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두 사나이
북경에서 남쪽으로 이십여 리 가량 떨어진 산촌(山村).
기울어져 가는 초라한 주막 하나가 나그네의 심사를 달래는 듯하다. 화려한 북경성
과 이곳의 풍경은 가히 하늘과 땅의 차이를 느끼게 한다. 북경성에 비한다면 그지없
이 쓸쓸한 곳이었다.
주막 한 구석에서 원계묵은 술을 마시고 있었다. 탁자 위에 빈 술병이 수십 개나 늘
어져 있는 것으로 미루어 그가 얼마나 폭음했는지 알만한 일이었다. 그의 얼굴은 취
기로 인해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는 일일이 잔에 따라 마시는 것도 귀찮은지
아예 술을 병째로 들어 마시고 있었다.
벌컥벌컥......!
목구멍에 쑤셔 박다시피 마셔대던 원계묵은 술병을 탕! 하고 내리며 외쳤다.
"주인장! 여기 한 병 더!"
한쪽에서 눈치보고 있던 초로의 주막 주인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나으리, 취하신 듯한데 웬만하면......."
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원계묵이 무섭게 눈을 부릅뜨고 노려봤기 때문이었
다. 주막 주인은 소름이 쫙 끼쳤다. 그는 아무 소리도 하지 못하고 급히 술을 대령
했다. 원계묵은 다시 병째로 벌컥벌컥 들이킨 후 손등으로 입가를 쓱 문질렀다.
"빌어먹을......."
꽝!
그는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그 바람에 탁자 위에 늘어져 있던 술병들이 한꺼번
에 튀어 올랐다 바닥에 떨어지며 박살이 났다.
"내가 먼저 떠난다고 말하지 않았소! 당신이 먼저 말을 꺼낸 거야!"
허공을 노려보며 부르짖는 그의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다.
"흐흐! 돈이 굴러 들어올 것 같으니까 내 말은 성에 차지도 않는 거야."
그는 와락 자신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그의 두 눈은 이글이글 불타고 있었다.
'내 평생 가장 좋아했던 삼 인이 있었소. 날 키워주고 가르쳐 주신 사부, 그리고 처
음이자 마지막으로 사랑했던 여인, 세 번째는 당신이었소. 하지만 사부는 죽고, 여
인은 배신했소. 내게 남은 건 오직 당신 뿐이었소. 당신을 처음 만난 순간부터 친형
님 같았소. 짧은 기간이었지만 무척 정이 들었소. 비록 늑대처럼 잡초처럼 자라온
이 원계묵, 의리 하나는 누구에게도 자부할 수 있었소. 당신에게 약속한 이상 언제
까지나 기다릴 셈이었소. 그런데.......'
원계묵은 머리칼을 잡아뜯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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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같은 놈! 한 마디 서운한 말에 형님 곁을 떠나다니.'
원계묵은 번쩍 고개를 쳐들었다. 벌겋게 충혈된 눈이 허공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젠 끝났다. 해가 지면 구룡상선은 떠난다.'
원계묵은 갈등하고 있었다. 아직 해가 지려면 두 시진 이상이 남았다. 그는 다시 술
병을 들어 벌컥벌컥 마셨다. 그러다 탕! 소리나게 내려놓았다. 또 술이 떨어진 것이
다. 그는 힐끗 주방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때였다. 한 가닥 경멸에 찬 소리가 들
려온 것은.
"저 친구 주막을 전세 냈나? 혼자 기분 다 내는군!"
"흐흐흐! 계집한테 바람이라도 맞았나 보군?"
원계묵의 이글거리는 눈이 홱 돌아갔다. 두 명의 장한이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제법 힘깨나 쓸 듯이 보이는 험상궂은 인상들이었다. 그 중 한 명이 다짜고짜로 원
계묵의 턱을 치켜들었다.
"임마! 너만 감정 있고 우리는 없을 것 같냐?"
원계묵의 눈에서 시퍼런 광채가 솟아났다.
"쥐새끼 같은 놈들!"
"음?"
장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 새끼가!"
장한은 솥뚜껑 만한 주먹을 번쩍 치켜들었다. 그가 막 주먹을 날리려는 순간이었다.
"헉!"
장한들은 헛바람을 토하며 얼어붙고 말았다. 머리가 선뜻했다.
이마 위로 잘린 머리카락이 풀풀 흘러내렸다. 머리카락이 통째로 잘려버린 것이었다
'이럴 수가.......'
믿을 수가 없었다. 상대가 언제 장도를 뽑았는지, 언제 머리카락을 싹둑 잘라버렸는
지, 보기는커녕 느끼지도 못한 것이다.
원계묵은 상대하기도 귀찮다는 듯이 내뱉았다.
"사라지지 않으면 이번엔 목을 날려 버리겠다."
장한들의 얼굴에 공포의 기색이 떠올랐다. 그들은 재빨리 판단했다. 이럴 땐 달아나
는 게 상책이라고. 눈 깜빡할 사이에 그들은 줄행랑을 놨다.
원계묵은 탁자를 두드렸다. 떨어진 술을 주문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주방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주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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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청을 높였으나 마찬가지였다. 원계묵의 눈썹이 꿈틀했다.
탁!
문득 술병 세 개가 뻗어오더니 탁자에 놓였다.
"이 집 술은 이게 끝이오."
원계묵은 고개를 들었다.
눈 앞에 한 소년이 서 있었다. 십 오륙 세쯤 되어 보였을까? 붉은 입술과 초롱한 눈
망울을 지닌 미소년이었다. 그는 생글거리며 한 손에 장난감처럼 예쁜 소도를 만지
작거리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는... 뭐냐?"
"쯧! 상대하기 거북한 양반이군."
소년은 히죽 웃으며 말했다.
"나는 이 술의 주인이오. 주점에 마지막 남은 술을 산 것이오. 당신이 아무리 술을
원해도 이젠 없소. 정 마시고 싶다면 나와 함께 이 술을 마시는 수밖에 없소."
소년은 굉장히 빠르게 말했다. 한 마디밖에 하지 않은 것 같았는데 할 말을 다했다.
원계묵은 눈살을 찌푸리며 소년을 살펴보았다. 소년은 보면 볼수록 아름다운 용모
를 지니고 있었다. 어느 한 구석 모자란 데 없이 완벽한 미소년이었다.
다만 이마에 약간 흐트러진 채 내려온 머리카락이 퇴폐적인 느낌을 갖게 할 뿐, 우
수에 젖은 듯한 눈동자에서는 묘한 매력이 느껴졌다. 원계묵은 소년이 마음에 들었
다.
"앉아라."
소년은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웃었다.
"고맙소."
그의 미소는 더욱 매력적이었다. 원계묵은 이상하게 가슴이 울렁거림을 느꼈다.
"난 부금진(符錦眞)이오. 약칭으로 소진(少眞)이라 불러도 되오."
"내 이름은 원계묵이다."
소년 부금진은 실소했다.
"당신은 무척 오만하군요. 초면에 반말이라니?"
원계묵은 짐짓 무섭게 말했다.
"네가 존댓말을 듣고 싶다면 엄마 젖을 더 먹고 오면 된다."
"......!"
부금진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는 약이 오른 듯 원계묵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원계묵
은 기분이 좋아지고 있었다. 그는 술병 하나를 잡아 부금진에게 주고는 자신도 하나
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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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소진, 건배하자."
그는 멋대로 쩡! 소리가 나게 술병을 부딪친 후 입에 처박았다. 벌컥벌컥 들이키는
그를 바라보며 부금진은 혀를 내둘렀다.
"당신은 내가 두 번째로 본 술고래요."
"첫 번째는 누구냐?"
원계묵은 입가의 술을 쓱 닦으며 물었다. 부금진은 대답 대신 키득키득 웃기만 했다
. 예쁘장한 용모에 어울리지 않는 웃음이었다.
'괴상한 놈이군.'
원계묵이 그렇게 생각할 때 부금진은 술병을 거꾸로 들더니 역시 단숨에 마셔버렸다
. 그는 손등으로 입술을 닦으며 말했다.
"첫 번째 주당은 우리 아버지요."
원계묵은 멍해졌다. 그러나 이내 대소를 터뜨렸다.
"좋군, 네 부친이 술고래면 너도 웬만큼은 하겠구나."
그는 남은 술병 하나를 들고 흔쾌하게 말했다.
"자, 이것만 마시고 나가자. 꼬마친구, 내가 한잔 사마."
그는 술병을 들어 다시 입에 댔다. 그 순간 부금진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 술을 모두 마신다면 칼을 잡는 손에 기(氣)가 빠질 것이오."
원계묵은 술병을 입에서 떼며 부금진을 노려보았다.
"무슨 뜻이냐?"
부금진은 손으로 턱을 괸 채 씩 웃었다.
"귀송자 혁련노후가 지금 당신을 노리고 있소."
원계묵의 안색이 굳어졌다.
"너는 누구냐?"
"나는 소진이오."
부금진은 기묘한 웃음을 흘렸다. 원계묵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러다 문득 안색이 굳어졌다. 그의 귀에 미세한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벌써 시작됐군."
부금진의 말이 떨어진 순간이었다.
펑!
폭음과 함께 창문이 부서지며 세 가닥 인영이 원계묵을 덮쳤다.
그야말로 전광석화 같은 속도였다. 그러나 원계묵의 동작은 더욱 빨랐다. 그는 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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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 세워둔 장도를 뽑았다.
"크아악......!"
처절한 비명이 터졌다. 세 명의 사나이가 피를 뿌리며 날아갔다. 언제, 어떻게 장도
가 그들을 베었는지 육안으로는 도저히 볼 수가 없었다.
원계묵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피묻은 장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부금진은 탄성을 발했다.
"정말 대단하군요."
원계묵은 몸을 빙글 돌렸다. 그는 주점의 문 쪽을 노려보았다.
처음으로 그의 눈썹이 부르르 경련하고 있었다.
저벅... 저벅.......
분명 발자국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문은
열려 있었고 저녁 무렵의 사양(斜陽)이 주점 안으로 비쳐들고 있었다. 그 와중에 발
자국소리는 점점 더 가까이 들려왔다.
'이럴 수가......?'
원계묵의 눈에 의혹이 떠올랐다. 이때 부금진이 놀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귀림(鬼林)의 술법자들이오."
그 순간 발자국소리가 멈추었다. 동시에 음산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흐흐흐! 제법이군, 꼬마."
원계묵은 예리한 살기가 뻗어오는 것을 느꼈다. 등줄기를 면도날이 파고드는 것 같
았다. 그는 미끄러지듯 위치를 옮겼다.
파악!
탁자가 마치 두부 모처럼 잘려졌다. 실로 간발의 차이였다.
'이놈들... 형체가 없는 놈들이란 말인가?'
원계묵은 전신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한편 부금진도 긴장된 표정이었다.
다시 음산한 기운이 쇄도해왔다.
"웃!"
원계묵은 즉시 오른쪽으로 피했다. 어깨가 화끈했다. 옷자락이 갈라지며 어깨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 약간만 늦었다면 왼팔이 통째로 잘려질 뻔한 것이다.
다시 음침한 음성이 들렸다.
"놈의 눈과 입. 용천(龍泉)과 명문(命門)을 노려라!"
원계묵은 섬뜩했다. 바로 자신의 급소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이때 다시 좌우에서
얼음장같은 기운이 날아왔다. 그는 다시 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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꽝!
폭음과 함께 주점 한쪽의 벽이 박살났다. 뚫린 벽구멍으로부터 석양빛이 밀려 들어
왔다. 어느새 해가 기울고 있었던 것이다.
'음!'
석양빛이 어둠침침한 주점 안으로 밀려들자 자욱하게 떠도는 먼지가 보였다. 원계묵
의 눈이 번쩍 빛났다. 다시 얼음장같은 기운이 쇄도해 왔다. 그는 왼쪽으로 피했다.
이번에는 벽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그 바람에 먼지가 자욱이 일었고, 석양빛을
받아 흙먼지의 미세한 입자(粒子)들이 환하게 보였다. 원계묵의 입술이 씰룩거렸다.
'살을 주고 뼈를 깎는다.'
그는 칼 끝을 아래로 내렸다. 그것을 본 부금진의 안색이 변했다.
'저런 무모한.......'
쐐... 액!
원계묵은 정체불명인들이 공격하는 소리를 들었다 이번에는 사방에서 동시에 들렸으
므로 방향을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의 눈은 허공을 떠도는 먼지 입자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입자들이 어지럽게 파동치고 있었다.
'네 명!'
슉!
칼 끝이 허공을 꿰뚫고 나갔다.
"으악!"
비명이 터졌다. 원계묵은 칼 끝에 둔탁한 물체가 닿는 것을 느꼈다. 아니나 다를까?
파아......!
자욱한 피보라가 뿌려지며 네 명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들은 모두 흑의를 입고 있었
다. 세 명은 이미 시체가 되어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살아남은 한 명의 흑의노인
은 복부를 잔뜩 움켜쥐고 있었는데 손아귀 사이로 선혈이 꾸역꾸역 밀려나오고 있었
다.
"끄으... 네놈이... 어떻게......?"
원계묵의 앞섶도 갈기갈기 찢겨나가 있었다. 찢긴 가슴에서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
다. 그는 흑의노인을 노려보며 말했다.
"아무리 뛰어난 은신술을 지니고 있다해도 먼지까지 움직이지 않게 하지는 못한다."
"......!"
흑의노인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는 쿡쿡 괴소를 흘렸다.
"대... 대단하다... 나 혁련궁(赫連宮)이... 이렇게 쉽게 당할... 줄이야......."
그는 고목처럼 앞으로 쿵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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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짝짝......!
박수소리가 울렸다. 부금진이 원계묵에게 다가오며 손뼉을 치고 있었다.
"정말 대단합니다. 귀림의 둘째 주인이자 혁련노후의 동생인 그 자를 단숨에 처단하
다니 말이오."
원계묵은 바닥에 뒹굴고 있는 술병을 집어들며 물었다.
"너는 어떻게 이 자들의 정체를 금방 알아냈느냐?"
부금진은 씩 웃었다.
"강호 견문이 넓은 탓이지요."
갑자기 부금진은 다급히 말했다.
"야단났소, 밖을 보시오."
원계묵은 시선을 돌리다 흠칫 굳어졌다.
주점 밖. 언제 나타났는지 수십 명의 흑의인들이 겹겹이 포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흐흣! 오늘 저녁 이 원계묵을 죽일 작정을 했나 보군."
원계묵은 추호도 두려운 표정이 없었다. 그는 냉소하며 밖으로 걸어나갔다. 부금진
도 그의 뒤를 따라 나갔다.
흑의인들은 사십여 명 가량 되었다. 그들 중 앞쪽에 서있는 자는 왜소한 체격의 노
인이었다. 노인은 헐렁한 갈의를 입고 있었으며, 눈처럼 흰 백발이 헝클어진 채 어
깨를 뒤덮고 있었다. 얼굴은 핏기라곤 한 점도 없어 마치 시체를 보는 것 같았다.
노인은 앞으로 걸어 나왔다. 원계묵은 그를 보는 순간 직감적으로 느꼈다.
'내가 만난 자 중 가장 강한 자다.'
그는 숨이 막힐 듯한 긴장을 느꼈다. 노인은 천천히 그의 앞으로 걸어왔다. 무너진
벽을 통해 주점 바닥에 쓰러져 있는 혁련궁의 시체가 보였다. 노인의 눈빛이 암울하
게 변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석년의 도담후를 대하는 것 같은 기분이군. 자네가 바로 원계묵인가?"
"그렇소."
원계묵은 억양이 없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노부는 혁련노후다."
원계묵의 안색이 약간 변했다. 그는 잠시 혁련노후를 노려보다 칼을 땅에 꽂은 후
포권했다.
"혁련 노선배의 명성은 익히 들었소이다. 뵙게 되어 영광이오."
혁련노후의 입가에는 여전히 음울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노부가 자네를 찾은 이유를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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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계묵은 술병을 들어 단숨에 마셔버린 후 던져버렸다.
"염무가 보낸 것으로 짐작하고 있소."
혁력노후의 음울한 눈빛이 흔들렸다. 그는 원계묵을 처음 보았다. 그러나 이 순간
누군가 그에 대해 한 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모용초의 말처럼 대단한 놈이군. 마치 야수와도 같군.'
그는 음울한 어조로 말했다.
"노부는 살인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노부는 나이가 너무 많아. 그래서 어서 자
네를 제거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쉬고 싶다."
원계묵의 눈에서 야수의 빛이 번쩍였다.
"흐흐흐! 내가 칼을 쥐고 있는 이상 이 하늘 아래 날 꺾을 자가 있다고는 믿지 않소
. 혁련 노선배."
그는 탁한 음성으로 이어 말했다.
"당신이 쉬고 싶다면 이번 기회에 영원히 쉬도록 도와주겠소."
스르릉!
그는 장도를 잡아 뺐다.
휘이잉!
바람이 불었다. 황혼이 짙어가는 산촌의 부서져 나간 주막 앞, 천공을 헤치며 불어
온 바람은 일대의 노마왕(老魔王)과 새롭게 떠오르고 있는 젊디 젊은 도왕(刀王) 사
이를 회오리치며 지나가고 있었다.
선실 안.
장천린은 탁자에 앉아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석양빛에 비친 그의 얼굴은 여전히
조각 같은 느낌을 주었다. 다만 예전과 판이하게 다른 것은 부드럽기보다는 강렬한
인상을 준다는 것이었다.
맞은편에 앉아있는 단위제는 주사위를 하나씩 쌓아 탑을 만들고 있었다.
"용대인은 사업을 시작한 지 몇 년이 되었습니까?"
장천린은 담담히 말했다.
"육 년째요."
단위제는 주사위 탑을 무너뜨렸다. 탁자 위에 흩어진 네 개의 주사위는 모두 육(六)
을 나타내고 있었다. 신기한 일이었다.
"나는 관부에 투신한 지 올해로 삼십 년째이오."
단위제는 주사위를 다시 쌓았다.
"나는 용대인을 볼 때마다 이상한 느낌이 들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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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천린은 여전히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으나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용대인은 사람을 끄는 마력이 있소이다. 나 같은 능구렁이까지도 말이오."
"......."
"용대인은 기억이 안 날지 몰라도 내가 처음 용대인을 본 것은 일 년 전 산동 안찰
사의 저택에서였소."
장천린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일 년 전 사업 관계로 산동 안찰사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었던 것이다.
단위제는 주사위 탑을 내려보며 말했다.
"당시 내가 받은 느낌은 실로 강렬했소이다. 그때부터 용대인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
게 되었소. 한데 정말 이상한 일이오. 용대인의 외숙인 양익상 어른에게는 용씨 성
을 가진 처남이 없으니 말이오."
장천린은 담담히 말했다.
"내 과거를 자세히 조사한 모양이구려."
단위제는 씩 웃었다. 그는 주사위를 무너뜨렸다. 이번에도 네 개의 주사위는 한결같
이 삼(三) 자가 나왔다. 그는 힐끗 장천린을 바라보며 물었다.
"용대인의 얼굴에 난 상처는 언제 다친 것이오?"
장천린은 흠칫했으나 이내 담담하게 말했다.
"몇 년 전 마차 사고로 다쳤소이다."
"아! 실로 안타까운 일이오. 그토록 아름다운 얼굴에 흠이 가다니......."
단위제는 문득 괴이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혹시... 장천린이란 사람을 아시오?"
장천린은 뜨끔했다. 설마 이런 질문을 할 줄이야.
"무슨 뜻으로 묻는 것이오?"
"별 것 아니오. 장천린이란 사람은 강서성에서 유명한 상인인데 혹시 아는가 싶어
물은 것이오."
장천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단위제는 주사위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이 년 전 강서성 남창부에서 몇 가지 사건이 일어났었지요."
"......."
"만금산장의 장주 금백만이 급사하고 청하원의 젊은 상인 장천린이 비슷한 시기에
실종되었지요. 당시 강서성 안찰사에서 그 사건을 맡아 조사했었는데 진전이 없자
내게 의뢰가 들어왔었지요."
장천린은 담담히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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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어떻게 되었소?"
단위제는 눈을 번득이며 말했다.
"그 두 가지 사건은 실로 미묘했소. 만금산장의 인물들은 결코 금백만의 시신을 보
여주지 않았소. 표면적인 이유는, 시신을 욕되게 할 수 없다는 것이었소. 그러던 중
나는 아주 재미있는 사실을 알게 됐소이다. 그것은 금백만이 죽은 날이 바로 그의
생일이었다는 점과, 그때 초대된 사람들의 명단을 입수하게 된 것이었소."
장천린은 묵묵히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초대된 사람은 모두 네 명인데 그들은 장천린과 그의 정인인 취랑, 그리고 용문전
장의 상관홍과 제갈유풍이란 젊은이였소. 한데 그날 이후 장천린과 취랑이 동시에
실종되었소. 더욱이 이상한 것은 금백만의 호위무사들도 모두 실종되었다는 사실이
오."
장천린은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 자는 자세히도 조사했구나.'
단위제는 다시 주사위탑을 허물어뜨렸다. 그런데 이번에는 각각 일(一), 이(二), 삼
(三), 사(四)의 각기 다른 숫자가 나타났다. 장천린은 탄성을 발했다.
"정말 대단한 솜씨요."
단위제는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솔직히 나는 금백만과 장천린 등이 타살되었다고 믿고 있소이다. 하지만 만금산장
에서 사건을 일으킨 자는 완벽하게 증거를 없애 버려 단서를 잡지 못했소이다. 결국
금백만은 자연급사로 처리되었고, 장천린은 원인불명의 실종처리가 되고 만 것이오
."
장천린은 내심 중얼거리고 있었다.
'제갈사라면 능히 가능한 일이지.'
그는 식어버린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결국 일 년 만에 나는 그 사건에서 손을 떼고 말았지요."
탁! 단위제는 손바닥으로 흩어져 있던 주사위를 덮쳤다. 그는 장천린을 향해 싱긋
웃더니 서서히 손을 들어올렸다.
"......?"
장천린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주사위가 감쪽같이 없어진 것이었다. 단위제는 손
바닥을 보여 주었다. 그의 손바닥에도 주사위는 없었다.
"허허허!"
단위제는 너털웃음을 웃으며 탁자 아래 들어가 있던 왼손을 꺼내 펼쳐 보였다. 주사
위는 왼손 손바닥에 들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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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한 실력이오."
장천린이 감탄하자 그는 별 것 아니라는 듯이 히죽 웃을 뿐이었다. 그러나 곧 정색
을 하며 말했다.
"한 달 전 나는 태진왕 전하로부터 북경으로 급히 올라오라는 명을 받았소이다. 그
래서 수하들과 함께 올라오던 중 진무현에서 용대인을 만나게 되었소이다. 또한 그
전에 원대협이 개입된 살인사건을 접했지요. 그런데 태진왕 전하께서는 뜻밖에도 내
게 동창의 대영반 자리를 맡기셨오이다. 나는 갈등하지 않을 수 없었소. 더 이상 벼
슬이 높아지는 걸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소. 하지만 황실의 더러움을 씻어 내겠다는
전하의 깊은 뜻에 감복하여 결국은 승낙할 수밖에 없었지요."
단위제는 손가락 사이로 주사위를 굴렸다. 주사위는 그의 손가락 사이를 오가며 없
어졌다 나타났다 하고 있었다. 실로 마술과 같은 묘기였다.
단위제의 말이 계속되었다.
"내 부친은 하급관리였소. 비록 살림은 옹색하고 성격 또한 편협한 분이셨지만 청렴
결백한 점만은 그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분이셨소."
장천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을 경청했다.
"지금으로부터 삼십 이 년 전, 부친께서는 누명을 쓰고 상급관부에 의해 오체분시(
五體分屍)라는 극형을 받고 수많은 백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대로에서 사지가 찢겨
져 돌아가셨소."
장천린은 안색이 변했다.
"어머니와 누이동생은 노비가 되었소. 얼마 후 어머니는 목을 매어 자살을 하셨소.
누군가에게 능욕 당했기 때문이었소. 게다가 누이동생은 어디에 있는지 지금도 알
수가 없는 상태요."
장천린은 격동을 금치 못했다. 이 세상에서 그런 비참한 일을 겪고도 태연하게 남의
얘기하듯 말할 수 있는 자가 과연 몇 명이나 된단 말인가? 그는 단위제를 새로운
시각으로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아버님께서 오체분시 되던 날 내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아시오? 흐흐... 그때 난
도박장에서 사흘 내내 도박을 하고 있었소."
단위제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있었다.
"그때 난 탁자에 산처럼 쌓인 은자를 보며 의기양양해 하고 있었소. 도박에서 딴 은
자를 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보니 대로에 누군가의 목이 효수(梟首)되어 있었소
. 흐흐... 난 재수가 없어서 침을 뱉었소. 그런데 잘려진 수급이 어딘가 본 듯해서
자세히 살펴보게 되었소. 그때서야 비로소 아버님의 수급이라는 걸 알게 되었소."
장천린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고 말았다. 그것은 이제껏 그가 들은 것 중
가장 비참한 이야기였다. 그러나 단위제는 조금도 우울한 표정이 아니었다.
"사흘 후 아버님이 무죄였음이 밝혀졌소. 그러나 그때는 이미 아버님의 시신은 썩어
버렸을 뿐더러 까마귀밥이 되어 흔적조차 찾을 수가 없었소. 어머니는 자결을 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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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이동생은 실종되고 말았소. 그때 나는 결심했소. 관리가 되기로 말이오. 후후! 생
각대로 나는 관리가 되었소. 그리고 사건을 맡을 때마다 끝까지 파고들어 기필코 해
결을 해냈소. 또한 범인의 배경이 아무리 든든하더라도 끝까지 그의 죄명을 밝혀 처
형시켜 왔소."
단위제는 더 이상 주사위를 만지작거리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초점 없이 허공을 더
듬고 있었다.
"물론 상급관부로부터 종종 사건에서 손을 떼란 명을 받은 적도 많았소. 하지만 그
럴수록 더욱 사건을 파헤쳐 반드시 내 손으로 범인의 목을 날려 버렸소. 그런 후 보
고서를 작성하여 상급관부에 올렸소."
장천린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은 능히 그럴만한 사람이오.'
"후후, 상급관부에서는 내가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을 것이오. 틈만 나면 날 옭아매
어 삭탈관직시키려 했소. 하지만 그들에게 조금도 틈을 보이지 않았소. 조금도 말이
오......."
단위제는 말 끝을 흐리다가 갑자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너절한 과거 얘기로 너무 주접을 떤 것 같소이다. 미안하오, 용대인."
장천린은 고개를 저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별말씀을......."
"내 평생 처음으로 남에게 과거 이야기를 한 것이오. 내가 왜 용대인께 이런 말을
했는지 아시오?"
단위제는 정면으로 장천린을 주시했다.
"글쎄요......."
"용대인은 평생 처음으로 내 마음을 움직인 사람이기 때문이오. 솔직히 말하겠소.
앞으로 용대인과 격의 없이 지내고 싶소이다."
장천린은 나직한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후후후, 내 과거가 무척이나 궁금한 모양이구려, 대영반."
단위제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단도독이라 불러주시오. 갑자기 출세하니 몸이 근질근질하고 어색합니다."
단위제의 눈빛은 부드럽게 변해 있었다. 가슴 깊이 묻어 두었던 비밀스런 상처를 내
보였기 때문일까? 그는 한결 홀가분한 표정이었고, 너그러워진 모습이었다.
장천린은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바라보았다. 운하의 수면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석
양이 마지막 잔양을 뿌리며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그의 얼굴도 석양빛을 받아 붉게
물들었다.
단위제는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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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대협 때문에 마음이 아프신 모양이구려?"
장천린은 씁쓸하게 말했다.
"친아우 같았지요. 아무래도 내가 실수한 모양입니다."
단위제는 짧은 수염을 손가락으로 꼬며 말했다.
"내 추측이 맞는다면 그는 언젠가 돌아올 것이오."
그의 손 안에 있던 주사위가 하나씩 소매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글쎄요......."
장천린은 넘어가는 해를 보며 입을 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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