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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장 검은 바람 (16/87)

제13장 검은 바람 

검은 바람! 

장천린은 물론 강호 경험이 풍부한 편인 원계묵조차 처음 듣는 이름인 듯 의혹의 표 

정을 지었다. 

"검은 바람은 동해와 남해에 걸쳐 무차별로 노략질을 일삼는 해적선을 말하는 것입 

니다. 검은 바람의 수괴는 교활하기 그지없는 놈이라 그동안 수군(水軍)의 추적을 

수십 차례나 빠져나가며 수많은 배들을 수장시켰습니다." 

단위제는 던져버린 파풍도를 가리키며 설명했다. 

"저 무기는 바로 그들의 것입니다. 검은 바람의 해적들의 숫자는 칠십여 명에 불과 

하나 하나같이 무공이 강한 데다 악랄하고 잔인한 놈들입니다. 동해를 오가는 상선 

들에게 놈들은 가히 공포적인 존재들이지요." 

단위제는 시체들을 둘러보며 단정했다. 

"이 배도 상선인 것 같습니다." 

장천린은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정말 잔인한 놈들이군. 저항할 능력도 없는 사람들을 이렇게 참혹하게 죽일 수 있 

단 말인가?" 

단위제의 음성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과거 해적선 검은 바람은 화포를 소유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화포를 달았으 

니 앞으로 놈들의 행패는 더욱 심해질 것 같습니다." 

이때, 배가 크게 흔들렸다. 밖에 나가 있던 운표가 고함을 질렀다. 

"배가 곧 가라앉을 것 같습니다!" 

장천린은 탄식하며 말했다. 

"이제 그만 돌아갑시다." 

선실 안에 있던 삼 인은 갑판으로 나갔다. 아닌 게 아니라 배는 완전히 기울어 침몰 

직전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막 목교로 올라서는 순간이었다. 머리 위쪽에서 한 가 

닥 신음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일행의 시선이 일제히 부서진 돛대 위로 향했다. 

"사람이다!" 

놀랍게도 부러진 돛대에 한 사람이 매달려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자는 팔과 다리에 못이 박힌 채 돛대에 박혀 있었다. 처음 그를 발견하지 못한 

것은 찢어진 돛폭이 휘감겨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람에 돛폭이 벗겨지며 비로소 그 

자의 모습이 드러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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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구해 주게, 운표." 

장천린의 명이 떨어지자 운표는 신형을 날려 돛대에 매달렸다. 

돛대에 박혀있는 자는 전신이 피로 물들어 있어 끔찍하기 그지없었다. 가까이서 보 

니 팔다리에 박혀있는 못은 손가락만큼 굵었다. 운표는 가슴이 섬뜩했다. 

'지독한 수법이군!' 

그는 치를 떨면서 못을 뺐다. 이어 피투성이가 되어있어 용모를 알 길이 없는 사나 

이를 옆구리에 낀 채 갑판에 떨어져 내렸다. 장천린이 물었다. 

"어떤가?" 

"간신히 숨만 붙어 있을 뿐입니다." 

이때, 구룡상선 쪽에서 다급한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배가 가라앉고 있습니다!" 

일행은 신형을 날렸다. 그들이 구룡상선에 건너간 직후, 굉음과 함께 난파선은 눈 

깜짝할 사이에 바다 속으로 침몰하고 말았다. 침몰의 여파로 파도가 소용돌이치며 

해일이 일어났다. 

한참 동안 주변의 바다는 부글거리는 거품과 함께 파도가 거칠게 일렁였다. 

난파선을 만난 지 일곱째 날이 지났을 때 구룡상선은 금문도(金門島)를 지났다. 그 

리고 다시 며칠 후에는 예정대로 해남도(海南島)에 도착했다. 그들이 닻을 내린 곳 

은 해구(海口)란 지명을 가진 곳이었다. 

실로 길고도 긴 항해였다. 

해남도는 대륙에서 최남단에 위치한 섬이었다. 그곳의 기후나 풍토는 대륙과 판이하 

게 달랐다. 사시사철 기후가 더웠으며 대륙에서는 보지 못하는 온갖 희귀한 식물과 

과실들이 열렸다. 

해남도는 뇌주반도(雷州半島)와 마주 보고 있었는데 자단목(紫檀木)의 산지로 유명 

한 곳이었다. 

대륙의 바다 건너 남단에는 두 개의 큰 섬이 있었는데 해남도는 그 중 하나로 주로 

리족( 族), 묘족(苗族), 회족(回族) 등이 원주민으로 오랫동안 살고 있었다. 이곳 

의 주산물은 소금이었으며 각종 희귀한 과실류 등이 황실에 진상되고 있었다. 또 한 

가지 유명한 것이 있다면 송대(宋代)에 이름을 날렸던 시인 소동파가 이곳에서 유 

배생활을 한 적이 있다는 점이었다. 

섬 한가운데는 산봉이 우뚝 솟아 있었는데 오지산(五指山)이라 불렀다. 그곳은 풍부 

한 광물자원이 매장되어 있다는 설이 있었다. 

해구(海口)는 해남도에서 가장 큰 포구다. 

새벽 안개가 자욱히 깔려 남국의 신비로움이 한결 진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구룡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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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은 그곳에 닻을 내렸다. 자욱한 안개와 후덥지근한 기후는 모든 이들에게 생소한 

느낌을 주었다. 대륙은 한창 겨울이었는데 이곳은 완전히 다른 세상 같았다. 

장천린을 선두로 백살대가 원계묵의 지휘 아래 하선했다. 단위제가 마지막으로 내렸 

다. 

일행이 하선하자 어디선가 안개를 헤치며 수십 기의 기마대가 요란한 말발굽 소리와 

함께 달려왔다. 마상인들은 하나같이 당당한 체격의 무사들이었다. 

기마대의 선두에는 삼십 세 가량 되어 보이는 화복청년(華服靑年)이 타고 있었는데 

허리에 쌍철편(雙鐵鞭)을 둘렀으며 머리에는 붉은 꽃을 꽂고 있었다. 기이한 것은 

긴 얼굴에 눈썹이 은빛이었으며, 실핏줄이 비칠 정도로 흰 피부에 콧날이 유난히 높 

았다. 어딘가 모르게 혈통이 다른 이국인 냄새가 풍겼다. 

그는 앞으로 나서며 큰 소리로 외쳤다. 

"어떤 분이 용백군 대인이십니까?" 

장천린은 낭랑하게 말했다. 

"본인이 바로 용백군이오." 

"......!" 

화복청년의 눈에 이채가 번뜩였다. 그는 상대가 젊다는 데 놀란 듯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곧 말에서 뛰어 내려 정중히 포권했다. 

"북경으로부터 전서구를 통해 연락을 받았습니다." 

그는 자신을 소개했다. 

"소생은 동방사성(東方射星)이라 합니다. 탁어른의 명을 받고 용대인을 마중 나오는 

길입니다." 

장천린은 마주 예를 표하며 물었다. 

"탁일비 대인은 어디 계시오?" 

화복청년은 패기에 찬 음성으로 대답했다. 

"탁어른의 자택은 여기서 이백 리쯤 더 가야 합니다. 마차를 준비했으니 오르시지요 

." 

기마대는 한 대의 화려한 사두마차를 끌고 있었다. 

"고맙소이다." 

장천린은 사의를 표한 후 마차에 올랐다. 원계묵은 그림자인 양 함께 마차에 올랐다 

. 화복청년 동방사성의 눈빛은 원계묵을 바라보는 순간 야릇하게 번쩍였다. 

"출발!" 

그가 손을 뻗자 마차가 움직였다. 마차가 움직이자 기다렸다는 듯이 비가 내리기 시 

작했다. 비는 가늘어 마치 안개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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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슬부슬 내리는 비와 안개... 후덥지근한 기후는 일행으로 하여금 기이한 정서를 

느끼게 했다. 특히 마차 안에서 바라보는 밖의 풍물은 장천린의 가슴에 야릇한 애수 

를 느끼게 했다. 

창문을 통해 보이는 연도의 나무들은 처음 보는 것들이었다. 잎사귀가 길고 널찍했 

으며 어떤 나무는 미끈하게 쭉 뻗어 올라갔다가 이상한 모양의 과실들을 주렁주렁 

달고 있기도 했다. 

마차 옆에는 백살대가 따랐다. 운표가 선두에서 걸었으며, 그의 곁에는 단위제가 걷 

고 있었다. 운표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투덜거리고 있었다. 

"제기랄, 도착한 줄 알고 좋아했는데 이백 리라면 오늘 저녁에나 도착하겠군." 

단위제는 말이 없었다. 그는 줄곧 동방사성과 기마대의 무사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직업으로 단련된 날카로운 직관력이 발동되고 있었다. 

'저 자들은 보통 인물이 아니다. 일반적인 무술을 수련한 자들이 아니다.' 

그는 동방사성을 주시했다. 

'특히 저 자는 얕볼 수 없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는 것 같다.' 

그는 안개비로 인해 시야가 짧은 전면을 바라보며 내심 중얼거렸다. 

'왠지 해남도의 일은 녹녹치 않을 것 같구나.' 

기마대는 규칙적인 말발굽 소리를 내며 전진했고 백살대는 조용히 그들의 속도에 맞 

추어 걸음을 옮겼다. 

짙은 안개와 축축하게 내리는 비... 어딘가 모르게 음산한 느낌을 주는 새벽이었다. 

해구에 정박해 있는 구룡상선은 안개에 휩싸여 절반 정도만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런데... 안개가 자욱이 깔려있는 포구의 바다 위를 수십 명의 인영이 헤엄쳐 가고 

있지 않은가? 잠시 후 그들은 구룡상선을 향해 소리 없이 기어올랐다. 그들은 모두 

백의를 입고 있었다. 

스스스......! 

갑판 위로 오른 백의인들은 사전에 치밀한 계획을 세운 듯 사방으로 신속하게 흩어 

졌다. 

같은 시각, 부금진은 선실 안에서 조각에 열중하고 있었다. 

사각! 사각! 

소도는 얼굴 부분을 다듬고 있었다. 선실 안에는 나무 깎는 소리만이 규칙적으로 울 

렸다. 지금 구룡상선에 남아있는 사람이라곤 그와 백연연, 그리고 이십여 명의 선부 

들이 전부였다. 

갑자기 부금진은 조각도를 멈추었다. 

'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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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였다. 

쾅! 

폭음과 함께 선실의 창문이 박살나며 백색 인영이 뛰어 들어왔다. 그는 다짜고짜로 

부금진을 공격했다. 

"웬놈이냐!" 

부금진은 날카롭게 외치며 몸을 바닥으로 굴렸다. 그는 연속 다섯 바퀴나 굴러간 후 

벌떡 일어섰다. 눈 앞에 한 명의 백의인이 우뚝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자는 정 

말 괴상한 모습이었다. 

머리는 앞부분을 칼로 박박 밀었으며 정수리 쪽에만 남겨놓아 상투를 틀어 놓고 있 

었다. 게다가 백의는 양어깨가 불룩 솟아있어 처음 보는 복장이었다. 

백의괴인은 손에 장도(長刀)를 움켜쥐고 있었는데 폭이 유난히 좁고 끝이 날카로웠 

다. 부금진은 소도를 왼손에서 오른손으로 옮기며 차갑게 물었다. 

"웬놈이냐? 무슨 이유로 암습했느냐?" 

"......." 

백의괴인은 대꾸는 물론 표정조차 변하지 않았다. 

사사삭! 

그는 빠르게 발을 움직였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횡보(橫步)로 이동했는데 그 속도 

가 상상을 불허할 정도로 빨랐다. 

"아아악!" 

어디선가 참혹한 비명 소리와 함께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 

부금진의 안색이 굳어졌다. 그는 사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러나 백의 

인은 그에게 생각할 틈을 주지 않았다. 

쐐액! 

백의인은 상단에서 하단으로 내려치는 단순한 도법을 구사했다. 그야말로 쾌속무비 

하면서도 악랄한 도법이었다. 

"읏!" 

부금진은 다시 몸을 굴리며 놀라 부르짖었다. 

"청풍류(靑風流)!" 

그는 두 바퀴를 굴러간 후 벌떡 뛰어 일어서며 물었다. 

"너는 왜국에서 왔느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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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의인의 표정이 비로소 변했다. 자신의 공격을 두 번씩이나 피하고 도법까지 파악 

한 데 대해 몹시 경악한 모양이었다. 이때 다시 밖에서 처절한 비명이 들려왔다. 

"차!" 

백의인은 재차 공격했다. 부금진은 냉소하며 바닥을 차고 위로 솟구쳤다. 그의 손에 

서 흰빛이 뻗었다. 

"큭!" 

백의인은 비틀거리며 장도를 떨어뜨렸다. 그의 이마 한복판에 소도가 꽂혀 있었다. 

그의 눈에는 온통 경악과 불신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설마하니 자신이 이토록 간단 

히 당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는 듯이. 

백의인이 고목처럼 쓰러지자 부금진은 소도를 회수하며 중얼거렸다. 

"왜국의 무사가 어찌 이곳에 있는 거지?" 

그는 혼란을 느끼며 염두를 굴렸다. 

'청풍류는 왜국의 사대유파(四大流波) 중 하나로 석정일랑(石井一郞)이란 도의 달인 

이 창안한 도법이거늘 어째서 그 자들이 날 공격한단 말인가?' 

그는 갑자기 안색이 우그러졌다. 

'아차! 백소저께서!' 

그는 쏜살같이 밖으로 뛰쳐나갔다. 

백연연은 장부를 정리하고 있었다. 

그녀는 항해하는 동안 장천린으로부터 장부 정리하는 법을 배웠다. 천성적으로 현명 

하고 차분한 그녀는 빠른 시간에 모든 것을 터득했다. 게다가 장부 계산하는 데 남 

다른 재미도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장부 정리를 멈추며 일어섰다. 

'시간이 꽤 됐구나, 그 분께 아침 식사 드리는 게 늦었네.' 

그녀는 한 사내를 떠올렸다. 

난파선에서 돛대에 못 박혀 있던 사내. 그의 이름은 반송(盤松)이라고 했다. 나이는 

삼십 사 세였는데 그밖의 것은 굳게 입을 다물고 밝히지 않고 있었다. 

상처가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으므로 장천린도 그의 신분에 대해 깊이 캐묻지 않았다 

. 어딘가 비밀이 많은 듯한 사내였다. 

똑똑......! 

백연연은 반송이 요양하고 있는 선실의 문을 가볍게 두들겼다. 반송의 가라앉은 음 

성이 들려왔다. 

"들어오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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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실 안으로 들어가자 침상에 누워있는 사내의 모습이 들어왔다. 비록 지금은 안색 

이 창백했으나 구레나룻 수염과 짙은 눈썹, 우뚝 솟은 코로 미루어 평시에는 패기만 

만한 인물일 듯했다. 

"좀 어떠세요? 반대협?" 

백연연은 소반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반송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몸을 반쯤 일으 

켰다. 

"좋아졌습니다. 모두가 소저 덕분이오." 

백연연은 생긋 웃으며 식사를 챙겼다. 

"식사를 가져왔어요." 

"감사하오이다." 

반송은 소반을 받은 후 수저를 들었다. 상처가 어느 정도 회복되면서 식욕이 늘고 

있었다. 더구나 절세미인인 백연연이 직접 장만한 음식은 그의 입에 딱 맞고 있었다 

그가 막 음식물을 한 입 넣은 순간이었다. 어디선가 날카로운 비명이 울렸다. 

"이... 이게 무슨 소리죠?" 

백연연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반송도 얼굴을 굳혔다. 바로 그때였다. 

우지끈! 

돌연 천장이 부서지며 한 줄기 섬광이 백연연을 향해 전광석화처럼 뻗었다. 반송은 

크게 부르짖었다. 

"조심하시오! 백소저!" 

그러나 이미 늦었다. 백연연은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그녀의 등에서 피가 

솟구쳤다. 

"백소저......!" 

반송은 다급히 부르짖었다. 천장으로부터 한 명의 백의인이 떨어져 내렸다. 그는 장 

도를 들고 있었는데 발 끝으로 백연연을 툭 걷어찬 후 반송을 노려보았다. 

"......!" 

반송은 가슴이 섬뜩했다. 

쐐... 액! 

백의인은 다짜고짜로 장도를 휘둘렀다. 반송은 침상에 앉아 있었으므로 그의 공격을 

막아내기에 준비가 부족했다. 다급한 나머지 그는 젓가락으로 장도를 막았다. 상식 

적으로 볼 때 그의 행동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쩡! 

금속성이 울렸다. 장도와 젓가락 사이에서 불꽃이 퉁겼다. 백의인의 눈이 크게 떠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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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장도가 젓가락에 의해 막혀버린 것이다. 실로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반송은 몸을 굴리며 탁자 위의 촛대를 움켜잡았다. 

파... 앗! 

그의 공격은 육안으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빨랐다. 촛대의 뾰족한 끝이 백의인의 심 

장을 향해 날아갔다. 그러나 백의인도 고수였다. 

싹! 

장도가 빙글 허공에 원을 그리는가 싶더니 촛대를 막았다. 깡! 하는 날카로운 쇳소 

리가 일어났다. 

"캑!" 

촛대에만 신경 쓴 것이 탈이었다. 정작 백의인을 노린 것은 촛대가 아니라 반송의 

왼쪽 손이었다. 그의 손은 칼날처럼 빳빳하게 세워진 채 백의인의 복부를 쑤시고 들 

어간 것이다. 손을 뽑아내자 내장이 뜯겨져 나왔다. 

"끄으......." 

백의인은 회의에 찬 눈을 부릅뜬 채 털썩 주저앉았다. 반송은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 

고 백연연에게 다가갔다. 

백연연은 옆으로 쓰러져 있었는데 안색이 백짓장처럼 창백한 채 혼절해 있었다. 그 

는 손가락을 코 끝에 대보았다. 실낱 같은 호흡이 간간이 이어지고 있었다. 

반송은 한숨을 쉬며 그녀의 등에 난 상처를 살펴보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그때 천장으로부터 다시 한 명의 백의인이 떨어져 내렸다. 

펑! 

폭음과 함께 문짝이 부서지며 역시 같은 백의인이 뛰쳐 들어왔다. 두 백의괴인은 바 

닥에 내장을 쏟아낸 채 죽어있는 동료를 보더니 안색이 무참하게 일그러졌다. 

그들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더니 일제히 장도를 휘두르며 반송을 향해 덮쳤다. 

파츠츳......! 

반송은 자신이 낭떠러지 끝에 와있다는 것을 절감했다. 죽느냐 사느냐는 한 순간에 

결정된다. 그는 발 끝으로 바닥의 장도를 걷어 차 손에 잡았다. 거의 동시에 허리를 

틀며 장도를 휘둘렀다. 

그야말로 상상조차 하기 힘든 쾌속한 동작이었다. 

"우와악!" 

두 마디 처절한 비명이 터졌다. 백의인들은 허리가 절단나며 거꾸러지고 말았다. 장 

도와 동체를 동시에 베어버린 것이다. 실로 듣지도 보지도 못한 가공할 도법이었다. 

선실 안으로 또 하나의 인영이 날 듯이 뛰어 들어왔다. 반송은 다시 장도를 뻗으려 

다가 황급히 멈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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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누님!" 

일행은 밀림을 뚫고 오지산(五指山) 기슭으로 들어섰다. 

산으로 접어들자 원숭이를 비롯하여 밀림에 사는 각종 금수들이 꽥꽥거리며 일행의 

주위를 맴돌았다. 잎새가 널찍한 각종 식물들과 넝쿨로 온통 뒤덮여 있는 밀림지역 

은 더욱 습도가 높은 듯했다. 

늪지대가 곳곳에 깔려 있었다. 만일 지리를 모르고 멋대로 들어선다면 늪지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거나 이름도 모를 독충(毒蟲)에 물려 황천길로 가는 것은 시간문제 

일 듯했다. 

'정말 기이한 곳이군.' 

장천린은 밀림의 풍경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는 사업을 위해 중원 여러 곳을 여 

행해 보았지만 해남도처럼 이국적인 풍경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어쨌거나 일행은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했다. 울창한 밀림 한가운데 있는 거대한 장 

원에 다다른 것이다. 장원은 중원의 건축양식과는 판이하게 틀린 모습이었다. 

지붕은 둥글었고 뾰족한 첨탑(尖塔)의 형상이었다. 비록 금백만이나 황학산의 저택 

처럼 광대하지는 않았으나 밀림과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으며 어딘가 신비한 분 

위기를 풍겼다. 

동방사성은 곧장 탁일비가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원계묵은 그림자처럼 장천린을 수 

행했으며, 단위제와 운표는 백살대와 함께 장원의 한 대전에 머물게 되었다. 

황금의 손 탁일비는 장원 깊숙한 곳에 있는 한 석전(石殿)에 기거하고 있었다. 그는 

석전의 침실에 누운 채 일행을 맞이했다. 병색이 완연해 보이는 칠순 가량의 노인 

으로 고목처럼 말라 있었다. 

동방사성은 절도 있게 예를 갖추며 보고했다. 

"용대인을 모시고 왔습니다." 

탁일비는 몸을 일으키려고 버둥거렸다. 그러나 잘 되지 않자 가래 끓는 듯한 음성으 

로 말했다. 

"몸을... 일으켜 다오." 

동방사성은 그의 상체를 부축해 일으켜 앉혔다. 탁일비는 장천린과 단위제를 번갈아 

바라보며 쇠잔한 음성으로 물었다. 

"어느 분이... 용대인이시오?" 

장천린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포권했다. 

"제가 바로 용백군입니다." 

"나... 탁일비요." 

탁일비는 힘겹게 말하고 어깨를 들썩이며 기침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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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야." 

동방사성이 뒤에서 그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잠시 후 숨이 가라앉은 듯 탁일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북경의 태진왕 전하께서... 생각보다 빨리 결정해 주셔서 기쁘오." 

장천린은 담담히 말했다. 

"몸이 좋지 않으신 듯한데 내일 이야기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탁일비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오. 촌각을 다투는... 문제요. 쿨럭! 쿨럭......." 

그는 다시 기침이 쏟아지는 바람에 한참 애를 쓰다가 말했다. 

"사성... 네가 대신 말씀드려라." 

"예, 노야." 

동방사성은 잠시 생각을 가다듬은 후 차분하게 입술을 열었다. 

"지금으로부터 일 년쯤 전이었소이다. 해남도에 일단의 무리들이 무단으로 상륙해 

왔습니다." 

그의 설명이 이어졌다. 

수척의 범선이 해남도의 해구(海口)에 상륙했다. 상륙한 순간부터 그들은 무차별 노 

략질을 벌였다. 

그들은 단숨에 해구의 관청을 박살냈으며 관인들을 몰살시켰다. 그들의 정체는 왜구 

(倭寇)였다. 그러나 그 규모나 그들이 지닌 무공은 일반 왜구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조직적이며 강했다. 그들은 잘 훈련된 왜국의 정병(精兵)들이었던 것이다. 

그들이 해남에 쳐들어온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십수 년 전, 왜국에서는 풍신수길(豊臣秀吉)이 죽고 덕천가강(德川家康)이 권력을 

장악했다. 조선에서의 긴 전쟁의 패배가 풍신수길의 죽음과 실정의 원인이 된 것이 

다. 

덕천가강은 기회를 틈타 세력을 장악했다. 그는 풍신수길의 총애를 한몸에 받던 석 

전삼성(石田三成)을 가장 먼저 제거해야 했다. 석전삼성이 풍신수길의 어린 아들을 

옹립하여 대를 이으려 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석전삼성이 이끄는 가신들과 덕천가강의 추종자들은 왜국의 운명을 바꾸게 하 

는 대격돌을 벌였다. 훗날 관원(關原)의 전투라 불리우는 피비린내 나는 전투가 바 

로 그것이었다. 

관원의 전투에서 석전삼성은 대패한 후 포로로 잡히고 만다. 나머지 수하들은 분루 

를 삼키며 패퇴할 수밖에 없었다. 덕천가강은 석전삼성을 처형한 후에도 후환을 없 

애기 위해 그의 수하들을 닥치는 대로 척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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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전삼성의 수하 중에 이 인의 무사가 있었다. 청풍류(靑風流)의 창시자로 도의 달 

인인 석정일랑(石井一郞)과 신음류(新陰流)의 제일고수인 청산의명(靑山義明)이 바 

로 그들이었다. 

두 사람은 자신들을 따르는 무사들과 함께 왜국을 떠났다. 국내에서는 발붙일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영원히 도망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덕천가강에게 복수할 날을 손꼽으며 

힘을 기르기 시작했다. 동해의 한 섬에 근거지를 정한 채 비지땀을 쏟으며 정병을 

양성했다. 

군비와 식량은 해상에서 노략질을 통해 조달했다. 비록 표면적으로는 해적이었으나 

그들의 가슴 속에는 본국(本國)으로 돌아가 대권을 탈환하리라는 원대한 꿈이 있었 

다. 

여기까지 얘기한 동방사성은 단정짓듯 말했다. 

"그 자들이 해남도에 상륙한 목적은 노야의 황금 때문입니다. 노야의 재물을 탈취하 

여 군자금으로 쓰려는 것입니다." 

장천린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설마 탁일비의 생명을 위협하는 무리들이 왜국인들이 

었을 줄이야! 

동방사성은 힘주어 말했다. 

"조만간 그들은 다시 쳐들어올 것입니다. 그러나 이곳의 관부는 썩을 대로 썩은 데 

다 무기력하므로 그들을 막아낼 수 없습니다. 그래서 노야께서는 전하께 서신을 올 

린 것입니다." 

장천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의외로구나. 일이 이렇게 클 줄은 몰랐다.' 

이번 일은 결코 단순한 게 아니었다. 해결하려면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상황을 판단한 그는 정중히 손을 모아 포권했다. 

"잘 들었습니다. 저에게 시간을 주십시오. 신중히 생각해 본 다음 대책을 강구해 보 

겠습니다. 그럼 오늘은 이만......." 

탁일비는 고개를 끄덕이며 기진한 음성으로 말했다. 

"모셔 드려라. 사성......." 

"예! 노야." 

장천린은 힘없이 기대 앉아있는 탁일비의 얼굴에서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것을 보았다. 왠지 그를 혼자 두고 나오는 것이 마음에 걸렸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 

었다. 해남도에 도착한 첫날이므로 이렇다하게 행동할 처지가 아니었던 것이다. 

선실로 뛰어든 인영은 부금진이었다. 그는 백연연을 끌어안으며 분노성을 내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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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백누님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소?" 

반송은 턱으로 바닥에 뒹굴고 있는 세 구의 시체를 가리킨 후 말했다. 

"난 밖을 살펴보겠네. 이곳은 부소협이 맡아주게." 

그가 밖으로 나간 후, 부금진은 선실 안을 살펴보았다. 

'단 일도에 베었다. 그것도 무기까지 한 번에.......' 

부금진은 가슴이 섬뜩했다. 새삼 반송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그러나 급한 것은 백연 

연의 상세였다. 그녀는 등에 한 푼이나 되는 깊은 도상(刀傷)을 입어 뼈가 드러날 

정도였다. 

'지독하게 당했구나!' 

그는 눈썹을 찌푸렸다. 

'백누님에게 이상이 생긴다면 용대인을 볼 낯이 없을 것이다." 

그는 품 속에서 금창약을 꺼내 백연연의 상처 부위에 조심스럽게 발랐다. 이어 자신 

의 옷자락을 찢어내 그녀의 등을 칭칭 동여매 주었다. 그 동안 밖에서는 연속 처절 

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우선은 생명에 지장이 없을 것이다.' 

부금진은 백연연을 침상에 눕혀 놓은 후 밖으로 걸어 나갔다. 

갑판 위에는 놀라운 장면이 벌어져 있었다. 수십 구의 시체가 뒹굴고 있었는데 그들 

은 하나같이 동강이 나 있었다. 게다가 복장이 동일한 왜인들이었다. 

한쪽에서는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다섯 명의 왜인이 한 사람을 포위한 채 

공격하고 있었다. 포위된 자는 다름 아닌 반송이었다. 그는 칼을 높이 들어올린 채 

한가운데 우뚝 서있었다. 

다섯 명의 왜인들이 장도를 휘두르며 일제히 공격했다. 

'역시 청풍류의 도법이구나.' 

부금진은 전율을 금치 못했다. 오 인의 공격은 전광석화처럼 빠른 데다 상호 배합이 

절묘하게 이루어져 도저히 피할 틈을 주지 않았다. 부금진은 눈을 부릅떴다. 반송 

이 칼을 직선으로 내려치며 오 인의 한가운데로 파고드는 것이 아닌가? 

'저 도법은!' 

오 대 일의 격돌 속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투... 툭툭......! 

다섯 개의 머리가 마치 수박통처럼 갑판 위를 굴렀다. 실로 가공할 일이었다. 단 

일도에 오 인의 머리통이 떨어진 것이었다. 부금진은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저건 천월도법(天月刀法)! 무림사상 가장 빠르다는 해남(海南)의 쾌도법이 아닌가! 

무림에 전해지는 도법의 종류는 수천, 수만 종에 달한다. 그러나 무림사를 통해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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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년 이상을 내려오며 그 위력이 인증된 도법은 몇 가지 되지 않았다. 

무극팔로도세(無極八路刀勢), 수라구류도(修羅九流刀), 흑사도법(黑 刀法), 천월도 

법(天月刀法), 풍뢰도법(風雷刀法) 등이 그것이다. 

그 도법들은 누대로 내려오며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왔다. 작금에 이르러 그 도법들 

은 상호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발전하여 각자 일가를 이루었다. 단지 익히는 

사람의 자질이나 숙련도에 따라 위력에 다소의 차이가 날 뿐이었다. 

그런데 정체불명의 사나이 반송이 오대도법 중에서 쾌도로 사상최강으로 알려진 바 

있는 천월도법을 사용한 것이다. 

첨... 벙! 

피묻은 장도가 바다에 떨어졌다. 오 인의 왜인무사를 해치운 반송이 칼을 던져버린 

것이다. 그는 아직도 멍한 표정으로 서있는 부금진을 돌아보며 물었다. 

"백소저의 상처는 어찌 되었는가?" 

부금진은 정신을 차렸다. 

"생명에는 지장이 없소. 단지......." 

"단지?" 

"등뼈를 다쳐서... 장담할 수가 없소.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소." 

반송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 순간 갑자기 안색이 창백해졌다. 

부금진은 그의 얼굴을 미처 보지 못하고 갑판 위의 시신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대체 이 자들이 무슨 이유로 우릴 공격했을까요?" 

그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반송이 한쪽을 바라보며 안색이 굳어져 있었기 때문이 

었다. 반송의 눈길을 따라 고개를 돌리던 그의 눈이 크게 떠졌다. 

"저것은......!" 

바다 저편에 배 한 척이 떠있는 것이 보였다. 거대한 범선이었다. 그 범선의 돛에 

검은 솔개 그림이 새겨져 있었다. 

"검은 바람!" 

부금진은 돛을 노려보며 부르짖었다. 바다의 무법자 검은 바람의 표식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었다. 그는 반송을 바라보았다. 반송의 눈빛이 무섭게 번뜩이고 있었다. 

검은 바람의 출현! 

대륙의 남단에 위치한 섬 해남도에 나타난 해적선 검은 바람! 

부금진은 갑자기 찬바람이 부는 것을 느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3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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