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은 칼 끝에 지고 제2부 풍운만장편 제2권
▣등장인물
◈장천린(蔣天麟) - 강남 무창의 동정호반에서 신선루를 경영하던 젊은 상인으로 정
인 취옥교의 의문의 배신과 신산 제갈사의 계략에 빠져 죽음의 위기에 처하게 된다.
죽음의 나락에서 되살아나 용백군이라는 전도 유망한 청년상인으로의 새 인생을 시
작하게 되는데... 사랑을 되찾고 누르하치의 음모에서 나라를 구하려는 그의 앞날은
과연.......
◈취옥교(翠玉嬌) - 장천린의 정인으로 신선루를 운영하던 절세의 미인. 천린으로부
터 청혼을 받은 꿈 같은 날 어둡기만 한 과거로부터의 부름이 있게 된다. 사랑을 위
해 배신할 수밖에 없는 그녀의 파란만장한 운명... 조화성의 명에 따라 금백만을 살
해하고 천린의 곁을 떠나는데.......
◈원계묵(元桂默) - 마도(魔刀)라 불리워지는 당대 도법의 일인자. 조화성의 살수
모용초에 의해 연인 손미로부터 배신당하고 사부인 만승금도 도담후가 살해당한다.
원수를 갚기 위해 백살대를 조직하여 필살의 의지를 불태우던 중 용백군이라는 젊은
상인을 만나게 되는데.......
◈모용초 - 조화성의 살수이자 마교십삼사의 일원. 절세의 미남자로 여인을 유혹하
여 이용하는 데에 아무런 죄의식을 갖지 않는다. 무정도(無情刀)라는 별호만큼이나
냉정하고 잔인하지만 여인에 대한 유별난 증오심에는 깊은 사연이 있었으니.......
◈부금진(符錦眞) - 피리를 즐겨 부는 미소년으로 약칭으로 소진(少眞)이라고도 불
리워진다. 영물에 가까운 흰 앵무새 백아를 데리고 다니며 비도술 및 의술에 일가를
이루었다. 신비에 싸인 인물. 그의 과거를 정확히 아는 자는 아무도 없다.
◈단위제(檀偉帝) - 산동성 제형안찰사사 소속으로 형부도독(刑府都督)이자 동창의
대영반. 청렴강직하며 흉악무도한 범인을 체포하는 데 달인의 솜씨를 지니고 있으며
, 미궁(迷宮)에 빠진 사건을 처리하는 전문가 중의 전문가.
◈반송 - 해적선 검은 바람에 의해 죽을 고비에 처했으나 용백군의 도움으로 살아난
다. 화포인 진천뢰를 제작할 수 있는 인물로서 천월도법의 달인. 담오 - 북방의 고
랍특성 낭인시장에서 몸값 삼십만 냥에 자신의 인생을 내놓은 무사. 돈을 위해 몸을
파는 아내 아랑을 저주한다. 용백군과의 조우 이후 돈과 세상을 함께 저주하는 그
의 인생이 뒤바뀐다.
◈태진왕(太眞王) 주익적(朱翊 ) - 신종(神宗) 만력제(萬歷帝)의 이복동생으로서
어지러운 황실을 구하기 위해 뜻 있는 충신들을 규합하고 변방을 강화하였다. 황실
의 특무기관인 금의위(錦衣衛)와 동창(東廠)의 실세를 쥐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백연연(白娟娟) - 태진왕을 마음 속 깊이 사모하고 있는 지혜로운 여인. 환관의
음모에 의해 사약을 받고 죽은 충신 백시열(白時悅)의 딸로 태진왕에 의해 목숨을
구함 받고 태진궁의 시비로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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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장 장미림의 첩자(諜者)
용문각(龍門閣).
그곳은 용문전장의 중심부에 있는 삼층전각이었다.
전각 안의 방안. 천장에는 화려한 공명등(孔明燈)이 밝혀져 있었다. 팔선탁을 가운
데 두고 두 사람이 마주앉아 있었다.
한 사람은 용문전장의 주인인 상관홍이었고, 맞은 편의 청수한 인상의 중년인은 신
산(神算) 제갈사였다.
상관홍은 침중한 안색으로 중얼거렸다.
"걱정이오, 옥류향과 딸아이가 아직 돌아오지 않으니 말입니다."
두 사람 다 초조해져 있었다. 더욱이 그들을 찾으러 간 황성마건조차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상관홍은 계속 한숨을 쉬었다.
"너무 걱정 마시오. 상관장주. 곧 소식이 올 것이오."
"글쎄요.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 아닌지."
"설사 일이 있다해도 옥류향의 기지가 뛰어나고 황성마건까지 찾으러 갔으니 위험은
없을 것이오."
그러나 상관홍은 걱정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혈육이라곤 오직 상관수아 밖에 없었다. 그는 시간이 흐를수록 초조감이 더해가고
있었다.
밤은 깊어만 갔다. 그들은 침묵한 채 소식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문득 급촉한 발자국소리와 함께 한 명이 방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상관수아에게 검
술을 가르치던 검선생이었다.
"오! 무슨 소식이라도 있소?"
상관홍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서며 물었다. 검선생은 어두운 안색으로 한 통의 서찰
을 내밀었다.
"이것은?"
"조금 전 어떤 자가 전하고 갔습니다."
상관홍은 급히 서찰을 뜯어보았다. 그 속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아버님, 소녀는 옥류향 공자님과 함께 잡혀 있습니다. 위치는 금월사(金月寺). 해
시(亥時)까지 신산(神算)이란 사람과 함께 오시지 않으면 소녀와 공자님을 죽이겠다
고 협박하고 있습니다. 아버님, 어서 빨리 오셔서 소녀를 구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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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관홍의 손이 눈에 뜨일 정도로 경련을 일으켰다. 그는 서찰을 읽고 또 읽어 보았
다.
'틀림없는 수아의 필적이다.'
그의 눈 가장자리가 떨렸다.
"분명 무슨 일이 생겼소!"
제갈사는 말이 없었다. 그도 곁에서 편지를 읽었다. 상관홍은 그를 바라보며 다급히
말했다.
"제갈대협, 빨리 조치를 취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장주,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시오."
상관홍은 눈을 부릅떴다.
"제갈대협!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오? 내 딸아이의 생명은 이제 한 시진밖에
남지 않았소!"
그는 몸을 홱 돌렸다.
"나는 더 기다릴 수 없소이다!"
그는 검선생을 향해 외쳤다.
"검선생, 호원무사들을 모두 집합시켜 주시오!"
"예!"
검선생이 대답하고 돌아서는데.
"잠깐."
제갈사가 그를 저지시켰다. 그는 엄숙하게 말했다.
"이 일은 무력으로 해결할 일이 아니오. 놈들이 노리는 것은 나 제갈사요. 날 유인
하기 위함이란 말이오."
상관홍은 경악을 금치 못하며 물었다.
"대체... 놈들은 누구입니까?"
"조화성일 것이오."
상관홍은 그만 안색이 창백해지고 말았다.
"조... 화... 성."
그는 넋을 잃었다. 비록 중원제일의 대부호라고는 하나 무림의 일에는 속수무책이었
다. 더구나 무림제일의 문파가 딸을 납치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악의 무리 속에... 수아가......."
그는 털썩 의자에 주저앉고 말았다.
한편 제갈사는 눈살을 찌푸리며 내심 중얼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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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이해할 수 없군. 조화성에서 어떤 자들이 왔기에 황성마건마저 아직 소식이
없단 말인가?'
그의 두뇌가 치밀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 근방에 있을 수 있는 자라면 사검 막청과 독로장미 서문표 뿐이다. 이제까지 조
화성의 인물들의 동태는 낱낱이 보고되고 있거늘, 이곳에서 가장 접근한 혈관음(血
觀音) 영호해상(令狐孩孀)도 하남성 내에는 들어왔지만 그녀가 이곳에 있을 가능성
은 거의 없다. 막청과 서문표도 무서운 고수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들 두 명 때문
에 황성마건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것은 설명이 되지 않는다.'
제갈사는 서찰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글씨 모양이 단정하고 미려한 것이 소녀의 필
체가 분명했다.
'......!'
제갈사의 눈빛이 빛났다.
그의 눈은 무서울 정도로 예리했다. 비록 서찰의 필체가 겉으로는 단정해 보였으나
자세히 보면 글씨체가 모두 한쪽으로 비뚤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뿐만 아
니라 획에도 힘이 없었다.
그는 상관홍을 향해 물었다.
"상관장주, 이 글씨가 상관소저의 글씨임이 분명하오?"
"틀림없소이다."
제갈사는 고개를 저었다.
'이 글씨체에는 힘이라곤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무의식 상태에서 쓴 것 같다.'
여기까지 생각한 그는 안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설마?'
그의 눈동자에서 예리한 광채가 발산되었다.
'설마, 태사독 그 자가!'
조화성의 제삼신마전주(第三神魔殿主) 태사독.
그를 처음 대한 순간 장천린은 압도감을 느꼈다. 태사독은 그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큰 느낌이었던 것이다.
태사독은 겸허하게 말했다.
"수하들이 거칠게 했다면 대신 사과하겠소, 용대인."
태사독은 태도는 어디까지나 정중했다. 장천린은 담담히 말했다.
"별말씀을.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태사독은 찻잔을 들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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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허, 용대인의 뛰어난 상술에 대해서는 귀가 따갑도록 들었소이다. 이렇게 만나게
되어 반갑소이다."
장천린은 묵묵히 듣기만 했다.
"그 동안 무척 만나고 싶었소이다. 허허! 한데 놀라웁구려. 의외로 이렇게 젊고 준
수하니 말이오."
그는 무척 기분이 좋은 듯했다.
"과찬이십니다."
물론 장천린은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태사독은 그를 응시하며 여전히 부드럽게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본인은 용대인을 한 번 초청하려고 했었소. 그 이유는 용대인과 거
래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오."
"......!"
태사독과의 거래. 그것은 곧 조화성과의 거래를 의미한다. 장천린은 뜻밖의 말에 염
두를 굴렸다.
그는 상인이었다.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백승(百戰百勝)이라고 했다. 나에게 득이 있고 또한 적
을 알 수 있는 기회라면 사양할 이유가 없다.'
그는 처음으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좋습니다. 본인은 상인입니다. 이득이 있다면 무엇이든 응할 용의가 있습니다."
"하하, 역시 호쾌하구려."
태사독은 손가락으로 수염을 꼬며 고개를 끄덕였다.
"매우 마음에 드는구려, 용대인."
그는 불쑥 손을 내밀었다. 장천린도 사양하지 않고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서로의 생각이 딴판인 두 사람이 손을 마주 잡았다. 태사독은 손을 흔들며 흔쾌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럼 얘기는 끝났소. 사소한 문제는 나중에 상담하기로 합시다. 오늘은 피곤하실
테니 편히 쉬도록 하시오."
태사독은 빙긋 웃으며 덧붙였다.
"내일쯤 산을 내려가게 될 것이오."
그는 옆에 서 있는 자의인을 불렀다.
"탁무종."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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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대인을 편히 모시게."
"알겠습니다. 전주."
장천린은 몸을 일으켰다. 그는 태사독에서 포권의 예를 취한 후 탁무종을 따라 방을
나섰다.
잠시 후 그가 안내된 곳은 후원이 달린 아담한 방이었다. 탁무종은 정중히 고개 숙
이며 말했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 부르십시오, 대인."
장천린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즉시 사라졌다. 혼자 남게 된 장천린은 침상에 걸터
앉으며 생각에 잠겼다.
'태사독은 과연 거물이다. 그는 내가 조화성의 수하들을 여러 명 죽인 것을 알면서
도 그 일에 관해서는 조금도 내색하지 않았다.'
장천린은 가슴이 섬뜩해졌다.
'과연 무서운 자다.'
그는 막막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 자를 수하로 데리고 있는 조화성주 염무란 자는 대체 어떤 인물이란 말인가?'
장천린은 한숨을 쉬었다.
그는 조화성이란 단체에 대해 두려움을 넘어서 경외감까지 느껴졌다. 그들이 악을
추구하든 선을 추구하든 간에 이렇게 거대한 단체를 이루었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도
대단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장천린은 침상 위에 누웠다. 문득 떠오르는 인물이 있었다.
'옥류향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는 심히 걱정이 되었다.
'아무리 황성마건이 무공이 강하다 해도 화포에 버티는 것은 불가능하다.'
장천린은 마음이 불안하여 잠이 오지 않았다. 결국 그는 몸을 일으키고 말았다. 어
차피 잠 못 이룰 바에야 운공이나 하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는 한 차
례 운공을 한 후 한숨을 쉬었다.
'다행이다. 진기가 순조롭구나.'
이젠 상처의 고통도 거의 느껴지지 않고 있었다.
다만 다소 피곤함을 느꼈다. 하루 사이에 벌어진 너무나 엄청난 일들로 인해 몸과
마음이 다같이 지친 상태였다.
그는 잠시라도 눈을 붙이기 위해 침상에 다시 누웠다. 그때였다.
갑자기 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들어섰다.
장천린은 흠칫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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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방으로 들어온 사람은 뜻밖에도 한 명의 미녀였던 것이다. 그것도 대단한 미색
을 지닌 요염한 미녀였다. 일신에 타는 듯한 홍의(紅衣)를 입고 있었는데 나이는 앳
되어 보였다.
이제 겨우 십 칠팔 세 가량 밖에 안되어 보였다.
홍의미녀는 그에게 다가오며 생긋 웃었다.
"소녀 감운경(甘雲鏡)이 대인께 인사드립니다."
감운경.
그녀의 눈은 요염하게 반짝였으며 입술은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사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품어보고 싶은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미녀였다.
"무슨 일이오? 낭자?"
장천린은 다시 몸을 일으켜 앉았다.
감운경은 한 줌밖에 안 되는 가는 허리를 비틀며 매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전주님께서 오늘밤 대인을 모시라고 하셨습니다."
장천린은 흠칫했다.
'태사독은 정말 이 정도로 날 생각해 준단 말인가?'
손님에게 여자를 제공하는 것은 특별히 우대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지금 장천린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비록 손님이라고 하나 반강제로 연금
되다시피 한 이상 아무리 미인이라 해도 기분이 내키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뜻은 고맙지만 나는 괜찮소이다. 태전주께 사의만 전달해 주시오."
감운경은 생긋 웃었다.
"소녀가 마음에 안 드시나요?"
"그런 것이 아니오. 다만."
"호호, 그렇다면 소녀가 이곳에 있는 것만이라도 허락해 주셔요."
감운경은 입가에 고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소녀를 품으시든 안 품으시든 그것은 대인의 자유예요. 하지만 소녀는 미녀를 옆에
두고 잠들 수 있는 군자가 있다고는 믿지 않는답니다. 호호호!"
장천린은 내심 중얼거렸다.
'야릇한 소녀로군.'
그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아 침상에 벌렁 누워버렸다. 감운경은 의외인 듯 상큼
눈썹을 치켜올렸다가 묘하게 몸을 비틀어댔다.
"아이, 따분해. 태어른은 정말 목석같은 분께 보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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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천린은 문득 궁금증이 일어났다.
"대체 소저의 신분은 무엇이오?"
그는 소녀가 평범한 여인이 아님을 은연중 느낀 것이다.
"호호호!"
감운경은 교소를 터뜨리더니 입술을 묘하게 움직이며 말했다.
"소녀는 제삼신마전의 외당(外堂) 당주예요."
장천린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요지선자(瑤池仙子)라 하지요. 하지만 경계하지 마세요. 소녀가 이곳에 온 것은 신
분을 떠나 단지 여인의 몸으로 온 것 뿐이니까요."
장천린은 내심 중얼거렸다.
'이제 보니 날 감시할 겸 보낸 것이로군.'
그렇게 생각하자 그는 더욱 냉정해졌다. 이때 감운경은 그의 마음을 훤히 들여다 본
듯 말했다.
"엉뚱한 예측은 하지 마세요. 태전주님께서 감시하라고 보낸 것은 아니니까요. 그
분은 그 정도로 소심한 분은 아니에요."
그녀는 장천린을 향해 다가오며 빤히 그의 얼굴을 주시했다.
"이제 보니 무척 미남이시군요."
장천린은 그녀에게서 향기를 느꼈다. 그것은 성숙한 여인에게서만 나는 향기였다.
그는 눈을 감아 버렸다.
감운경은 침상 가에 걸터앉더니 손을 뻗어 대담하게 그의 뺨을 쓰다듬었다.
"후훗, 도리어 이 감운경의 가슴이 설렐 정도로 말이에요."
장천린은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손을 치우시오."
"호호!"
감운경은 교소를 터뜨렸다. 그러다 힐끗 문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녀의 눈이 반짝
빛났다.
잠시 후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녀는 옷을 벗기 시작했다. 옷자락 스치는 소리에 눈
을 떠본 장천린은 깜짝 놀랐다.
"이게 무슨 짓이오?"
"호호, 더워서요."
그녀는 상의를 반쯤 벗다시피 벌려 놓았다. 그 바람에 눈부시게 흰 젖가슴이 반쯤
노출되었다. 깨끗한 느낌이 드는 가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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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안은 더웠다.
그 열기에 또 다른 열기가 보태지자 방안은 후덥지근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천린은 아무런 욕망도 느끼지 않았다. 그는 더 말해 보았자 소
용없음을 알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때 돌연 감운경이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무슨 짓이오!"
"호호, 무척 수줍어하시는 군요."
감운경은 그의 목에 매달리며 자신의 젖가슴을 밀착시켰다. 장천린은 그녀를 떼어내
려다 멈칫했다. 그녀가 자신의 등에 손가락으로 글씨를 쓰는 것이 느껴졌던 것이다.
'조용히 하세요.'
'음?'
장천린은 입을 다물었다. 감운경은 그의 뺨에 입술을 갖다 대며 교소를 흘렸다.
"호호! 이제 보니 여자경험이 없는 것 같군요?"
장천린은 그녀의 몸에서 풍기는 자극적인 냄새와 뜨거운 입술 공세에 곤욕을 치렀으
나 등뒤에 계속 글이 쓰여지는 바람에 할 수 없이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당황하지 마세요, 소녀는 수년 전 신산 어른에 의해 조화성에 잠입한 몸이에요.'
'신산의 첩자!'
장천린은 가슴이 서늘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등뒤에서 감운경의 손가락이 계속 움직
였다.
'대인께 제가 온 이유는 상관소저 때문이에요.'
장천린은 더욱 놀랐다. 그는 그녀를 껴안는 척 하면서 역시 등에다 글을 써 물었다.
'상관소저가 이곳에 있단 말이오?'
'이곳에 감금되어 있어요. 하지만 그 위치를 모르고 있어요.'
장천린은 탄식했다.
'역시 그녀도 빠져나가지 못했군.'
'상관소저를 구출해야만 신산 어른께서 마음대로 활동하실 수가 있어요. 그래서 제
가 왔어요.'
'신산... 정말 놀라운 일이다. 조화성 내에까지 첩자를 두고 있다니.'
이때 감운경은 그의 목을 더욱 세게 안으며 콧소리를 냈다.
"아이, 목석처럼 굴지 마시고 어떻게 좀 해 보세요!"
동시에 그녀는 한 손으로 계속 글씨를 썼다.
'상관소저를 구하기 위해서는 대인의 힘이 필요해요. 태사독은 용대인님의 부탁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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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 어느 정도 들어줄 거예요. 저에게 상관소저가 갇혀있는 위치만 어떻게든 알려 주
시면 돼요.'
장천린은 글을 썼다.
'내가 있는 이곳은 어디요? 나는 눈을 가린 채 와서 잘 모르겠소.'
'금월산 기슭에서 동쪽에 있는 산장이에요. 소녀의 부탁을 들어주시겠어요?'
장천린은 잠시 생각했다. 그는 문득 의심이 들었다.
'이 소녀가 신산의 첩자임을 어떻게 믿는가? 태사독이 날 시험하는 것인지도 모르지
않는가?'
이때 감운경은 그의 심경을 눈치챈 듯 다시 글을 썼다.
'소녀를 믿든 안 믿든 대인의 자유예요. 하지만 상관소저는 기필코 구해야 돼요.'
장천린은 글을 써 물었다.
'솔직히 나는 소저를 믿을 수 없소. 신산은 어디에 있소?'
감운경의 눈동자에 당황이 어렸다. 만일 대답하지 않는다면 상대는 그녀를 불신할
것이다. 그러나 신산의 위치를 알린다는 것은 너무나 큰 모험이었다.
그녀는 잠시 망설였으나 곧 입술을 깨물며 손가락을 놀렸다.
'용문전장에 있어요, 이것은 극비예요.'
장천린은 결정을 내렸다. 그녀가 결코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든
것이었다.
'좋소. 최선을 다해 상관소저가 갇힌 곳을 알아보겠소.'
감운경의 눈에 감격의 빛이 어렸다. 그녀는 가볍게 장천린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맞추었다.
'고마와요, 언젠가 대인을 한번 모시고 싶었어요. 사실 소녀는 아직 처녀랍니다.'
장천린은 그만 머쓱해졌다. 그녀의 말은 너무나 노골적이었다. 이때 갑자기 감운경
은 상의를 벗어버렸다. 이내 잘 발달한 젖가슴이 드러났다. 그녀는 속옷을 입고 있
지 않았던 것이다.
장천린은 흠칫 놀랐다.
아무리 연극이라지만 그녀의 행동이 지나치다는 느낌이 든 것이다. 그는 멍하니 감
운경의 젖가슴을 바라보았다. 감운경은 스스로 젖가슴을 어루만지며 콧소리를 냈다.
"이래도... 절 품고 싶지 않나요?"
그녀는 가슴을 흔들어 대며 그의 목을 껴안았다. 그 순간 장천린은 등에 글씨가 써
지는 것을 느꼈다.
'빨리 소녀의 따귀를 한 대 쳐주세요.'
장천린은 그녀의 의도를 눈치채고 짐짓 분노한 음성으로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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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만 나가 주시오, 소저!"
철썩!
장천린은 사정없이 그녀의 따귀를 갈겼다. 감운경은 악! 하는 비명과 함께 몸을 일
으켰다.
"흥! 천하의 목석 같으니라구!"
그녀는 황급히 옷을 걸치며 독살스럽게 말했다.
"못난 사내 같으니... 만일 당신이 무림인이었다면 결코 그냥 두지 않았을 거예요!"
장천린은 흠칫했다. 그녀가 옷을 입기 위해 팔을 치켜드는 순간 겨드랑이에 붉은 색
의 장미꽃 문신이 새겨져 있는 것을 본 것이다.
'저건......?'
그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장미림(薔薇林)의 문신이 아닌가!'
장천린은 장미림에 대해서 막남 지방을 여행할 때 알게 되었다.
당시 부금진은 산혜란 이름의 소녀를 구한 적이 있었다. 장천린은 그녀가 수상하다
는 느낌이 들어 원계묵으로 하여금 비밀리에 조사하라고 한 적이 있었다.
그녀를 감시하던 중 원계묵은 부금진과 산혜의 대화를 엿듣게 되었고, 그 사실을 장
천린에게 보고했다.
산혜가 속해있는 장미림은 여인들만으로 이루어진 조직으로 주로 미인계(美人計)를
동원해 첩자활동을 해오고 있었다.
장천린은 부금진과 장미림이 어떤 관계인지 의문이 들었으나 굳이 묻지는 않았다.
그는 상대의 비밀을 눈감아줄 줄 아는 도량이 있었던 것이다.
'이제 보니 이 여자는 장미림의 첩자였구나.'
그는 눈을 반쯤 감은 채 염두를 굴렸다.
'그렇다면 표상아와는 어떤 관계일까?'
이때 대충 옷을 걸친 감운경은 코웃음을 쳤다.
"흥! 두고봐요. 나 감운경이 오늘의 모욕을 잊는지."
장천린은 쓴웃음을 지었다.
'정말 대단한 연극이로군.'
감운경은 몸을 돌려 세차게 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장천린은 편하게 몸을 뻗으며 기
다렸다.
아니나 다를까?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났을 때 이번에는 탁무종이 들어섰다. 그는
포권하며 사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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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대인, 죄송하외다."
장천린은 몸을 일으키며 담담히 말했다.
"아니오, 별말씀을."
"허어, 감소저는 본성의 외당 당주로 성격이 오만한 편이오. 용대인께서 널리 이해
해 주시기 바라오."
탁무종은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솔직히 대인께 보통 여자를 보내면 모욕이 될 것 같아 일부러 감당주를 보낸 것이
오. 그런데 그것이 용대인께 폐가 될 줄은 몰랐소이다."
장천린은 담담히 말했다.
"관계없으니 괘념치 마시오."
탁무종은 껄껄 웃었다.
"헛헛! 감당주는 대단한 여인입니다. 그녀는 눈이 높아 상대를 가리는 편입니다. 설
사 남자가 아무리 원해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허락하질 않소. 이번에도 그녀 스스로
원해서 온 것이라오."
장천린은 씁쓸한 표정을 짓기만 했다. 탁무종은 다가오며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소생은 탁무종이라 합니다. 대인과 대화를 좀 나누고 싶은데 허락하시겠습니까?"
장천린은 새삼 그를 쳐다보았다. 탁무종은 삼십 오륙 세쯤 되어 보였으며 강직한 성
품을 지닌 듯했다. 그는 자영구살(紫影九殺)의 우두머리기도 했다.
탁무종은 침상 곁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저는 무림인이라 상계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용대인의 소문은 많이 들었습니다.
정말 대단하더군요. 게다가 수하들의 이야기로는 대인은 무공도 고강하다더군요."
"과찬일 뿐이오."
"하하하하!"
탁무종은 대소를 터뜨렸다.
"수하들 몇 명 죽인 걸 가지고 미안하게 생각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사실 흑의를 입
은 자들은 본성의 직속이 아닙니다. 그들은 외성(外城)이나 각지의 분타에 소속되어
있는 자들입니다."
'이 친구는 의외로 솔직한 성품이로구나.'
장천린은 잠시 생각하다가 질문을 던졌다.
"탁대협, 한 가지 질문이 있소이다. 상관수아란 이름의 소저가 혹시 이곳에 있지 않
소?"
탁무송은 뜻밖인 듯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잠시 후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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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결국 그렇게 되었구려."
"그녀와 잘 아는 사이입니까?"
"그렇다고도... 그렇지 않다고도 할 수 있소."
탁무종의 얼굴에 의아한 표정이 어렸다. 장천린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비록 우연히 한 번 만났을 뿐이지만 왠지 마음에 걸려서 그렇소."
탁무종은 빙긋이 웃었다.
"안심하십시오. 그녀는 잘 있습니다."
장천린은 그를 주시하며 진지하게 말했다.
"부탁이 있소, 탁대협."
"무엇이오?"
"아무래도 그녀를 직접 봐야 안심이 될 것 같소이다."
탁무종의 얼굴에 난처한 기색이 떠올랐다. 장천린은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비웃지 마시오. 솔직히 그녀를 처음 본 순간 마음이 끌렸소. 그래서 그녀가 무사한
지 직접 봐야만 안심이 됩니다."
탁무종은 아! 하고 탄성을 발했다. 그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이제 보니 그런 일이 있었군요? 하하, 하긴 그녀 정도의 미모면... 대인의 마음을
사로잡을만하지요. 좋습니다. 하지만 전주님께는 이야기하지 마십시오. 자칫하면 제
가 치도곤을 당할지도 모르니 말입니다."
"염려 마시오. 탁대협, 나는 입이 가벼운 사람이 아니오."
장천린은 은근한 음성으로 말했다.
"차후 탁대협의 성의에 반드시 보답하겠소."
"......."
탁무종은 그저 멋적게 웃을 뿐이었다.
그는 눈앞의 젊은 상인에 대해 자신이 필요 이상으로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느낌
이 들었으나 어쩔 수 없이 말려들고 있었다.
산장의 후미진 곳에 떨어져 있는 한 별원.
상관수아는 침상에 반듯이 누워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초췌했다. 그저 멍하니 눈을
뜬 채 천장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
그녀를 본 순간 장천린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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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관소저."
"......."
상관수아는 아무 것도 듣지 못한 듯 대답이 없었다. 장천린은 탁무종을 돌아보며 물
었다.
"어떻게 된 것이오?"
탁무종은 헛기침하며 말했다.
"전주께서 혈을 짚어 놓았습니다. 몸에는 절대 이상이 없습니다."
'혈을 짚는다고 이렇게 된단 말인가?'
장천린은 얼른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제 그만 나가시지요, 대인."
탁무종은 그를 재촉했다.
"고맙소, 탁대협."
말은 그렇게 했으나 장천린의 기분은 썩 좋지 않아 보였다. 탁무종은 눈치를 보며
말했다.
"공연히 모시고 온 것 같습니다."
장천린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오, 그렇지 않소."
두 사람은 다시 처소로 돌아왔다. 탁무종은 변명처럼 몇 마디를 늘어놓다 사라졌다.
장천린은 다시 침상에 누운 채 생각에 잠겼다.
'조화성은 정말 괴이한 곳이다. 어떤 자는 악랄하고 무자비한 성품을 지녔으나 탁무
종 같은 자는 충직할 뿐더러 호걸의 기질을 갖추고 있다. 또한 태사독도 근본적으로
악인은 아닌 것 같다.'
그는 불가사의한 느낌이 들었다.
'이렇게 서로 다른 별종의 인간들이 한데 모일 수 있단 말인가?'
장천린은 생각할수록 조화성에 대해 불가사의한 느낌이 들었다. 이때였다. 어디선가
한 가닥 전음성이 들려왔다.
"대인, 상관소저가 어디 있는지 알아 내셨나요?"
장천린은 그 전음성이 감운경이 보낸 것을 알고 안색이 변했다. 그도 역시 전음으로
말했다.
"다행히 알아냈소이다."
"아......! 어디 있나요?"
장천린은 도리어 반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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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저는 지금 어디 있소?"
"천장 속에 있어요."
장천린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기막히군. 전문적으로 첩자기술을 배웠나 보군.'
장천린은 상관수아가 갇혀있는 별원의 위치를 자세히 말해 주었다.
"고마와요, 용대인님."
천장에서 들려온 전음성은 애교가 넘쳐흘렀다.
"호호! 대인. 여인의 입장에서 보면 대인은 정말 매력적이에요."
장천린은 쓴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한동안 기다렸으나 전음성은 더 들려오지 않았다
'갔나 보군.'
그는 침상에 편히 드러누웠다.
'과연 구출해 낼 수 있을까?'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그녀를 보낸 신산의 능력이 아무리 놀랍다고 해도
태사독도 보통 인물이 아니었다.
'이 싸움의 승자는 과연 어느 쪽일까?"
장천린은 자신의 처지는 잠시 잊은 채 흥미를 느꼈다.
끼이익!
용문전장의 육중한 대문이 좌우로 활짝 열렸다.
지축을 울리는 소리와 함께 전장 안으로부터 수십 기의 인마가 달려 나왔다.
그들은 용문전장에서 거금을 주고 고용한 호원무사들로 한결같이 눈빛이 형형했으며
양쪽 관자놀이가 불쑥 솟은 것이 일류고수들임을 알 수 있었다.
기마대는 자욱한 먼지를 일으키며 전속력으로 질주했다. 그야말로 태풍 같은 기세였
다.
선두에는 청수한 인상의 중년인이 타고 있었다. 그는 바로 바로 신산(神算) 제갈사
였다.
그들이 어둠 저편으로 사라지자 담장 그늘 아래서 한 명의 거지가 몸을 일으켰다.
"흐흐! 드디어 죽음의 길로 떠났군. 제갈사."
거지는 품속에서 비둘기를 꺼내더니 무엇인가를 발목에 매달았다.
푸드드득!
비둘기는 야간비행을 위해 특수하게 훈련된 듯 어둠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눈 깜짝
할 사이에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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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흐... 신산. 늙은 여우도 오늘로 끝났다."
거지는 음산한 웃음을 흘리며 몸을 돌렸다. 그때였다.
"......!"
거지는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눈앞에 한 명의 반백노인이 우뚝 서 있는 것이 아닌
가? 갑자기 거지의 태도가 급변했다.
"나으리, 한 푼만 줍쇼......."
굽실거리며 손을 내미는 그의 모습은 영락없는 거지였다.
반백노인은 바로 검선생이었다. 그는 거지를 내려다보며 담담히 말했다.
"흠, 자네는 동냥이 서툴군. 게다가 자네 옷과 신발이 어울리지 않아."
거지의 눈썹이 경련했다. 아닌게 아니라 누더기 옷과 달리 그가 신고 있는 신발은
가죽신이었다.
거지의 눈이 차갑게 빛나는 순간 허리춤에서 번쩍! 검광이 일어났다.
전광석화 같은 쾌검(快劍)이었다.
검선생의 눈에 당혹이 일었다.
'예상외로군. 상당한 고수!'
그는 미끄러지듯 뒤로 물러나며 거지의 검을 피했다. 거지의 손에는 부드러운 연검(
軟劍)이 쥐어져 있었다. 그는 음침한 웃음을 흘렸다.
"흐흐, 제법 관찰력이 있군. 하지만 관계없다. 어차피 놈들은 지옥으로......."
그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어둠 속에서 불쑥 한 인영이 나타난 것이다. 놀랍게도
그는 방금 기마대의 선봉장으로 출발했던 신산 제갈사였다.
'이럴 수가......?'
"놀랐나?"
제갈사는 가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거지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외쳤다
"속았구나! 아까 그놈은......."
제갈사는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미 늦었다. 네가 보낸 전서구대로 태사독은 움직이겠지."
"죽엇!"
거지의 연검을 불을 뿜었다.
"흥!"
검선생의 냉소가 터졌다. 그는 옆구리에 목검(木劍)을 차고 있었는데 허리를 비틀자
흰빛이 독사의 혀처럼 뻗어나갔다.
"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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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는 목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며 다급히 물러났다. 얼른 손을 대보니 뜨끈한 선
혈이 묻어 나왔다. 그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검선생의 검법은 신기에 가까웠다. 비록 목검이었으나 검끝에서 뿜어져 나오는 예기
는 예리하기 그지없었다.
한편 제갈사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
'저 검법은?'
그가 미처 생각을 끝내기도 전에 비명이 들렸다. 거지 행세를 하던 인물이 비틀거리
고 있었다. 그의 가슴에 목검이 깊숙이 꽂혀 있었다.
"현음검법(玄陰劍法)... 당, 당신은... 천외(天外)......."
그는 벌렁 쓰러졌다.
검선생은 목검을 거두었다. 이상하게도 목검에는 피 한 방울도 묻어 있지 않았다.
제갈사는 눈을 부릅뜬 채 죽어있는 거지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자영구살 중 제 칠살(七殺), 제삼신마전 최강고수 중 한 명이 죽었군."
검선생은 흥미 없다는 듯이 돌아서며 말했다.
"이제 움직여야지요."
제갈사는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검선생, 천외삼기(天外三奇) 중 검군(劍君) 궁일평(宮一平)이란 분을 아십니까?"
검선생은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글쎄요, 처음 듣는 이름입니다."
제갈사의 눈에 기광이 어렸다.
"검선생이 아까 쓴 검법은 현음검법 같소만?"
검선생은 담담히 말했다.
"잘못 보셨습니다. 노부의 검법은 추운검법(追雲劍法)입니다."
그는 몸을 돌렸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제갈사의 눈빛이 어둠 속에서 번쩍였다.
'검선생, 신비한 인물이다. 상관장주도 저 자에 대해서만은 언급을 회피하던데...
대체 누굴까?'
그는 잠시 명상에 잠기는 듯하더니 손가락을 입에 대었다. 휘파람소리가 낮으면서
날카롭게 울렸다.
스스스!
어둠 속에서 수백 명의 인영이 유령처럼 나타났다.
"가자."
제갈사의 명이 떨어지자 인영들은 일제히 몸을 날렸다. 수백 명이 동시에 허공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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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솟아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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