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청년의 용모는 매우 특이했다.
넓은 이마와 가지런한 눈썹, 반달같은 눈에 맑은 눈동자, 쭉 뻗은
콧날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면 여인네의 그것처럼 붉은 입술이 있고,
알맞게 꺾어진 턱의 윤곽이 보기 좋았다.
그러나 대머리였다. 잠시 방안이 밝아 보일 정도로 환한 머리가
잡티 하나 없이 뒷덜미까지 둥글게 연결된, 완벽한 대머리였던 것이
다. 용유진은 중도 봤고, 불량스러워 보이려고 일부러 머리를 민 사
람도 봤지만 이렇게 완벽한 대머리는 처음 봤다. 면도날로 밀어도
이렇게 깨끗이 잡털 하나 없을 수는 없을 것이다.
복장 또한 기괴했다. 금실로 수놓은 화려한 비단 옷을 멋들어지게
차려입었는데 목에는 어린 아이 주먹만한 염주알을 꿰어 만든 염주
를 걸고 있었다. 잘생긴 외모에 비단옷, 눈부신 대머리에 염주, 하
나하나 뜯어보면 이상할 것도 없지만 전체적으로는 지독한 부조화를
연출하고 있는 것이 청년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가장 놀라운 것은 그러한 외모가 아니었다. 청년이 입을
벌려 공손조덕을 불렀을 때 용유진은 망치로 뒤통수를 한 대 맞는
듯한 충격을 느껴야 했다.
"어이 공손 강시(疆屍)! 어르신을 초대해 놓고 준비한 것이 겨우
이 죽 한 솥은 아니겠지? 어딘가 산해진미가 있을 게 틀림 없어. 그
렇지? 제발 그렇다고 말 좀 해주라. 안 그러면 이 부처님이 보름이
나 걸려서 달려온 보람이 없지 않나."
졸지에 강시가 되어버린 공손조덕은 화도 내지 않았다.
"미안하지만 땡초야, 준비한 건 이것 뿐이다. 산해진미는 네 소굴
에서 매일 먹으면서 여기까지 와서 그런 것을 찾는단 말이냐. 너도
식탐이 강해서 성불하긴 애저녁에 글렀구나."
그리곤 용유진을 보며 말했다.
"내기 조건을 바꿔도 괜찮겠구나. 네가 이 땡초처럼만 되지 않는
다면 성공한 인생인 셈이니 네가 이긴 것으로 해도 되겠다."
남여를 들고왔던 여인중 하나가 남녀 밑바닥에서 작은 의자 하나
를 꺼내더니 불가에 놓고 그 위에 비단을 덮었다. 대머리 청년이 그
의자에 앉았다. 그는 괴상한 표정을 지으며 용유진을 아래위로 살피
더니 말을 걸었다.
"공손 강시의 목소리는 워낙 커서 내가 십리 밖에서부터 들었다.
혹시 이미 내기를 하기로 약속을 했느냐? 했으면 넌 크게 사기를 당
한 거다. 이 교활한 강시가 하초(下焦)가 부실해서 자손도 못 보다
가 늘그막에 겨우 아들 하나 얻더니 그 아들 마저 년전에 골로 가버
렸지. 그 이후로 천하를 돌아다니며 인재(人才)라고 생긴 애들에게
는 침을 함지박으로 하나씩 흘리고 있다는 말을 내 들은지 오래였
다. 오늘 네가 걸린 모양이니 불쌍타 아니할 수 없구나. 끌끌."
이렇게 마구 말을 하는 걸 보면 청년은 공손조덕과 터놓고 지내는
사이가 틀림없었다. 사실은 그가 누군지 용유진은 이미 어느 정도
짐작을 할 수 있었다. 단지 청년의 용모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가
상상도 못했기 때문에 일말의 의혹을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하여간
공손조덕과 심한 농담을 주고받는 사이이니 대단한 인물이 분명했
다.
용유진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내기야 이미 걸었습니다만, 어느 모로 보나 제게 유리한 조건이
라 내기라 할 수도 없을 것 같습니다."
청년이 눈을 까뒤집으며 크게 손을 저었다.
"무슨 소리! 이 강시 늙은이가 손해보는 장사를 할 것 같으냐? 미
리 말하면 남의 장사 망친다고 욕할 것같아 말은 않는다만, 이 늙은
이는 지든 이기든 이익 보는 내기를 건 거란 말이다. '백 배로 이득
을 보는 일이 아니면 내기를 걸지 않는 공손 강시'라는 화려한 이름
을 너는 모르나 보다만 아는 사람은 다 알고있는 일이지."
"너 이 땡초야, 말을 조심해라. 이 한 판의 내기에 나는 월환과
월령을 다 걸었으니 그야말로 내 본전까지 톡톡 털어 큰 도박에 내
던진 것인데, 그러고도 내가 이득 보는 장사란 말이냐? 내가 육십
여 년 간 이런 저런 내기를 해왔지만 너처럼 날 매도하는 사람은 없
었다."
"매도하긴 뭘 매도하나? 매도란 말은 말이야, 사실이 아닌 걸 사
실이라고 우길 때 쓰는 말이지 사실을 사실 그대로 표현할 때 쓰는
말이 아냐."
이쯤 되면 화를 내지 않을 수 없겠다고 생각하는데 공손조덕은 오
히려 웃고 있었다.
"그래, 땡초. 네 생각엔 내가 어떻게 해야 이 내기가 공정할 것
같으냐?"
청년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망설이지 않고 대꾸했다.
"월인(月刃)까지 걸어라!"
공손조덕이 입을 딱 벌렸다.
"월인까지?"
"그래 월인(月刃). 월인(月人) 공손조덕에게 있다는 세 보물, 월
환, 월령, 월인 이 세 가지를 다 걸지 않으면 공정하지 않지. 월환
은 지금 안 줄테고, 월령은 누구 손에 있으나 마찬가지로 쓸 데가
없는 것이니 월인까지 내 놓으란 말이다."
공손조덕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월인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그에
게는 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 것인 모양이었다. 일생일대의 중요사
를 결정해야 하는 순간에 선 사람처럼 침중하게 앉아 있더니 결국
얼굴을 펴고 웃었다.
"흐흐흐, 좋아, 좋아. 거는 김에 다 걸어보지. 정말 이 공손조덕
의 일생에 이와같이 큰 도박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청년을 힐끗 노려보았다.
"설마 월인이 이 아이에게 넘어가게 만들어놓고 네가 침을 흘리는
건 아니겠지?"
청년이 순간적으로 뜨끔했다는 빛을 보이더니 이내 표정을 바꾸고
맹렬하게 손을 저었다.
"사람을 뭘로 보는거냐. 천하의 일승 고목대사(古木大師)께서 월
인같은 애들 장난감에 침을 흘릴 것 같으냐? 난 줘도 안 갖는다."
일승 고목대사.
용유진의 짐작대로 청년은 과연 일월성신 중 하나인 '일(日)', 일
승 고목대사였다. 젊어서 중생제도(衆生濟度)에 뜻을 두고 자진 출
가, 승려가 된 뒤에 혜택 받지 못한 중생들에게 주육(酒肉)과 색정
(色情)의 열락을 퍼부어주는 것이 부처의 뜻이라는 해괴망측한 논리
에 입각해서 기루를 세우고 운영한다는 파계승이었다.
천하의 불교 종파에서 하나같이 그에게 분노를 표시하면서도 어쩌
지 못하는 것은 순전히 그의 무공이 강하기 때문이라는 괴짜중의 괴
짜, 그러면서도 무림사이 중 첫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고수가 그인
것이다.
그런 일승의 말인데도 공손조덕은 코웃음을 쳤다.
"여자 장사나 하는 놈의 말을 누가 믿는단 말이냐. '정직한 말은
단 한 마디도 하지않는 고목 땡초'라는 말도 이 아이는 모르겠지만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지."
이 말이 통렬한 일격이었던 모양, 일승은 얼굴을 붉히고 손을 떨
었다. 신기한 것은 그가 흥분하자 대머리에서 은은한 빛이 발산된다
는 것이었다. 이래서 별호에 해 일(日)자가 들어간 모양이라고 용유
진은 생각했다.
"난 평생 단 한 마디도 거짓말을 한 적이 없어!"
"오오 놀랍군, 그거야말로 완벽한 거짓말이다. 졌다, 졌어!"
공손조덕이 짐짓 손까지 들며 이죽거렸다. 일승은 흥분이 극에 달
한 듯 머리까지 새빨갛게 물들이고 몸을 떨었다. 비단 장포가 태풍
을 만난 것처럼 펄럭거렸다. 그러나 공손조덕은 조금도 우려하지 않
는 듯 솥뚜껑만 단속할 뿐이었다.
"먼지 들어갈라!"
일승은 잠시 그렇게 있다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히죽 웃었다. 얼
굴이 급속히 식었다.
"난 여자 장사나 하는 파렴치한이라고 치자. 넌 뭐냐? 세상에서
제일 더러운 것이 남의 불행을 이용해 먹는 무리 아니냐? 돈 받고
본적도 없는 사람까지 마구 죽이는 자객놈과 천리타향에서 친지를
잃어 곤란에 빠진 사람들 등을 치는 너 시체 몰이꾼은 정말 더러운
장사를 하고있다 아니할 수 없지."
이 비난에 대꾸한 것은 공손조덕이 아니라 밖에서부터였다.
"자기들끼리 싸우면 그만이지 왜 애매한 사람까지 끌어들여 욕을
하나?"
방문이 열리고 비바람이 잠시 들이치더니 그 비바람을 배경으로
한 사내가 나타났다. 눌러쓴 낡은 방립(方笠) 사이로 섬전같은 눈빛
을 번뜩이고 있는 사내. 온 몸에는 밤의 빛깔과 같은 검정 일색의
옷을 입고 피풍(披風)을 둘렀는데, 바람에 펄럭거리는 것을 보면 거
의 넝마나 다름없는 남루한 옷이었다.
사내는 한 손으로 방립을 들어올리며 방안을 훑어보았다. 용유진
은 헛숨을 들이쉬었다. 분명 공손조덕과 같은 연배일텐데도 청년으
로 밖에 보이지 않는 일승의 얼굴도 괴상했지만 지금 나타난 사내의
얼굴도 괴상하기로는 더 했다. 공손조덕의 얼굴에 주름살이 가득하
다면 이 사내의 얼굴에는 흉터가 가득했다. 얼굴과 드러난 손 등에
칼자국들이 거미줄처럼 종횡으로 그어져 있는 것을 불빛 아래 드러
났던 것이다. 칼자국에 가려져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얼굴. 거기에
다 애꾸였다.
칼 위에서 뒹구는 인생이기 마련인 무림인들 중에도 저와 같이 흉
악한 얼굴은 드물었다. 그래서 용유진은 그가 바로 일월성신 중에도
가장 살기가 넘치는 인물, 지옥의 별이라는 명성(冥星), 달리는 생
사판(生死判), 생사를 주관하는 판관이라고도 불리는 인물임을 알아
볼 수 있었다.
십대고수 중 일인이자 무림 최고 자객집단의 교주이기도 한 생사
판은 그렇게 나타나서 불 가에 주저 앉았다. 그리곤 소맷자락을 잠
시 흔드는 듯싶자 끝이 뾰족한 쇠꼬챙이 하나가 튀어나왔다. 생사판
은 그것으로 모닥불을 쑤셨다. 불이 잠시 밝아졌다.
"내가 사람들의 은원을 대행해 주는 직업을 가진 것이 고목대사께
서는 못마땅한 모양이지?"
일승 고목대사가 어색한 미소를 흘리며 손을 저었다.
"농담이다. 농담. 그런걸 가지고 정색을 하고 흉기를 꺼낼 필요는
없잖아? 흉명이 자자한 그 귀왕자(鬼王刺)는 집어넣고 이야기 하자
고."
생사판은 귀왕자라 불린 쇠꼬챙이를 불에서 꺼내 빨갛게 달구어진
그 끝에 침을 뱉었다. 침은 곧 끓어 증발했다.
"고목대사께서 팔에 찬 조양(朝陽), 명봉(鳴鳳), 학익(鶴翼)과 흑
오(黑烏), 그 네 놈을 풀어놓으면 나도 이놈을 집어넣지."
"오, 언제 이놈들이 나와 있었지?"
일승은 그 말에 새삼 깨달았다는 듯 팔뚝을 보았다. 한 팔에 두
개씩 네 개의 팔찌가 그의 팔목에 걸려있다는 것을 용유진은 지금에
서야 알았다. 신기한 것은 팔찌들은 일승의 팔뚝보다도 굵은 테를
가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손목 끝까지 올라와 있다는 점이었다. 통
상적으로 저렇게 손을 들어올린 자세에서는 팔꿈치까지 내려가 있어
야 정상일텐데도 마치 무엇에 들어올려진 듯이 손 바로 아래에서 찰
랑거리고 있는 네 개의 팔찌. 그것들 각각의 이름이 조양이고 명봉,
학익에 흑오, 바로 고목대사의 주무기인 것이다.
"죽 맛 떨어진다. 둘 다 그만 둬."
공손조덕이 둘 사이로 손을 내밀었다. 지금 그들은 모닥불을 사이
로 두고 둥글게 앉아 있으니 그 가운데로 손을 내밀면 아래에서 올
라오는 불길에 손을 들이미는 모양이 되었다. 그런데 공손조덕의 손
으로는 불길이 다가서지 않았다. 마치 불길이 그의 손을 무서워 하
는 것 같은 모양이었다.
공손조덕은 그 손을 돌려 용유진에게 내밀었다.
"아까 땡초가 말한대로 이걸 마저 주마."
공손조덕의 손은 빈손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아무 것도 없는 듯했
지만 자세히 보면 투명한 백색의 서릿발 같은 것이 손바닥으로부터
튀어나와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마치 장심(掌心)으로부터 솟아난
듯한 모습이었다.
"이게 월인, 달빛 칼날이다. 이걸 네게 내기의 대가로 미리 빌려
주겠다. 네가 이기면 아주 네것이 되는거고, 지면 물론 다시 돌려받
는다."
용유진은 고개를 저었다.
"이러면 정말 노인장이 손해보는 장사일텐데요? 제겐 더 걸 물건
이 없습니다."
공손조덕은 웃었다.
"괜찮으니 손바닥을 내놔라. 내기는 이제 네가 아니라 이놈들과
걸겠다."
용유진이 머뭇거리며 손바닥을 내밀자 공손조덕은 월인이 튀어나
와있는 손바닥을 그의 것에 마주 대었다. 서릿발 같은 차가운 기운
이 용유진의 손바닥으로 파고들었다. 비명을 지르려 하다가 겨우 참
았지만 실제로 비명을 지르려 했어도 지를 수도 없었다. 용유진의
반신은 금세 얼음덩이처럼 굳어져갔다. 그의 얼굴이 파랗게 변색하
고 있었다.
고목이 놀라 경호성을 터뜨렸다.
"미친 놈, 어린애에게 바로 찔러주면 어쩌자는 거냐?"
공손조덕은 웃음을 잃지 않았다.
"네가 하나 내놓으면 될 것 아니냐. 그게 내기 조건이다."
"미친 놈 내가 언제 너랑 내기 하자고 했더냐!"
욕설을 퍼부으면서도 고목은 팔찌중 하나를 풀어 용유진의 팔목에
채워주었다.
"하는 수 없군, 제일 쓸모없는 놈으로 주지. 흑오다."
이번에는 용유진의 반대쪽 몸이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월인
은 극음(極陰)의 물건, 흑오는 태양 속에 산다는 전설의 까마귀에서
이름을 딴 그대로 극양(極陽)의 물건이기 때문이었다. 독문의 내공
을 익혀 그 힘을 제어할 수 있는 공손조덕과 고목대사의 몸에서는
별 이상이 없는 물건들이었지만 받아들일 능력이 없는 용유진의 몸
에서는 흉기로 찌른 것이나 마찬가지의 결과를 보이고 있었다. 세숫
대야에 우물물을 통째로 붓는 셈으로 넘치는 힘을 용유진의 육체가
견뎌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용유진은 잠시동안은 붉게 달아올랐다가 다시 잠시동안은 파랗게
식어버리곤 하며 극도의 고통 속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나마 죽지
않고 있는 것은 양쪽에서 공손조덕과 고목이 진기를 불어넣으며 균
형을 맞춰주고 있기 때문이었다.
"젠장, 이게 무슨 꼴이야!"
고목은 연신 투덜거렸다. 대단한 힘은 아니었지만 공손조덕이 용
유진을 통해서 보내오고 있는 힘에 대항해서 끊임없이 진기를 불어
넣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한 순간이라도 진기를 멈추면 그야 상관없
겠지만 용유진은 죽어버리고 말 것이었다.
"대책도 없이 이런 일을 벌이다니. 어떻게 좀 해봐라 이 강시야!"
공손조덕은 여전히 여유를 잃지 않고 있었다. 그는 마치 이런 일
을 애초에 기대하고 일을 벌린 것같은 태도였다.
"보채지 마라, 땡초야. 여기 생사판만 손을 쓰면 간단히 해결될
일이다."
"강시, 이 교활한 늙은이. 애초에 이걸 노리고 일을 벌였군. 생사
판 네 녀석도 구경만 하지 말고 손 좀 써봐!"
생사판은 그러나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불만 쑤시면서 담
담히 구경할 뿐이었다.
"내가 왜?"
생사판이 말했다.
"내가 왜 이 꼬마를 도와야 하는 거지?"
공손조덕이 말했다.
"너도 내기에 참여하라는 거다."
생사판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내가 왜 내기에는 참여해야 하나? 난 내기 따위에는 흥미가 없
다."
"월인을 네게 주겠다. 그래도 흥미가 없나?"
생사판이 잠시 침묵을 지켰다. 공손조덕의 제의를 생각해보고 있
은 것 같았다.
"자세히 듣고싶군."
공손조덕이 설명했다.
"나는 이 꼬마가 십년 후에 무림십대 고수의 하나가 되느냐 안 되
느냐를 놓고 내기를 걸었다. 물론 이 꼬마가 안된다는 쪽에 걸었지.
내기의 대가는 월인과 월환, 월령이다. 꼬마가 이기면 셋 다 줄 것
이다. 그러나 지면 아무 것도 주지 않는다. 물론 빌려준 월인과 월
령도 빼앗는다."
"노림수가 많은 내기군. 어떻게 해도 너는 손해를 보지 않는 셈이
구나."
보통은 공손조덕이 손해를 보는 내기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생사
판도 고목과 마찬가지로 공손조덕이 무조건 이득 보는 내기라고 평
가했다.
"게다가 너는 이미 월인을 이 꼬마와의 내기에 걸었는데 어떻게
또 나와의 내기에도 걸겠다는 거냐?"
고목이 소리쳤다.
"그러게 말이다. 너는 이미 내기에 건 물건은 다시 내기에 걸 수
없다는 도박판의 규칙도 모른단 말이냐? 그리고 월인을 저 자객놈에
게 주면 내겐 뭘 주겠다는 거냐. 이 내기는 무효다. 난 안할테다."
금방이라도 손을 뗄 것같이 하는 고목에게 공손조덕은 머리를 가
로저어 보였다.
"내게 방법이 있지. 너희들과는 역으로 내기를 걸겠다."
"그건 또 무슨 소리냐?"
생사판도 물었다.
"설명을 듣겠다."
공손조덕은 찬찬히 설명을 했다.
"너희들이 보기에는 이 아이가 십년 후에 십대고수의 반열에 오를
것 같나?"
고목이 즉시 대답했다.
"아니! 그건 불가능하다!"
그는 그 이유를 말했다.
"당금 십대고수 중에 서른이 되기 전에 십대고수의 칭호를 받은
것은 강시, 너밖에 없다. 강시당의 후계자로 태어나 모친의 뱃속에
서부터 숱한 영약과 대법으로 단련된 데다가 다섯 살이 되기 전에
이미 내가기공을 익히기 시작했겠지. 게다가 강시당의 독문심법인
고루마공( ?魔功)은 천하구대극품기공(天下九大極品氣功) 중에 하
나야. 같은기간을 연마해도 남보다 몇 배의 효과를 얻는단 말이다.
그런 혜택에, 좋은 무공에, 천부의 자질까지 갖추고 단련을 받은 녀
석과 이 돌보지 않은 잡초같은 녀석이 경쟁이 될 리가 없어. 당연
불가능이다."
공손조덕은 생사판을 향해 물었다.
"네 생각도 같은가?"
생사판은 천천히, 신중하게 대답했다.
"안될 가능성이 더 높겠지."
공손조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다. 그럼 너희 둘은 안된다는 쪽에 걸어라. 나는 된다는
쪽에 걸겠다."
"그건 또 무슨 헛소리냐? 이미 안된다는 쪽에 걸었으면서!"
"그건 이 아이하고의 내기에서였지. 너희들과는 역으로 걸겠단 말
이다."
"그런…?"
"이 아이가 만약 십대고수 중 하나가 된다, 혹은 십대 고수중 하
나를 이긴다면 나도 지고, 너희도 지는거다. 나는 이 아이에게 졌으
니 월인, 월환, 월령을 다 넘겨주면 그만이다. 너희도 졌으니 대가
를 지불하면 되겠지?"
"만약 안된다면?"
"만약 이 아이가 안 된다면 나는 이 아이에게는 이기지만 너희에
게는 진다. 그럼 월인, 월환, 월령 모두를 돌려받아서 너희에게 내
기의 대가로 주면 그만이다. 어떠냐, 문제 없지?"
고목과 생사판은 잠시 말이 없었다. 공손조덕의 말이 과연 옳은지
생각하는 것이다. 한참 후에야 고목이 말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너는 이기든 지든 월인, 월환, 월령을 포기하
겠다는 말이로군. 왜? 너무 오래 가지고 있어서 지겨워졌나?"
"그 말대로다."
공손조덕은 다시 미소를 지었다.
"내 나이 이제 예순, 십년 후면 칠십이다. 너희들같은 괴물들과
다투기에도 진력이 났다. 십년 후엔 손 씻고 산에 들어가 수도나 하
고싶은게 내 심정이다. 그러니 월환이든 뭐든 아무거나 가져가 버려
라."
고목이 눈을 끔벅거리더니 코웃음을 쳤다.
"월환? 시체 부리는 종따윌 가져서 뭐하랴. 내가 이기면 난 월령
을 갖겠다. 그쪽이 난 여러모로 좋아."
그는 월령을 달고있던 소녀의 시체 쪽을 보면서 혀를 내밀어 탐욕
스럽게 입술을 핥았다.
공손조덕이 잠시 이맛살을 찌푸리더니 이내 다시 폈다.
"그것도 좋겠지. 자 그럼 자객, 너는? 월인이냐, 월환이냐?"
생사판은 고개를 저었다.
"나는 아직 내기를 한다고 하지 않았다. 확인할 일이 더 남아 있
으니까."
그는 손을 들어 손가락을 꼽아 보였다. 마치 나병 환자처럼 검은
천으로 감아놓아 공포스러운 느낌을 갖게 하는 손가락이었다.
"첫째, 저 녀석이 십 년이 되기도 전에 죽어버리면 어쩌지? 가령,
내가 내일이라도 당장 죽여버리면? 그래도 내가 이기나?"
공손조덕이 대답했다.
"너나, 나나, 혹은 이 땡초는 이 아이에게 오늘 건네주는 것 외에
는 아무런 도움도, 아무런 위해도 가하지 않는 걸로 하지. 만약 누
가 손을 댔다면 그가 지는 거다. 나는 너희들이 스스로의 눈에 모든
것을 걸었다고 믿고싶다. 나는 정말 이 아이의 미래가 궁금한 거다.
누군가가 끼어들어서 내 즐거움을 망쳐놓으면… 흐흐흐."
그는 다시 웃었다. 역시 음충궂은, 그러나 아까까지의 웃음과는
달리 살기가 짙게 깔린 웃음이었다.
"약속하지. 우리의 오랜 싸움도 거기서 끝날 것이다."
생사판은 두 번째 손가락을 접었다.
"가장 중요한 것인데, 네가 월인을 걸면 난 뭘 걸어야 하는거냐?
난 너처럼 이 내기에 크게 의미를 두지 않으니 월인과 같은 가치를
지닌 것은 걸기 싫다. 그런 걸 걸라고 하면 난 빠지겠다."
고목이 비웃었다.
"흥, 쩨쩨한 놈. 나도 흑오를 걸었는데, 물건이 아까워 내기를 안
걸겠다는 거냐?"
"너도 마찬가지다 땡초야. 흑오 하나에 월령과 맞먹는 가치가 있
다고 생각하지는 않겠지?"
상관조덕은 가볍게 핀잔을 주고는 결론을 내렸다.
"땡초는 만약 내가 이기면 이 아이에게 나머지 셋 중에 하나를 더
줘야 한다. 자객, 너는 지금 한 가지만 이 아이에게 가르쳐 주면 된
다. 천마호심결(天魔護心訣)이다."
생사판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희미하게 웃었다.
"본전을 내놓으라는 거군. 그건 월인보다 결코 가치가 작지 않
아."
상관조덕도 마주 웃었다.
"네 본전은 그게 다가 아니야. 게다가 그건 월인보다도 훨씬 가치
가 작다. 넌 그걸 깨는 방법도 알고 있을 테니까."
생사판은 용유진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들이 다투는 동안에 용
유진은 거의 초주검이 되어 있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나 용유진의 등뒤에 섰다. 그리고 손을 내밀었다. 손에 감긴 천
들이 순간적으로 풀어져 흩어졌다. 그리고 검게 번들거리는 맨손이
나타났다. 거의 뼈만 남은 손, 푸르스름한 인광(燐光)마저 발산하고
있는 손이 용유진의 등을 찍었다.
생사판이 소리쳤다.
"자, 들어라, 꼬마야! 난 두 번 말하지 않는다!"
그 다음은 조용했다. 그는 용유진만이 들을 수 있도록 전음으로
천마호심결의 구결을 전해주고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주문이 용유
진의 머릿속으로 파고 들었다. 용유진은 한 손에는 극음의 한기를,
다른 손에는 극양의 열기, 게다가 머리는 빠개지는 듯한 고통 속에
서 천천히 혼절했다.
억겁과도 같은 긴 시간이 흐른 후에, 사실은 극히 순간적으로 혼
절했다가 용유진은 다시 정신을 차렸다. 생사판은 제 자리로 돌아가
있었다. 고목도, 공손조덕도 그의 손을 놓고 불 가에 앉아 있었다.
공손조덕이 물었다.
"기분이 어떠냐?"
용유진은 혼란스러운 생각을 정리하며 앉아 있다가 되려 물었다.
"도대체 죽은 언제 먹는겁니까?"
죽은 마지막 손님이 와야 먹을 수 있었다. 사이 중의 마지막 한
사람, 북신(北辰) 상관대부(上官大夫)가 마지막 손님이었다. 그리고
그는 용유진의 질문이 나오자 마자 바로 나타났다.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그러나 도저히 그럴 수는 없는 상태에서
그는 환상처럼 갑자기 허공에 가마를 타고 나타났다.
가마는 고목의 남여보다 큰 사인교(四人轎), 네 사람이 드는 것이
었다. 그러나 가마꾼은 보이지 않았다. 아무도 들지 않는데도 허공
에 떠있는 가마, 그 위에 북신은 금관조복(金冠朝服)을 입고, 양손
을 모아 홀(笏)까지 들고 정좌하고 있었다.
귀까지 닿을 정도로 긴 눈썹에 세 갈래로 갈라진 긴 수염을 드리
우고 있는 노인, 이것이 북신의 모습이었다.
용유진이 듣기로는 북신이란 곧 북극성(北極星)의 다른 이름으로
스스로는 움직이지 않아도 뭇 별이 그를 중심으로 돈다는 말처럼 그
자신은 거의 강호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이십팔수(二十八宿)라 불
리는 수하들을 통해서 거의 모든 일을 처리한다고 했다. 그런데 오
늘 이 자리에 직접 나타난 것이다.
사인교가 천천히 불 가에 내려 앉았다. 상관대부는 홀을 소맷자락
에 집어 넣고 정좌를 풀었다. 조금도 서두르지 않는, 우아한 몸가짐
이었다. 그러나 그 우아한 몸가짐으로 제일 먼저 한 일은 솥 안을
들여다 보는 것이었다.
죽은 끓은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눌거나 식지 않고 여전히 김을 뿜
어내며 끓고만 있었다. 무얼 넣었는지 연노란 색으로 보글거리는
죽, 상관대부는 새끼손가락에만 길게 자란 손톱을 솥에 넣어 죽을
좀 뜨더니 맛을 보고 입맛을 다셨다.
"아이들이 길을 잘못 들어서 좀 늦었네. 기다리지 말고 먼저들 드
시지 그랬어? 그만 먹세 그려."
고목이 아뭇소리 않고 그를 바라보고 있다가 문득 입을 열었다.
"왜 잊고 있었을까? 나는 여자 장사보다도, 자객보다도, 시체 몰
이꾼보다도 더 더러운 직업이 하나 있다는 걸 이제야 기억해냈다."
그와 공손조덕, 심지어 냉정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생사판까지도
입을 모아 외쳤다.
"탐관오리(貪官汚吏)!"
그때까지 새끼 손가락 손톱을 빨고있던 상관대부는 한가로운 웃음
을 지었다.
"성현 말씀에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르고, 욕은 높은 곳에 모인다'
고 하셨지. 관리도 힘든 직업이긴 하군. 아무 잘못도 없는 청백리
(淸白吏)가 탐관오리라고 불리는 걸 보면 말일세."
고목이 코웃음을 쳤다.
"청백리가 어디 가서 다 물에 빠져 죽으면 상관 오리(汚吏)가 청
백리라 불릴 날이 있을 지도 모르지. 일하는 건 못 봤지만 이런 음
침한 밤에 이런 음침한 곳에 나타난다는 것만 봐도 제대로 된 관리
가 아닌 건 분명해. 하는 짓을 봐, 또 얼마나 음침하게 나타나냔 말
이야."
상관대부는 손가락을 들어 가볍게 저었다. 어이없다는 표시였다.
"이런 곳에 부른 사람이 누군데 왔다고 타박이란 말인가? 나도 어
지간하면 경사의 어디 분위기 좋은 다루(茶樓)에서 놀고싶지 이런
곳에서 누굴 만나기는 싫은 사람일세. 옷 꼴을 보게나. 퇴궁(退宮)
하고는 갈아입지도 못하고 허둥지둥 달려오느라 이 꼴일세. 일이 끝
나면 또 밤을 도와 가야할 판이야."
고목이 용유진의 귓가에 입을 가까이 하고는 말했다.
"너도 들어봐서 알겠지만 저게 말이 되는 소리라고 생각하느냐?
경사 순천부에서 여기까지 세 시진만에 달려왔다는 말인데, 정말 터
무니 없지. 여기 있는 네 사람 중 네가 정말로 조심해야 할 사람은
물론 나 빼고는 전부지만 그 중에도 특히 저 상관 오리는 각별히 경
계해야 할 것이야. 내가 '정직한 말은 한 마디도 않는 고목'이라지
만 저 상관 오리야 말로 '입만 벌리면 거짓말을 하는 상관 오리'라
는 말로 유명하지."
귓속말이라고 한 것이지만 그 소리는 너무 커서 모두의 귀에 또렷
이 들릴 정도였다.
상관대부가 혀를 찼다.
"없는 말을 지어내고, 있는 일은 왜곡해서 전달함으로써 사람을
해치는 것이 네 장기인줄은 안다마는 직접 보니 그 폐해가 심하기
짝이 없구나. 오늘 처음 본 아이에게 내가 왜 흰소리를 하며, 그 아
이가 나를 경계할 이유는 또 어디에 있단 말이냐?"
고목이 간단하게 대답했다.
"내기 때문이지."
"내기? 무슨 내기?"
상관대부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고목이 잔뜩
인상을 썼다.
"숨어서 다 들은 줄 알고 있어. 입 아프게 만들테냐?"
"무슨 소린줄 모르겠군. 나는 나라의 녹을 받는 관리로써 율(律)
이 규제하는 바 큰 돈이 걸린 내기는 절대로 해선 안 되는 몸이다.
그런 내가 무슨 내기를 했다는 건가?"
그쯤 나오자 고목도 믿을 수밖에 없는 것 같았다.
"음… 정말 모르나? 그럼 새로 다 설명을 해야 하잖아."
"그럴 필요 없다."
공손조덕이 손을 저었다. 그는 어느새 몇 개의 그릇과 수저를 준
비하고 있었다.
"죽이란 다 끓은 뒤에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시간이 너무 짧아. 지
금 바로 먹지 않으면 다들 실망할 게다. 간단히 결론 짓고 죽이나
먹도록 하지."
그는 그릇에 죽을 퍼서 상관대부의 면전에 내밀고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상관대부, 자네 조건은 아무 것도 않는 것으로 하지. 나는 월환
을 걸겠다."
상관대부가 손을 내밀어 죽그릇을 쥐었다. 그러나 공손조덕이 놓
지 않아 서로 그릇을 쥔 채 대치하는 것같은 형국이 되어 버렸다.
"아무 것도 않는다?"
"그렇다. 아무 것도 않으면 된다. 저 아이에게 어떤 위해도 주지
않고 그냥 두고 본다고 약속만 하면 자네도 내기에 참가하는 걸로
하겠다."
"그건 내게 너무 유리한 조건 아닌가?"
"절대 자네에게 불리하지 않아. 월환과 강시당은 쓸모 없는 존재
가 아니야. 져도 본전이고, 이기면 월환과 강시당일세. 어때?"
"다른 친구들 생각은?"
고목은 상관대부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다가 불쑥 소리쳤다.
"천하의 상관대부는 그냥 가만히 있어도 값어치가 나가지. 아니,
가만히 있는 게 값어치가 나간다는 게 옳겠군. 상관대부가 끼면 되
는 일이 없으니까 말이야. 난 강시가 제시한 조건에 불만 없네."
생사판도 짧게 말했다.
"나도 좋아."
그들을 쳐다보지도 않고있던 상관대부가 그제야 슬며시 웃었다.
"좋아, 그럼 하는 걸로 하지. 그릇이나 내놓게. 배고파 죽겠네."
용유진은 어이가 없어서 한참이나 상관대부의 얼굴을 보았다. 얘
기가 돌아가는 걸로 보아 '입만 벌리면 거짓말을 하는 상관 오리'라
는 말이 근거 없는 모함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기의 내용을 숨어서 듣고 있었던 것도 사실인 듯했고, '유리하다'
는 말도 사실은 '불리해서 안한다'는 뜻으로 한 말이라는 것도 분명
했다.
그는 도대체 이 네 사람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다
는 생각을 했다. 서로 농담을 주고받는 걸 보면 허물없이 지내는 사
이같아 보였지만 그 농담이 하나같이 뼈가 숨어있는 것이라고 생각
하면 불구대천지 원수같기도 했다. 게다가 아까 공손조덕은 이들 괴
물과 더 이상 싸우고 싶지 않다고까지 표현하지 않았던가. 그는 이
들 네 사람 사이에는 세상이 모르는 무언가 대립같은 것이 있는 것
이 아닌지 추측해 보았다. 만약 그렇다면 오늘의 모임에도 심상치
않는 내력이 있을 것이고, 그를 둘러싸고 벌이는 장난같은 내기에도
이유가 있을 것이다. 죽 한 그릇 먹기위해 모였다가 우연히 내기를
하게 되었다고는 믿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그에게도 죽그릇이 왔다. 정말 오랜 기다
림 끝에 먹게되는 죽 한 사발이었다.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말을 채 끝내지도 않고 그는 바로 한 숟갈을 퍼서 입에 넣었다.
그리고는 형언할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죽은 지독하게도 맛이 없고, 용암처럼 뜨거웠다. 아무리 배가 고
파도 먹을 수 없는 종류의 음식이었다. 용유진은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에 눈물 콧물을 흘리며 죽은 삼키지도 못하고 다른 사람을 보았
다. 놀랍게도 고목, 생사판, 상관대부는 천하진미라도 맛보는 것처
럼 허겁지겁 죽을 퍼먹고 있었다.
"최근 십년래에 이렇게 맛있는 죽은 처음일세."
상관대부의 말이었다.
"공손 강시가 이번엔 신경 좀 썼군."
고목의 감탄이었다.
공손조덕은 스스로는 먹지 않고 다들 먹는 구경만 하다가 죽을 비
우면 새로 퍼주고 있었다. 그가 용유진을 보며 만면에 미소를 띠고
말했다.
"어떠냐? 모자랄 것 같으면 말해라. 얼마든지 더 주마."
용유진은 눈을 딱 감고 입 속의 죽을 목구멍으로 넘겼다. 그냥 입
속에 뒀다가는 혀가 타 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게 실
수였다. 죽은 목구멍을 따라 가슴을 지나고 명치께까지 천천히 흘러
갔다. 그 궤적이 용유진에게는 눈에 보일 듯 잡혔다. 용암 한 덩이
가 몸속에 흐르고 있으니 모를 수가 없었다.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같은 고통에 시달리는 그에게 공손조덕이 다
가섰다.
"힘이 없어 숟가락질도 제대로 못하는군. 내가 먹여주마."
용유진은 필사적으로 눈을 뜨고 손을 저었다. 공손조덕의 태도로
보아 억지로라도 먹이려는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갑자기 뒷덜미를
후려쳤기 때문이었다. 억지로 먹다 죽느니 차라리 스스로 먹는 것이
모양이 좋을 것이다. 그런 이상한 오기가 발동해서 용유진은 다시
숟가락을 쥐고 그릇째 입에 대고 퍼 넣었다.
처음보다는 나을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죽은 조금도
식지 않았고, 맛도 나아지지 않았다. 용유진은 그대로 천천히 뒤로
넘어갔다. 죽 한 그릇을 먹고 기절하는 것은 용유진의 생애에 이것
이 유일한 경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