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폐가가 있던 곳은 요산의 북쪽 산자락이었다. 그것을 용유진은 길
로 나서자 마자 알아차렸다. 눈에 익은 길이었던 것이다. 밤새도록
걸은 것 같았지만 사실은 요산을 가운데 두고 맴돌았다는 것을 동시
에 깨달았다.
그건 이상한 일이었다. 어려서부터 길눈은 밝은 편이고, 몇 번 다
녔던 곳이라 비록 청주성과 반대편이라고는 해도 길을 잃을 이유는
없는 것이다.
"어젠 확실히 제정신이 아니었던 거야."
용유진은 고개를 흔들어 잡생각을 떨쳐버리고는 요산을 돌아서 청
주로 향했다. 앞으로 해야 할 일로도 머리가 복잡해서 지난 일을 생
각할 여유가 없다는 것이 그의 상태였다.
용유진의 머리를 복잡하게 한, 사실은 딱히 해결할 방법이 없어서
그를 난처하게 하는 첫 번째 일은 종이가 없다는 것이었다. 종이가
없으면 배첩(拜帖)을 만들 수 없고, 배첩이 없으면 누구에게도 찾아
갈 수 없다, 더구나 사업관계로 누굴 만나는데 배첩 없이는 안된다
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었다.
사실 돈만 있으면 간단히 해결될 일이었다. 지전(紙廛)에 가서 붉
은 종이를 사고, 문방기구전(文房器具廛)에 가서 여행용의 필선(筆
船)을 하나 사면, 그 안에 붓만이 아니라 먹과 벼루, 작은 연적(硯
滴)까지 있으니 고민이 한꺼번에 해결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돈
이 없다는 것이었다.
상죽(湘竹)으로 만들어 자단(紫檀)이나 흑단(黑檀)으로 모서리를
마감하지 않은 것은 물건으로 치지도 않는다고 하지만 썩은 송판으
로 만든 필선 하나라도 구할 수 있다면 지금 당장 속옷이라도 벗어
줄 수 있겠다고 용유진은 생각했다.
그는 속으로 '종이와 필선'을 생각하며 걷고 있었는데, 발길은 어
느새 홍화로(弘華路)로 향하고 있었다. 청주성 안에서도 번화한 시
전(市廛)거리를 땅만 보고 걷는 것은 혹시라도 종이 한 장 떨어져
있을까 바라는 마음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아는 사람을 만날까 두려
워 해서였다.
거리는 깨끗했다. 종이 한 장 떨어져 있지 않았다. 용유진은 마음
을 고쳐 먹고 발길을 돌려 주택가로 향했다. 종이를 주워야 한다면
이쪽이 차라리 나을 것이다. 하지만 거기도 마찬가지였다. 그 비싸
고 귀한 종이를 누가 땅에 떨어뜨릴 것인가.
용유진은 거리를 서성거리다가 문득 눈을 반짝였다. 저만치 앞에
있는 저택 대문기둥에 붙여진 붉은 종이가 어제 내린 비바람에 쓸려
서인지 거의 떨어질 것처럼 너덜거리고 있었다. 봄이 오면 대문에
써서 붙이는 '입춘대길(立春大吉)'류의 춘방(春榜)이었다.
용유진은 주변 눈치를 살피며 슬그머니 다가갔다가 아무렇지도 않
은 표정으로 종이를 떼서 소매에 쑤셔 넣고는 지나갔다. 다행히 아
무도 그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모퉁이를 돌아설 때까지 용유진
의 등덜미로는 식은땀이 흘렀다.
종이에는 복(福)자가 쓰여져 있었다. 햇빛에 바래고 비에 쓸려 탈
색되긴 했지만 아직 붉은 기가 남아 있어서 다행이었다. 글씨가 바
랜 것도 그의 필요에는 맞았다.
용유진은 종이를 반듯하게 펴서 두 번 접은 다음 그대로 고이 들
고 다시 홍화로로 향했다. 아까전부터 생각한 장소가 있었다. 생전
에 그의 부친과 교류가 있었던 왕대인(王大人)이 경영하는 주루, 호
화객잔(豪華客棧)이었다.
왕대인을 만날 필요도 없었다. 그는 객잔에 들어가서 손님인줄 알
고 반갑게 맞으러 나오는 점소이를 밀어내고는 계산대로 향했다. 정
(丁)씨 성을 가진 장방(帳房)도 몇 번 본적이 있어 안면은 있는 사
람이었는데, 그를 보자 일어나 반가운 척을 했다.
"아니, 이거 용공자 아니십니까. 아버님 일은 안되셨습니다. 가보
지도 못하고…."
"아니요. 마음만으로도 고맙습니다."
용유진은 손을 모아 감사를 표했다.
장방이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관심있게 물었다.
"다치셨다더니 생각만큼 큰 상처는 아니었던 모양이군요. 그래 웬
일로 오셨습니까?"
용유진은 손을 들어 그의 앞에 보이며 빙긋 웃었다.
"그렇게 큰 상처는 아니었지요. 문방사우를 좀 빌려 쓸 수 있을까
요?"
장방은 더 수다를 떨 참이었으나 용유진의 손톱 없는 손가락을 보
자 말문이 막혔는지 입을 다물고는 장부를 기입할 때 쓰는 붓과 먹
물을 내어놓았다. 용유진은 붉은 종이를 반듯이 펴고는 글귀를 생각
하다가 붓을 대어 천천히, 정성 들여 이름을 썼다.
-비룡표국, 이대국주 용유진 배상(拜上)
바랜 종이, 바랜 글씨를 배경으로 열 세 자가 또렷이 나타났다.
용유진은 붓을 떼고는 한참이나 그 열 세 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말
로 다 할 수 없는 감회를 그 열 세 자에서 느끼고 있었다.
"으흠!"
곁눈으로 훔쳐보던 장방이 헛기침으로 그를 깨우고는 만면에 미소
를 담아 인사했다.
"이거, 축하 드립니다. 후원자를 구하셨나 보군요."
후원자를 구해 표국을 다시 열었느냐는 질문인 셈이었다. 용유진
은 붓을 돌려주고는 고개를 저었다.
"표국을 다시 열었습니다. 저 혼자요."
장방이 당혹스럽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후원자는…?"
"그런 건 없지요."
용유진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저 혼자 할겁니다. 이곳에서도 맡기실 일이 있으면 저희 비룡표
국을 이용해 주십시오.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성심성의껏 처리해
드리겠습니다."
"아, 예, 예…."
떨떠름한 인상의 장방을 뒤로 하고 용유진은 객잔을 나섰다. 첫
번째 문제는 이렇게 해결되었다. 다음은 일을 맡으면 되는 것이다.
이번 문제는 생각해둔 것이 있었다. 그는 홍화로의 끝쪽 끝까지 걸
어가서 사람이 두셋 들어가고도 남을 큰 항아리에 쌀과 곡식을 담아
거리에까지 내놓은 가게 앞에 섰다.
'산동옥미(山東玉米)'라는 현판이 위압적으로 내려다보는 문을 지
나 안으로 들어가자 바쁘게 움직이는 일꾼들 사이로 주판을 움켜쥔
청년 하나가 튀어 나왔다.
"어서오십…, 넌 누구냐?"
일견(一見)하고 손님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구별하지 못하면 상인
으로서의 자격이 없다고 하던가. 용유진이 곡식을 사러 온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청년은 한 눈에 알아본 모양이었다.
"심대인(沈大人)을 만나러 왔네. 안내하게!"
다짜고짜 반말, 게다가 주인을 찾는 것이다. 용유진의 초라한 복
색에 적의를 보이던 청년은 순간적으로 태도를 돌변시켜 허리를 굽
혔다.
"어디서 오신 누구시라고 전해드리면 될까요?"
"이걸 보이면 아실걸세."
용유진은 붉은 종이를 건네주었다. 청년은 종이를 받고서도 의심
스러운 빛으로 살펴보았다.
"이건…?"
"배첩일세!"
"이게…?"
청년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의 표정변화와 동시에 조금씩 허리가
펴졌다. 태도가 매우 잘 변하고, 생각한 것이 그대로 얼굴에 드러나
는 놈이라고 용유진은 청년을 평가했다.
'작은 장사꾼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절대 큰 장사꾼은 되지 못할
것이다.'
영 떨떠름한 얼굴로 배첩을 가져간 청년이 곧 허둥지둥 달려와 부
러질 듯 허리를 꺾었다.
"용공자님이셨군요. 몰라뵈어 죄송합니다. 어서 안으로…!"
청년의 안내를 받아간 가게의 내부, 깊숙한 방에 '산동옥미'의 주
인이자 청주부 인근의 양곡(糧穀) 흐름을 쥐고있다는 심대인이 앉아
있었다. 용유진은 인사를 하고, 심대인의 입에서는 호화객잔의 장방
이 말한 것과 거의 흡사한 말이 흘러나왔다.
"용공자 어서오시게. 아버님 일에 대해서는 들었네만 가보지 못해
미안하고…."
용유진은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오셨었지요."
"음? 아…, 그래. 갔었군. 갔었지. 하하 내 정신이라니…."
용일담만이 아니라 백여명에 달하는 표사와 쟁자수(爭子手)들이
죽은 것은 청주성에서도 작은 사건은 아니었다. 그 혼령들을 위로하
는 합동 위령제에 청주성의 명사(名士)로서 심대인도 왔던 것인데,
기억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용유진은 오늘 일이 그리 쉽지 않을거
라는 걸 예감했다.
"찾아뵌 것은 다른 일이 아니고…."
"아, 그래. 무슨 일로 오셨나?"
둥근 얼굴에 어울리는 미소를 잃지 않고 용건을 묻던 심대인의 표
정은 용유진의 말이 끝나자마자 돌변해 버렸다.
"이번 곡물수송건을 맡고싶다고?"
곡물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연중행사는 당연히 세미(稅米)를 조
달하고 운반하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당연히 관군이 투입되고, 어마
어마한 물량이 움직인다. 그러나 그보다는 물량이 적지만 상당한 물
량이 움직이는 행사가 일년에 네 번 있었다. 산해관(山海關)에 주둔
한 군사들에게 군량(軍糧)을 나르는 일이었다. 이것 역시 관과 군이
감독하지만 실제 물건을 나르는 것은 표국이었기 때문에 적지않은
보수가 보장되는 일이 이것이었다. 이 행사를 주관하고 움직이는 것
이 심대인이고, 용유진은 이 일을 맡으려 온 것이다. 용일담 생존시
에 비룡표국이 맡아 해온 일이기 때문이었다.
용유진으로서는 아버지의 유업을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실
제로 적지않은 돈이 된다는 이유에서 첫 표행을 그것으로 하고싶었
던 것인데, 일은 그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미쳤나?"
용유진의 표정이 그 말 한 마디로 굳어졌다.
"아니오."
"미치지 않고서 어떻게 그런 말이 나오나?"
"제가 다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운반할 양이 많으면 한 표국이 다 하지 않고 몇 개의 표국이 힘을
합쳐 일을 하는 경우가 있었다. 산해관으로의 양곡운반 건도 그런
경우인데, 보통 비룡표국이 중심이 되지만 군소 표국들도 몇 개가
참가하곤 했던 것이다. 용유진은 이번에 비룡표국도 그 보조역으로
참가하게 하고 싶은 것이다.
"표사는?"
"제가 하겠습니다."
"마부는?"
"그것도 제가 하지요. 마차는 이미 몰아본 적이 있기 때문에…."
"마차는 있고 그런 소리를 하나?"
"심대인께서 일을 맡겨주시면 차행(車行)에서 빌려줄 것입니다."
차행은 마차와 말, 혹은 수레 같은 것을 빌려주고, 때로는 마부까
지 빌려주는 곳이다. 용유진은 심대인과의 약속을 담보로 말과 마차
를 빌리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어느 차행과 약속이라도 했나?"
"아직 안했지만…, 맡겨만 주시면 제가 책임지고 빌려서…."
"어린아이에게 마차를 빌려주는 정신 나간 놈도 없고, 혹시 있어
도 너에게 일을 맡길 수도 없다. 내가 도대체 뭣 때문에 표사 있고,
마차 있고, 경력도 있는 표국들 다 놔두고 네게 일을 맡겨야 한단
말이냐?"
"그건…!"
용유진은 말문이 막혀 얼굴만 붉힌 채 아뭇소리도 못하고 있었다.
일이 쉽지 않을거라는 건 각오하고 있었지만 심대인이 이렇게 매몰
차게, 확실하게 거절할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었다. 아버지 생존
시에 그렇게 친하게 지냈던 두 사람이 아니었던가.
그의 그런 생각을 짐작한 듯 심대인이 말을 보탰다.
"설마 선친의 덕을 보겠다고 내게 찾아온 건 아니겠지? 만약 그랬
다면 정말 잘못 생각했다. 나는 공은 공, 사는 사로 확실하게 구분
한다는 걸 자랑으로 삼고 사는 사람이야. 부끄러운 줄 알아!"
정말 부끄러워 죽을 지경이었다. 심대인의 그 한 마디에 그는 죽
은 아버지 이름을 팔아 장사를 하려고 한 인간으로 낙인이 찍혀버린
것이다. 그 자신 조차도 원래 그런 마음이 조금이라도 없지는 않았
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무어라 반박할 말이 없었다. 그게 더 분했다.
용유진은 수치심에 아득해지는 정신을 간신히 추스르고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깔끔하게 떨치고 돌아가는 모습이라도 보여주면 자
존심이 조금이나마 회복될 것 같은데, 심대인은 그럴 기회도 주지
않았다.
"그만 돌아가라! 사적으로 찾아오면 언제든 반겨주겠다. 그러나
공적으로, 일을 맡겠느니 어쩌니 헛소리를 하며 오면 다리몽둥이를
부러뜨려 줄테다. 여긴 애들이 장난으로 들락거리는 곳이 아니란 말
이야."
용유진은 깊이 심호흡을 했다. 한 마디를 안해줄 수가 없었다.
"심대인, 저는 비록 어리고, 힘도 없지만 장난으로 일을 하려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팔고싶지도 않고, 동정을 호소
한 것도 아닙니다. 엄연히 일을 상의하러 온 제게 심대인의 오늘 행
동은 너무하신 것 같군요."
심대인의 표정이 이상야릇하게 변했다. 분노를 참는, 혹은 터뜨리
려고 준비하는 모습을 거기에서 찾아볼 수 있었지만 미안하다든가
사과하려 한다든가 하는 빛은 조금도 없는 표정이었다. 용유진은 그
표정을 뒤로 하고 문을 박찼다.
그리고 조금 후에 다시 들어왔다. 심대인이 온갖 인상을 쓰며 노
려보았다. 용유진은 잠시 망설이다가 주저주저 말을 꺼냈다. 방금의
통쾌한 퇴장이 여지없이 망가지고, 다시 한 번 자존심이 구겨지는
순간이었다.
"아까 드린 배첩, 그걸 돌려 받으러 왔습니다."
심대인은 아무 말없이 발치께를 가리켰다. 침이나 가래침을 뱉는
타담호(唾痰壺) 속에 그의 배첩은 구겨져 뒹굴고 있었다.
저녁이 되었다. 몇 군데를 더 돌아다녀 봤지만 사정은 산동옥미에
서와 마찬가지였다. 표사도 없고, 심지어 표국으로 쓸 건물도 없는
그에게 일을 맡기겠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나마 다들 만나주
기라도 하는 것은 아버지의 이름 덕이었다.
오늘 하루 용유진은 평생동안 받은 것보다도 더 많이, 몇 배로 모
욕을 받았다. 한 번 거절 당할 때마다 발걸음은 두 배로 무거워지
고, 애써 꼿꼿이 세운 머리가 땅을 향하게 되는 것이다.
배가 고팠다.
어젯밤 그 이상한 죽을 먹은 뒤로 아무 것도,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한 것은 코끝으로 파고드는 음식 냄새였다.
용유진이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그는 호화객잔의 앞에 와 있었
다.
냄새만으로도 그 정체를 짐작하게 하는 갖가지 오묘한 냄새들이
객잔의 안으로부터 풍겨 나오고 있었다. 용유진은 침을 삼켰다. 그
러나 돈이 없었다. 예전에는 먹고싶은 것이 너무 없어서 고민을 했
었다. 그러나 이제 무엇이라도 먹을 수 있을 듯한데 먹을 것이 없는
것이다.
그는 힘없이 발걸음을 돌리다가 멈춰 섰다. 밑져야 본전, 오늘의
마지막 승부를 이곳에서 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는 다시
발길을 돌려 객잔 안으로 들어갔다.
점소이가 튀어나왔다.
"어서옵…, 또 너냐?"
용유진은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장방에게 다가갔다.
"왕대인을 만나 뵈러 왔는데…."
아침에만 해도 반색을 하며 그를 맞던 장방이 지금은 조금 이상했
다.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고 눈만 약간 올려서 그를 바라보더니
다시 주판을 튕기는 일로 돌아갔다. 그리고 무뚝뚝한 대꾸가 나왔
다.
"무슨 일로?"
용유진은 분위기가 변한 것에 조금 당황했지만 어차피 볼 일은 장
방이 아니라 주인에게 있는만큼 여기에서까지 기죽을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다.
"왕대인을 뵙고 말씀드리지."
"안 보는게 나을텐데…."
"그건 내가 알아서 할테니 왕대인께 안내하게."
그제야 장방이 고개를 들고 짜증스럽다는 듯 머리를 긁었다.
"젠장 바빠 죽겠구먼, 별 일이 다…."
그는 객잔의 이층으로 올라갔다가 나오더니 이층 계단 위에서 손
짓을 했다.
"이리 와봐! 만나주신댄다."
장방이 처음부터 저런 태도였다면 용유진은 아무렇지도 않았을 것
이다. 그러나 원래는 아니었는데 갑자기 이런 태도라는 것은 더욱
참을 수가 없는 모욕이었다. 그래도 참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 슬펐
다.
용유진은 입술을 깨물고는 이층으로 올라가 장방의 뒤를 따랐다.
복도를 사이에 두고 닫힌 문들이 여럿 있었고, 그 안에서는 남녀의
웃음소리들이 새어나왔다. 전에는 그도 여기에서 음식을 먹은 적이
있었다. 막힌 공간을 제공한다고 해서 같은 음식도 값을 두 배로 받
는 장소였다. 지금은 길거리에서 먹는다고 해도 먹을 것만 있으면
좋을 것 같은데….
왕대인은 복도 끝의 가장 큰방에서 손님들과 함께 연회를 벌이고
있었다. 거기 들어간 순간 용유진은 장방의 말대로 만나지 않는 게
좋았을 거라고 깊이 후회했지만 이미 때가 늦었다. 손님은 이곳의
유지들이었고, 그 중에는 오늘 그가 만난 인물들이 다수 섞여 있었
던 것이다.
"오…, 용공자. 비룡표국의 이대국주. 여기엔 웬일이신가?"
왕대인이 비대한 몸을 돌려 그를 보면서 큰 소리로 말했다. 좌중
에 폭소가 터져나왔다. 그들은 이미 용유진에 대해 알고 있었다. 오
늘 그가 찾아가지 않은 사람들까지. 그를 안주 삼아 여러 순배를 거
친 모양이었다.
용유진은 이대로 돌아서서 나가버릴까 고민했다. 한꺼번에 쏟아지
는 수치와 모욕으로 아득해진 정신은 그의 결정을 기다릴 것도 없이
방을 빠져나가려고 했다. 용유진은 정신을 수습하고 다시 한 번 아
프게 입술을 깨물었다. 이왕 당한 일, 더 이상의 모욕을 받는다 해
서 달라질 것도 없을 것이다.
그는 가슴을 펴고 말했다.
"왕대인께 부탁이 있어 왔습니다."
"부탁? 난 선물은 좋아하지만 그런 선물은 별로인데…."
다시 폭소가 터져나왔다.
"아시다시피 지금은 가세가 몰락하여 예물을 준비해오지 못하였습
니다. 왕대인의 도움으로 다시 일어서게 되면, 그때 제대로 인사를
하기로 하지요."
"내 도움이라…. 비룡표국 이대국주씩이나 되는 분께 소인이 무슨
도움을 드릴 수 있을까?"
그리 재미있는 농담도 아닌데 좌중의 사람들은 배를 움켜쥐고 웃
어대었다.
"돈을 빌려주십시오."
"돈을?"
"예, 마차를 빌리고, 표사를 고용할 밑천을 빌려주십시오. 일이
끝나면 이자까지 쳐서 갚아 드리지요."
"이자라…, 내 이자는 비싼데?"
"얼마든 갚아드리지요."
"뭐, 이자를 후히 쳐주겠다면야 돈을 아니 빌려드릴 일도 없겠지
요. 그래 얼마나 필요 하신가? 한 푼? 열 푼? 마차를 빌리고 표사를
고용하려면 열 냥쯤이면 되나?"
자리에 있던 손님중 하나가, 이 사람은 차행을 소유한 사람이었는
데 왕대인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열 냥이면 마차바퀴 하나는 빌려줄 수 있지요."
"그럼 얼마나 있어야 되는 거요?"
다른 손님이 대꾸했다.
"적어도 은자 백 냥은 있어야 마차도 빌리고, 표사도 고용할 수
있겠죠."
"내가 아는 표사가 있는데, 성실하고 칼도 잘 쓰죠. 단지 앉은뱅
이라서 탈이지만…!"
다시 폭소가 터졌다. 용유진은 묵묵히 듣고 있다가 말했다.
"말씀대로 백냥은 필요합니다."
왕대인이 기겁을 하며 손을 저었다. 그 서슬에 탁자 위의 음식이
흩어져 떨어졌다.
"백 냥? 백 냥이나 되는 거금이 어디 있겠소? 용공자께서 소인을
과대평가 하시는군요. 여기 다른 분들은 몰라도 나는 그런 돈 없소
이다."
"아, 나도 없지. 요즘같은 세상에 누가 백 냥 쌓아두고 사는가
요?"
그렇게 말한 사람은 산동옥미의 주인 심대인이었다.
용유진은 고개를 숙이고 돌아섰다.
"방해를 한 것 같군요. 그럼 저는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잠깐만 용공자!"
왕대인이 그를 불렀다. 방금까지와는 달리 정색한 얼굴이었다.
"돈은 안 빌려가는거요?"
"없으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왕대인은 손가락을 저었다.
"물론 없지요. 하지만 돈이라는 놈이 또 묘해서 나올 때가되면 어
디서든 나오는거요."
"어떻게 해야 나올까요?"
"머리를 낮추고 얼굴엔 미소를 잃지 않아야지요. 겸손을 떨어야
돈이 나온다오."
그는 훈계라도 하려는 듯 손을 흔들고 침을 튀겨가며 말을 이었
다.
"남의 신세를 지게될 바엔 벌거벗고 달려드는거요. 거기에 체면이
니 위신이니가 끼여들 틈이란 없소. 손을 비비고 비굴한 웃음을 지
어가며 머리는 땅에다 찧어 피가 날 정도가 되어야 돈이 나오지요.
용공자, 남의 돈 먹기가 쉬운 게 아니라오."
"벌거벗는 쪽으로는 소질이 있다고 들었는데?"
다시 심대인의 목소리였다. 좌중이 웃음소리로 다시 시끄러워졌
다.
용유진이 왕대인에게 물었다.
"말씀은 잘 들었습니다만, 그래서 돈을 빌려주시겠다는 겁니까?"
"물론 안되지요. 지금은 돈이 없다고 하지 않았소."
"언제 나올까요?"
"좀 더 크면 그때 오시오. 그리고 그땐 머리도 좀 더 숙이고, 손
의 상처도 좀 더 나은 다음이라야 하겠군요. 비빌려면 말이요."
용유진은 다시 심호흡을 했다.
"남의 돈 얻기가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건 저도 아버님께 배워 잘
알고 있습니다. 예, 필요하다면 무릎으로 기어서라도 얻어야겠지요.
하지만 지금 제게는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비룡표국에는 저밖에
없고, 제가 곧 비룡표국입니다. 제가 기면 비룡표국이 같이 기는 것
이고, 돌아가신 아버님과 표사 형제들이 다 같이 기는 것입니다. 그
러니 지금 저는 돈을 못 얻는 일이 있어도 길 수는 없는 것입니다.
여러 어르신, 안녕히 계십시오."
밖은 이미 어두워졌다. 용유진의 마음도 그렇게 어두웠다. 오늘
알아본 이대로라면 비룡표국을 재건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
다. 그는 배고픈 것도 잊고 터덜터덜 걸었다. 성을 빠져나와 한참을
걷다가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어제의 그 폐가로 향하는 자신을 발견
할 수 있었다.
용유진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십오야(十五夜)의 만월이 그를 내려
보고 있었다. 눈가가 뜨거웠다. 손을 들어 훔치자 거기 물기가 묻어
나왔다. 성에서 오는동안 내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는 울고있었
던 모양이었다.
"이게 무슨 부끄러운 일인가."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그는 계속 남의 앞에서는 당당하려 노력
하고, 뒤에서는 눈물을 짜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게 부끄러워 화까
지 났다.
"이젠 죽어도 안 울 테다!"
밤 하늘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지르고나니 마음이 가벼워졌다. 용유
진은 좋은 생각만 하기로 했다.
"이젠 조금씩 나아질거야. 오늘이 최악이니까. 이보다 더 나쁜 날
이 있을 수는 없을테니, 내일은 오늘보단 낫겠지."
그가 한 가지 간과한 것은 최악의 날은 아직 완전히 끝나지 않았
다는 점이었다. 그것을 그는 폐가에 돌아온 다음에 알았다. 월령이,
소녀의 시체는 없고 대신 몇 명의 사내들이 방안에 불을 피우고 둘
러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