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용유진, 월령을 얻다.
1.
용유진이 다시 눈을 떴을 때, 방에는 아무도 없고, 모닥불도 사그
러들고 있었다. 대신 머리맡 땅바닥에 '십년 후에 다시 보자'라고
쓰여져 있었다.
용유진은 쓰게 웃었다. 비 피하겠다고 들어왔다가 영문도 모르고
온갖 이상한 일을 당하고, 내기를 건데다가 십년 후의 약속까지 건
셈이다. 그리고 아직까지 영문을 모르고 있었다. 게다가 죽 한 그릇
먹고는 기절을 하다니. 용유진은 아무래도 자기가 옛날 이야기에 나
오는 한바탕 백일몽을 꾼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그리고 차라리
그런 꿈을 꾼 것이기를 바랬다. 내일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외로운
신세에 무림사이 씩이나 되는 초고수들의 관심을 끌게되었다는 것은
좋아만 할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골치 아픈 일이 생길게 틀림없어!'
그러나 꿈은 아니었다. 그 증거로 그의 팔에는 두 개의 팔찌가 채
워져 있었다. 하나는 어제 고목에게서 직접 받은 흑오라는 팔찌였
고, 다른 하나는 그가 혼절한 사이에 채워놓고 간 것인 모양인데,
옥처럼 맑은 백색의 학이 날개를 활짝 펴서 감싼 듯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학익인 모양이었다.
그렇게 찬찬히 바라보다가 용유진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닫고 다시
학익을 뜯어보기 시작했다. 표국의 일이라는 것이 물건을 날라주는
게 주 역할이지만 그러려면 물건을 볼줄도 알아야 한다. 엉터리 물
건을 맡아서 사기를 당하는 일은 없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어려서부
터 표국에서 살면서 이런저런 물건들을 본 용유진도 자연 어느정도
는 물건을 보는 눈을 기르게 되었는데, 지금 그 재능이 발휘되었다.
용유진은 혀를 내밀어 학익을 핥아보았다. 틀림 없었다.
"가짜잖아!"
은(銀)인줄 알았더니 은도 아니고, 그럼 백금(白金)인가 했더니
백금도 아니었다. 이런 종류의 합금(合金)은 처음 보지만 학익은 분
명 쇠였다. 칠한 것은 아니고, 아마도 철에 뭔가를 섞어서 백색이
나게 만든 것임이 틀림 없었다.
'흑오는?'
흑오도 역시 쇠였다. 범상치 않은 흑색의 광채를 발하기에 흑옥
(黑玉)이라도 될 거라고 생각한 용유진의 기대가 보기좋게 빗나가
버렸다. 그래도 학익의 세공은 정교함의 극치를 달려서 공예품으로
제법 값이 나갈 것 같았지만 흑오는 아무런 장식도 없는 그냥 말 그
대로 검정색 팔찌에 불과해서 한푼 값어치도 안 나갈 것 같았다.
"어차피 팔 것도 아니니까."
용유진은 빼서 품속에 보관하려고 했다. 그러나 팔찌는 빠지지 않
았다.
"이상하네."
고목의 팔에 채워져 있을 때는 꽤 둘레가 커 보였는데, 지금 보니
그의 팔목 굵기보다 약간 넓은 정도에 불과했다. 주먹에 걸려서 빠
지지 않을 정도. 혹시나 하고 어디 연결고리가 있는가 찾아봤지만
그런 것도 없었다. 팔목에서 뺄 방법이 없는 것이다.
"취향은 아니지만 그냥 차고 다닐 수밖에 없겠군."
팔지도 못하고, 더더구나 취향이 아닌 물건은 하나 더 있었다. 용
유진은 월인 공손조덕이 넘겨 준 월령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한참을
살펴보았다.
반쪽은 해골, 반쪽은 소녀의 얼굴. 용유진은 문득 여기 새겨진 소
녀의 얼굴이 어제 본 그 소녀 강시의 얼굴과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설마…!"
그런 우연이 있겠나 스스로 부정하면서 용유진은 방울을 흔들어
보았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응?"
그는 더 힘차게 흔들었다. 여전히 소리가 나지 않았다. 흔들어도
소리를 내지 않는 방울. 이것이 월령의 정체인 듯했다. 한 마디로
아무 쓸모가 없는 물건이었다.
"그냥 장식용 귀걸이인가?"
그런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월령을 흔들어서인지는 몰라도 용유
진 외에는 아무도 없던 방안에 한 사람이 나타났다. 정확히 말해서
한 구의 강시가 나타났다. 문제의 그 소녀 강시였다.
양팔은 몸통과 함께 묶여있고, 무릎과 발목 관절도 붉은 밧줄로
묶여있는데다가 얼굴에는 부적 한 장이 붙여져 있는 소녀의 시체.
몸을 감싼 수의는 검정 일색으로 칙칙하고 비에 젖어 있긴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좋은 비단으로 만들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귀한 집 여
식이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얼굴은 용유진의 생각대로 월령에 새겨진 그 소녀의 얼굴
과 놀랄 정도로 닮아 있었다.
불도 거의 꺼져서 희미하게 붉은 빛만 아른거리고 있는 방 안에
아무리 소녀라고는 하나 이미 시체가 된 소녀와 단 둘이만 있는다는
것은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용유진은 은근히 소름이 끼쳐오는
것을 느끼며 마른 침을 삼켰다.
"분명 월령은 네가 아니라 단지 이 귀걸이일 뿐이라고 했는데?"
당연히 소녀의 시체에서는 대답이 없었다. 흔히 알려진대로 무릎
을 함께 구부려 껑충껑충 뛰는 방식으로 그의 앞에 나타난 그 이후
로는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고 꼿꼿이 서있기만 했다.
용유진은 이것이 우연일지, 아니면 월령에 반응해서 강시가 움직
이는 것인지 시험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방 한쪽 구석에 가
서 섰다.
"이리 와봐!"
소녀의 시체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이리 와 보라니까!"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명령이다. 이리 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용유진은 방울을 흔들었다. 그 순간 소녀의 시체가 껑충 뛰어 허
공에서 몸을 돌리더니 용유진을 바라보고 내려 섰다. 소리내지 않는
방울, 월령의 정체는 강시를 움직이는 물건이라는 것인 모양이었다.
"이걸 어디다 쓰나!"
용유진은 한숨을 내 쉬었다. 자기 한 몸조차 책임지기 힘든 처지
에 강시라는 여러모로 처치곤란한 군식구까지 떠맡게 된 것이다.
"에구, 모르겠다!"
용유진은 불 가로 돌아와서 바닥에 누워버렸다. 아직은 새벽, 나
가기에는 어중간한 시간이었다. 용유진은 그대로 아침을 기다리기로
했다.
"너도 어디 가서 쉬어라!"
물론 시체는 움직이지 않았다.
용유진은 다시 한숨을 쉬고 월령을 흔들며 말했다.
"어디 가서 쉬어!"
소녀의 시체는 콩콩 뛰더니 벽에 기대어 섰다. 쉬는 자세인 모양
이었다. 용유진은 물끄러미 그 모습을 보다가 일어서서 다가갔다.
"그래 가지고서야 불편해서 쉬겠니. 끈을 풀어주지."
소녀의 몸에 묶인 끈을 풀어주다가 용유진은 소녀의 팔에 잠깐 스
치고는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싸늘하게 식어서 체온이라곤 느낄
수가 없었다. 용유진은 머리를 흔들며 다시 끈을 풀었다.
"시체가 체온이 없는 게 당연하지. 놀라긴 바보같이."
스스로 꾸짖으며 끈을 다 풀어주고는 다시 자리와 와서 누웠다.
소녀의 시체는 끈을 풀어줬어도 여전히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용
유진은 방울을 흔들어 명령했다.
"아무데나 누워라!"
소녀의 시체는 다시 콩콩콩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용유진의 바
로 옆으로 와서 장작 무너지듯이 쓰러져 누웠다.
"켁켁! 누가 여기 와서 누우랬어! 자리도 넓은데 딴 데로 가!"
솟아오른 먼지를 손으로 날리면서 소리쳤지만 물론 이번에도 소녀
는 움직이지 않았다.
"못 말리겠군, 정말!"
용유진은 혼자서 투덜거리다가 손으로 머리를 괴고는 옆으로 누워
소녀의 시체를 자세히 뜯어보기 시작했다.
키가 비슷한지 소녀의 머리는 그의 눈 바로 앞에 와 있었다. 그
옆얼굴이 깎은 듯 아름다워서 용유진은 감탄했다.
반듯한 이마에 매미 더듬이처럼 가지런한 눈썹, 열려진 눈은 위는
반듯하고 아래는 곡선을 그리며 올라가 있어서 순한 눈매를 한데다
가 속눈썹이 길어 마치 그늘 드리운 연못처럼 고요해 보였다. 미묘
한 곡선을 그리며 뻗은 코는 조금 더 급한 경사로 내려와 인중을 만
나고, 인중에서부터 윗입술, 아랫입술, 다시 턱까지 이어지는 곡선
은 어떤 인공의 창작물도, 어떤 자연의 조화도 따를 수 없을만큼 부
드럽고, 미묘한 선을 그리고 있었다. 단지 핏기 없이 창백한 뺨과
멍하니 열린 눈동자가 피안(彼岸)과 차안(此岸)의 세계로 갈라져,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도저히 만날 수 없었던 용유진과 그녀의 세계
사이의 단절을 말해주고 있었다.
용유진은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가 가슴 속이 이상하게
뛰는 것을 느끼고 실색해서 돌아누웠다.
'추하구나, 용유진. 시체를 보고 이상한 느낌을 갖다니!'
한순간 그는 소녀가 살아 있는 사람인 것처럼 두근거리는 마음을
느꼈던 것이다. 아니 단 한 번도 살아있는 소녀에게서는 느껴보지
못했던 그런 마음을 느꼈던 것이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속으로 불호를 외다가 용유진은 방울을 들어 흔들었다.
"눈 감아!"
그러는 것과 안 그러는 것에 별 차이는 없겠지만 눈을 감으면 시
체도 편히 잘 수 있을 것 같다는 마음이었다. 그것이 어쩐지 어린아
이 생각 같아서 한 마디 더 변명처럼 하고서야 용유진은 잠이 들었
다.
"파리가 알이라도 까면 곤란하잖아."
아침이 왔다. 비는 그치고 폐가의 처마에 매달린 거미줄에는 빗방
울이 달려 빛을 내고 있었다. 용유진은 문턱에 앉아 멍하니 그 구슬
을 세고 있었다.
아침이 왔지만 할 일이 없었다. 무언가 하긴 해야 하는데 막상 무
얼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사람들 앞에서는 당당하게 행동하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지금 생
각해보면 그 모든 것이 다 턱없는 허풍, 근거 없는 큰소리인 것만
같았다. 어떻게 다시 표국을 일으키고,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에게
진 마음의 빚을 갚는단 말인가. 당장 아침을 먹을 일도 막막하지 않
은가.
'일단 다른 표국에 들어가 표사라도 될까?'
용유진은 고개를 저었다. 그의 아버지가 주인이었으니 표행에 따
라갈 수 있었지 다른 표국에서 열 네 살 어린아이를 표사로 받아준
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럼 다른 일이라도?'
그것도 가능하지 않았다. 다른 일이라고 열네 살 어린아이에게 시
켜주는 일이 있을 것인가. 게다가 살아오면서 보고 배운 일이라곤
표국의 일밖에 없는 그가 할만한 일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가 가진
것이라곤 어젯밤 갑자기 생긴 세 가지 물건과 표국의 현판, 그리고
시체 한 구밖에 없지 않은가.
용유진은 시체 생각을 하고는 방안을 들여다보았다. 햇볕이 비춰
드는 방안에는 소녀의 시체가 어젯밤 누운 그 자세 그대로 누워 있
었다. 용유진은 한 가지 생각을 하곤 빙긋 웃었다.
"어이, 우리 약장수라도 할까? 내가 약을 팔면 너는 춤을 추는거
야. 물론 내가 남들 모르게, 아니 알아도 상관 없겠군. 강시가 춤을
춘다고 하면 사람들이 더 신기해 할지도. 근데 너 춤은 출줄 아나?"
여전히 대답은 없었다. 용유진은 고개를 저었다.
"아 참. 팔 약도 없군. 안되겠다."
다시 막막해졌다. 용유진은 거미줄에 걸린 물방울이나 세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새 물방울도 말라버리고 없었다.
"되는 게 없구나."
용유진은 한숨을 쉬었다. 그때 다른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어디엔가 숨어있던 거미가 기어 나오더니 줄을 고치기 시작한 것이
다. 네 개의 다리로 씨줄을 밟고, 뒤로 돌린 두 개의 발을 움직여
꽁무니에서 나온 줄을 꼬고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두 개의 발로 그
렇게 만든 줄을 망가진 집에 연결시키고, 눌러 고정시키고 있었다.
"어이, 거긴 너무 망가져서 고쳐봤자 못 쓰겠다. 딴데 가서 새로
지어!"
거미도 시체와 마찬가지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자기 일만 할뿐
이었다.
"바보 같은 놈!"
욕은 했지만 달리 볼 것도 없었다. 용유진은 한없는 무료함을 느
끼며 거미가 일하는 모습만 바라보았다.
태양이 한 자쯤 움직이고, 미처 다 비를 뿌리지 못한 구름이 바람
에 찢겨 흩어졌다. 처마 그림자가 성큼성큼 걸어와 방안에까지 숨어
버렸다. 시간은 정오를 향해 가고 있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거미는 찢겨진 집을 다 수리하고 먹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둥과 처마로 연결된 줄들은 은빛을 발하고, 솜
씨좋은 수리공이자 음험한 사냥꾼인 거미는 여덟 개의 다리를 벌려
팔방을 제압하고 있었다.
용유진은 왠지 눈물이 나려는 것 같아 입술을 깨물었다. 이렇게
맑은 날씨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렇게 넓은 세상, 무한히 주어진
자유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가야 할 시간이 더
많이 남았다는 것이 지겨워 죽고싶을 정도였다.
용유진은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난 거미보다 못한 놈이구나! 난 벌레만도 못한 놈이야!"
용유진은 퇴락한 정원 구석에 고인 웅덩이로 뛰어가 손과 얼굴을
씻었다. 붉게 화농한 상처가 손가락 끝에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참
을만 했다. 머리카락을 묶은 끈을 풀고 머리를 감은 다음 웃옷을 벗
어 얼굴까지 함께 닦았다. 그는 지금 가능한 한 가장 깨끗하게 몸을
꾸미려고 애쓰고 있었다.
나뭇가지에 옷을 걸어 말리면서 젖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몇번이고
빗어서 머리 위로 올린 다음 끈으로 묶었다. 빗으로 빗은 것은 아니
지만 어제보다는 훨씬 단정하게 보였다. 대충 마른 옷을 걸치고 옷
매무새까지 가다듬자 준비는 끝났다. 용유진은 지금 가슴 속으로부
터 뜨거운 투지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방 안을 들여다 보며 말했다.
"이대로 더 쉬어. 난 일을 물어 오겠다. 오늘이 비룡표국 제 이대
주인 용유진의 첫 영업날이야! 저녁엔 같이 술이라도 마시면서 축하
해 보자"
그는 돌아서서 뛰어나가다가 다시 돌아왔다.
"네 이름은 월령이라고 하자. 난 이름 짓는덴 소질이 없고, 그런
것에 마음 쓸 시간도 없어. 그리고 월령은 여자애에게도, 여자애 강
시에게도 좋은 이름인 것 같아."
용유진은 이제 진짜로 뛰어나가 산 아래로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