소설리스트

독행표-8화 (8/37)

제4장: 용유진, 개에게 물리다.

1.

"넌 뭐냐?"

용유진이 나이는 어리지만 아버지를 따라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많

은 사람들을 봐왔다. 하지만 지금 이 사내들처럼 무식하고도 단도직

입적으로 묻는 자들은 처음 봤다. 하지만 면면을  살펴 봤더니 말투

에 어울리게 흉악하게 생긴 자들이었다. '불한당(不汗黨)'이라고 얼

굴에 붙이고 다니는 자들 같았다. 이런 자들과  시비가 붙으면 여러

모로 골치 아플 것이다. 용유진은 순순히 대답하기로 했다.

"어제 여기서 잔 사람입니다."

"어쩐지 불 피운 흔적이 있더라니. 네놈이었군."

처음 보는 사람에게, 비록 그가  어린 소년이라고 해도, 하는  말

치고는 대단히 무례한 말투였다. 그러나 그 말을  한 사내의 얼굴은

그런 무례한 말투가 어울려 보일 정도로 충분히 흉악했다. 주둥이가

길어서 약오른 개처럼 생긴 얼굴이라  그냥도 흉악한데, 도끼에라도

빗겨맞은 듯한 자국이 왼쪽 이마에서부터 오른쪽 입언저리까지 길게

나 있었다. 호박을 비스듬히  잘랐다가 붙이긴 했는데  잘못 붙여서

약간 어긋난 것처럼 보이는 얼굴이었다. 이런 얼굴을  한 사람이 말

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일단 해주고 볼 일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의

대단한 용모였다.

"불을 피운 것은 다른 사람이지만…, 하여간 제가  여기서 잤었지

요. 방해가 되었다면 그만 물러가겠습니다."

용유진은 말을 해놓고는 방 안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불 위에는

돼지라기에는 말랐고 사슴이라기엔 조금 작은, 정체를 알수 없는 동

물이 구워지고 있었다. 채 익지도 않은 다리들이  이미 뜯겨져서 사

내들의 손에 들려있고, 몸통에서는 기름이 흘러 불위에 떨어지고 있

었다. 주변에는 몇 개의 상자들이 있고,  술병들이 어지럽게 구르고

있었다. 그러나 용유진이 찾는 물건은 보이지 않았다.

도끼자국의 옆에 앉아있던 사내가 고함을 질렀다.

"간댔으면 얼른 꺼지지 않고 뭐하는 거야?"

"찾을 게 좀 있어서…!"

용유진은 말을 하다말고 멈췄다. 방금 말한  자는 도끼자국보다도

더 흉악한 용모를 가진 사내였다. 눈이나 코,  입 어느 한군데도 잘

못 된 것은 없는데  문제는 색깔이었다. 얼굴이  석탄처럼 시꺼맸던

것이다. 옥문관(玉門關)을 넘어 새외(塞外)로 나가면 온몸이 석탄처

럼 검은 묵인(墨人)이라는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들었는데, 바로 이

사람이 그중 하나인 모양이었다.

용유진은 묵인이란 종류의 인간을 처음 봤고, 그런 인간이 사람의

말을 한다는 것이 너무 신기했다. 그리고  공포스러웠다. 그러나 그

공포는 세 번째 사내가 주는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가고싶다고 갈 순 없지. 오는 것은 쉬워도 가는 것은 어렵고, 개

집에 함부로 들어왔으면 물리지 않고 나가길 바라기 어렵지."

가장 부드러운 말투지만, 가장  위협적인 내용의 말이었고,  가장

부드러운 목소리지만 그  목소리는 시체의 입김처럼  싸늘하게 식어

생기가 없었다. 세 번째 사내는 시체처럼 창백한  백색의 얼굴을 하

고 검은 자위보다는 흰자위가 많은 혼탁한  눈빛으로 용유진을 바라

보고 있었다.

그의 눈을 보는 순간 용유진은 그대로 뒤돌아 도망가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여럿 죽여본 사람의 눈'이라고 아버지가 말한 바로

그 눈빛을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아무 이

유없이' '여럿을 죽여본 사람의 눈'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용유진은 그 '여럿 죽여본 사람'에게서

도망칠 수는 없었다. 그에게서  받아갈 것이 있었다.  '여럿 죽여본

사람'이 깔고 앉아 있는 것이 바로 비룡표국의 현판이었기 때문이었

다.

용유진은 '여럿 죽여본 사람'을 향해 말했다.

"여기가 개집이라고요? 그럼 개들은 어디 있습니까?  설마 어르신

들이 개라는 것은 아니겠지요?"

"개가 어쨌다는거야?"

도끼 자국이 눈을 부라렸다.

"너, 개한테 원한 있나? 개가 널 못살게 군  적이라도 있나? 우리

가 개고, 이 집이 개집이면 안되는 이유라도 있나?"

도끼 자국은 눈을 부라릴  뿐만 아니라 게거품까지 물고  있었다.

그 모습이 정말 미친개와 비슷하다고 용유진은 생각했다. 이해할 수

없는 행동, 이해할 수 없는 인간들이었다. 그  순간 그는 이들의 정

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중주사견(中州四犬)!"

강호에 네 마리의 개가 있다. 누런 개, 검은 개, 하얀 개, 그리고

점박이…. 하나같이 불한당이고, 하나같이 개같은 놈들이었다. 그리

고 그들 스스로는 개라고 불리는 것을 전혀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

다.

불한당이란 말은 떼강도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원래 그  뜻을 찾아

들어가면 '땀[汗]을 흘리지 않는 무리'라는 뜻이다.  즉, 땀흘려 일

을 하려고 하지 않는 자들이었다. 그러면서 잘 먹고 잘 살려고 하는

데에서 문제가 생긴다. 이들 중주사견은 땀을 흘리지  않는 범위 내

에서 돈을 벌 수 있는  일이면 무엇이든 하는 것이다.  그런 일중에

가장 쉽고, 그래서 이들이 가장 즐겨 하는  일이 강탈이었다. 한 마

디로 도둑놈들이 이들 중주사견이었다.

"잘 아는구나, 꼬마!"

여태까지 아무 말 않고 있던 사내가 입을 열었다.  사실 용유진은

이 자가 있는 줄도 몰랐었다. 사내, 중주사견의 두목인 점박이 반구

대(斑狗大)는 방안 정면의 단상에 목만 얹혀 있었다.  그 목이 입을

벌리고, 눈을 돌려 그를 바라보는 것이다.

용유진은 한순간 기겁해서 넘어갈  뻔 했지만 자세히  살펴보고는

단상에 지하로 통하는 구멍이 있고, 지금 반구대는  그 구멍으로 목

만 내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얼굴에 왼쪽  눈을 중심으로 커

다랗게 붉은 반점이 있어서 우스꽝스럽게 보이는 남자였다. 그가 바

로 점박이 반구대인 것이다. 반구는 점박이라는 뜻, 대자는 서열 일

위라는 뜻으로 사용하는 이름이었다.

"잘 아는 상으로 팔만 하나 떼고 보내줄까?"

"팔 하나로는 부족하죠. 대형은 요즘 너무 후하십니다. 후해요."

도끼 자국, 중주사견 중의 둘째인 누렁이  황구이(黃狗二)가 고개

를 저었다. 그는 달리 광견(狂犬)이라고도  불리는 인물로 흉폭하기

로는 이들중에도 제일이었다. 다른 자들은  흉폭하고 잔인해도 이유

가 있지만 황구이는 이유  없이 흉폭했다. 광기가  발동되기만 하면

상대가 누구든 물려고 드는 것이다.

"다리도 하나쯤 떼놔야 균형이 맞겠죠. 왼팔, 아니 오른팔을 떼고

왼쪽 다리를 떼면 대충 균형이 맞아서 걸어  다니는 데 불편하진 않

겠죠."

"그냥 죽여버리지 뭘 한쪽씩 남겨놓고  그럽니까? 둘째형님이야말

로 후하시군요."

급기야 죽이자는 소리를 한 자는 검정  개 흑구삼(黑狗三)이었다.

그러나 가장 잔인한 자는 막내, 흰둥이 백구말(白狗末)이었다.

"그냥 죽여버리면 우린 이 긴 밤 나머지 시간동안 뭘하고 놉니까?

일단 팔을 자르고, 다시 하나 더 자르고, 다리를 자르고, 다시 하나

더 자른 다음에, 눈도  한 번 뽑아보고, 혀도  잘라내거나 그러면서

밤새 놀아보는게 어떨까요?"

황구이와 흑구삼이 동시에 감탄의 찬사를 보냈다.

"역시 막내야! 의견이 참으로 좋군. 그렇게 하세."

용유진은 이들이 벌이는 수작을 듣고, 보면서 강호에 널리 알려진

악명 그대로 이들은 정말 '개새끼들'임을 알았다. 문제는 대항할 방

법이 별로 없다는 것이었다. 가진 무기도 없고, 무기가 있어도 상처

때문에 제대로 싸울 자신도 없었다.

'발로 불을 걷어차서 혼란을 일으킨 다음 도망을…?'

이 정도가 유일한 방법인 듯했지만 성공 가능성은 백에 하나도 안

된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기습이든,  도망이든 어느정도 무공

이 비슷해야 가능하지 이렇게  차이가 나선 아무 것도  안되는 것이

다.

이들 네 마리의 개들은 그 악명만큼이나 무공도  뛰어나서 천하의

숱한 표국에서 상금을 걸어놓고 잡으려 했고, 뜻있는 협사들이 나선

일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아직 크게 낭패보는  일도 없이 생생하게

살아서 돌아 다니고 있다. 생전의 아버지도 이들 네 마리 개가 중주

(中州) 일대에서 주로 활동할 뿐 산동에서는 본 적이 없음을 다행으

로 여기지 않았던가. 그런데 용유진은 재수 없게도 표국을 시작하기

도 전에 대도적(大盜賊)들부터 만난 꼴이었다.

할수만 있다면 얼른 도망가고 싶었지만 그럴 기회가  보이지 않았

다. 기회가 있었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용유진에게는 이들에게서

찾아갈 것이 있었다.

"그걸…."

용유진은 백구말을 가리켰다. 정확하게는 그가 엉덩이에  깔고 앉

은 것을 가리켰다. 비룡표국의 현판이 거기 있었다.

"그걸 내주시오. 그러면 쉬시는 곳에 함부로 들어온  걸 사과하고

나가지요."

"뭐?"

백구말은 용유진이 자기를 가리키자 잠시 이해할 수  없다는 빛을

보이더니 한참이나 지난 후에야 비로소 용유진의 뜻을 이해했다.

"쥐새끼 같은 놈이…!"

그는 뺨이라도 한 대 맞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한  번도 그런 일

을 당한 적이 없는 것처럼 심한 모멸감이  그의 창백한 얼굴에 그대

로 드러나 있었다.

"죽을지 살지도 모르는 것이 겁없이 물건을 찾아갈 생각을 해? 그

것도 어르신네가 앉은 자리를!"

용유진은 오늘 그의 재수가 심하게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들에

게는 사리가 통하지 않았다. 현판은 그의 자존심이고, 모든 것이며,

애초에 그의 물건이니 그가 찾아갈 권리가 있다는 것을 이해할 정도

의 머리가 그들에게는 없는 것 같았다. 그들은  그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정말  용유진은 오늘 그들

을 만난 것으로도 심하게, 평생 이런 경우가 다시 없을 정도로 재수

가 없는 것이다.

"이리 와!"

백구말은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가져갈 자신이 있으면 와서 가져가보란 말이다!"

그의 손가락질, 그의 표정과 그의 얇은 입술,  거기서 튀어나오는

말에는 서릿발같은 살기가 어려 있었다.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능욕한 사람에게나 보일 수 있을 것같은 살기를 그는 쉽게도 드러내

고 있었다.

용유진은 침을 삼켰다. 아무리 그가 어리고, 강호의  경험이 없다

고 한들 이러한 노골적인 살기와 폭력의 위협앞에서 몸을 사릴 줄은

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그 현판은 내 모든 것이오.  당신이 그걸 깔고 앉은  것만으로도

나는 이미 충분히 모욕을 받고 있소. 하지만 모르고 한 일이니 용서

해주겠소. 두 손으로 들어 바치시오."

"이런 쥐새끼같은 것이!"

순간적으로 용유진의 목이 조여졌다. 발이 땅에서  떨어지는가 싶

더니 어느새 그의 얼굴을  땅바닥에 닿아 뭉개지고  있었다. 쓸려진

살갗의 따거움이 머리에 전달되기도 전에, 벌려진 입으로 들어온 흙

의 매캐한 맛이 느껴지기도 전에 한 사람의  발이 그의 뒤통수를 밟

았다.

욕설을 뱉으며 용유진의 멱살을 잡아 바닥에 박아놓은  것은 흑구

삼, 뒤통수를 밟은 것은 황구이였다. 그들도  경우 없기로는 백구말

에 못지 않아서 용유진의 요구가 턱없이 보였던 모양이었다. 똑같이

화를 내게 만들었던 모양이었다.

"이걸 그냥 이대로 묵사발을 만들어버려?"

황구이가 발을 움직여 용유진의 머리를 짖이기면서  말했다. 백구

말이 말렸다.

"흥분하지 마세요, 형님. 그렇게 하면 지나치게 가볍게 죽이는 거

잖습니까. 아까 제가 말씀드린대로 일단 손부터 잘라 버리고…."

"아니, 그보다 먼저 몇 가지 물어보자."

여태 보고만 있던 점박이  반구대가 손을 저었다. 용유진이  땅에

깔린 채로 바라본 그 손은 피칠을 한 것처럼 붉어 기괴한 느낌을 주

었다.

"일으켜 세워!"

용유진의 몸이 거칠게 세워졌다. 용유진은 그제야 입 속에 들어온

흙의 맛을 느끼고 뱉어내었다. 황구이가 그의 뺨을 후려쳤다.

"이게 어디다 침을 뱉고 지랄이야!"

잠시 눈앞이 아득해질 정도로 강한 타격이었다. 그러나 이런 수모

가 용유진에게 새긴 마음의 상처보다는 훨씬 약했다. 용유진은 찢어

질 듯 눈을 떠서 황구이를 노려보았다.

"이걸 그냥 눈알을 뽑아버려…!"

"아아…, 내가 물어볼 게 있다고 했잖아!"

반구대는 제단 위에 완전히 올라와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그 옷에도 군데군데 붉은 칠이 되어 있어서  용유진은 그의 옷에 남

겨진 붉은 칠과 손에 묻은 것이 모두 피라는 것을 깨달았다. 불위에

올려진 짐승의 것일수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인간의  피일 가능성이

더 높다고 그는 생각했다.

반구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피 묻은 손으로 턱을 긁으면서 말했

다.

"비룡표국의 현판이던데, 너는 거기와 어떤 관계냐?"

용유진은 반구대의 턱에 묻혀지는 피를 혐오스럽게 바라보면서 대

꾸했다.

"내가 비룡표국의 이대국주요."

네 마리 개가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이거야 기연 아니냐, 예전에 네 아비가 우리에게 욕을 했다는 소

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언제 한 번 만나면  손 좀 봐줘야지 했는데

오늘 그 자식새끼가 걸렸으니  정말 다행이다. 아비의  죄는 자식이

갚는 법이지. 음… 하여간 그건 좀 있다가 하고, 지금은 조금 더 물

어볼 게 있지."

반구대는 간단히 용유진에게 죄를 씌우고는 다음 질문을 했다.

"네 아비가 동창놈들과 손을 잡고 풍도당을 쳤다면서?"

"동창?"

용유진은 처음 듣는 일이라 일순 멍해졌지만 다음 순간 문제의 그

흑의 복면인들이 바로 동창에서 나온 자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랬군…!"

그렇다면 모두 이해가 갔다. 관군이라기엔 지나치게  강한 그들의

무공도 설명이 되는 것이다.

"뭔가 아는 게 있는 모양이지?"

"아니…."

용유진은 고개를 저었다.

"나는 아는 바 없다."

뒤통수에 강한 충격이 왔다. 용유진은 바닥에  꼬꾸라졌다가 머리

채를 잡혀 다시 일어났다. 윙윙거리는 귀에 황구이의 거친 목소리가

퍼졌다.

"다시 모른다는 소리가 나오면 골을 파서 네놈 입에  처넣어 줄테

다!"

황구이가 후려갈긴 것이다. 손바닥이 마치 철판처럼  단단해서 한

대만 맞고도 어디가 깨졌는지  뜨끈한 피가 흐르는 것을  그는 느꼈

다.

'정말 재수 없군!'

용유진은 속으로 뇌까렸지만 입가에 비웃음을 담아 반구대에게 던

져 주었다.

"나는 모른다."

"뭐, 몰라도 상관 없지. 중요한  일은 아니야. 진짜 중요한  일은

말이다. 어제 여기에서 네가 만난 사람들이  누구냐는 거다. 우리가

한달 쯤 비운 사이에 적어도 열 명  이상의 사람들이 여기에서 무슨

일인가를 벌였어. 넌 그게 누군지, 무슨 일을 한건지 알고 있겠지?"

용유진의 머리가 어지럽게 돌아갔다. 반구대의 말에서 짐작해보면

이 폐허는 원래 그들의 은신처였던 모양이었고  어제의 일에 대해서

는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 그리고 오늘 그를  만난 것은 우연에 불

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정말 재수가 없구나.'

하고 많은 사람중에 하필이면 이런 개잡종들을 만날 것이 뭐란 말

인가. 하지만 달리 생각해 보면 방금의 그 말로 그가 살아날 방법이

발견된 것일 수도 있었다.

"어제 여기 있던 사람들이 누군지 몰랐단 말이오?"

황구이가 그를 걷어찼다.

"우리가 그 따위를 알 일이 없잖아!"

용유진은 다시 한 번 땅바닥에 입맞춤을 해야 했지만 아까처럼 그

렇게 충격은 받지 않았다. 머리 속으로 전략이  세워진 지금은 여유

롭기조차 했다.

"그 따위라고요? 당신들 상전에게 그런 말을 써도 되는거요?"

황구이가 기가 막히다는 듯 때릴 생각도 못하고 허허로이 웃었다.

"상전? 상전같은 게 우리에게 있단 말인가? 우리  상전 될 자격이

있는 사람이 천하에 어디 있던가?"

"그럼 당신들은 고목대사나 생사판이  보내서 온 게 아니란  말이

오?"

황구이의 얼굴이 웃던 표정 그대로 굳어졌다.

"고목대사? 생사판? 그런 이름이 지금 왜 나오지?"

반구대가 앉은 자세 그대로 날아와서 용유진의 턱을 움켜 쥐었다.

"어제 여기 있던 자들이 그들이란 얘기냐?"

턱과 목을 함께 압박당하는 바람에 제대로 숨을 쉬지 못해 용유진

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꼬박꼬박  대답을 했

다.

"그들과…, 켁켁…, 월인, 그리고 상관대부까지…!"

"상관대부? 북신 상관조홍(上官潮紅)을 말하는 것인가?"

"상관조홍이라는 이름은 모르지만 북신인 것은  맞소. 고목대사가

그를 상관대부라고…."

"더 들을 것도 없습니다, 형님!"

백구말이 소맷자락 속에서 긴 꼬챙이같은 것을  꺼내었다. 생사판

의 무기 귀왕자와 얼핏  비슷해 보였지만 지금 백구말의  것이 훨씬

길고, 날카롭게 날이 세워져 있고, 색깔도 백색 광망이 번뜩여 훨씬

흉악해 보였다. 용설자(龍舌刺)라 부르는 이 기형 병기의 끝을 용유

진의 목에 가져다 대고 백구말이 낮게 으르렁 거렸다.

"살다 보니 별 놈을 다 보는군. 내 평생 무수히 많은 놈을 죽여보

았지만 무림사이의 이름까지 들먹거려가며 목숨을 구걸하는 놈은 처

음 본다."

"꾸며낸 이야기란 말인가?"

"당연하지 않습니까! 이런 곳에 무림사이가 왔다는 것, 더구나 네

명이 다 모였다는 건 있을 수가 없는 일이죠."

"네 분…, 연극을 잘 하는군요."

용유진이 비웃었다.

"당신들은 분명 고목대사나 생사판…, 아니면  상관대부의 수하겠

죠. 아니면… 청부를 받았거나.  내게 손을…, 손을  대지 않겠다고

약속해놓고 이렇게 비겁한  짓을 할줄은 몰랐소.  무림사이…씩이나

되는 분들이."

용유진은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상기된 얼굴로  간신히

말을 뱉었다. 눈동자가 튀어나올 것처럼 확대되었다. 지금이라도 그

의 목을 놔주지 않으면 곧 죽어버릴 것같은 상태였다.

반구대는 그의 턱을 놓고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백구말의 무기도

치우도록 손짓했다.

"왜 우리가 무림사이의 수하라고 생각하는 거냐? 왜  우리가 고목

이나 생사판, 그리고 상관대부의 명령을 받아 너를 죽인다고 생각하

는 거지?"

이들 네 마리의 개중에 그가  가장 영민한 머리를 지닌  모양이었

다. 반구대는 연달아 몇 개의 질문을 던지면서 용유진의 말 속에 숨

은 내용을 짐작해내고 있었다.

용유진은 으스러질 것같은 턱과 목을 만지면서 간단히 대답했다.

"월인과 나, 그리고 나머지 세 사람 사이에 내기가 있었소. 그 내

기가 끝나기 전에는 나에게 손을 대지 않기로 다들 약속했던 거요."

"무슨 내기?"

"십년 후에 내가 무림십대고수중 하나가 되느냐  못되느냐에 대한

거요."

"푸하!"

황구이가 실소했다.

"형님 들으셨죠? 이놈이 십년 후에 십대고수중  하나가 된답니다.

한다하게 미친 놈도 여럿 봤지만 이렇게 미친  놈은 정말 처음 보는

군. 더 들으면 우리까지 머리가 이상해질 것  같으니 그만 죽여버리

죠!"

그러면서 그도 병기를 꺼내었다. 한 쌍의 개산대부(開山大斧), 거

대한 도끼였는데 놀랍게도 금빛을 번뜩이는  물건이었다. 도끼를 들

어 단번에 용유진의 머리를  쪼갤 듯 자세를 취하는  그를 반구대가

제지했다. 그리고 용유진에게 물었다.

"증거가 있나?"

"증거는 무슨…!"

황구이가 다시 도끼를 쳐드는데 용유진이 손을 들어올리는 바람에

잠시 멈추었다.

"이게 증거요."

그의 손에는 월령이 들려 있었다. 해골과 소녀의 얼굴이 빙글빙글

돌아가며 드러났다.

"그게 뭐냐?"

중주사견은 서로 얼굴을 보았다. 그들 중 누구도 월령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

"월령이오."

"월령은 또 뭐냐?"

용유진은 낭패라는 심정이 되었다. 그러고보니 그도  월인의 신표

는 월환이다라는 말만 들었지 월령이라는 이름은 모르고 있었다. 그

러나 그는 겉으로는 태연한 신색을 유지해야 했다.  이들 네 마리의

개에게 그와 사이의 관계를 납득시키지 못하면, 그리고 어떻게든 말

을 돌려 그의 배후에 사이의 보호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 못하면 이

자리에서 죽는 것이다.

"월령이 월령이지 뭐겠소?"

그는 월령을 가볍게 흔들었다. 그것으로 강시를 움직이는 것을 보

면 이들도 조금은 믿어줄 것이다. 그러나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소

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용유진은 다시 흔들었다.  여전히 반응이 없

었다.

"무슨 수작을 부리는 거냐!"

백구말이 낯빛을 바꾸며 백색의 용설자를 찔러왔다.  용유진은 넘

어질 듯 급히 몸을 피했다. 그러나 백구말의  공격을 피하기에는 그

가 너무 느렸다. 백구말의 용설자는  용유진의 가슴팍으로 파고들었

다.

"막내야 멈춰!"

반구대가 급히 손을 뻗었다.  놀랍게도 그의 팔이 길어지며  피로

물든 손이 뻗어와서 백구말의 용설자를 잡았다. 원래  그의 팔과 손

은 의수로 길어졌다 짧아졌다 하는 물건이었다. 그러나 이미 용설자

는 용유진의 가슴을 꿰뚫고 등으로 튀어나와 있었다.

"늦었군!"

백구말이 뭔가 실수라도 했나 싶어 그의 눈치를 보았다.

"뭐가 잘못 됐습니까?"

반구대는 용유진의 손목을 가리켰다. 눈부시게 하얀  팔찌 하나가

거기 채워져 있었다.

"아무래도 아주 거짓말은 아닌 것같군"

"저건 학익?"

백구말은 놀란 표정으로 용유진의 멱살을 잡아 일으켰다.

"저걸 어디서 얻었나?"

"물론…, 고목…에게서 얻었지."

용설자는 용유진의 폐를 뚫은 모양이었다. 입을 벌릴 때마다 피거

품이 튀어나왔다.

백구말의 안색이 돌변하는데 반구대가 재빨리 제단의 구멍으로 뛰

어들어가며 명령했다.

"입을 막아버려! 방울과 팔찌는 빼앗아서 챙기고…,  우린 철수하

자. 서둘러!"

백구말이 신속하게 반구대의 명령을 이행했다. 용유진의 가슴에서

용설자를 빼서 다시 심장을 겨누고 찔러넣은 것이다. 용유진은 벌어

진 동공으로 천장을 바라보며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 손은 그 무엇

도 잡을 힘이 없었다. 그는 천천히 쓰러졌다.

팔찌는 쉽게 빠지지 않았다. 황구이가 도끼를 들며 소리쳤다.

"팔뚝을 잘라 버리면 쉽지!"

그때, 반구대가 들어간 제단으로부터  폭음이 들렸다. 돌아본  세

마리 개들의 눈앞에서 놀라운 광경이 벌어졌다. 제단의 구멍으로 반

구대가 튀어나오고, 그 뒤를 이어 제단이 폭발하듯 터져나가더니 검

은 그림자가 솟아올랐다. 그들은 모르지만 월령, 소녀의 강시였다.

"협공해!"

공중에 떠오른 반구대가 외쳤다. 그 말에 따라 백구말이 용설자를

빼서 월령을 향해 찔러갔다. 황구이는 용유진의 팔뚝을 자르려던 도

끼로 월령의 이마를 겨냥하고 던졌다. 흑구삼이 허리춤에서 검고 긴

채찍을 풀어서 월령을 감으려 휘둘렀다.

공중에 떠있던 반구대의 옆구리에는 짐 보퉁이 하나와  한 사람이

끼어 있었는데, 그는 그것들을 바닥 한켠에 내려 놓은 후 다시 공중

으로 떠오르더니 물구나무 서듯 몸을 돌려  허공으로부터 월령의 머

리를 향해 눌러 갔다. 양쪽  손이 모두 의수인 듯 두  개의 혈수(血

手), 열 개의 손가락이 갈고리처럼 뻗어가고 있었다.

월령은 제단 아래서 튀어나오자  발을 떠받쳐주는 손이라도  있는

것처럼 허공에 꼿꼿이 섰다. 그녀의 검은 옷이  바람도 없는데 펄럭

거리고 앞으로 뻗은 양 손에는 검은 안개 같은 것이 감돌았다. 부적

뒤로 월령의 눈에서 붉은  광채가 번뜩이는 것이  보였다.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밝은 광채, 한 순간 월령의 눈은 야수의 그것처럼 불을

뿜고 있었다.

황구이의 도끼와 백구말의 용설자가  거의 동시에 그녀의  얼굴과

가슴을 향해 찔러 들었다. 월령의 손이  뻣뻣하게 움직였다. 허공을

가르며 날아드는 도끼와 독사의 혀처럼 날랜 용설자에 비하면 너무,

지나치게 느린 동작이었다. 그러나 얼굴과  가슴을 가리기에는 충분

히 빨랐다.

예리한 쇳소리가 울려퍼졌다. 월령이 손으로 도끼를  잡으며 내는

소리였다. 금빛 찬란한 도끼날이 가늘고  창백한 손가락을 자르지도

못하고 그대로 잡혀 버렸다. 다음 순간 용설자가  그녀의 목을 찔렀

다. 월령의 고개가 잠깐  뒤로 젖혀졌다. 그러나 타격을  받은 것은

오히려 백구말이었다. 용설자는 월령의 목을  꿰뚫지 못하고 활처럼

휘어졌다. 월령의 왼손이 용설자의 중동을 움켜쥐었다.  다른 한 손

은 도끼를 든채로 백구말의 머리를 후려치고 있었다. 백구말의 얼굴

이 사색이 되었다. 그는 평소의 흉악한 성품대로  몸조차 같이 찔러

들 듯 달려들었기 때문에 월령에게서 극히 가까운 곳까지 접근해 있

었다. 그의 발은 월령의 발끝을 밟을 듯하고  얼굴은 월령의 얼굴과

마주 보듯 했다. 그런 상태에서 공격을 받으면  도저히 도망갈 길이

없었다. 그때 흑구삼의 채찍이 비로소 닿아 월령의  발을 감아 당겼

다. 월령은 허공에서  주춤거렸다. 반구대의 손이  그녀의 정수리와

어깨를 찍어 눌렀다. 그 틈을 타서 백구말은  활처럼 휘어진 용설자

가 다시 펴지는 탄력을 이용해 뒤로 물러갔다.  머리를 노린 도끼가

빗나가며 그의 가슴을  후려쳤지만 옷과 가슴팍  살점을 그어버리는

정도로 끝나 버렸다.

반구대의 혈수가 누르는 힘은 굉장한 것이었다.  바위도 바스러뜨

리는 그 힘 앞에 보통은 머리가 달걀처럼 터지고, 어깨는 병아리 가

랑이를 찢어내듯 손쉽게 떨어져야 마땅했다.  그러나 월령의 신체는

강철보다도 더 단단했다. 그녀는 잠깐 움찔 하더니 곧 손을 뻗어 머

리를 누른 반구대의 혈수를 잡아 당겨 내동댕이  쳤다. 그러면서 흑

구삼을 향해 도끼를 던졌다.  흑구삼은 채찍을 놓고  굴러서 간신히

도끼를 피했다. 도끼가 벽 한쪽에 부딪히더니 폭음을  내며 벽을 뚫

고 나갔다. 황구이가 직접 던진 힘보다 열  배는 강한 힘이었다. 허

공에 날려가던 반구대가 놀라 소리쳤다.

"강시! 고루마공이다!"

황구이는 처음 도끼를 날린 후 감히 덤빌 엄두를 못 내고, 흑구삼

은 땅을 구르다 일어났다. 백구말은 용설자를 부러뜨리지 않고 되찾

아 온 것만으로도 고마워서 벽에 등을 기대고 헐떡거리고, 반구대는

허공에서 몇번이나 공중제비를 넘더니 백구말처럼 벽에  등을 댄 상

태에서야 멈추어 섰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방금  일장의 격돌에서

받은 충격과 혼란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해 상기되어 있었다.

"강시당의 계집이야!"

강시당의 계집, 월령은 천천히  땅바닥에 내려서고 있었다.  목을

찔리고, 머리를 눌렸는데도 그녀의 모습에서는 그로 인해 받은 타격

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그녀는  다음 공격을 준비하는

듯했다. 부적이 펄럭거리며  들어올려지고 있었다. 그  아래 드러난

얼굴은 흙빛으로 죽어들어갔지만 눈빛은 더욱  밝아지고 있었다. 애

초에 그녀의 손만 감싸고 돌던  검은 안개가 팔을 감돌고,  이내 온

몸을 감돌아 흐르기 시작했다.

반구대가 다시 외쳤다.

"분명해! 고루마공이다!"

백구말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강시당이 여기 왜…? 그럼… 저 놈이 한 말이 진짜라는…?"

그가 저놈이라 부른 용유진을 향해 일동의 시선이 모였다. 그런데

거기에는 강시당의 계집이 나타난 것보다 더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용설자에 심장을 관통당해 죽은 줄 알았던 용유진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있었던 것이다.

용유진은 실제로 죽진 않았었다.  폐를 관통당하고, 다시  심장이

꼬챙이에 끼워진 새처럼  파닥거리다가 멈추긴 했지만  끝내 의식을

잃진 않았었다. 얼음처럼 차가운 무기의 감촉,  이내 불같이 뜨거운

상처의 느낌이 그의 온 몸을 전율하게 했지만  눈을 감진 않았었다.

그래서 그는 월령과 중주사견의 싸움을 놓치지 않고  볼 수 있었다.

도대체 이렇게는 죽을 수  없다는 억울함, 그야말로  개죽음을 하는

데 대한 원통함이 뱃속으로부터 끓어오르는 것을  느끼며 이를 갈고

있었다. 그러던 한 순간 구멍난 심장이 다시 움직여 뜨거운 피를 머

리로 뿜어 올렸다. 뱃속에서부터 시작된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온 몸을 뜨겁게 달구었다. 생명이 그의 몸 속에 다시 돌아와 흐르기

시작했다. 그 힘에 처음 반응한 것은 오른팔이었다. 팔 속에서 무언

가 이물질이 움직이는 듯한 느낌이 들더니 그 힘은 심장에서 시작된

힘과 합쳐져서 격렬하게 몸속을 흐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팔에 다시

모여 터지기 직전의 그 무엇처럼 팽창하기 시작했다.

용유진은 몸을 가누고 일어나 팔을 뻗었다.  그의 손바닥으로부터

붉은 칼날이 솟아나왔다. 월인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월인이 분명했

지만 어젯밤 공손조덕의 손바닥에서 솟아나와 그의 손바닥으로 전해

진 그 작고 예리한 칼날이 아니라 거대한  장검의 그것처럼 크고 거

친 칼날이었다.붉은 광채로만  이루어진 듯한 검.  그것을 용유진은

검을 잡듯 손바닥으로 움켜 쥐었다.

"죽여…버린다!"

용유진은 내뱉듯 말하고는 손을 휘둘렀다. 백구말이 첫 번째 공격

대상이었다.

발로는 중궁(中宮)을 밟고 검은  두 손으로 감싸듯 잡아  명문(命

門)을 노리는, 무공을 아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아는 삼재검법(三才

劍法)의 한 초식이었다. 죽은줄 알았던 용유진의  부활에 얼이 빠져

있던 백구말이 그 어설프면서도 단순한 공격을  맞아 용설자를 휘둘

렀다. 평소같았으면 공격의 틈으로 용유진의 목을 노려 반격까지 했

겠지만 총망중이라 간단히 받아 퉁겨내는 정도로  방어를 하려고 생

각했던 것이다. 그것이 잘못이었다. 용유진의 검은  간단히 그의 용

설자를 잘라 버리고 다시 휘둘러졌다. 백구말이 기겁해서 뒤로 물러

났다. 그의 등 뒤에서 벽이 무너졌다. 그는  무너진 흙벽을 굴러 넘

어서 마당으로 굴러갔다.

용유진의 검이 방향을 돌려 반구대를 겨냥했다.

"좋지 않다! 물러서자!"

반구대는 급히 외치고는 방 한켠으로 펄쩍 뛰었다. 용유진의 검이

그가 서 있던 자리를 긁었다. 벽과 땅바닥에 길게 칼자국이 생겼다.

두부를 자르듯 예리한 자국이었다. 천하의 명검이 아니면 이런 자국

을 남기기 불가능할 것이었다.

반구대는 한켠에 놓아둔 짐들을  낚아채듯 잡아 황구이에게  던졌

다. 그리고 자신은 제단 아래로부터 끼고 나온  사람을 잡고 밖으로

달려나가 사라져 버렸다. 그 뒤를 황구이와  흑구삼, 마당에서 구르

던 백구말이 따랐다. 방은 조용해지고, 용유진의  검은 목표를 잃었

다.

용유진은 멍청히 서서 손을  보았다. 극도의 혼란과 긴장이  그를

흥분시켜 거친 숨을 토해내도록 만들었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은 오늘 몸 안에서 이루어진 이상한 현상때문인지, 아니면 잠시나

마 생사를 건 싸움을 벌인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차츰 검이 작아

졌다. 칼날은 처음 나타날 때처럼 신비하게 그의 손바닥으로 스며들

어가 버렸다. 그와 동시에 용유진도 땅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그를

광분하게 하고 달아오르게 했던 힘이 아지랑이처럼  그의 몸에서 빠

져나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젠 진짜 죽는걸까?'

심장이 다시 격렬한 통증을  호소하고 있었다. 볼 수는  없었지만

가슴에 뚫린 구멍으로부터 피가 한없이 흘러나가고  있는 것같은 기

분이 들었다. 어지러워지고, 눈앞이 흐려졌다. 숨이 막히고 있었다.

그렇게 혼절해가는 와중에 그는 월령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다는 것

을 알았다. 한 손으로 부적을 들어올린 채  걱정스럽게 그를 내려다

보는 소녀의 얼굴을 본 것 같았다.

'착각이겠지?'

착각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는 월령을 향해 희미하게 웃어주었다.

걱정하지 마라고 얘기해주고 싶었다. 괜찮다고  손을 흔들어주려 하

다가 그는 완전히 혼절해 버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