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장 상술의 귀재
흔히 부유한 사람이 나이가 들면 느는 것이 살집이요, 흐르는 것이 번들거리는 개기
름이다. 그도 예외는 아니었다.
뚱뚱했다. 뚱뚱해도 너무 뚱뚱하다. 어찌나 살이 쪘는지 양뺨이 축 늘어졌으며 턱은
살에 파묻혀 가슴과 맞닿아 있을 정도다. 체구도 보통 사람의 두 배가 넘는다. 따
라서 그가 앉는 의자는 특별히 주문해야할 정도였다.
눈은 가늘고 길었다. 눈까풀은 두터운 살집으로 인해 뜨기조차 무거운 듯 늘 감겨있
는 듯했다. 따라서 그저 살덩이로 이루어진 얼굴에 가느다란 선을 그어놓은 것처럼
보였다.
이 노인이야말로 산동성에서 제일 간다는 거부인 황가철장(黃家鐵莊)의 장주 황학산
이었다. 정확히 말해 그는 십일대째 황가철장을 유지하고 있었다.
네 명의 중년무사가 칼을 찬 채 그의 뒤에 우뚝 서있다. 그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살
벌했다. 황학산은 특별 주문한 의자에 앉아 대청 한가운데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 떴는지 감았는지 모르는 실눈으로 내려보고 있었다.
대청 한가운데에는 오순 가량 되어 보이는 우람한 체격의 황의노인이 연신 식은땀을
흘리며 서있었다.
"호개악(胡介岳), 무슨 이유로 날 찾아왔는지 몰라도 노부는 관심 없네. 시간이 없
으니 어서 얘기하고 나가 주게."
황학산은 냉정하게 말했다. 비대한 몸뚱이에서 나온 것이라도 믿기 힘들 정도로 칼
칼한 음성이었다.
호개악. 그는 제남부에서 제법 이름난 무도관인 청무관의 관주다. 그는 만면에 간절
한 표정을 지으며 애원했다.
"황노야, 부탁입니다. 이번 한 번 만 도움을 주신다면 평생 잊지 않겠소이다."
황학산은 무심한 어조로 물었다.
"무슨 도움을 달라는 건가?"
"은자 이십만 냥만 빌려주십시오. 반년 이내에 반드시 갚겠소이다."
황학산은 입술을 들썩였다.
"이십만 냥?"
그의 얼굴 근육이 흔들렸다.
"흘흘흘, 자네는 이십만 냥이 뉘집 개 이름인 줄 아나?"
"노야......!"
"나가 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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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학산은 단호히 거절했다. 호개악은 완전히 기가 죽었다. 그는 비굴한 표정으로 손
바닥을 비비며 말했다.
"제발, 청무관을 잡히겠소이다."
황학산은 껄껄 웃었다.
"그까짓 청무관이야 털어 봐야 은자 오만 냥도 안돼. 게다가 자네는 한 달 전 용문
전장 제남지부에서 청무관을 저당잡혀 은자 삼만 냥을 받았지 않은가?"
약점을 잡힌 호개악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흘흘, 자넨 스스로의 역량도 재보지 않고 무리하게 사업을 벌였어."
"노야!"
황학산은 단정적으로 선언했다.
"자넨 이제 끝이야."
호개악은 몸을 후들후들 떨었다.
"자네는 그저 청무관이나 운영하는 게 나았어. 주제넘게 감히 사업을 벌이다 패가망
신한 꼴이라니......."
모욕도 이런 모욕이 없다. 아무리 돈을 빌리러 왔다지만 황학산의 말은 그의 자존심
을 무참히 구겨버렸다. 호개악의 안색이 희다 못해 푸르게 질리고 말았다. 황학산은
그의 심정은 아랑곳없이 계속 말했다.
"어제 저녁 한 복면인이 청무관에 뛰어들어 무술사범 열 두 명의 팔을 부러뜨리고
자네 조카 은이랑이란 놈을 반쯤 죽여놨다고 하더군. 쯧쯧! 청무관도 이젠 끝이야.
자네 도장에 무술 배우러 갈 사람이 어디 있겠나? 자넨 소생할 아무 건덕지도 없어
졌어."
"노야......."
호개악의 눈에 절망이 어렸다. 황학산은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냉정하게 말했다.
"여봐라, 호관주를 배웅해 드려라."
등 뒤에 서있던 네 명의 무사 중 한 명이 호개악을 향해 다가갔다.
"가시지요. 호관주!"
호개악은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쥐도 궁지에 몰리면 문다고 했다. 자존심이
뭉개질 대로 뭉개진 그는 버럭 외쳤다.
"비켜라!"
그는 팔꿈치로 밀쳤다.
"흥!"
무사는 코웃음치며 손가락을 갈고리처럼 구부리더니 호개악의 곡지혈(曲池穴)을 움
켜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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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
팔꿈치를 잡히자 호개악은 그 부분이 끊어지는 듯한 고통에 입을 떡 벌렸다. 그는
얼굴이 온통 시뻘겋게 변했다. 무사가 그의 귓전에 대고 나직이 속삭였다.
"호개악, 팔뚝을 아주 분질러 줄까?"
무사는 그를 질질 끌고 밖으로 사라졌다.
대청 밖에서 호개악이 울부짖는 음성이 들려왔다.
"노야... 제발......."
"쓰레기 같은 놈."
황학산의 얼굴에 경멸이 어렸다. 그에게 있어 호개악은 발톱의 때만큼도 비중이 없
는 것 같았다. 비록 제남에서는 꽤 알려진 무인이라고 하나 그의 눈에는 빚 투성이
의 평범한 늙은이에 불과했던 것이다.
호개악이 개처럼 끌려나간 지 얼마나 되었을까? 밖에서 하인의 보고가 들려왔다.
"노야, 손님이 오셨습니다."
"누구냐?"
"양가장의 용백군 대인입니다."
황학산의 가는 눈에서 번쩍 빛이 일어났다.
"용백군?"
황학산은 용백군과 안면이 있었다. 아니 안면 정도가 아니라 그가 산동성 일대에서
가장 경계하는 인물이 바로 용백군이었다. 오래 전부터 그는 용백군이 뛰어난 사업
가가 될 것이라 점찍고 있었던 것이다. 황학산은 급히 명을 내렸다.
"그를 객원에 정중히 모셔라."
황가철장의 대문을 들어선 이후 운표는 연신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수만 평이 넘는 저택의 규모도 규모이거니와, 곳곳에 경비를 서고 있는 무사들이 그
의 신경을 건드리고 있었다. 타고난 무인인 그는 직감적으로 무사들이 보통 실력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마치 병영(兵營)에 들어온 것 같군요."
운표의 말에 장천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했다.
"재산은 모으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네. 황학산의 이재능력이 아
무리 뛰어나다 해도 그를 호위해주는 무사들이 없다면 녹림 비적들의 밥이 될 게 아
닌가? 그는 자신을 지킬 줄 아는 자네."
운표는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호위무사들이 얼마나 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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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병만 해도 천 명이 넘네. 장원 안에만 오백 명 이상의 무사들이 있을걸."
운표는 눈썹을 꿈틀했으나 무슨 생각에선지 입가에 비웃음을 담고 말했다.
"후후, 숫자만 많다고 능사는 아니겠지요."
두 사람은 하인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잠시 후 그들은 객원에 안내되었다. 객원은
화려하게 꾸며져 있어 귀빈을 접대하는 곳임을 알 수 있었다.
"잠시 쉬십시오. 곧 장주님께 연락이 올 것입니다."
하인은 공손히 절을 한 후 사라졌다. 운표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황학산은 무척 바쁜 모양이지요?"
장천린은 빙긋이 웃으며 대답했다.
"천만에. 그는 극히 한가하네. 그가 바쁜 시간에 찾아오는 것은 실례가 되므로 일부
러 일이 없는 시각에 방문했네."
운표는 눈썹을 꿈틀했다.
"그렇다면 바로 만나 주지 않고 객원에서 기다리라고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걸 모르겠나? 그는 날 시험하고 있는 것이네."
운표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표정이었다. 장천린은 담담한 어조로 설명했다.
"운표, 상계는 무림계와 다르네. 성질대로 행동해서는 아무 것도 되는 것이 없네.
황학산은 산동제일의 부호로 상당히 오만한 위인이네. 게다가 그는 양가장에 대해
경쟁의식을 지니고 있어 나에 대해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네. 그밖의 다른 인물들
은 그의 안중에도 없지."
운표는 투덜거렸다.
"하지만 이렇게 무작정 기다릴 수는 없지 않습니까?"
"물론 그럴 수는 없지."
장천린은 벽에 매달린 끈을 잡아 당겼다. 그러자 멀지 않은 곳에서 영롱한 방울소리
가 울렸다. 잠시 후 귀엽게 생긴 시비가 나타났다.
"시키실 일이 있습니까, 손님?"
시녀는 뜻밖에도 예쁜 용모에 총기가 엿보였다.
"흠! 황가철장에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아름답군?"
장천린의 말에 시비는 얼굴을 빨갛게 붉혔다.
"이름이 무엇이냐?"
"천녀는... 당혜라고 합니다."
시비는 감히 그의 얼굴을 마주보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장천린은 눈을 가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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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채 그녀를 응시했다. 그러자 시비는 보이지 않는 끈으로 전신이 꽁꽁 묶인 듯 꼼
짝할 수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가슴이 마구 두방망이질을 쳤다.
"문방사우를 준비해다오."
장천린의 말에 당혜는 멈칫했다. 문방사우는 바로 탁자 위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시키는 대로 문방사우를 탁자에 늘어놓았다. 장천린은 다시 명령했다.
"먹물을 갈아라."
당혜는 다소곳이 앉아 먹을 갈았다. 그녀는 도무지 그의 말을 거역할 수가 없었다.
그 광경에 운표는 입을 벌릴 지경이었다.
'세상에! 남의 시녀를 마치 자기 하인처럼 부리는구나. 정말 용대인의 수완은 놀랍
기만 하구나.'
장천린은 붓을 들어 일필휘지(一筆揮之)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의 필체는 용이 날고 봉황이 춤추는 듯 웅휘하고 미려했다.
-박산(博山)의 함배옥(咸杯玉)은 양문(楊門)에 가깝고, 철계(鐵溪)의 물은 곧 바닥
이 드러난다.
운표는 그가 쓴 글을 보고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가 없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장천
린은 종이를 둘둘 말아 당혜에게 건네주었다.
"이것을 황노야에게 전해주고 오너라."
"네."
당혜는 무엇에 홀린 듯이 공손히 종이를 받았다.
"참, 황노야에게 전해다오. 시간이 없어서 잠시 후에 돌아가야 한다고 말이다."
"알겠습니다."
당혜가 총총히 사라진 지 꽤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운표의
눈썹이 점차 찌푸려져 가는데 장천린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가자, 운표."
"예, 용대인."
두 사람은 객원을 나왔다. 천천히 걸어 황가철장의 대문 쪽으로 향하는 데도 아무도
저지하는 사람이 없자 장천린의 눈썹이 미미하게 찡그려졌다. 그는 내심 중얼거렸
다.
'내 생각이 틀렸단 말인가?'
"잠깐만! 기다리세요, 용대인님!"
저만치서 당혜가 소리치며 달려오고 있었다. 그녀는 엎어질 듯 당도하더니 가쁜 숨
을 몰아쉬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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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야께서... 대인을 만나시겠답니다."
장천린의 입가에 신비한 미소가 어렸다.
"그래?"
장천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마지못한 듯이 몸을 돌렸다.
황학산의 실처럼 가느다란 눈에 기묘한 빛이 흘렀다.
"용대인, 노부가 급한 일 때문에 대인을 소홀히 한 점 이해해 주시기 바라오."
장천린은 빙긋이 미소지었다.
"물론이지요. 하지만 저도 마냥 기다릴 수가 없어 나중에 찾아뵈려던 참이었습니다.
노야께서 이렇게 시간을 내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황학산은 의아한 듯 물었다.
"무슨 일로 노부를 만나러 온 것이오?"
장천린은 그를 똑바로 주시하며 말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황가철장에서 필요로 하는 모든 물품의 수상 운
송권을 저희 양가장에서 맡고자해서 찾아 왔습니다."
"......!"
황학산의 눈에서 날카로운 빛이 뻗어 나왔다.
장천린의 제의는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황가철장은 강북도상에서 소모되는 철기류
의 삼 할 이상을 생산해 왔다. 그러기 위해서는 막대한 철광석이 필요했다. 그들은
철광석을 주로 황하의 수로를 이용해 광산에서 직접 여러 곳에 퍼져 있는 철공소로
운송해 왔다.
그 뿐이 아니다. 철광석을 녹이기 위해서는 엄청난 양의 나무와 석탄을 가져와야 한
다. 게다가 완성된 철기류를 강북도상의 상인들에게 전달하는 것 또한 상상을 불허
할 정도로 큰 일이었다.
따라서 황가철장의 운송권에는 막대한 이권이 걸려 있었다. 그 물품을 모두 운반하
려면 대형 범선 백여 척이 쉴 틈도 없이 움직여야 했으며 그 비용 또한 천문학적인
액수에 달했다.
그런 이권이 달려있는 운송권을 황가철장이 남에게 넘겨줄 리가 없었다. 지금까지
그들은 운송을 직영으로 운영해 오고 있었다.
황학산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용대인, 지금 노부와 농담하자는 것인가?"
"진담입니다."
"수로의 운송은 우리 황가철장이 직영하고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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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있습니다."
"하면?"
"수상 운송에 관한 한 양가장이 황가철장보다 정통하기 때문입니다."
황학산은 냉소했다.
"나가 주게. 더 얘기할 필요를 느끼지 않네."
축객령이 떨어졌다. 그러나 장천린은 굴할 줄 몰랐다.
"한 마디 하겠습니다. 현재 노야께서 확보하고 계신 철계의 광산 열 아홉 군데는 앞
으로 삼 년 안에 바닥이 날 것입니다."
"......!"
황학산의 안색이 굳어지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장천린은 빠른 어조로 말을 이었다
"철계 외에도 청도(靑島), 완주(阮州), 경량(京亮), 탄곡(彈谷)의 철광 중 향후 십
년 이상을 버틸 수 있는 곳은 한 군데도 없습니다. 일단 철계의 철광석이 고갈되면
당장 물량부족에 시달리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노야께서는 올해부터라도 다른 광산
을 알아보셔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박산(博山), 주령(朱領), 당산(唐山), 촉
읍(蜀邑), 환재(晥在)의 다섯 군데 광산을 노야보다 먼저 매입해 버린다면 노야께서
는 치명타를 입게 될 것입니다."
"......!"
황학산의 축 처진 뺨이 부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물론 노야는 양가장의 십 배에 달하는 재력을 지녔으니 미리 손을 쓸 수도 있습니
다. 하지만 박산의 주인 함배옥(咸杯玉)은 양가장과 인척관계이고, 촉읍과 환재의
광산은 이미 제가 매입했습니다."
황학산은 이마에 땀방울이 송글송글 어렸다. 그는 목이 타들어 가는 듯한 갈증을 느
끼며 침을 꿀꺽 삼켰다.
"노야께서는 잘 해야 주령과 당산 중 한 군데 정도만 구입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
지만 당산에도 이미 한 달 전 제가 사람을 보냈지요."
그렇다. 한 달 전 장천린은 당산으로 진총관과 초광을 보낸 적이 있었다. 그 모든
것은 치밀한 계획 하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마침내 황학산은 더 이상 초연할 수가
없었다. 그는 자세를 바꾸며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용대인, 지금...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가?"
"노야께서 그 다섯 군데의 광산을 얻지 못하면 어쩔 수 없이 다른 광산을 택해야 합
니다. 그러나 이곳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 수백 리 아니면 천여 리나 떨어져 있습니
다."
장천린은 마치 청산유수처럼 쉬임없이 말을 이었다.
"무리해서 먼 곳의 광산을 택하면 운송에만 막대한 비용이 들어가게 됩니다. 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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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해 황가철장의 제품은 단가가 오르게 되어 다른 곳과 경쟁이 될 수 없습니다. 결
국 노야의 철공소 열 두 군데는 급격히 위축될 것입니다. 황가철장은 철기류 생산이
주사업이므로 머지않아 수천 명의 점원이 일자리를 잃게 되고 수백 개의 상점도 문
을 닫아 걸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물론 앞으로 오 년 정도 뒤의 일이긴 합니다만."
황학산의 양뺨이 눈에 띄게 경련을 일으켰다.
'무... 무서운 놈.......'
그의 가슴에는 미칠 듯한 격노가 일어났다. 그는 실눈 사이로 흉광을 쏟으며 거칠게
말했다.
"내가 마음만 먹으면 양가장 정도는 통째로 날려버릴 수도 있다는 걸 모르나?"
장천린은 싱긋 웃었다.
"노야께서는 호랑이 한 마리를 잡으려고 태산을 불태우시겠습니까?"
"......!"
황학산의 얼굴은 물론 비대한 몸에서도 땀이 자꾸만 흘러내렸다. 그는 주먹을 꽉 움
켜쥐고 있었다. 그는 강북도상, 그것도 산동성에서 설마 자신에게 이런 식으로 도전
해올 자가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는 필사적으로 대응 방안을 찾아보았다
. 그러나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장천린의 말에는 한 점의 허점도 찾을 길이 없었
다.
'으음! 어쩔 수 없다. 놈은 내 급소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
황학산은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에 광산을 구입해 둘 것을!'
하지만 어찌하랴! 이미 늦어도 철저히 늦어 버린 것을. 그는 마침내 백기를 들고 말
았다.
"좋다. 그대가 말한 광산을 노부에게 양보해다오. 그 대가로 황가철장의 운송권을
양가장에 이양하겠다."
실로 파격적인 양보였다. 장천린은 싱긋이 웃었다.
"감사합니다."
그는 정중히 포권한 뒤 은근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렇게 되면 노야께서 지니고 계신 백 척의 선박은 필요가 없겠지요?"
"......!"
황학산은 안색이 대변했다.
그렇다. 직접 운송을 하지 않는다면 백 척이나 되는 대형 범선이 무슨 쓸모가 있겠
는가? 그대로 두면 관리비만 엄청나게 들 것이다. 더욱이 황가철장은 대대로 철의
사업만 했을 뿐 선박업과는 무관했다. 그는 신음을 발하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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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어쩌겠다는 건가?"
"제가 구입하겠습니다."
황학산은 거듭 뒤통수를 얻어맞는 기분이었다. 그는 기분이 몹시 나빴다. 계속해서
상대의 수에 말려드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역시 장사꾼이었다.
'끄응! 어차피 두어봐야 짐만 될 뿐이지.'
그는 몸을 뒤로 기대며 물었다.
"얼마에 사겠나?"
"척당 은자 만 냥으로 치면 백만 냥입니다."
황학산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지금 농담하는 건가? 내 배는 최소한 척당 이만 냥은 되네!"
장천린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 배들은 너무 낡았습니다. 게다가 철광석 운반용으로 건조되었으므로 다른 용도
로는 쓸 수가 없습니다. 만 냥도 많다고 할 수 있습니다."
황학산은 기가 막혔다. 용백군의 계획은 치밀하여 바늘구멍만한 틈도 없었다. 결국
그는 두손 두발 다 들 수밖에 없었다.
"내가 졌다! 자네 마음대로 하게."
"감사합니다."
장천린은 정중히 포권하고는 낭랑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럼, 내일 안으로 사람을 보내 문서를 작성할 수 있도록 조치하겠습니다."
황학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와 얘기하면 할수록 더 큰 손해를 입을 것 같은
기분이 든 것이다.
"그럼. 바쁘신 시간을 뺏어 송구스럽습니다."
장천린은 비로소 몸을 일으켰다. 그 순간 황학산은 눈을 번쩍 떴다. 그의 눈에서 이
상한 광채가 흘러나왔다. 갑자기 그는 비대한 몸을 일으키더니 장천린의 손을 덥석
잡았다.
"용대인, 이번에는 내가 졌네. 하지만 나 황학산은 빚을 지고는 잠을 이루지 못하는
성격이라는 걸 기억해 주게."
장천린은 빙긋 웃었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는 다시 한 번 정중히 포권한 후 물러났다. 잠시 후, 그는 운표와 함께 황가철장
의 육중한 대문을 나섰다. 어느덧 저녁노을이 아름답게 서녘하늘을 물들이고 있었다
장천린은 양가장에서 닷새 동안 머물며 여러 가지 일을 처리했다. 그동안 그가 해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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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들은 가히 놀랍기만 했다.
그 중에서도 특기할 만한 것은 막대한 이권이 걸려 있는 황가철장의 운송권을 전격
적으로 따낸 것이었다. 게다가 백 척의 운송선을 시세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헐값에
사들였다.
이로써 양가장의 사업은 단숨에 다섯 배 이상 신장되게 되었다.
그러나 장천린이 이토록 엄청난 사업을 이룩한 데 사용한 미끼는 고작 은자 이만 냥
짜리 종이조각에 불과했다. 그는 촉읍과 환재의 광산을 완전히 인수한 것이 아니라
각각 일만 냥의 계약금을 걸었을 뿐이었다.
결국 그는 이만 냥을 투자하여 선박 백 척의 매입에서 최소한 오십만 냥을 남겼으며
, 독점적인 운송권 획득으로 인해 벌어들일 이익금은 더욱 막대한 것이었다.
양익상의 입이 찢어질 듯이 벌어진 것은 물론이다.
"허허허헛......! 백군, 자네가 앞으로 삼 년 만 더 사업을 한다면 산동 제일의 대
사업가가 될 것이 틀림없네!"
양익상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했다. 그러나 장천린은 그저 담담히 웃을 뿐이
었다.
제남에 온 지 엿새째 되는 날, 그는 구룡상선에 올랐다. 단위제, 백연연, 원계묵,
운표, 부금진도 따랐으며 백살대도 함께 승선했다. 구룡상선은 황하를 통해 동해(東
海)로 빠져나갔다.
범선은 발해만을 거쳐 산동반도를 지났다. 연후 남쪽으로 방향을 돌려 청도를 지나
염성으로 향했는데 항로는 순조로웠다. 범선이 장강 하구에 있는 숭명도(崇明島)에
도착했을 때는 제남을 떠난 지 십 이 일째 되는 날이었다.
촤... 아......! 철썩!
파도가 범선을 흔들었다. 바람이 다소 세게 불고 있었다. 그러나 구룡상선은 특별히
건조한 선박으로 그 정도 파도에는 항해에 아무 지장이 없었다.
장천린은 선실 안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독서로 소일했다.
오늘도 그는 두꺼운 고서를 읽으며 한가롭게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선실 안으로 백연연이 들어왔다. 그녀는 소반에 향차를 받쳐들고 있었다. 장천린은
독서삼매경에 빠진 듯 그녀가 들어온 것도 모르는 듯했다.
"......."
백연연은 그윽한 눈으로 그를 보더니 조심스럽게 소반을 한쪽에 내려놓고 선실 구석
에 있는 의자에 걸터앉았다. 장천린의 독서를 방해하고 싶지가 않았기 때문이었다.
꽤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장천린은 그녀의 존재를 느끼지 못한 듯 계속 책만
읽었다.
'이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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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였을까? 그녀는 용백군에 대해 갈수록 새로운 느낌이 들곤 했다. 처음에는
그저 유능한 젊은 상인 정도로 여겼었다. 그러나 생각을 달리해야 했다. 유하면서도
강하고, 섬세한 듯하면서도 날카로운 면을 지닌 사람. 게다가 사람들을 사로잡는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을 받으며 턱을 괸 채 독서에 몰두해 있는 용백군의 모습
은 신성스럽게까지 보였다. 백연연은 도무지 그에게서 눈길을 뗄 수가 없었다.
장천린은 책을 덮고 일어서다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니, 백소저?"
백연연은 달콤한 미소를 지었다.
"차를 끓여 왔어요. 하지만 대인께서 독서에 몰두해 있어 방해할 수가 없었어요."
장천린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이것 참... 실례가 이만저만이 아니오."
그는 탁자 옆의 빈자리를 가리켰다.
"앉으시오, 소저."
"네."
백연연은 찻주전자를 들다 실소를 흘렸다.
"차가 다 식어버렸군요."
장천린은 빙긋이 웃었다.
"백소저의 아름다움이 배인 찬데 식은들 어떻겠습니까?"
"어머!"
백연연의 얼굴에 홍조가 어렸다. 평소 농담을 잘 하지 않는 장천린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 하지만 왠지 그의 농담이 싫지 않았다. 그녀는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띤 채 차를 따랐다.
장천린은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물었다.
"이번 여행이 피곤하지 않으십니까?"
"아니에요. 오히려 즐거운걸요. 저는 이렇게 긴 여행은 처음이라 보고 느끼는 점이
많아요."
"다행입니다."
백연연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해남까지는 얼마나 남았나요?"
"앞으로 보름은 더 가야 할 것입니다."
두 사람은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었다. 젊은 남녀가 한 방에서, 그것도 마주앉아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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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은 편치 않은 일이다. 특히 백연연은 여인이므로 그런 감정이 더할 수밖에 없
었다.
그런데 백연연은 지금 이 자리가 무척 편했다. 그것은 장천린이 자연스러운 분위기
를 풍기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전 궁금한 게 하나 있어요."
"무엇이오?"
"용대인께서는 왜 결혼을 하지 않으셨나요?"
장천린은 뜻밖의 질문에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상대가 없으니까요."
백연연은 손으로 입술을 살짝 가리며 말했다.
"여인을 보시는 눈이 무척 까다로우신가 보군요."
장천린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제가 여인들에게 매력이 없기 때문이겠지요."
백연연은 가볍게 눈을 흘겼다.
"지나친 겸손은 오만이라고 하더군요. 매력이 없다니요? 세상 어떤 여인도 용대인을
보면 반하지 않을 수 없을 거예요. 단지......."
"......?"
"대인께선 마음의 문을 닫고 계신 것 같아요. 이건 제 예감이지만 분명 사랑하는 분
이 계실 거예요. 제 말이 틀렸나요?"
장천린은 어색한 표정으로 시선을 돌려 버렸다. 그의 눈길은 창 밖으로 향했다. 순
간 가슴 속에서 한 여인의 얼굴이 아련히 떠올랐다.
'옥교.......'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백연연은 장천린의 눈에 한 가닥 고통의 빛이 흐르는
것을 보았다.
'뭔가 사연이 있는 분이야.'
마침내 장천린의 입술이 떨어졌다.
"그렇습니다. 저에게도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지요. 하지만 지금은 곁에 없습니다."
백연연은 호기심이 가득한 눈을 반짝였다.
"어디... 계신가요?"
"아주 먼 곳에......."
백연연은 가슴이 철렁함을 느끼며 조심스럽게 반문했다.
"그럼 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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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닙니다. 단지 만나기 힘들 정도로 먼 곳에 있을 뿐이지요."
백연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재차 물었다.
"그 분을 아직도 사랑하시나요?"
"그렇습니다."
"그럼... 반드시 만나야 하겠군요?"
장천린은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백소저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랑하는 연인이 있지만 만날 수 없는 사람이
라면?"
백연연은 눈빛을 빛내며 또렷한 음성으로 답했다.
"만나야지요. 진정으로 사랑한다면요.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만큼 아픈 것은 없으니
까요."
장천린은 몹시 의외라는 느낌이었다.
'백소저는 내성적인 줄 알았는데 뜻밖에 강한 면도 있었군.'
그는 백연연을 응시하며 물었다.
"백소저는 사랑하는 분이 계십니까?"
백연연의 얼굴에 홍조가 어렸다. 그러나 대답을 회피하진 않았다.
"네, 있지요. 그 분은 저의 모든 것이에요. 제가 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면서도 사
랑하는 분이니까요."
장천린은 문득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태진왕을 말하는 것이로군.'
"하지만, 그 분은 제 마음을 모르지요. 말하자면 저 혼자만의 짝사랑일 뿐이랍니다.
이때 문이 열리며 운표가 들어서는 바람에 두 사람의 대화는 끊기고 말았다. 운표는
다급히 보고했다.
"용대인님, 난파선입니다!"
'난파선?'
뜻밖의 보고에 장천린은 흠칫했다. 그는 즉시 운표와 함께 갑판으로 나섰다.
갑판에는 이미 수십 명이 모여 맞은편 해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장천린은 그들의 시
선이 집중되고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과연 한 마장쯤 떨어진 해상에 한 척의 배가
보였다.
배는 비스듬히 기울어 있었으며 절반 이상 가라앉아 있는 상태였다. 장천린은 급히
선부들에게 지시했다.
"난파선으로 접근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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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룡상선은 난파선을 향해 이동해 갔다. 원계묵이 곁으로 다가서며 물었다.
"풍랑을 만난 걸까요? 형님?"
장천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준미한 눈썹이 보일 듯 말 듯 찌푸려졌다.
'풍랑 때문은 아니다. 최근 인근 해역에서 배를 침몰시킬 정도의 태풍은 불지 않았
다. 어쩌면.......'
구룡상선은 난파선에 닿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목교를 놓아라!"
원계묵이 눈살을 찌푸리며 만류했다.
"위험합니다, 형님. 배가 곧 가라앉을지도 모릅니다."
장천린은 단호히 말했다.
"괜찮다. 어서 목교를 걸쳐라."
선부들은 서둘러 난파선에 목교를 가설했다. 장천린은 앞장 서 난파선을 향해 건너
갔고 그 뒤를 원계묵과 운표, 그리고 단위제가 따랐다.
"......!"
일행은 배에 오른 순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난파선은 심하게 부서져 있었다. 갑
판은 물론 돛대가 부러졌으며 선실의 벽은 산산조각이 나있었다. 뿐만 아니라 여기
저기 불에 탄 듯 시커멓게 그슬려 있었다.
단위제는 날카로운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다가 불에 탄 나무조각을 주워 냄새를 맡더
니 침중하게 말했다.
"화포(火砲)에 당했습니다."
일행은 일제히 안색이 변했다.
"상태로 보아 그리 큰 화포는 아닙니다. 하지만 누가 이런 짓을 했는지 알 수가 없
군요."
이때, 부서진 선실로 먼저 뛰어 들어갔던 운표가 소리를 지르는 것이 들려왔다.
"시체가 있습니다!"
선실 안으로 들어간 일행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곳에는 실로 놀라운 광경이 벌어져 있었다. 무려 오십여 구가 넘는 시체가 널려
있었던 것이다. 끔찍한 것은 하나같이 칼로 난도질 당해 있다는 것이었다. 시체들은
이미 부패가 상당히 진행되어 코를 찌르는 악취가 선실을 메우고 있었다.
"이럴 수가......!"
장천린은 분노를 금치 못했다. 수많은 살인사건을 접했던 포정사사의 명포교인 단위
제조차 혀를 차고 있었다. 웬만한 일에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던 원계묵도 눈썹을
경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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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위제는 직업이 직업인지라 시체들을 면밀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는 시
체 사이에서 한 자루의 병기를 찾아냈다. 그것은 파풍도(破風刀)였다.
파풍도를 살펴보던 단위제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는 파풍도의 손잡이에 새
겨진 검은 색의 솔개 문양을 주시하고 있었다.
"검은 바람[黑風]......."
장천린은 그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알아낸 것이 있소?"
단위제는 파풍도를 내던지며 침중하게 말했다.
"이 배는 해적선에 당했습니다. 동해상에서 가장 악명 높은 해적선인 검은 바람의
짓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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