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용유진, 월인(月人)을 만나다.
1.
용유진이 산을 내려온 것은 어둠이 하늘을 가리고 대지를 덮은 이
후였다. 여름인 탓에 길옆의 논에서는 개구리가 울고, 멀리서 밤새
소리가 들려왔다. 그 길을 그는 터벅터벅 걸었다. 기다리는 사람이
없으니 바쁠 것도 없고, 갈 곳이 없으니 길을 잃을 염려도 없었다.
아무리 어두워도 발만 헛디디지 않고 걸어가면 그만이었다.
"그래도 어딘가에서 자긴 해야 할텐데…."
마음의 통증으로 잊고있던 육신의 고통이 피로에 밀려 조금씩 스
며 나오기 시작했다. 현판을 쥔 손이 욱신거리고 얼굴과 몸의 상처
도 다시 따끔거렸다.
생각해보면 집으로 돌아와서도 표행 후의 처리 때문에 제대로 쉰
적이 없었다. 치료도 그날밤의 그 복면인들에게 받은 것이 전부였
다.
복면인들에게 생각이 미치자 용유진의 눈이 빛을 발했다. 그들의
정체는 대단히 궁금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분명 풍도십삼호를 노리고 우리에게 표물을 맡겼을 거야."
생각해보면 너무나 뻔한 일이었다. 일종의 음모에 걸려 비룡표국
은 망한 것이다.
그러나 용유진에게는 그들을 원망하는 마음이란 조금도 없었다.
어차피 아버지도 그런 위험은 알고서 맡은 일이었다. 대신 보수가
보통의 다섯 배나 되지 않았던가. 암표는 어차피 그 내용과 내력에
대해 묻지 않고 맡는 것이고, 위험은 항상 따르게 되어 있는 일이었
다. 이런 일, 이런 결과에 대해 원망할 사람이 있다면 도적보다 약
한 그들 자신밖에 없었다.
그러니 용유진이 그들의 정체에 관심을 갖는 것은 복수를 위해서
가 아니었다. 단지 그렇게 강한 세력이 어디일까 하는 궁금증때문이
었다.
몇 십 명으로 몇 백 명을 죽일 수 있을 정도로 강한 구성원, 그러
면서도 풍도십삼호같은 도적을 노렸다는 것. 가장 간단히 생각하면
도적을 소탕하려 한 관군(官軍)이나, 아니면 그 반대로 풍도십삼호
의 영역을 빼앗으려 한 또다른 도적들 정도였지만 두 가지가 다 가
능성이 없었다. 관군이 그렇게 강할 리가 없고, 도적이 그렇게 강할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아무러면 어때."
용유진은 피곤한 눈을 들어 하늘을 보았다. 별조차 보이지 않는
어두운 밤이었다. 발목에 스치는 풀잎이 보통보다 젖어있고, 얼굴까
지 축축해질 정도로 안개가 올라오는 것으로 보아 곧 비가 내릴 것
같았다.
어둠은 문제가 아니었지만 비가 내리면 그건 좀 문제가 되었다.
이대로는 야숙도 못할 것이다.
"잘 곳을 찾아야 하는데…."
청주성까지 낮에는 한 시진 거리였지만 밤에는 그 두세 배의 시간
이 걸린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찾아가 보아야
성문을 열어줄 리도 없고, 들어가 봐야 갈 곳도 없었다. 그러니 부
근에 농가, 하다못해 무너진 폐가라도 있다면 거기에서 쉬는 것이
상책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걸어도 불빛 하나, 폐가의 기왓장 하나 보이지 않
았다.
"최악이군!"
낮에 그가 온 길로 따라가면 이렇게 집이 없을 수가 없었다. 아마
도 산을 내려 오면서 어두운 탓에 길을 잘못 든 모양이었다. 어쩌면
그는 벌판으로 향하고 있을 지도 몰랐다.
급기야 비가 내렸다.
"정말 최악이군."
용유진은 들고있던 현판을 머리에 이어 비를 그으며 터덜터덜 걸
었다. 낮에 다 쏟은 줄 알았던 눈물이 다시 솟구치려 했다.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 처량한 신세가 되어버린 것이다.
천지가 갑자기 청색으로 밝아졌다.
꽈르릉- 꽝-!
천둥은 한참 지나서야 때렸다. 빗줄기가 굵어지며 발밑에서 물이
튀어 오르기 시작했다. 현판으로 가려봤자 이제는 꼼짝없이 물에 젖
은 생쥐 꼴이 될 참이었다.
다시 천지가 밝아지고 천둥이 때렸다. 용유진의 눈빛이 잠시 밝아
졌다. 방금 내려꽂힌 번개의 빛줄기 너머로 집같은 형체가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잠시 서서 다음 번개를 기다렸다. 과연 집 한 채가 저만치
산등성이에서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는 현판을 머리에 인 채 그 집
을 향해 달려갔다.
집은 집이었지만 폐가였다. 그것도 묘당(廟堂)의 폐가였다. 한때
는 꽤 번창한 묘당인 듯 담장도 있고, 건물도 여럿이었던 모양이었
다. 그러나 지금은 반쯤 무너져 흙덩이로 변해가고 있었고, 온전하
게 보이는 곳도 지붕이 무너져 비가 들이치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중앙의 본전(本殿)은 제법 형체를 유지하고 있었다. 용유진은 그 안
으로 뛰어들었다.
"천천히 다녀라!"
의외였다. 방안에는 이미 선객이 있었다. 그것도 여럿이었다.
"죄송합니다."
용유진은 문간에 서서 방 안을 둘러보았다. 꽤 넓어서 몇 십명이
들어갈 수 있을 듯한 방의 전면에는 모셔지던 신이 누구인지 몰라도
대좌가 남아 있었고, 방 안 한가운데에는 모닥불이 피워져 있었다.
그리고 모닥불 위에는 돌로 만든 받침 위에 솥 하나가 얹혀 있었다.
솥 안에서는 정체는 알 수 없지만 분명히 먹을 수 있는 것인 그 무
언가가 끓고 있고, 그리고 한 사람이 앉아 솥안의 그 무엇인가를 젓
고 있었다.
용유진이 지금 극도로 시장하긴 했지만 그의 관심을 끈 것은 솥
도, 그 솥안의 무엇인가를 젓고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의 시선은
방 한쪽 벽을 따라 나란히 서있는 여러 사람에게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았다.
"시체(屍體)?"
검정색 수의(壽衣)를 입고, 검정 모자를 쓰고 얼굴에는 붉은 글씨
적힌 부적을 붙였다. 손 발은 마를 꼬아 만든 밧줄로 묶여 있었다.
관에 넣을 때의 모습 그대로인 시체들이 그렇게 벽에 나란히 기대어
서 있는 것이다.
솥을 젓고있던 사람이 용유진을 힐끗 바라보았다. 붉고 푸른 천을
조각조각 오려붙여서 만든 것같은 옷을 입고, 머리에는 어울리지 않
게도 황금색으로 칠한 나무 관(冠)을 쓰고 있었다. 그 아래 머리카
락은 지저분한 회색이었고, 온 얼굴에는 거미줄처럼 갈라진 주름살
이 깊이 새겨져 있었다. 강시보다 오히려 더 공포스러운 얼굴이었
다. 주름살에 가려져 잘 안 보이던 그의 입이 슬쩍 벌어지며 누런
이를 보였다.
"너도 죽으면 저렇게 될텐데 뭘 그리 놀라나?"
"시체 때문에 놀란 게 아니라…."
용유진은 생각했다. 시체는 움직이지 못하고, 사람을 해치지도 못
하니 놀라고 두려워 할 것이 아니다.
"있어야 할 곳이 아닌 곳에 저런 것이 있으니 잠시 당황한 것뿐입
니다. 불가에 앉아도 될까요?"
"편할대로 하려무나."
노인은 아무렇게나 손을 저었다. 그러더니 용유진이 현판을 벽에
기대어 두고 불가에 앉는 것을 보고는 다시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
었다.
"있어야 할 곳이 아닌 곳에 이상한 물건을 들고 온 건 너도 마찬
가지구나. 그건 뭐냐?"
용유진은 잠시 망설이다가 불쑥 대꾸했다.
"제 밥줄입니다."
"밥줄이라…."
노인은 현판에 쓰여진 글자를 힐끗 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간판 따윈 어지간히 유명하지 않고는 밥줄이 안되는 거다. 내가
보기에 너는 매우 도움이 안되는 밥줄을 움켜쥐고 있구나."
용유진은 얼굴을 붉혔다. 여러 말로 설명하기 싫어서 대충 대답한
것이었는데 이렇게 핀잔을 당하고 나니 자존심이 상한 것이다.
"곧 다른 어떤 것보다도 더 도움이 될 겁니다. 제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요."
"무슨 방법으로?"
노인은 심심했던 모양이었다. 용유진의 말꼬리를 붙잡고 늘어져서
계속 얘기하고 싶어하는 티가 역력했다. 용유진도 별로 싫진 않았
다. 혼자 남겨진 고독을 절감한 하루였던 때문인지 처음 보는 사람
과 대화를 한다는 것이 그리 어색하지 않았다. 단지 대답할 말이 별
로 떠오르지 않아 퉁명스럽게 대꾸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든지요."
"어떻게든이라…, 좋은 말이지. 어떻게든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말은 반박할 방법이 별로 없는 말이다. 그러면서도 나중에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는 말중 하나지. 어떻게든 했지만 어쩌다가 안 됐다
고 하면 그만이니까."
용유진은 다시 얼굴을 붉혔다. 이 괴상한 노인네는 남의 약점을
물고 늘어지기 좋아하는 못된 성질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
사람에게 사정없이 약점을 잡히는 스스로를 원망해야 할 판이었다.
자연 말이 퉁명스럽게 나갔다.
"제가 노인장에게 책임질 일이란 없을 테니 걱정 마시죠. 그리고
전 어떻게든 한다면 할겁니다. 아직은 제 말을 어긴 적이 없으니까
요."
"아직은이라…. 나중에, 한 이삼십년 후에까지 그러면 몰라도 네
나이로는 그런 말을 하면 건방지단 소리를 듣는 거다, 애야. 세상엔
자기 입에서 나온 말을 제대로 주워담는 사람이란 정말 드물거든."
"노인장은 어떤 사람입니까? 흔한 쪽인가요, 아니면 드문 쪽인가
요?"
"흐흐흐…, 이 월인(月人) 공손조덕(公孫祖德)에게 그런 걸 묻는
사람은 오랜만에 보는구나. 정말 건방진 꼬마야. 흐흐흐."
'월인, 월인이라고? 어디선가 들은 이름인데….'
용유진이 기억을 더듬고 있는 동안 자칭 월인이라 밝힌 노인은 아
까의 대답을 하고 있었다.
"나야말로 신용 하나로 살아온 사람이지. 이 장사를 시작한 이후
로 단 한 번도 기일을 어긴 적도, 실패한 적도 없었다. 내가 모월
모일까지 날라다 준다면 주는 거야. 하늘의 귀신에게도 땅의 사람에
게도 아직 말을 어긴 적이 없어. 내 밥줄이 그거거든. 흐흐흐, 밥줄
은 소중한 것이지. 끊어지지 않게 잘 붙잡고 있어야 하는 거야. 간
판 따위가 아니라 능력으로 쌓은 신용이 바로 밥줄이라는 거다."
"노인장이 하는 장사가 뭔데 그러십니까?"
"이거."
월인 공손조덕은 벽에 기대어 선 시체들을 가리켰다.
"그거라면…, 혹시 구시술(驅屍術)?"
용유진은 문득 깨달았다. 월인 공손조덕이 한다는 일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가 누구인지도.
"노인장이 강호에 유명한 바로 그 강시당(疆屍堂)의 주인이시군
요."
구시술은 시체를 부리는 술법을 말하는 것이다. 강호에는 시체를
전문적으로 처리하는 직업이 있어서 염습(殮襲)과 장의(葬儀)를 대
행할 뿐 아니라 객사한 시체를 고향으로 옮겨주는 일도 한다고 했
다. 그런데 이 넓은 땅덩어리 구석에서 다른 구석까지 옮기려면 오
랜 시간이 소요될 때도 있는데, 시체는 부패하기 쉬우니 그 시간을
기다릴 수가 없게 된다. 그래서 시체에 방부처리를 해서 부패하지
않게 할뿐 아니라 아예 술법을 써서 움직이게 만든 다음 묻힐 곳까
지 걸어가게 하는 것이다. 이것을 구시술이라 부르며, 이 직업을 지
닌 사람들 중 가장 유명한 집단이 산서(山西)의 명문, 강시당이었
다. 그리고 당대 강시당의 주인이 월인 공손조덕이었다. 밤에만 다
닌다고 해서 월인, 그리고 달 아래에서는 가장 강하다는 무인(武人)
이 그였다.
공손조덕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 이름을 들은 적이 있나 보군. 그래, 내가 공손 늙은이다. 흐
흐흐."
공손조덕의 이름을 못 들었다면 무림인이 아닐 것이다. 당금 무림
에서 가장 강하다는 십대 고수중 한 사람, 일월성신(日月星辰)이라
묶어서 불려지는 네 고수중 하나가 바로 월인 공손조덕이기 때문이
었다.
용유진이 듣기로는 십대고수 중에 사이(四異)가 있는데, 이들의
별호에 일월성신의 네 자가 들어있다고 했다. 바로 일승(日僧), 월
인(月人), 명성(冥星), 북신(北辰)이 그들이었다. 하나같이 괴짜고,
하나같이 고유의 영역을 지키고 있는 인물들.
예를 들어 일승은 파계승으로 극락전(極樂殿)이라는 이름의 기루
(妓樓)를 경영하고 있고, 월인은 구시술을 쓰는 장의사(葬儀社)인데
강시당의 주인이기도 했고, 명성은 자객(刺客)이면서 동시에 생사교
(生死敎)라는 종교 집단의 교주였다. 그리고 북신은 어딘가의 관리
(官吏)라고 했다. 보통의 무인이 한 문파나 단체에 소속되어 직업이
라 할만한 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데, 이들 네 명은 직업이 확실한,
강호인으로 봐서는 특이한 인물들인 셈이었다.
"노인장이시라면 그런 큰 소리를 치실 수도 있겠군요. 하지만 어
린아이가 하는 말이라고 해서 항상 큰 소리만은 아닙니다. 살아보기
전에는 모르는 거니까요."
월인 공손조덕이 아무리 세상을 떨어 울리는 대단한 위명을 가지
고 있다해도 용유진은 기죽어 보이긴 싫었다. 여태까지 퉁명스레 대
하다가 유명한 인물이고, 고수라고 해서 태도를 바꾼다는 것은 어쩐
지 비겁하다고 생각한 탓도 있었다.
손가락 하나만 움직여도 용유진을 죽여버릴 수도 있을 인물, 공손
조덕은 그런 그를 괘씸하게는 보지 않는 모양이었다.
"호오, 자신이 만만하군. 하지만 자신만큼의 실력은 있어 보이질
않는걸?"
"노인장은 날 때부터 강했습니까? 나중 일은 모르는 거지요."
공손조덕은 어깨를 으쓱거려 보였다.
"나야 날 때부터 강했지. 나이 여덟에 첫 승리를 한 이후 네 나이
때는 이미 백여 명이 넘게 죽여 그 피를 손에 묻혔고, 일문(一門)의
주인이었을 뿐 아니라 강호의 떠오르는 태양으로 불려졌었다. 흐흐
흐."
"시작이 늦었다고 해서 꼭 나중에 도착하는 건 아닙니다. 제가 십
년 후쯤에는 노인장이 스물 넷에 성취하지 못했던 걸 성취할 수도
있겠죠."
"스물 넷이라…, 내가 그 나이 때는 이미 십대고수의 하나로 그중
제일로 불리워지지 못하고 있는 걸 원통해 하고 있었지. 너도 십년
후에 십대고수 중 하나가 될 수 있단 말이냐?"
용유진은 다시 얼굴을 붉혔다. 이번엔 분해서였다. 공손조덕의 그
와 같은 성취는 정말 놀라운 것으로 지금의 그로서는 어떻게 한다해
도 쫓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무슨 수로 무림십대고수의
하나를 추월해 그 자리를 빼앗을 수 있단 말인가.
용유진은 잠자코 앉아서 씨근덕거리다가 문득 마음을 돌려 생각에
잠겼다. 그가 왜 십대고수 따위의 이름에 연연한단 말인가. 그가 바
라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지 않은가.
"사람이 성취할 수 있는 최고봉이 무림십대고수는 아니겠지요. 그
중 하나가 되었다고 해서 최고의 인간이라는 것은 이상하지 않습니
까. 저는 그런 걸 바라지 않습니다."
"호오, 재미있는 말을 하는군. 가끔은 그런줄 모르고 산다마는 네
말이 공자님 말씀이지. 인간이 성취할 수 있는 것이 십대고수만은
아니고, 무림 최고가 십대고수인 것만도 아니다. 그런데…, 그럼 넌
뭘 바라는 거냐? 뭘 해서 나보다 더 성취했다는 걸 보일 수 있단 말
이냐?"
"제가 노인장보다 더 성취했다는 걸 보일 필요는 또 뭐가 있습니
까? 각자는 각자의 삶을 살면 그만일 것입니다. 애초에 비교할 필요
도 없는 것 아닌가요?"
공손조덕이 갑자기 표정을 굳혔다.
"이 건방진데다 교활하기까지 한 꼬마녀석! 주워들은 말은 많아
가지고 노인을 희롱하는구나. 아까까지는 나보다 나은 사람이 되겠
다고 큰 소리를 쳐대더니 이제는 비교가 되니 안되니 운운하며 발뺌
을 하려 들어?"
"제가 언제…?"
용유진은 펄쩍 뛰었다. 아무리 심심해서 이런다고는 하지만 정말
해도 너무 하는 것 아닌가. 공손조덕은 지금 그에게 시비를 걸고있
는 것으로밖에는 달리 생각할 수 없는 행동을 하고있는 것이다.
용유진은 잔뜩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가 그냥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숙였다.
"제가 잘못 했습니다. 철없는 어린아이의 언동이려니 생각하시고
노여움을 푸십시오."
정중히 사과했지만 공손조덕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오히려 더
굳어졌다.
"너 지금 내가 노망난 노인네라고 생각하는 거냐?"
"그건 또 무슨 말씀…?"
"잘못한 게 하나도 없다는 표정으로 잘못했다고 말하니, 그게 날
말이 안 통하는 노인네라고 생각하는 증거 아니냐. 넌 내가 이 나이
에 햇병아리같은 무림후배를 위협해서 절이나 받자고 이러는줄 아는
거냐, 아니면 너는 고수 앞에서는 그냥 비굴해져서 잘못한 게 없는
데도 잘못했다고 빌고, 상대가 화를 내지 않아도 용서부터 빌고 보
는 겁 많은 병아리에 불과한 거냐?"
'앞에서는 날 보고 병아리라고 단정 짓더니 뒤에서는 다시 병아리
냐고 묻는군. 일월성신 사이는 하나같이 어디가 잘못된 사람들이라
더니 정말 그렇군. 도대체 말이 통하지 않는구나.'
용유진은 아뭇소리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현판을 들고 나가려 했
다. 뒤에서 공손조덕이 불렀다.
"비 아직 안 그쳤다."
용유진은 돌아서서 절하고 말했다.
"제가 있는 것이 노인장 신경에 여러모로 거슬리는 것 같으니 홀
로 명상에 잠기실 수 있도록 비켜드리겠습니다."
나가려는 용유진의 어깨를 누군가가 잡아 당겼다. 저항할 수 없이
큰 힘이었다. 용유진은 그대로 어깨를 잡혀 허공으로 두자쯤 들어올
려진 채 불 가에 끌려와서 다시 앉혀졌다.
"이게 무슨 짓…!"
아무리 무림의 초고수요 까마득한 선배라 해도 이런 행동은 용서
할 수 없다고 화를 내다가 용유진은 입을 벌린 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를 끌고 온 손의 임자라고 생각했던 공손조덕은 여전히
솥안의 죽만 젓고 있지 않는가.
'그럼 이 손은?'
그의 어깨를 잡은 손의 임자는 공손조덕이 아니었다. 벽에 기대어
서있던 시체중 하나의 것이었다.
용유진은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뻔했지만 본연의 자제력을 발휘하
여 그 비명을 목구멍 너머로 삼켰다. 그리고 하던 말을 마저 했다.
"이게 무슨 짓이십니까?"
공손조덕은 의외라는 표정으로 그를 보더니 씨익 웃었다.
"시체가 한 일을 왜 내게 따지는 거냐?"
용유진은 시체가 잡았던 어깨를 손으로 털며 대꾸했다.
"몽둥이에 맞았다고 몽둥이를 욕할 순 없죠. 몽둥이를 쥔 사람이
나쁜 것 아니겠습니까?"
"흐흐흐, 옳은 말이다. 넌 정말 얘기 상대가 되는구나."
이쯤 해서는 용유진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아까는 말 상대가 안된다고 화를 내더니 이제는 또 상대가 된다
고 좋아하는군. 이렇게 왔다갔다 하는 걸 보니 무공은 강해도 머리
는 좀 잘못 된 모양이다.'
"내가 이상한 늙은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눈치는 또 엄청나게 빠르군.'
용유진은 아니라고 하려다가 마음을 바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면이 아주 없진 않군요."
공손조덕은 화를 내지 않고 음충궂은 웃음만 흘렸다.
"그래, 그런 면이 아주 없진 않지."
그는 잠시 말을 않고 솥만 저었다. 바깥에서는 빗소리가 그치지
않고 들려오고, 솥에서는 무얼 넣어 만든 것인지 알 수 없는 죽이
끓고 있었다. 방안은 잠시 조용해졌다.
"나는 평생 산 사람보다는 죽은 사람과 더 많은 이야기를 하며 지
냈다."
공손조덕이 말했다. 방금까지의 시비조가 아니라 옛날 이야기를
하듯 편안한 어조였다. 용유진은 잠자코 그의 말을 들었다.
"또 나는 산 사람보다는 죽은 사람에게서 더 많은 것을 배웠다.
오늘처럼 비 오는 날 고요히 앉아 있노라면 내게는 저 시체들이 하
는 이야기가 들려오는 것만 같다. 저마다 죽은 이유도 살아 있을 때
의 모습도 달랐지만 오늘 내게 이렇게 육신을 맡겨 저승길로 데려가
주길 원하는 자들. 그들이 살았을 때 어떻게 살았고, 왜 죽었는가를
생각해 보노라면 나는 마치 수백, 수천 개의 인생길을 대신 밟아 보
는 것같은 생각에 빠진단 말이다."
용유진은 공손조덕의 말을 들으며 벽에 세워진 시체들을 보았다.
모닥불 불빛이 그 시체들의 얼굴에 그늘을 만들고 있었다. 시체의
수는 열 두 구, 늙은이도 있고, 청년도 있고, 심지어 어린 소녀도
있었다. 개중에는 얼굴을 천으로 감아 눈도 안 나오게 한 것도 있었
는데, 어떻게 죽었기에 이런 식으로 염을 했나 생각해보면 끔찍한
상상이 되었다.
과연 이런 시체들과 평생을 같이 하면 싫어도 생각이 많아지지 않
을 수 없겠구나 하고 있는데 공손조덕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나는 그들의 인생을 따라가면서 많은 걸 배웠다. 하지만 남는 의
문도 많았지. 많이 알게되면 알수록 의문은 더욱 많이, 그리고 깊어
졌다. 누가 왜 죽었나, 그의 숨통을 막아버린 결정적인 암기, 혹은
병기는 뭐였나? 이런 사소하고 몰가치한 의문이 아니라 좀더 근본적
인 것, 좀더 우리 삶의 기저(基底)에서부터 발원한 문제들, 그런 의
문들이 내 깊숙한 어딘가에 쌓여 소리를 내더라는 거다. 삶이란 도
대체 무엇인가? 죽음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이렇게 살다가 이렇게
죽을 바엔 도대체 인간이란 무엇이었나?"
공손조덕의 눈은 아련하게 흐려져 가고 그의 그림자는 더욱 짙어
졌다. 가볍게 팔을 들어 허공을 감싸 안으려는 듯한 동작을 취하자
방안의 공기가 그에게 감응하여 떠는 것 같았다. 확실히 시체보다
그가 더 공포스러웠다.
용유진은 차분히 말을 듣고 있다가 불쑥 한 마디 던졌다.
"죽 탑니다."
공손조덕이 눈을 떠 내려다 보고는 얼른 다시 죽을 저었다.
"그래, 죽이 타면 안되지. 손님 대접할 것인데."
그 말을 들은 건 용유진의 귀가 아니라 배였던 모양, 손님이 누구
라는 걸 확인하기도 전에 뱃속이 요동을 쳤다. 생각해보면 하루종일
아무 것도 먹지 못했던 것이다.
공손조덕이 그런 그를 보고 히죽 웃었다.
"급할 건 없다. 네게도 줄테니까. 그런데 이 죽은 끓이는데 시간
이 많이 걸린단 말이야. 벌써 사흘째 젓고있는데 이제 겨우 다 되어
가는구나."
사흘째 끓고있는 죽. 용유진은 노인네가 흰 소리를 다 하는구나
생각했지만 토를 달진 않았다. 공손조덕은 말이 끊겨서 다시 연결하
기 힘드는 것인지, 아니면 마음 속을 내보여서 괜히 무안한 생각이
드는 것인지 더 이상 말을 않고 죽만 열심히 젓고 있었다. 그게 어
쩐지 미안한 기분이 들어 용유진이 먼저 말을 꺼냈다.
"말씀은 잘 들었습니다만 저로서는 잘 이해할 수가 없군요."
적절한 말이 아닌 듯해서 용유진은 잠시 단어를 고르다가 그냥 솔
직하게 심경을 내비췄다.
"내일 당장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모르는 저에게는 삶이니 죽음이
니 하는 단어는 너무 먼 것 같군요. 마음에 와닿지를 않습니다."
그말에 공손조덕이 반색을 했다. 말을 이을 거리가 생긴 것이다.
"하루하루가 삶이고 죽음이라는 생각을 안해봤나? 내일 만약 자네
를 기다리는 절대적인 적과 싸워야 한다고 생각해봐라. 오늘 죽음에
대해서, 삶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까? 우리네 삶이라는 것이 그렇
게 하루하루 삶이 뭐고, 죽음이 뭔지 생각하면서 보내는 끝없는 탐
색의 연장인 것은 아닐까? 매일매일 어떻게 살지, 무엇을 먹고, 무
엇을 입을 것인지 고민할뿐만 아니라 더 잘 사려면 어떻게 해야 할
까, 더 맛있는 걸 먹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더 좋은 옷을 입으려
면 어떻게 해야 할까 매일 생각하지 않느냐 말이다. 그런 것이 모두
더 나은 삶에 대한 노력 아닐까? 더 나아가면 인(仁)이니 의(義)니
예(禮)니 하는 것들에 대해서도 생각이 미치게 되는 것이고, 더 좋
은 사람, 더 강한 사람, 더 완벽한 사람이 되고 싶어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사실은 같은 고민에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용유진은 공손조덕의 그와 같은 열변을 멍하니 듣고만 있었다. 옳
은 말 같기도 했지만 역시 마음에는 와닿지 않는 말들이었다. 그것
을 눈치챘는지, 아니면 애초에 이해를 바라지도 않았는지 공손조덕
은 손을 저었다.
"괜찮다. 나중엔 이해할 날이 올 것이다. 그래서 말인데…."
그는 용유진을 아래위로 훑어보며 의미 있는 웃음을 그렸다.
"내기를 하지. 십 년 후의 네가 스물 네 살적의 나와 비교해서 더
나은 사람이 될지 어떨지를 놓고 내기를 하는 거다. 난 이걸 걸지."
그가 걸겠다면서 내놓은 물건은 자루가 달린 종(鐘)이었다. 무엇
으로 만들었는지는 몰라도 푸르스름한 색깔에 복잡한 무늬가 새겨져
있는 물건.
"월환(月幻)이라는 거다. 시체를 끌고 갈 때 앞에서 울리는 종이
지."
그 말을 듣고서야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월인 공손조덕
의 독문병기이면서 강시당의 장문 영부가 바로 저것 아닌가.
유진은 여전히 멍하니 있다가 불쑥 말했다.
"전 걸 게 아무 것도 없는데요."
걸 게 혹시 있어도 걸 수가 없었을 것이다. 저 월환에 상응하는
가치를 가진 물건이라면 천하를 통틀어도 그리 쉽게 찾을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상관없다. 넌 이걸 걸어라!"
공손조덕이 가리킨 것은 시체였다. 아까전부터 눈에 띄던 소녀의
시체.
용유진은 더 알 수가 없게 되어 버렸다.
"저건 제 것이 아니잖습니까."
"이제부터 네 것이다."
"둘 다 노인장 물건인데 이기든 지든 노인장이 손해보는 것 아닙
니까. 그런 내기가 있을 수 있나요?"
"네가 이기면 이 월환과 월령(月鈴)이 다 네것이 된다. 내가 이기
면 월령을 내게 돌려줘야 한다. 하지만 그때쯤에는 죽어도 월령을
내게 돌려주기 싫어질 것이다. 그래도 난 월령을 돌려 받겠다. 그러
면 넌 죽을 것같은 고통을 느끼게 되겠지. 어때, 공평하지 않으냐?"
"저 소녀의 생전에 불린 이름이 월령인 모양인데, 왜 제가 저걸
돌려주기 싫어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게 이해가 안 가는군요."
공손조덕은 잠시 묘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더니 히죽 웃었다.
"하여간 내기를 거부하진 않겠다는 말이지? 그럼 계약은 성립된
걸로 알겠다. 그리고…."
공손조덕이 소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생겼
다. 소녀의 시체가 뻣뻣이 굳은 손발을 움직여 다가오더니 귀에 건
귀걸이 하나를 떼어 내미는 것이다.
"월령은 이 아이의 이름이 아니라 이 귀걸이 이름이다."
과연 그 귀걸이는 단순한 귀걸이가 아니라 방울[鈴]이었다. 금이
간 곳을 중심으로 반으로 나뉘어 한쪽에는 해골이, 다른 한쪽에는
아름다운 소녀의 얼굴이 정교하게 새겨진 방울. 그것이 월령이었다.
"이건…."
"그게 어떤 물건인지는 가지고 있으면 자연히 알게된다. 내말대로
인지 아닌지도 시간이 지나보면 자연히 알게 될 거고. 네 생각대로
십년이 지난 후에도 아무 아쉬움 없이 내게 돌려줄 수 있다면 그냥
정신 나간 노인네 헛소리였다고 생각하면 그만 아니냐. 복잡하게 생
각할 것 없다. 그건 그렇고…."
공손조덕은 용유진이 더 말도 못 붙이게 만들어놓고는 손을 저었
다. 소녀의 시체가 다시 벽으로 가서 섰다.
"손님이 왔으니 이제 먹을 준비를 하자!"
방 안에는 어느새 한 사람이 늘어나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세
사람이 늘어나 있었다.
제비처럼 가냘픈 몸매를 비단옷으로 감싸고, 머리에는 비를 피하
려는 듯 비단 휘장 늘어진 테 넓은 모자를 쓰고있는 두 미녀, 그 두
미녀가 앞뒤로 들고있는 남여(藍轝; 두 명이 들게 되어있는 가마)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은 청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