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장 월락검극천미명(月落劍極天未明)
천계(天啓) 이년 정월 보름.
끝간 데 없이 펼쳐진 광대한 설원(雪原).
휘이이이잉......!
눈보라가 기승을 부리며 천지를 휩쓸고 있다.
벌써 사흘 째, 폭설은 조금도 기세를 죽일 줄 모르고 휘몰아 쳤다. 급기야 눈은 발
목까지 빠질 정도로 대지 위에 쌓였고, 뼈를 엘 듯한 한파로 인해 대륙은 온통 꽁꽁
얼어붙고 있었다.
두두두두......!
휘몰아치는 눈보라를 맞으며 한 필의 말이 설원을 가로지르며 달리고 있다.
마상 위에는 한 명의 죽립인이 타고 있었다.
이곳은 중원에서 멀리 떨어진 북방(北方)의 곤륜산(崑崙山), 설원 끝으로 하늘까지
닿을 듯한 곤륜산의 능선이 설풍(雪風)으로 인해 부옇게 보이고 있는 곳이다.
마상의 인물은 규칙적인 속도로 곤륜산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마상인은 쓰고 있던 죽립을 들어올렸다.
죽립 아래 드러난 얼굴은 가면을 쓰고 있었다. 초승달 모양의 눈구멍 속에 자리한
그의 눈은 암울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담자개였다.
파라라라락!
설풍이 그의 장포를 찢어낼 듯이 흔들고 있었다. 담자개는 흐릿하게 보이는 곤륜의
웅자를 바라보며 내심 중얼거리고 있었다.
'아버님, 당신의 결단은 위대했습니다. 그리고... 올바른 것이었습니다.'
그의 암울한 눈동자에 어지럽게 휘날리는 눈송이가 비쳤다.
'당신의 결단으로 인해 천하는 평화를 되찾았고 중원에 뿌리 박으려던 북방민족의
뿌리는 송두리째 뽑혀졌습니다.'
담자개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이 아들은 아버님을 원망하고 증오했었습니다. 하나... 이제는 아버님을 자랑스럽
게 여길 것입니다.'
담자개는 주먹으로 가슴을 쳤다.
'당신은... 이 아들의 자랑스런 아버님이십니다.'
그의 암울하기만 하던 눈동자에서 결연한 빛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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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저도 아버님과 한 약속을 지킬 것입니다.'
그의 눈에서 불꽃이 이글거렸다.
'무영을 죽이고 용백군을 제거하겠습니다. 아버님이 못다 이루신 일들을 이 아들이
모두 해낼 것입니다.'
두두두두......!
끝없는 상념 속에서도 그는 계속 말을 몰았다. 눈발은 더욱 굵어져 한풍을 타고 분
분하게 흩어졌다. 그때였다. 환상처럼 서쪽의 설원으로부터 한 필의 말이 나타났다.
마상에는 역시 한 사람이 타고 있었는데 그 또한 죽립을 눌러쓰고 있었다. 일신에는
눈보다 흰 백의(白衣)를 입었으며, 죽립 또한 흰색이었다. 타고 있는 말도 백마(白
馬), 왼손으로는 말고삐를 쥐고 오른손에는 한 송이의 백장미를 들고 있었다.
온통 백색 일색인 죽립인의 출현은 지극히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그는 일직선으로
달려와 담자개와 나란히 한 채 말을 달렸다. 사전에 약속이라도 한 듯했다.
이 세상에 이런 인물은 오직 한 명, 독로장미 서문표일 것이다.
그는 나란히 말을 몰며 입을 열었다.
"소종사의 서찰은 잘 받았소."
"서문형의 뜻은?"
서문표의 음성은 봄바람처럼 부드러웠다.
"후후... 마교십삼사(魔敎十三邪)는 언제나 한 몸이오."
담자개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대답은 그것이면 충분했다.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설원을 달리는 두 사나이는 조금도 추위를 느끼지 못했다. 아
니, 가슴 속은 도리어 용광로와도 같이 뜨거운 피가 흐르고 있었다.
얼마나 달렸을까?
이번에는 동쪽으로부터 한 필의 말이 등장했다.
마상의 인물은 거대한 체구의 노인이었다. 괴이하게도 그는 어깨에 관을 메고 있었
다.
시마(屍魔) 관중이 아니면 또 누가 있겠는가?
그 역시 달려와 담자개의 옆으로 말을 붙이며 나란히 달렸다.
"하하핫... 오랜만일세, 소종사!"
담자개는 의외인 듯 그를 바라보았다.
"관노야께서 오실 줄은 생각지 못했소이다."
시마 관중은 껄껄 대소를 터뜨리며 말했다.
"천계 이년 정월 보름 오시(午時)에 대설평(大雪平)을 지날 테니 뜻 있는 십삼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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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이라고 쓴 자네의 서찰은 너무 건방졌네."
그는 한 마디로 결론을 내렸다.
"십삼사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아도 한 몸이네."
담자개는 나직이 웃었다. 하지만 그는 가슴이 뭉클할 정도로 감동을 느끼고 있었다.
'이 길이 죽음의 길일지도 모르거늘.......'
관중은 고개 돌려 설원을 빙 둘러보더니 쇠를 긁는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과연 몇 놈이나 모이는지 보겠다! 오지 않는 놈은... 그냥 두지 않겠다."
그의 말이 끝나는 순간 한 가닥 맑고 요염한 여인의 음성이 천리전성(千里傳聲)의
수법으로 들려왔다.
"그냥 두지 않으면 대체 어떻게 하겠다는 건가요?"
중인들은 흠칫하며 고개를 돌렸다.
두두두두......!
뒤쪽으로부터 두 필의 말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한 눈에 두 인물을 알아
보았다. 한 명은 여자로 귀서시(鬼西施) 우문산요였고, 한 명은 사검(邪劍) 막청이
었다.
막청은 무척 초췌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눈빛만큼은 더욱 유현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들은 일행과 합류하여 곤륜산을 향해 달렸다. 모두 오인으로 늘어난 셈이었다. 나
란히 달리던 관중이 중얼거렸다.
"이제 네 명 남았군."
그의 말이 막 끝난 순간 다시 말발굽소리가 지축을 울렸다.
설원의 북쪽으로부터 세 필의 말이 모습을 드러냈다. 서문표는 뜻밖이라는 듯 중얼
거렸다.
"놀랍군! 지난 이십 년 동안 보지 못한 저들까지 나타나다니......."
잠시 후 삼인이 달려와 일행에 합류했다. 그들은 모두 중년인으로 마교십삼사의 일
원이었다.
혈수마번(血手魔幡) 애조앙.
천비도(千飛刀) 추약빙.
쌍마경(雙魔鏡) 음무상.
눈보라를 뚫고 다가온 삼인 중에서 혈수마번 애조앙이 한껏 격앙된 음성으로 일행을
향해 말했다.
"혈관음은 사령(邪令)을 버리고 마교를 탈퇴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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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인들은 아무도 대꾸하지 않았다. 마치 예상이라도 하고 있었다는 듯한 반응들이었
다.
나타날 때는 각자 나타났으나 이제 하나로 뭉친 팔인, 그들은 말머리를 나란히 한
채 곤륜산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이미 죽은 사인, 즉 무정도 모용초와 귀송자 혁련노후, 화미인 소휘경, 고왕 해사아
를 비롯하여 마교를 탈퇴한 혈관음 영호해상을 제외하면 마교십삼사가 모두 한 자리
에 모인 것이다.
얼마나 달렸을까?
곤륜산의 웅자가 더욱 크게 느껴지는 순간 막청이 물었다.
"어디로 가는 것이오, 소종사?"
담자개는 짤막하게 대답했다.
"마교의 발원지."
"천마정(天魔井)?"
"그렇소."
그 몇 마디가 오간 후 팔인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들은 말고삐를 힘껏 움켜쥔
채 곤륜산을 향해 속도를 배가시켰을 뿐이었다.
천마정(天魔井).
그곳은 마교의 발원지다. 천 팔백 년 전 마교의 제 일대 교주인 탁성유(卓惺維)가
마공을 터득했으며, 천 년 전 환궁(幻宮)이 천마구예(天魔九藝)를 창안한 곳이다.
또한 담자개를 비롯한 마교십삼사가 달려가는 곳이었다.
두두두두......!
팔기의 인마는 눈보라를 차며 줄기차게 달렸다.
달리는 동안 팔인은 전신이 팽팽히 긴장되면서 가슴을 두드리는 듯한 벅찬 흥분을
느끼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그들은 자신의 근원을 찾아가는 셈이었다.
천마정은 마교의 영원한 성지(聖地)였다.
모든 것이 무너진 지금 마교의 성지를 찾아간다는 것은 곧 새로운 부활의 의미가 있
었다.
마침내 곤륜산 아래 당도했다.
이제 더 이상 말이 오를 수 없는 천애의 험로(險路)가 이어지는 곳이었다. 팔인은
약속이나 한 듯이 마상을 박차고 일제히 신형을 날렸다.
휙휙휙!
눈보라를 뚫고 달리는 그들의 신법은 가히 섬전과도 같았다. 도끼로 찍어낸 듯한 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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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 칼을 거꾸로 세운 듯한 산봉우리, 만년설(萬年雪)이 거대한 빙벽(氷壁)을 이룬
곳을 마치 평지처럼 가로지르는 유성과도 같은 팔인의 인영은 마침내 그들의 가슴을
들끓게 했던 마교의 성지에 당도할 수 있었다.
천마정(天魔井).
이름과 달리 그곳은 우물이 아니었다. 천마정이 위치한 곳은 곤륜의 한 산정(山頂)
이었으며, 시커먼 빛을 띤 채 만년을 지나도록 얼지 않는 호수를 말하는 것이었다.
마교의 근원지이자 마도인에게는 정신적인 고향과도 같은 천마정.
물빛이 검은 이 호숫가에는 높이 십 장이 넘는 거대한 석비(石碑)가 세워져 있다.
석비에는 천마정(天魔井)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마도인에게는 자부심으로, 정도인에게는 공포의 상징으로 존재해 온 천마정!
"이... 이럴 수가!"
마교십삼사의 팔인은 얼어붙은 듯 경직된 채 일제히 부르짖고 있었다.
보라!
눈앞에 당당하게 우뚝 서있어야 할 천마비(天魔碑)는 간데 없고 그 자리에는 박살난
돌의 파편만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아니, 더욱 놀라운 것은 천마비가 세워져 있던 자리에 백색의 거대한 석비가 새롭게
세워져 있다는 사실이었다.
-정대비(正大碑).
석비는 바로 그 같은 글씨가 뚜렷이 새겨져 있었다.
"으으......."
팔인은 끓어오르는 분노에 전신을 부들부들 떨었다.
마교의 신성한 발상지가 어찌 이 모양이 되었단 말인가?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마교
의 부활을 다짐하기 위해 눈보라를 뚫고 달려온 그들의 눈앞에 세워져 있는 것이 정
대비라니.......
그들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이때였다. 시마 관중이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저건......!"
나머지 칠인의 시선이 거의 동시에 그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
들의 눈동자는 경악으로 부릅떠지고 말았다.
보라!
사방의 산 능선을 따라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인영들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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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자개는 침중히 외쳤다.
"사방... 사방이 모두 포위됐구나! 정파 놈들이오."
그렇다. 그들을, 아니 천마정을 중심으로 겹겹이 포위한 채 몰려들고 있는 수천에
달하는 인영들은 바로 중원무림의 정도고수들이었다. 그들은 시시각각 거리를 좁혀
오고 있었다.
"......."
장천린은 걷고 있었다.
그 뒤를 이어 원계묵과 사문도, 반송과 요북사도 담오, 부금진과 낙수범 등이 바짝
따랐고, 다시 그 뒤에는 구룡장원의 고수들을 필두로 구파일방과 천금동을 탈출한
기인들을 비롯하여 수많은 정도의 인물들이 따르고 있었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휘날리는 눈보라 속을 묵묵히 걷고 있는 그들의 목표는 동일했다. 구릉을 하나씩 넘
을 때마다 목표는 가까워지고 있었다.
하늘과 맞닿을 듯이 높다는 곤륜산(崑崙山)이다.
중원을 출발하여 이곳까지 오는 동안 그들의 가슴에는 무림의 평화란 명제가 뚜렷이
박혀 있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그들의 마음은 하나가 되었다.
마교의 잔당(殘黨)들을 제거하면 그토록 그리던 무림의 평화를 쟁취할 수 있는 것이
다.
휘이이이잉.......
세찬 눈보라가 회오리를 일으켰다.
눈보라 속에서 점점이 서있는 팔 명의 인영이 그들의 눈에 들어왔다. 정대비를 배경
으로 우뚝 서있는 인물들. 마교십삼사 중 팔인이었다.
장천린은 그들의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
운명이었다. 장천린과 담자개의 시선이 허공에서 사납게 부딪쳤다. 먼저 입을 연 것
은 장천린이었다.
"마교는 무너졌다. 이제 그대들이 마지막 생존자, 따라서 그대들이 사라짐으로써 마
교는 종지부를 찍게 될 것이다."
그의 말을 받은 것은 사검 막청이었다. 그는 허파를 긁어내듯 괴이한 웃음을 날렸다
"훗훗... 좋아, 좋아! 대충 살펴봐도 천 대 일 정도는 되겠군... 좋아, 좋아!"
무엇이 좋다는 것인가?
이번에는 독로장미 서문표가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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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면 우리가 패한들 수치스러운 일이 아닐 것이외다!"
그의 눈에서는 투지가 타올랐다.
시마 관중도 입술을 비틀며 건조한 음성을 흘렸다.
"수치라고? 흐흐! 영광이겠지. 장차 마교가 부활한다면 오늘의 일은 그들의 가슴 속
에 영원한 신화가 될 것이다."
혈수마번 애조앙도 고개를 끄덕였다.
"다 좋은 소리야. 하나 살아난다면 더욱 멋진 신화를 만들 수 있겠지!"
관중이 킬킬 웃었다.
"이기면. 통쾌하게 이기면 더욱 좋겠지."
담자개는 비로소 입을 열었다. 그는 암울한 시선으로 칠인을 둘러보았다. 그의 음성
은 깊이 가라앉아 있었다.
"내가 여러분을 잘못 부른 것 같소."
서문표는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후후... 마교십삼사는 공동운명체요. 소종사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것이오."
그는 힐끗 시마 관중을 바라보며 말했다.
"관형, 우리 지옥에서 만납시다."
말이 떨어지는 순간 그는 곧바로 신형을 날려 겹겹이 에워싸고 있는 정도 군웅들 속
으로 뛰어 들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나머지 칠인도 더 이상 기다리지 않았다. 그들은 일제히 거대한
파도 속으로 몸을 던졌다.
싸움은 반드시 승자(勝者)와 패자(敗者)를 남긴다. 또한 삶과 죽음으로 갈라놓게 마
련이다. 이번 싸움도 예외는 아니었다. 마교십삼사는 그 중 하나를 택해야 했다. 하
지만 그들은 아무 것도 택하지 않았다. 애당초 승산이 없는 싸움이었기에... 삶의
희망이 전무한 싸움이었기에.
"야아아아아아!"
누군가의 입에서 처절무비한 장소(長嘯)가 터져 나왔다. 한(恨)이 절절이 배어있는
장소였다.
콰우우우우!
파도가 치기 시작했다. 아니, 그것은 천 명이 동시에 일으키는 경력(勁力)의 소용돌
이였다. 마교십삼사의 팔인이 뛰어드는 순간 거대한 경력이 해일처럼 일어났다.
마교의 팔인이 아무리 지고무상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한들 어찌 천 명의 힘을 당할
수 있겠는가! 그들은 성난 파도를 향해 떨어진 여덟 개의 조약돌과 같은 존재에 불
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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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아앗......!
담자개는 검무(劍舞)를 추었다. 화려하게 불꽃을 뿜어내던 그의 검은 수백 자루의
검과 부딪쳐 산산조각이 났다. 천만(千萬)의 검파(劍波) 속에서 그는 장렬하게 산화
하고 말았다.
서문표는 백색의 안개처럼 파도 사이를 누볐다. 파도 사이를 흐르던 안개는 어느 순
간 핏방울로 화해 설지(雪地) 위에 백만 송이의 혈장미(血薔薇)로 화하고 말았다.
시마의 관(棺)이 풍차처럼 회전하며 폭풍을 일으켰다. 그러나 작은 폭풍에 불과했다
. 거대한 파도가 관을 산산조각 내고 말았다. 관중의 몸은 그가 평생 동안 떠메고
다녔던 관과 함께 가루가 되어 설풍을 따라 천공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사검 막청은 어떤가?
스스스스!
그의 검은 음유(陰柔)했다. 소리도 느낌도 없이 군웅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촤아아아악!
핏줄기가 선홍빛 무지개를 그렸다.
수급이, 팔 다리가 허공으로 떠오르며 춤을 춘다. 막청은 혈향(血香)에 취해 춤을
추었다. 거대한 파도가 다가왔다. 그는 비릿하게 웃으며 파도 속으로 뛰어 들었다.
콰우우우!
파도가 지나간 뒤 더 이상 그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파라라라락!
혈수마번(血手魔幡) 애조앙의 마번(魔幡)은 악마의 울부짖음을 토해내며 나부꼈다.
왼손의 핏빛 광채를 줄기줄기 뿜어냈고, 오른손의 흑색 마번은 폭풍을 일으켰다.
태어난 이래 처음으로 그는 자신의 무공이야말로 다수를 상대하는 데 무림최강의 무
공이란 자부심을 느꼈다. 혈수 아래 십여 명의 수급이 으스러졌으며, 마번의 깃발
아래 수십 명이 사지가 끊기며 날아갔다.
하지만 다수도 다수 나름이었다.
정도 군웅 일천 명은 정예 중의 정예고수들이었다. 파도는 잠시 멈칫했을 뿐, 다시
밀려왔을 때는 해일(海溢)이 되어 그를 삼켜 버렸다. 그는 온 세상이 암흑으로 변하
는 것을 느꼈다.
천비도(千飛刀) 추약빙은 비도(飛刀)의 달인이다.
슈슈슈슈슉!
양소매가 펄럭이자 수천 개의 유성우(流星雨)가 흐르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도합
백 팔 개의 비도가 동시에 날아갔다. 그것은 그의 생애 전부를 쏟아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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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빗발치듯 쏘아져 나간 비도조차 해일처럼 몰려오는 파도를 멈추게 하기에는 어림도
없었다. 파도는 여지없이 그를 삼켜버렸다.
또 있다.
귀서시 우문산요의 입가에는 처절할 정도로 아름다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의 칠색
요대(七色腰帶)가 끌러지는 순간 천상의 선녀가 춤추는 듯한 장관이 연출되었다.
"호호호호호홋......!"
웃음소리.
혼백(魂魄)을 앗아갈 듯한 웃음소리가 파도 속에 묻혀 버렸다. 파도가 지난 후 그녀
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다만 산산조각으로 찢어진 칠색의 요대만이 수만 송
이의 꽃잎처럼 허공에 휘날렸을 뿐이었다.
쌍마경(雙魔鏡) 음무상의 병기는 특별했다.
두 개의 마경(魔鏡)이 마주칠 때마다 내공이 약한 군웅들은 고막이 파열되어 버렸다
. 마경이 번쩍이는 순간 파괴적인 마광(魔光)이 그들의 눈을 멀게 했다.
하지만 물은 아래로 흐른다.
마경은 산산조각이 났고, 음무상은 산화(散化)되고 말았다.
어둠이 밀려온다.
곤륜의 산정은 음산한 어둠 자락에 가라앉고 있었다. 미친 듯이 휘날리던 눈보라도
차츰 잦아들고 있었다.
혈전(血戰)은 하루 낮을 계속되었다.
설지는 시뻘겋게 물들었으며 즐비한 시신들이 역한 피비린내를 풍기고 있었다.
그들은 몰랐다.
자신들이 파도에 삼켜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독로장미 서문표를 피안개로 만든 것은 사문도의 일월쌍극(日月 戟)이라는 것을.
사검 막청의 몸을 양단한 것이 마도 원계묵의 칼이었다는 사실을. 애조앙의 마번을
갈가리 찢으며 그의 가슴을 관통한 것이 옥류향의 흰 손이라는 사실을. 천비도 추약
빙의 비도가 허공에서 차단되어 비껴나가고 그의 가슴과 목을 가른 것이 반송과 담
오의 칼이었다는 사실을!
피 안개 속을 풍차처럼 회전하던 담자개는 어느 순간 거대한 벽에 부딪쳤다. 그의
장력은 더 이상 나가지 못했다.
그의 초승달 모양의 눈에 이채가 솟았다. 그를 가로막은 운명의 벽! 그것은 오늘의
상황을 이끌어낸 정도 무림맹의 맹주 장천린이었다.
담개는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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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승달 모양의 눈은 늘 웃는 모양이었으나 이번의 웃음은 그 의미가 달랐다.
......너였느냐?
......그렇소. 귀하의 운명은 오늘로 종지부를 찍게 되오. 잘 가시오.
무언(無言)의 대화는 짧았다. 눈과 눈으로 나눈 대화였으므로.
담자개와 장천린이 부딪쳤다가 떨어졌다. 한 사람은 대지 위에 서있었고 한 사람은
누웠다.
누워있는 자의 가슴 위로 눈송이가 쌓였다. 그 눈은 금세 붉게 물들었다. 펑펑 쏟아
져 내리던 함박눈이 거짓말처럼 그친 것은 그 순간이었다. 사위가 적막해졌다.
곤륜산은 적막 속에 빠른 속도로 어두워지고 있었다.
담자개의 죽음과 함께 조화성주 염무의 비밀도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지고 말았다.
비극의 사생아 사문도의 신세에 얽힌 비밀과 함께.......
이날, 눈보라가 대륙을 휩쓸었던 천계(天啓) 이 년 정월 보름.
마교(魔敎)의 장구한 역사를 막을 내린 날이었다.
장천린은 어둠의 장막이 떨어지는 곤륜산을 내려오고 있었다.
그의 곁에는 옥류향이 걷고 있었고 그 뒤로 원계묵과 사문도가 따르고 있었다. 옥류
향은 히죽 웃으며 말했다.
"용형. 내게 한 약속은 지켜야 하오, 꼭이오."
장천린이 돌아보자 그는 입술을 묘하게 실룩이며 물었다.
"설마 벌써 잊은 것은 아니겠지요? 상관소저를 받아들인다는 것 말이오."
장천린은 고소를 머금었다.
"이미 옥형과 약혼했다고 하지 않았소?"
"후후! 얼굴도 안보고 한 약혼이 무슨 소용 있겠소? 그 점은 잊으시오. 올해 안으로
반드시 상관소저를 용형의 아내로 삼아야 하오."
"하하! 이거 정말 큰 일 났구려."
장천린은 간만에 밝은 웃음을 터뜨렸다. 옥류향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리고 한 가지 부탁이 더 있소."
"부탁이라니요?"
"나를... 구룡장원의 일원으로 받아달라는 것이오."
장천린은 걸음을 멈췄다. 돌아보는 그의 얼굴에는 경이로움이 떠올랐다. 옥류향은
이미 결심한 듯 간절한 눈빛으로 그의 손을 잡았다.
"진심이오. 부탁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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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천린은 옥류향의 손에서 뜨거운 직정(直情)을 느꼈다. 마침내 그는 고개를 끄덕였
다.
"좋소. 옥형이 도와준다면 천하에 못 이룰 게 뭐가 있겠소?"
"고맙소, 용형!"
두 사람은 뜨겁게 서로의 손을 마주 잡았다.
하산한 일행은 곤륜산 아래 대기하고 있던 말에 올랐다.
장천린과 함께 나란히 말을 몰던 옥류향은 생각난 듯이 물었다.
"참, 무영은 어디로 갔는지 아시오?"
눈보라가 그친 밤하늘은 거짓말처럼 개어 별이 총총했다. 장천린은 휘황하게 뒤덮인
성운(星雲)을 우러러보며 대답했다.
"그 분은 한선생이란 이름을 지닌 채 영원히 은퇴하셨소. 아마... 다시는 볼 수 없
을 것이오."
"음......."
옥류향은 신음을 발했다. 장천린은 채찍을 휘둘렸다.
"자, 이제 갑시다. 설원을 마음껏 달려보는 것도 좋을 것이오."
"끼럇!"
옥류향은 박차를 가했다.
두두두두두......!
요란한 말발굽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은 질풍처럼 달리기 시작했다. 뒤를 이어 군웅들
도 일제히 달렸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중원(中原), 새로운 역사가 열리는 땅이었다
* * *
후기(後記).
대륙을 휩쓸던 일대의 회오리는 막을 내렸다. 하지만 그것은 무림(武林)에 국한된
일이었을 뿐, 곧이어 천하는 난세(亂世)에 돌입하고 만다. 부패할 대로 부패한 명조
(明朝)는 날이 갈수록 기울어만 간 것이다.
그 와중에서 구룡장원(九龍莊院)의 장천린은 마침내 대륙의 상권(商權)을 장악하게
된다. 더불어 무림계를 통일시킨 그는 살아있는 무림계의 신화를 창조하게 되는데..
.....
달빛은 검 끝에 스러져도 천하는 아직 어두우나니!
(月落劍極天未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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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호(嗚呼) 통재(痛哉)라!
여진(女眞)의 누르하치는 만리장성을 넘어 중토를 짓밟기 시작했으니, 대륙은 전화(
戰禍)에 휩쓸리고 만다. 무능한 황제와 부패한 조정의 대신들이 기우는 국운(國運)
을 바로 세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급기야 대륙의 풍운아 장천린은 모든 것을 떨치고 전운(戰雲)이 감도는 산해관(山海
關)으로 떠난다.
천계(天啓) 칠 년. 누르하치는 전열을 가다듬어 중토를 재침(再侵)하니, 대영웅 장
천린은 산해관을 지키는 명의 맹장 원숭환에게 진천뢰(震天雷)를 공급하여 누르하치
를 뇌내(雷內) 속에 지게 하다.
하지만 천리(天理)는 이미 예정되었던 것인가!
떨어질 줄 모르는 태양과도 같던 대명제국(大明帝國)도 마침내 기울게 되니.......
향후 반천복명(反淸復明)의 뿌리가 대륙의 심처(深處)에 면면히 살아남아 숨쉬게 됨
은 과연 누구의 힘이었던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