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6장 독로장미(禿路薔薇) (30/87)

제6장 독로장미(禿路薔薇) 

한 흑의청년이 객당 안에 있는 작은 불상 앞에 무릎 꿇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무심하기만 했다. 묵념을 드리고 있는 건지, 아니면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특히 창백한 안색으로 인해 어딘가 인간미가 결여된 

것 같아 보였다. 

그는 서서히 눈을 떴다. 

잠시 후 객당 밖으로 걸어나온 그는 마당에 내려서서 하늘을 응시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눈부시게 푸르렀다. 그러나 그를 보는 청년의 눈에는 짙은 고독감이 담 

겨있었다. 

그는 짚단으로 둘둘 만 물건을 어깨에 둘러멨다. 그때였다. 

"이것으로 세 번째 만남이구려, 귀공." 

"......!" 

흑의청년의 몸이 굳어졌다. 객당 한쪽 모퉁이로부터 걸어오는 준수한 청년이 있었다 

. 장천린이었다. 

"아무래도 우리는 꽤나 인연이 깊은 듯하오?" 

흑의청년은 잠시 그를 응시하더니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원래 이 금월사에 머무르고 계셨군요." 

"그렇소이다." 

장천린은 빙긋이 웃으며 자기 소개를 했다. 

"소생은 용백군(龍白君)이란 떠돌이 상인이외다." 

흑의청년은 가볍게 포권했다. 

"사문도(射文島)라고 합니다." 

'사문도.' 

장천린은 그의 이름을 듣는 순간 왠지 정겨운 느낌을 받았다. 그는 친숙한 어조로 

말했다. 

"일 년 전 사형(射兄)을 볼 때부터 호감이 일었소이다. 시간이 있으시다면 이야기 

좀 나누고 싶소이다." 

괴청년 사문도의 고독해 보이는 눈빛이 가볍게 흔들렸다. 그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자신을 키워준 양부 외에 이런 관심을 기울여 주는 사람을 만나 본 적이 없었다. 

장천린의 친숙한 미소와 부드러운 말을 듣는 순간 삭막하기만 했던 가슴속으로 훈풍 

이 불어 드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비로소 무심한 표정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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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정중히 말했다. 

"소생에게 시간이 있다면 좋겠습니다만 아쉽게도 약속이 있습니다." 

장천린은 부드럽게 물었다. 

"어디로 가시는 중이오?" 

"개봉에 작은 일이 있습니다. 아마 내일쯤이면 돌아올 것 같습니다." 

장천린의 얼굴에 섭섭한 빛이 떠오르자 그는 덧붙여 말했다. 

"양부의 유골을 모셨기 때문에 돌아온 후에는 이곳에서 백 일 간은 머무를 예정입니 

다." 

장천린은 담운이 한 말을 떠올렸다. 

-그 젊은 시주도 다른 곳을 찾게 해야할 것 같습니다. 

이때, 사문도가 가볍게 포권했다. 

"내일까지 이곳에 계신다면 한번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장천린은 미소 지었다. 

"나 역시 잠시 다녀올 데가 있어 모레쯤이나 돌아올 것이오." 

사문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모레라면 소생이 이곳에 있을 테니 시간이 충분할 것 같군요." 

그는 목례를 취하고는 절 밖으로 걸어나갔다. 장천린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마 

음이 흡족해졌다. 

'첫 인상과는 달리 무척이나 예의바른 친구로군.' 

그는 어쩐지 사문도가 매우 가깝게 느껴졌다. 어쩌면 그것은 끈끈한 운명의 연을 맺 

게될 예고인지도 몰랐다. 

잠시 후 장천린도 걸음을 옮겼다. 

얼마쯤 가다 그는 중년승인과 마주치게 되었다. 오전에 그가 은자를 준 중이었다. 

"아미타불, 용시주님. 구경은 잘 하셨는지요?" 

"네, 덕분에." 

장천린은 그의 입가에 기름기가 묻어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내심 쓰게 웃었다. 중년 

인은 밖에서 돌아오는 길인 듯했다. 

"오늘밤부터 용시주를 위해 불공을 드릴 생각입니다." 

중의 말에 장천린은 고개를 저었다. 

"고마운 말씀입니다만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건 그렇고 스님 입가의 기름기나 

좀 닦으시지요. 노선사께서 보실까 두렵습니다." 

그 말에 중년승인은 황급히 소매로 입가를 문질렀다. 아니나 다를까? 과연 기름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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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어 나오자 그는 당황하여 변명했다. 

"오, 오해 마십시오. 소... 소승은... 절대 개고기를 먹지 않았습니다!" 

"개고기라고요?" 

장천린이 놀라 반문하자 중은 자신이 큰 실수했음을 느끼고 더더욱 당황했다. 

"수, 술을 조금 마시다가... 그저 맛만 보았을 뿐 절대로 많이 뜯지는 않았......." 

'아차!' 

중은 또 한번 실수를 했음을 느끼고 얼굴이 하얘졌다. 

"술도 드셨습니까?" 

장천린은 정녕 개탄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데 중은 너무나 다급한 나머지 계속 

헛소리를 연발하고 있었다. 

"저는 잘못이 없습니다. 먹, 먹고 싶지 않았는데... 향월이 년이 자꾸만 먹으라고 

하는 바람에......." 

'여자까지!' 

장천린은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그는 휭하니 몸을 돌려 버렸다. 

중년승인은 그제서야 자신의 연속적인 실수에 그만 없는 머리칼을 몽땅 쥐어뜯고 싶 

은 심정이었다. 

하나 어찌하랴. 이미 엎질러진 물인 것을. 그는 간절한 음성으로 말했다. 

"용시주님... 제발 노선사께는......." 

장천린은 차갑게 말했다. 

"말씀드릴 필요도 없습니다." 

'휴우!' 

중년승인은 창백한 안색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미타불, 감사합니다." 

장천린은 역겨운 느낌이 들어 그를 돌아보지도 않고 걸어갔다. 그는 담운의 선방으 

로 향했다. 

다행히도 상관수아는 깨어나 있었다. 담운은 그녀의 옆에서 불경을 읽고 있었다. 

"깨어 나셨군요, 소저." 

장천린이 정중히 말하자 상관수아는 얼른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소녀를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떻게 보답을 드려야 할지......." 

아마도 담운이 그 동안의 경과에 대해 얘기해 준 것 같았다. 장천린은 그저 담담히 

말했다.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니 너무 괘념치 마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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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관수아는 얼마전의 일이 떠올라 수치감이 치밀었다. 

'이 사람이 그때 그 광경을 보았을까?' 

이때 담운 노선사가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용시주. 그만 떠나시지요." 

장천린은 몸을 일으킨 후 목례했다. 

"노선사님, 그럼 모레 뵙겠습니다." 

담운은 대답 대신 불호를 외울 뿐이었다. 장천린은 밖으로 나가며 말했다. 

"소저, 나갑시다." 

상관수아는 조용히 그의 뒤를 따라 나섰다. 

움직일 때마다 목에 은은한 통증이 일었으나 그녀는 마음이 급했다. 한시라도 빨리 

용문전장으로 돌아가 옥류향이 납치된 사실을 알려야 했기 때문이었다. 

담운은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산을 내려가며 장천린은 앞으로의 거취문제를 생각했다. 

'계묵은 모레쯤이나 돌아올 테니 그 동안에는 개봉부에 머물러 있어야 겠구나.' 

그는 상관수아를 돌아보며 물었다. 

"소저의 댁은 어디시오?" 

상관수아는 짧게 대답했다. 

"용문전장이에요." 

장천린은 놀라마지 않았다. 

"용문전장? 그렇다면 상관대인과는 어떻게 되는 사이요?" 

"제 아버님이에요." 

장천린의 안색이 가볍게 변했다. 실로 뜻밖이었다. 

'그렇다면 이 소녀가 상관홍의 무남독녀로 장차 용문전장의 후계자가 될 소녀란 말 

인가?' 

상관수아는 그가 놀라는 것을 보고는 우쭐한 기분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그의 정체 

가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이 분은 뭐 하는 분일까? 문사 같지는 않은데, 그렇다고 무사는 더욱 아닌 것 같고 

.' 

그녀는 슬쩍 장천린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옥공자도 미남이지만 이 분은 더욱 매력이 있어. 준수하면서도 사나이다운 매력이 

넘쳐흘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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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생긋이 웃으며 말했다. 

"아버님께 이번 일을 말씀 드리면 공자님께 큰 답례를 하실 거예요." 

장천린은 그저 쓴웃음을 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계속 산길을 내려갔다. 

얼마쯤 갔을까? 장천린은 갑자기 이상한 예감이 들어 뒤를 돌아보다가 깜짝 놀랐다. 

멀리 시커먼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지 않은가? 

'금월사 쪽이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길래?' 

순간 그의 뇌리에 담운 노선사의 말이 떠올랐다. 

-시주가 여시주를 데리고 떠나지 않는다면 두 분은 물론 금월사는 큰 화(禍)를 입게 

될 것이오.' 

장천린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노선사는 무슨 일이 생길 것인가를 이미 알고 있었다.' 

여기까지 생각한 그는 마음이 급해졌다. 그는 모르는 척 할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 

어 걸음을 멈추었다. 

"소저." 

"무슨 일이죠?" 

상관수아는 생각에 잠겨 있다가 깜짝 놀라 그를 쳐다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 

는지 그녀의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다. 장천린은 짧게 말했다. 

"잠시 이곳에서 기다리시오. 다녀올 데가 있소이다." 

"아니? 어디로......?" 

상관수아는 말을 채 다하지 못했다. 장천린이 신형을 날렸던 것이다. 

"이 봐요!" 

상관수아는 목청을 돋워 그를 불렀다. 그러나 장천린은 이미 저만치 사라지고 있었 

다. 그의 음성이 십여 장 밖에서 들려왔다. 

"만일 소생이 돌아오지 않으면 소저 혼자 내려가시오." 

상관수아는 입술을 깨물고 말았다. 

'아니 뭐 저런 사람이 다 있지?' 

화가 치밀어 아미를 찌푸리던 그녀는 눈을 크게 떴다. 장천린이 사라진 방향에서 멀 

리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저건!' 

그녀는 깜짝 놀랐다. 연기가 피어오르는 곳이 어디인지를 깨달은 것이었다. 바로 그 

녀가 상처를 치료하던 금월사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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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이 났단 말인가?' 

상관수아는 안색이 변했다. 비로소 장천린이 왜 다급히 그녀를 놔두고 갔는지 이해 

가 되었다. 그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곳을 바라보며 왠지 가슴이 무거워졌다. 

어제오늘 사이에 일어난 일들. 그것은 철부지 소녀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벅찬 것 

들이었다. 

금월사는 백 오십 년 전, 당대의 현승 금월대사(金月大師)가 창건한 이후 오늘까지 

한번의 파란도 겪지 않은 채 그 전통을 이어 내려왔다. 비록 대찰(大刹)은 아니었으 

나 산세 수려한 곳에 위치하고 있어 꽤 많은 불자들을 배출해 왔다. 

그런데 지금 금월사는 창건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었다. 

대웅전(大雄殿). 

웅장한 건물 앞에 십여 명의 승려들이 일렬로 무릎 꿇고 있었다. 그들의 주위에는 

정체불명의 흑의인들이 포위하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마당에 담운 노선사가 쓰러져 

있다는 것이었다. 

대웅전 계단 위에 한 명의 죽립인(竹笠人)이 우뚝 서서 마당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기이하게도 죽립은 물론 신발과 장삼, 머리카락과 눈썹까지도 온통 백색이었다 

죽립괴인은 왼손에 백장미(白薔薇) 한 송이를 가볍게 쥐고 있었다. 죽립 아래로 약 

간 드러나 보이는 얼굴은 의외로 부드러운 인상이었다. 

휙휙휙! 

사방에서 십여 명의 흑의인들이 마당에 모여들었다. 

죽립괴인은 부드러운 음성으로 물었다. 

"어찌 되었느냐?" 

한 흑의인이 공손히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모두 수색해 봤지만 그 계집은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 스님들에게 물어봤느냐?" 

"예! 모두 모른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중놈들을 족쳐야 할 것 같습니다." 

흑의인은 마당에 무릎 꿇고 있는 중들을 날카로운 눈으로 노려보며 말했다. 

죽립괴인은 혀를 찼다. 

"쯧! 사찰은 신성한 곳이다. 스님들을 함부로 다루어야 쓰겠느냐?" 

그는 한쪽에 쓰러져 있는 담운 노선사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어서 저 분 노스님을 부축해라." 

"예." 

다른 흑의인 한 명이 나서더니 담운을 부축했다. 죽립괴인은 계단을 천천히 걸어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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려온 후 담운을 향해 공손히 말했다. 

"노선사, 수하들의 무례를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담운은 담담히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별 말씀을 다하오." 

죽립인은 여전히 정중하게 말했다. 

"본인은 서문표(西門彪)라 합니다. 지금 한 명의 소녀를 찾고 있는 중인데 이곳으로 

달아난 흔적이 있어 찾아온 것이오. 그 과정에서 수하들이 본의 아니게 실례를 한 

것 같은데 부디 널리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담운은 합장한 채 말했다. 

"아미타불, 빈승은 시주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서문표는 차분하게 설명했다. 

"금월사에서 오 리쯤 떨어진 곳에서 본인의 수하들이 죽었습니다. 그것은 수하들이 

잡아놓고 있던 소녀를 누군가 데려가면서 저지른 일입니다." 

"아미타불......." 

서문표는 미소를 잃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우리도 처음에는 그 소녀가 누군지 몰랐습니다. 하지만 알고 보니 무척 중요한 존 

재였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찾을 생각입니다. 부디 노선사께서 협조해 주시기 바랍 

니다." 

담운은 비록 백 세가 넘었으나 서문표의 말뜻을 모르지 않았다. 그는 상관수아를 찾 

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불문에 몸을 담은 입장에서 어찌 약자를 내어놓을 수 있겠 

는가? 

"허허, 빈승은 모릅니다. 이 사찰에는 여인이라곤 없습니다." 

"흠." 

서문표는 손으로 백장미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그는 흑의인을 향해 명령했다. 

"베어라." 

그의 음성은 달콤할 정도로 부드러웠다. 마치 연인에게 하는 말 같았다. 

명이 떨어진 순간 믿을 수 없도록 잔인한 일이 벌어졌다. 

열 명의 승려들 중 맨 오른쪽에 있던 승려의 목이 한 흑의인이 휘두른 검에 뎅겅 잘 

린 것이다. 

"으아악!" 

처절한 단말마의 비명이 적막한 사찰의 공기를 흔들었다. 

"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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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운의 안색은 창백하게 변했다. 승려들의 얼굴도 시커멓게 죽고 말았다. 가공할 공 

포감이 그들의 심장을 짓누른 것이다. 

서문표는 여전히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다른 스님들의 말로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 두 명의 남자가 있다고 들었소." 

그는 백장미를 코에 대고 냄새를 흠흠, 맡았다. 

"노선사, 그 두 사내는 지금 어디 있소?" 

담운은 고개를 저었다. 

"모르오." 

"베어라." 

서문표의 부드러운 음성이 떨어지자마자 다시 검이 호선을 그렸고, 승려의 목이 피 

를 뿌리며 허공에 떠올랐다. 

실로 잔인무도한 행위였다. 

흑의인들은 반항할 힘도 용기도 없는 승려들의 목을 썩은 짚단 베듯 잘라버렸다. 그 

것을 지켜보는 서문표의 안색은 여전히 춘풍이 불 듯 온화하기만 했다. 

담운은 전신을 부르르 떨며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그대들은 천벌을 받을 것이오." 

서문표는 온화하게 말했다. 

"노선사, 나는 평생 동안 한번도 실수한 적이 없소. 그 소녀의 이름은 상관수아요. 

그녀의 몸에서 흐른 핏방울이 분명 이곳으로 왔소." 

"노납은 모르는 일이오." 

담운은 눈을 감아버렸다. 서문표의 입꼬리가 슬며시 말려 올라갔다. 

"베어라." 

다시 살인령이 떨어졌다. 흑의인은 검을 치켜들었다. 

마침 그의 앞에 무릎 꿇고 있는 중은 장천린이 준 은자로 개고기를 사먹은 돌중이었 

다. 그는 사지를 벌벌 떨며 외쳤다. 

"서... 선사님! 저는 죽기 싫습니다. 제발 말씀해 주십시오. 그 자들 때문에 우리가 

죽을 필요가 어디 있습니까? 예? 으흐흐... 제발!" 

서문표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그는 힐끗 돌중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 분 스님은 매우 현명하시군요." 

돌중은 바닥에 이마를 쿵쿵 찧으며 손바닥을 싹싹 빌었다. 

"선사님... 제발......!" 

담운은 그를 바라보며 엄숙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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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오(正吾), 두려워 말아라. 구차하게 목숨을 연명하느니 명예롭게 죽는 것이 부처 

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길이니라." 

그러나 정오는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된 채 몸부림쳤다. 

"아이고! 저는 싫습니다요! 죽어서 극락에 가느니보다는 사는 것이 더 좋습니다. 제 

발... 선사님!" 

"아미타불......." 

담운은 눈을 감아버렸다. 그의 주름진 얼굴에는 분노와 실망, 체념의 빛이 그늘처럼 

내리 깔렸다. 

서문표의 눈빛이 괴이하게 번뜩였다. 그는 걸음을 옮겨 정오의 앞에 가 섰다. 

"나리, 사... 살려 주십시오." 

정오는 그를 올려다보며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다. 서문표는 조용히 조용히 말했다. 

"정오. 너는 아무래도 이승보다는 저승에 가는 것이 어울릴 것 같다. 노선사의 말씀 

을 듣지 못했느냐?" 

"사, 살려... 끅!" 

정오의 눈이 부릅떠지더니 눈알이 툭! 튀어나왔다. 서문표의 손이 그의 뒤통수를 뚫 

고 들어간 것이다. 그의 다섯 손가락이 단단한(?) 돌머리에 박혀 있었다. 

정오는 앞으로 푹 쓰러졌다. 그가 그토록 미련을 두고 있던 이승에서 채 쓰지 못한 

은자가 소매 속에서 쏟아져 나왔다. 은자는 선혈과 함께 피범벅이 되고 말았다. 

서문표는 느릿하게 손가락을 빼내며 말했다. 

"노선사, 나 독로장미(禿路薔薇) 서문표가 어떤 사람인지 이제부터 똑똑히 보여 주 

겠소." 

그의 음성은 여전히 부드러웠다. 그러나 그것을 부드럽다고 느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의 잔인무도한 행동을 똑똑히 보았기 때문이었다. 

독로장미! 

대체 인간의 마음을 지니고 있는지, 아니면 악귀나찰의 마음을 지니고 있는지 모를 

정도로 끔찍하기 그지없는 심성의 소유자였다. 백장미를 손가락 사이에서 빙글빙글 

돌리고 있는 그에게서는 음산한 기운이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화르르륵! 

백 오십 년의 풍우에도 빛이 바래지 않았던 금월사의 황금빛 편액이 시뻘건 불길에 

타 들어가고 있었다. 

불길은 모든 것을 앗아갔다. 금월사의 산문(山門) 전체가 불덩이가 된 채 굉음과 함 

께 쓰러졌으며, 뒤이어 불당(佛堂)과 객당들도 차례로 무너져갔다. 

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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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인영이 금월사 앞에 떨어져 내렸다. 그는 연기를 보고 되돌아 온 장천린이었다. 

'이럴 수가!' 

그는 망연자실해졌다. 금월사는 이미 얼마 전의 모습이 아니었다. 산문은 잿더미가 

되어 무너졌고, 불당들도 반 이상 허물어진 채 검은 연기를 피워 올리고 있었다. 

그는 금월사 안으로 들어갔다. 참혹한 광경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웅전 앞마당 

에 열 구의 시체가 나뒹굴고 있지 않은가? 그들은 모두 목이 없었다. 

'누가 이런 천인공노할 짓을?' 

그는 심장이 떨리는 것을 느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문득 담운 노선사의 모습이 보 

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노선사!" 

크게 불러보았으나 대답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불길이 완전히 번지지 않은 

대웅전을 향해 걸어 들어갔다. 

대웅전에 들어선 순간. 

장천린은 그만 얼어붙고 말았다. 

"......!" 

맞은편에 청동불상이 있었다. 그의 눈은 불상의 머리에 고정되어 있었다. 서서히 눈 

이 부릅떠지고 있었다. 그곳에는 당연히 있어야 할 부처의 머리 대신 담운 노선사의 

머리가 올려져 있는 것이 아닌가! 

"선사......." 

장천린은 충격에 온몸이 마비되어 버린 듯했다. 

이때 불길은 대웅전 안으로 번져오고 있었다. 장천린은 비틀거리며 불상을 향해 걸 

어갔다. 화끈거리는 불의 열기조차 그는 조금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담운은 비록 목이 잘린 채 불상 위에 놓여져 있었으나 그의 얼굴은 평온하기만 했다 

. 두려움의 빛이나 놀라는 빛조차 없을 뿐더러 반쯤 뜨고 있는 눈동자에는 인자한 

빛이 가득했다. 

백 세가 넘도록 자질이 미흡하여 불도를 깨우치지 못했노라 자탄하던 노승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의 얼굴은 당대의 어떤 고승(高僧)보다도 불도가 깊어 보였다. 

죽는 순간에 해탈이라도 하였던 것일까? 

"누가 노선사를... 이렇게......?" 

장천린은 무서운 분노를 느꼈다. 가슴에 피가 끓고 있었다. 

'선사, 당신은 이것을 예견하고 저에게 나가라고 한 것입니까? 그렇다면 왜... 당신 

스스로 피하지 않으셨소? 왜?' 

장천린은 주먹을 으스러져라 움켜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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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길은 불당 안까지 번져 화염지옥을 이루고 있었다. 뜨거운 열기에 옷이 타 들어갈 

지경이었다. 장천린은 손을 뻗었다. 담운의 수급을 그대로 둘 수는 없었던 것이다. 

"......!" 

문득 그는 손을 멈췄다. 

불현듯 담운의 수급이 불상과 하나가 되어버린 듯한 기분이 든 것이다. 

아니, 실제로 그러했다. 담운은 이미 성불(成佛)해 있었다. 그의 목은 불상 위에 놓 

여 있었으나 불상과 동화(同化)되어 자연스럽기 그지없게 보이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될 줄을 알고 계셨군요.' 

장천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비로소 담운의 깊은 뜻을 알 것 같았다. 그는 손을 거두 

며 고개 숙여 묵념했다. 

'노선사, 당신께서는 마침내 성불하셨군요. 정녕 경하 드리옵니다.' 

잠시 후, 그는 신형을 날려 화염지옥이 된 불당을 빠져 나왔다. 막 문을 나서는 순 

간 이상한 예감에 그는 뒤돌아보았다. 그때 화염에 휩싸인 담운의 얼굴이 그를 향해 

웃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장천린은 잿더미가 되어버린 금월사를 등지고 산을 내려오고 있었다. 

얼마쯤 내려왔을까? 

양쪽 숲속으로부터 옷자락 날리는 소리와 함께 다섯 명의 흑의인이 번개처럼 앞을 

가로막았다. 

"......." 

장천린은 묵묵히 그들을 바라보았다. 흑의인 중 한 명이 살기 띤 눈으로 그를 노려 

보며 물었다. 

"네놈은 그 늙은 중과 어떤 사이냐?" 

장천린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졌다. 

"당신들인가? 금월사를 그렇게 만든 것이?" 

흑의인은 어깨를 으쓱하며 시인했다. 

"흐흐! 그렇다." 

장천린의 가슴에 분노의 불길이 확 치솟았다. 

"하!" 

기합과 함께 그는 신형을 날렸다. 금월사의 참변을 본 후 그는 타오르는 분기를 다 

스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이토록 분노한 것은 실로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는 도약한 상태로 공격을 펼쳤다. 머리를 아래로, 다리를 위로 한 채 오른손을 갈 

고리처럼 구부려 흑의인을 향해 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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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 

흑의인은 다급성을 발했다. 상대가 이렇게 갑작스럽게 공격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지 못한 듯했다. 그는 급급히 뒤로 물러났으나 늦고 말았다. 장천린의 백골마조가 

그의 옆구리를 훑어버린 것이다. 

"으아악!" 

흑의인은 처절한 비명과 함께 나뒹굴었다. 옆구리가 통째로 뜯겨져 나간 것이다. 구 

멍이 뻥 뚫린 옆구리로 내장이 뽑혀 나와 있었다. 

"이... 이런 죽일 놈!" 

"쳐라!" 

네 명의 흑의인은 대경실색하여 일제히 장천린을 공격했다. 

장천린은 살심이 극도로 고조되어 있었다. 그는 흑의인이 떨군 칼을 집어들고 크게 

원을 그렸다. 

우르릉! 

은은한 뇌성(雷聲)이 울렸다. 풍뇌도법(風雷刀法)이 전개된 것이다. 

"크아아악!" 

두 명의 흑의인이 통째로 허리가 동강나며 날아갔다. 실로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으으......!" 

두 흑의인은 공포에 질린 채 뒷걸음질쳤다. 

장천린의 신형이 사라졌다. 귀영비마보(鬼影飛魔步)를 전개한 것이었다. 한 가닥 연 

기와 같은 기운이 흑의인들을 덮쳤다. 

"크악!" 

한 명의 정수리에 칼이 떨어졌다. 연이어 또 한번의 비명소리가 났다. 

마지막 남은 흑의인은 눈을 부릅떴다. 그의 눈알이 툭 튀어 나왔다. 장천린의 손이 

그의 목을 틀어쥔 것이다. 

"끄으......." 

흑의인의 안색이 횟빛이 되었다. 장천린은 목을 누르며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물었 

다. 

"네놈들은 조화성에서 왔느냐?" 

흑의인은 그르륵 하는 소리를 내며 간신히 대답했다. 

"그... 그렇다." 

"무슨 이유로 금월사를 잿더미로 만들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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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관수아란 계집과... 사내놈이 간 곳을... 말하지 않기에......." 

"천참만륙(千斬萬戮)할 놈들!" 

장천린의 입에서 난생 처음으로 욕이 튀어 나왔다. 너무나 화가 난 나머지 그는 자 

신도 모르게 손에 힘을 주었다. 

우두둑, 하는 소리와 함께 흑의인은 목이 부러져 즉사하고 말았다. 

"......." 

장천린은 허무한 시선으로 다섯 구의 시체를 돌아보았다. 그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 

보았다. 도무지 살인을 한 손 같지 않게 깨끗했다. 그러나 방금 전 그 손은 분명 다 

섯 명의 흑의인을 눈 깜빡할 사이에 해치워 버린 것이다. 

그는 돌아서서 금월사를 향해 합장했다. 

'선사, 부디 극락왕생 하시길 비오.' 

그는 미련없이 신형을 날렸다. 상관수아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떠올린 것이었다. 

"......?" 

장천린은 산기슭에 멈춘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기다리고 있어야 할 상관수아의 모 

습이 보이지 않았다. 

'먼저 산을 내려갔을까?' 

내심 이렇게 생각해 보기도 했으나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는 생각을 떨치려 

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무사히 내려갔겠지.' 

그는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상관수아를 만나면서부터 불행한 일이 시작된 것이다. 그가 만일 그녀를 구하지만 

않았어도 금월사가 화를 입을 까닭이 없었다. 

'이것도 인연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실로 불행한 인연이 아닌가?' 

장천린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산 아래로 걸어내려 갔다. 

산동(山洞)에 두 명이 마주보고 있었다. 

그들은 사검(邪劍) 막청과 그에 의해 납치된 옥류향이었다. 

옥류향의 모습은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평소의 화려하고 풍류에 넘치던 모습은 간 

곳이 없고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머리카락은 멋대로 헝클어져 있었으며, 

옷은 여기저기 찢어진 채 선혈이 낭자한 차림이었다. 

바닥에 맥없이 주저앉아 있는 옥류향과는 대조적으로 막청은 바위 위에 느긋하게 걸 

터앉아 있었다. 

"신산이 가장 신임하는 자가 바로 너 옥류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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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청의 음성에는 여유가 있었다. 그는 조금도 서두를 생각이 없었다. 

"그런 네가 신산이 있는 곳을 모른다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지." 

옥류향은 입가에 묻은 피를 소매로 닦으며 말했다. 

"나는 상인이오. 무림의 일에 개입시키지 마시오." 

그의 태도는 놀랄 정도로 굳굳하기만 했다. 

"놈!" 

퍽! 

막청의 발이 옥류향의 턱을 정통으로 걷어찼다. 

옥류향은 비명을 지르며 두 바퀴나 굴러가서야 벽에 부딪치면서 멈추었다. 입과 코 

로 피가 쏟아져 나왔다. 

막청은 차갑게 그를 응시하며 물었다. 

"무슨 일로 용문전장을 방문했느냐? 신산은 무슨 명령을 내렸지?" 

옥류향은 괴소를 흘렸다. 

"후후! 힘만 믿고 행동하는 자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우매한 부류들이지. 바로 당신 

이 그런 부류인 것 같군." 

막청의 눈이 이글거렸다. 그는 검을 뻗어 옥류향의 뺨에 갖다 댔다. 그의 음성은 더 

욱 낮게 가라앉았다. 

"신산은 어디 있느냐? 대답하지 않으면 네 얼굴을 그물처럼 만들어 주마." 

옥류향의 눈이 가늘어졌다. 

"후후! 언젠가 당신이 내 손에 걸려들 날이 있다면 그때 나는 당신을 곱게 다져서 

술을 담궈 먹겠소."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 검광이 번쩍 일어났다. 옥류향의 뺨에 길게 검흔이 새겨졌 

다. 

"지독한 세뇌를 받았군. 하지만 어디까지 견디나 보자." 

막청의 얼음장같은 음성이 동굴 안을 울렸다. 

츠츠츳! 

눈부신 검화(劍花)가 일어났다. 

옥류향은 눈을 부릅떴다. 안면이 화끈화끈했다. 검화가 사라진 후, 그의 얼굴은 악 

귀나찰처럼 변해 있었다. 관옥 같던 얼굴에 수십 가닥의 흉칙한 검흔이 새겨진 것이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옥류향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있었다. 

'지독한 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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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청은 내심 욕설을 퍼부으며 음산하게 말했다. 

"이 동굴 안에는 불개미들이 산다. 흐흐, 벌써 네놈의 피냄새를 맡고 놈들이 몰려오 

기 시작했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어두워 잘 보이지는 않았으나 동굴 바닥에는 수많은 개미떼 

가 몰려들고 있었다. 

"한 시진의 여유를 주겠다. 신산의 거처만 일러주면 즉시 풀어 주마." 

막청은 무정하게 말한 후 나무토막 하나를 집어들었다. 

삭삭! 

그는 검으로 나무토막을 깎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것은 길고 뾰족한 창의 모양으로 

바뀌어갔다. 그는 나무창을 이러 저리 살펴보며 중얼거렸다. 

"다시 말하지만 나 막청은 인간미를 상실한 지 이미 오래다." 

그는 고개를 들어 밖을 향해 외쳤다. 

"누구 있느냐!" 

"넷!" 

동굴 안으로 한 흑의인이 들어왔다. 

"놈의 양손바닥을 겹쳐 땅에 대라." 

처음 흑의인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으나 곧 무슨 뜻인지 깨달은 듯했다. 그는 옥 

류향의 오른쪽 손바닥을 바닥에 대게 한 다음 왼손을 그 위에 얹게 했다. 

사각사각......! 

막청은 계속 나무를 깎았다. 이제 나무는 날카로운 목창처럼 변했다. 그의 입술이 

달싹였다. 

"한 시진이다. 옥류향." 

차가운 음성이 떨어진 순간 번뜩하고 흰빛이 쏘아 나갔다. 

처절한 비명이 들렸다. 막청의 손을 떠난 목창이 옥류향의 겹쳐진 손바닥을 꿰뚫고 

바닥에 깊숙이 박혀버린 것이다. 

"끄으으......." 

옥류향은 이를 악물었다. 극심한 고통에 안면은 물론 전신 근육이 푸들푸들 경련을 

일으켰다. 

"한 시진이 지나면 네 몸뚱이는 불개미에게 뜯겨 뼈만 남게 된다." 

"흐으......." 

"살고 싶으면 날 불러라." 

막청은 몸을 일으켜 밖으로 걸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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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에 혼자 남게된 옥류향은 시시각각 밀려드는 고통에 이를 악물고 있었다. 

'한 시진... 한 시진.......' 

생각만 해도 아득한 일이었다. 손바닥을 관통한 나무창이 주는 고통은 상상을 절하 

는 것이었다. 문득 전신이 근질근질해졌다. 

'한 시진 후면 신시(申時)다. 그때까지 용문전장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수색이 시작 

될 것이다.' 

옥류향은 치밀한 성품의 사나이였다. 그의 생각은 언제나 한 치의 오차도 없었으며 

행동 또한 그러했다. 

그는 어디를 가든 주위에 백여 명의 고수들을 대동했다. 또한 출타할 때 반드시 돌 

아갈 시간을 예고해 두었다. 지금까지 그 시간을 어긴 적은 한번도 없었다. 

만일 그가 예정된 시간 내에 돌아가지 않으면 즉시 팔십일인의 고수들이 출동하게 

되어 있었다. 팔십일인의 고수들- 그들의 무서움을 옥류향은 익히 알고 있었다. 

그들이야말로 이리와 같은 작자들이었다. 

'반드시... 그들은 날 찾을 것이다.' 

옥류향은 전신이 따끔거리는 것을 느꼈다. 불개미가 살점을 뜯어먹고 있는 것이다. 

그는 번연히 눈 뜬 채 불개미가 자신을 뜯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다. 그야말로 피가 

마르고 간장이 타 들어가는 듯한 심정이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오직 그가 믿는 

것은 오랫동안 지켜왔던 시간(時間)의 보호망 뿐이었다. 

믿는 것이 있었기에 그는 고통을 참을 수 있었다. 

옥류향! 

외모만으로 본다면 준수한 미공자요, 풍류 넘치는 젊은 상인이었다. 그러나 그의 무 

서움은 바로 이런 치밀함과 인내에 있었다. 그가 이런 인간이 아니었다면 신산은 결 

코 그를 믿지 않았을 것이다. 

시간은 자꾸 흘렀다. 

그러나 그 시간은 옥류향이 느끼기에는 정지된 듯 한없이 느리기만 했다. 맹세코 단 

언하건대... 그는 이처럼 시간이 지겹다고 느낀 적은 없었다! 

'한 시진! 한 시진이다, 옥류향!' 

그는 이를 악문 채 자신에게 부르짖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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