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장 대륙의 상권을 통일해 주오
온몸이 결박당한 듯한 뻐근함을 느끼며 장천린은 점차 의식을 찾았다.
......어떻게 된 것일까?
......이곳은 어디인가?
장천린은 풀로 붙여놓은 듯이 끈끈하고 무겁게만 느껴지는 눈꺼풀을 힘겹게 열었다.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창이었다. 휘장이 걷혀진 창문을 통하여 아침을 알리는 대
자연의 위대한 광구(光球)가 떠오르는 것이 정면으로 보였다. 강렬한 태양빛이 눈을
찌르자 한순간 막막한 기분이었다.
"아하......."
장천린은 길게 기지개를 켰으나 가슴이 납덩이를 얹어 놓은 듯 무거움을 느꼈다. 알
고 보니 유리공녀가 그의 가슴에 머리를 묻은 채 곤히 잠들어 있었다.
아마도 밤새 그를 간호하다 지켜 잠이 든 모양이었다.
장천린은 몸을 일으키려다 그녀가 잠을 깰까봐 그만 두었다. 그는 편안한 자세를 취
한 후 기억을 떠올려보았다.
'고왕 해사아를 죽인 후 정신을 잃은 것 같았는데.......'
거기까지가 기억의 마지막 부분이다. 더 이상은 아무 기억도 남아있는 것이 없었다.
창문을 통해 방 안 가득 들어온 햇살이 눈부셨다.
'사예는 어디 갔지? 남북쌍마와 호소저는? 대체 이곳은 어디고 난 어떻게 이곳에 와
있는 것일까?'
기억이 사라져버린 시간의 공백. 그것은 많은 의문들을 불러 일으켰다.
'마치 오랜 시간을 잠 속에 빠져있었던 것 같구나.'
창이 약간 열려있는 것일까? 산뜻하면서도 다소 찬 공기가 느껴지고 있었다. 그는
전투장면을 떠올렸다.
'환우구검은 예상보다 훨씬 대단한 위력이었다. 깊이로 친다면 달마삼검에 조금 못
미칠지 모르나 패도적인 면에서는 도리어 뛰어난 점이 있다.'
장천린은 한숨을 쉬었다.
'한선생이 정말 무영 고검령이었단 말인가?'
그는 몇 가지 추리를 해보았다. 고개가 절로 끄덕여지고 있었다.
'무영의 존재는 언제나 안개에 가린 듯 신비에 싸여 있었다. 내가 만난 한선생도 자
신을 깊이 감춘 은자(隱者)였다. 그가 무영일 가능성은 충분하다.'
문득 가슴이 바늘로 찌르는 듯 아파왔다. 아마도 격전을 치르면서 입은 내상 때문일
것이다. 장천린은 입가에 고소를 머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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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하게 익히지 못한 달마삼검을 무리하게 전개했기 때문에 진기가 역류했다.'
그는 잠시 숨을 몰아쉬며 통증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그때였다. 방문이 열리며 천
사예가 들어섰다.
그녀는 장천린을 보지 못하고 급히 창문으로 다가가 문을 닫으며 중얼거렸다.
"아픈 사람에게 이제껏 찬바람을 쏘였다니......."
장천린은 그 말을 통해 그녀가 얼마나 자신을 끔찍이 위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 그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난 괜찮다. 사예."
천사예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장천린을 본 그녀의 얼굴이 온통 기쁨으로 빛
났다.
"깨어나셨군요!"
그녀의 들뜬 음성에 잠들어 있던 유리공녀가 깨어났다. 그녀는 커다란 눈을 몇 차례
깜박이다 꽃처럼 활짝 웃었다.
"천린......."
오랜만에 유리공녀의 해맑은 웃음을 보자 장천린은 기분이 상쾌해졌다.
"좋은 아침이다."
"그... 그래요."
정말이지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져 들어오는 기분 좋은 아침이었다.
장천린이 깨어난 곳은 태문현(太門懸)의 한 객점이었다. 내상을 입고 혼절한 그를
임시로 이곳에 옮겨 요양을 시킨 것이었다.
함께 온 일행 중 몇 사람들은 이미 떠난 뒤였다.
남북쌍마는 직접 나서서 장천린의 상세를 치료한 후 떠났다고 했다. 그들은 반 년
후 복우산 홍엽곡(紅葉谷)에서 만나자는 말을 남겼다는 것이다. 전해들은 이야기였
으나 그들은 한결같이 그를 두고 떠나는 것에 대해 미안해하고 있다고 했다.
오후가 되자 장천린은 대충 움직일 수가 있었다.
객점에서 계속 머무를 수가 없었기에 그는 두 여인과 함께 밖으로 나왔다. 비록 몸
은 완전한 상태가 아니었으나 조화성에서 뜻한 바를 이루었으므로 기분은 몹시 좋았
다.
그는 객점을 나서다 문득 생각난 듯이 물었다.
"참, 호소저는 어떻게 됐소?"
천사예는 걱정스러운 듯 대답했다.
"호소저의 상처도 꽤 심각했어요. 하지만 도리어 당신을 걱정하면서 떠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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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천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천사예는 은근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호소저가 떠나기 전 당신에게 전해달라고 하더군요."
"음? 무슨 말을?"
"천금동에서 당신을 오해하여 함부로 굴은 것을 용서해 달라고 했어요."
장천린은 싱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랬었군."
이번에는 유리공녀의 표정이 야릇해졌다.
"그 분 호소저... 눈치가 조금 이상했어요."
그녀는 눈을 갸름하게 뜨면서 덧붙였다.
"천린 당신을 꽤 좋아하고 있는 것 같던데요?"
장천린은 유리공녀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당연하지. 나야 워낙 여자들에게 인기가 좋지 않은가?"
"어머!"
유리공녀는 탄성을 발했다.
"호호호호......!"
천사예도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세 사람은 유쾌한 기분으로 거리를 걸었다. 그런데 유독 거리가 시끌벅적했다. 사람
들이 온통 거리로 쏟아져 나와 있는 것 같았다. 뿐만 아니라 옷도 비단옷이거나 정
성껏 장만한 새 옷을 주로 입고 있는 것 같았다.
장천린은 왠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오늘이 무슨 특별한 날인가?"
천사예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요?"
펑! 펑!
일행은 깜짝 놀랐다. 갑자기 바로 뒤쪽에서 요란한 폭음이 울린 것이다. 고개를 돌
린 장천린은 장난감 폭죽을 터뜨린 후 까르르! 웃으며 달려가는 아이들을 보았다.
그는 손으로 이마를 탁 치며 말했다.
"그렇군, 오늘이 바로 원단(元旦)이었군!"
그제야 천사예도 탄성을 터뜨렸다.
"아! 맞아요. 그러고 보니 오늘이 새해 첫날이군요."
그 동안 너무나 바쁘게 움직였기 때문에 세월이 흐른 것도 미처 의식하지 못한 것이
었다. 장천린은 어이가 없었다. 아무리 바빴기로서니 원단이 온 것도 몰랐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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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두 여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유리, 사예... 새해에는 모든 것이 소원대로 이루어지기를 기원하오."
천사예와 유리공녀도 그를 향해 고개 숙이며 축복을 했다.
"당신도 만사가 형통하기를 빌어요."
원단은 그들에게 새로운 기분을 안겨주었다. 장천린은 천사예를 바라보며 물었다.
"사예, 당신의 올해 소원은 무엇이오?"
천사예는 눈이 부신 듯 장천린을 바라보며 입가에 살포시 미소를 띄웠다.
"그냥 마음속에 담아둘 거예요."
"하하! 마음대로 하시오. 그럼 유리는?"
유리공녀는 솔직했다.
"유리의 소원은 당신과 언제까지라도 함께 있는 거예요. 당신과 함께라면 모든 것이
행복하니까요."
그야말로 가장 단순하면서도 솔직한 심경을 고스란히 담은 말이었다. 장천린은 그만
머쓱해지고 말았다.
"하하... 이거 쑥스럽구만."
세 사람은 약간 들뜬 기분이 되어 혼잡한 거리를 걸어갔다.
흐르는 세월은 멈추는 법이 없다.
유난히도 눈이 많이 내렸던 그 해 겨울도 설매(雪梅)의 고고한 기상과 정취를 채 음
미하기도 전에 운남(雲南)으로부터 불어온 봄바람에 어느덧 기울어갔다.
대지는 온통 꽃바람으로 가득 찼으며 어느새 신록(新綠)이 우거지고 폭염이 이글거
리는 여름으로 접어들었다. 그야말로 계절의 변화는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흐르는 세월 속에서 대륙은 점차 격동기로 접어들고 있었다.
만력 사십구년 칠월.
초하의 폭염 속에서 대륙의 주인인 천자(天子)가 붕어했다.
사십 구 년간의 장구한 세월을 대륙의 하늘로 군림하며 온갖 폭정(暴政)을 일삼고
만년에 접어들어서는 정사를 돌보지 않았던 황제 신종(神宗)의 죽음이 시사하는 바
는 결코 심상치 않은 것이었다.
만력제(萬曆帝) 신종의 뒤를 이어 장남(長男)인 태자 주상락(朱常洛)이 보위에 오르
니 그가 바로 광종(光宗)이었다.
그러나 성격이 쾌활하고 매사에 낙천적이었던 광종(光宗)도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
작하는 구월의 어느 날 몹쓸 병에 걸려 죽음을 맞이한다.
신종이 재위했던 사십 구 년간의 세월과는 너무도 대비적인 두 달여에 불과한 재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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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이었다. 연속된 국장(國葬)으로 황실은 술렁댔고, 그 와중에서 광종의 장자인
주유교(朱由校)가 다시 보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희종(熹宗)이다.
연속된 보좌의 교체 속에서 정권을 거머쥔 환관들의 위세는 갈수록 기승을 부렸다.
특히 위충현(魏忠賢)은 희종의 신임을 한 몸에 받으며 막후의 세력가로 막강한 권력
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그의 행패는 희종 외에는 누구도 건드리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으며 그에 따라 관리
들은 정사를 돌보기보다는 환관 위충현의 비위를 맞추기에 급급했다. 어디 그뿐인가
? 위충현은 대소관리들을 자신의 휘하로 끌어들이더니 급기야 동창(東廠)과 금의위(
錦衣衛)를 자신의 소속으로 장악하게 되니, 명조는 이제 걷잡을 수 업는 파국의 길
로 접어들고 있었다.
황조(皇朝)가 이렇듯 가파른 내리막길을 걷고 있을 때 무림의 동태는 또 어떠했는가
무림은 무림대로 격변을 예고하는 몇 가지 사건이 차례로 일어나고 있었다.
첫 번째 사건.
지난 수십 년의 세월에 걸쳐 홀연히 사라졌던 수백 명의 기인들이 조화성에 갇혀 있
다 집단적으로 탈출한 사건이 일어났다. 특기할 만한 사실은 그들의 탈출에 결정적
인 역할을 한 사람은 정도무림의 연합맹주라는 것이었다.
정도무림의 연합맹주.
그의 정체는 마치 구름 속에 숨은 신룡인 양 아직까지도 신비에 가려져 있었다.
두 번째 사건.
조화성의 성주 염무가 돌연 전무림을 조화성의 예하에 둔다는 충격적인 선언을 한
것이다. 실로 광오한 선언이었다. 도대체 무슨 의도로 염무는 그런 선포를 했단 말
인가?
그로 인해 무림은 온통 흔들리고 있었다.
세 번째 사건.
마교(魔敎)의 등장!
천 년의 장구한 세월 속에서 어둠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린 채 잡초처럼 끈질기게 생
명력을 이어 내려온 악마의 세력 마교가 마침내 무림의 전면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
다.
조화성주 염무가 마교의 교주임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마교의 힘은 정확하게 드러나지 않은 상태였다. 단지 마교의 최정예 고수들로 알려
진 마교십삼사(魔敎十三邪)만이 간간이 활동을 해왔을 뿐이었다.
그런 마교가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특히 마교의 장로원(長老院)이라 할 수 있는 천마루(天魔樓)의 구천마존(九天魔尊)
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지난 백여 년간 마교를 이끌어온 중추적인 인물들이
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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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천마존의 수뇌는 백마(白魔) 갈훼였다. 그는 과거 신주사성의 일원으로 이미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다.
마교(魔敎)의 등장으로 무림은 걷잡을 수 없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충격적인
사건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네 번째 사건.
그 동안 전설로만 인구에 회자되어 오던 신비의 여인집단 신녀궁(神女宮)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신녀궁에 대해 알려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들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신녀궁주가 누구인지조차 아는 사람이 없었다. 모든 것
이 철저히 비밀에 싸여있는 여인집단일 뿐이었다.
다만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옥녀(玉女) 구양영봉(歐陽靈鳳)이란 여인과 신녀십비(
神女十秘)로 불리는 열 명의 미녀들이 활약을 시작했으며, 그녀들의 손아래 중원무
림의 기라성 같은 고수들이 추풍낙엽처럼 산화하고 있다는 사실뿐이었다.
기이한 것은 신녀궁의 행동이었다. 그녀들이 죽이는 대상은 하나같이 과거 무영(無
影)과 신산(神算)의 세력들이라는 점이었다.
과연 그녀들은 왜 무영과 신산의 세력만 골라 죽음의 손을 뻗치는 것일까?
의문은 의문을 낳을 뿐이었다.
무림은 경동(驚動)하고 있었다.
풍운을 예고하는 만력 사십 구 년이었다. 이미 구르기 시작한 수레바퀴는 멈출 수
없고 던져진 주사위도 회수할 수 없는 법, 무림천하는 난세(亂世)를 예감하며 예측
할 수 없는 세월을 맞이하고 있었다.
만추(晩秋).
허공을 휘돌며 떨어지는 한 장의 낙엽을 보고 천지에 가을이 다가왔다는 것을 안다
고 했던가?
천계(天啓) 원년(元年).
천하는 변했다.
새로운 천자의 등극은 황실과 명조의 정국에 미묘한 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무림계에도 바야흐로 엄청난 풍운이 일 징조를 보이고 있었다. 겉으로
는 지극히 평온한 듯 보였으나 실은 전무후무한 대혈겁이 태동(胎動)하고 있었다.
구룡장원은 강남상권의 중심부다.
천하의 상계(商界)는 크게 강북의 옥류향과 강남의 용백군으로 나뉘어지고 있었다.
천재적인 상술을 지닌 두 거상은 사실상 천하의 주인일지도 모른다. 대륙에는 전운(
戰雲)이 짙게 드리워져 있어도 정작 황금(黃金)에 대한 인간의 욕망과 애착은 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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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 때문이다.
"가을이 깊었군......."
구룡장원의 내전에서 한 사나이가 화원을 내다보며 중얼거렸다.
그는 천하에서 가장 신비한 사나이로, 상계에서는 양대거봉의 하나요 무림계에서는
극비리에 추진된 정도연맹(正道聯盟)의 맹주인 장천린이었다.
그가 구룡장원에 돌아온 지 어언 팔 개월, 그 동안 한 번도 밖으로 나가지 않고 있
었다. 하지만 그는 비천(飛天)의 날을 준비하는 한 마리 잠룡(潛龍)과도 같은 상태
였다. 그는 은밀히 조화성과의 결전의 날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장천린은 화원의 나무들이 점차 잎을 떨구고 있는 광경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봄, 여름... 그리고 가을, 겨울... 계절은 항상 돈다."
그는 누군가에게 하듯 중얼거렸다.
"천하의 이치도 그런 것이 아닐까? 야망도 그 시대가 지나면 물거품처럼 스러지는
것... 한데 왜 인간들은 그토록 불나방처럼 무모하게 덤비는가?"
조화성에서 겪은 일은 그에게 획기적인 변화를 주었다. 그는 이제 젊음의 혈기보다
는 보다 완숙하고 침착한 인간의 자세를 보이고 있었다.
장천린은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옥류향이 방문한다는 날이 꼭 삼일 남았군."
그렇다. 한 달 전 옥류향은 인편으로 서신을 전해왔다. 서신의 내용은 구룡장원을
방문하여 한 가지 긴요한 일을 상의하겠다는 것이었다.
'대체 무엇을 상의하겠다는 것일까?'
궁금했다. 더불어 옥류향의 그 동안의 변화된 모습이 무척 흥미로웠다.
'만나보면 알겠지.'
장천린은 방을 나섰다. 마당에 내려서는 그의 얼굴이 부드러워지고 있었다.
'설연이 요즘 꽤나 답답해하겠군.'
잠시 후 그는 내원에 있는 한 침실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흠.......'
그는 약간 장난스런 표정을 지었다.
침상 옆 의자에 등을 돌린 채 앉아있는 여인이 있었다. 윤기가 도는 풍요로운 머리
카락을 허리까지 길게 늘어뜨린 여인은 황보설연이었다. 그녀는 무엇엔가 열중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장천린은 발자국 소리를 죽여 그녀의 등뒤로 접근해갔다. 황보설연은 아무 것도 느
끼지 못한 채 여전히 무슨 일인가에 열중하고 있었다.
'대체 무엇을 하고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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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천린은 그녀의 등뒤에 서서 낮게 기침했다.
"험! 설연, 뭘 그리 열중하기에 내가 들어온 것도 모르고 있소?"
"어머!"
후다닥!
황보설연은 마치 도둑질을 하다 들킨 아이처럼 무엇인가를 급히 감추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하하! 그것이 뭐요?"
"아, 아니에요. 아무 것도......."
황보설연은 귓불까지 빨개지며 얼굴을 붉혔다.
"대체 무엇이오? 어디......."
장천린은 장난스런 심정으로 그녀가 감추고 있는 천을 슬쩍 빼앗았다.
"이건......?"
그는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어... 린아이 옷이 아니오?"
황보설연은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네, 우리들의 아기가 입을 옷이랍니다."
장천린은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의 눈은 자신도 모르게 황보설연의 아
랫배로 향했다.
확실히 불러 보였다. 황보설연은 임신 중이었던 것이다. 그는 한결 부드러워진 음성
으로 물었다.
"몇 개월 되었소?"
"다섯 달째예요."
황보설연은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 장천린은 고개 숙여 그녀의 반듯한 이마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몸을 보중하시오. 그리고 꼭 딸을 낳으시오. 설연을 닮은."
"아니에요. 저는 아들을 낳고 싶어요. 천린을 닮은......."
"하하! 아니오. 나는 딸이 더 좋소."
"아니에요. 전 아들이......."
문득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보며 환하게 웃었다.
장천린은 행복했다. 구룡장원에는 그를 사랑하는 많은 여인들이 있었다. 황보설연,
동방옥, 유리공녀, 천사예... 그녀들은 한결같이 절세미녀들이었다.
처음 유리공녀와 천사예를 구룡장원으로 데리고 돌아왔을 때 그는 은근히 걱정을 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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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다. 그러나 그것은 기우임이 밝혀졌다.
여인들은 현숙하기 이를 데 없어 그의 염려는 금세 해소되어 버린 것이다. 특히 황
보설연은 명문의 여인답게 모든 것을 슬기롭게 대처하여 여인들 사이의 투기(妬忌)
란 찾아보려야 볼 수가 없었다.
따라서 장천린의 마음은 말할 나위 없이 평화로웠다.
사실 그는 미래에 대해 장담을 할 수 없었다. 만일 그가 일신의 안위만을 좇아 상계
에 남아 있고자 했다면 행복은 보장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것을 알면서도 그는
인생의 노정을 바꾸었다. 자신만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장부답지 못한 짓이라 생
각한 것이다.
"후후... 이놈이 지금 놀고 있는 모양이오."
"아이......."
"장차 놈이 사내라면 장군이 될 것이고 계집애라면 설연처럼 미인이 될 것이오."
"후훗! 정말 그럴까요?"
불 꺼진 침실. 그곳에는 부부만의 아늑한 대화가 있었다.
장천린은 동그랗게 부풀어 오른 여인의 배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만삭이 되어 가는
여인의 뱃속에는 그가 뿌린 생명의 씨가 자라고 있었다.
세월은 흐를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세상에는 새로운 인간이 뜻을 펼치게 될 것이다
손, 두 사나이의 손이 서로의 뜨거운 체온을 나누며 굳세게 마주잡았다.
"오랜만이오, 용형!"
"옥형도 오랜만이오."
장천린과 옥류향.
두 사람은 수년만에 다시 만나게 되었다. 금월산(金月山)에서 생사의 기로를 헤맬
때 그들은 사나이끼리의 진한 우정을 나눈 바 있었다. 그날 이후 두 사람은 천하상
계의 양대 거목이 되어 다시 만났다.
옥류향의 얼굴은 온통 검흔(劍痕) 투성이로 지난날의 절세미남자의 흔적은 어디에서
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는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 그때 진작 용형이 거목임을 알아야 했었소. 지금 이렇게 성장한 용형을 보니
참으로 감개무량하오."
장천린은 미소지었다.
"옥형의 거취가 궁금하더니 역시 금백만 대인의 뒤를 이어 강북상권을 장악했구려.
과연 옥형만이 가능한 일이었소이다."
"하하하......."
옥류향은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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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는 과거의 옥류향이 아니었다. 그에게서는 온갖 세파를 다 겪은 노련한 상인
의 모습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었다.
장천린은 과거 그가 무림인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었다. 그것은 옥류향 역시 마찬
가지였다. 그는 지금도 장천린이 거상이라는 사실만을 알고 있을 뿐이었다.
장천린은 옥류향의 강렬하게 빛나는 눈빛을 통해 느껴지는 바가 있었다.
'과거의 옥류향이 아니다."
옥류향은 문득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소제가 용형을 찾아온 것은......."
옥류향은 빛나는 시선으로 장천린을 주시했다.
"먼저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소이다. 용형은 아직도 천하상계를 주름잡고 싶은
마음이 있소이까?"
장천린은 낭랑하게 웃었다.
"하하하! 마음만 있다고 되는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강북에 옥류향이 있는 이상 어
쩌면 그것은 영원히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르지요."
옥류향의 얼굴에 한 가닥 신비한 빛이 어렸다.
"어쩌면... 용형의 뜻대로 될 수도 있소이다."
"......?"
"용형, 내 눈을 보시오. 이 옥류향이 예전의 옥류향으로 보이오?"
장천린은 짐짓 놀란 표정을 지었다.
"후후! 옥류향은 변했소. 옥류향의 뜻은 이제 상계에 있지 않소."
장천린은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신 후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그렇다면 어디에 있소이까?"
옥류향의 눈에서 뜨거운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복수요!"
"복... 수......!"
"그렇소. 나 옥류향에게 남아있는 것은 오직 복수에 대한 일념뿐이오."
장천린은 보았다. 옥류향의 두 눈에 이글거리는 불꽃과도 같은 기운을! 그것은 복수
심에 불타는 한 사나이의 집념에 찬 눈빛이었다.
"이 옥류향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했던 한 사람에 대한 복수를... 삶의 가장 큰 의미
로 삼게 되었소이다."
장천린은 한동안 침음하다 신중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 분은 어떤 분이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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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류향은 서슴없이 말했다.
"신산이란 분이오. 그리고 나 옥류향의 아버님이기도 하오."
"신산!"
장천린은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설 뻔했다. 너무도 뜻밖의 일이었다. 신산
제갈사가 바로 옥류향의 부친이었다니... 그는 자신의 귀를 의심할 정도로 놀라고
말았다.
"어쩌면 용형도 알 것이오. 그 분은 무림의 마지막 희망이셨소. 하지만 그 분은 조
화성과 마교에 의해 돌아가셨소."
옥류향은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금월산에서 얼굴이 망가지면서까지 나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던 것은... 그 분에게
서 나란 존재는 마지막 안배였기 때문이었소. 그러나 이제는 나설 때가 되었소. 그
분의 아들로 무림에 당당히 모습을 드러낼 때가 된 것이오."
장천린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경이로운 눈으로 상대를 바라볼 뿐이었다.
"용형,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강북의 상권을 용형께 팔기 위해서였소."
장천린은 다시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강북의 상권을......?"
"그렇소. 옥류향은 이제 더 이상 상인이 될 수 없소. 내가 상계에 머문다면 그로 인
해 강북상계가 무림인의 손에 의해 유린될 지도 모르기 때문이오."
장천린은 잠시 생각하다 묘한 미소를 지었다.
"당신이 지니고 있는 강북상권을 몽땅 사들이려면 강남상계 전부를 털어야 할텐데..
....."
옥류향은 피식 웃었다.
"용형께 요구하는 것은 일시불이 아니오. 더구나 이것은 일반적인 거래가 아니오."
장천린은 다시 한 잔의 차를 따랐다. 차를 마시는 그의 표정은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나는 용형이 내가 못 다한 꿈을 이루어 주기를 바라고 있소. 대륙 상계를 통일하는
것! 후후! 그것이야말로 이 옥류향이 평생에 걸쳐 해보고 싶은 꿈이었소."
장천린은 침묵을 깨고 물었다.
"그럼 얼마에 파시겠소?"
옥류향은 품속에서 한 권의 두툼한 책자를 꺼내 내밀었다.
"이 장부 속에 내가 이룩한 사업체가 명기되어 있소이다."
장천린은 고개를 흔들었다.
"이미 알고 있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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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후! 내 그럴 줄 알았소이다. 그렇다면 용형은 내 재산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파
악하고 있겠구려?"
"대충은 파악하고 있소이다."
"좋소. 그럼 간단히 이야기합시다. 이것은 장사가 아니오. 난 이득을 남기려는 생각
은 추호도 없소이다. 다만......."
옥류향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세 가지 조건만 들어주면 되오."
장천린은 눈을 크게 떴다.
"세 가지 조건?"
"그 첫 번째는 매년 은자 천만 냥을 향후 칠 년간에 걸쳐 나누어 지불해주는 것이오
. 그것은 결코 과한 요구가 아닐 것이오."
"......."
"두 번째는 용문전장 상관장주의 딸 상관수아와 결혼해 주는 것이오."
장천린은 처음으로 안색이 변했다. 너무나 뜻밖의 조건이었던 것이다. 옥류향은 그
가 놀라거나 말거나 계속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그것은 용문전장의 안위와 상관부녀의 생명을 위한 일이기도 하오. 왜냐하면......
."
옥류향은 그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그는 본래 용문전장의 딸 상관수아와 미묘한 관계에 놓여있었다. 그것은 장차 그녀
와 맺어진다는 가정 하에 신산과 상관홍이 모종의 관계를 이루어왔던 것이다.
그로 인해 용문전장은 신산의 세력에 막대한 금력지원을 해왔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신산이 죽음으로써 조화성이 과거의 일을 알아내게 된다면 용문전
장은 화를 면할 길이 없었다.
따라서 자신이 상계에서 완전히 발을 뺀 후 장천린이 상관수아와 혼인을 하게되면
자연 용문전장은 조화성의 눈길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것이었다. 결국 상관수아와 용
문전장을 위한 최선책은 그것밖에 없다는 설명이었다.
"하지만......."
장천린은 말끝을 흐렸다.
아무래도 그는 탐탁치가 않았다. 혼인은 인륜지대사다. 그런데 마치 거래하듯이 상
관수아와 혼인한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더구나 그에게는 이미 많은
여인들이 있었다. 그가 또 다른 여인을 맞아들인다면 가뜩이나 바람기 많다는 소문(
?)이 사실로 굳어질 가능성도 있었다.
옥류향은 문득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핫!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은 상관소저가 용형을 좋아한다는 사실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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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니 이건 거래라기 보다는 자연스런 일이기도 하오."
장천린은 어리둥절했다.
"그럴 리가......?"
"핫핫! 틀림없는 사실이오. 금월산의 사건 이후로 그녀는 줄곧 용형만을 생각해 왔
소."
장천린의 뇌리에 상관수아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던 여인이
었다. 금월산에서 그녀와 함께 겪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그녀가 날 좋아한다고?'
옥류향은 그 일은 이미 결정됐다는 듯 다시 말했다.
"세 번째 조건, 이것은 가장 중요한 것이오. 또한 내가 용형께 간절히 바라는 것이
며 나 옥류향의 개인적인 부탁이기도 하오."
"......?"
"대륙의 상권을 통일해 주시오!"
-대륙의 상권을 통일해 주시오!
장천린의 심장은 급격하게 뛰었다.
그 얼마나 엄청난 말인가? 일찍이 중원의 상계를 통틀어 과연 그 누가 강남북의 상
권을 통일한 적이 있었던가? 그야말로 전대미문의 일이 아니던가.
옥류향이 제시한 세 번째 조건은 실상 그 자신이 오래 전부터 이루고 싶어했던 야망
이었다. 이제 그는 상계를 떠나며 모든 것을 장천린에게 넘기려 하는 것이었다.
장천린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감히 쉽게 대답할 조건이 아니었다. 실상 옥류향의 제안을 그의 입장에서 보면 하등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옥류향이 이미 구축한 사업체는 막강한 것이었으며 그 대가
로 칠 년간을 통해 은자 칠천만 냥을 지불하는 것은 공짜나 다름없는 조건이었다.
첫 번째 조건과 두 번째 조건은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다. 그
러나 세 번째 조건은 달랐다. 그것은 천하를 정복해 달라는 말과도 같은 의미였던
것이다.
옥류향은 진지한 눈빛으로 참을성 있게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장천린은 세 번째 차를 따르고 있었다.
그는 말없이 차를 마셨다. 그리고... 빈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좋습니다. 수락하겠소."
"오! 고... 고맙소. 용형!"
옥류향은 감격한 듯 장천린의 두 손을 덥석 잡았다. 굳게 움켜쥔 손아귀에서는 뜨거
운 기운이 넘쳐흘렀다. 장천린도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두 거상의 손! 그것은 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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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북이 하나가 되도록 하는 언약의 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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