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행표-2화 (2/37)

제1장: 용유진, 홀로 남다.

1.

"용유진이라고?"

"예, 비룡표국 국주였던 용일담(龍逸潭)의 아들입니다."

"용일담은?"

"이번에 죽었습니다."

"미망인은?"

"년전에 이미 죽었습니다."

"형제는 없나?"

"삼대독자랍니다."

"친척이나 후견인 같은 건 없나? 표국에 남은  사람은? 일개 표국

의 국주씩이나 됐는데 지인(知人)이나 가신(家臣)같은 것도 없단 말

인가? 그렇게 인덕이 없는 사람이었나, 용일담은?"

"인덕이야 너무 많아서 넘치는 사람이었죠. 주변 사람들  돌봐 주

느라 빚을 너무 많이 져서 이번에 위험한 줄 알면서도 일을 맡은 것

인데…."

동창 선위대의 대주인 진일동(陳一童)의  별호는 철벽나한(鐵壁羅

漢)이었다. 별호 그대로 장대한 체구에 거무튀튀한  낯빛을 가진 호

걸 풍의 인물. 이런 류의 사람 치고 세세한  면까지 따지는 일을 좋

아하는 사람은 없다. 그런 건 얼굴 하얀  유생 나부랭이에게나 맡기

면 좋을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작전을 마치고

돌아오면 남에게 보고를 대리시킬 수는 없었다.

'환관 자식이…!'

진일동은 속으로야 그렇게 투덜거렸지만 언감생심 그런 말을 뱉을

수 없을 뿐 아니라 내색조차 해서는 안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동창이 아무리 서슬 퍼런 위세를 지니고 있다  해도 결국엔 환관(宦

官) 손안에서 움직이는 친위병일 뿐이었다. 지금  앞에 앉아있는 조

비홍(趙飛鴻)이 아무리 사례감(司禮監)의 일개 태감(太監)에 불과하

다고 해도 그 뒤에 제독태감(提督太監)이 있고  보면 진일동 정도의

목이야 손가락 하나로 뗐다 붙여다 할 수 있는 것이다.

진일동은 불알도 없는 놈 앞에 부동자세로 서서 보고하는 것이 아

무리 고깝더라도, 이런 저런  사정을 설명하는 것이  아무리 체질에

안 맞는다 하더라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이왕 하려면 잘 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그는 마음을 다잡고는 용일담과  관련된 일에 대

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원래 용일담은 산동대협(山東大俠)이라고 불릴 정도로 이름이 나

있었는데 표국은 그리 크지 않고, 별로 더 키울 야망도 없는 사람이

었던지라 실속은 없고 이름만 높은  형국이었습니다. 그런데 도와달

라고 찾아오는 사람은 많단 말이지요."

"고대 협사의 풍모를 지녔다는 거군. 그래 계속해봐."

"찾아오는 사람에게 거절하는 법이 없으니 마누라  속곳까지 팔아

서 원하는 건 다  해줬다는군요. 그러다 모자라면 빚을  졌는데, 이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서 조만간 갚지 않으면 빚에 깔려 죽게 생겼더

랍니다. 그래서 암표(暗 )를 했지요."

"우리 물건 말이군."

"그렇습니다. 원래 암표라는 것은 내용과 물주(物主),  가치 등등

물건에 관련된 사항을 아무 것도 묻지 않고 정해진 사람에게 운반해

주는 것을 말하지요. 대신 요금이 엄청납니다. 우린 그 점을 이용해

서 용일담에게 수송을 부탁했고, 용일담은 빚에 쪼들리고 있던 터라

우리에게 수상한 점이 여럿  있었지만 승낙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

다음은 아시는 대로입니다."

동창의 이번 작전에는 몇 가지 배경이 있었다.

산동성과 경사순천부(京師順天府; 지금의 북경)  사이에서 암약하

는 유명한 도적떼 풍도당과 그 두목  풍도십삼호를 제거하여 민심을

안정시키고 관도를 정리한다는  것이 겉으로 드러난  목적이었지만,

그 이면에는 환관의 명을 받아 관리와 왕족에  대한 사찰과 공안(公

案)에만 주력하고 횡포를 부린다는 동창에  대한 비난을 불식시킨다

는 목적이 깔려있는 일종의 선전성 작전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동창 내에서도 주력이라 할 수 있는 선위대를 내보냈던 것

인데, 구체적으로는 산동성의  일개 표국에 물건을  운송시키고, 그

물건이 엄청난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허위  정보를 경사와 산동지부

의 관리들 틈에 은근히  풀어놓았다. 풍도십삼호가 그  동안 비밀로

분류된 몇몇 공물을 약탈한  사실로 볼 때 경사나  산동지부의 관리

중에 내통자, 혹은 적어도 정보 제공자가 있을 걸로 추측할 수 있었

기 때문이었다.

모든 일은 계획대로 풀려나갔다. 비룡표국의 국주  산동대협 용일

담은 빚을 갚기 위해 정체도 확실치 않은 그들 동창의 대리인으로부

터 암표를 수주 받아 모을 수 있는 사람은 모두 대동하고 표행에 나

섰고, 풍도십삼호는 또 전 세력을 동원해서 표물을 약탈했다. 그 다

음은 동창의 차례, 선위대의 마흔 명 위사들만으로 풍도십삼호를 전

멸, 소탕시킨 것이다.

"용일담이 아주 바보는 아닌데다가 인덕은 있는  인물이었다는 것

이…."

진일동은 떨떠름한 미소를 지었다. 분명 웃을 일은  아니었다. 음

모를 꾸민 것이 그들이었으니까.

"이번 물건에 무언가 음모가 있다는 것을 눈치 채고  실력으로 뚫

고 나가려 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모을 수 있는 사람은 다 모았는

데, 평소 그에게 신세를 졌던 지인들이 다  모였죠. 그리고 다 죽었

습니다. 워낙 실력 차가 나서…."

"그래서?"

"예?"

"우리 때문에 천애고아가 되었으니 불쌍하더라 이건가?"

"그런 게 아니라…."

"그런 게 아니면 왜 살려뒀지?"

"그게…."

"그녀석이 그 사실을 다 알면 어쩔 텐가? 우리가  암표를 맡긴 게

풍도십삼호를 꼬이기 위한 음모란 걸 알면? 우리가 동창에서 나왔다

는 걸 알면?"

"꼬마녀석이 그런 걸 알 리가…."

"멍청하군. 머리가 있는 놈이면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것  아닌

가. 풍도십삼호를 그렇게 소탕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인데 왜 표국

에 물건 따윌 맡기겠나.  음모란 게 뻔하잖아. 아무리  꼬마라 한들

표국이 산적에게 당하고, 그 산적은 물건 맡긴 사람들에게 당했다는

걸 봤으니 내막이 훤히 보였겠지. 안 그래?"

"그럴 수도 있습니다만…."

진일동은 오늘 말이 자꾸  꼬이는 이유를 깨달았다. 꼬마  놈이야

죽건 말건 그가 알 바가  없는 것인데 괜히 살려준  덕분에, 그리고

지금도 괜히 생각해 주는 마음이 되어 버려서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어색한 기분이 되는 것이다.

그는 조비홍을 힐끗 보았다.

분을 바른 것처럼  하얀 낯짝에 계집의  그것처럼 갸름하게  빠진

턱, 피를 머금은 것처럼  붉은 입술, 가늘고 긴  눈썹까지 하나에서

열까지 전부 재수 없는 얼굴 생김이었다. 여자가 저런 모습이었다면

모르지만 환관 놈이, 그것도 직급상 그의 상관인  놈이 저런 모습을

하고 있다니…. 게다가 항상  마음속을 뚫어보고 있는  것처럼 재수

없는 눈빛을 하고있지 않은가.

진일동은 얼른 보고를 마치고 돌아가 이 더러운 기분을 술로 씻어

냈으면 하는 마음밖에 없었다.

그렇다. 괜히 상관없는 꼬마놈 생각해주는 척 하지 말고  얼른 끝

내 버리자.

"저도 처음엔 우리에게 이용당하고 죽은 자의  아들놈인지라 처음

엔 죽여 버릴까도 생각했습니다만…. 그… 뭐랄까…, 살려줘도 별로

위험은 없을 것도 같고, 또 다시 잡아들이는 게 어려운 일도 아니고

해서…."

"정말 멍청한 소리만 골라서 하고있군. 내가 걱정하는 것은 그 꼬

마놈이 아니야. 그 놈 입이  문제란 말이지. 세 치 혀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자넨 전혀 모르는 것같군. 자네 정도의 직

급이면서 그걸 아직 모른다는 건 문제가 적지 않아."

"명심하겠습니다."

진일동은 고개를 푹 숙였다. 반성해서가 아니라  상처받은 자존심

이 표정에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해서였다.

'이걸 한방에….'

때려죽여 버리고 같이 죽을까보다라는  것이 지금 그의  심정이었

다.

동창의 원래 편제는 극히 간단했다.

그 정점에 제독태감, 정식명칭으로는  제독동창(提督東敞)이 있는

데, 이 제독태감은  사례감의 수장인 사례태감(事禮太監)을  겸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환관중의 환관, 내시중의  내시로 영락제(榮樂帝)

가 동창을 만든 후 백여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권력의 정점에 올

라있는 자리였다.

제독태감의 아래에 첩형(貼刑)이라 불리는 직책이 둘  있었다. 그

자리에 오르는 자격은 역시 내시, 제독태감의  왼팔, 오른팔이라 할

심복들이 여기 차지하고 앉아 동창을 환관을  위한 기관으로 만들어

주고 있었다.

그 다음은 당두( 頭)였다. 황명에 의해 정해진  직제상으로는 당

두는 총 일 백 명. 그 아래 번역(番役)이 있는데, 그 수는 일 천 명

이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총  일 천 일 백 삼  명으로 구성된

집단이 동창이었다. 그 외에 필요한 인원은 금의위에서 차출해 쓰도

록 되어있었다.

그러나 지금 동창의 구성원은 일 만 삼천 명이  넘었다. 직제상에

없는 인원들이 일만 이천 구백여 명이 있는  셈이었다. 첩형의 보좌

역으로 들어온 조비홍이 그런 경우고, 당두 중에  서열을 만들어 이

급 당두로 분류되는 진일동도 그런 경우였다.

그래도 진일동은 자기는 정식으로 금의위에서 발탁되어 단계를 밟

아 당두에까지 오른 사람이고, 조비홍은 어느 날  갑자기 뚝 떨어져

직제에도 없는 윗자리에 앉은  놈, 더구나 환관이니  자기보다 나을

게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 놈이 이러니  저러니 훈계까지 하

고 있으니 고깝지 않을 수가 없었다.

큰 일 만들고 싶지 않아 먼저 고개를 숙였지만 정말 한 마디만 더

하면 사고 한 번 쳐보리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눈치를 챘는지 조비홍

의 어조가 부드러워졌다.

"이왕 그렇게 된 일이니 하는 수 없지. 하여간  이번 일은 수고했

고, 다음에도 이런 류의 일은 선위대에 돌릴 터이니 잘 해주기 바라

네. 그만 가봐!"

"예, 그럼…."

진일동은 숙였던 고개를 약간 까닥거려 보이고는 돌아서며 생각했

다.

'정말 너 오늘 한 목숨 건진줄 알아라, 어휴…, 성질 같아선…!'

"아, 그리고…."

조비홍이 그의 뒤에 대고 한 마디를 더 던졌다.

"용가 꼬마 놈은 진대주가 책임지는 걸로 알지."

진일동은 밖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조

비홍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잇 사이로 낮게 소리를 내어 물었다.

"책임을 지라 하심은?"

그의 이런 위협적인 태도와 상반되게도 조비홍은 의자에  등을 기

대고 싱글거리고 있었다. 매력적인 미소, 그러나 진일동에게는 징그

럽기 짝이 없는 미소였다.

"뭐, 천천히 생각해 보게. 어떻게 책임 질지."

"알겠습니다."

진일동은 이를 갈았다.

"제가 어떻게든 책임 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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