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2장 운명의 조우(遭遇) (26/87)

제2장 운명의 조우(遭遇) 

북방의 아침 햇살이 황원(荒原)을 눈부시게 비춘다. 

태양이 대륙을 비추면 사람들은 활기차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어제의 독한 피로와 

절망까지도 딛고 일어서며 새로운 힘을 근육 구석구석에 느끼며 힘차게 대지를 밟고 

일어선다. 

융고숙잔은 부산해졌다. 

장천린은 고랍특성을 떠나기로 했다. 백살대의 도객들은 바빠졌다. 그들은 장비를 

챙기며 떠날 채비에 열중했다. 

간밤에 찾아왔던 아국여인 타루미는 진시(辰時) 경에 융고숙잔을 떠났다. 그녀는 떠 

나면서 장천린에게 무슨 말인가를 할 듯했으나 결국은 하지 못하고 떠났다. 

장천린은 그녀의 초록빛 눈 속에 깃든 애틋한 심정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감정을 내색하지 않았다. 

타루미는 떠났다.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면서. 

정오 무렵의 융고숙잔의 후원에는 백여 명의 각양각색의 인간들이 모여들었다. 

임시로 만든 대 위에 올라 선 반송이 그들을 둘러보며 제법 엄숙한 표정으로 무엇인 

가를 지시하고 있었다. 

젊은이, 늙은이, 한인(漢人), 몽고인(蒙古人), 서장인(西藏人), 심지어는 색목인(色

目人)까지 두루 섞여 있는 백여 명의 인간들은 그야말로 다양했다. 복장은 물론이려 

니와 그들이 소지하고 있는 무기도 모두 틀렸다. 다만 그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그것은 한결같이 분위기가 메마르고 잔인해 보인다는 점이었다. 

마치 들개 같다고나 할까? 그들은 바로 낭인시장에 스스로의 몸을 내놓았던 자들이 

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들 중에 평범해 보이는 자들은 아무도 없었다. 

반송은 낭인무사들을 상대로 일장 훈시(?)를 하고 있었다. 

"내가 바로 지금 이 순간부터 너희들의 모든 움직임을 통제할 사람이다." 

반송은 하나 뿐인 팔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켰다. 

"잘 기억해 둬라. 내 이름은 반송이다. 나는 공적인 일에 관한한 피도 눈물도 없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내 주인이 너희들을 고용했고 너희들의 신상을 맡긴 이상 이제 

부터 모든 생사여탈권은 내가 쥐게 된다." 

"......." 

반송의 말에 아무도 대꾸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저 메마르고 삭막한 공기만이 감돌 

고 있었다. 

아니, 그런 것만도 아니었다. 백여 쌍의 음산하면서 번들거리는 야수의 눈동자들은 

반송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만일 보통의 담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아예 그들 앞에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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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못할 뿐더러 입도 못 뗄 살벌한 분위기였다. 일생을 거칠게 살아오며 칼끝에 

몸을 던져온 그들이 아니던가. 

그러나 반송을 달랐다. 그는 입가를 씰룩이며 추호도 기세가 밀리지 않았다. 그의 

음성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계약기간은 일 년이다. 그 동안 모든 숙식을 제공한다. 돈도 모두 선불로 준다. 그 

러나 명심해 둘 것이 있다. 만약 계약 도중에 대열을 이탈하거나 명령에 어기는 놈 

이 있다면 그 자리에서 베어 버리겠다." 

그의 살벌한 말에 낭인들의 눈빛이 사납게 번뜩거렸다. 이때 낭인들 중에서 한 명이 

거친 음성으로 말했다. 

"질문이 있소." 

대머리의 중년인이었다. 그는 몸에 찰싹 달라붙는 검은 가죽옷을 입고 허리에는 날 

카로운 낫을 껴차고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은 혐오감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흉악해 

보였다. 

특히 주먹코에 구멍이 숭숭 뚫려있는 것과 반들반들한 대머리에 시뻘건 독사 수십 

마리가 꿈틀거리는 문신을 새겨넣은 것은 보기만 해도 섬뜩한 느낌을 주었다. 

"뭐냐?" 

반송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대체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이오?" 

반송은 냉엄하게 말했다. 

"질문은 받지 않는다. 너희들은 어떤 일이든 시키는 대로 계약기간 동안만 따르면 

된다. 그것이 계약 조건에 포함되어 있지 않느냐?" 

대머리는 눈을 가늘게 한 채 음산한 웃음을 흘렸다. 

"흐흐! 살인도 그 중에 끼어 있소?" 

반송은 그를 노려보았다. 

"네 이름이 뭐냐?" 

"훗훗훗! 막서(漠西) 위로특(危魯特)의 독두사(禿頭蛇) 화로(華路)라면 알겠소?" 

낭인무사들 사이에서 술렁거림이 일어났다. 그의 존재는 낭인시장에서 상당히 알려 

진 듯했다. 반송은 차갑게 코웃음쳤다. 

"흥! 화로, 한번만 더 입을 놀리면 네 대갈통의 껍질을 모조리 벗겨 주겠다." 

"......!" 

화로의 안색이 무섭게 굳어졌다. 그의 눈에서 살기가 불꽃처럼 이글거렸다.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험악한 분위기가 흘렀다. 화로는 법은 물론 예의나 형식 따위 

는 안중에도 없는 작자로 그저 기분 내키는 대로 살인을 밥먹듯이 하는 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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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큿! 좋소. 반나리. 계약을 한 이상 참겠소. 하지만 계약이 끝난 후 반나리는 어 

깨 위의 물건을 잘 간수해야 할 거요." 

반송도 음산하게 말했다. 

"좋아, 기다리지. 하지만 너는 일 년 안으로 나 반송이 어떤 위인인지 뼈저리게 느 

끼게 될 것이다." 

화로는 그저 킬킬거릴 뿐이었다. 

"여기 질문 있소!" 

이번에는 반송의 바로 앞에서 음침한 음성이 들렸다. 그 자는 흑의를 입고 있었는데 

안색이 밀랍처럼 창백하고 깡마른 청년으로 역시 음험하고 악랄한 인상이었다. 그 

는 등뒤에 음양검(陰陽劍)을 교차시켜 메고 있었다. 

"말해 봐라." 

반송은 그를 노려보며 짧게 말했다. 청년은 음푹 꺼진 눈에 음험한 빛을 흘리며 히 

죽 웃었다. 

"반나리의 왼팔은 어찌하다 분실했소?" 

그 말에 낭인들의 안색이 일제히 굳어졌다. 그야말로 반송의 자존심을 무참히 건드 

리는 질문이 아닌가? 

그런데 반송의 반응은 실로 뜻밖이었다. 

"으하하하하!" 

갑자기 그는 요란한 대소를 터뜨린 것이다. 잠시 후 웃음을 그친 그는 싸늘하게 말 

했다. 

"간수를 잘못하면 무엇이든지 분실할 수 있는 법이다. 됐나?" 

청년은 음험하게 말했다. 

"됐소, 반나리." 

"네 이름은?" 

청년은 히죽 웃었다. 

"오사장(烏斯藏)의 음양검(陰陽劍) 패륵결(貝勒訣)이오." 

반송은 미소지었다. 

"좋다. 패륵걸!" 

그는 음성을 낮추며 말했다. 

"그런데 한 가지만 충고하겠다." 

"앞으로 내 앞에서 함부로 입을 놀리면 아래 위 턱을 뭉개버리겠다." 

웃으며 하는 말치고는 실로 무서운 말이었다. 그런데 그 말이 채 여운을 끝내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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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이었다. 그의 허리춤에서 번쩍, 섬광이 일어났다. 

"헉!" 

패륵걸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나왔다. 

보라! 그의 머리를 묶은 끈이 잘라져 나풀거리며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패륵걸은 

가슴이 서늘한 느낌에 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의 몸이 학질 걸린 사람처럼 덜덜 떨 

렸다. 

앞가슴의 옷이 걸레쪽이 되어 펄럭이는 것이 아닌가? 그 사이로 바람이 스며들고 있 

었다. 그는 믿을 수가 없었다. 머리끈이 잘라졌으나 머리카락은 한 올도 잘려지지 

않았고, 가슴 또한 피부에 조금의 상처도 나있지 않았다. 

아니, 그보다 무서운 것은 그를 비롯하여 백여 명의 낭인들 중 아무도 반송이 칼을 

뽑는 것을 본 자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어디 그 뿐이랴? 그가 칼을 회수한 것조차 

본 자가 없었다. 

그야말로 반송의 발도술(拔刀術)은 섬전을 방불케하는 것이었다. 

"......!" 

패륵걸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는 보기 딱할 정도로 겁에 질려 있었다. 

반송은 이 한번의 행동으로 백 명의 낭인무사들을 휘어잡는데 성공했다. 그는 히죽 

웃으며 다시 일장 훈시를 한 후에야 대 위에서 내려와 유유히 사라졌다. 

낭인무사들은 그가 떠나고 난 뒤에도 한참 동안을 얼어붙은 듯이 서 있다가 한숨을 

쉬며 하나 둘씩 자리를 떴다. 

아랑은 며칠째 우울했다. 

그래서 어제 저녁에는 손님을 받긴 받았지만 평시와 달리 몸이 차갑게 식어 아무 것 

도 할 수가 없었다. 결국 그녀와 몸을 섞는 도중에 손님은 그녀의 따귀를 치고는 화 

를 나가 버렸다. 

주점 주인은 그녀를 불러 욕설을 퍼부었다. 그런 식으로 손님을 상대하면 그녀를 내 

쫓겠다는 것이었다. 아랑은 그저 묵묵히 듣기만 할 뿐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그녀는 완전히 의욕을 상실했다. 심지어는 삶의 의욕마저도 상실한 것 같았다. 아무 

말도 하고싶지 않았고, 누구와 어울리거나 음식을 먹는 것조차 역겹기만 했다. 

"......." 

지금 그녀는 자신의 방에서 동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동경 속에 비친 그녀의 얼굴은 

자신이 생각해도 지쳐 있었다. 

과거의 생기 넘치던 얼굴은 어디로 가고 동경 속에 비친 얼굴은 시들어 버린 잡초에 

다름 아니었다. 

'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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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심 중얼거리는 순간 가슴이 칼로 베어지는 듯이 아팠다. 그녀는 북받쳐 오르는 슬 

픔에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눈물이 얼굴을 타고 떨어져 내렸다. 

담오가 떠난 뒤, 그녀는 가슴이 텅빈 듯 허탈감에 빠져 버렸다. 

갑자기 무엇을 생각했는데 그녀는 고개를 발딱 들었다. 

'아랑, 마음을 굳게 먹어. 약해져서는 안돼.' 

그녀는 동경을 노려보았다. 

'너에게는 꿈이 있지 않느냐? 가난이 싫어서, 그래서 부유하게 살기 위해 네가 선택 

한 길이 아니니?' 

아랑은 손등으로 눈물을 닦았다. 

'어차피 담상공은 날 사랑하지도 않아.' 

그녀는 동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노려보며 마음을 굳게 먹었다. 

'내게 남아있는 것은 이제 아무 것도 없어. 믿을 것은 오직 돈 뿐이야.'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돈을, 돈을 버는 거야.' 

그녀는 갑자기 생기를 되찾고 화장을 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화장 솜씨는 능숙했다. 

잠깐 사이에 분을 바르고 머리를 빗어 넘기자 그녀의 얼굴은 아름답게 피어났다. 

방금 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모습이었다. 그녀는 웃었다. 

'그래, 아직도 나는 예뻐, 날 찾는 사람은 아직도 많단 말이야.' 

그때였다. 

그녀의 몸이 나무토막처럼 굳어졌다. 동경 속으로 방문이 열리며 한 사나이가 들어 

오는 것이 비친 것이다. 그는 바로 담오였다. 

"담상공!" 

그녀는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고 말았다. 자신도 모르게 부르짖었다. 

담오가 찾아왔다. 그녀가 그토록 존재를 지울 수 없었던 담오가 다시 찾아온 것이다 

아랑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돌아섰다. 담오는 무심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차갑게 말했다. 

"내 몸이 팔렸다. 아랑." 

막 그에게 다가가려던 아랑의 몸이 흠칫 멈추었다. 

"이제 다시는 고랍특성에 올 수 없을 것 같다." 

담오의 말에 아랑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결국, 당신은 칼에 인생을 걸기로 한 건가요?" 

담오는 자나깨나 손에서 놓은 적이 없는 녹슨 칼을 내려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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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는 것은 칼 뿐이다." 

그는 품속에서 작은 상자 하나를 꺼내 그녀에게 던져주었다. 

"내 몸값이다. 그 동안 네게 진 빚을 이것으로 갚으마. 이걸로 네 인생이 행복해지 

기를 빌겠다." 

아랑은 망연자실해졌다. 

"가는... 건가요?" 

담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시 만날 수는 없나요?" 

담오는 나직이 말했다. 

"모르지. 인연이란 것은 무서우니까. 장담을 할 수 없는 것이 사람의 운명이자 인연 

이다. 하지만 재회를 장담하기에 이 대륙은 너무 넓다." 

아랑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어디로 가실 건가요?" 

"모른다. 나도." 

담오는 할 일을 다했다는 듯 몸을 돌렸다. 

"안녕, 아랑." 

아랑은 넋을 잃었다. 그녀는 한 순간 발 밑이 땅이 한없이 꺼져가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담오를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왠지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안... 녕." 

그저 그녀의 입에 흘러나온 그 뿐이었다. 그것도 그녀의 입속에서만 맴돌았을 뿐, 

밖으로 흘러나오지 못했다. 

담오는 사라졌다. 그녀의 시야에는 닫혀버린 방문만이 단절의 의미를 전달하고 있었 

다. 그는 사라진 것이다. 어쩌면 영원일지도 모르는 이별이었다. 

담오가 나가고 한참이 지나서야 아랑은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그가 남기고 간 상자 

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허탈감만이 가득했다. 

그녀는 상자의 뚜껑을 열어보았다. 순간 그녀의 얼굴에 경악이 떠올랐다. 

보석이었다. 작은 상자 속에는 그녀가 한번도 본 적이 없는 희귀한 보석들이 가득 

들어있는 것이 아닌가? 

"......!" 

그녀는 넋을 잃었다. 그녀가 그토록 원하던 것. 사랑을 배신하고 몸을 팔아가면서, 

아니 인생을 던져가면서까지 얻으려 노력했던 것이 상자 속에 담겨 있었다. 

아랑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그녀는 시야가 흐려지는 것을 느끼며 보석상자를 

껴안았다. 다음 순간 그녀는 발딱 고개를 치켜들더니 날카로운 웃음을 터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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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호호홋... 호호호홋......!" 

그것은 극도로 허무함을 느끼게 하는 웃음이었다. 날카로운 웃음은 오랫동안 계속되 

었다. 눈물은 이제 뺨을 적시고 그녀의 옷자락까지 적시고 있었다. 

주점 앞. 

"왜 삼십만 냥을 모두 그 여인에게 주었나?" 

반송은 의아한 듯 물었다. 그는 담오가 나오기를 기다렸던 것이다. 담오는 그의 질 

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를 사랑하나?" 

담오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닐세." 

"그럼?" 

담오는 앞장 서 걸어가며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내가 과거에 정을 준 유일한 여인이다. 그녀와 나의 운명은 모질다 못해 혹독하게 

얽혀 있었지. 어쩌면 내 인생을 팔아버린 그 돈으로 그녀에 대한 마지막 미련을 지 

워버리고 싶었는지도 모르지." 

반송을 그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가슴이 아픈가?" 

담오는 미소지으며 그를 돌아다보았다. 그 미소는 전에 없이 부드러운 것이었다. 

"반형, 자네는 정말 좋은 친구일세. 나는 자네를 만난 것을 큰 기쁨으로 생각하네." 

그는 앞을 바라보며 홀가분하게 말했다. 

"내 걱정은 하지 말게. 이제 내 가슴속에 남아 있던 과거의 찌꺼기를 모두 씻어버려 

기분이 무척이나 유쾌하단 말일세. 하하핫!" 

그는 대소를 터뜨렸다. 그러나 어딘가 모르게 쓸쓸한 구석이 깃들어 있는 웃음이라 

고 반송은 생각했다. 

담오는 계속 앞만 보며 걸어갔다. 

'행복해라, 아랑. 네게 준 삼십만 냥어치의 보석에는 나의 전 인생이 담겨져 있다. 

너는 이제 가난을 벗어났다. 넌 날 거부했지. 하지만 난 네가 생각하는 행복을 위해 

날 던졌다. 왜냐고? 너와의 지긋지긋한 인연을 끝내고 싶어서였다.' 

담오의 눈 속에는 알 수 없는 빛이 흐르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보 

았다. 

'그런데 말이다.' 

담오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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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상 네 곁을 떠났다고 생각한 순간에야 네게 대한 내 감정을 알게 되었다.' 

담오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아직도 너를 사랑한다, 아랑. 하지만 이제는 잊기로 했다.' 

해가 서녘으로 기울고 있었다. 

'안녕, 아랑.' 

두 사나이가 기다란 그림자를 이끌며 사라지고 있었다. 

고랍특성의 낭인시장에서 만난 두 사나이. 어쩌면 그들은 다시는 이곳에 돌아올 수 

없게 될는지도 몰랐다. 

대황원(大荒原). 

끝없이 펼쳐진 황원은 황량하다기 보다는 웅대하다는 느낌을 준다. 간간이 푸른 초 

원이 끝간데 없이 이어지다가는 다시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자라지 않은 푸석푸 

석한 황지(荒地)의 건조한 사막이 펼쳐지기도 하는 곳이다. 

막남몽고(漠南蒙古) 지방 특유의 건조한 기후로 인해 대부분의 땅은 사막으로 이루 

어져 있다. 어쩌다가 초지가 형성되는 지대에는 유목민들의 생활 근거지가 형성되어 

있었다. 

양떼를 방목하며 초원을 누비는 유목인들은 나름대로 독특한 생활풍습을 갖고 있었 

다. 

양에서 나온 모든 것이 그들의 생활에 반영된다. 의복은 물론 빠오를 만드는 것은 

양털과 양가죽이었고, 주식 역시 양고기와 양젖이었다. 

그러므로 초원에서 양의 존재는 곧 생명 그 자체이기도 했다. 

황원에 흙먼지가 일었다. 

메마른 황원을 가로지르는 대상이 있었다. 그들은 낙타 수십 마리와 말 수백 마리를 

이끌고 황원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다름 아닌 고랍특성을 떠난 장천린 일행이었다. 행렬 중간에는 낙타가 끄는 커다란 

마차가 있었다. 마차의 양쪽에는 백살대의 도객들이 엄중히 호위하고 있었다. 

대열의 후미는 낙타의 등에 짐을 잔뜩 실은 행렬이 이어졌고 낭인시장에서 고용한 

낭인무사들이 낙타를 다루고 있었다. 

규모가 비교적 큰 대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일찍이 막남이나 막서지방에서 이런 류 

의 대상은 흔히 보는 것이긴 했으나 규모면에서 볼 때는 드문 것이었다. 

마차 안에는 장천린과 부금진이 타고 있었다. 

바닥에는 부드러운 양탄자가 깔려 있어 아늑한 분위기였다. 게다가 내부도 제법 널 

찍하여 여러 사람이 앉을 수도 있었고 편히 누워 잠을 잘 수도 있었다. 

두 사람은 마주 앉은 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주로 부금진이 이야기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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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금진은 몽고에 관해서 자신이 아는 것들을 설명하고 있었다. 몽고의 풍습, 지리, 

생활양식은 물론 그들에게서 전해져 오는 전설(傳說)에 이르기까지 자세히 이야기했 

다. 

장천린은 부금진에 대해 감탄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미소녀를 뺨칠 정도로 아 

름답게 생긴 소년의 머리에는 풍부한 학식과 지혜, 그리고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깊 

이 있는 경륜까지 갖추어져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장천린에게 큰 도움이 되고 있었다. 

"막남몽고의 수십 개 부족은 대개가 후금(後金)의 왕(王) 누르하치에게 굴복하여 매 

년 조공을 바치고 있는 형편입니다." 

부금진은 이 지방의 정세에 대해 설명했다. 

"막남의 가장 큰 부족인 찰합이부족의 임단한(林丹汗)은 그 세력이 막강합니다. 더 

구나 성격이 드세고 자존심이 강해 아직까지도 누르하치에게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그는 누르하치가 보낸 병사들을 격파하여 큰 타격을 입히고 있지요." 

장천린은 부금진의 설명을 귀담아 들었다. 그것은 머지않아 그가 취할 행동에 긴요 

한 정보가 되기 때문이었다. 

"임단한은 일당천(一當千)의 맹장이에요. 그는 무공이 극고하여 대초원의 풍운아(風

雲兒)라고 불리웁니다." 

부금진은 엄지손가락을 내세워 보냈다. 

"장차 대초원의 지배자가 될 것이 확실해요." 

장천린은 묵묵히 들으며 나름대로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가 중원에서 멀리 떨 

어진 이곳 몽고까지 들어온 진정한 이유는 바로 막남몽고의 영웅 임단한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물론 그 사이에 장사를 하는 것도 개인적인 목적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가 이곳 몽고지방에 온 지도 벌써 한 달이 지났다. 그 동안 그는 막북(漠北)과 막 

서(漠西)를 돌며 엄청난 물량을 거래했다. 

그는 중원에서 산해관(山海關)을 넘어올 때 많은 물품들을 가지고 왔다. 그리고 그 

것은 대막지방을 돌며 이미 팔아 치웠고, 또 대막에서만 나는 갖가지 특산물도 구입 

했다. 

게다가 거상 아랍대에게서 말 일만 필을 구입하기도 했다. 

아랍대에게 접근한 목적은 마필의 구입도 있지만 진정한 이유는 임단한을 만나기 위 

한 준비과정 때문이었다. 

장천린은 해남도에서 돌아온 직후 북경의 태진왕을 만났다. 태진왕은 그에게 한 가 

지 부탁을 했다. 그것은 임단한을 만나 달라는 것으로, 극비사항이라는 점을 강조했 

었다. 

"......." 

장천린은 마차 밖으로 끝없이 펼쳐진 대황야를 바라보았다. 황야의 끝에 지평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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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어져 있었다. 그 지평선을 경계로 하늘과 땅 사이에는 거대한 황색의 구름이 피어 

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황야를 스치며 지나는 바람이 만든 걸작품이었다. 흙먼지를 말아올려 거대한 

먼지구름을 만든 것이다. 

'누르하치.' 

내심 이렇게 중얼거린 장천린은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는 누르하치란 이름을 중원에 

서는 거의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정작 몽고에 와보니 사정이 틀렸다. 

누르하치란 존재는 이곳에서는 공포와 경외의 대상이었다. 

'여진족 제일의 영웅이라고 했지.' 

누르하치. 

그는 조부 규상과 부친 타실이 음모에 걸려 명군(明軍)에 의해 처참하게 죽자 무서 

운 원한을 가지게 된다. 

그 이후 각고의 노력과 불굴의 투혼으로 건주여진(建州女眞), 해서여진(海西女眞)을 

비롯하여 후이파(輝發), 우라(烏拉) 등의 여진족 각 부족들을 통합하여 칸(汗)의 

지위에 올라 국호를 후금(後金), 연호를 천명(天命)이라 하였다. 

그 후 여진문자를 발명하고 팔기제도를 제정하였으며, 도성을 혁도아랍(赫圖阿拉)으 

로 옮겼다. 연후 그의 야망은 중원으로 돌려지게 되었다. 조부와 부친을 죽인 명에 

대한 원한은 그 뿌리가 깊었던 것이다. 

여진의 절대자 누르하치- 그의 세력은 급팽창하고 있었다. 

장천린의 상념은 계속 이어졌다. 

'누르하치는 나날이 위협적인 존재로 성장하고 있는데 황실에서는 별다른 대처를 하 

지 않고 있다. 다만 태진왕만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을 뿐이다.' 

그는 태진왕이 한 말을 떠올렸다. 

'과거 여진이 명의 휘하에 있을 때 나는 북방을 순시하러 흥경(興京)에 갔다가 누르 

하치를 본 적이 있네. 당시 누르하치는 이십대의 청년이었지. 그는 호상(虎相)이었 

고 천하를 오시하는 듯한 이글거리는 눈을 갖고 있었네. 가히 제왕의 상(相)을 지닌 

인물이라 생각되어 몹시 마음에 걸렸네. 현재 누르하치의 세력은 나날이 성장하고 

있네. 그런데도 황실은 썩을 대로 썩어 그의 존재에 대해 아무도 신경 쓰는 사람이 

없는 것이 한탄스럽기만 하네. 실상 내가 군병을 양성하려는 이유는 바로 누르하치 

때문이네.' 

'임단한을 만나게. 그는 막남의 영웅으로 누르하치와 대치하고 있는 인물이지. 그것 

은 남에게 복종하지 않으려는 임단한의 성격 탓도 있지만 실상 막남과 여진은 지리 

적으로 인접해 있어 전통적으로 적대감을 갖고 있기 때문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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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자는 찰합이부족의 젊은 추장으로 휘하에 있는 군병만도 십만에 이르네. 내가 

자네로 하여금 임단한을 만나라고 하는 이유는 그 자를 이용하여 중원침공의 야심을 

불태우고 있는 누르하치를 다소나마 견제하려는 것일세.' 

부금진은 의아한 표정으로 장천린을 바라보았다. 그가 어두운 표정으로 오랫동안 밖 

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었다. 

"용대인." 

장천린은 그의 말을 듣지 못한 듯했다. 

"용대인!" 

장천린은 비로소 상념에서 깨어났다. 

"아, 소진. 미안하다, 잠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부금진은 다소 걱정이 되었다. 

"피곤하신가 봅니다. 이제 그만 얘기할까요?" 

장천린은 고개를 흔들었다. 

"괜찮다. 계속 이야기하거라." 

"아닙니다. 좀 쉬시는 게 좋습니다. 아직 임단한을 만나려면 며칠 여유가 있으니까 

요." 

장천린은 부금진을 바라보았다. 그가 정면으로 직시하는 바람에 부금진은 얼굴을 붉 

혔다. 그는 유난히도 수줍음을 타는 소년이었다. 

"저... 제 얼굴에 뭐가 묻었나요?" 

"네 얼굴은 깨끗하고 아릅답다. 아니, 무엇보다도 순수해서 좋구나." 

부금진은 더욱 얼굴을 붉혔다. 

"널 대할 때마다 감탄하곤 한다. 특히 나이에 비해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해박한 지 

식과 한번 본 것은 절대로 잊지 않는 네 기억력에 대해서 말이다." 

"과찬입니다." 

"하하! 소진. 널 볼 때마다 어떤 한 인물이 떠오르곤 한다." 

부금진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누구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무영(無影) 고검령이란 인물이다." 

부금진의 안색이 미묘하게 변했다. 

"무영신산 중에서 무영 고검령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알고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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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금진은 고개를 슬며시 숙이며 말했다. 

"그는 아주 신비한 인물이에요. 한데 용대인은 그를 만나보신 적이 있나요?" 

"만나보지 못했다. 하지만 들은 바에 의하면 그의 능력은 불가사의하다고 하더군. 

그 자는 무엇이든 한번 본 것은 절대로 잊지 않는 놀라운 두뇌와 분석력을 지녔다고 

한다. 소진 너처럼 말이다." 

"......." 

부금진의 눈에 복잡미묘한 빛이 어렸다. 장천린은 이상한 듯이 물었다. 

"무슨 걱정이라도 있느냐? 안색이 좋질 않구나." 

"아, 아닙니다." 

부금진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이때, 마차 옆으로 원계묵이 다가섰다. 

"형님." 

"음?" 

장천린은 주렴을 들추었다. 

"무슨 일이냐, 계묵?" 

"형님, 조그만 문제가 생겼습니다. 행렬의 앞쪽에 심한 상처를 입은 여인이 발견되 

었습니다." 

"여인?" 

여인이라고 하기에는 아직 소녀 티가 남아 있었다. 나이는 십 육칠 세 가량 되어 보 

였는데 대단히 화려한 옷을 입고 있었다. 게다가 각종 장신구를 옷과 머리에 달고 

있어 범상치 않은 신분이라는 것을 느끼게 했다. 

용모 또한 빼어난 미모였다. 다만 안색이 백짓장처럼 창백한 채 입술도 말라 갈라 

터져 있었고, 전신이 피로 물들다시피 한 상태였다. 

여인은 마차 안으로 옮겨졌다. 

"지독한 상처입니다. 예리한 병기에 당한 것 같습니다." 

원계묵은 눈살을 찌푸리며 설명했다. 

"게다가 상처 입은 몸으로 먼 거리를 걸어와 탈진상태입니다." 

장천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지시했다. 

"소진, 네가 상처를 살펴보거라." 

"네, 용대인." 

부금진은 여인의 상처를 살펴보고 맥을 짚어 보았다. 잠시 후 그는 고개를 들며 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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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상은 그리 심하지 않습니다. 다만 피를 너무 많이 흘린 것 같습니다." 

"생명에는 지장이 없겠느냐?" 

"살릴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상당기간 동안 치료해야 합니다." 

"그럼 응급조치부터 취하거라." 

"알겠습니다." 

부금진은 품속에서 몇 개의 약병을 꺼내 늘어놓은 후 여인의 상처를 치료하기 시작 

했다. 상처를 치료하려면 피에 절어있는 옷부터 벗겨야 했다. 부금진은 본래 여인이 

라면 꺼려하는 성품이었다. 그래서 행동이 몹시 느렸다. 

잠시 후, 여인의 상의를 절반쯤 벗긴 채 상처를 살펴보던 그는 안색을 굳히고 말았 

다. 

그의 눈은 여인의 흰 겨드랑이 사이에 멎어 있었다. 

겨드랑이 한가운데. 정교하기 그지없는 장미 문신이 새겨져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 

도 피처럼 붉은 혈장미 문신이었다. 

비록 눈에 잘 뜨이지 않는 신체의 은밀한 부위에 새겨져 있었으나 그 문신은 시선을 

빨아들일 듯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 

부금진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다행히(?) 그는 장천린으로부터 등을 지고 있었으므로 

표정을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이때 원계묵이 힐끗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형님, 이 여인은 옷차림으로 볼 때 여진족인 것 같습니다." 

장천린은 의외라는 느낌이 들었다. 

"이 여인은 누구에겐가 쫓기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장천린은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단정할 수 있나?" 

"이곳은 막남땅에서도 가장 동쪽입니다. 여기서 동으로 오십여 리만 가면 바로 여진 

의 땅입니다." 

"자네 생각은?" 

원계묵은 무뚝뚝하게 말했다. 

"깨어나는 대로 약간의 식량과 물, 말 한 필을 주어 보내는 것입니다. 굳이 저 여인 

으로 인해 쓸데없는 충돌을 빛을 필요는 없으니까요." 

문득 부금진이 고개를 홱 돌리며 말했다. 

"원형님, 이 여인은 절대 안정이 필요합니다. 지금 내쫓으면 결코 살아날 수 없습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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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금진의 음성은 약간 떨렸다. 다소 흥분한 어조였다. 

원계묵은 눈살을 찌푸리며 일축했다. 

"소진, 우리는 더 이상 이곳에서 지체할 필요가 없다." 

부금진은 벌떡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저에게 맡겨 주십시오. 제가 알아서 치료하겠어요. 행렬에 지장이 없게 하면 되지 

않습니까?" 

그는 여인을 안아 들며 매서운 눈으로 원계묵을 노려보았다. 

"일도 중요하지만 인간의 생명은 귀중한 것입니다. 살모사 형님." 

그는 마차에서 뛰어내리더니 찬바람이 일 정도로 몸을 돌려 대열의 후미 쪽으로 사 

라졌다. 

갑작스런 그의 행동에 원계묵은 그만 멍한 표정이었다. 장천린은 대소를 터뜨렸다. 

"핫핫! 계묵. 이번엔 자네가 한 방 얻어맞았구나." 

원계묵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장천린은 의미심장한 표정 

으로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소진에게 저런 면이 있는 줄은 몰랐는데." 

원계묵도 쓰디쓰게 웃으며 말했다. 

"저도 동감입니다." 

저녁이 되자 행렬은 초지에 당도하여 짐을 풀었다. 

모든 행동이 일사불란하게 이루어졌다. 초지에 원형으로 여러 개의 빠오가 설치되고 

야숙할 준비가 착착 이루어 졌다. 백살대는 물론 낭인무사들은 각각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알아서 행동하여 잠깐 동안에 모든 준비가 끝났다. 

초지에는 부드러운 풀이 자라 있었으며 나무들도 꽤 우거져 있었다. 작지만 연못까 

지 있었으므로 대상들이 쉬어가기에 알맞은 장소였다. 

백살대와 낭인무사들은 저녁을 먹고 빠오 안이나 풀밭에 드러누워 휴식을 취하기 시 

작했다. 여러 날 행진을 했으므로 무공을 익힌 자들이라 해도 노곤하기는 마찬가지 

였던 것이다. 

여인은 힘없이 눈을 떴다. 

긴 속눈썹이 조금씩 들려지더니 호수처럼 크고 아름다운 눈동자가 몇 차례 깜박였다 

. 그녀는 시야가 흐릿한 듯 한동안 멍한 표정이다가 갑자기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눈앞에 여러 사람들의 낯선 얼굴이 보였던 것이다. 

부금진은 부드럽게 말했다. 

"걱정 마시오. 이곳은 안전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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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은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녀가 누워있는 곳은 아늑하게 꾸며진 빠오 안 

이었다. 

"소녀는......." 

그녀는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 했다. 부금진은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움직이지 말아요, 소저는 지금 상처가 심해요." 

여인은 힘없이 도로 누워야 했다. 부금진의 가볍게 누르는 힘도 당해낼 수가 없었다 

. 부금진은 친절하게 물었다. 

"몽고어를 합니까?" 

"조금." 

여인의 얼굴에 수줍음이 어리자 더욱 앳되어 보였다. 

"저어... 소녀는." 

이때였다. 반송이 빠오 안으로 들어서며 황급히 말했다. 

"용대인님, 지금 수십 기의 기마대가 달려오고 있습니다." 

그 말에 소녀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장천린은 소녀를 힐끗 본 후 몸을 일으켰다. 

"나가 봐야 겠군. 소진, 너는 이 소저를 숨기도록 해라." 

부금진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용대인." 

초원에 어둠이 밀려들고 있었다. 잠깐 사이에 대황원 전체가 황갈색으로 물들었다. 

두두두두......! 

지축을 뒤흔드는 말발굽소리가 점점 크게 들리더니 수십 기의 인마가 초지에 닥쳐들 

었다. 기마인들은 모두 양피옷을 입고 있었는데 한결같이 용맹한 모습이었다. 

두 눈은 불덩이처럼 이글거렸으며 체격도 우람한 자들이었다. 그들은 인솔하는 자는 

두 명으로, 털빛이 붉은 적토마(赤土馬)를 타고 있었다. 

우측에 청년이 앉아 있었다. 그는 어깨에 가죽 피풍을 걸쳤으며 허리에 소검(小劍) 

을 차고 있었다. 네모진 각진 얼굴에 양쪽 관자놀이까지 길게 뻗은 특이한 눈을 지 

니고 있었다. 피부는 구릿빛이었고 체격 또한 당당했다. 

그는 은연중 만인을 압도하는 기풍과 한번 보면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은 신비한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비쩍 마른 체격에 머리칼이 붉은 노인이 앉아 있었다. 괴이하게도 그의 

눈은 온통 흰자위 뿐으로 눈알을 움직일 때마다 섬뜩한 느낌을 주었다. 

"......." 

노소(老少) 두 사람은 원형으로 설치된 빠오 앞에 멈춘 채 마상에서 내릴 생각을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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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빠오 사이로 한 청년이 유유히 걸어나왔다. 그의 뒤에는 사오 명의 인물이 따르고 

있었다. 

청년, 즉 장천린은 기마인들 앞으로 걸어오더니 적토마를 탄 노소를 올려보며 담담 

히 물었다. 

"귀하들은 누구시오?" 

각진 얼굴의 청년은 적토마 위에서 장천린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기다란 눈이 더욱 

가늘어졌다. 

"그대가 이곳 대상들의 대표인가?" 

청년의 음성은 착 가라앉아 있었다. 장천린은 부드럽게 말했다. 

"그렇습니다." 

청년은 적토마 위에서 뛰어 내렸다. 그의 체격은 당당했다. 그러나 장천린도 훤칠한 

신장을 지니고 있어 마주 선 두 사람은 별 차이가 없어 보였다. 

'......!' 

청년이 마주 선 순간. 장천린은 이제까지 한번도 느끼지 못한 충격을 받았다. 갑자 

기 숨이 턱 막힐 듯했던 것이다. 청년에게서는 만인을 압도하는 기세가 흘러나온 것 

이다. 

"본인은 과이심(科爾沁)의 황태극(皇太極)이오. 귀하에게 물어 볼 말이 있어 왔소." 

'황태극!' 

장천린은 심장이 부르르 격동하는 것을 느꼈다. 비록 처음 들어본 이름이었으나 충 

격적인 느낌을 받은 것이다. 

이 만남. 

삭막한 막남몽고의 대초원 한 귀퉁이에서 만난 운명의 조우(遭遇)야 말로 대풍운의 

서막을 예고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장천린과 황태극! 

장차 평생을 두고 싸우게 될 일세영웅과 대효웅의 만남이었던 것이다. 

황태극은 훗날 찬란했던 대명제국을 무너뜨리고 한족의 땅에 새로운 제국을 건설하 

게 될 역사의 주인공이었던 것이다. 훗날 그는 청조(淸朝)를 건설하여 청태종(淸太

宗)이 된 인물이었다. 

하늘은 알았을까? 

아니, 신은 알고 있었을까? 

장차 대풍운의 역사를 일궈낼 두 인물의 만남은 이렇듯 대황원의 한 가운데에서 아 

무런 예고도 없이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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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날 청황제(淸皇帝)가 될 청년 황태극도 중원의 대영웅이 될 장천린과의 첫만남에 

서는 미처 운명의 변수를 예측하지 못하고 있었다. 

과이심부(科爾沁部). 

임단한의 찰합이부와 함께 막남지방에서는 가장 큰 부족이다. 

찰합이부가 임단한의 영도 아래 똘똘 뭉쳐 누르하치와 대치하는 것에 비한다면 과이 

심부는 누르하치와는 다소 우호적인 입장이었다. 

과이심부는 대립보다는 화친정책을 써서 누르하치의 후금(後金)에 정기적으로 조공 

을 바침으로써 전화(戰禍)를 피하고 있었다. 

장천린은 청년 황태극을 마주보며 담담히 물었다. 

"무슨 일로 찾았소이까?" 

그의 음성과 태도에 평범치 않은 무게가 실려 있었다. 황태극은 기다란 눈에 광채를 

띤 채 장천린을 직시했다. 비로소 그는 상대방이 보통이 아님을 느낀 듯 자세히 살 

펴보는 듯했다. 

그는 가슴이 진탕하는 것을 느꼈다. 

'일개 상인이 아니다. 이 자는.' 

그는 태도를 바꾸어 정중한 어조로 말했다. 

"본인은 여진 출신의 한 소녀를 찾는 중이오." 

장천린은 내심 중얼거렸다. 

'그 소녀를 말하는 것이군.' 

이미 예상한 터라 그는 태연히 반문했다. 

"여진의 소녀라니, 무슨 말씀이시오?" 

황태극의 눈썹이 꿈틀하고 움직였다. 그러나 여전히 차분한 어조로 설명했다. 

"그녀의 이름은 산혜(珊慧)요. 과이심부 출신으로 수년 전 여진의 귀족인 여리표(黎

理豹) 대인의 양녀로 입적했었소. 하지만 그 계집은 일찍이 한족의 간세(間世:첩자) 

로 여진과 과이심부의 기밀을 정탐하고 있었소. 그러던 중 며칠 전 과이심부를 방문 

했던 여리표 대인을 죽이고 달아났소." 

장천린은 묵묵히 듣기만 했다. 

"그 계집은 상처가 심해 혼자 힘으로는 사막지대를 빠져 달아날 수 없는 상태였소. 

또한 이곳에는 달리 숨을 곳도 없소. 그래서 혹시 귀공의 대상행렬이 그녀를 발견해 

구해준 게 아닌가 해서 찾은 것이오." 

장천린은 겉으로는 담담한 표정이었으나 내심 저으기 놀라고 있었다. 

'그 소녀가 간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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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일은 없었소이다." 

황태극의 안면이 갑작스럽게 싸늘해 졌다. 

"그럼 본인의 수하들로 하여금 빠오를 수색케 해도 좋겠소?" 

장천린도 녹녹하지는 않았다. 

"본인이 부인하는데도 굳이 수색하겠다는 것은 본인의 말을 불신함이 아니오?" 

황태극은 대소를 터뜨렸다. 

"핫핫핫! 한족은 거짓말을 잘한다. 고로 나는 귀하의 말을 믿을 수가 없다." 

황태극은 장천린의 대답은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옆의 적발노인을 향해 말했다. 

"적리사부(赤狸師父), 수하들을 시켜 빠오를 뒤져보십시오. 만일 거부하면 살상해도 

좋습니다." 

적발노인은 무심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알았소이다." 

그는 등뒤의 기마대를 돌아보며 차갑게 명령했다. 

"뒤져라!" 

"넷!" 

기마인들은 일제히 말을 탄 채 빠오를 향해 진입하려 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내 멈 

추어야 했다. 

보라! 

황혼이 스러지고 어둠이 짙게 깔려있는 주위에 기척도 없이 나타나는 그림자들을! 

그들은 백살대와 백 명에 달하는 낭인무사들이었다. 

그들 이백여 명이 기마인들을 빈틈없이 포위하니 가히 숨통을 끊을 듯 긴장감이 고 

조되었다. 

맨 앞에서 반송이 앞으로 나서며 탁성으로 외쳤다. 

"지금부터 한 발자국이라도 움직이는 자가 있다면 가차없이 죽여라!" 

"......!" 

황태극은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이백여 명의 장한들이 하나같이 일급 

고수들이라는 것이었다. 

'으음! 일개 상인이 이렇게 많은 고수들을 거느리다니?' 

그는 장천린을 노려보았다. 장천린은 그의 눈길을 피하지 않고 받았다. 그의 좌우에 

는 원계묵과 담오가 목상처럼 시립한 채 서있었다. 

황태극은 눈썹을 꿈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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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들 두 명은 초일급 고수들이다.' 

상황은 점점 예상치 않은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장천린은 입가에 한 가닥 미소를 띄운 채 말했다. 

"본인이 수색을 불허하는 데는 이유가 있소이다. 그것은 이 근처에 비적들이 횡행하 

기 때문이오. 상인인 나로서는 조심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오." 

황태극은 냉소했다. 

"그럼 우리를 한낱 비적 따위로 본단 말인가?" 

장천린은 여유있게 말했다. 

"상인은 외지에 나오면 그 누구도 믿지 않는 법이오." 

황태극은 주위를 둘러본 후 차갑게 말했다. 

"그대들이 수색을 허용치 않는다면 이 막남지방을 무사히 빠져나가지 못할 것이다." 

장천린은 움찔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다소 우려하는 모습이었다. 

황태극은 말투를 고쳐 다소 부드럽게 말했다. 

"그대가 정 못 믿는다면 무기를 맡기고 수색하겠다." 

장천린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정히 그렇다면 귀공을 한번 믿어보겠소이다." 

그는 주위를 향해 손을 저었다. 그러자 백살대와 낭인무사들은 뒤로 물러나며 길을 

터 주었다. 

황태극은 적발노인에게 말했다. 

"적리사부, 무기를 이곳에 놓고 수색하도록 하시오. 그리고 빠오 밖으로 빠져나가는 

자들이 있는지도 살피시오." 

"알겠소이다." 

적발노인은 기마인들에게 몇 가지 명을 내렸다. 기마인들은 병장기들을 한 곳에 모 

아 쌓아놓은 후 대열을 나누어 갈라졌다. 한 무리는 빠오로 진입하여 수색하기 시작 

했고, 한 무리는 뒤로 물러나 빠오를 감시했다. 

장천린의 곁으로 부금진이 다가왔다. 그는 전음으로 보고했다. 

'용대인, 잘 숨겨 두었습니다.' 

장천린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그는 부금진의 기지를 잘 알고 있기에 불안 

감을 느끼지 않았다. 

부금진은 가늘게 한숨을 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다 적발노인을 발견한 그는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지고 말았다. 

마침 적발노인도 그를 바라보게 되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정면으로 부딪쳤다. 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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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금진을 보고도 아무런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부금진은 달랐다. 그의 안색은 굳어지다 못해 횟빛이 되었다. 

"아는 사람이냐?" 

장천린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물었다. 부금진은 당황한 음성으로 더듬거렸다. 

"아... 아닙니다. 저 노인의 모습이 워낙 특이해서요. 제가 소문으로만 들었던 인물 

과 너무도 흡사합니다." 

"누구를 말하는 것이냐?" 

"사존(邪尊)... 적리휼(赤狸恤)이란 인물입니다." 

"적리휼?" 

장천린은 황태극이 노인을 적리사부라고 부른 것을 상기하고 질문을 던졌다. 

"그는 어떤 인물이냐?" 

부금진은 긴장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는 여진족 출신으로 사상 최고의 고수입니다. 몽고, 아국, 여진은 물론 오사장과 

금천(金川) 일대를 통틀어 무적의 고수입니다. 지난 오십 년 간 그 자의 손 아래 

십초를 넘긴 고수는 아무도 없습니다. 또한 그 자의 손에 사라져간 일류고수만 해도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부금진은 계속 적발노인을 살펴보며 말했다. 

"심지어는 북해의 제왕인 숙야염조차 꺼려하는 무서운 고수입니다." 

장천린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빠오를 수색하던 기마인들이 하나둘 빠져 나왔다. 그들은 모두 고개를 흔들었다. 샅 

샅이 수색했지만 아무도 산혜라는 여인을 발견하지 못한 것이었다. 

이렇게 되자 황태극은 깨끗이 단념을 한 듯 장천린을 향해 손을 모았다. 

"이거 오해를 한 것 같소. 죄송하게 되었소이다. 귀공." 

장천린은 빙긋 웃으며 마주 포권했다. 

"별 말씀을. 도리어 본인이 귀공을 비적으로 모욕한데 대해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황태극의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가 그어졌다. 그는 적토마에 뛰어 올랐다. 자세를 추 

스르던 그는 생각난 듯 물었다. 

"참, 실례지만 귀공의 존함은 어찌 되시오?" 

"용백군이라 하오." 

"내 기억해 두리다." 

황태극은 말고삐를 잡으며 호쾌한 음성으로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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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리사부! 갑시다." 

그는 박차를 가했다. 적토마는 힘찬 울음소리와 함께 두 발을 번쩍 치켜들었다가 앞 

으로 내달았다. 뒤이어 기마대는 지축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를 남긴 채 대황야의 어 

둠 속으로 빨려들 듯 사라져 갔다. 

짧은 만남. 그것은 그렇게 끝났다. 

장천린은 황태극이 사라진 후에도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황태극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실로 보통인물이 아니었다. 아니, 이제껏 

그가 만난 어떤 인물보다도 출중한 기도를 지닌 인물이었다. 

'황태극, 그 자는 제왕의 상을 지닌 인물이다.' 

왠지 가슴이 답답해졌다. 

"형님, 그만 들어가시지요." 

원계묵의 권유에 그는 마지못한 듯 돌아서 빠오를 향해 걸어가다가 물었다. 

"소진, 어디다 숨겨 두었느냐?" 

부금진은 씩 웃었다. 

"헤헤! 가보시면 알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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