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장 구룡장원(九龍莊院)
좋은 비는 내려야 할 때를 알고 있어
봄이 되면 만물을 싹트게 하네
비는 바람 따라 조용히 밤새 내리고
만물에 생기를 돌게 하면서도 기척 없이 내리네
들길도 비구름과 더불어 일색(一色)으로 검게 물들고
강상에 뜬 고기잡이 불만이 밝게 비친다
새벽녘에 붉게 물든 곳을 보게 된다면
금관성(錦官城)에 꽃이 흠뻑 피어났음을 알거라
<두보의 춘야희우(春夜喜雨)>
죽림(竹林).
끝없이 펼쳐진 죽림의 푸른빛은 멀리서 보면 마치 바다처럼 보인다.
동쪽으로는 동해의 망망대해가 끝없이 펼쳐져 있고, 서쪽으로는 운하(運河)와 호수
가 펼쳐져 있는 물의 고장이다. 이곳은 대이산(大伊山)과 청이호(靑伊湖)를 양쪽에
낀 전원(田原)의 향리로 사람들은 언제부터인가 구룡릉(九龍陵)이라고 불렀다.
이렇게 불리게 된 것은 이 고장에 구룡장원(九龍莊院)이 생기고 부터다. 중원의 상
권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구룡장원!
하나 이곳 사람들은 구룡장원의 진정한 능력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것이 없었다.
쏴아아아!
밤새 비가 억수로 쏟아졌다.
강남의 산야는 밤새 내린 비로 인해 한결 푸르름이 진해졌다.
아침이 되자 비는 말끔히 그쳤고, 눈부신 태양이 대지를 비추었다. 비온 뒤라 죽림
에는 죽순(竹筍)이 여기저기 솟아 나와 있었다.
푸른 댓잎 끝에는 방울방울 영롱한 빗방울이 매달려 있었는데 햇살에 무지갯빛 광채
를 발산하고 있어 사뭇 환상적인 분위기를 만들었다.
우주(宇宙)를 담은 물방울 하나가 똑! 하고 떨어졌다.
그 순간 죽림 속으로 들어서는 한 사나이가 있었다. 우의를 걸치고 머리에는 죽립을
눌러쓴 사나이의 어깨에는 빗방울이 맺혀 있었다.
반쯤 걷어올린 소맷자락 아래 드러난 팔뚝은 검게 그을려 있어 건강한 느낌을 주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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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칠한 키에 죽립 아래 조금 드러난 얼굴의 하관은 섬세한 곡선과 함께 강인한 느낌
을 준다. 특이한 것은 그의 머리였다. 칠흑같이 검고 긴 머리카락이 등뒤로 길게 드
리워져 있었다.
사나이는 죽림에 들어선 후 잠시 대나무를 둘러보았다. 이어 허리춤에 걸고 있던 낫
을 꺼내 대나무를 자르기 시작했다.
굵지도 가늘지도 않은 청죽(靑竹) 열 개를 잘라낸 그는 즉석에서 대나무 껍질을 벗
겨냈는데 솜씨가 몹시 능숙해 보였다. 잠시 후 얇게 벗긴 대나무 껍질을 뭉치더니
어깨에 둘러멨다.
사나이는 무릎께에 스물거리는 안개를 헤치며 죽림을 빠져나와 산등성이로 올라갔다
언덕 위에 오르자 전망이 탁 트이면서 멀리 아스라이 펼쳐진 평원(平原)이 보였다.
하늘은 언제 비를 쏟았느냐 싶게 구름 한 점 없이 쪽빛이 되어 있었다. 평원 저쪽으
로 비에 젖은 대지가 수증기와 아지랑이를 자욱히 뿜어내고 있어 실로 그 경관은 도
원경을 보는 듯 했다.
지평선 저쪽에 아지랑이 사이로 거대한 성채(城砦)가 보였다. 사나이는 한동안 성을
응시하더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백부님!"
문득 활달한 소년의 외침이 그의 걸음을 멈추게 했다.
언덕 아래서 한 소년이 달려오고 있었다. 흑의(黑衣)를 걸친 십 이삼 세 가량의 강
직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소년은 체격에 어울리지 않게 자신의 키 만한 강궁(强弓)
을 멘 채 날랜 사슴처럼 단숨에 언덕으로 달려올라 왔다.
사나이는 죽립을 이마 위로 치켜올렸다.
장천린(蔣天 )이었다.
소년이 코앞으로 다가와 가쁜 숨을 몰아쉬자 그는 빙긋이 웃으며 물었다.
"어딜 갔다오는데 그리 서두느냐?"
소년은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훔쳐냈다.
"사냥하기 위해 막 나오는 길이에요. 그런데 백부님은 어딜 가시는 거예요?"
"청산초당(靑山草堂)에 간다."
장천린은 담담히 말하며 걸음을 옮겼다.
소년- 천기운(千奇雲)은 그의 뒤를 졸졸 따라가며 다시 물었다.
"그럼 언제 장원으로 돌아오실 거죠?"
장천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천기운은 눈치를 살피며 종알거렸다.
"사부님께선 요즘 무척 신경이 날카로워지셨어요. 모두들 눈치만 살피고 있어요. 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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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 다른 어르신들도 마찬가지긴 하지만......."
천기운은 다시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가 꿀꺽 삼키고 말았다. 장천린의 표정이 너무
도 담백했기 때문이다.
장천린은 천천히 걸어갔다. 천기운은 왠지 그의 사색을 방해해선 안될 것 같은 심정
에 입술을 다물고 따라가기만 했다. 대략 일 각쯤 흘렀을까? 장천린이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물었다.
"운아. 네 꿈은 무엇이냐?"
천기운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저는 무사가 될 거예요. 그것도 천하제일고수가 되어 대륙을 한 자루 칼로 질타할
거예요!"
장천린은 잠시 소년의 천진한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내심 중얼거리고 있었다.
'계묵은 좋은 제자를 두었군. 하지만 이 아이는 계묵 만큼이나 거세다. 이런 기질을
가진 아이는 한 번 꺾이면 위험해 진다.'
천기운(千奇雲).
소년은 황가철장(黃家鐵莊)에서 첫 손가락 꼽히는 장인(匠人)인 천일학 노인의 증손
자였다. 천일학 노인은 벌써 세상을 떴는데 그에게는 두 명의 혈육만이 있었다. 그
들은 천일학의 손자손녀로 천독고(千獨古)와 천사예(千思藝)라고 했다. 그 중 천독
고는 천일학의 뒤를 이어 황가철장에서 제일 가는 장인이 되어 있었다.
천기운은 천독고의 아들이다.
반 년 전 사문도는 일월쌍극(日月雙戟)의 날을 세우기 위해 철계(鐵溪)의 철공소로
천일학을 찾아갔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천일학이 타계한 뒤였다.
훗날 그는 장천린의 주선으로 천독고를 만나 그에게 병기를 맡겼다. 마침 대동했던
원계묵은 천독고의 아들 천기운을 보고 한 눈에 그가 훌륭한 무사가 될 것을 알고
제자로 거두게 된 것이다.
그 날 이후로 천기운은 구룡장원에 머물게 되었다.
그의 성격은 어쩐지 원계묵과 닮은 점이 많아 장천린은 그를 볼 때마다 원계묵의 분
신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들곤 했다.
구룡릉(九龍陵)에 세워진 구룡산장은 거대한 성채를 형성하고 있다.
구룡장원은 이미 중원대륙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거상체(巨商體)로 부각된지
오래였다. 특히 강남과 강서 일대에서 수로(水路)를 이용해 벌이는 사업은 나날이
규모가 증대하여 구룡장원이란 이름만으로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지경이었다.
구룡장원의 후원에 있는 전각(殿閣).
전각의 방안은 깊이 가라앉은 침잠한 분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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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문도는 탁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흑의에 흑건을 두른 그는 온통 검은 색 일
체였다. 창백한 안색만 제외한다면 영준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누가 보면 책에 몰입해 있는 듯했지만 실은 그는 책장을 한 장도 넘기지 못하고 있
었다.
이따금 창 밖을 응시하는 그의 동공은 불안해 보였다.
요즘 들어 그는 안정을 잃고 있었다. 지난 반 년 내내 구룡장원에서 한 걸음도 밖으
로 나가본 적이 없었다. 그 때문에 내부에 고여있는 무혼(武魂)이 끓고 있었다.
더욱이 외부로부터 조화성에 대한 소식이 전해져 올 때마다 그는 답답함을 금치 못
했다. 당장이라도 달려나가 조화성을 부수고 염무의 목을 쳐버리고 싶은 충동을 참
은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탁!
사문도는 소리가 나게 책장을 덮으며 고개를 번쩍 들었다.
'형님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걸까?'
그의 눈에 우울한 빛이 어렸다.
'벌써 반 년이 넘도록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다. 오직 농사일에만 열중하고 계시니
... 더구나 이 장원에도 들르지 않은 채.......'
그는 장천린을 믿었다. 장천린에 대한 신뢰는 가히 절대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답답
한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
'대체 언제까지 이곳에 틀어박혀 있어야 한단 말인가?'
이때였다. 문이 열리며 두 사람이 들어왔다.
"대형(大兄)!"
방안에 들어선 두 사람은 낭인무사들이었다. 그 중에서 수뇌 격인 위천조와 뇌찰격
이 찾아온 것이다. 위천조는 여전한 모습이었으나 뇌찰격의 모습은 다소 변해있었다
머리는 길렀는데 복장은 라마승이 있는 옷을 입었고, 손에는 주먹만한 염주를 감아
쥐고 있어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다.
"웬일이시오, 두 분?"
사문도가 의아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이때 위천조의 손바닥 위에 앉아있던 하얀 다람쥐가 쪼르르 그의 발을 타고 달려 내
려오더니 사문도의 무릎 위로 냉큼 올라왔다. 사문도는 손을 뻗어 다람쥐의 등을 가
볍게 쓰다듬어 주었다.
위천조는 의자에 앉으며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상의드릴 게 있어서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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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찰격이 염주를 신경질적으로 굴리며 말했다.
"요즘 들어 도무지 짜증이 나 미칠 지경이외다!"
뇌찰격은 염주를 짜그락! 짜그락! 소리나게 굴리며 거침없이 말했다.
"우린 상인도 아니고 더구나 농사꾼도 아니외다. 칼을 쓰는 무사외다. 우리가 낭인
시장을 돌아다닌 것은 선천적인 방랑벽이 있기 때문이오. 조용한 것을 정말 참을 수
가 없단 말이오!"
그는 눈알을 희번득이며 계속 말했다.
"한데 이게 뭐냔 말이오? 용대인은 우리를 상인이나 농사꾼으로 만들려 하고 있지
않소?"
위천조도 동감이라는 듯이 고소 지으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내 검은 벌써 녹슬기 시작했습니다. 지난 반 년 간 나는 냄새나는 장
부책만 뒤지며 살았습니다."
위천조는 눈빛을 번들거리며 나직하게 말했다.
"대형, 낭인조(浪人組)의 무사들은 모두 신경이 날카로워질 대로 날카로워졌습니다.
자칫하면 큰 사태가 벌어질 지도 모릅니다."
사문도의 검미가 꿈틀 일어났다.
"지금... 내 앞에서 위협하는 건가?"
위천조는 흠칫했다.
"위협이 아니라 사실 그대로를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사문도는 몸을 일으켜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낭인조의 마음은 이해하오. 하지만 대인께서는 속이 깊으신 분이오. 반드시 어떤
생각이 있을 것이오. 낭인조에게 알리시오. 위형! 만에 하나 용대인께 조금이라도
피해가 가게 하는 자가 있다면 이 사문도가 먼저 용서치 않을 것이라고."
두 사람을 쏘아보는 사문도의 눈에서는 섬뜩한 안광이 흘러나왔다.
위천조와 뇌찰격은 그만 가슴이 서늘하게 식는 것을 느꼈다. 위천조는 씁쓸하게 웃
었다.
"알겠습니다. 대형, 나와 뇌형이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고맙소."
사문도는 잠시 두 사람을 바라보다 그들의 어깨를 치며 말했다.
"위형, 뇌형, 저녁때 나가서 한 잔 합시다. 낭인조의 몇 명도 데려오시오."
위천조와 뇌찰격의 얼굴에 어색한 미소가 피어났다.
"알겠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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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정중히 포권한 뒤 밖으로 사라졌다.
혼자 남게 된 사문도는 생각에 잠겼다. 그의 손은 여전히 다람쥐의 털을 쓰다듬고
있었다.
'낭인조의 심정도 이해가 간다. 그들의 생리로 볼 때 지금과 같은 생활은 적응할 수
없는 것이다. 아무리 험난하다 해도 칼날 위에 목을 건 채 피가 튀는 생활을 영위
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더욱 어울리는 일이다.'
사문도는 한숨을 쉬었다.
'바람이나 쐬러 나가봐야겠군.'
그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문 앞에 한 명의 시녀가 서 있다 그를 보고 깊숙이
절을 했다.
"잠시 나갔다 올 테니 그 동안 방 정리 좀 해다오."
"예."
사문도는 허리를 숙이는 시녀를 뒤로하고 정원을 가로질러 갔다. 몇 채의 전각을 지
나자 웅장한 건물이 나타났다. 그곳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거의 모두가 장
사꾼으로 보이는 인물이었는데 대청의 탁자 앞에는 낙수범이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한 손으로는 장부를 들치고 한 손으로는 주판을 퉁기며 뭐라 열심히 떠들어 대
고 있었다. 사문도는 건물을 지나치며 쓴웃음을 지었다.
'이곳에서 가장 바쁜 사람은 낙형 뿐이군.......'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천부적인 상인이야. 형님이 없는데도 무리 없이 일을 처리할 뿐 아니라 오히려 사
업을 확장시키기까지 하니... 어떤 면에서 저런 사람이 형님에게 더 필요할지도 모
르지.'
그는 우울한 기분을 느끼며 걸어갔다.
이번에는 연무장이 나타났다. 넓은 후원의 뜰을 연무장으로 사용했는데 그곳은 주로
백살대(百殺隊)가 자주 이용하고 있었다.
연무장에 다다른 사문도는 눈썹을 쫑긋 치켰다.
'음?'
연무장 한가운데 질서정연한 모습으로 백살대가 앉아 있었다. 그들은 마주 보는 자
세로 무릎 꿇고 있었는데 무릎 앞에는 목도(木刀)가 똑같은 방향으로 가지런히 놓여
져 있었다.
그들의 앞에는 원계묵이 태산 같은 모습으로 우뚝 서 있었다.
그는 기다란 목도를 어깨에 얹고 있었는데 옆에는 운표가 엄숙한 표정으로 두 손을
늘어뜨리고 있었다.
엄숙하고 냉엄한 분위기였다. 백 명이 넘는 인원이었으나 바늘 하나 떨어지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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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들릴 정도로 조용하기만 했다. 뿐만 아니라 백살대의 자세와 눈빛도 한 점 흐트
러짐이 없어 보였다.
이때 원계묵의 냉랭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칼을 쓴다고 하여 그것이 곧 칼일 수는 없다. 진정한 도객은 칼에 혼을 넣어야 한
다. 혼이 없는 칼은 곧 죽은 칼이다!"
원계묵의 음성은 찌르는 듯 날카로웠고, 그 말을 귀담아 듣는 백살대의 표정은 더욱
더 엄숙해졌다.
사문도는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백살대... 무림에서 저들처럼 똘똘 뭉친 채 충성을 바치는 무사들은 없을 것이다.
저들은 개개인이 모두가 진정한 무사들이다.'
그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원계묵.......'
그의 얼굴은 서서히 굳어졌다.
언제부터인가 그는 원계묵에게 경쟁심리를 느끼고 있었다. 원계묵을 생각하면 그의
존재가 마치 거인처럼 부상되었다.
마도(魔刀) 원계묵. 그는 평소 말이 없는 위인이다.
그는 언제나 강철같고 바위 같은 존재다. 그러나 막상 칼을 뽑기만 하면 일순간에
황야를 질타하는 사자(獅子)로 변하여 대지를 주름잡는다.
그런 그에게서 사문도는 가끔 숨이 막히는 느낌을 받곤 했다. 사문도 역시 타고난
무인이다. 그는 세상에 눈을 뜰 때부터 무공을 익히기를 밥먹듯이 행했으며 무공으
로 자신을 꺾을 수 있는 자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단 한 사람 원계묵!
그를 생각하기만 하면 은연중 위축감을 느끼는 것을 어찌 하겠는가?
"칼은 곧 마음이다. 마음이 통일되면 칼은 몸과 같이 움직여진다. 그렇지 않으면 칼
은 신외지물(身外之物)일 뿐, 거추장스런 존재로 전락하고 만다."
등뒤에서 전해져 오는 칼칼한 원계묵의 음성은 비수가 되어 사문도의 뒤통수에 박혔
다.
'너무 강해.......'
사문도는 주먹을 움켜쥐면서 앞을 향해 걸어갔다.
구룡장원이 세워지기 전 이 지역은 죽제품의 산지(産地)로 유명했다. 오래 전부터
이곳에는 죽제품을 생산하는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었다.
청산당(靑山堂)도 그 중 하나였다. 특히 이곳의 죽제품은 품질이 우수해 비싼 값으
로 팔리고 있었다. 그런데 청산당의 주인은 장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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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그를 유노인(庾老人)이라 불렀다.
장님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죽제품을 다루는데 있어 명장으로 소문나 있었다. 그는
별 말이 없는 노인으로 하루를 온통 대나무를 만지는 것으로 보내곤 했다.
오늘도 유노인은 청산초당에 앉아 대나무를 만지고 있었다. 요즘 들어서는 수전증까
지 생겨 손끝이 떨고 있었으나 솜씨만은 변함이 없었다.
"......."
유노인은 한 시진이 넘도록 대나무를 깎고 다듬으며 여러 가지 기물들을 만들었다.
그의 옆에는 각종 바구니와 죽제품들이 쌓여 있었다.
장천린은 그의 앞에 앉아 있었다. 그가 이곳에 온 것은 한 시진 전이었다. 그는 유
노인에게 말을 걸지 않은 채 그저 묵묵히 앉아 그의 손놀림만 지켜보고 있었다.
유노인의 손이 멈췄다.
"대인. 노부는 지금이 행복 하외다. 지난날의 노부는 이미 땅 속에 묻혀 버렸소. 제
발... 더 이상 이 늙은이를 찾지 말아 주시오......."
장천린은 비로소 입을 열었다.
"유노인, 당신은 과거 섬서(陝西)지방에서 무적의 신화를 일궈낸 낙일검(落日劍) 유
겸승(庾謙昇)입니다. 본인은 다만 노인을 통해 검에 대한 것을 알고 싶을 뿐입니다.
유겸승은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손을 들어 곰방대를 잡아 빨았다. 자욱한 담배연기가 초당 안에 번져 나갔다.
연기에 감싸인 유겸승의 모습은 더욱더 나이가 들어 보였다.
"노부는... 한때는 검에 미쳐 인생을 건 적도 있었소. 하지만 수십 년의 지난 지금
노부가 검을 통해 얻은 것은 허무 뿐이오."
그의 흰자위만 보이는 눈에 회한의 빛이 어렸다.
"대인께서는 어떻게 노부가 무림인 임을 알아내셨소?"
장천린은 담담히 말했다.
"검을 버렸다해도 기도까지 버릴 수는 없습니다. 더욱이 노인장의 오른손 손바닥과
엄지 안쪽에는 굳은살이 박혀있습니다. 그것은 오랜 세월에 걸쳐 검이나 도를 사용
한 흔적이지요."
유겸승은 고소 지었다.
그는 장천린을 희끄무레한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대인은 상인입니다. 노부가 알기로 대인 곁에는 무림고수가 무척 많은 것 같은데
어찌하여 굳이 무공을 익히려 하시오?"
"본인 자신과의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 사이에는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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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겸승은 계속해서 곰방대를 빨았다. 연거푸 연기를 들이마셨다가 내뿜었기 때문에
초당 안에는 연기가 가득 차 버렸다.
잠시 후 그는 입을 열었다.
"과거 노부는 낙일검이란 이름으로 섬서와 북평(北平) 일대를 주름잡은 적이 있소.
노부의 검은 화려한 변식(變式)을 위주로 하는 것이 특징이오. 일단 전개되면 태양
이 서산으로 넘어갈 때 화려한 홍채(紅彩)를 뿜어내듯 현란하다오."
장천린은 묵묵히 경청했다.
"하지만 천하는 넓었소. 삼십 년 전 노부는 연속 세 차례나 패배하였소."
유겸승은 연기를 둥글게 내뿜었다.
"첫 번째 패배는 웅이산(熊耳山)에서 만난 천외삼기(天外三奇) 중 한 명으로 검군(
劍君) 궁일평에게 당한 것이오."
장천린은 흠칫했다.
'천외삼기?'
"패배를 모르던 노부는 그에 의해 고작 육십 초 만에 꺾이고 말았소."
유겸승은 담배 연기 속에 완전히 파묻히다시피 했다.
"검군은 위대한 검객이었소. 노부는 그에게 패한 후 와신상담(臥薪嘗膽), 다시 검을
익히기 시작했소. 그로부터 일 년 후 자신감을 얻고 강호에 나갔는데... 그만 만검
(晩劍)의 달인이라는 노전익(魯殿翼) 선배에게 다시 패배하고 말았소. 그 뿐 아니라
......."
유겸승의 얼굴은 이제 연기에 묻혀 보이지 않았다. 다만 곰방대만이 발갛게 달아오
르고 있었다.
"그로부터 이년 뒤에는 천산(天山)의 마검(魔劍) 막후(莫候)란 자에게 다시 처참하
게 패하고 말았소."
장천린은 내심 중얼거렸다.
'천산마검 막후라면 혹시 천산검부(天山劍府)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
그는 모르고 있었다. 마교십삼사(魔敎十三邪)의 일원인 사검(邪劍) 막청(莫靑)이 바
로 천산마검 막후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세 차례에 걸친 패배는 하늘 높은 줄 모르던 노부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소. 결국
절망을 느낀 노부는 검을 꺾어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소."
"......."
"하지만 그때는 고향을 떠난 지 사십 년이나 지난 후였소. 고향에는 이미 날 기다리
는 사람이 없었소."
곰방대의 담배가 떨어졌는지 유겸승은 더 이상 연기를 뿜어내지 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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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기다리던 아내는 이미 죽고 얼굴도 모르는 자식은 나에게 냉담했소. 그도 그럴
것이 아내가 놈을 임신했을 때 나는 고향을 떠났기 때문이오....... 결국 자식에게
도 받아들여지지 못한 노부는 절망만을 안은 채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소."
연기가 흩어지면서 유겸승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는 부쩍 늙어 보였다.
"허허! 그로부터 이십 년이 지난 지금 노부는 병들고 눈먼 추물이 되어 이렇게 대나
무나 엮는 신세가 된 것이오."
장천린의 마음은 무거워졌다.
한때 무적의 검으로 검의 일가를 세웠던 낙일검 유겸승이 이렇게 조락한 모습이 되
어있는 것을 보니 마음이 좋지가 않았다.
잠시 후는 질문을 던졌다.
"한 가지 묻겠습니다. 천하에서 가장 뛰어난 검법을 꼽으라면 노인께선 무엇을 꼽겠
습니까?"
새 담배를 채워 넣던 유겸승은 잠시 침음하다 입을 열었다.
"노부가 아는 한 단연코 달마삼식(達磨三式)이오."
"달마삼식?"
장천린은 뜻밖이라는 느낌이었다. 유겸승은 담배를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달마삼식이야말로 위대한 불검(佛劍)이오. 지상에서 가장 강한 항마력을 지닌 검식
이지요. 당나라 말엽에 소림의 십이대 장로인 굉우선사(宏宇禪師)가 창안했소. 하지
만 검을 배타하던 소림이었기에 달마삼식은 아무도 관심 갖는 이 없이 잊혀지고 말
았던 것이오."
"음......."
"역대 무림을 돌아보면 알려지지 않은 검의 달인이 많소이다. 천산검부의 막후도 그
러했고, 백 년 전 도성 유백과 자웅을 겨루던 도문의 괴인 청허자(靑虛子)도 가히
신의 경지에 이르렀지요."
유겸승의 음성에는 어느덧 흥분기가 들어 있었다.
"천외삼기의 한 명인 검군 궁일평도 일대종사급이고 신검 노전익도 검의 달인이외다
."
장천린은 그의 말을 뇌리에 새겨 넣었다.
"더 과거로 돌아가 보면 천 년 전 마교 십대천마(十大天魔) 중 첫째였던 냉살(冷煞)
의 검법도 빼놓을 수 없소이다. 흑도의 검법 중에서 단연 으뜸이라고 칠 만 합니다.
천 년 전 냉살은 마교를 배신한 대가로 검 한 자루로만 마교교주 환궁의 천마구예(
天魔九藝)를 육백 초나 감당해 내었습니다."
장천린은 문득 궁금한 생각이 들었다.
'그럼 왕검십결해(王劍十訣解)를 남긴 인물은 어느 정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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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천린은 그 동안 검에 빠져 있었다.
그는 항주의 천불동에서 반가선사로부터 받은 세 권의 비급을 통해 은밀히 검을 연
구하고 있었다. 특히 그 중에서도 왕검십결해에 온 정력을 쏟고 있었다.
유겸승은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무슨 연유인지 모르지만 대인께서 진정한 검의 진리를 알고 싶으시다면 한 사람을
찾아가 보십시오."
"어떤 분 말입니까?"
"막부산 선인대(仙人臺)의 한선생(閑先生)을 찾아가 보십시오."
"한선생?"
유겸승은 담배에 불을 붙였다.
곰방대에 다시 연기가 피어오르며 그의 모습은 자욱한 연기에 휩싸여 갔다. 그는 담
배 연기에 싸인 채 다시 손을 놀리기 시작했다. 규칙적이고 능숙한 솜씨로 대나무를
만지며 죽제품을 엮어나가기 시작했다.
"대인께서 노부를 조금이라도 생각하신다면 이대로 놔두시오. 여생을 편안하게 지내
고 싶소이다. 죽으면... 관이나 한 개 써주시면 더욱 고맙겠소이다."
장천린은 더 이상 그를 방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몸을 일으켰다.
"유노인의 말씀 감사합니다."
유겸승은 들었는지 안 들었는지 오직 일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장천린은 청산초당을 나왔다.
태양이 중천에 떠 있었다. 밝은 햇살 아래 죽공예의 산지인 마을 전체가 싱그러운
대나무 향기로 가득 차 있는 듯했다.
그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푸른 하늘에 뭉게구름이 일어나고 있었다.
'세상에는 무수한 풍운이 일어나고 있다. 기인들의 수효도 헤아릴 수 없이 많고...
그들의 운명 또한 끊임없이 부침한다. 그들 중에 검에 일생을 걸었던 기인은 또 그
얼마나 많았던가?
장천린은 죽립을 눌러쓰고 걷기 시작했다.
'과연 내가 검을 배운다면 그들을 누르고 검의 최고봉에 올라설 수 있을까?'
장천린은 빙긋 미소지었다.
그는 조급해 하지 않았다. 그저 차분히 자신이 갈 수 있는 데까지 가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방법은 묵묵히 노력하는 것 뿐이다.'
죽립 아래서 그의 눈빛이 별처럼 빛났다.
'설사 내 일생에 걸쳐 이룩하지 못한다 해도 괜찮다. 얼마나 노력했고, 얼마나 깨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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았느냐가 중요할 뿐이다.'
장천린은 유유히 걸어갔다. 그의 걸음걸이는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았다. 언젠가부터
변한 걸음걸이였다. 마치 행운유수(行雲流水) 같다고나 할까? 오래 전부터 그를 지
켜본 자가 있다면 그의 이런 변화를 눈치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혈육이나 다름없는
원계묵까지도 말이다.
대지에 아지랑이는 사라졌다. 중천에 뜬 태양이 뜨거운 빛을 뿌렸기 때문이다. 대신
산하(山河)는 더욱 청명해졌고, 산들바람이 조금씩 불어오기 시작했다. 유유히 걸
어가는 장천린의 모습이 죽림 사이로 사라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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