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행표-1화 (1/37)

독행표(獨行 )

左  栢  自  序

재미있는 무협을 보고싶다. 기다릴 수 없다면 내 손으로라도 쓰고

싶다.

그것이 무협을 쓰기 시작할 때의 내 마음이었다. 그리고  그 마음

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삼 년 하고도 육 개월, 그 동안 단 네 편의 이야기를 만들어 내었

다. 그러나 그중 어느 것도 만족스럽지 않다. 날이 갈수록 나아지는

것이 있어야 하는데 오히려 점점 후퇴를 하고 있다는 기분이다.

이제 정말 스스로에게 다시 물어볼 때다.

나는 여태 무엇을 하고 있었나. 이제 무엇을 해야 하나.

재미있는 무협을 보고싶다. 기다릴 수 없다면 내 손으로라도 쓰고

싶다.

시작은 그것이었다. 지금도 그렇다.

다시 삼 년 육 개월을 쏟아 붓더라도 한 편의 재미있는, 그럴듯한

무협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아깝지 않겠다.

나는 다시 시작하고 있다.

다시 시작할 터전이 되어주고, 다시  꿈을 꿀 용기를 준,  그리고

같은 꿈을 꾸는 시공사와 드래곤 북스 팀의 스텝들에게 감사드린다.

어디에서나 그랬지만, 여기에서도 나는 불량  작가였다. 기다려도

기다려도 나오지 않는 원고를 짜증도 내지 않고 마냥 기다려준 편집

부 분들께 다시 한 번 감사를.

이제부터 읽어주실 독자 분들께 가장 깊은 감사를.

左  栢   올림

序  생존자(生存者)

비가 내리고 있었다.

천자일호(天字一號), 동창(東敞) 선위대(煽威隊)  천자조(天字組)

조장(組長)의 직함을 가지고 있는 천자일호  위류향(魏留香)은 차라

리 잘 됐다고 생각했다.

이 비는 그들의 행동에 은밀함을 더해주고, 적들에게는 위협을 더

하는 효과를 가져올 것이다.

그는 앞에 늘어선 열 명의 수하를 향해 짧고 나직하게 명령했다.

"발도(拔刀)!"

열 개의 칼날이 동시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러나 빛은  발하지

않았다. 칼은 모두 불빛을 받아도 반사하지 않는  칙칙한 먹빛의 날

을 가지고 있었다.

위류향은 다시 한 번 주의를 줬다.

"개인 거리는 최소한 삼 척이다.  하나를 해치우면 다시 삼  척을

이동한 후 싸운다. 한 번 베면 반드시 죽이고, 세 명을 죽인 다음에

는 뒤로 빠져서 무기를 점검한 후 다시  전진한다. 명심해 둬라. 저

기 우리 선위대 사람들 말고는 살아있어도 좋을  자는 아무도 없다.

알고 있겠지?"

열 개의 칼날이 비스듬히 눕혀졌다가 다시 곤두섰다. 그것이 대답

이었다.

"정렬!"

열 개의 칼날이 뒤를 향했다. 열 개의 복면 또한 뒤를 향했다. 이

제 그들은 언제든지 뛰쳐나갈 수 있었다.

위류향은 그들이 숨은 산 중턱의  나무 그늘 아래에 서서  발아래

계곡에 웅크린 저택의 지붕들을 내려다보았다.  태곳적 동물의 등뼈

처럼 웅크린 기왓장들이 간혹 밝혀지는 번갯불  속에서 모습을 드러

내었다.

지금, 여기 말고도 어둠 속 어딘가에서는 방금 그가 한 말과 똑같

은 경고가 발해졌을 것이다. 여기 열 개의  심장과 똑같은 빠르기로

뛰고있는 서른 개의 심장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서른 줄기의 살기

가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서 애써 이빨을 감추고 숨어 있을 것이다.

지금 그들은 학살을 준비하고 있었다.

휘유우우-!

휘파람 소리 같은 대초명적(大哨鳴鏑)의 울음이 밤하늘을 갈랐다.

화살 깍지 앞에 둥근  구체를 붙여놓고 거기에 구멍을  뚫어 휘파람

소리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학살을 시작하라는 신호였다. 때마침 번

개가 때렸다. 뇌성 속에서도 들릴 정도로 크게  위류향의 명령이 떨

어졌다.

"돌격!"

그 자신의 것까지 합해 열 한 개의 그림자가  숲을 헤치고 뛰어나

갔다. 혹시 있을지도 모를 반격에 대비해 거의  땅 바닥에 붙다시피

자세를 취하고 있으면서도 방금 허공을 가르고 지나간 대초명적만큼

이나 빠르게 목표에 접근하고 있었다.

저택 곳곳에서 경호성(警號聲)이 터지고, 이곳저곳 횃불이 밝혀졌

다. 기습을 포착한 것이겠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위류향은 제일 먼저 저택으로 진입해서 순식간에 세 명을 베어 넘

겼다. 그는 전문가였기 때문에 칼에 부딪는 뼈의 감촉만으로도 적의

생사를 확인할 수 있었다. 당연히 즉사였으므로 그에게는 확인의 칼

질이라는 것은 필요 없었다. 그리고 그에게는 달리 할 일이 있었다.

위류향은 뒤를 따르는 열 개의 그림자들과는 다른  방향으로 뛰었

다. 날아갈 것같이 휘어진 처마, 뱀처럼 이어진 지붕들이 그의 발아

래 달리고 있었다. 그는 순식간에 몇 개의 전각과 정원을 넘어서 저

택 중심부로 다가갔다.

다시 번개가 때렸다. 청회색의 공간 속으로 당황해 허둥대는 일단

의 무리들이 보였다. 위류향은 그들 속으로 덮쳐 갔다.

늑대의 습격을 받은 양떼처럼 적들은 흩어지고, 피를 뿜으며 쓰러

졌다.

순식간에 십여 명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못할 길로 떠났다. 다시

그 길에 한 명을  추가하려고 칼을 휘둘렀을 때  귓전에 바람소리가

스쳤다.

위류향은 본능적으로 그것이 적의 반격임을 깨닫고,  오랜 수련의

결과 몸에 배인 동작으로 공격을 피했다. 그리고 한 풀 꺾인 살기에

분노를 더해 두 배의 포악함으로 무장하고 반격을 가했다.

푸른 번개가 밤하늘을 찢을 때 그의 칼은 두  명의 가슴을 찢어발

겨 놓았다.

"좋은 솜씨!"

검은 그림자 하나가 전장에 뛰어들었다.

위류향은 본능적으로 그림자를 향해 칼을 휘두르다가 목소리를 듣

고는 재빨리 옆으로 비껴 쳤다. 새로 나타난 그림자에 의해 이미 쓰

러지던 적이 그의 칼에 두 번 죽었다.

"좋아, 좋아, 변함없이 흉폭한 칼솜씨군! 방금 자네  칼에 십삼호

(十三虎)중 하나가 죽었음을 알려주는 바일세!"

그 말로 위류향은 두 사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방금 그에게 반격

당해 죽은 자가 오늘의 목표인 열 세 마리 호랑이 중 하나라는 것과

지금 이 떠버리가 현자조장(玄字組長) 오대룡(吳大龍)이라는 것이었

다.

성격상 그와 반대에 가깝지만 묘하게도 가장 친하게  지내는 놈이

이놈이었다.

위류향은 십삼호의 목을 잘라 허리춤에 매달며 물었다.

"다른 놈들은?"

"이제 찾아봐야지! 자네에게만 공을 몰아줄 순 없으니까!"

오대룡은 말을 하면서 두 사람을 더 죽이고 이  장원 안에서 가장

큰 건물을 향해 달려갔다. 위류향이 그 뒤를 따랐다.

돌사자가 서있는 계단을 달려 올라가 붉은 색 기둥 사이에 서있는

거대한 문짝을 그대로  어깨로 박아버리는 오대룡의  위로 위류향이

뛰어올랐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깨어져 나간 문짝  너머로 화살이

빗발처럼 쏘아져 나왔다.

위류향은 팔방풍우(八方風雨)의 초식으로 칼을 휘둘러 화살들로부

터 그와 오대룡을 보호했다.

그의 방어막 안에서 다시 오대룡이 튀어나와 적들  틈으로 파고들

었다. '떠버리 멧돼지'라는 별명 답게  저돌적이고 요란한 공격이었

다. 위류향은 고개를 저으면서도 오대룡의  옆으로 비스듬히 따라가

서 보조를 맞추었다.

항상 이렇게 오대룡이 일을 저지르면 그가 보좌를  하는 모습으로

싸움은 이루어 졌었다. 그리고 항상 그렇듯이 적들은  그들 둘의 협

공 아닌 협공 앞에서 맥없이 갈라지고 쓰러졌다.

"웬놈이냐!"

방천화극(方天畵戟)의 화려한 창날이  오대룡의 앞으로  날아들었

다. 요즘 세상에 이렇게 무식한 무기를 쓰는 사람은 힘 자랑하기 좋

아하는 군부의 장군 말고는  어디 산적밖에 없다.  그래서 위류향은

지금 그들이 찾는 상대가 하나 더 나타났다는 것을 알았다. 산동(山

東) 북부에서 악명을 날리는 녹림대도(綠林大盜) 풍도십삼호(風都十

三虎)중 일곱째 천극호(天戟虎)의 애병이  방천화극이었기 때문이었

다.

"알 것 없어!"

정수리로 창날이 파고들기 직전이니 막아야 한다는 그  바쁜 와중

에도 오대룡은 말대꾸부터 하고는  손을 썼다. 머리로  창날을 막고

칼을 내밀어 창대, 창을 든 손, 그 손 임자의 머리까지 단숨에 쪼개

버렸던 것이다.

그리고는 창을 막은 머리에  손을 올려 만져보는데, 모자가  창에

뚫려 날아간 것을 빼고는  조금의 손상도 없는 민  대머리가 만져졌

다. 오대룡은 선천적인 대머리였다. 그리고 후천적으로  만든 돌 머

리이기도 했다.

"무식한 놈!"

위류향은 그 민 대머리를 넘어 뛰었다. 등불 빛을 받아 푸른 섬광

을 발하는 비수들이 비오듯 날아오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허공

에서 팔방풍우의 초식이 다시 한 번 펼쳐졌다.  비수들이 퉁겨져 나

갔다.

아래에서부터 무언가가 위류향의  발을 받쳤다. 오대룡의  손이었

다. 위류향은 그 손을 밟고 다시 뛰어서 넓은 대청의 끝까지 날아갔

다. 거기 비수를 날린 손이 있었다.

"두 개 째야!"

호통은 십삼호의 넷째인 독비호(毒匕虎)의 목이  공중에 떠오르는

것과 동시에 터져나왔다. 오대룡의 패기에  위류향까지 조금 들떠버

린 것이다.

"좋아 계속 겨뤄보자고!"

오대룡이 피 바람을 일으키며 외쳤다. 위류향도 핏물에 젖은 채로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미소짓고  다음 목표를 찾아  눈을 번뜩였다.

그들 조장의 목표는 십삼호, 이들  풍도당(風都堂)이라 자처하는 도

적 패거리의 두목들을 확실하고 안전하게 처치하는 데에 있었다. 나

머지 졸개들은 수하들의 몫이었다.

비는 계속 쏟아지고, 번개는 하늘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그 속

에 삼사 백이나 되는 시체가 만들어져서 장원의 가장 넓은 곳, 연무

장에 쌓였다. 그 중에 동창의 희생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위류향과 오대룡은 핏물에 젖은 칼을 빗물에 씻으며 그 광경을 바

라보고 있었다. 그때 지자일호(地字一號)  석소봉(石蕭峰)이 나타났

다. 양손에 두 개씩 총 네 개의 머리를 들고 있었다.

오대룡이 아는 척을 했다.

"어이, 오늘은 천자일호에게 졌는 걸! 이쪽은 다섯 개야."

"수가 문제가 아니라 내용이 문제지."

석소봉은 그들의 앞에 머리들을 던지고 손가락에 감긴 머리칼들을

떼내었다.

오대룡은 위류향이 자른 머리중  하나를 발끝으로 차서  석소봉의

앞으로 굴렸다. 고슴도치 같은 수염이 특징적인 머리였다.

"이놈이 수괴니까 내용상으로도 지지 않는걸?"

"수괴는 그놈이지만 그 못지 않은 놈이 내쪽에 있지. 배후 인물이

라고나 할까."

석소봉도 머리하나를 굴렸다. 위류향이 잠시 들여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역시 이 놈이 정보를 전해주고 있었군.  근데 왜 여기까

지 왔을까? 평소 같았으면 본거지에 숨어 있었을 텐데?"

"우리가 흘린 가짜 정보에 완전히 넘어간 덕이지. 이놈은 이번 표

행( 行)에 진짜 엄청난 물건이 있는 줄 알았던 것같아."

석소봉은 자기 뒤쪽을 가리켰다. 거기 지자조의  조원들이 특이한

시체 몇 구를 끌어다  놓고 있었다. 그들 동창의  요원들도 아니고,

풍도당의 도적도 아닌 시체들.

"이번 토벌전의 미끼가 됐던  비룡표국(飛龍 局)의 표사( 師)들

이야. 하나같이 엄청난 고문을 당하고 죽었더군."

"고문이라…!"

"있지도 않은 보물을 내놓으라고 시달렸겠지."

"불쌍하군. 비룡(飛龍)이 떨어져서 사룡(死龍)이 된 셈이군. 아마

이번 표행에 전원 출동했었지?"

"그게 조건이었으니까 그랬겠지."

"전부 죽었나?"

"거의…, 하나만 빼고."

"하나 살았다고?"

"저기…."

마지막으로 지자조원 하나의 손에 끌려나오는 왜소한 체구의 사람

이 비룡표국의 유일한 생존자였다. 희미한 등불 불빛으로도 온통 피

범벅이 된 그 모습은 알아볼 수 있었다.

위류향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여자 같은데 똑같이 고문한 모양이군. 심하게 당했는걸."

"여잔 아냐."

"그럼?"

"어린애야."

석소봉이 손짓을 하자 수하가 그 유일한 생존자, 어린애라기엔 좀

더 나이가 든, 십 사오세 소년의 얼굴을  들어 보여주었다. 피에 물

든 얼굴에 부어터진 눈까풀을 들어올려 소년이 그들을 바라보았다.

"당신들은…?"

석소봉이 대답했다.

"물건 주인이다."

"신표(信標)는…?"

위류향은 품속을 뒤져 옥으로  만든 패 반쪽을 내놓았다.  소년은

그것을 유심히 살펴보다가 미소를 지었다.

"잘됐군요…!"

소년은 부축하고 있는 지자조원의 손을 뿌리치고 건물  저편 어두

운 곳으로 걸어갔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길…!"

비틀거리면서도 용케 쓰러지지  않고 소년은 사라졌다.  석소봉이

수하에게 눈짓을 하자 아무말 없이 소년의 뒤를 따라갔다.

오대룡이 나직이 속삭였다.

"저녀석은 어쩌지?"

석소봉이 짧게 대꾸했다.

"없애버리는 게 깨끗하겠지?"

위류향이 고개를 저었다.

"살려줘도 별 이상은 없을 듯한데…, 일단 하는 짓을 보고."

소년이 어둠 속에서 다시  나타났다. 그 뒤에서 감시역으로  보낸

수하가 기묘한 손짓을 했다. 엉덩이를 만지고 코를 잡는 것이었다.

위류향과 석소봉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저놈이…!"

오대룡은 그때까지도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소

년이 가까이 와서 하는 행동을 보고 모든  것을 알아차렸다. 소년은

기름종이에 싼 작은 물건을 그들에게 내밀었던 것이다. 옷 어디에도

없던 것, 그렇게 고문을 해도 안 나왔던  것, 그러나 사실은 그렇게

목숨을 버려가며 지킬 필요는 없었던 것이 소년의 뱃속에서 나온 것

이다.

"맡기신 물건입니다. 저희 비룡표국이 무사히  물건을 전달했음을

확인해 주십시오."

위류향이 형언할 수 없이  묘한 표정으로 소년과 물건을  보았다.

그러다가 손을 내밀어 물건을  받아들었다. 그걸 품속에  넣고 대신

종이 한 장을 꺼내어 옷에 묻은 핏물에 반쪽 옥패를 적셔 종이에 찍

었다. 그것을 소년에게 내밀자 소년은 소중히 받아서 찢어진 옷가지

틈에 챙겨 넣었다. 그런 다음 갑자기 허리가  꺾이도록 깊이 인사하

며 외쳤다.

"다음에도 일이 있으면  맡겨주십시오! 성심성의껏  봉사하겠습니

다!"

소년은 천천히 허리를 펴며 방금의 활달한 인사와는  달리 고통스

러운 어조로 덧붙였다.

"지금은 말고 나중에요…, 아주 나중에…!"

위류향은 소년의 태도를 흥미롭다는 듯 바라보다가 물었다.

"이름은?"

소년은 피에 물든 손을 들어 이마로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 올렸

다. 그 손에 남은 손톱 하나 없이 전부  뽑혀나간 것을 위류향은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소년은 고통스러운 표정도 짓지 않고 또박또박  이름을 말

했다.

"유진(遊眞)입니다. 용유진(龍遊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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