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장 무법자 북검엽(北劍葉)
제사신마전주 낭리초는 장천린을 맞이하여 도가 지나칠 정도로 환대했다.
그는 장천린이 자신의 초대에 응해준 것에 대해 수십 회나 인사말을 반복했으며 근
한 시진 여에 걸쳐서 지난 날 북마영과 자신이 얼마나 우의가 돈독했었는가를 설명
했다.
어디 그 뿐인가? 자신이 초대한 인척들에게 일일이 소개해 주었으며 삼백 가지가 넘
는 진기한 요리로 꾸며진 만찬을 끝낸 뒤에야 겨우 장천린을 놓아주었다.
황혼 무렵이었다.
장천린은 자신의 처소로 특별히 배정된 별원을 뒤로 하고 산책길에 나섰다.
조화성에 발을 들여놓을 때부터 그는 줄곧 당당하게 행세했다. 따라서 별원을 나서
자마자 수많은 조화성의 인물들을 스쳤지만 조금도 위축됨이 없이 행세했다.
기실 조화성은 그 규모가 방대하여 낯선 사람이 들어온다 해도 대부분 그리 신경 쓰
지 않는 듯했다.
남들이 볼 때 그는 유유히 산책을 즐기는 듯했다.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한가한 듯
여기저기 구경을 하면서도 날카롭게 조화성의 지리를 익히고 건물 배치 등을 머릿
속에 담아두고 있었다.
그는 조화성의 중심부로 접근해 가고 있었다.
만마(萬魔)의 집마부(集魔府) 답게 조화성에는 몇몇 금지구역이 있었다.
밀운각(密雲閣)도 그 중 하나다.
중원 전역에 걸쳐 입수되고 있는 밀서와 기밀서류들을 보관하는 곳으로 일체의 출입
이 금지된 곳이었다. 밀운각은 제이신마전에서 경비를 담당하고 있었다.
'흠, 슬슬 사건을 일으켜 볼까?'
장천린은 죽림(竹林) 사이로 보이는 밀운각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죽림 앞에
이르는 순간 싸늘한 냉기가 느껴졌으나 모른 척하고 밀운각으로 향하는 소로로 접어
들었다.
채 일곱 걸음이나 진입했을까?
"멈춰라!"
휙!
날카로운 호통과 함께 청삼을 입은 중년인이 섬광처럼 앞을 가로막았다. 매부리코에
눈이 죽 째진 그 자는 등에 고검(古劍)을 메고 있었다.
송문검(松文劍) 오사령(吾査嶺)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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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신마전 소속으로 금불 숭의겸의 두터운 신임을 얻고 있는 고수로 밀운각의 경비
책임자였다. 장천린은 가볍게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왜 고함을 지르고 난리냐?"
실로 오만하기 그지없는 말이었다.
송문검 오사령은 그의 반응에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자신의 임무를 생각하여 화를
꾹 눌러 참으며 냉엄하게 말했다.
"여기가 어딘 줄 알고 함부로 들어오느냐?"
장천린은 여전히 오만하게 말했다.
"그걸 내가 알게 뭐냐? 본인은 산책 중이다."
평소 금불 숭의겸의 세력을 등에 업고 콧대가 높기로 유명한 오사령이었다. 하지만
오만하기로 말하면 한 술 더 뜨는 존재가 바로 비마 북검엽이란 신예고수가 아닌가?
오사령은 그만 기가 꽉 막혔다. 그는 아직 북검엽, 즉 장천린에 대해 알지 못하고
있었다.
"네 놈은 대체... 누구냐?"
장천린은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
"제사신마전주 낭리전주의 손님이다."
오사령은 흠칫했으나 곧 고개를 저으며 코웃음 쳤다.
"그따위 말을 어찌 믿느냐? 영패를 보여라."
장천린은 고개를 저었다.
"영패? 그런 것 모른다."
그는 죽림을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가고자 하는 곳은 어디든 간다. 감히 누가 날 막겠다는 거냐?"
"뭐......? 이런 미친 놈!"
마침내 오사령은 격분을 참지 못하고 주먹을 날렸다.
"흥!"
장천린은 코웃음치며 슬쩍 머리만 이동하여 피했다. 오사령은 이미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었다. 따라서 그 정도에 그칠 리가 없었다.
"네놈의 상판때기를 문질러 버리겠다!"
윙!
파공성과 함께 이번에는 일곱 차례의 주먹과 발길질이 연속적으로 가해졌다. 그야말
로 눈부신 권각술(拳脚術)이었으나 그때마다 장천린은 약간의 동작만으로 교묘히 피
해내며 약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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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쯧쯧! 아직 멀었다. 그따위 장난 같은 실력으로 조화성에 들어왔느냐? 어깨에 멘
물건은 장식품이냐? 어서 써봐라. 그렇지 않으면 뽑을 기회조차 없을 것이다."
"이... 이... 건방진 놈!"
촤앙!
결국 오사령은 좀처럼 뽑지 않던 고검을 뽑고 말았다. 그는 독문의 송문오행검법(松
紋五行劍法)으로 무림에 명성을 떨쳐온 인물이었다.
슈슈슈... 팟!
장검이 섬광을 뿜으며 눈부시게 쏘아나갔다. 장천린은 여전히 유들유들한 표정이었
으나 이번만은 피하지 않고 슬쩍 손을 뻗어 대나무 가지 하나를 꺾어 들었다.
휘휙!
그는 수중의 대나무 가지를 회초리처럼 휘둘렀다. 오사령은 그만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으드득! 감히 대나무 가지로 날 상대하다니......!'
고수들의 대결에 있어 흥분은 절대금물이다. 오사령은 자신도 모르게 금기를 범하고
있었다.
"뒈져라!"
츠츠츠츳!
그는 종횡무진 검을 휘둘렀다. 흥분하는 바람에 그의 검법에는 허(虛)가 드러나고
있었다. 그 점을 놓칠 장천린이 아니었다. 그는 아무렇게나 흔들어 대던 대나무 가
지에 진기를 주입해 창처럼 빳빳하게 만들며 허를 찔렀다.
슉!
"흑!"
대나무 가지는 오사령의 미간(眉間)을 찔렀다. 오사령은 아찔한 나머지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귓전에 장천린의 오만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으하하하핫......!"
펑! 하는 폭음에 이어 오사령은 처절한 비명을 발했다. 그는 장천린의 발길에 채여
저만치 날아가고 말았다. 대나무 숲에 처박힌 그는 한동안 일어날 수가 없었다.
이때 소란을 듣고 밀운각을 지키던 제이신마전 소속의 고수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그들은 송문검 오사령이 죽림에 처박혀 나뒹구는 것을 보고 벌떼처럼 달려들었다.
장천린은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핫! 오합지졸들, 얼마든지 덤벼라!"
파파파파팟!
수중의 대나무 가지가 현란하게 흔들렸다. 순간 사방 일 장이 온통 그물 같은 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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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휩싸였다.
"크윽!"
제이신마전의 고수들은 태어나서 이렇게 쾌속하고 변화무쌍한 검법은 본 적이 없었
다. 그들은 채 방어를 하기도 전에 손목과 어깨, 목 등을 난타 당한 채 추풍낙엽처
럼 날아가고 말았다.
한낱 대나무 가지에 얻어맞았으나 그들의 손목, 어깨 등은 금세 퉁퉁 부어 올랐다.
"아이쿠!"
"으으......."
죽림 안은 때아닌 비명과 신음소리로 가득 찼다. 장천린은 대나무 가지를 던지며 중
얼거렸다.
"별 것도 아닌 놈들이 수만 믿고 까불었군."
그는 돌아서 걸어가며 오만하게 말했다.
"어떤 놈이든 따질 일이 있으면 제사신마전으로 오너라."
제사신마전에 들어선 장천린은 낭리초를 찾았다.
"오! 어서 오게."
낭리초는 반색을 하며 그를 맞이했다. 장천린은 대뜸 화부터 냈다.
"대체 그런 무례한 놈들이 어디 있소? 손님대접을 이렇게 하다니... 내 당장 조화성
을 떠나야겠소!"
"아니... 대체 무슨 일이기에 그러나?"
낭리초는 어안이 벙벙했다. 장천린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콧등을 가리키며 흥분된 어
조로 말했다.
"이 비마 북검엽이 그 따위 놈들에게 무시당하다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소! 이런
대접을 받으려 조화성에 온 게 아니란 말이오!"
낭리초는 그를 달래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 알았네. 우선 어찌된 사정인지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대체 무슨 일을 당했
기에 그리 화를 내는 건가?"
장천린은 인상을 쓰며 방금 전 밀운각 근처에서 일어났던 일을 얘기해 주었다. 낭리
초는 몇 차례나 안색이 변하다가 한숨을 쉬었다.
"그건... 그들만 나무랄 일이 아니네."
장천린은 펄쩍 뛰었다.
"아니, 그럼 내 잘못이란 말이오?"
낭리초는 황급히 손을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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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닐세, 그런 뜻은 결코... 노부는 다만 이곳 사정이......."
"시끄럽소이다. 내 당장 이곳을 나가겠소."
장천린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서자 낭리초는 급히 그의 손을 잡았다.
"내 말을 들어보게. 그곳은......."
그는 장천린의 손을 잡아 억지로 자리에 앉힌 후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자네가 간 곳은 밀운각이란 곳으로 조화성 내에서도 몇 안 되는 금지구역 중의 하
나일세. 특별히 허가 받지 않은 사람은 접근조차 할 수 없는 곳이지. 그러니 그들이
제지한 것은 당연한 일이네. 대체 무엇 때문에 그곳에 가서 곤욕을 치렀나?"
장천린은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는 듯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곳이 중요한 곳인지 아닌지 내가 어떻게 안단 말이오?"
그는 자신의 잘못은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낭리초는 쩔쩔 맸다.
"그 놈들에게 내 얘기를 안 했단 말인가?"
장천린은 코웃음을 쳤다.
"흥! 제사신마전 얘기를 했지만 놈들은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소. 아마 낭리전주가
직접 가도 마찬가지였을 것이오."
낭리초는 발끈했다.
"뭣이? 놈들이 감히......."
장천린은 짐짓 누그러진 음성으로 말했다.
"놈들의 말에 의하면 무슨 영패인가 뭔가 하는 게 있어야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다
고 하던데 낭리전주에게는 그런 것이 없소?"
낭리초의 안색이 가볍게 변했다.
"이... 있지. 물론......."
"그럼 그걸 주시오. 도대체 이곳은 금지구역이 많아 답답해서 다닐 수가 없소. 그렇
지 않으면 이곳을 떠나겠소. 난 본시 성격이 활달하여 답답한 것은 못 참는단 말이
오."
"으음... 그렇다면......."
낭리초는 처음에는 난색을 짓다가 할 수 없다는 듯이 품속에서 둥근 모양의 금빛 영
패 하나를 꺼냈다.
영패의 전면에는 조화령(造化令)이란 글씨가 양각으로 새겨져 있었고 뒷면에는 두
마리 용이 구슬을 다투는 쌍룡쟁주(雙龍爭珠)의 조각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낭리초는 영패를 들고 한동안 망설였다.
"이건... 조화성에서도 열 개 미만 밖에 없는 것으로 신분이 지고한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것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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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천린은 낚아채듯 영패를 받으며 반문했다.
"이것만 있으면 어떤 곳이든 무사 통과할 수 있단 말이오?"
"그... 그렇지, 특별한 곳만 제외하고......."
"그럼 당분간 이걸 빌려 쓰겠소."
낭리초는 당황한 듯 말했다.
"아... 아무 곳에나 보여주진 말게. 규정상 외인에게는 줄 수 없는 물건이라서.....
.."
장천린은 눈을 크게 떴다.
"아니! 그럼 낭리전주는 날 외인 취급한단 말이오?"
"아, 아닐세. 그럴 리가 있나? 허허헛... 갖고 다니게. 자네 마음대로 써도 좋네.
까짓 문제가 생기면 이 낭리초가 다 처리하겠네."
낭리초는 짐짓 호탕한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그러나 그의 입맛이 개운치 못한 것을
모를 장천린이 아니었다.
'후후! 어리석은 낭리초야. 네 무덤을 스스로 파는 구나.'
다음 날 아침 장천린은 휘파람을 불면서 밀운각으로 향했다.
그가 죽림 안으로 들어서자 다시 송문검 오사령이 나타났다. 그는 어제 얻어맞은 후
유증으로 인해 얼굴이 퉁퉁 부어 있었다.
"또... 왔느냐?"
하루사이에 그의 태도는 달라져 있었다. 어딘가 겁먹은 표정이었다. 장천린은 거드
름을 피우며 품속에서 조화령을 내밀었다.
"이번엔 정식으로 왔다. 이것이면 들어갈 수 있느냐?"
오사령은 안색이 홱 변했다.
"무... 물론이오. 통과할 수 있소."
갑자기 눈앞에 흰빛이 번쩍 스쳤다. 짝! 하는 소리와 함께 그는 머리가 홱 돌아갔다
"억!"
오사령의 뺨에 손바닥 도장이 선명하게 찍혔다. 그는 나가떨어지며 세 바퀴나 뒹굴
렀다.
"조심해라, 사람을 몰라본 죄다."
장천린은 입가에 피를 흘리며 일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오사령을 향해 지껄였다
"부러진 이는 어제 진 빚의 이자로 생각해라."
장천린은 유유히 그를 지나쳐 죽림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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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으.......'
간신히 몸을 일으킨 오사령은 피와 함께 부러진 이빨조각을 내뱉으며 이를 갈았다.
하지만 어찌하랴?
실력도 실력이거니와 상대가 내민 조화령의 권위는 그가 대항할 수준이 아니었다.
그저 벙어리 냉가슴 앓듯 끙끙거릴 수밖에 없었다.
'빌어먹을... 어디서 도깨비 같은 놈이 찾아와 가지고.......'
그는 부어터진 입술을 손등으로 문지르며 내심 욕설을 퍼부었다.
천군낙일루(千君樂日樓)는 조화성 안에 있는 술집이다.
조화성은 워낙 규모가 큰데다 수만 명을 헤아리는 흑도, 마도의 다양한 인물들이 드
나들고 있었으므로 술과 여자의 존재는 필수적이었다.
조화성주 염무는 엄격한 규율로 성도들을 통제해 왔다. 본래 마도인들은 누구의 통
제도 받기 싫어한다. 그들을 오랫동안 묶어 두면 반드시 사고가 나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조화성 내에 그들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유흥장이 필요했다. 그곳에서
는 마음껏 술을 마시고 여자를 즐길 수가 있었다. 그곳이 바로 천군낙일루였다.
천군낙일루는 중원의 어떤 술집이나 기루 보다도 그 규모가 월등히 컸다. 소속된 기
녀들의 수만 해도 수백 명이 넘었으며, 천하의 명주(銘酒)와 각종 진귀한 요리를 비
롯하여 얼마든지 도박을 즐길 수 있는 시설도 되어 있었다. 그야말로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쾌락은 그 무엇이든 누릴 수가 있는 곳이었다.
장천린이 그곳에 나타난 것은 정오 무렵이었다.
그는 어깨를 거들먹거리며 천군낙일루에 올랐다.
천군낙일루는 삼층으로 되어 있었는데 각 층마다 오백 명 이상이 술을 마실 수 있는
자리가 있었다.
계단을 오르는 순간 왁자지껄한 소음이 고막을 멍하게 할 정도였다.
장천린은 오만한 눈으로 주루 안을 쓸어보았다. 술병 째로 목구멍에 처박고 마시는
자가 있는가 하면 구석진 곳에서 기녀를 무릎에 올려놓은 채 주물러대는 작자, 혹은
한창 마작(麻雀)에 열을 올리는 자들, 그야말로 각양각색의 모습들이었다.
천군낙일루는 환락경이라 할 수 있었다. 이곳에서는 모든 술이 공짜였으며 기녀도
수단만 좋으면 얼마든지 취할 수가 있었다.
장천린은 주루 안을 쓸어본 뒤 창가로 걸어갔다. 창가에 면한 자리에 앉은 그는 술
을 시켜 혼자 마시기 시작했다.
이따금 기녀들이 그의 곁을 지나쳤다.
기녀들은 그를 향해 노골적인 추파를 던지기도 했으며 일부러 치맛자락을 슬쩍 들추
며 관심을 끌려고 애쓰기도 했다. 장천린은 그녀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술만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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셨다.
그가 있는 곳은 삼층이었다. 일, 이층은 더욱 혼잡하여 삼층까지 올라온 것이다.
'정말 개판이군.'
그는 주변의 소음에 눈살을 찌푸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중년인 한 명이 그를 향해 다가왔다. 그는 약간 뚱뚱한 체격에 화복(華服)을 입었으
며, 허리춤에는 가느다란 검은 채찍을 감고 있었다. 그는 공손히 포권하며 물었다.
"혹시... 비마 북검엽 대협이 아니신지요?"
장천린은 힐끗 그를 쳐다본 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만?"
중년인은 얼굴을 활짝 폈다.
"아! 반갑습니다. 저는 흑편신(黑鞭神) 임충후라 합니다. 제삼신마전 소속입지요."
"그런데?"
"헤헤! 어젯밤 송문검 오사령을 혼내주셨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장천린은 시큰둥하게 반문했다.
"그래서 어쨌다는 거요?"
"저어... 잠시 합석해도 될는지요?"
장천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헤헤... 고맙습니다. 역시 소문대로 북대협은 호쾌하신 데가 있습니다."
임충후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과 아부를 반복했다.
"헤헤... 사실 송문검 오가는 안하무인이라 한 번 혼을 내주고 싶었는데 북대협께
통쾌하게 손 봐 주셨더군요."
장천린은 소채 한 점을 집어 입으로 가져가며 오만하게 말했다.
"내 성질을 건드린 자는 누구도 마찬가지요."
"사실 제삼신마전의 형제들은 그 일을 전해 듣고 몹시 통쾌해 하고 있습니다."
장천린은 고개를 들었다.
"제삼신마전?"
"그렇습니다. 제이신마전 놈들은 도무지 돼먹지가 않았으니까요."
임충후는 연신 떠벌리다 문득 음성을 낮추었다.
"헤헤... 저쪽에 본전의 형제들이 있는데 합석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오늘은 제가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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턱 내겠습니다."
장천린은 은연중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흠, 기회로군. 제이신마전과 제삼신마전은 평소에 사이가 좋지 않았군. 잘만 하면.
......'
그는 인심이라도 쓴 양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고맙습니다. 그럼 오늘은 이 임충후가 북대협을 천화원(天花院)으로 모시겠습니다.
장천린은 내심 중얼거렸다.
'천화원이라? 어떤 곳인지 알만 하군.'
임충후가 말한 천화원은 고급스런 기원(妓院)으로 천군낙일루가 주로 일반 무인들이
이용하는 곳임에 반해 비교적 신분이 높은 자들이 애용하는 곳이었다. 천화원에 소
속된 기녀들은 한결같이 절세미녀들이었으며 천군낙일루와 달리 술값 또한 비싸게
받는 곳이었다. 따라서 아무나 이용할 수 없는 곳이었다.
장천린은 자리를 천화원으로 옮겼다.
그의 주위에는 임충후를 비롯한 제삼신마전 소속의 인물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하하하! 정말 북대협의 소문을 듣고 얼마나 통쾌했는지 모릅니다."
"흐흐! 오가 놈의 이빨이 몽땅 부러졌다는 소문에 우리 제삼신마전의 형제들은 배꼽
을 움켜잡고 웃었습니다."
십여 명의 제삼신마전 고수들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송해 마지않았다. 장천린은
그저 묵묵히 그들의 듣기만 할뿐이었다.
어쨌든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어느 정도 친숙감이 돌자 임충후는 점원을 불러 귓
전에 대고 뭐라고 묻는 듯했다. 연후 장천린을 향해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북대협, 영웅은 미인을 좋아한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대협은 어떻습니까?"
장천린은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핫! 그야 두말하면 잔소리요. 내 어찌 미인을 마다하겠소? 하지만 꽤 눈이 높
은 편이라 말이오."
임충후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
"하긴 북대협 같은 분이라면 오죽 하시겠습니까? 이 천화원에도 미녀는 많습니다.
그러나 북대협의 마음에 차는 미녀는 드물 겁니다. 한 명만 제외하고는......."
장천린은 그가 일부러 말끝을 흐리는 것을 알았다. 그는 짐짓 호기심이 동한 듯 관
심을 보였다.
"흠, 괜찮은 기녀가 있단 말이오?"
임충후는 자신의 수가 통한다고 느꼈는지 호탕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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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핫핫! 있고 말고요. 이곳에서 최고의 미녀로 뽑히는 기녀가 있습니다. 일명 무쌍화
(無雙花) 조옥령(趙玉鈴)이란 미녀지요."
"무쌍화라?"
"이곳에 온 지 열흘밖에 안됐지만 벌써부터 그녀를 차지하기 위한 쟁탈전이 치열합
니다. 하지만 워낙 콧대가 높아 아무도 꺾지 못했습니다. 이 참에 북대협께서 한 번
나서 보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임충후는 눈을 찡긋했다.
"저희들은 북대협의 솜씨를 기대해 보겠습니다."
그는 장천린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점원에게 손짓했다.
"이봐, 빨리 불러와라!"
"옛! 알겠습니다. 임나리!"
점원은 미리 언질을 받은 듯 황급히 어딘 가로 달려갔다. 그로부터 일각 후, 기녀들
이 줄줄이 모습이 드러내며 장천린이 있는 자리로 다가왔다.
과연 기녀들은 천군낙일루에서 본 기녀들과는 격이 달랐다. 하나같이 미색이 출중하
여 엄선하여 고르고 고른 미녀들인 듯했다. 기녀들은 각각 제삼신마전 소속의 고수
들 옆에 자리 잡고 앉았다.
다만 장천린의 옆자리만은 아무도 앉지 않았다.
"헤헤, 조금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무쌍화는 아무나 부른다고 오지 않습니다. 일단
손님을 살펴보고 마음에 들어야 나옵니다. 후후! 아마 지금쯤 어딘가에서 북대협을
살펴보고 있을 겁니다."
장천린은 미간을 슬며시 찌푸렸다. 이때였다.
띵... 띠잉... 딩!
어디선가 청아한 비파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이어 비파음을 타고 한 미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얼굴에 면사를 드리우고 있었는데 좌우에서 청의를 입은 시비 두
명이 부축하고 있었다.
비록 얼굴은 가렸지만 몸매와 분위기만으로도 좌중에 앉아있는 십여 명의 기녀들을
능히 압도하고도 남을 듯했다.
면사녀는 사뿐사뿐 걸어오더니 장천린의 앞에서 날아갈 듯이 절을 했다.
"소녀 조옥령이라 합니다."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음성은 마치 은쟁반이 옥구슬이 구르는 듯 맑고도 달콤했다
. 장천린은 짐짓 거드름을 피우며 물었다.
"흠, 네가 그 비싸게 군다는 무쌍화냐?"
그의 말투는 오만방자했다. 곁에 있던 임충후조차 안색이 변할 정도였다. 실제로 그
는 조바심을 느꼈다. 도도하기 그지없는 무쌍화 조옥령이 반발하여 발길을 돌려버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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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되면 북검엽에게 환심을 사려는 계획이 무산될 것
이 아닌가.
그런데 상황은 전혀 뜻밖이었다. 무쌍화는 화를 내기는커녕 얼굴을 가리고 있던 면
사를 벗으며 달콤하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대협, 한 마디만 올리겠습니다. 사실은 소녀가 비싼 것이 아니라 소녀를 찾는 사내
들이 싸구려였기 때문입니다."
"......!"
장천린은 흠칫했다. 예상 밖의 반격이었다. 그는 고개 들어 조옥령을 똑바로 바라보
았다.
아름다웠다. 아니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요염무쌍했다. 호수같이 잔잔한 눈망울은
이루 말할 수 없는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으며 마늘쪽 같이 예쁜 코, 앵두같이 붉고
도톰한 입술은 아무리 철심(鐵心)의 사내라도 단번에 녹일 정도로 고혹적이었다.
장천린은 잠시 조옥령을 노려보다 호탕한 대소를 터뜨렸다.
"좋아, 좋아! 하하핫! 제법 쓸만한 계집이구나."
그는 무척 기분이 좋은 듯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몰래 한숨을 내쉰 임충후는 목청
을 가다듬어 말했다.
"옥령낭자, 이 분은 당금 무림에서 위명이 쟁쟁하신 북검엽 대협이시오. 모시게 된
것을 영광으로 알아야 할 것이오."
조옥령은 고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이미 알고 있답니다. 그렇잖으면 소녀가 이렇게 나올 리가 있나요?"
"어? 허허, 그렇지. 내 조낭자의 실력을 깜박 잊었소."
임충후는 겸연쩍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조옥령은 장천린의 곁에 바짝 붙어 앉아 술을 따른다, 안주를 집어준다 하며 시중들
기 시작했다. 그녀의 태도는 극진하다 못해 입안의 혀처럼 나긋나긋했다.
장천린은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사람 녹이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군. 이 정도면 웬만한 사내의 혼을 빼놓기는 식은
죽 먹기일 것이다.'
그는 조옥령의 시중을 받으며 술을 들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의 손은 잠시도 쉬지
않고 움직였다. 조옥령의 가슴속으로, 또는 치마 속으로 부지런히 왕복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람둥이로 알려진 북검엽으로 행세하고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
묘한 것은 조옥령의 반응이었다. 그녀는 그때마다 몸을 틀어 그의 공격(?)을 피해냈
던 것이다. 그렇다고 기분이 상할 정도로 거부하지는 않았다. 적당히 몸을 맡기면서
도 최후의 선은 유보하는 듯한 자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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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천린은 그 점을 분명 느꼈다. 그는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묘한 기분이었다.
"빌어먹을! 태전주님과 자영구살 분들이 살아만 있어도 놈들이 그렇게 안하무인이지
는 않았을 텐데......."
"죽일 놈들! 갈수록 하늘 높은 줄 모른다니까!"
술이 얼큰해지자 제삼신마전의 고수들은 점점 더 언성이 높아졌다. 그들은 제이신마
전에 대해 노골적으로 불만을 털어놓고 있었다.
덕분에 장천린은 그들을 통해 조화성 내의 상황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제삼신마전은 조화성에서 가장 세력이 컸다. 산하의 직속 인원만 해도 각 지단을 합
하면 수천 명에 육박했다. 거기에 비해 제이신마전은 고작 천명 정도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삼신마전이 수모를 겪는 이유는 전주인 태사독이 죽은 후 뚜렷
한 지도자가 없기 때문이었다.
본래 머리가 없는 뱀은 맥을 추지 못하는 법이다. 제삼신마전이 그런 경우였다.
장천린은 술잔을 들며 넌지시 물었다.
"흠, 여러분들의 얘기를 들으니 흥미가 당기는 구려. 그럼 지금 제삼신마전은 누가
다스리고 있소?"
임충후가 분통 터진다는 듯이 침을 튀기며 말했다.
"해서오궁(海西五宮)의 다섯 분과 몇 명의 원로들이 지키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이
신마전주의 입김 때문에 마음대로 활동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장천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비위를 긁었다.
"결국 제이신마전에 덜미를 잡힌 꼴이군."
"빌어먹을! 분하지만 그런 셈입니다."
임충후는 생각할수록 화가 치미는 듯 연거푸 술잔을 들이켰다.
"제기랄, 실력으로 보나 인원으로 보나 제이신마전 따위는 상대가 되지 않는데도 눈
치를 보며 살아야 하니... 내 더러워서!"
탕!
그는 빈 술병을 탁자에 소리나게 내려놓았다.
"야! 술 더 가져와!"
"옛... 나리!"
애꿎은 점원만 벼락을 맞고 달려갔다. 장천린은 고등술수를 쓰기로 했다.
"쯧쯧! 안된 일이오. 우두머리가 없으니 만 명이 아니라 십만 명이라도 어쩔 수 없
지 않소?"
임충후는 한동안 이상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무슨 말인가 할 듯 말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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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설이더니 어렵게 입을 열었다.
"제 생각엔 차라리......."
그는 말끝을 흐렸다가 큰맘을 먹은 듯 내뱉었다.
"차라리 북대협 같은 분이 본전에 계신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
다."
장천린은 내심 코웃음을 쳤다.
'흥! 역시 네놈들에게 그런 속셈이 있었군.'
그는 대답 대신 술잔을 들어 천천히 들이켰다. 좌중의 인물들은 모두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하긴 어차피 서로를 이용하기 마련이지.'
장천린은 술잔을 내려놓으며 짐짓 겸양의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하지만 누가 나 같은 떠돌이를 맞아들이겠소?"
임충후의 얼굴에 기쁨의 빛이 떠올랐다. 그는 기회를 놓칠세라 급히 말했다.
"아, 아닙니다. 해서오궁의 다섯 분과 본전의 원로들이 추천해 총단 장로회를 거치
면 됩니다. 최종적으로는 성주님의 결재만 떨어지면 되는 일입니다."
임충후는 신이 난 듯 계속 떠들었다.
"정말입니다. 북대협께서 승낙하시기만 하면 제가 본전의 형제들과 함께 전심전력으
로 추천하겠습니다."
"글쎄......."
장천린은 말을 얼버무렸다. 그는 내심 염두를 굴리고 있었다.
'아직은 일러. 좀더 이 자들을 달아오르게 해야한다.'
임충후는 조급한 듯 매달렸다.
"북대협 같은 절세고수라면 본전에 입전하시기만 하면 그 즉시 높은 직위를 차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장천린은 일부러 화제를 돌렸다.
"자, 자! 그런 얘긴 그만 합시다. 술이나 마십시다."
그가 술잔을 들어올리자 임충후는 할 수 없이 잔을 들어 건배했다. 장천린은 술잔을
기울이며 내심 웃음을 흘렸다.
'후후, 일이 제대로 돌아가는군. 내가 거절하면 할수록 이 자들은 더욱 몸이 달아오
를 것이다. 서둘 것 없다. 그저 기다리면서 은연중 이 자들을 부추기기만 하면 될
것이다.'
장천린의 심계(心計)는 깊고도 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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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결코 서둘지 않으면서도 한 단계 한 단계 목표를 향해 전진하고 있었다.
무림사상 최강의 힘을 지닌 거대한 집마부 조화성! 그 속에서 그는 계획한 바를 착
착 진행시키고 있었다. 과연... 그의 계획은 달성될 수 있을 것인지?
오직 하늘만이 알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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