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은 칼 끝에 지고 제1부 거상열전편 제3권
▣등장인물
◈장천린(蔣天麟) - 강남 무창의 동정호반에서 신선루를 경영하던 젊은 상인으로 정
인 취옥교의 의문의 배신과 신산 제갈사의 계략에 빠져 죽음의 위기에 처하게 된다.
죽음의 나락에서 되살아나 용백군이라는 전도 유망한 청년상인으로의 새 인생을 시
작하게 되는데... 사랑을 되찾고 누르하치의 음모에서 나라를 구하려는 그의 앞날은
과연.......
◈취옥교(翠玉嬌) - 장천린의 정인으로 신선루를 운영하던 절세의 미인. 천린으로부
터 청혼을 받은 꿈 같은 날 어둡기만 한 과거로부터의 부름이 있게 된다. 사랑을 위
해 배신할 수밖에 없는 그녀의 파란만장한 운명... 조화성의 명에 따라 금백만을 살
해하고 천린의 곁을 떠나는데.......
◈원계묵(元桂默) - 마도(魔刀)라 불리워지는 당대 도법의 일인자. 조화성의 살수
모용초에 의해 연인 손미로부터 배신당하고 사부인 만승금도 도담후가 살해당한다.
원수를 갚기 위해 백살대를 조직하여 필살의 의지를 불태우던 중 용백군이라는 젊은
상인을 만나게 되는데.......
◈모용초 - 조화성의 살수이자 마교십삼사의 일원. 절세의 미남자로 여인을 유혹하
여 이용하는 데에 아무런 죄의식을 갖지 않는다. 무정도(無情刀)라는 별호만큼이나
냉정하고 잔인하지만 여인에 대한 유별난 증오심에는 깊은 사연이 있었으니.......
◈부금진(符錦眞) - 피리를 즐겨 부는 미소년으로 약칭으로 소진(少眞)이라고도 불
리워진다. 영물에 가까운 흰 앵무새 백아를 데리고 다니며 비도술 및 의술에 일가를
이루었다. 신비에 싸인 인물. 그의 과거를 정확히 아는 자는 아무도 없다.
◈단위제(檀偉帝) - 산동성 제형안찰사사 소속으로 형부도독(刑府都督)이자 동창의
대영반. 청렴강직하며 흉악무도한 범인을 체포하는 데 달인의 솜씨를 지니고 있으며
, 미궁(迷宮)에 빠진 사건을 처리하는 전문가 중의 전문가.
◈반송 - 해적선 검은 바람에 의해 죽을 고비에 처했으나 용백군의 도움으로 살아난
다. 화포인 진천뢰를 제작할 수 있는 인물로서 천월도법의 달인. 담오 - 북방의 고
랍특성 낭인시장에서 몸값 삼십만 냥에 자신의 인생을 내놓은 무사. 돈을 위해 몸을
파는 아내 아랑을 저주한다. 용백군과의 조우 이후 돈과 세상을 함께 저주하는 그
의 인생이 뒤바뀐다.
◈태진왕(太眞王) 주익적(朱翊 ) - 신종(神宗) 만력제(萬歷帝)의 이복동생으로서
어지러운 황실을 구하기 위해 뜻 있는 충신들을 규합하고 변방을 강화하였다. 황실
의 특무기관인 금의위(錦衣衛)와 동창(東廠)의 실세를 쥐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백연연(白娟娟) - 태진왕을 마음 속 깊이 사모하고 있는 지혜로운 여인. 환관의
음모에 의해 사약을 받고 죽은 충신 백시열(白時悅)의 딸로 태진왕에 의해 목숨을
구함 받고 태진궁의 시비로 살아간다.
바로북 99 3
제14장 남국(南國)의 유혹
단위제와 운표는 처소에서 바둑을 두고 있었다. 국면은 일방적으로 단위제가 우세했
다. 흑대마가 궁지에 몰려 회생 가망이 없었다. 그러나 운표는 고집스러웠다. 대세
가 완전히 기울었음에도 불구하고 돌 던질 생각은 않고 끙끙대며 수를 세고 있었다.
단위제는 놀리듯이 말했다.
"운표, 그러다 머리카락 빠진다. 이제 그만 돌을 던지지 그래."
"흥!"
운표는 코웃음쳤다. 그는 들은 척도 않고 계속 바둑판만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쯧쯧! 그저 고집은 황소 같아 가지고서."
단위제는 따분한 듯 길게 하품했다. 운표는 벌써 이 각이 넘도록 장고(長考)했다.
단위제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럼 실컷 고민해 보게. 허헛! 난 산책이나 하고 오겠네."
그는 자리를 떨치고 일어났다. 후덥지근한 기후가 아직 적응이 안되어 땀이 줄줄 흘
러내리고 있었다.
단위제는 정원을 거닐던 중 하나의 문을 발견했다. 문을 넘어가 보니 그곳은 장원의
후원이었다. 그런데 야자수가 울창하게 우거져 있어 마치 밀림을 보는 듯했다. 중
원의 일반 저택에서 흔히 보는 후원과는 완전히 틀린 분위기였다.
비는 여전히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고 주위는 어둑어둑했다.
'정말 특이하군. 중원은 한창 겨울인데 이곳은 이토록 덥다니.'
단위제는 색다른 감상에 젖은 채 걸음을 옮겼다.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그는 꽤
멀리까지 걸었다.
후원은 바로 밀림과 연결되어 있었다. 특별히 담장이 마련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얼마나 걸어갔을까?
"......!"
밀림 속에서 은밀히 움직이는 그림자가 있었다. 인영은 쾌속하게 어딘가로 달려가고
있었다. 단위제는 호기심이 치밀어 인영의 뒤를 밟기 시작했다.
인영은 신법이 영활하기는 했지만 단위제의 추적술을 따돌릴 수는 없었다. 단위제는
나무에 몸을 숨겨가며 은밀히 인영의 뒤를 추적했다.
얼마쯤 갔을까? 인영이 멈추어 섰다. 단위제는 비로소 그의 모습을 보았다. 그 자는
삼십여 세 정도 되어보이는 장한이었다.
단위제에게는 남이 따를 수 없는 몇 가지 장기가 있다. 그 중 하나가 한 번 본 사람
은 절대로 잊지 않는다는 것이다. 설사 슬쩍 지나쳤다 해도 절대로 잊지 않았다. 그
바로북 99 4
특이한 기억력은 그가 관부에서 형부도독으로 이름을 날리게 했던 중요한 원인 중
의 하나였다.
'저 자는 동방사성과 함께 해구로 마중 나왔던 무사들 중 한 명인데?'
단위제는 사나이를 바라보며 가슴 속에 의문이 일어났다.
'무슨 일로 이렇게 은밀히 행동한단 말인가?'
단위제는 형부도독 출신이다. 그는 아주 작은 하나의 단서만으로도 그 속에 숨어있
는 실체를 추리해내는 타고난 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사나이의 태도에서 그는 수상
한 냄새를 맡았다.
이때, 숲이 흔들리더니 인영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놀랍게도 그 자는 왜인이었다
. 허리에 장도를 차고 어깨에 풀을 먹인 옷을 걸친 것만으로 금방 알아볼 수가 있었
다.
왜국인은 유창한 한어로 물었다.
"어찌 되었소?"
"지금 탁노야와 만나고 있소이다."
"그 자의 모습은 상세히 그렸소?"
"염려 마시오. 석 장을 각기 다른 각도에서 그렸으니 틀림없을 것이오."
사나이는 득의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이미 그 자의 모습으로 분장시키고 목소리까지 연습하고 있소. 오늘 밤 안으로 용
백군과 똑같은 인물이 탄생할 것이오."
'......!'
나무 뒤에 숨어 엿듣고있던 단위제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때 왜국인의 웃음
소리가 들렸다.
"흐흐흐, 잘됐군. 사흘 후 공격하겠소. 계획대로 싸움이 시작되면 못 이기는 척하고
도망가겠소."
왜국인의 음성이 낮아졌다. 단위제는 청력을 기울였다.
"...탁일비가 황금이 숨겨져 있는 비도를 그에게 넘겨주면 계획대로 일을 시작하겠
소."
사나이는 자신있게 말했다.
"후후... 한 점의 차질도 없을 것이오."
"용백군을 확실히 처리하시오. 그놈의 곁에 있는 놈은 보통이 아닌 듯하오."
"염려 마시오. 동방영주는 빈틈없는 분이오."
사나이의 말에 단위제는 충격을 느꼈다.
'동방영주라고?'
5 바로북 99
왜국인의 음침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흐흐! 지금쯤 구룡상선에 남아있던 놈들은 한 놈도 남김없이 황천으로 갔을 것이오
."
'뭐라고!'
단위제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 바람에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직이고 말았다.
"누구냐!"
사나이는 버럭 외치며 그가 있는 쪽을 향해 몸을 홱 돌렸다.
'이런, 실수다.'
단위제는 품 속에서 작은 쇠구슬 하나를 꺼내 반대편 숲을 향해 회선비류(回旋飛流)
의 암기수법으로 던졌다.
스스스슷!
나뭇잎 스치는 소리가 반대방향에서 일어났다. 사나이는 그쪽으로 벼락같이 신형을
날렸다.
번쩍!
숲에 떨어진 그는 검을 쾌속무비하게 휘둘렀다.
캬악! 하는 비명과 함께 무엇인가 바닥으로 떨어지며 선혈을 뿌렸다. 그것은 한 마
리의 야조(夜鳥)였다.
"쯧! 새였군!"
사나이는 검을 거두며 왜인을 향해 돌아섰다.
"자, 그럼 사흘 후에 봅시다."
그는 신형을 날려 오던 길을 향해 달려갔다. 그가 사라지자 왜인도 지체없이 숲 속
으로 모습을 감추어 버렸다. 단위제는 마음이 급해졌다.
'어서 이 사실을 알려야겠다.'
그는 신형을 날려 숲을 가로질러 갔다. 그런데 겨우 십여 장쯤 달렸을까?
"후후후......! 역시 쥐새끼 한 마리가 숨어 있었군!"
허공에서 뚝 떨어져 앞을 가로막는 자가 있었다. 그 자는 방금 전 사라졌던 왜국 무
사였다.
단위제는 내심 크게 놀랐으나 백전노장답게 태연하게 말했다.
"무슨 소리하는 거요? 나는 탁노야의 손님으로 산책하는 중이오. 그런데 당신은 누
구요?"
왜국인의 눈에서 독사처럼 새파란 안광이 뿜어져 나왔다.
"변명해야 소용없다. 난 바보가 아니다."
6 바로북 99
그는 앞으로 한 걸음 다가오며 으시시한 음성으로 말했다.
"설사 그 말이 사실이라 해도 만사 안전이 제일이다. 조금이라도 수상한 놈은 제거
해 버리겠다!"
창! 하는 소리와 함께 장도가 불을 뿜으며 뽑혀졌다. 장도 끝에서 푸른 도기가 음산
하게 뻗어나왔다. 단위제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무서운 도기다!'
단위제는 몰랐다.
눈 앞의 왜인이야말로 보통인물이 아니었다.
세천상유(細川常有)란 이름을 가진 그는 왜국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무서운 고
수로 신음류(新陰流)의 서열 이 위에 속한 인물이었다. 일명 도귀(刀鬼)란 별호를
지닌 작자였다.
어느덧 비는 그치고 나뭇가지 사이로 으스름한 초승달빛이 잘게 부서져 내리고 있었
다. 폭이 좁고 긴 장도에 반사되는 달빛은 찌르듯이 단위제의 목줄기를 압박했다.
장천린은 으리으리한 방 안에 앉아 있었다.
그곳은 그를 위해 특별히 배정된 곳으로 그 규모나 장식의 수준이 황궁에 못지 않을
정도로 고급스러웠다.
장천린은 자단목 의자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는 이번 일이 결코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동방사성의 말 대로라면 석정일랑과 청산의명이 이끄는 왜국 무사들의 숫자는 근 오
백 명에 달할 것이다. 게다가 그들의 무공은 결코 얕볼 수준이 아니다. 특히 석정일
랑과 청산의명은 왜국에서도 첫손가락을 꼽는 도의 달인들이었다.
그는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들의 능력으로 미루어 쉽게 탁일비를 죽일 수 있었다.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는
탁일비가 숨겨놓은 황금 때문이다.'
한편, 원계묵은 방 안에 서서 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는 지금 다른 생각에 골
몰해 있었다.
그는 타고난 무골(武骨)이었다.
무골 특유의 투지가 남다른 그는 청풍류(靑風流)의 대가 석정일랑과 신음류(新陰流)
의 달인인 청산의명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과 도법을 결해보고 싶다는 충동이 일
어나고 있었다. 왜국의 도법과 자신의 수라구류도를 비교해 보고 싶은 것이었다.
둥.......
어디선가 해시(亥時)를 알리는 둔중한 북소리가 울렸다.
"형님, 밤이 늦었는데 이만 주무시지요."
7 바로북 99
원계묵은 벽에 세워 두었던 장도를 잡고 문 쪽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저는 운표에게 가보겠습니다. 백살대를 점검해야 하니까요."
"그러게, 아우."
장천린은 그가 나간 후에도 계속 사색에 잠겼다. 그는 지금까지 겪은 정황들을 하나
하나 분석하며 정리해 나갔다. 갑자기 그의 안색이 변했다.
'어쩌면!'
그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내가 이곳에 온 것은 탁일비를 돕기 위한 것이다. 석정일랑과 청산의명이 그 사실
을 모를 리가 없다. 그런데도 그들이 움직이지 않는 것은... 내가 오기를 기다렸다
는 것이 아닌가?'
이때였다. 누군가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사전에 문 두드리는 소리조차 없었
다.
방 안으로 들어온 것은 한 명의 소녀였다. 십 칠팔 세쯤 되어 보였다. 비록 아직은
앳되긴 했지만 눈이 번쩍 뜨일만한 미소녀였다. 특히 호수처럼 커다란 눈망울이 인
상적이었다. 미소녀는 화복(華服)를 입고 한 손에는 비파(琵琶)를, 또 한 손에는 옥
갑을 들고 있었다.
"그대는 누구지?"
장천린은 눈을 가늘게 하며 물었다. 미소녀는 살짝 무릎꿇으며 공손히 말했다.
"오늘 밤 대인을 시중들러 왔사옵니다."
장천린은 눈살을 찌푸렸다. 내심 짐작되는 것이 있었다.
"동방사성이 보냈느냐?"
"네."
소녀의 순순한 대답에 그는 고개를 저었다.
"마음은 고맙지만 난 그런 취미가 없으니 돌아가거라."
미소녀의 눈에 이채가 반짝였다.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곧 입가에 달콤한 미
소를 지으며 말했다.
"보낸 분은 동방사성님이지만 여기에 온 것은 소녀입니다."
"......?"
"대인께서 소녀를 거절하심은 소녀에게는 크나큰 치욕입니다."
장천린은 새삼 소녀를 바라보았다. 의외로 그녀의 언행은 품위가 있었고 세련미가
넘치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대 이름은 무엇인가?"
"동방옥(東方玉)이라 합니다."
8 바로북 99
그는 흠칫하며 다시 물었다.
"그럼 동방사성과?"
"소녀의 오라버님입니다."
장천린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놀랍군. 어찌하여 자신의 누이동생을 타인에게 시중들게 하는지 내 상식으로는 도
저히 이해할 수가 없군!"
장천린의 말에 동방옥은 달콤한 미소를 지었다.
"그건 대인께서 모르시는 말씀입니다. 저희 지방에서는 가문의 여식이 영웅을 모시
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는 풍습이 있답니다. 소녀는 오늘 저녁 먼발치서 대인의 모습
을 뵙고 절로 연모하는 마음이 일어나 오라버니의 청을 수락했사옵니다."
실로 대담한 고백이었다. 장천린은 이곳의 풍습에 관해 알지 못했다. 그래서 동방옥
의 설명에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해남의 풍습이 모두 그렇단 말인가?"
동방옥은 생긋 웃었다.
"그렇지는 않사옵니다. 일부의 종족에서만 내려오는 풍습입니다."
장천린은 어느새 그녀의 말에 끌려들고 있었다.
"여인의 정절은 고귀한 것이거늘, 타인에게 시중을 들고도 혼인하는 데 아무 흠이
되지 않는단 말인가?"
동방옥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한 분의 영웅을 모시면 그 여인은 절대로 다른 사람과 맺어질 수 없습니다."
그녀의 말인즉, 시중을 들게 되면 그 남자와 영원히 살아야 한다는 것이 아닌가? 장
천린은 그저 어이가 없어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동방옥은 미소 지으며 설명을
계속했다.
"소녀가 태어난 곳은 해남에서도 가장 남쪽에 있는 곳이에요. 그곳의 여인들은 모두
소녀와 같은 생각을 갖고 있답니다. 물론 모실만한 분을 발견하지 못하면 부족의
청년 중에서 한 사람과 혼인을 하지요. 하지만 일단 타족의 영웅과 결합하게 되면
다시는 혼인할 수가 없어요. 만일 그 분이 한 번 취한 후에 버리게 되면 그 여인은
평생 홀로 살아야 합니다. 저희 부족은 정절을 최상의 가치로 생각하니까요."
장천린은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남자 측에서 거절할 수도 있지 않은가?"
"그렇게 되면... 길은 한 가지밖에 없어요. 명예를 지키기 위해 자결할 수밖에요."
동방옥은 입술을 깨물며 덧붙였다.
"하지만 지금까지 거절당한 경우는 한 번도 없었어요."
9 바로북 99
"......."
장천린은 그저 아연할 뿐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 밤 자신을 모시겠다는 것이
아닌가? 물론 강요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말은 협박도 이 정도면 대단한 협
박이었다.
장천린도 남자였다. 더구나 그는 고리타분한 군자풍의 인물은 아니었다. 특히나 아
름다운 여인이라면 어찌 품고싶지 않겠는가? 취옥교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그는
상당한 풍류객이었다.
동방옥은 사뿐사뿐 다가오며 말했다.
"소녀는 결코 대인의 가정에 폐를 끼치지는 않을 거예요. 오늘 밤 이후 다시 뵐 수
없다 해도 결코 원망하지 않겠어요."
장천린은 쓴웃음을 지었다.
"오해하지 마라. 나는 아직 결혼하지 않았다."
동방옥의 눈이 반짝 빛났다.
"믿어지지 않는군요. 용대인 같은 분이 아직도 홀몸이라니."
장천린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나는 아직도 이해할 수가 없다. 낯선 남자의 품에 안기려는 그대들의 풍습을 말이
다."
동방옥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대인께서 보시기에는 이상할지 몰라도 저희들에게는 조금도 이상하지 않아요. 지난
수백 년 간 내려온 전통이니까요."
황촉불이 가물거리고 있었다. 일렁이는 황촉 아래 그림처럼 아름다운 소녀가 그를
올려다보며 종알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비록 취옥교처럼 화려
한 아름다움은 아니었으나 그녀만의 생동감 넘치는 매력이 있었다.
동방옥에게는 야성미가 넘치고 있었다. 마치 남국의 야생화와 같은 느낌이었다. 그
녀는 육감적인 입술을 쫑긋거리며 장천린을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점점 더
염기(艶氣)가 짙어지고 있었다.
'.......'
장천린은 서서히 욕망이 일어서는 것을 느꼈다. 그는 오랫동안 욕망을 자제해 왔다.
취옥교와 헤어진 후로는 여인을 가까이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잊어버리고 있
던 욕망이 동방옥으로 인해 고개를 쳐든 것이다.
동방옥은 그의 변화를 눈치챈 듯 얼굴이 상기되었다. 그것은 수줍음 때문이 아니었
다. 그녀의 종족은 본능에 솔직했다. 장천린의 심경이 변화하는 것을 눈치챈 순간
서서히 몸이 뜨거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녀는 발 끝을 올려 장천린의 턱 밑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10 바로북 99
도발적인 행동이었다. 장천린은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육감적인 입술이 바로 눈 아
래 있었다. 그녀에게 향기가 나고 있었다. 그것은 싱그러우면서도 달콤한 야자향(椰
子香)이었다.
동방옥은 반짝이는 눈망울로 장천린을 올려보며 종알거렸다.
"소녀를 받아 주시렵니까?"
"......!"
장천린의 눈빛이 뜨거워졌다. 그는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설사 오늘밤 널 취한다 해도 향후 어떤 언질도 줄 수 없다. 그래도 좋단 말이냐?"
동방옥은 더욱 얼굴을 들이밀며 말했다.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소녀는 후회하지 않습니다."
장천린의 입가에 신비한 미소가 어렸다. 동방옥은 멍해졌다. 그녀는 지금까지 남자
에게서 그런 미소를 본 적이 없었다. 오늘밤 그녀는 남자를 유혹하러 왔다. 그런데
도리어 자신이 유혹되고 있는 느낌이었다.
장천린의 달콤한 음성이 귓전을 간질였다.
"비파를 탈 줄 아느냐?"
동방옥은 가슴이 벅차 올랐다.
"조금요......."
"그럼 한 곡조 부탁한다."
장천린은 평소 음악을 좋아했다. 그는 이역만리 떨어진 남만의 오지에서 비파를 들
을 수 있다는 사실이 무척 반가웠다. 처음 그녀가 비파를 안고 들어왔을 때부터 은
연중 흥이 돋고 있었다.
"그럼 부족하더라도 양해해 주세요."
띵... 띠딩... 띵.......
비파가 탄주되기 시작했다. 동방옥은 비파 소리에 맞춰 노래를 불렀다. 달콤한 음성
이 비파음에 실려 나왔다.
봄은 대체 어디서 오고,
봄은 대체 어디에 와 있나요?
달은 지고 새벽인데 꽃은 아무 말 않고,
꾀꼬리 꽃 사이에서 울고만 있네요.
그녀의 노랫소리는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비파 타는 솜씨도 기교가 무궁무진하여 듣
는 이를 능히 황홀경에 빠지게 할 정도였다. 장천린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11 바로북 99
'한두 해 익힌 솜씨가 아니다.'
그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정말 훌륭한 솜씨구나."
"부끄러울 따름이에요."
동방옥은 살풋이 고개 숙였다.
이때, 자시(子時)를 알리는 북소리가 은은히 들려왔다. 동방옥은 비파를 물리며 일
어섰다.
"밤이 깊었사옵니다."
그녀는 장천린에게 다가왔다. 그녀의 몸에서 야자향이 진하게 풍겼다. 장천린은 눈
을 지그시 감으며 내심 중얼거렸다.
'옥교의 몸에서는 장미향이 났었지.'
그는 동방옥의 어깨를 어루만졌다. 그녀는 살풋이 기대왔다. 장천린이 뺨을 감싸쥐
자 눈을 사르르 감아버렸다.
"내게는 사랑하는 여인이 있다."
"......!"
동방옥은 눈을 반짝 떴다. 그가 무척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여인을 안으면서 결코 다른 여인의 얘기를 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남자는. 그녀는
갑자기 가슴 속이 더워지는 느낌이었다.
'그만큼 진실한 분이라 그럴 거야. 소옥(小玉), 넌 사람을 잘 보았어!'
그녀는 방긋 웃으며 물었다.
"그 분, 아름다우신가요?"
"물론... 아름다웠지."
장천린의 눈빛이 몽롱해졌다. 동방옥은 달콤한 음성으로 말했다.
"하지만 용대인, 그 분은 이곳에 없어요. 대인의 품 안에는 지금 소녀가 있을 뿐이
랍니다."
장천린은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대단한 여인이구나. 조금도 불쾌해 하지 않다니.'
그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동방옥을 내려다보았다. 동방옥은 그의 품에서 떨어지더니
탁자를 향해 걸어갔다. 탁자 위에는 그녀가 들어올 때 가지고 왔던 옥갑이 놓여있었
다.
옥갑의 뚜껑을 열자 술병 하나와 옥배(玉杯)가 나타났다. 술병도 옥배도 홍옥(紅玉)
으로 된 것으로 표면에는 아름다운 조각이 아로새겨져 있었다.
동방옥은 자웅(雌雄) 한 쌍의 옥배에 술을 따랐다. 술은 벽옥빛이었는데 잔에 채워
12 바로북 99
지는 동안 달콤한 향기가 방 안을 진동시켰다.
그녀는 두 개의 잔을 들고 돌아서며 말했다.
"합환주랍니다."
장천린은 옥배를 바라보며 빙긋이 웃었다.
"이것도 풍습인가?"
동방옥의 안색이 은은히 붉어졌다.
"합환주를 마시는 것은 두 사람의 육체와 영혼이 결합되는 것을 의미한답니다. 웅배
는 남자가, 자배는 여인이 마시며 각각 지배와 복종의 뜻이 담겨있답니다."
장천린은 웅배를 받아 단숨에 마셔버렸다. 동방옥도 자배를 두 손으로 받쳐들고 마
셨다. 동방옥은 얼굴에 홍조를 띄우며 장천린의 품에 살며시 기대왔다.
"지금 이 순간부터 소녀는 영원한 종이옵니다."
장천린은 그녀가 무척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동방옥의 턱을 가볍게 치켜들
고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동방옥은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소녀의 옷을......."
장천린은 가슴이 더워지는 것을 느꼈다.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그녀는 스스로 원해
서 자신을 던져온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단호히 거절했을 것이다.
그의 눈에서 정염의 불꽃이 타올랐다. 마침내 그는 동방옥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동방옥은 긴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그가 옷을 벗기기 쉽도록 몸을 움직여 주었다.
사르륵!
황촉불이 타오르는 심야에 여인의 옷자락 흘러내리는 소리는 유난히 자극적이다. 사
나이의 손은 하나씩 여인의 꺼풀을 벗겨 나갔고, 여인은 서서히 우윳빛 나신을 드러
내기 시작했다.
유지처럼 매끄러운 어깨가 드러나고... 봉긋한 젖가슴이 드러났다. 장천린은 탄복을
금치 못했다. 동방옥의 젖가슴은 순결의 상징 그 자체였다. 마치 설산(雪山)의 만
년설을 인 봉우리처럼 순백했다.
그는 젖가슴을 향해 손을 뻗었다. 떨리는 손가락이 연분홍 빛의 화륜(花輪)을 이루
고 있는 그녀의 유두에 막 닿았을 때였다.
갑자기 머리가 아찔했다. 그는 천지가 빙글 도는 듯한 현기증을 느끼며 놀라 부르짖
었다.
"독을 쓰다니......!"
동방옥은 깜짝 놀라 눈을 떴다. 장천린은 눈을 부릅뜬 채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의 안색은 시퍼렇게 변색되어 있었다.
"대인......!"
13 바로북 99
"네가... 독을......."
장천린은 그녀를 손가락질했다. 그의 동공이 하얗게 뒤집어지고 있었다. 그는 전신
을 부르르 떨더니 앞으로 푹 고꾸라지고 말았다.
"대인!"
동방옥은 급히 그를 끌어안았다. 실로 상상도 못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녀는 너
무도 놀라 어찌해야할 바를 모른 채 멍해지고 말았다. 그때였다.
"하하하......! 소옥, 수고했다."
득의에 찬 웃음소리와 함께 방 안으로 동방사성이 들어왔다.
그의 뒤에는 다섯 명의 무사들이 따르고 있었다.
"오라버니!"
동방옥은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그녀의 눈길은 동방사성의 뒤를 따라 들어온 한 무
사에게 고정되었다. 놀랍게도 그 자는 장천린과 옷차림에서 용모까지 완벽하게 닮아
있는 것이 아닌가?
동방옥은 무엇을 느낀 듯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오라버니... 무슨 음모를 꾸미려는 거죠?"
동방사성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소옥,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다. 너는 그만 물러가거라."
동방옥은 탁자 위의 자웅옥배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서 매서운 빛이 흘러나왔다
"오라버니가 자웅옥배에 장난을 쳤나요?"
"후후! 사전에 미혼약을 조금 발라두었었지."
동방옥은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무엇 때문이죠?"
"나는 탁노야가 지니고 있는 황금이 필요하다."
동방옥의 안색이 차갑게 굳어졌다. 그녀는 따지듯 물었다.
"그렇다면 절 용대인에게 보낸 것도 오라버니의 사전 계획 속에 포함된 것이겠군요?
동방사성은 어색한 표정으로 말했다.
"네가 이해해다오."
동방옥은 뒤로 주춤 물러서며 반문했다.
"그럼 왜... 미리 저에게 말해주지 않았죠?"
"그건 완벽한 작전을 위해서였지."
"호호호호홋......!"
14 바로북 99
갑자기 동방옥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곧 뚝 그치더니 싸늘하게 말했다.
"오늘처럼 오라버니가 비열해 보이기는 처음이에요."
그녀는 장천린을 부축한 채 뒤로 물러나며 힐끗 가짜 장천린을 쏘아보았다.
"저 자를 내세워 탁노야의 눈을 속일 셈인가요?"
동방사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탁노야 밑에서 삼 년 동안 일해온 것은 바로 오늘 같은 날이 오기를 기대했기 때문
이었다."
동방옥은 냉랭하게 코웃음쳤다.
"흥! 이제야 알겠어요. 석정일랑과 청산의명을 끌어들인 것도 바로 오라버니였군요.
동방사성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자꾸 뒤로 물러나고 있는 동방옥을 바라보며 가
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용백군을 이리 넘겨라."
동방옥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어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오라버니는 한 가지를 예상하지 못했어요."
"......?"
"오라버니는 목적을 위해 절 이용했을지 몰라도 용대인을 향한 제 마음은 진심이었
어요."
동방사성의 안색이 굳어졌다. 동방옥은 결의에 찬 어조로 말했다.
"즉, 용대인은 이제 저의 주인이에요. 주인님을 해치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라도 용
서치 않을 거예요. 설사 그것이 오라버니라 해도 말이에요."
말이 끝나는 순간, 그녀는 탁자 위에 놓여있던 철비파(鐵琵琶)를 집어들었다.
푸슈슈슉!
철비파를 빙글 돌리는 순간 예리한 파공성이 일어났다. 동방사성은 경악하며 외쳤다
"추혼침이다. 조심해라!"
하지만 이미 늦었다.
"헉!"
세 명의 무사가 철비파에서 발사된 추혼침을 맞고 비명과 함께 쓰러졌다. 동방옥은
장천린을 안은 채 창문을 향해 몸을 날렸다. 펑! 하고 창문이 박살나며 그녀의 모습
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쫓아라!"
동방사성의 지시에 한 명의 무사가 부서진 창문을 통해 추격해 갔다. 동방사성은 장
천린으로 변장하고 있는 자에게 당부했다.
15 바로북 99
"너는 지금 즉시 객당으로 가 원계묵과 백살대가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게 조치해라.
"알겠습니다!"
"객당 주위에도 수하들을 풀어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해야한다. 알겠느냐?"
"넷!"
가짜 장천린은 신형을 날려 사라졌다. 동방사성은 부서진 창문을 바라보며 어이없다
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소옥, 네가 그토록 어리석은 일을 벌일 줄은 몰랐다."
그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그는 입술을 깨물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지금 와서 포기할 순 없다. 이번 일에 목숨을 걸었으니까."
그는 뒷짐을 진 채 초조한 표정으로 방 안을 서성거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동방옥을 추격해갔던 무사가 돌아왔다.
"어떻게 됐느냐?"
무사는 털썩 무릎을 꿇었다.
"놓쳤... 습니다. 소저께서는 장원을 떠나 밀림 속으로 들어가셨습니다."
"빌어먹을!"
동방사성은 눈썹을 칼같이 곤두세우며 호통쳤다.
"당장 수하들을 풀어 밀림을 수색해라!"
그는 생각난 듯 재차 지시했다.
"참, 그리고 밀림 속에 숨어있는 청산의명에게 연락해 용백군을 잡는 데 협조해 달
라고 해라."
"알겠습니다."
무사가 몸을 일으키는 순간 동방사성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조심해라. 소옥을 다치게 하면 안 된다. 단, 용백군은 죽여도 좋다."
"알겠습니다."
무사는 고개를 조아린 후 신형을 날려 사라졌다.
동방사성은 화를 참을 길이 없는 듯 성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갑자기 그는
탁자 위의 자웅옥배를 두 손에 움켜잡더니 힘을 주었다.
팍!
자웅옥배가 손에서 가루가 되어버렸다. 그의 눈에서 번갯불 같은 광채가 흘러나왔다
"절대, 실패할 순 없다!"
밀림은 새벽안개에 뒤덮여 있었다. 본래 울창한 열대림으로 인해 하늘을 볼 수 없을
16 바로북 99
정도였으나 안개가 자욱이 깔리는 바람에 시계는 더욱 좋지 않았다.
"......."
밀림 한가운데. 나뭇잎이 수북이 쌓여 있는 곳에 일남일녀가 앉아 있었다. 그들은
바로 장천린과 동방옥이었다.
두 사람의 모습은 말이 아니었다. 옷자락이 찢겨지고 진흙이 잔뜩 묻어 있었다. 특
히 동방옥은 더욱 낭패한 모습이었다. 머리카락은 헝클어져 있었으며 몸 여기저기에
선혈이 배어 있었다.
장천린도 낭패한 모습이기는 마찬가지였다. 다만 표정만은 침착하게 가라앉아 있었
다. 동방옥은 감히 그를 보지 못하고 눈길을 바닥에 떨군 채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이
었다.
장천린이 정신이 든 것은 대략 한 시진 전이었다. 그는 이미 상황을 모두 파악하고
있었다.
탁일비는 평생 동안 모은 황금을 자신만이 아는 비밀장소에 감추어 두고 있었다. 동
방사성은 그 사실을 알고 탁일비에게 접근하여 충성을 바치는 척하고 있었다. 그 동
안 황금이 묻혀있는 장소를 알아내려 무진 애를 썼으나 허사였다.
그는 탁일비를 위협하여 비밀장소를 알아낼 생각도 해봤으나 확신이 서지 않았다.
탁일비는 늙고 병든 몸이라 자칫하면 스스로 생명을 포기할지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되면 지금까지 들인 공은 만사휴의(萬事休矣)였다.
결국 그는 한 가지 계책을 세웠다. 그는 은밀히 서신을 날려 석정일랑과 청산의명을
끌어들였다. 그들이 해남도를 유린하게 함으로써 탁일비로 하여금 두려움을 느끼게
했다.
예상대로 탁일비는 북경에 서찰을 보내 구원을 요청했다. 이 모든 것을 그는 손바닥
들여다보듯 헤아리고 있었다. 그는 가짜 용백군으로 하여금 북경에서 온 인물들을
조정하려 했다.
왜인들과는 비밀리에 약정을 맺었다. 북경에서 온 구원자들과 격돌하게 한 다음 일
부러 패한 척 달아나도록 한 것이다. 그렇게 되면 탁일비는 태진왕과 약속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그가 지닌 황금의 삼분지 일을 내주려면 황금이 묻혀있는 장소를 공개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때 황금을 몽땅 삼킬 야심적인 계책을 세워둔 것이었다.
장천린은 쉽게 여기까지 추리해낼 수 있었다. 동방옥으로부터 자신과 똑같이 위장시
킨 작자를 보았다는 말에 모든 것을 꿰뚫어보게 된 것이었다.
동방옥은 기어 들어가는 음성으로 말했다.
"대인께 뭐라 사죄를 드려야 할지... 오라버니로 인해 큰 욕을 보셨으니......."
장천린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그는 부드러
운 음성으로 말했다.
17 바로북 99
"그대의 오라버니는 날 죽이려 했지만 반대로 그대가 내 생명을 구해주었으니 내 어
찌 탓을 하겠는가?"
"흑!"
동방옥은 울음을 터뜨리며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장천린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
듬다 그녀의 옆구리가 온통 선혈로 물든 것을 보고 탄식했다.
"상처는 좀 어떠냐?"
"괜찮아요. 찰과상 정도인 걸요."
동방옥은 눈물을 훔치며 생긋 웃었다. 그가 걱정해 주자 무척 기쁜 표정이었다. 장
천린은 그녀가 새삼 아름답게 느껴졌다. 비록 간악한 계략으로 자신을 위해한 동방
사성을 생각하면 증오가 치밀었으나 남매지간인 동방옥은 전혀 다른 느낌을 주었다.
더구나 가냘퍼 보이기만한 그녀가 밤새워 자신을 안고 숲 속을 도주하며 추적자들과
혈투를 벌인 것을 생각하면 안쓰럽기만 했다.
"고맙다, 소옥. 넌 내 생명의 은인이다."
장천린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말하자 동방옥은 감격에 겨운 듯 몸을 떨
었다. 그녀는 기쁜 듯 속삭였다.
"소녀가 당연히 해야할 도리인 걸요? 대인은 영원한 저의 주인님이시잖아요."
장천린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는 울창하기만한 밀림을 둘러보며 물었다.
"난 방향을 알 수가 없구나. 이곳 지리를 아느냐?"
뜻밖에도 동방옥은 고개를 저었다.
"몰라요. 이곳은 오지산 내에서도 가장 험한 곳이에요. 따라서 이곳 사람들도 웬만
해서는 들어오기를 기피하는 곳이에요. 소녀도 이렇게 깊숙이 들어온 건 처음인 걸
요."
장천린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럼 우리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모르겠구나."
"네."
"음......."
장천린은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는 장원에 남아있을 일행이 걱정되었다.
'당분간은 별 일 없을 것이다. 그 자는 탁일비의 황금을 노리고 나와 똑같은 가짜를
내세웠다. 그러니 목적을 달성할 때까지는 무리한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다만 원제나 단도독이 그 자의 음모를 눈치챌까봐 걱정이다. 그렇게 되면 동방사성
은 곧바로 행동에 들어갈 것이다.'
이때, 동방옥은 장천린의 품에 안긴 채 행복감에 빠져 있었다. 그녀는 장천린에 대
18 바로북 99
해 별로 아는 것이 없었다. 다만 그가 멀리 중원에서 온 용백군이란 상인으로만 알
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기대고 있는 사내의 가슴은 마치 강철처럼 탄탄했다. 더
구나 그는 이런 상황에서도 조금도 흔들림 없이 안정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 분... 평범한 분이 아니야. 어쩌면 진정한 영웅일지도 몰라.'
그녀는 장천린의 품에 뺨을 댄 채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 갑자기 아미를 경
련했다.
'......!'
동방옥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들이 기대고 있던 야자수로부터 인영이 무서운 속도
로 떨어져 내리며 두 사람을 덮친 것이다.
띵!
날카로운 비파음이 울렸다. 창졸지간에 동방옥은 비파줄을 퉁겼다. 비파로부터 추혼
침이 쏘아나갔다.
"컥!"
인영은 목줄기를 움켜쥔 채 떨어졌다. 추혼침은 정확히 그의 천돌혈(天突穴)을 관통
해 버렸다.
휙휙휙!
옷자락 날리는 소리가 어지럽게 들리더니 사방에서 여섯 개의 인영이 속속 나타났다
. 그들은 한결같이 괴상한 복장을 한 왜국무사들이었다.
동방옥은 입술을 깨물며 장천린의 품에서 몸을 일으켰다.
"용대인님, 잠시 뒤로 물러나 계세요."
그녀는 장천린이 무공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를 뒤로 물러나게 하고 비파
를 단단히 부여안은 채 앞으로 나섰다. 육 인의 왜국무사들도 장천린에게는 신경쓰
지 않고 동방옥만을 포위했다.
매부리코의 왜국무사가 서툰 한어로 물었다.
"소저가 동방영주의 누이동생이오?"
동방옥은 차갑게 말했다.
"그래요."
"소저는 다치게 하고 싶지 않소. 비키시오."
동방옥은 냉소했다.
"어림없는 소리!"
무사는 눈살을 찌푸렸다.
"어쩔 수 없군, 상처를 입더라도 원망은 마시오."
쉬... 악!
19 바로북 99
놀라운 도법이었다. 장도가 언제 뽑혔는지도 모르게 시퍼런 도광을 뿜으며 날아왔다
. 동시에 다른 오 인도 공격해왔다. 실로 쾌속한 공격이었다.
따... 땅......!
철비파에서 연신 비파음이 울렸다. 동방옥의 무공실력은 보통이 아니었다. 그녀는
철비파를 현란하게 휘둘러댔다. 철비파가 그녀의 손에서 빙글빙글 돌아갔다. 그때마
다 상대의 장도를 막아내거나 퉁겨냈다.
육 인의 왜국무사들은 철비파에 추혼침이 내장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듯 몸
을 사리는 것이 역력해 보였다. 따라서 그들은 수적으로는 압도적인 우위였으나 쉽
게 동방옥을 제압하지 못하고 있었다.
한편 장천린은 육 인의 도법을 관찰하고 있었다. 그들의 도법은 정교하면서도 잔인
했다.
'음! 저 자들은 하나같이 일류급 고수들이구나. 이대로 가면 소옥은 십 초 이상을
버티기 힘들 것이다.'
그는 왜국무사가 떨군 장도를 집어 들었다. 비록 도를 잡긴 했으나 확신은 할 수가
없었다.
'내 무공도 약한 편은 아니다. 하지만 실전경험이 없어 잘 통할지 의문이다.'
그는 육 인의 왜국무사들을 노려보며 계획을 세웠다.
'저 자들은 내가 무공을 모르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 점을 최대한 이용해야 한다.'
이때였다.
따당! 하는 비파음과 함께 동방옥의 비명이 울렸다. 그녀의 철비파는 장도에 의해
현이 세 줄이나 끊겨 버렸다. 그녀는 힘이 부친 듯 계속 뒤로 밀려났다.
소맷자락이 길게 찢어진 채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녀는 추혼침을 발사하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발사하면 두 명은 죽일 수가 있었다. 그러나 나머지 인물들의 공격을
막아낼 자신이 없었다. 그녀는 계속 뒤로 물러나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죽는 것은 상관없어! 하지만 용대인님은.......'
이때였다. 귀에 익은 음성이 들려왔다.
"소옥, 내가 돕겠다."
그녀는 놀라 고개를 돌렸다. 장천린이 칼을 쥔 채 달려들고 있었다. 그의 동작은 어
설프기 짝이 없었고 몸의 중심도 엉망이었다. 그것을 본 육 인의 무사들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코웃음쳤다.
그들은 장천린에게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달려 들어봐야 대순가 하는 표정들이었다
. 동방옥은 가슴이 철렁하여 다급히 외쳤다.
"용대인! 안돼요, 그만......."
그녀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육 인의 왜국무사에게 달려가던 장천린이 갑자기 도약
20 바로북 99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허공에 무려 삼 장 가량 떠오른 채 장도를 빙글 휘둘렀다.
"크아악!"
비명이 터졌다. 두 명의 목이 그대로 날아갔다.
"......!"
나머지 사 인의 안색이 급변했다. 그러나 그들에게 여유를 줄 장천린이 아니었다.
"뇌전(雷電)... 단홍(斷虹)!"
풍뢰도법(風雷刀法)의 제일초가 섬광을 뿌렸다.
우르르! 하는 우레소리와 함께 다시 한 명이 무너지듯 넘어갔다. 그 자는 칼과 몸이
동시에 두 동강이가 나버렸다. 놀라운 것은 칼이 지나간 자리가 숯처럼 검게 그슬
려 있다는 사실이었다.
"헉... 조심해라! 무서운 놈이다!"
남은 삼 인이 경각했을 때는 장천린이 삼도귀변팔법(三刀鬼變八法) 중 제육초인 혈
망개(血網開)를 전개한 후였다.
파아앗!
도가 세 개로 보였다. 세 개의 도가 지나간 순간 한 명은 머리서부터 두 쪽이 났고,
한 명은 어깻죽지가 끊겼다. 또 한 명은 옆구리가 갈라지며 내장이 쏟아져 나왔다.
실로 가공할 도법이었다. 만일 장천린이 실전경험이 풍부했다면 삼 인 모두 양단되
었을 것이 틀림없었다. 다만 처음으로 펼친 도법이었으므로 그 정도에 그친 것이었
다.
"으으......!"
아직 숨이 끊기지 않은 두 명은 혼비백산한 채 뒷걸음질쳤다. 한 명은 어깻죽지가
끊겼으며 한 명은 옆구리가 갈라져 있었다. 그들은 마치 귀신이라도 본 양 만면에
공포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설마하니 일개 상인이 이토록 무시무시한 실력을 감추
고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퍽!
섬뜩한 소리가 울렸다. 비명조차 일어나지 않았다. 옆구리에 도상을 입은 자는 세
치 두께의 강철판도 뚫을 수 있다는 백골마조(白骨魔爪)를 가슴에 맞고 그대로 고꾸
라졌다. 장천린은 갈고리처럼 구부러진 손가락을 그의 가슴으로부터 떼어내고 있었
다.
"허헉!"
나머지 한 명은 대경실색한 채 전력으로 신형을 날렸다. 그야말로 다리야 나 살려라
는 심정으로 숲을 향해 죽을 힘을 다해 달려갔다. 그러나 등 뒤에서 차가운 호통소
리가 들렸다.
"어딜 가느냐!"
21 바로북 99
장천린은 귀영마변보(鬼影魔變步)로 허공을 뛰어가듯 날아가 그의 바로 옆에 떨어졌
다. 그는 손바닥을 빳빳이 펼친 채 왜인의 옆구리를 쳤다. 기이하게도 그의 손바닥
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적살장(赤殺掌)이다."
냉랭한 음성과 함께 처절한 비명이 울렸다.
"크아아악!"
왜인은 허공에 붕 떠오르더니 저만치 날아갔다. 그의 옆구리에는 시뻘건 장인(掌印)
이 새겨져 있었다. 주변에는 살이 타는 듯한 고약한 냄새가 진동했다.
육 인의 왜국무사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모두 죽고 말았다. 그야말로 믿어지지 않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
동방옥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장천린을 바라보았다. 꿈에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
다. 그녀는 멍하니 바라보다가 갑자기 소리치며 달려왔다.
"용대인!"
그녀는 얼굴이 온통 눈물로 범벅이 되는 것도 모르고 달려와 장천린의 품에 안겼다.
"이젠 괜찮다, 소옥."
장천린은 그녀의 등을 도닥여 주었다.
"정말, 정말 몰랐어요! 용대인님의 무공이 그 정도일 줄은......."
동방옥은 기쁨에 차 몇 번이고 같은 말을 되뇌었다. 장천린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
다.
"그렇게 대단한 게 아니다. 저들이 날 너무 무시했기에 쉽게 당한 것이다. 만일 경
계했다면 이렇게 쉽게 이길 수는 없었을 것이다."
동방옥은 고개를 흔들며 들뜬 음성으로 말했다.
"아니에요, 대인의 무공은 정말 놀라웠어요. 설사 그들이 사전에 대비했다해도 결코
막지 못했을 거예요. 소옥은 정말... 기뻐요."
장천린은 담담히 웃으며 주의를 환기시켰다.
"소옥, 지금 우리에게 급한 것은 이 밀림을 벗어나는 것이다."
"네!"
동방옥은 힘차게 말하며 그의 품에서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유난히 빛나
고 있었다. 그녀는 마음 든든한 듯 장천린의 소매를 잡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일단 이 쪽으로 가봐요."
"좋아, 밀림을 벗어나기만 하면 방향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두 사람은 전진하기 시작했다. 자욱한 안개는 서서히 걷히고 있었으나 울창한 밀림
22 바로북 99
에는 길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왜국무사들이 남긴 장도로 잡목을 자르며 앞
으로 나아갔다.
23 바로북 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