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21장 살인청부(殺人請負) (45/87)

제21장 살인청부(殺人請負) 

곡류하(曲流河)는 항주의 명소인 서호(西湖)에서 전당강(錢塘江)으로 흘러나가는 작 

은 강으로 강줄기가 구곡양장(九曲羊腸)인양 끊임없이 굽이쳐 흐르는 곳이다. 

강 양안으로는 숲이 울창하게 우거져 있었고, 강물이 맑고 깊어 태공(太公:낚시꾼) 

들이 즐겨 찾는 곳이었다. 이곳에서는 특히 잉어가 많이 잡히기로 소문나 있었다. 

"......." 

굽이치는 강을 내려다보는 만송령(萬松嶺). 

노인은 회억(回憶)의 빛을 담은 채 커다란 바위를 응시하고 있었다. 

바위에는 여기저기 깊은 균열이 나 있고 이끼가 잔뜩 덮여 있었다. 천년의 풍상(風

霜)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듯했다. 

노인은 아침 일찍 이곳 곡류하로 낚시를 나왔다. 그는 잉어 몇 마리를 잡고는 집으 

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그 동안 집과 곡류하를 오고가며 수없이 마주쳤던 바위였다. 

노인은 자신의 삶과 흡사한 느낌을 받는 바위를 대할 때마다 오랫동안 멍하니 서서 

바라보곤 했다. 그는 지난 십여 년 간 이 바위를 보아왔다. 

요즘 들어 노인은 깊은 상념에 잠기곤 했다. 어린 시절 그는 만송령에 올라 곡류하 

가 전당강과 합류되는 것을 바라보았고, 다시 그 물줄기가 만경창파(萬頃蒼波)의 동 

해(東海)로 흘러나가는 것을 굽어보곤 했다. 

그때부터 그는 만송령(萬松嶺)처럼 거대한 산이 되고 싶어했다. 

혈기 넘치던 젊은 시절, 검을 비껴 차고 강호(江湖)로 뛰어들어 기라성 같은 강자들 

을 꺾고 위명을 날리고자 했다. 연후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만송령을 바라보면 뿌듯 

한 마음이 들 것이라 생각했다. 

-내 너를 닮으리라. 너처럼 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했는가? 

청운(靑雲)의 푸른 꿈을 안고 강호로 들어섰을 때, 처음부터 무참하게 좌절을 당하 

고 말았다. 강적을 만나 뼈저린 패배를 맛본 것이다. 그때 고향의 만송령을 떠올리 

며 그는 땅에 떨어진 검을 주웠었다. 

그로부터 수십 년이 흐르는 동안 그는 더욱 더 많은 좌절과 고초를 겪어야만 했다. 

강호는 그의 모든 꿈과 희망을 짓밟아 버렸다. 급기야 나이가 들어 백발이 턱과 머 

리를 눈처럼 하얗게 변색시켰을 때, 비로소 그는 만송령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 

러나 너무 늙어 있었다. 

백 년의 세월이 유수처럼 흘러가 버린 것이다. 

명예도 힘도, 청운의 푸른 꿈도 희미해져버린 시력(視力)과 함께 쇠락해 버렸다. 그 

렇게 좋아하던 만송령의 웅대한 모습도 짓무른 눈을 한껏 찌푸려야 간신히 보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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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 아니, 청년시절 반짝이는 물결까지도 환히 볼 수 있었던 전당강마저 가물거릴 

뿐이다. 만경창파의 넘실대던 동해의 파도는 거의 보이지 않게 되었다. 

다만 가까이 있는 곡류하와 집으로 돌아갈 때 만나는 바위만이 쉽게 볼 수 있을 뿐 

이었다. 

노인은 이끼가 덮이고 거북등처럼 균열이 나있는 바위를 쓰다듬었다. 바위를 어루만 

지는 그의 손등에 검버섯이 잔뜩 피어나 있었다. 

"허허! 이놈아. 너도 처음에는 만송령처럼 크게 태어나고 싶었겠지. 하나 겨우 이런 

바위가 되었구나. 그것마저도 잔뜩 금이 가고 이끼에 뒤덮여 버렸구나." 

노인은 낮게 웃었다. 백 년의 생애가 그의 웃음 속에서 바스러지고 있었다. 

-이놈아, 그렇다고 너무 자학할 것 없다. 나 역시 너처럼 숱한 역경을 겪었으니까. 

너의 몸에 균열이 가듯 내 얼굴에도 주름살이 졌지 않느냐? 네 몸에 이끼가 끼듯 내 

머리도 허옇게 세었다. 어린 시절 만송령을 닮고 싶어하던 내가 허무하게 흘러가 

버린 세월 속에 그만 너를 닮아 버렸다. 허헛... 하지만 이제야 알겠다. 네가 만송 

령 아래 있지만 결코 만송령 못지 않다는 것을....... 녀석아, 실망하지 말아라. 모 

든 이가 널 알아주지 않는다 해도 나는 널 이해한다. 너는 이 늙은이의 친구니까... 

.... 

노인은 바위에서 손을 떼었다. 

"허허허." 

그의 입에서 허허로운 웃음이 흘러나왔다. 

"잘 있게, 친구!" 

그는 땅에 놓았던 낚싯대를 메고 바구니를 걸쳤다. 이어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며 

걸어가기 시작했다. 

내 다시 태어나도 만송령에 살리라. 

만송령의 솔향기를 맡으며 곡류하에 낚싯대를 드리우리라. 

오고가는 길에 저 늙어버린 바위에 앉아 대화를 나누고 밤이면 책을 읽으며 별들과 

이야기하리라. 

검 대신 호미 들고 살아있는 모든 것을 사랑하리라. 

귀밑에 서리 내리면 손자의 재롱이나 보면서 지나온 세월을 반추해 보리라. 

노인은 산길을 따라 걸어갔다. 

"허헛, 그 늙은 땡초와 술이나 한잔해야겠다. 잉어를 안주 삼아서. 헛헛......." 

노인 노전익(魯殿翼)은 유쾌한 웃음을 흘리며 사라져 갔다. 그가 가는 방향은 항주 

의 북쪽 방향이었다. 

그런데 어찌 상상인들 했겠는가? 그가 인사를 남긴 바위를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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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는 것을. 

"아저씨, 이거 아저씨가 만든 거야?" 

일곱 살쯤 먹었을까? 

호아(虎兒)는 귀여운 눈을 굴리며 물었다. 

느티나무 아래. 

한 명의 죽립인(竹笠人)이 서 있었다. 얼굴에는 면사가 드리워져 있어 그 용모를 알 

길이 없는 죽립인은 한 손에 작은 탈을 들고 있었다. 두 눈이 초승달 모양으로 웃 

는 탈이었다. 

호아는 그 탈이 부러운 듯 자꾸만 바라보고 있는 중이었다. 

죽립인은 부드럽게 말했다. 

"그렇단다." 

"야! 정말 잘 만들었다. 아저씨, 호아에게도 하나 만들어 줘. 응?" 

호아는 응석을 부리듯 올려다본다. 죽립인은 가만히 호아를 응시했다. 빨갛게 상기 

된 뺨에 천진스런 눈동자, 깨물어 주고 싶을 정도로 귀여운 소년이었다. 

"호아는 지금 몇 살이지?" 

"일곱 살!" 

'일곱 살.......' 

죽립인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그때 나 역시 일곱 살이었지.' 

얼굴이 면사에 가려져 있지만 않았더라면 분명 처절한 표정을 짓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호아는 탐이 나는 듯 계속 탈을 바라보고 있었다. 

담자개는 호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의 입에서 부드러운 음성이 흘러 나왔다. 

"호아는 이 세상에서 누구를 가장 사랑하지?" 

호아는 눈알을 사르르 굴렸다. 

"응, 할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 

갑자기 호아는 고개를 저으며 정정했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제일 좋아." 

호아는 자랑스럽게 떠들어댔다. 

"우리 할아버지는 호아에게 무척 잘해 줘. 목마도 태워주고 밤도 따주고 음... 그래 

. 물고기도 잡아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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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하!" 

담자개는 웃었다. 이상하게 낮고 힘이 없는 웃음이었다. 무기력하면서 아득한 절망 

감이 느껴지게 하는 그런 웃음이었다. 

"호아." 

"응?" 

"이 탈 줄까?" 

호아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는 침을 꼴깍 삼키며 담자개가 들고 있는 탈을 바라보 

았다. 담자개는 탈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호아의 할아버지는 지금 어디 있지?" 

호아는 여전히 탈을 응시하며 건성으로 말했다. 

"곡류하에 낚시하러 갔어. 그곳에 없으면 저쪽 늙은 스님 할아버지한테 갔을 거야." 

호아는 작은 손가락으로 한 곳을 가리켰다. 항주의 북쪽이었다. 

"착한 아이다. 호아는......." 

담자개는 탈을 호아에게 주었다. 호아의 얼굴에 갈등이 어렸다. 

"가져도 돼?" 

"그럼." 

호아는 빼앗듯이 탈을 잡아채더니 얼른 뒤로 숨겼다. 

"다시 달래기 없어!" 

"그래." 

이때 담자개의 시선이 호아의 등뒤로 향했다. 그곳에 한 채의 모옥(茅屋)이 있었다. 

모옥의 문이 열리며 두 명의 중년남녀가 걸어나오는 것이 보였다. 부부인 듯했다. 

남자가 소리쳤다. 

"호아야! 어디 있느냐?" 

호아가 깡충 뛰며 외쳤다. 

"아버지! 여기야!" 

남자가 손짓을 했다. 

"어서 오너라. 저녁 먹어야지." 

"응!" 

호아는 고개를 돌리더니 재빨리 말했다. 

"아저씨 나 갈래." 

"그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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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자개는 고개를 끄덕였다. 호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갔다. 잠시 후 호아가 

모옥 앞에서 중년여인의 품으로 뛰어드는 것이 보였다. 도란도란 나누는 대화가 들 

려왔다. 

"이 탈 어디서 났니, 호아야?" 

"응, 저 아저씨가 준거야." 

담자개의 몸이 흠칫 흔들리는 듯했다. 

'노전익의 자식들이다.'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노전익의 혈족들!' 

면사 속의 숨어 있는 담자개의 눈빛이 음울해졌다. 그의 눈은 이상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이때 호아가 그를 향해 소리질렀다. 

"아저씨! 고마와요!" 

호아는 그를 향해 탈을 들고 흔들고 있었다. 너무나 맑고 아름다운 웃음을 지으며. 

순간 담자개의 눈에서 쓰디쓴 빛이 흘러나왔다. 잠시 호아를 응시하던 그는 손을 들 

어 흔들어 주었다. 그리고 돌아서 걷기 시작했다. 

'노전익, 네 핏줄만은 보존시켜 주마.' 

담자개, 그는 대체 누구인가? 

팔 월 십이 일. 

장천린이 항주에 온 지도 어느덧 이십여 일이 흘렀다. 그 동안 사업은 어느 정도 마 

무리단계에 들어섰다. 

낙수범은 항주와 절강성 일대의 용정차 구입을 거의 끝냈다. 구입액은 예상을 초과 

하여 은자 천 이백만 냥이나 들었으나 장천린은 조금도 놀라지 않고 전표를 끊어주 

었다. 

모든 일이 순조로웠다. 그 동안 장천린, 즉 상인 용백군의 이름은 강남의 상계에 확 

고히 자리잡게 되었다. 

천화군방원(天華群芳院). 

항주제일의 기루인 천화군방원은 화려하기로 천하에서 으뜸이다. 그것은 안목 높은 

군방원의 원주 화가영이 거금을 들여 천하 각처로부터 온갖 희귀한 장식물들을 들여 

와 직접 꾸몄기 때문이다. 

지금 천화군방원에서도 가장 크고 사치스런 방에 두 사람이 마주앉아 있다. 

장천린과 개방의 젊은 방주 백의신룡(白衣神龍) 태무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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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천린은 이 년 전부터 이곳을 잘 알고 있었다. 사업차 항주에 올 때마다 매번 이곳 

에 묵었던 것이다. 이곳의 원주 화가영과도 몇 차례 상면한 적이 있었다. 

그는 자수성가한 여인 사업가 화가영을 높이 평가했다. 

화가영 또한 그를 귀빈으로 접대했다. 그들은 남녀 관계를 떠나 사업의 지기(知己) 

와도 같은 교제를 이어오고 있었다. 

한때 두 사람은 밤을 세워가며 중원의 상권(商權)과 고금의 상술(商術)에 대해 토론 

을 벌인 적도 있었다. 다만 장천린은 그녀가 옥류향의 연인이란 사실만은 알지 못하 

고 있었다. 

장천린은 태무결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사실 그는 태무결의 초청을 받아 이곳에 

온 것이었다. 

당금의 개방은 창건이래 최대의 융성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전대방주 육지신룡이 남 

북개방을 통일하긴 했으나 오랫동안 반목을 거듭해 왔던 개방의 질서는 채 확립되지 

않은 상태였다. 

개방의 위계질서를 바로 세우고 중원남북 십삼개성(十三個省)의 조직을 재편하며 개 

방의 풍운아로 등장한 것이 바로 백의신룡 태무결이었다. 그가 방주에 오른 이후 개 

방의 위세는 급격히 신장되어 명실공히 무림의 최대방파로 성장하게 되었다. 

태무결은 육지신룡의 여섯 명의 제자들 중 서열상으로 세번째였다. 

그러나 타고난 지혜와 통솔력, 뛰어난 임기응변으로 인해 방주의 위(位)에 오르게 

되었다. 실상 무공만으로 본다면 그가 가장 강한 것은 아니었으나 여섯 명의 제자들 

은 그를 방주로 추대하는데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또 하나의 별호가 있었다. 

삼촌독심(三寸毒心)! 

삼 촌 길이의 혓바닥으로 사람을 죽이며(三寸殺人), 겸손하면서도 부드러운 마음속 

에서 일단 살심(殺心)을 품기만 하면 무서운 독기(毒氣)를 품는다 하여 생긴 별호였 

다. 

장천린은 미소지으며 말했다. 

"방주께서 어인 일로 이런 곳에서 소생을 초청하셨소이까?" 

태무결은 나직이 웃었다. 

"하하! 소제가 아무리 거지라 해도 명색이 개방 방주인데 귀한 손님을 아무려면 움 

막에서 모실 수야 없지 않습니까?" 

강변에서의 우연한 조우 이후, 태무결은 곧 구룡상선으로 정식으로 초청장을 보내왔 

다. 

장천린은 그가 자신을 초청한 의도를 알 수가 없었다. 더욱이 전당강에서 헤어진 후 

보름이나 지났기 때문이었다. 그 동안 그는 사업으로 인해 눈코 뜰 새 없었던 것이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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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무결은 술병을 들어 올렸다. 

"자, 우선 소제의 잔을 받으십시오, 용대인." 

장천린은 두 손으로 술을 받아 흔쾌히 마셨다. 

그는 태무결이 마음에 들었다. 놀라운 능력과 수완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항상 겸손 

한 젋은 방주였다. 지혜로운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을 알아보는 법이었다. 

장천린과 태무결은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태무결은 

달변에 능변이었다. 화제 또한 다양했으며 유머와 해학이 넘치는 위인이었다. 

두 사람은 마치 십년지기(十年知己)라도 되는 양 금세 친숙하게 되었다. 

잔이 거듭되는 동안 날이 저물어 창밖이 어둑어둑해졌다. 두 사람의 얼굴도 취기로 

인해 화색이 감돌고 있었다. 

태무결은 문득 정색을 하며 말했다. 

"소제가 용대인을 초청한데는 중요한 일이 있어서입니다." 

"중요한 일이라시면?" 

"우선 이것을 봐 주시겠습니까?" 

장천린은 그가 건네는 것을 살펴보았다. 

그것은 붉은 색의 첩지(帖紙)로 놀라운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극비살인지령(極秘殺人指令) 제일백육십사호. 

집행자: 시마(屍魔) 관중(關中). 

대상: 육지신룡(陸地神龍) 범천구(凡天九). 

집행등급: 제육등급. 

내역: 납치하되 불가하면 척살(刺殺)할 것. 기타사항은 동봉하는 자료를 참조하라.> 

첩지의 내용을 읽어본 장천린은 가슴이 섬뜩해졌다. 

"이것은......?" 

태무결은 술잔을 탁자에 내려놓으며 침중하게 말했다. 

"조화성주 염무가 뿌리는 살인혈첩입니다." 

그는 어두운 표정으로 설명했다. 

"이 혈첩이 시마 관중에게 전달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육 년 전입니다." 

그는 빈 잔에 술을 따르며 말을 이었다. 

"시마 관중이 누군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육 년 전 사부께서는 돌연 실종되어 지금 

까지 생사불명(生死不明)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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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천린의 안색이 변했다. 

놀라운 일이었다. 그는 개방의 전대방주 육지신룡이 은거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 

었다. 무림인 모두가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의문의 실종이었다니! 

태무결은 가라앉은 음성으로 계속 말했다. 

"육 년 전 사부께서 실종된 후로 개방 내에서는 꾸준히 분열을 획책하는 자들이 암 

약하고 있습니다. 비록 소생이 필사적으로 질서를 바로 잡으려 노력하고 있으나 아 

직 첩자들의 정체를 밝혀내지 못한 상태입니다." 

장천린은 눈썹을 찌푸렸다. 

백의신룡 태무결의 입에서 나온 것은 중대한 무림비사였다. 그의 말을 듣는 동안 그 

는 가슴속의 피가 격탕함을 금치 못했다.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단위제. 

산동성 제형안찰사사의 형부도독이자 동창의 대영반이란 엄청난 직함을 지닌 위인. 

그는 직함과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능글능글하며 낙천적인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지독한 술귀신이기도 했다. 

일단 사건이 터지면 그는 완전히 달라진다. 술기운에 찌들은 두뇌는 무섭게 돌아가 

고, 충혈되어 탁한 눈빛도 바늘처럼 예리해진다. 오늘 밤 그는 그런 모습으로 눈을 

가늘게 한 채 살기를 번쩍이고 있었다. 

객점의 한 방안. 

점소이가 겁먹은 눈으로 침상 위에 죽어있는 시체를 바라보고 있었다. 주위에는 항 

주성 관부의 관졸 세 명이 조사하고 있었다. 한쪽에는 단위제가 팔짱을 낀 채 우뚝 

서있었다. 아직 여명이 트지 않은 새벽이었다. 

어젯밤 그는 이곳 객점에서 백살대의 몇몇 후배들과 함께 술을 마셨다. 

그러나 그의 주량을 감당하지 못해 모두들 만취한 상태에서 돌아가 버리고 그는 혼 

자서 계속 술을 마셨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밤이었다. 

자시(子時)쯤 되었을까? 

그가 있는 객방 바로 옆방에 두 명의 중년무사가 들었다. 단위제는 마침 바람을 쏘 

일 겸 밖으로 나오다 그들을 보게 되었다. 두 중년인의 눈빛이 워낙 날카롭고 기도 

가 출중하여 단위제는 약간 놀랐다. 

그날 새벽, 바로 두 중년인들이 묵고 있는 객방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한 명이 죽고 한 명이 실종된 사건이었다. 

단위제는 워낙 많은 술을 마셔 살인이 일어난 시각에 아무런 기척도 듣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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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술을 나르려 들어갔던 점소이가 시체를 발견하여 즉각 관부에 신고하게 되었다 

마침 객원의 여덟 개 방 가운데 살인사건이 일어난 방을 제외하고 사람이 묵은 것은 

단위제 혼자 뿐이었다. 그로 인해 단위제는 유력한 용의자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이 방으로 끌려온 것이었다. 

시체를 살피던 관졸이 혀를 찼다. 

"쯧! 처참하게 죽었군. 목이 반쯤 끊어졌어." 

다른 관졸도 고개를 흔들었다. 

"예리한 칼로 한 번에 내려친 것 같군. 상처가 매끈한 걸로 보니 말이야." 

한편 단위제의 흐리멍덩한 눈은 방안의 구석구석을 살펴보고 있었다. 관졸의 음성이 

들렸다. 

"시신의 상태로 보아 원한관계에 의한 살인이 틀림없는 것 같군." 

단위제의 입가에 조소가 어렸다. 그때 한 명의 관졸이 다가와 그에게 냉엄하게 말했 

다. 

"노인장, 관청까지 함께 가야겠소." 

단위제는 관졸을 바라보며 퉁명스럽게 반문했다. 

"내가 왜 그곳에 간단 말인가?" 

관졸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 자가 죽었을 때에 객원에 있던 사람은 당신 뿐이오. 그러니 당연히......." 

단위제는 히죽 웃으며 점원을 턱으로 가리켰다. 

"점소이도 있지 않은가?" 

점소이는 펄쩍 뛰었다. 

"노인장! 생사람 잡지 마시오. 나는 이제껏 개미 한 마리 죽여본 적이 없소!" 

이때 다른 한 명의 관졸이 다가오며 협박하듯 말했다. 

"나이를 생각해 포박은 않을 테니 곱게 따라오시오." 

그는 단위제의 팔목을 잡으려 했다. 단위제는 팔꿈치로 관졸을 밀쳤다. 

"엇!" 

관졸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감히 관인에게 반항이라니? 

단위제는 그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시체에게 다가갔다. 

"노인장! 무슨 짓이오?" 

관졸이 포승을 잡은 채 다가왔다.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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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위제는 갑자기 눈을 부릅뜨며 그를 노려보았다. 관졸은 그만 기세에 밀려 멈칫했 

다. 

"단위제란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느냐?" 

"옛?" 

관졸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어찌 그 이름을 모르겠는가? 관부의 전설적인 인물이 

아니던가. 산동성 일대에서는 귀신조차 잡는다는 무서운 인물로 오랫동안 귀가 따갑 

게 들었던 이름이었다. 

"노... 노인장은 뉘시오?" 

관졸은 비로소 포승을 거두며 공손히 물었다. 

"내가 바로 산동성 제형안찰사사의 형부도독 단위제다." 

단위제는 신분을 증명하는 영패를 내보였다. 굳이 동창의 대영반이란 신분을 밝힐 

필요도 없었다. 

"죄... 죄송합니다. 단도독님!" 

관졸들은 일제히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한편 점소이는 창백한 표정으로 안절부절하 

고 있었다. 단위제를 용의자로 지목한 것은 바로 자신이었던 것이다. 

단위제는 본격적으로 방안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의 눈은 더 이상 흐릿하지 않았다. 날카로운 안광을 뿌리며 그는 방안 구석구석을 

면밀히 조사했다. 그는 먼저 시신에 나있는 상처부위를 조사했다. 과연 목이 반쯤 

베어져 있었다. 

'역시 예상 대로군.'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칼에 당한 게 아니다. 날카롭고 가느다란 철사에 베인 것이다. 그것도 무공이 아주 

뛰어난 자의 짓이다.' 

그는 창가로 걸어갔다. 

평범한 사람의 눈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으나 그의 예리한 눈에는 창문틀에 미 

세한 흔적이 포착되었다. 그는 소매 속에서 작은 손 칼을 꺼내 그곳을 파보았다. 

"......?" 

관졸들은 의아한 눈으로 그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단위제는 창틀에서 무엇인가를 파 

냈다. 그것은 손가락 길이의 가느다란 암기(暗器)였다. 

수노(袖弩:소매 속에 감춘 채 발사하는 작은 활)였다. 전체적으로 화살처럼 생겼으 

나 극히 가늘고 섬세한 모양이었다. 그것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살피던 단위제의 눈 

빛이 반짝였다. 

'이렇게 작은 수노를 쓰는 문파는 흔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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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노를 면밀히 살펴보던 그는 미세한 글씨가 새겨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화(華)> 

'화산파(華山派)!' 

단위제의 안색이 급변했다. 화산파라면 구파일방 중에 속해있는 문파였다. 

그의 안색이 더없이 침중해졌다. 그는 탁자로 걸어가더니 손가락으로 탁자 면을 훑 

은 후 냄새를 맡아보았다. 그의 안면이 가볍게 일그러졌다. 

'낙일향(樂日香)! 이것은 상대의 기력이 서서히 빠지게 만드는 미혼향의 일종이다.' 

그는 잠시 생각했다. 

머리 속에서 대충 사건의 개요가 그려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그는 신형을 날려 창문 

틀에 내려앉았다. 창밖에는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저 자가 죽기 전에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단위제는 창문에 올라앉은 채 예리한 시선으로 창문 주위를 살펴보았다. 문득 추녀 

끝에 시선이 고정되었다. 

추녀 끝에 미량의 진흙이 묻어 있는 것이 보였다. 

'역시!' 

그는 다시 방안으로 뛰어내린 후 여전히 영문을 모른 채 서있는 관졸들에게 지시했 

다. 

"너희들은 시체를 관부로 이송해라. 이번 사건은 노부가 해결하겠다." 

관졸들은 감히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고 일제히 대답했다. 

"옛!" 

단위제는 더 이상 볼 것 없다는 듯 방안을 빠져 나왔다. 

객원의 후원으로 걸어나온 단위제는 찌푸린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아직 어두운 하늘 

이었다. 빗물이 금세 얼굴을 적셨다. 

'살인자는 여자다. 그것도 대단한 고수다. 죽은 자는 화산파의 인물이고.......' 

그가 범인을 여자로 단정한 것은 그만이 지니고 있는 직감이었다. 또한 그의 직감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다. 

'범인은 추녀 끝에서 편복신법(  身法)으로 매달린 후 창문 틈으로 낙일향을 흘려 

넣었다. 무색무취한 낙일향을 맡고 두 중년인은 현기증을 느꼈을 것이다.' 

단위제의 눈이 매섭게 번들거렸다. 

'범인은 그들이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자 철사(鐵絲)를 날려 한 명의 목을 감고 날아 

들어왔다. 단숨에 한 명을 해치운 후 다른 한 명을 납치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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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추리는 계속되었다. 

'화산파의 한 인물은 동료가 죽는 것을 보고 본능적으로 범인을 향해 수노를 발사했 

다.' 

단위제는 왠지 이 사건에 흥미가 당기는 것을 느꼈다. 그는 이번 사건이 보통 사건 

이 아님을 감지하고 있었다. 

'화산파의 두 중년인은 보통인물이 아니다. 범인은 절정무공을 지닌 데다가 사전에 

치밀한 계획을 세워 암습했다. 그런데도 수노의 활이 박힌 깊이가 세 푼이나 되는 

것은 수노를 날린 인물이 심후한 내공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단위제의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어렸다. 

'좋다. 한번 조사해보자. 범인이 누군지 몰라도 날 만난 것은 불행한 일이다.' 

단위제의 머리는 비상하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미리부터 계획된 살인이었다면 오히려 쉬운 일이다.' 

그는 발걸음을 옮겼다. 

'항주는 번화한 곳이므로 여인의 몸으로 실신한 사람을 운반하기는 쉽지 않다. 그렇 

다면.......' 

단위제는 걸음을 빨리 놀렸다. 

이상하게도 그는 이번 사건에 강한 흥미를 느꼈다. 처음에는 단순한 살인사건인 줄 

알았으나 추리를 거듭할수록 점점 더 중요한 사건임을 느끼게 되었다. 더욱이 구파 

일방의 일원인 화산파가 개입되었다는 사실이 더욱 그의 흥미를 불러 일으켰다. 

비는 소리 없이 계속 내리고 있었다. 단위제의 눈에는 이미 술기운이 싹 가셔버리고 

없었다. 

<현재 개방의 주도권을 움켜쥐고 있는 것은 본인과 본인의 다섯 사형제들입니다. 우 

리들은 지난 육 년 간 노력을 경주하여 개방의 질서를 바로 잡았습니다. 하지만 본 

방 내에는 큰 독버섯이 있으니 바로 개방의 구결대장로(九結大長老)인 구지신개(九

指神 ) 난추평(蘭秋平)입니다. 그는 남개방(南  ) 출신으로 절강일맥(浙江一脈) 

의 지도자이기도 합니다. 그는 남개방 삼십만 방도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고 있으며, 

과거 사부께 사사건건 불만을 표시했던 인물입니다. 사부께서 북개방(北  ) 출신 

이었기 때문입니다.> 

<난추평 장로는 지금 남개방을 북개방과 분리할 계획을 짜고 있습니다. 그의 신념은 

확고한 것입니다. 그 동안 본인은 수없이 설득해 보았으나 그는 생각을 바꾸지 않 

고 있습니다. 그 와중에 난추평 장로를 이용하려는 자가 등장했는데 바로 조화성입 

니다. 조화성주 염무는 북개방에 첩자를 침투시켰고, 그들로 하여금 여론을 획책하 

고 있습니다. 그의 최종목적은 개방을 남북으로 분리하는 것입니다.> 

장천린은 구룡상선의 선실에서 용정차를 마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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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따라 유난히 용정차 향기가 진하게 느껴졌다. 그는 어제 저녁 개방 방주 태무결 

과 이야기한 후 새벽녘에야 돌아왔다. 선실의 창밖에는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쏴아....... 

물 끼얹는 소리가 들렸다. 선실 안쪽에는 속이 은은히 비치는 휘장이 쳐져 있었다. 

휘장을 통해 여인의 나신이 투영되어 보였다. 황보설연이 목욕을 하고 있었다. 

장천린은 휘장을 통해 은은하게 비쳐 보이는 그녀의 나신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 그는 태무결이 한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육 년 전 조화성주 염무가 살인혈첩을 띄워 사부를 납치한 것은 개방의 통일을 저 

지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본인이 사부님의 실종을 비밀에 붙인 것은 개방의 혼란에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그로 인해 지난 수년 간은 간신히 개방의 분열 움 

직임을 막아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염무는 계속 첩자를 통하여 개방의 분열을 획 

책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개방의 결속이 이루어지면 그 세력이 막강할 뿐더러 근 백 

만(百萬)을 헤아리는 방대한 인원과 거미줄 같은 소식통으로 인해 조화성의 움직임 

이 쉽게 드러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최근의 정보에 의하면 본인도 이미 염무가 뿌린 살인혈첩의 대상자에 올랐습니다. 

본인은 두렵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천하가 염무의 손에서 놀아날 수는 없지 않습니 

까?> 

<십수 년이래 무림 각파의 장문인들과 일급고수들, 무림의 기인들이 원인 모르게 실 

종되었습니다. 그 숫자는 이미 수백 명에 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조화성에 

의해 납치된 것이 확실합니다. 사부의 경우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증거가 없습니다. 

유일한 증거라면 육 년 전 사부가 실종된 직후 하남(河南)에서 한 개방도가 우연히 

소매치기한 전낭 속에서 발견한 염무의 살인혈첩 뿐입니다. 그러나 그 제자는 그 

날 죽었으며 단지 살인혈첩 한 장만이 하남분타에 전해졌기에 본인의 손에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아마 살인혈첩이 든 전낭을 지녔던 자가 시마(屍魔) 관중이 아닌가 

추측됩니다.> 

장천린은 시선을 창가로 돌렸다. 

'삼 년 전 남창 만가산에서 만난 백변천군 노명, 개벽신수 전붕, 일수삼도 강중문, 

소림의 귀원선사.......' 

그의 눈빛은 과거의 기억을 더듬어 나갔다. 

'그들은 조화성 제오신마전에 갇혀있던 사람들이었다. 비록 노명의 지략으로 육십 

육 인의 고수는 조화성을 탈출했지만 결국은 만가산에서 전멸하고 말았다.' 

장천린은 훗날 무림에서 그들 사인에 대해 알아보았다. 

그들은 모두가 쟁쟁한 일류고수들이었다. 일수삼도(一手三刀) 강중문만 해도 만승금 

도 도담후 이래로 가장 뛰어난 도객(刀客)으로 평가받던 고수였다. 특히 귀원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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歸元禪師)는 당금 소림(少林)의 장문인(掌門人) 귀진대사(歸眞大師)의 사형으로 무 

공의 깊이를 추측할 수 없다는 불문의 고수로 평가받고 있었다. 

'당시 네 사람의 무공은 지고무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화성에 그렇게 쉽게 당 

한 이유는 신체에 어떤 금제가 가해졌음이 분명하다.' 

그의 뇌리에 다시 태무결이 말이 떠올랐다. 

<한 달 전 본인은 난추평 장로를 만나기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 마지막으로 그 분과 

협상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결렬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엄청난 비 

밀을 알아냈습니다. 본인을 수행한 북개방의 팔결장로(八結長老)중 한 명이 난장로 

와 은밀히 접선한 것입니다. 더욱이 그 자는 조화성의 일맥인 혈관음(血觀音)과도 

접선했습니다.> 

<본인은 그 자의 주위를 조사했지요. 결국 또 한 가지 엄청난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그 자는 일개 하수인에 불과하며 북개방의 대원로(大元老) 중 한 분이 이미 수년 

전부터 난추평 장로와 묵계를 맺었다는 것입니다.> 

<그 묵계는 개방을 남북으로 나눈 뒤 본인과 본인의 사형제들을 제거한 후 두 사람 

이 각각 남북개방의 방주에 오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계획은 치밀하게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놀라운 사실은 이미 혈관음의 수하들이 본인을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는 것입니다. 일차적으로 본인이 제거되어야만 그들이 마음대로 활약 할 수 

있기 때문이겠지요.> 

휘장을 통해 보이는 여체는 목욕을 마친 듯 수건으로 몸을 닦고 있었다. 허리를 숙 

인 여체의 모습은 다분히 환상적으로 보였다.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기 위해 상체를 

젖히자 봉긋한 젖가슴의 선이 유난히 자극적으로 보였다. 

장천린은 용정차를 다시 한잔 따랐다. 은은한 향기가 선실 안을 감돌았다. 

'전당강 근처에서 죽은 소녀는 혈관음의 스물 한 번째 제자였다. 그녀는 북개방의 

대원로와 남개방의 난장로가 만나는 비밀장소를 혈관음에게 알리기 위해 가다가 태 

무결의 수하 십육 명을 죽이고 도주했다. 그리고 태무결에 의해 당했다.' 

장천린은 그녀의 은밀한 부위에서 가느다란 원통을 꺼내던 늙은 거지의 모습이 떠올 

랐다. 

'그녀가 자신의 비부 속에 숨긴 쪽지에는 팔월 망월 남병산 정자사(靜慈寺) 해시(亥

時)란 글씨가 적혀 있었다. 그것은 비밀 회합장소를 표기한 것이다. 그곳에서 두 사 

람은 혈관음과 협정을 맺을 계획이었을 것이다.' 

장천린의 두뇌는 무섭게 돌아가고 있었다. 

'결국 그 일 때문에 태방주는 날 초청했다.' 

<북개방 대원로는 현재 남북개방을 통틀어 가장 배분이 높은 분입니다. 본인에게는 

사숙조뻘이 되며 연세는 백세를 훨씬 넘긴 분으로 천중노개(天中老 ) 탁애장(卓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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長)이란 분입니다. 그 분은 개방 일에 관여하지 않은지 수십 년이나 되었는데 그런 

음모에 가담했다는 사실은 정말 충격입니다. 본인이 용대인을 초청한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장천린은 몸을 일으켜 창문을 향해 걸어갔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전당강 하구(河口)에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왠지 음산 

한 느낌을 주는 아침이었다. 

그의 뇌리에는 태무결의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사숙조님과 난추평 장로를 제거해 주십시오.> 

장천린은 눈썹을 찡긋했다. 창문을 통해 바람에 날린 빗방울이 얼굴을 때렸던 것이 

다. 

'태무결은 무서운 자다. 삼촌독심이란 별호와 한 치도 다르지 않은 자다. 일단 냉정 

히 판단한 후 대를 위한 소라고 판단되면 과감히 제거하는 그런 냉정한 인물이다.' 

장천린은 태무결의 얼굴을 떠올렸다. 

'썩은 곳을 도려낸다고 하지만 그의 사숙조나 난추평이 죽으면 개방에서 그에게 도 

전할 인물은 사라지게 된다. 그럼 자연히 남북개방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며 그는 반 

석 위에 앉게 될 것이다.' 

장천린은 물안개가 어려있는 전당강 하구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는 직접 나서서 그들을 죽일 수가 없다. 그들 두 명은 개방에서 존경을 

받고 있으며 수많은 추종세력을 거느리고 있다. 만일 그들을 죽인다면 엄청난 소요 

가 일 것이며 어쩌면 태무결이 방주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될지도 모른다. 아니, 생 

명까지도 보장받을 수 없을 지도 모른다.' 

장천린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그래서 그는 외부인을 생각한 것이고 원제(元弟)를 생각했을 것이다. 계묵이라면 

그들을 처치할 수 있으리라 판단했을 것이다. 게다가 계묵에게 그들의 약점을 제시 

하면 쉽사리 죽일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질 것이다. 설혹 실패한다 해도 그는 충분히 

발뺌할 수 있다. 계묵은 개방사람이 아니니 그가 부인한다면 그대로 믿을 것이다.' 

장천린의 머리는 점점 빨리 돌아가고 있었다. 

'그들 두 명이 죽는다면 태무결은 겉으로는 적극적으로 범인을 찾는 척하며 슬픔을 

위장하여 개방도들의 인심(人心)을 얻을 것이다.' 

장천린의 머리카락 끝에서 빗방울이 맺혔다. 

'더욱이 혈관음의 제자를 죽였으니 정작 혈관음은 그들 두 사람이 만나는 장소조차 

모르지 않은가?' 

이때였다. 뒤에서 희고 아름다운 손이 뻗어와 그의 목을 살며시 끌어안았다. 동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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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그러운 여체의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시나요, 백군?" 

귓가에 따스한 입김이 부어졌다. 황보설연이었다. 

방금 목욕을 끝낸 그녀는 홑겹의 나삼만 입은 채 아직 마르지 않은 머리카락을 수건 

으로 질끈 동여 묶은 채 다가와 있었다. 

장천린은 돌아서며 그녀의 모습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아름답군." 

"정말?" 

"그렇소." 

황보설연은 배시시 웃으며 두 손을 그의 목에 걸고 매달렸다. 그녀는 꽃잎 같은 입 

술을 비쭉 내밀었다. 

"음!" 

그녀는 눈을 감으며 달콤한 신음을 발했다. 사랑스러운 여인이었다. 

장천린은 절로 웃음이 나왔다. 

"하하! 설연, 당신은 입맞춤이 그리도 좋소?" 

황보설연은 생긋 웃으며 말했다. 

"당신에게만요." 

장천린도 남자다. 더욱이 황보설연같은 미인 앞에서야 세상의 어떤 남자가 감흥을 

느끼지 않겠는가? 

장천린은 황보설연의 한 줌밖에 안 되는 가느다란 허리를 가볍게 껴안았다. 

그는 고개 숙여 그녀의 촉촉이 젖어있는 입술을 지그시 눌렀다. 황보설연은 열렬히 

반응해 왔다. 그의 목에 매달리다시피 하며 적극적으로 그의 입술을 받아들였다. 홑 

겹의 나삼을 통해 그녀의 육체가 뜨겁게 꿈틀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장천린은 그녀의 둔부를 가볍게 어루만졌다. 

"으응......." 

황보설연은 허리를 비틀며 더욱 깊이 안겨왔다. 장천린이 가볍게 그녀를 떼어놓자 

아쉬운 듯한 표정으로 기대오며 물었다. 

"백군, 어제는 왜 안 들어왔죠?" 

장천린이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그녀는 코웃음쳤다. 

"흥, 기루에 갔었지요?" 

장천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럴만한 일이 있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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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보설연의 얼굴에 질투의 빛이 어렸다. 

"기루의 여인들은 모두 예쁘지요?" 

장천린은 빙긋 웃었다. 

"그걸 말이라고 하오? 예쁘지 않으면 어떤 사내가 기루를 찾겠소?" 

황보설연의 얼굴이 굳어졌다. 

"정말... 저보다도 예쁘나요?" 

장천린은 그녀의 뺨을 꼬집었다. 

"당신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여자들이오." 

비로소 그녀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러나 짐짓 뾰로통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거짓말 말아요." 

잠시 후 그녀는 눈가를 약간 긴장하며 물었다. 

"그녀들과 잠을 잤나요?" 

장천린은 피식 웃었다. 

"설연, 내가 그런 사람으로 보이오?" 

"흥, 남자들이란 그저 여자만 보면 맥을 쓰지 못하잖아요?" 

장천린은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설연, 내가 여자를 밝히는 사람이었다면 이제까지 가만히 있었겠소?" 

"가만히 못 있으면요?" 

"하하! 벌써 그대를 꿀꺽 삼켰을 것이오." 

"어머!" 

황보설연의 얼굴이 빨개졌다. 그녀는 부끄러움에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이더니 곧 항 

의하듯 따지고 들었다.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제가 무슨 음식인가요?" 

장천린은 그녀의 뺨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설연, 당신은 그녀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여자요.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사랑하는 여인이라는 것이오." 

황보설연의 얼굴에 화사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때였다. 밖에서 착 가라앉은 음성 

이 들려왔다. 

"형님, 사문도입니다." 

장천린은 안색을 가다듬었다. 

"잠시만 기다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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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가볍게 황보설연을 떼어내며 말했다. 

"설연, 그대는 옆방으로 가시오." 

황보설연은 고개를 저었다. 

"흥, 제가 들으면 안 되는 이야기인가요?" 

장천린은 그녀의 몸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안될 것은 없소. 하지만 그 모습으로 있으면 문도에게 눈요기만 실컷 제공하게 될 

거요." 

"어머!" 

황보설연은 그제야 자신의 모습을 내려다보고는 그만 얼굴이 홍당무가 되고 말았다. 

홑겹의 나삼은 너무나 얇아 그녀의 모든 것이 고스란히 비쳐 보였던 것이다. 장천 

린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들어오게, 문도." 

사문도가 들어왔다. 그의 얼굴에는 좀처럼 볼 수 없었던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너무 행복해 보이는 것 같아 질투가 납니다, 형님." 

장천린은 그저 웃어 보일 뿐이었다. 

"빨리 결혼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보기에 황보소저 이상 가는 여인은 없을 것 

같습니다." 

장천린은 화제를 돌렸다. 

"문도, 조사한 일은 어찌 되었나?" 

사문도는 그와 함께 지내는 동안 표정이 많이 밝아져 있었다. 그는 정색을 하며 보 

고했다. 

"태무결의 말은 사실이었습니다. 난추평은 개방 내에서 대단한 야심가로 통하고 있 

었습니다. 북개방의 천중노개 탁애장과 은밀히 회동한 것도 사실인 것 같습니다. 최 

근 그가 항주에 와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그렇군. 참, 단도독은 지금 어디 있는가?" 

사문도는 눈썹을 모았다. 

"글쎄요? 어제부터 보이지 않습니다. 아마 술독에 빠져 계시는 모양이지요." 

장천린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나이를 생각해서라도 술을 좀 줄여야 할 텐데." 

사문도는 미소지으며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단도독님의 위장은 철판입니다. 소제도 술이 

강한 편인데 단도독님께는 도무지 상대가 되지 않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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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천린은 빙그레 웃으며 내심 중얼거렸다. 

'하긴, 반송(盤松)이나 돌아와야 단도독이 조금 기가 죽을까?' 

이때 사문도는 비로소 생각난 듯 말했다. 

"참 조금 전 누군가 형님께 이 서찰을 전해달라고 맡겼습니다." 

그는 소매 속에서 한 통의 서찰을 꺼내 두 손으로 바쳤다. 장천린은 서찰을 읽어보 

았다. 

<용대인 전(前). 

어제 저녁 술자리는 매우 즐거웠습니다. 용대인과의 대화 또한 매우 뜻깊은 것으로 

평생의 추억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용대인께서 항주를 떠나시기 전에 다시 한 번 기 

회가 닿는다면 영광스런 자리를 만들어 보고 싶습니다.> 

서찰은 서명은 없었으나 개방 방주 태무결이 보낸 것이었다. 내용은 평범한 것이었 

다. 굳이 그런 글을 서찰로 써보내는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장천린은 창가로 걸어가더니 서찰을 창밖으로 내밀었다. 서찰이 빗물에 젖으며 서서 

히 다른 글씨가 나타났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망월(望月:보름. 십오일을 말함) 해시(亥時) 남병산 정자사(靜慈寺)에서 구지신개 

난추평과 천중노개 탁애장, 팔결장로 녹배상(祿背相) 등 삼인이 회동할 예정. 혈관 

음(血觀音)은 오지 못할 것이오. 대인의 결단을 바라오. 받아들일 수 없다면 우리 

둘 사이의 대화는 영원히 기억 속에서 지워버리셔야 할 것이오. 대인께서 승낙하신 

다면 그 은혜 평생 잊지 않을 뿐더러 사례로 은자 백만 냥과 본인이 개방 방주에 재 

위하는 동안 대인께서 필요로 하시는 모든 정보를 최우선으로 제공할 것이오. 본인 

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리다. 대인의 현명한 판단을 바라오.> 

스스스....... 

놀랍게도 서찰이 녹기 시작했다. 장천린은 빗물을 맞고 흐물흐물해지면서 손가락 사 

이로 빠져나가는 서찰을 내려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실로 용의주도하군. 일체의 증거도 남지 않았다.' 

그는 손바닥을 창가에 문질러 닦은 후 고개를 들어 전당강의 수면을 바라보았다. 

'태무결... 그 자의 두뇌는 신산에 비해 결코 약하지 않다. 아니, 잔인한 면에서는 

신산보다 몇 배나 무서운 작자다.' 

그는 생각에 잠겼다. 

'그런 자와 손을 잡는다는 것은 큰 모험이다. 왜냐면 그를 완전히 신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영악한 자일수록 신용을 보증할 수 없는 법이다.' 

장천린의 생각은 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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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가 제시한 조건은 뿌리치기에는 너무도 유혹이 크다. 백만 냥의 은자는 

아무 것도 아니다. 대강남북 십삼개성에 골고루 분포되어 있는 백만을 헤아리는 개 

방방도들의 방대한 조직과 정보망을 마음대로 쓸 수 있다면 장차 나의 사업에 날개 

를 다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다.' 

장천린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 자는 자신이 제시한 조건이 내게 얼마나 큰 유혹인 줄을 잘 알고 있다. 그것은 

내가 정보를 중시하는 상인이란 점을 알기 때문이다. 과연... 교활한 작자다.' 

갈등! 

장천린은 심한 갈등을 느꼈다. 뿌리칠 수 없는 거대한 유혹이 그의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거절하면 그것으로 태무결과의 인연은 끊긴다. 그러나 거절하기에는 그가 

던진 미끼가 너무도 컸다. 

개방의 방대한 조직과 정보망을 얻을 수 있다면 그야말로 천군만마(千軍萬馬)보다 

더한 원군을 얻는 셈이다. 이후의 그의 사업은 그야말로 날개 달린 호랑이처럼 중원 

대륙 십팔만 리를 거침없이 달릴 수 있게 된다. 

장천린의 눈빛이 문득 빛났다. 

'어차피 난세다. 난세에는 정도보다는 임기응변과 편법이 더욱 효과적일 수 있다.' 

그는 결정을 내렸다. 

"문도." 

"넷." 

"망월 해시에 남평산 정자사로 가라. 그곳에 가면 개방의 고수인 난추평과 탁애장, 

녹배상 등 삼인이 있다." 

사문도의 눈이 가늘어졌다. 

"형님의 뜻은?" 

"죽여라. 단, 일체의 증거를 남겨선 안 된다. 병기도 다른 것을 써라." 

사문도의 눈빛이 칼날처럼 빛났으나 그는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다. 

"알겠습니다." 

그는 한 마디도 묻지 않았다. 왜 그들을 죽여야 하는지, 그들을 죽여서 무슨 이득을 

얻을 수 있는지조차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는 모든 것을 장천린에게 맡겼기 때문이 

었다. 심지어는 자신까지도 말이다. 

그것은 장천린에 대한 완전한 신뢰였다. 

'남병산 정자사 해시, 이틀 후다.' 

사문도의 눈빛이 깊이 가라앉았다. 그는 공손히 포권한 뒤 선실을 빠져나갔다. 밖에 

는 여전히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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