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은 칼 끝에 지고 제1부 거상열전편 제2권
▣등장인물
◈장천린(蔣天麟) - 강남 무창의 동정호반에서 신선루를 경영하던 젊은 상인으로 정
인 취옥교의 의문의 배신과 신산 제갈사의 계략에 빠져 죽음의 위기에 처하게 된다.
죽음의 나락에서 되살아나 용백군이라는 전도 유망한 청년상인으로의 새 인생을 시
작하게 되는데... 사랑을 되찾고 누르하치의 음모에서 나라를 구하려는 그의 앞날은
과연.......
◈취옥교(翠玉嬌) - 장천린의 정인으로 신선루를 운영하던 절세의 미인. 천린으로부
터 청혼을 받은 꿈 같은 날 어둡기만 한 과거로부터의 부름이 있게 된다. 사랑을 위
해 배신할 수밖에 없는 그녀의 파란만장한 운명... 조화성의 명에 따라 금백만을 살
해하고 천린의 곁을 떠나는데.......
◈원계묵(元桂默) - 마도(魔刀)라 불리워지는 당대 도법의 일인자. 조화성의 살수
모용초에 의해 연인 손미로부터 배신당하고 사부인 만승금도 도담후가 살해당한다.
원수를 갚기 위해 백살대를 조직하여 필살의 의지를 불태우던 중 용백군이라는 젊은
상인을 만나게 되는데.......
◈모용초 - 조화성의 살수이자 마교십삼사의 일원. 절세의 미남자로 여인을 유혹하
여 이용하는 데에 아무런 죄의식을 갖지 않는다. 무정도(無情刀)라는 별호만큼이나
냉정하고 잔인하지만 여인에 대한 유별난 증오심에는 깊은 사연이 있었으니.......
◈부금진(符錦眞) - 피리를 즐겨 부는 미소년으로 약칭으로 소진(少眞)이라고도 불
리워진다. 영물에 가까운 흰 앵무새 백아를 데리고 다니며 비도술 및 의술에 일가를
이루었다. 신비에 싸인 인물. 그의 과거를 정확히 아는 자는 아무도 없다.
◈단위제(檀偉帝) - 산동성 제형안찰사사 소속으로 형부도독(刑府都督)이자 동창의
대영반. 청렴강직하며 흉악무도한 범인을 체포하는 데 달인의 솜씨를 지니고 있으며
, 미궁(迷宮)에 빠진 사건을 처리하는 전문가 중의 전문가.
◈반송 - 해적선 검은 바람에 의해 죽을 고비에 처했으나 용백군의 도움으로 살아난
다. 화포인 진천뢰를 제작할 수 있는 인물로서 천월도법의 달인. 담오 - 북방의 고
랍특성 낭인시장에서 몸값 삼십만 냥에 자신의 인생을 내놓은 무사. 돈을 위해 몸을
파는 아내 아랑을 저주한다. 용백군과의 조우 이후 돈과 세상을 함께 저주하는 그
의 인생이 뒤바뀐다.
◈태진왕(太眞王) 주익적(朱翊 ) - 신종(神宗) 만력제(萬歷帝)의 이복동생으로서
어지러운 황실을 구하기 위해 뜻 있는 충신들을 규합하고 변방을 강화하였다. 황실
의 특무기관인 금의위(錦衣衛)와 동창(東廠)의 실세를 쥐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백연연(白娟娟) - 태진왕을 마음 속 깊이 사모하고 있는 지혜로운 여인. 환관의
음모에 의해 사약을 받고 죽은 충신 백시열(白時悅)의 딸로 태진왕에 의해 목숨을
구함 받고 태진궁의 시비로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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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상인 용백군
칠흑 같은 어둠이 사위를 장막처럼 뒤덮고 있는 밤.
이곳은 산동성(山東省) 진무현(陳武縣)으로 황하 하류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다.
한 채의 객점이 적막에 싸여있다.
작은 마을에 흔히 볼 수 있는 아담한 객점으로 앞쪽은 식사와 술을 겸할 수 있는 반
점이요, 후원의 방사들은 여행자를 위한 객사로 사용되고 있었다. 밤이 이슥해서인
지 후원의 객사는 모두 불이 꺼져 있었다.
스스.......
두 개의 검은 인영이 한 객방을 향해 빠르게 접근했다. 그 중 한 명이 객방의 창문
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아주 느리게, 조금씩 열렸으므로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들은 창문을 넘어 방 안으로 스며들어갔다.
방 안은 캄캄했다. 두 인영은 벽면에 바짝 붙어선 채 벽의 일부가 된 듯 움직이지
않았다. 잠시 후, 그들은 벽을 따라 침상 쪽으로 접근해갔다. 일체의 소리는 물론
공기의 파동도 없는 극히 은밀한 움직임이었다.
슈슈슉!
두 인영의 손에서 수십 개의 비표(飛 )가 쏘아나갔다. 비표는 정확히 침상 위에 꽂
혔다. 동시에 그들은 침상을 덮쳤다.
검광은 어둠을 가르며 침상을 네 동강이 냈다. 인영은 좌우로 갈라져 내려섰다. 그
런데 동강난 침상을 내려보는 그들의 눈에 경악이 떠올랐다. 침상만 조각났을 뿐,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흑!"
신음이 들렸다. 한 명의 목이 어느 틈에 잘려 떼구르르 바닥에 굴렀다. 다른 한 명
은 반사적으로 몸을 굴려 오른쪽으로 뒹굴어갔다.
"틀렸다. 좌측이다."
"큭!"
인영의 목이 떨어졌다. 언제 어떻게, 목이 잘렸는지도 모르게 그는 황천으로 직행했
다. 비로소 방 한구석에서 누군가의 음산한 눈빛이 나타났다. 그러나 그것도 한 순
간.......
슉!
그는 천장을 뚫고 치솟았다.
"크흑!"
지붕 위에서 참혹한 비명이 울렸다. 두 명의 흑의인이 피를 뿜으며 객사 아래로 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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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져 내렸다.
"후후훗......!"
괴인영은 괴소를 터뜨리며 동쪽으로 도약했다. 그는 객방에 묵고 있던 인물로 단숨
에 사오 장을 날아 담장을 넘어 날아갔다.
"으아악!"
그가 담장을 스쳐가는 순간 단말마의 비명이 들렸다. 담장 위에서 한 구의 시체가
굴러 떨어진 것은 괴인영이 한참이나 멀리 날아간 후였다.
괴인영은 계속 질주했다. 그는 한 마장쯤 달려가다가 한 그루 고목을 지나며 우수를
뻗었다.
"크아악!"
고목이 두 동강나며 처절한 비명이 들렸다. 고목 뒤에 숨어있던 흑의인이 고목과 함
께 허리가 동강난 것이었다. 괴인영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계속 달려갔다. 그의 일
련의 살인동작과 신법은 가공할 정도로 빨랐으며, 냉혹무비했다.
스스스......!
황하 강변에 무성하게 밀집해 있는 갈대밭에 이르자 괴인영은 신형을 멈추었다.
"......."
달빛 아래 회의인영(灰衣人影)의 모습이 드러났다. 뜻밖에도 그는 이십여 세 정도에
불과한 청년이었다.
전체적으로 마른 몸과 긴 얼굴을 지니고 있었다. 피부는 창백하여 푸르스름하게 보
일 정도였다. 두 눈은 삼각형을 이룬 독사눈이었고, 광대뼈에 끝이 약간 구부러진
매부리코를 지니고 있었다.
반면 이마는 넓고 반듯했으며, 숱 많은 눈썹이 길게 뻗어있어 음독해 보이는 일면
강직한 면모도 엿보였다.
회의청년은 칠척 장신으로 한 자루의 장도(長刀)를 메고 있었는데, 장도와 그의 몸
은 한 몸처럼 보였다.
청년은 음산한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번에는 또 어떤 놈들이냐?"
그의 입에서 날카로운 음성이 떨어지는 순간 갈대밭 사이에서 경미한 음향이 들려왔
다.
스스스스......!
갈대 스치는 소리와 함께 세 인영이 떠올랐다. 그들은 청년을 중심에 두고 품자(品
字)형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들은 중년인으로, 이상하게도 용모가 똑같았다. 각각
여섯 자 길이의 청룡언월도(靑龍偃月刀)를 비스듬히 들고 있었는데 무표정한 얼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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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한 눈빛이었다.
회의청년은 그들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청룡언월도를 쓰는 세 쌍둥이라, 흐흐흐... 너희들이 바로 지옥의 도수부(屠手夫)
라는 조화성 제삼신마전의 악씨(岳氏) 삼형제인가?"
삼 인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맞추었다."
"살인혈첩(殺人血帖)이 떨어진 이상 천신이라 해도 조화성의 손을 벗어나지 못한다.
원계묵(元桂默)!"
"백살대와 떨어져 있었던 것이 너의 치명적인 실수였다."
각각 한 마디씩 짧게 말하는 악씨 삼형제. 그들은 평소에도 필요한 말 이외에는 하
지 않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서서히 거리를 좁혀 들었다. 각자의 손에 비스듬히 들
려진 청룡언월도 끝에 달빛이 부서져 내렸다.
원계묵의 입가에 비정한 미소가 선처럼 그어지고 있었다.
"복수의 칼을 뽑은 이상 내 심장의 피가 식기 전에는 어떤 상대라도 사양치 않을 것
이다."
휘이이......!
갈대밭에 바람이 불었다. 무섭도록 팽창된 공기가 살기로 인해 터져 나갈 것만 같았
다. 그들은 마치 석상이라도 된 듯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대치상태는 결코
오래 갈 것 같지 않았다.
왜냐면 그들의 눈에서 필살의 살기가 점점 더 짙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년은 조각을 하고 있었다.
으스름한 유등(油燈) 아래 도취된 표정으로 조각에 열중하고 있었다. 여인보다도 섬
세해 보이는 손에 쥐어진 조각칼은 손잡이가 상아로 된 예쁜 소도였다.
나이는 십 오륙 세 정도 되어 보인다. 소년의 우수에 잠긴 듯한 눈은 흡사 가을 호
수를 연상케 했으며, 오관도 미려하기 그지없었다.
이마 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소년의 극미(極美)한 얼굴을 약간 가리고 있어 어딘
가 모르게 퇴폐적인 분위기가 풍기기도 했다.
사각, 사각.......
소년이 조각하는 것은 여인상이었다. 조각도가 섬세하게 움직이는 가운데 여인상의
모습이 점차 확실해져 갔다. 비록 목상이긴 했지만 무척이나 아름다운 미녀의 모습
이었다. 마침내 미인상은 완성되었다.
소년은 완성된 미인상을 응시했다. 그의 눈에 짙은 그늘이 덮이는가 싶더니,
"크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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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의 입술이 일그러지며 괴소가 흘러 나왔다. 조각도가 번뜩! 빛을 발하더니 미인
상의 심장 부분에 깊숙이 박혀버렸다.
"크큿!"
소년은 다시 괴소를 흘렸다. 그의 아름다운 눈에 음영이 어리고 있었다. 푸르스름한
유등 아래 심장을 관통 당한 미녀상은 더욱 섬뜩한 느낌을 주었다.
미녀상을 뚫어져라 응시하던 소년의 눈썹이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그때였다. 창
문으로부터 날갯짓 소리와 함께 한 마리의 앵무새가 날아왔다. 털빛이 눈처럼 흰 앵
무새였다.
앵무새는 방 안에서 빙빙 돌며 부리를 요란하게 움직였다.
"왔다! 왔다! 소진(少眞), 그 자가 왔다."
놀라운 일이었다. 앵무새의 입에서 사람의 음성이 나오다니?
소년의 두 눈에 반짝 이채가 떠올랐다.
"어디로 가더냐?"
앵무새는 날개를 요란하게 파다닥거리며 빠르게 종알댔다.
"선창가다. 선창가로 간다!"
소년은 몸을 일으켰다.
"백아(白兒), 네가 추격해라."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앵무새 백아는 쏜살같이 날아가며 종알거렸다.
"소진아, 소진아! 너는 언제나 신중해야 한다. 너는 이 아비의 마지막 희망이다!"
앵무새의 음성은 어떤 사람의 음성을 흉내낸 듯 굵직하게 울렸다. 소년은 멍한 표정
이다가 곧 피식 웃으며 내뱉었다.
"버릇없는 놈."
그는 한동안 창가에 서서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잠시 후 그의 입술이 벌어지며 낮
은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원계묵이라고 했던가?"
소년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눈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미소였다. 아니, 요염하기조
차한 미소였다. 이 신비한 소년- 그의 이름은 소진(少眞)이었다.
지옥의 도수부란 별호를 가지고 있는 악씨 삼형제의 셋째인 악표는 핏발선 눈으로
회의청년 원계묵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의 옷은 여기저기 찢어진 채 온통 시뻘건 선혈로 젖어 있었다. 주위의 갈대밭에는
흑의복면인들의 시체가 십여 구 쓰러져 있었다. 그런데 악씨 삼형제 중 두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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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활한 놈! 우리 삼형제를 계략으로 흩어지게 하다니!"
원계묵은 가장 효과적인 전법을 사용했다.
그는 갈대숲에 수많은 매복이 있음을 짐작하고 있었다. 그래서 선공(先攻)을 했다.
그런데 상대는 악씨 삼형제가 아니라 갈대숲에 포진하고 있던 흑의복면인들이었다.
그는 수십 번이나 방향을 바꾸었다. 그 바람에 악씨 삼형제는 그의 종적을 놓쳤을
뿐더러, 서로 흩어지기까지 했던 것이다.
다리를 어깨 넓이로 벌린 자세로, 원계묵은 음산한 웃음을 흘렸다.
"쉽게 이길 수 있는 것을 구태여 어렵게 할 필요야 없지. 분산지계도 병법의 일종이
다."
악표의 눈에서 살광이 뿜어나왔다.
"날 쉽게 이길 수 있을 것 같으냐?"
원계묵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 그의 태도는 상대를 무시하는 빛이 역력했다. 악표
는 치욕을 느꼈다.
"죽일 놈!"
슈악!
평소 냉정을 잃은 적이 없었던 악표다. 그러나 지금 그는 이성을 잃고 있었다. 청룡
언월도가 허공을 가르며 원계묵의 목을 쳐갔다. 원계묵은 차디차게 말했다.
"도법으로 말하면 너는 아직 멀었다."
원계묵의 손이 움직였다.
파앗!
섬광이 작렬했다. 언제, 어떻게 뽑았는지 모르게 어깨 위에 걸쳐져 있던 장도가 불
을 뿜었다.
원계묵의 동작은 간단했다. 일체의 변식이라곤 없이 극쾌하게 뻗어나갔다. 단순도
극에 이르면 그 어떤 변화보다도 뛰어난 위력을 발휘한다.
"으악!"
처절한 비명이 터졌다. 악표는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그의 입가에 선혈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수... 수라구류도(修羅九流刀)... 과... 과연......."
그는 털썩 무릎을 꿇었다. 청룡언월도로 땅을 짚은 채 간신히 쓰러지지 않고 몸을
고정시킬 수 있었다. 뒤늦게 그의 앞섶에서 선혈이 푹 치솟으며 상반신을 시뻘겋게
물들였다. 심장 부위가 깨끗이 절단된 것이었다.
원계묵은 같은 자세였다. 장도는 여전히 어깨에 걸쳐져 있었는데 처음부터 아예 뽑
지도 않은 것 같았다. 그는 무심한 눈으로 상대를 바라보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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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추격하는 최종 인물은 누구냐?"
"흐으... 원계묵. 어차피 너는... 우리의 손을 벗어나지는... 못한다."
악표는 반쯤 뒤집어진 눈을 부릅뜬 채 그를 노려보았다.
"너의 수라구류도가... 아무리 무섭다 해도... 그 어른의 손을 벗어날 수는 없다...
...."
원계묵은 재차 물었다.
"그가 누구냐?"
악표의 입가에 비틀어진 웃음이 그어졌다.
"귀(鬼)... 송(松)... 자(子)......."
그것이 끝이었다. 말을 마치자마자 앞으로 푹 고꾸라진 것이었다. 원계묵의 안색이
처음으로 변했다.
"귀송자 혁련노후(赫連瑙侯)."
그의 눈빛에 음울한 기운이 떠올랐다.
"그가 아직까지 생존해 있었던가?"
그는 힐끗 악표의 시체를 바라보더니 괴이한 웃음을 흘렸다.
"흐흐... 원계묵, 약해졌구나. 조화성 전체를 상대하겠다는 네가 겨우 그 이름 하나
에 긴장하다니?"
원계묵은 몸을 굽혀 악표의 시체에서 흘러나온 피를 손가락에 찍어 옷자락에 몇 자
의 글씨를 갈겨썼다.
-선창가에서 만나자.
원계묵은 고개 들어 천색을 살핀 후 신형을 날렸다. 칠 척이 넘는 장신이었으나 그
의 동작은 바람처럼 가벼웠다. 눈 깜빡할 사이에 갈대밭 사이로 모습을 감추어 버렸
다.
휘이잉.......
갈대밭에 바람이 불었다. 방금 전의 바람과는 사뭇 다른 바람이었다. 역겨운 피비린
내가 물씬 배어있는 살벌한 바람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갈댓잎이 흔들리더니 왜소한 인영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미소년이었는데 어
깨에 흰 앵무새가 걸터앉아 있었다. 소년은 악표의 시신을 내려보며 혀를 찼다.
"쯧! 굉장한 솜씨군. 석년의 도담후에 비교해도 뒤지지 않겠어."
소년은 악표의 옷자락에 피로 쓰여진 글씨를 읽었다. 그의 아름다운 얼굴에 묘한 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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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가 어렸다.
"대담한 놈이야."
소년은 흑백이 분명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더니 낮게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귀송자 혁련노후가 등장했다니, 좀 뜻밖인걸?"
그때였다. 날카로운 파공성과 함께 허공으로부터 한 인영이 떨어져 내렸다. 인영은
내려서자마자 악표의 시신을 발견하고 놀라 부르짖었다.
"셋째!"
나타난 자는 악씨 삼형제의 둘째인 악호(岳虎)였다. 그의 눈에서 불똥이 퉁겨져 나
왔다.
"이럴 수가......! 네가 당하다니......!"
악호는 옷자락에 쓰여진 글귀를 읽더니 이를 빠드득 갈았다.
"으으! 원계묵... 이놈!"
그는 너무나 분노해 소년의 존재를 잊어버린 듯 바로 신형을 날리려 했다.
"잠깐."
악호는 홱 몸을 돌렸다. 그의 눈은 시뻘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웬 꼬마 놈이냐?"
소년은 미소지으며 말했다.
"당신은 그곳으로 갈 필요가 없소."
악호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소리냐?"
"당신의 실력으로는 가봐야 소용없기 때문이오. 차라리 이곳에서 동생과 저승길의
동무가 되는 것이 나을 것 같아서 하는 얘기요."
악호는 눈을 크게 떴다. 그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소년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는 믿어지지가 않았던 것이다. 그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이런 미친......."
그는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소년이 싱긋 웃으며 손을 들어올린 것이다. 그의 작은
손에는 앙증맞을 정도로 얇은 소도가 쥐어져 있었다.
슉!
소도가 소년의 손을 떠났다. 악호는 두 눈을 부릅떴다. 그의 눈에는 온통 불신이 가
득차 있었다. 어느새 이마 한복판에 정확히 소도가 꽂혀있는 것이 아닌가!
"이... 이건... 말이... 안돼. 말이......."
둔중한 소리와 함께 그는 벌렁 쓰러졌다. 죽는 순간까지도 그는 소년이 어떤 수법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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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소도를 날렸는지 보지 못했다. 그저 이마가 화끈했을 때야 비로소 당했다는 것을
알았을 뿐이었다.
소년은 악호의 이마에 박혀있는 소도를 뽑아냈다. 소도에는 피 한 방울 묻어있지 않
았다.
"악씨 삼형제의 합벽도술은 무림일절인데 이렇게 허망하게 죽은 것을 알면 조화성
제삼신마전주(第三神魔殿主) 태사독의 눈에 불똥이 튀겠군."
소년은 어깨를 흔들었다.
"가자, 백아."
푸르르륵!
앵무새 백아는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그러나 허공에서 종알거리는 것을 잊지 않았
다.
"소진아! 너는 언제나 신중해야 한다. 너는 이 아비의 마지막 희망이다."
괴소년 소진은 허공에다 대고 주먹질을 했다.
"내 언젠가 네놈의 버릇없는 주둥이를 문질러 버릴 테다!"
그런 소년의 얼굴에는 화난 기색은커녕 장난기가 어려있을 뿐이었다.
그는 옷을 툭툭 털더니 갈대밭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소년이 떠난 후 갈대밭에는
정적만이 남게 되었다. 이따금 부는 바람이 갈대를 한 방향으로 눕히며 스산한 소리
를 낼 뿐이었다.
소진. 그는 이 괴이한 소년은 대체 누구인가?
원계묵은 선창가에 있었다.
새벽 안개가 짙게 깔려 있었다. 멀리서 보면 하반신은 보이지 않고 장도를 어깨에
걸치고 있는 상반신만 보였다.
'이상하군. 왜 그 두 놈들이 오지 않는 걸까?'
그는 눈살을 가볍게 찌푸렸다.
'악표의 시체를 발견하지 못했을 리가 없는데.......'
원계묵은 지루해진 듯 주변을 서성거렸다. 자욱한 안개가 시야를 방해하고 있었으나
황하(黃河)를 도강하기 위해 선창가에 정박해있는 선박들의 돛이 간간이 보였다.
슉......!
문득 미세한 파공성이 울렸다. 원계묵의 짙은 눈썹이 꿈틀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
았으나 소리만으로도 암기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원계묵은 두 손가락을 가위처럼 벌린 채 허공을 집었다. 틱! 하는 소리와 함께 손가
락 사이에 차가운 비수 날이 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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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칠 생각이 아니었군.'
비수를 잡는 순간 그는 내심 그렇게 중얼거렸다. 손가락에 느껴지는 강도가 의외로
미약했던 것이다. 살펴보니 비수의 자루 부분에 종이가 묶여 있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비수는 최소한 사오십 장 밖에서 날린 것이다. 따라서 추적하기에는 이미
늦은 감이 있었다. 자루에 묶여있는 종이를 풀자 다음과 같은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악룡과 악호 형제는 이미 제거됐으니 기다려 봐야 헛일이오. 가능한 빨리 그곳을
벗어나도록 하시오. 당신이 벌인 살인극 때문에 산동행성(山東行省) 제형안찰사사(
提刑按察使司)에서 추적자를 파견했소. 조심하기 바라오.
종이에는 서명도, 그 밖의 다른 기호도 남겨있지 않았다. 필체는 급히 갈겨쓴 듯했
으나 달필이었다. 원계묵은 눈썹을 놀리며 중얼거렸다.
"악룡, 악호가 제거됐다고?"
그는 가슴이 진동하는 것을 느꼈다.
'조화성 말고 날 지켜보는 자가 또 있었단 말인가?'
그는 다시 한 번 서찰의 내용을 훑어보았다. 의문이 떠올랐다.
'이 조그만 진무현에 제형안찰사사의 무사들이 나타나다니?'
제형안찰사사(提刑按察使司)는 중원십삼개성(中原十三個省)에 설치된 지방관청으로
주로 형법(刑法)을 담당한다. 각 행성(行省)마다 한 개씩 있으며 일명 얼사( 司)라
불리기도 했다.
그곳의 장관은 안찰사(按察使)로 정삼품(正三品)에 해당하며,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
했다. 비록 십 삼 행성 중 일 행성이라 해도 관할지역이 광활하므로 인원 또한 많았
다. 게다가 일반적인 관부와 달리 안찰사사에 속한 병사들은 고강한 무공을 지닌 것
으로 알려져 있었다. 형(刑)을 담당하려면 뛰어난 무예를 지니고 있어야 하기 때문
이었다.
원계묵은 제형안찰사사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의문이 일어났다.
'일개 지현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에 어찌 제형안찰사사의 무사들이 동원된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서찰의 내용이 허위일 것 같
지는 않았다.
'누군지 몰라도 일단은 믿어 보는 게 좋을 것 같군. 관부와 부딪쳐 좋을 것은 없으
니까.'
원계묵은 최소한 한 가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어쨌든 조화성의 인물은 아닐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사실을 알려줄 이유가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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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가 걷히고 있었다. 시야가 트이자 황하의 누런 물이 보였다. 선창에 정박해 있
는 선박들의 모습도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원계묵은 유독 눈에 뜨이는 범
선을 발견했다. 다른 배들에 비해 월등히 컸던 것이다.
마침 인부들이 범선으로 화물을 운반하고 있었다. 그는 한 인부에게 다가가며 물었
다.
"언제 출발하오?"
인부는 힐끗 그를 쳐다보다 찔끔한 표정을 지었다. 장대한 체격에 커다란 칼까지 둘
러멘 그의 모습에 기가 질린 듯했다.
"곧... 떠날 겁니다."
"행선지는?"
"북경... 입니다요."
원계묵은 내심 중얼거렸다.
'괜찮군. 잠시 이용하기에는.'
그는 인부의 곁을 지나쳐 범선에서 선창으로 연결된 목교를 건너갔다. 이런 종류의
범선은 화물수송 뿐 아니라 대가를 받고 사람을 운송하기도 했다.
"......."
잠시 후 그는 뱃머리에 서서 막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았다. 이글거리는 태양이 수
평선으로부터 지글지글 끓으며 떠오르고 있었다. 그 모습은 실로 장관이었다.
태양을 바라보던 그의 눈에 아련한 추억이 어렸다. 귓전에 사부 도담후의 음성이 쟁
쟁하게 울리는 듯했다.
......이십 년 전 나는 무영, 신산과 함께 조화성주 염무를 제거할 계획을 세웠었다
. 그러나 완벽한 계획에도 불구하고 실패하고 말았다. 수년이 흐른 후에야 그 이유
를 알게 되었다. 그것은 무영과 신산, 나 삼자간에 형성되어 있는 불신감 때문이었
다. 무영과 신산은 뛰어난 기재였다. 때문에 보이지 않게 서로를 견제하고 있었다.
나 또한 같은 생각이었다. 바로 그 점이 염무에게 바늘구멍 같은 틈을 주었고 모든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이제 곧 염무는 복수의 칼을 뽑을 것이다. 우리
들 중 아무도 그의 마수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사부.......'
원계묵의 움푹 패인 눈에 사나이의 슬픔이 어렸다.
'당신은 제게 아무 말씀도 남기지 못한 채 떠나셨지만 저는 당신의 죽음을 절대로
묵과할 수 없습니다.'
원계묵의 눈에서 불꽃이 이글거렸다.
'저에게 있어 당신은 부친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이 원계묵, 다른 놈은 몰라도 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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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을 죽게 만든 모용초와 그에게 살인지령을 내린 염무만은 반드시 내 손으로 제거
하겠습니다.'
원계묵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무영과 신산이 손을 잡자고 해도 절대로 응하지 않겠다. 이 일은 반드시 나 원계묵
단독으로 해낼 것이다.'
태양은 이제 강상으로 높이 떠올라 강렬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비록 계절은 가을의
문턱을 넘어서고 있었으나 태양은 불꽃처럼 찬란했다. 원계묵의 가슴에도 불꽃이
타고 있었다.
'멋진 사내로군.'
인기척을 느끼고 돌아서던 원계묵의 얼굴에 작은 변화가 일어났다. 그가 있는 곳을
향해 한 청년이 다가오고 있었다.
청년은 그의 곁을 지나치더니 뱃머리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원계묵을 바라보지
않았다. 후리후리한 키에 건장한 체격이었다. 그러나 결코 둔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유연함이 느껴질 뿐이었다.
청년은 긴 흑발을 허리춤까지 늘어뜨리고 이마에는 흑건을 단정히 두르고 있었다.
이목구비는 반듯했으며 피부는 은은한 장미빛이었다.
'대단한 미남이로군.'
원계묵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런데 눈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이마에서
뺨까지 길게 나있는 가느다란 흉터 자국이었다. 묘한 것은 그 흉터가 결코 흉해 보
이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도리어 묘한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만일 그 흉이 없
다면 지나치게 유약해 보일 수도 있었다.
원계묵은 내심 중얼거렸다.
'저자는 평범한 인물이 아니다. 대체 누굴까? 무림인 같지는 않은데.......'
그는 흑삼청년에게 강한 호기심을 느꼈다. 좀처럼 타인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 그의
성격으로 볼 때 이례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원계묵의 따가운 시선을 느꼈음인가?
흑삼청년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원계묵은 내심을 들킨 것이 쑥스러워 씩
웃어 주었다. 그런데 청년이 그에게 한 말은 실로 뜻밖이었다.
"얼마 전 배 위로 관부의 인물들이 올라왔소. 옷을 갈아입는 게 좋을 것 같소. 소매
의 핏자국이 그들의 주의를 끌지도 모르니 말이오."
원계묵은 급히 고개를 숙여 보았다. 과연 오른쪽 소매에 핏방울이 점점이 묻어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슬쩍 소매를 감춘 뒤 정중히 포권했다.
"충고 감사하오이다."
흑삼청년은 담담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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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 진무현에서 이십여 명이 살해되었다는데 당신과 관계가 있소?"
단도직입적인 질문이었다. 원계묵은 흑삼청년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지가 않았다.
"부인하지 않겠소이다."
청년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괜찮다면 내 방으로 가서 차 한 잔 하시겠소?"
원계묵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실례가 안 된다면 감사히 받아들이겠소이다."
청년은 미소 지으며 선실 쪽으로 걸어갔다. 원계묵은 마치 무엇에 홀린 듯한 기분이
었다. 타인을 믿지 않는 그가 유독 흑삼청년에게는 호감을 느끼고 살인한 것을 시인
했을 뿐더러 초대까지도 응한 것이다.
선실은 생각보다 넓었다. 별 장식은 없었으나 담백하면서도 고풍스런 느낌을 주었다
. 팔각형의 흑단목 탁자가 한 가운데 놓여있었다.
흑삼청년은 원계묵에게 자리를 권한 후 밖을 향해 외쳤다.
"초광(楚光) 있느냐?"
"넷!"
우렁찬 대답과 함께 한 사나이가 선실 안으로 들어왔다. 원계묵은 흠칫 놀랐다. 사
나이가 워낙 거구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흑갈색의 피부와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이
중원인이 아닌 것 같았다.
구 척이 넘는 키에 팔뚝만 해도 웬만한 사람의 허리통만큼 될 정도로 우람했다. 원
계묵도 체격에서는 자신이 있는 편이었으나 이 사나이와 비교한다면 왜소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부르셨습니까, 주인님?"
거한 초광은 공손히 팔을 늘어뜨린 채 시립했다.
"옷 한 벌과 명패 하나를 가져오너라."
"알겠습니다."
초광이 사라지자 청년은 담담히 말했다.
"초광은 내 하인이오. 원래 밀석아국(密昔兒國:이집트)의 노예였는데 우연한 기회에
거두게 되었소이다."
원계묵은 밀석아국이 어떤 나라를 말하는 건지 몰랐다.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
다.
"정말 대단한 체격이외다."
"신력(神力)의 소유자요. 충심이 대단한데다 계산이 빨라 큰 도움이 되고 있소이다.
'계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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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계묵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흑삼청년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본인은 상인이외다. 이 배의 주인이기도 하지요. 미천한 이름은 용백군(龍白君)이
라 하지요."
원계묵은 손을 모아 답례했다.
"소생은 원계묵이라고 합니다. 보시다시피 떠돌이 낭인입니다."
상인 용백군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이때, 문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초
광이 돌아왔다. 그의 손에는 옷 한 벌이 들려있었다.
용백군은 부드럽게 말했다.
"갈아입으시지요."
"고맙소이다."
원계묵은 상대의 호의가 부담스러웠으나 굳이 사양할 필요가 없는 것 같아 사의를
표한 후 옷을 갈아입었다. 새 옷은 청삼(靑衫)이었다.
"초광, 헌 옷은 알아서 처리해라."
초광은 네! 하고 대답한 후 벗어놓은 옷을 들고 사라졌다.
잠시 후 그는 다시 나타났다. 이번에는 차를 끓여 가지고 왔다. 거구의 사나이가 차
를 끓여온 것이 어쩐지 어울리지 않았지만 차맛은 일품이었다. 두 사람은 마주 앉아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원계묵은 시간이 흐를수록 용백군에 대해 경탄을 금치 못했다.
그것은 대화에서 느껴지는 박학다식함 때문이었다. 용백군은 학문은 물론 기예(技藝
)에 대해서도 모르는 것이 없었다.
원계묵은 자칭 문무를 겸전했다고 평소에 자부해 왔었다. 그러나 용백군에 비한다면
보름달에 반딧불을 견주는 것 같다는 자괴감까지 들었다. 그 뿐이 아니었다. 용백
군은 나이답지 않게 원숙함을 지니고 있었다.
겉보기에 두 사람은 비슷한 또래였다. 그러나 용백군의 인생 경륜은 원계묵으로 하
여금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하고 있었다. 어쨌든 원계묵은 점차 용백군에게 끌려 들
어가고 있었다.
범선은 황하와 연결된 대운하(大運河)로 접어들었다.
두 사람은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 사이 초광이 두 번씩이나 차를 새로 끓여 들어
와야 했을 정도였다. 두 사람 사이에는 화제가 끊어질 줄을 몰랐다.
오시(午時)쯤 되었을 때, 한 중년인이 선실로 들어와 보고했다.
"주인님, 아침에 배에 오르신 관부의 나리께서 좀 뵙자고 하십니다."
'......!'
원계묵은 흠칫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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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부인이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자신으로 인해 용백군이 곤란을 당하지나 않을까 염
려되어서였다.
"안으로 모셔라."
용백군은 태연히 말했다. 중년인이 나가려는 순간 그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중년인
을 불러 세웠다.
"잠깐만."
용백군은 붓을 들어 종이에 빠르게 휘갈겨 쓴 후 그에게 건넸다.
"이걸 초광에게 전해라."
"알겠습니다, 주인님."
원계묵은 중년인이 밖으로 나가기를 기다렸다 몸을 일으켰다. 용백군은 빙그레 웃으
며 말했다.
"원형은 그냥 앉아 계시오."
"용대인......."
원계묵은 뭐라 말하려 했으나 용백군이 눈을 찡긋하는 바람에 다시 자리에 앉고 말
았다.
'용형에게 무슨 복안이라도 있나 보군.'
이상하게도 원계묵은 안심이 되는 것을 느꼈다. 만난 지 불과 반나절도 안 되는 사
이에 그는 용백군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신임할만한 사람이라는 믿음이 들었다.
잠시 후 삼 인이 선실로 들어왔다. 앞장 선 자는 사십대 중반 가량으로 관복을 입고
짧은 턱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그는 전형적인 관부인의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마
른 얼굴에 가느다란 눈매가 날카로운 인물이었다. 그의 뒤에는 관복 차림의 두 청년
이 따르고 있었다.
중년인은 선실 안에 들어서자 정중히 포권했다.
"실례하오. 함부로 뵙기를 청해서......."
말하는 동안 그의 눈은 용백군과 원계묵을 빠르게 스쳤다. 그는 용백군에게 눈을 맞
추며 말했다.
"관부의 일로 실례를 무릅쓰고 방문했으니 협조를 바랍니다."
용백군은 당당한 모습으로 그의 인사를 받았다.
"앉으시지요. 무슨 일인지는 모르나 나랏일이라면 당연히 도움을 드려야지요."
중년인은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과연 산동(山東)의 거상 용백군 대인답습니다."
용백군은 빙긋이 웃었다.
"저에 대해 벌써 조사를 하신 모양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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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동의 관리로서 대명이 쟁쟁한 거상을 어찌 모를 수 있겠습니까?"
중년인은 의례적인 말을 늘어놓은 후 정색을 하며 자신을 소개했다.
"본인은 산동성 제형안찰사사 소속으로 형부도독(刑府都督) 단위제(檀偉帝)라고 합
니다."
용백군은 물론 원계묵도 흠칫하는 표정을 지었다.
형부도독 단위제.
그 이름은 산동 일대에서는 모르는 자가 거의 없었다. 그의 관직상 지위는 정육품이
었다.
단위제는 평범한 관리가 아니었다. 그는 흉악무도한 범인을 체포하는 데 달인의 솜
씨를 지니고 있었으며, 미궁(迷宮)에 빠진 사건을 처리하는 전문가 중의 전문가였다
. 그의 실적은 가히 경이적이었다. 오죽하면 귀사(鬼査)란 별명이 나돌 정도겠는가?
일단 사건을 대하면 그는 동물적인 육감을 발휘한다. 그에게는 어떤 사건이든 무섭
게 파고드는 집중력과 영활한 두뇌가 있었다.
따라서 그가 손댄 사건 치고 미결로 남는 일은 없었다. 그 동안의 공적으로만 친다
면 그의 관직은 이미 몇 단계 오르고도 남음이 있었다.
다만 그가 정육품에서 더 이상 오르지 못하는 것은 타협을 모르는 강직함 때문이었
다. 그는 상부의 압력 따위는 철저히 무시했다. 그의 신조는 오직 하나, 청렴결백이
었다.
한때 그의 상관이 공물을 착복한 탐관오리를 비호했을 때도 그는 압력에 굴하지 않
고 법에 따라 단호하게 처리했다. 그 일로 상관의 미움을 사 한직으로 물러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곧 복직되었다. 그 만큼 사건을 완벽하게 해결하는 인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부하들에게 있어서 그는 절대적인 존경을 받고 있었다. 그것은 논공행상(論功行賞)
이 정확하고 부하에 대한 애정 또한 지극했기 때문이었다.
단위제는 형부도독으로서의 능력 외에도 상당한 고수급 무공을 지닌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것은 무림인들이 개입된 사건을 여러 건 해결함으로써 짐작케 된 것이었
다.
용백군은 정색을 하며 정중히 말했다.
"실례했습니다. 설마 그 유명하신 단도독님이실 줄은 몰랐습니다."
단위제는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별 말씀을. 부끄럽소이다."
그는 힐끗 원계묵을 바라본 후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본인이 용대인을 뵙자고 한 이유는 한 가지 도움을 청할 일이 있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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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백군은 겸손하게 말했다.
"말씀하십시오. 단도독님의 명을 어찌 거절하겠습니까?"
"어젯밤 진무현에서 살인극이 벌어졌습니다. 그로 인해 이십 명이 넘게 죽었습니다.
용백군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니, 대체 어떤 일이 벌어졌기에 그 많은 사람들이 죽었단 말입니까?"
단위제는 담담히 말했다.
"무림인들의 분쟁이라고 생각됩니다. 한데 문제는 죽은 자들의 신분이 보통이 아니
라는 것입니다. 시신들을 살펴 본 결과 놀랍게도 조화성의 인물들이라는 것이 밝혀
졌습니다."
"조화성!"
용백군은 크게 부르짖고 말았다. 그는 정말로 놀란 듯했다. 단위제는 고개를 끄덕이
며 말했다.
"당금 무림에서 제일 가는 세력이지요.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범인의 무공입니다
."
"......?"
"이십여 구의 시체 중 두 구만 제외하고는 모두 한 사람에게 당했습니다. 그것도 단
일 초에."
단위제는 변함없이 차분한 음성으로 설명했다.
"범인은 어제 저녁 진무현의 열래객잔에 머물렀습니다. 열래객잔에서도 시체가 다섯
구나 발견되었지요. 객잔 주인의 말로는 범인의 모습이......."
그는 말꼬리를 흐리며 힐끗 원계묵을 바라보았다. 원계묵의 안색이 미미하게 변했다
. 문득 단위제는 벽쪽으로 걸어가더니 한 폭의 산수화 앞에 섰다. 그는 엉뚱하게 산
수화를 가리키며 물었다.
"이건 진품입니까? 송나라 때의 그림 같습니다만."
용백군은 감탄을 금치 못한 듯 칭찬했다.
"맞습니다. 정말 대단한 안목이십니다."
단위제는 한동안 산수화를 바라보다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시체들의 몸에 난 상처로 보아 범인은 상당히 긴 장도를 사용했습니다."
원계묵의 안색은 점점 더 딱딱하게 굳어져 갔다. 그는 주먹을 움켜쥐며 내심 중얼거
리고 있었다.
'상처만으로 그 점을 추리해내다니... 무서운 안목을 지닌 자다.'
단위제는 산수화에서 시선을 거두더니 선실 안을 둘러보았다. 그의 눈이 한 곳에 이
르러 멈추었다. 탁자 옆에 원계묵의 장도가 비스듬히 세워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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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두 구의 시체에 난 상처는 달랐습니다. 그들은 일종의 비도술(飛刀術)에 당했
습니다."
단위제는 손바닥으로 허공을 수평으로 그으며 말했다.
"역시 일 초에 즉사했습니다."
용백군은 그를 주시하며 물었다.
"단도독께서 말씀하고 싶으신 결론은 무엇입니까?"
단위제는 턱으로 원계묵을 가리키며 반문했다.
"실례지만 저 분의 성함은 어떻게 되시는지요?"
"원계묵이라 합니다."
원계묵은 흠칫했다. 설마 용백군이 자신의 본명을 말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것
이다.
"오! 그렇다면 근래 명성이 쟁쟁한 백살대(百殺隊)의 대장 마도(魔刀) 원대협(元大
俠)이 바로 저 분이시란 말입니까?"
용백군은 쾌히 대답했다.
"맞습니다."
단위제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실례가 안된다면 원대협이 용대인과 함께 계신 이유를 말씀해 줄 수 있는지요?"
"본인은 사업상 해상과 수로(水路)를 많이 이용하게 됩니다. 따라서 해적들이 호시
탐탐 노리고 있지요. 그래서 올해 초부터 원대협과 계약을 맺었습니다. 원대협의 무
공과 백살대의 힘을 빌어 안전을 구가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용백군의 설명에 단위제는 씩 웃으며 말했다.
"아, 그렇게 된 것이군요."
문득 그는 눈을 가늘게 하며 물었다.
"그렇다면 원대협은 언제부터 배에 타고 계셨습니까?"
"한 달 가량 되었습니다."
단위제의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가 스쳤다.
"그렇습니까?"
그는 빙글 돌아서며 수하들에게 말했다.
"가서 그들을 데려오너라."
"네, 도독님."
한 청년관인이 공손히 대답한 후 밖으로 나갔다.
청년관인이 밖으로 나간 후, 선실 안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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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원계묵은 좌불안석이었다. 여차하면 그는 자리를 박차고 떠날 생각을 하고 있
었다. 물론 그렇게 되면 관부와는 등을 지겠지만 그것을 두려워할 원계묵이 아니었
다.
하지만 상인인 용백군은 그로 인해 큰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기이한 것은 용백군의 태도였다. 시종일관 그는 태연
했던 것이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기에 저리 담담할 수 있단 말인가?'
이때 청년관인이 한 사람을 대동한 채 돌아왔다. 원계묵은 그 자를 본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듯했다. 관인의 뒤를 따라온 자는 그가 배에 오르기 전 말을 걸었던
인부였던 것이다.
'들통나고 말았구나!'
그는 여차하면 달아날 준비를 했다. 이때 단위제는 인부의 면전으로 다가가며 물었
다.
"너는 저 사람을 알고 있느냐?"
단위제의 음성은 마치 죄인을 심문하듯 추상같은 위엄을 내포하고 있었다. 인부는
원계묵을 힐끗 본 후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아... 알고 있습니다."
"그를 처음 본 것은 언제였느냐?"
"원공자님 말씀입니까? 그 분은 한 달 전부터 줄곧 배에 타고 계셨습니다."
단위제의 안색이 돌덩이처럼 굳어졌다. 그는 눈을 부릅뜨며 다그쳤다.
"무슨 소리냐? 너는 오늘 새벽 한 명의 회의인이 배에 올랐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 그렇... 습니다."
인부는 다리를 후들후들 떨며 시인했다.
"그렇다면 왜 지금 와서 부인하는 거냐?"
"네... 새벽에 한 명이 배에 오르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그 자는 처음 보는 사람
이었습니다. 원공자님은 한 달 전부터 쭉 계셨습지요."
단위제는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는 원계묵을 돌아다보았다. 그의
눈썹이 흔들렸다. 이제 보니 원계묵이 입고 있는 옷은 회의가 아니라 청삼이었다.
그는 머리가 띵해졌다.
'당했군. 깨끗이 당하고 말았어!'
이때 용백군이 인부를 향해 물었다.
"잘 생각해 봐라. 정말 아침에 단도독께서 말씀하신 자가 배 위에 오른 게 틀림없느
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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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주인님!"
"그 자는 지금 어디에 머물고 있느냐?"
인부는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습니다. 새벽에 오른 후로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소인도 그 점이 이상해서
찾아봤지만 아무데서도 볼 수 없었습니다."
용백군은 단위제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안됐군요. 아마 그 자는 도중에 배를 떠난 모양입니다."
용백군은 이번에는 원계묵을 향해 말했다.
"원형, 명패를 보여주시구려."
원계묵은 흠칫했다.
'명패? 아니 무슨 명패를 말인가?'
그는 얼떨결에 품 속에 손을 넣었다가 해연이 놀라고 말았다.
품 안에서 딱딱한 물건이 만져진 것이었다. 그는 놀랍기 그지없었다. 용백군이 이
모든 상황을 모두 예측하고 준비해 놓았다고 생각하니 등골이 다 서늘할 지경이었다
"여기 있소."
그는 명패를 꺼내 단위제에게 내밀었다. 단위제는 날카로운 눈으로 명패를 노려보았
다.
<구룡(九龍)>.
명패에는 음각으로 새겨진 글씨와 함께 아홉 마리의 용(龍)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
다.
단위제는 한 눈에 그것이 산동거상 용백군의 식솔임을 표시하는 명패임을 알아보았
다. 전에도 몇 번 그와 같은 명패를 본 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는 시선을 돌려 지그시 용백군을 응시했다. 용백군은 담담한 표정이었다. 그에게
서 더 이상 캐낼 것이 없을 것 같자 단위제는 껄껄 웃고 말았다.
"허허헛! 이 구룡상선(九龍商船)에서 이기려고 한 내가 잘못이었소. 용대인, 깨끗이
졌소이다."
용백군은 낭랑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단도독께서는 아직도 원형을 범인으로 생각하시는 모양이군요?"
단위제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정말 대단하군. 원계묵의 얼굴을 아는 증인으로 객점 주인이 있지만 저자의 태도로
볼 때 이미 손을 써둔 것 같군. 정말 치밀한 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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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원계묵을 바라보았다. 원계묵의 안색은 평온하기만 했다.
'저자는 정말 기막힌 도피처를 찾은 셈이로군.'
단위제는 용백군을 향해 정중히 포권하며 말했다.
"용대인, 이 배는 북경까지 간다고 들었습니다. 괜찮다면 함께 타고 가도 되겠습니
까?"
"물론이지요. 비록 상선이긴 하지만 돈만 내신다면 승객도 싣습니다."
과연 상인다운 말이었다. 단위제가 비록 관부인이긴 하지만 승선하는 대가는 받아야
겠다는 것이다. 단위제의 얼굴에 일말의 감탄이 스쳤다.
"고맙습니다. 그럼 바쁘신 용대인께 실례가 많았습니다."
그는 다시 한 번 포권지례를 취한 다음 돌아섰다. 용백군은 그가 두 명의 청년관인
과 함께 사라지자 비로소 인부를 향해 손을 저었다.
"자네도 나가보게."
"네, 주인님!"
인부가 물러간 직후, 초광이 들어왔다.
"수고했네. 초광."
용백군의 치하에 초광은 그저 충직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원계묵은 두 사람을 바
라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정말 부러운 관계로군.'
범선은 순조롭게 북상했다. 단위제는 더 이상 귀찮게 하지 않았으므로 원계묵은 편
안한 여행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모든 것이 젊은 상인 용백군의 기지 덕분이었다.
천륭객점(天隆客店)은 북경에서도 첫 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큰 객점이었다. 그곳은
일개 부중(府中)을 방불케 할 정도로 규모가 컸는데 주루와 반점을 겸하고 있었다.
객방만 해도 수백 칸이 넘었으며, 독립된 후원을 갖춘 별원도 십여 채나 되었다. 한
꺼번에 천 명 이상이 투숙할 수 있을 정도로 완벽한 시설을 갖춘 곳이었다. 객점의
전면에는 삼층의 주루가 있었는데 그 웅장한 규모와 화려함으로 인해 이미 오래 전
부터 북경성의 명물로 자리잡고 있었다.
주루 삼층의 창가에 면한 자리는 칸막이로 구별되어 있었다. 그곳에는 탁자와 의자
가 모두 최고급품으로 설치되어 있었고, 창문을 통해서는 북경시내가 한눈에 들어왔
다.
용백군과 원계묵은 마주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들이 북경에 도착한 지도 어언 닷새가 지났다. 그 동안 용백군은 활발하게 사업을
벌였다. 그의 사업은 각종 물품들을 황실(皇室)에 납품하는 일이었다.
그가 납품하는 물품은 실로 다양했다. 종이, 도자기, 금은 세공품, 포목과 비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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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롯하여 갖가지 일상용품들이 망라되어 있었다.
그는 황실에 물품을 납품함으로써 막대한 이윤을 남기고 있었다. 원계묵은 그의 곁
에서 사업을 도와주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의 유창한 화술과 귀신같은 상술(商術)은 흉내도 내지 못할 정도였던 것이다.
구룡상선에 실려있던 막대한 물품들은 지난 오 일 동안 완전히 바닥이 나버렸다. 비
록 사업에는 문외한인 원계묵이었지만 그 점만으로도 용백군의 사업수완이 뛰어나다
는 것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덕분에 그는 용백군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알게 되었다.
용백군은 산동성 제남(齊南)의 거부인 양익상(楊益尙)의 조카였다. 그는 지난해부터
양익상의 사업을 물려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놀라운 것은 그가 사업을 이어받
은 지 불과 일 년 사이에 열 배 가까이 규모가 커졌다는 사실이었다.
용백군의 나이는 이십 이 세로 원계묵보다 두 살이 많았다.
그러나 인생경험과 원숙한 대인관계는 그에게 비할 바가 아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용백군에게 강한 매혹을 느끼며 존경심을 품게 되었다. 급기야 북경에 온 지 며칠
이 되지 않아 그를 형님이라 부르게 되었다.
원계묵은 술잔을 비운 후 용백군에게 돌렸다.
그는 두 손으로 술을 따르며 물었다.
"형님은 이제 제남으로 가셔야겠군요?"
용백군이 담백한 미소를 지었다.
"아직 한 가지 할 일이 있네. 그 일을 마친 후 일단 제남에 돌아갔다가 다시 일을
시작할 생각이네."
이번에는 그가 물었다.
"원제는 앞으로 어떻게 할 셈인가?"
원계묵은 잠시 생각한 후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
"글쎄요.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는 이미 사부인 만승금도 도담후와 조화성 사이에 은원관계를 모두 고백한 터였다
. 만난 지 열흘밖에 안되는 용백군에게 어떻게 모든 것을 털어놓게 되었는지 본인도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용백군은 잠시 생각하더니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이 우형의 생각으로는 자네와 백살대만으로 조화성과 대결하기에는 무리인 것 같네
."
원계묵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형님의 말씀을 솔직히 시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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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가 말한 무영과 신산, 그 두 사람과 합작하는 것이 어떤가?"
원계묵은 단호하게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싫습니다. 결코 그들과 손잡을 생각은 없습니다."
용백군은 남은 술잔을 서서히 비운 후 차분하게 말했다.
"원제, 기다린다는 것은 지루한 것이지만 때로는 기다려야 할 때도 있는 법이네. 무
모한 용기는 단지 만용에 불과할 따름이네."
원계묵은 그를 응시했다. 용백군의 눈은 별처럼 차가워 보인다. 그러나 그 눈에서는
왠지 신뢰가 느껴졌다. 원계묵은 이 며칠 동안 갈등했던 일들을 떠올리며 결론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형님, 이 어리석은 아우에게 길을 안내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용백군의 눈이 빛났다.
"무슨 말인가?"
원계묵의 두 눈이 번뜩였다.
"형님 곁에 있고 싶습니다. 형님께서 제가 움직여야 할 때를 알려주십시오."
용백군은 안색이 가볍게 변했다. 그러나 곧 나직이 웃으며 말했다.
"원제, 자네는 날 너무 크게 보는군. 나는 일개 장사꾼일세. 자네가 속한 무림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네."
원계묵은 힘주어 그를 주시하며 말했다.
"소제를 속이지 못합니다. 형님은 상인이지만 결코 단순한 상인은 아닙니다. 형님은
제가 보기에 대단한 무공을 지니고 계십니다."
원계묵의 음성에는 점점 더 열기가 더해갔다.
"무림에서는 뛰어난 두뇌를 지닌 자로 신산 제갈사를 꼽지만 제 육감으로는 형님은
결코 제갈사의 아래가 아닙니다."
용백군은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원제, 나는......."
"형님! 부탁드립니다."
원계묵은 용백군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의 두터운 손이 어울리지 않게 떨리고 있었
다.
"요즘 들어 소제는 극도의 무력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형님을 만나게 해준 것은 어
쩌면 하늘의 뜻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용백군은 한동안 그를 응시하다 물었다.
"원제, 내가 자네에게 무엇을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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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움직일 방향을 설정해 주십시오."
용백군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 그것을 일러주기에는 무리일세."
"기다리겠습니다. 언제까지라도......."
그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덧붙였다.
"상대가 상대인 만큼 백 년이라도 기다릴 용의가 있습니다."
용백군은 원계묵을 주시했다. 그의 두 눈에는 간절한 빛이 어려있었다. 마침내 용백
군은 빙긋이 웃었다.
"자네는 언젠가 날 택한 것을 후회할 걸세."
"형님!"
원계묵의 눈에 기쁨이 충만하게 떠올랐다. 그는 손에 힘을 주었다.
"저의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도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용백군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한 번 해보세, 아우."
두 사나이의 약속.
놀라운 지모를 지닌 상인 용백군과 도법의 제일인자인 마도 원계묵 간에 이루어진
약속. 과연 그것이 불러일으킬 풍운의 향배는 어찌될 것인가? 그것은 오직 하늘만이
알 수 있을 것이다.
태진궁(太眞宮).
자금성(紫禁城) 동쪽에 위치한 이곳이야말로 당금 황조의 국운을 좌지우지하고 있는
한 거인의 처소였다.
태진왕(太眞王) 주익적(朱翊 )은 신종(神宗) 만력제(萬歷帝)의 이복동생이다. 그는
전대 황제 목종(穆宗)이 아끼던 서귀비(徐貴妃)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면서부터 줄
곧 신동(神童)이란 평판을 들어왔다.
목종은 제위에 오른 지 육 년 만에 죽었다. 뒤를 이어 신종이 황제가 되었을 때 그
의 나이 불과 열 살이었다. 그토록 어린 나이에 정사를 제대로 다룰 수 없음은 불문
가지였다.
천행이랄까?
다행히 그 무렵에는 철의 재상으로 이름 높았던 명신 장거정(張居正)이 있으므로 해
서 국사는 순조롭게 이어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만력 십 년 경, 신종은 철의 재상 장거정을 환관의 농락에 휘말려 제거하게
되는 우를 범하고 만다. 이후로 그는 주색(酒色)에 빠져 폭정을 일삼게 되니 나라
살림이 말이 아니게 되었다. 주변에 충신은 사라지고 온통 환관이 득세하게 된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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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다.
한편 태진왕은 나라를 염려하여 수 차례에 걸쳐 신종에게 상소문을 올렸으나 그의
상소문은 환관의 손에서 처리되어 신종에게 전달조차 되지 않았다.
태진왕은 방법을 달리 하기로 했다. 그는 뜻 있는 충신들을 규합하여 어지러운 황실
을 위해 보이지 않는 노력을 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수십 년 간에 걸쳐 그는 많은 일들을 했다. 특히 변방을 강화하여 찰합이
성 일대의 달탄부족과 대륙의 남방을 침입하여 약탈을 일삼는 왜구들을 막아내는 데
전념했다.
뿐만 아니라 북방의 근심거리인 흑룡강(黑龍江)과 송화강(松和江) 일대의 여진족의
족장인 누르하치를 감시하고 그가 남하하는 것을 억제하는 데 배전의 노력을 기울였
다.
그의 보이지 않는 노력은 충신들에게 무한한 존경심을 품게 만들었다. 또한 그는 황
실의 특무기관인 금의위(錦衣衛)와 동창(東廠)의 대권을 위임받아 황실의 비리 제거
에도 앞장섰다.
보이지 않는 힘, 그것은 황조를 지탱하는 최후의 보루이기도 했다.
그러나 뉘 알았으랴? 태진왕을 중심으로 마침내 심상치 않은 바람이 불기 시작했으
니.......
화원에는 갖가지 꽃들이 만발해 있다.
금란화, 백일홍, 작약, 국화, 목단, 매화, 장미, 해당화... 세상의 꽃이란 꽃이 모
두 이곳에 모여있는 듯하다. 그곳에서 여인이 꽃을 따고 있었다. 그녀는 백의를 입
고 있었다.
화장기가 전혀 없는 청초한 얼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인의 전신에서는 고귀
함이 느껴졌다. 주변의 꽃들이 무색할 정도로 아름답기도 하려니와 그보다 돋보이는
것은 고고함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백연연(白娟娟)이다.
만력 삼십 년, 환관의 음모에 의해 사약을 받고 죽은 충신 백시열(白時悅)의 딸이었
다. 역적으로 낙인찍혀 사약을 받으면 삼족이 멸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럼에
도 불구하고 그녀는 살아 있었다.
그것은 백시열의 충심을 알고있던 태진왕이 비밀리에 그녀를 빼돌렸기 때문이었다.
그 후 백연연은 태진궁에 살게 되었다.
태진왕은 그녀를 자신의 측근에 두었다. 비록 명목상으로는 시비였으나 태진왕이 혼
인을 하지 않았으므로 사실상 그녀는 태진궁의 살림을 도맡아 하는 안주인의 역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나이 이십 세. 여인으로는 무르익은 나이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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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을 따던 백연연의 손길이 멈춘다.
그녀의 눈에는 아직 벌어지지 않은 해당화가 들어왔다. 아직 이른 아침이라 해당화
봉오리에는 영롱한 이슬방울이 맺혀있었다. 백연연은 가만히 입술을 열어 시를 읊었
다.
"영롱한 이슬방울 해당화 봉오리에 가지런히 매달렸네.
꽃잎은 연지를 바른 듯 붉고 납으로 봉한 듯 야무지게 닫혀있는데
그대 주의하여 이슬을 떨구지 마세요.
만약 이슬이 떨어지면 붉은 색 튀어나와 봄날은 가버리고 말 거예요."
미녀의 옥음에 실려 나온 시음은 화원을 영롱하게 울렸다.
"허허! 연연(娟娟), 네 아름다움이 꽃 속에 있으니 꽃들마저 빛을 잃은 듯하구나."
어디선가 은은한 웃음소리와 함께 한 인물이 나타났다.
곤룡포를 입은 오순 가량의 인물이었다. 노인의 용모는 청수했으나 아쉽게도 낯빛이
몹시도 파리해 중병을 앓고 있는 듯이 보였다.
그는 바로 태진왕이었다. 물론 이곳은 태진궁의 별원이었다.
"연연아, 네 노래가 들리기에 나와봤다. 허허... 역시 네 음성은... 쿨룩... 쿨룩!"
갑자기 그는 심하게 기침했다. 급히 그를 부축하는 백연연의 얼굴에는 안타까움이
넘치고 있었다.
"전하, 날씨가 차온데 옥체를 상하실까 두렵사옵니다."
기침이 멎자 태진왕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헛헛! 내 몸은 아직 건강하다. 걱정할 정도는 아니다."
백연연의 두 눈에 그늘이 지고 있었다.
"요즘 전하의 건강이 많이 상하셨습니다."
"허허... 그러냐?"
태진왕은 문득 고개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설혹 내 한 몸이 사라진다한들 나라만 평안하다면 무슨 걱정이겠느냐?"
"......."
"북방의 누르하치가 여진을 통일하고 금(金)을 세워 나날이 그 힘이 커지고 있으니
장차 이 나라가 근심스럽기만 하구나."
가뜩이나 파리한 태진왕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게다가 세간에서는 조화성인지 뭔지 하는 단체가 혼란을 일으키고 있으니... 쿨룩.
.. 쿨룩......."
그는 다시 기침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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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
백연연은 급히 그를 부축했다.
그녀는 눈물이 글썽해졌다. 태진왕의 건강이 갈수록 나빠지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
다.
그의 존재는 마치 어버이와도 같았다. 그러나 또다른 감정이 그녀의 마음 속에 비밀
리에 자리하고 있었으니... 언제부터인가 태진왕에 대한 애정이 싹트고 있었던 것이
다.
"전하께서는 이 나라의 마지막 희망입니다. 부디 옥체를 보중하소서."
태진왕은 간신히 기침을 억누른 후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 걱정하지 마라. 나는 안 죽는다."
그는 꽃바구니에서 한 송이의 꽃을 꺼내 얼굴로 가져가며 말했다.
"이 국화는 매우 아름답구나."
백연연의 꽃바구니에는 국화만이 가득 담겨져 있었다. 그녀는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전하의 처소에 장식할 것이옵니다."
태진왕은 너털웃음을 쳤다.
"허허허! 연연, 너는 장차 결혼하면 훌륭한 내조자가 될 것이다."
백연연의 얼굴에 노을과 같은 홍조가 피어났다. 태진왕은 은근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래,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있느냐?"
백연연은 그만 귀밑까지 붉어졌다.
"호!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보니 있기는 있는 모양이구나."
백연연은 고개를 푹 떨구었다. 그녀는 내심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전하! 제가 사랑하는 분은 전하 뿐이옵니다. 왜... 모르시나요?'
그녀는 야속한 느낌이 들었다. 이때 태진왕이 담담하게 말했다.
"너는 결코 관리와 결혼하지 말거라. 평범한 것 이상 좋은 것이 없느니라."
백연연은 내심 중얼거렸다.
'소녀는 전하의 곁에 있는 것만이 가장 큰 행복이나이다.'
어찌 감히 마음 속에 있는 말을 꺼낼 수 있으랴? 그녀와 태진왕 사이에는 엄청난 신
분의 차이가 있었다. 그 때문에 그녀는 마음속의 사랑을 꽁꽁 동여맬 수밖에 없었다
태진왕은 몸을 돌렸다.
"들어가자꾸나."
"네, 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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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화원으로 한 명의 금포 중년인이 총총히 들어섰다. 그의 소매에는 금빛의 수실
이 매어져 있었다. 중년인은 태진왕을 발견하자 즉각 무릎을 꿇었다.
"아뢰옵니다, 전하."
"무슨 일이냐?"
"전하를 알현하고자 하는 자가 있습니다."
중년인은 두 손으로 한 장의 배첩을 받들어 올렸다. 배첩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
혀 있었다.
-산동(山東) 용백군(龍白君) 배례(拜禮).
"용백군이라? 처음 듣는 이름이군."
태진왕이 고개를 흔들자 중년인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용백군은 유명한 거상입니다."
"상인이란 말인가?"
"그렇습니다, 전하."
태진왕은 고개를 저었다.
"몸이 안 좋으니 나중에 들라 일러라."
중년인은 급히 말했다.
"용백군은 일 년 전 전하께서 구진(九鎭)을 시찰 나가셨을 때도 태진궁을 방문한 적
이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는 양응시(楊應翅) 대감의 외손자이기도 합니다."
순간 태진왕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양응시 대감의 외손자라고?"
"그렇습니다."
태진왕의 얼굴에 희색이 떠올랐다.
"오! 양대감의 후손이라면 어찌 안 만나겠는가? 어서 들라 해라."
"알겠습니다. 전하."
중년인이 총총히 사라지자 백연연은 궁금한 듯 물었다.
"전하, 양응시 대감이 누구신가요?"
태진왕의 얼굴에는 가벼운 흥분이 떠올랐다.
"양대감이야말로 충신 중의 충신이지. 그는 강직한 성품 때문에 이십 년 전 모함을
받아 삭탈관직된 후 산동으로 낙향했다. 그동안 통 소식이 없었는데 그 후손이 찾아
왔다니......."
그는 회상에 젖은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그분이야말로 내 젊은 시절에 스승이나 다름없는 분이셨다. 정말 대단한 어른이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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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태진왕의 얼굴에는 아련한 추억이 떠오르는 듯했다. 그는 한시라도 빨리 양응시의
후손을 만나고 싶은지 총총걸음으로 내실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뒤따르는 백연연은
그가 간만에 생기를 보이는 것이 그저 눈물나게 반가울 뿐이었다.
실내는 당대 황족의 처소로 보기에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검박했다. 평범한 서탁
을 앞에 두고 태진왕은 포단 위에 앉아 있었다.
검은 옷을 입은 청년이 그에게 대례를 올리고 있었다.
"미천한 백성 용백군이 전하께 인사드립니다."
태진왕은 처음 그가 들어서는 것을 보고 크게 놀랐다. 그는 한눈에 용백군을 알아
보았다.
'오오! 석년의 양대감을 보는 듯하구나. 아니... 그 기상이 더욱 더 훌륭한 청년이
로다!'
태진왕은 반가운 어조로 말했다.
"일어나게. 자네를 만나보니 양대감을 직접 보는 듯해 몹시 기쁘다네."
"황송합니다."
용백군은 자세를 바로 잡았다. 그도 역시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말로만 듣던 것보다 훨씬 검소하고 다감한 분이시구나.'
"그래, 양대인께서는 평안하신가?"
용백군의 안색이 침울해졌다.
"외조부님께선 십 년 전 노환으로 별세하셨습니다."
"무엇이? 별세했다고?"
"그렇습니다."
"아아......! 진정한 충신 한 분이 돌아가셨구나!"
태진왕은 충격이 큰 듯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고 공허한 눈을 허공에 두고 있었다.
한참 후 그는 자책하듯 중얼거렸다.
"허허, 한심하도다. 양대감의 부음조차 몰랐다니......."
그의 얼굴에는 비감한 기운이 한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아니, 세월의 무정함을 느낀
듯 그의 파리한 얼굴은 더욱 그늘이 지고 있었다.
"으음. 양대감께서는 익상이란 아들과 혜(慧)라는 딸이 있었는데 그들은 어찌 되었
느냐?"
"외숙의 함자가 바로 익상입니다."
"허! 자당이 양혜(楊慧)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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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다, 전하."
태진왕은 한동안 멍하니 용백군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알 수 없는 추억의 그림
자가 난마처럼 엉키는 듯했다.
"자당은... 안녕하신가?"
용백군의 안색이 다시 침울해졌다.
"돌아가셨습니다."
"음."
태진왕도 어두운 표정이었다. 그는 지그시 눈을 내리 감으며 말했다.
"내가 알기로 자당은 이십 몇 년 전인가 남창(南昌)의 장씨(蔣氏) 성을 가진 상인과
결혼한 것으로 아네만......."
"그렇습니다."
태진왕은 의심쩍은 듯 눈을 번쩍 떴다.
"한데 어째서 자네의 성이 용씨(龍氏)인가?"
용백군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용씨는 거짓이옵니다. 신의 천명은 장천린이라 합니다."
장천린!
놀랍게도 그는 바로 장천린의 화신이었다. 그는 남창을 떠난 후 지금까지 용백군이
란 가명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그렇게 한 이유는 신산 제갈사의 이목을 피하
기 위함이었다.
태진왕의 눈빛이 형형하게 빛났다.
"어째서 가명을 썼느냐?"
장천린은 내심 한숨을 쉬었다. 태진왕은 그에게 진실을 묻고 있었다. 그는 감히 숨
길 수가 없어 그동안 자신이 겪은 일들을 털어놓았다.
부친 장진군이 죽은 이후 사업을 이어받은 일, 남창 제일의 주루인 신선루(神仙樓)
를 세운 일, 죽어가던 여인 취옥교를 구해주고 그녀와 함께 지냈던 나날들, 그리고
우연히 만가산에서 노명을 비롯한 사 인의 괴인을 만났던 일... 그날 이후로 벌어졌
던 파란만장했던 사건들을 모두 털어놓았다.
물론 강남의 거상 금백만의 죽음과 신산 제갈사의 차도살인계에 걸렸던 일, 그 후로
모든 것을 정리하고 태산(泰山)에 들어가 복수를 다짐하며 무공연마를 하게 되었던
사연들을 상세히 이야기했다.
"......!"
태진왕의 놀라움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실로 한 청년에게 벌어진 일치고는
너무도 엄청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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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천린은 차분한 음성으로 계속 이야기했다.
"태산에서 몇 개월 간 무공을 익힌 저는 제남의 외숙을 찾아갔습니다."
제남의 거부 양익상은 실제로 그의 외숙으로 모친인 양혜(楊慧)와 피를 나눈 사이였
다.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극히 적었다. 그것은 삭탈관직 당한 양씨 문중이 가계의
노출을 꺼려했기 때문이었다. 양혜가 신분이 전혀 다른 장진군과 결혼하게 된 것도
관직에 염증을 느낀 양씨 가문의 심정 탓이라고 할 수 있었다.
"외숙의 사업을 돕던 중 지난 해 전하를 뵈러 온 적이 있었습니다."
"음. 그 얘기는 들었네."
"노명 어른이 부탁한 서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전하를 만나 뵙지 못해서 다시
돌아가야 했습니다. 그 동안 사업에 전념하다보니 이제야 전하를 뵙게 되었습니다."
한동안 침묵하던 태진왕은 허탈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노명이 죽었단 말이지?"
장천린은 그의 반응에 의혹을 느꼈다.
"전하는 애당초 그를 아셨단 말인가?"
태진왕은 그가 궁금해하는 것을 말해 주었다.
"노명은 금의위(錦衣衛)에 속한 인물이었네. 그는 비밀리에 명령을 받고 조화성에
잠입했었네."
"아!"
장천린은 비로소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품 속에서 서찰을 꺼내 바쳤다.
"전하께 전해 달라는 서찰입니다."
태진왕은 서찰의 봉인을 뜯었다. 진지한 표정으로 읽어 내려가던 그의 얼굴이 굳어
지고 있었다. 아니, 파리한 안색이 더욱 창백하게 변하고 있었다. 이윽고 그는 식은
땀을 흘리며 서찰을 내려 놓았다. 그런 그의 모습은 똑바로 앉아있기도 힘에 겨운
듯해 보였다.
'대체 어떤 글이 쓰여있기에?'
장천린은 의혹을 금치 못했으나 감히 물어보지 못하고 그가 입을 열기만을 기다렸다
"허허헛......."
태진왕의 입에서 허망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어찌하여... 들리느니 좋은 소리는 없고, 망국(亡國)의 소리만 전해오는가?"
그는 현기증을 느끼는 듯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전하......."
장천린이 어쩔 줄을 몰라하자 태진왕은 서찰을 건네며 힘없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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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보겠는가?"
"황공합니다."
장천린은 서찰을 두 손으로 받은 후 펼쳐 보았다. 깨알같은 글씨가 잔뜩 쓰여 있었
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신 노명(盧明)이 전하께 글을 올립니다.
전하의 뜻을 받들어 조화성에 잠입한 지도 벌써 수 년, 그 동안 신은 조화성의 금제
에 걸려 함부로 몸을 움직일 수 없었기에 연락을 취하지 못했습니다. ...... 중략 .
..... 신은 조화성의 제오신마전(第五神魔殿)에 갇혀 있었던 육십 육 인을 설득하여
탈출을 시도하려 합니다. 만에 하나 신이 죽더라도 한 명이라도 살아 나가게 되면
전하께 이 서찰을 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일이면 탈출을 시도할 것입니다. 마지
막으로 신이 조화성에서 조사한 사실을 적어 두겠습니다. 그 중 두 가지 사안은 황
조마저 위태롭게 하는 너무도 놀라운 것입니다.>
여기까지 읽은 장천린의 놀라움은 극에 달했다. 그는 숨조차 쉬지 못한 채 계속 읽
어 내려갔다.
<...조화성주 염무는 여진(女眞)의 누르하치와 암중으로 동맹을 맺었습니다. 중원을
안과 밖에서 정복하려는 반역을 자행한 것입니다. 더욱 무서운 일은 염무가 전하의
옥체를 노리고 살인혈첩(殺人血帖)을 내렸다는 사실입니다. 그 집행자가 누구인지
는 알 수 없으나 필시 무서운 인물로 추측됩니다. 전하께서는 어지러운 이 나라의
마지막 보루이옵니다. 부디 옥체를 보중하셔야 합니다. 만일 하늘의 가호가 있어 신
이 살아난다면 반드시 뵐 수 있으리라 여기며.......>
서찰은 그렇게 끝났다. 말미에는 노명의 서명(書名)이 기재되어 있었다. 실로 상상
도 하지 못한 엄청난 소식을 담고 있었다.
장천린은 심장이 크게 뛰었다.
'조화성....... 감히 이 나라를 정복할 음모까지 꾸미다니.......'
그의 충격은 컸다. 비로소 그는 태진왕의 안색이 그토록 창백해진 까닭을 알게 되었
다. 장천린의 가슴에는 이제껏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분노의 불덩이가 이글거렸
다.
'조화성!'
그것은 조화성이 개인적인 원수이면서 동시에 국가에 대한 반역자라는 사실 때문이
었다.
태진궁의 한 별원.
두 청년이 마주앉아 술을 들고 있다. 그들은 장천린과 원계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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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계묵은 술잔을 내리며 답답하다는 듯이 묻고 있었다.
"형님, 대체 언제까지 이곳에 머무를 작정이십니까?"
원계묵의 불만은 당연했다. 그들이 태진궁에 들어온 지 이미 열흘이 지났기 때문이
었다. 장천린은 술을 한 모금 마시며 담담히 말했다.
"원제, 지금은 나가고 싶어도 나갈 수가 없다."
"어째서 말입니까?"
장천린은 입가에 묘한 웃음을 담으며 설명했다.
"태진왕은 속이 깊은 분이야. 그는 분명 제남의 양가장으로 사람을 보냈을 걸세."
"그렇다면......."
원계묵의 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나라는 존재를 십분 믿기 위해서 그런 일을 하셨을 걸세."
원계묵은 코웃음쳤다.
"흥! 결국은 형님을 완전히 믿지 못한다는 말이 아닙니까?"
"그만큼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지. 만에 하나라도 그 서찰이 가짜라면 황실에 얼마
나 큰 타격이 오겠는가?"
"......."
"아무리 황실의 병력이 강하다해도 무림제일의 단체인 조화성과 정면으로 부딪칠 수
는 없는 일이네."
원계묵의 안색이 굳어졌다. 그는 내심 중얼거렸다.
'그렇다. 조화성의 고수는 수만을 헤아린다. 명의 병력이 수백만이라 한들 무림고수
를 상대하는 것은 다르다. 자칫하면 엄청난 비극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장천린은 문득 화제를 돌렸다.
"아우, 근처에 몇 명의 감시자가 매복해 있는가?"
원계묵의 눈빛이 번뜩 빛났다. 그는 공력을 일으켜 청각을 집중했다.
"열 세 명입니다. 숨소리가 고르고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 모두 일급
고수들입니다."
그는 불쾌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하는군요."
문득 그의 눈빛이 칼날처럼 빛났다.
"누군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장천린은 태연히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잠시 후, 문 두드리는 소리가 가볍게 들
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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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오시오."
원계묵이 딱딱한 음성으로 말하자 살며시 문이 열리며 백의미녀가 들어왔다. 그녀는
바로 백연연이었다. 그녀는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두 분께서는 소녀를 따라 오시지요."
공손하면서도 기품 있는 태도에 장천린은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전하께서 부르시는 것이오?"
백연연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장천린의 눈이 반짝였다.
그는 원계묵에게 전음으로 말했다.
"아우, 고달픈 일이 생길 것 같네. 주의하게."
'......?'
원계묵은 의아했으나 이미 그를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있었으므로 묵묵히 뒤를 따랐
다. 세 사람은 방을 나와 회랑으로 접어들었다. 회랑은 길었다. 몇 채의 건물을 돌
고 돌아 그들이 당도한 곳은 넓은 대청이었다.
백연연은 걸음을 멈추며 말했다.
"잠시 기다리십시오."
그녀는 두 사람만 남겨둔 채 나가버렸다. 원계묵은 주위를 둘러보다 불길한 예감을
느꼈는지 전음으로 물었다.
"형님,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장천린은 대답 대신 몇 걸음 걸어가더니 벽을 어루만졌다. 손가락에 닿는 감촉이 유
난히 차가웠다.
'벽 속에 강철이 들어 있다.'
그는 긴장이 되었으나 겉으로는 아무 내색도 하지 않았다.
그들이 대기한 지 일각쯤 지났을 때였다. 가벼운 발자국 소리와 함께 다섯 명의 괴
인이 들어왔다. 그들은 검을 들고 있었는데 하나같이 얼굴을 백색의 복면으로 가리
고 있었다. 그들은 말없이 두 사람을 포위했다.
장천린은 원계묵에게 전음으로 말했다.
"원제, 상대는 대내(待內)의 일급 고수들이네. 일 대 오인데 감당해낼 수 있나?"
원계묵은 복면인들을 날카로운 눈으로 주시했다. 그 순간 벌써 어깨 위의 장도를 약
간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은 오랫동안 숙련된 준비동작이었다. 그는 이미 찰나적으
로 그들을 파악하고 있었다.
'풍기는 기도로 보아 악씨 삼형제 이상이다. 황궁에서 이 정도 무공을 쓰는 자들이
라면?'
그는 내심 단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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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의위 아니면 동창 중 하나다.'
금의위나 동창에 소속된 황궁의 대내고수들이 일반 무림고수와는 또 다른 특출한 무
공을 지니고 있음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원계묵은 전신의 근육을 긴장시키며 전음으로 물었다.
"형님, 대체 태진왕의 속셈은 무엇일까요?"
장천린도 그것이 궁금했다. 물론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다. 그는 오 인의 복면인을
향해 물었다.
"당신들은 누구요?"
복면인들은 아무도 대꾸하지 않았다. 그러자 원계묵이 냉소하며 말했다.
"후후, 태진궁에 감히 복면 쓴 무리들이 횡행하다니, 고약한 일이군!"
말이 끝나는 순간, 그는 결코 감정과 현실을 혼동하지 않는 사람답게 이미 공격을
가하고 있었다.
"갈!"
쐑!
도광이 번득였다.어느새 뽑힌 장도가 오 인 중 한 명을 두 쪽 낼 듯 날아갔다. 순간
복면인도 기민한 반응을 보였다. 그의 손에서 검이 불을 뿜었다.
캉!
귀청을 찢는 금속성과 함께 시퍼런 불꽃이 튀었다.
일도일검이 격돌한 순간 복면인은 몸을 휘청거렸다. 그러나 원계묵의 놀라움은 이만
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손목은 물론 팔 전체가 떨어져 나갈 듯이 진동했던 것이다.
'이 자! 대단한 강자다.'
그는 일 초로 상대의 능력을 시험한 것이었다. 이때 그의 귓전으로 장천린의 전음이
들려왔다.
"원제, 될 수 있으면 실력의 삼 푼은 숨겨두게."
원계묵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좌우에서 두 명이 전광석화처럼 공격해 왔다.
"후훗!"
원계묵은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 그의 눈빛은 비정한 광채를 발하기 시작했다. 장도
를 비스듬히 눕힌 채 벼락처럼 날리는 그의 모습은 마치 한순간에 야수로 화한 듯했
다.
파파파팍! 카캉......!
실로 무시무시한 싸움이 벌어졌다. 불꽃이 우박처럼 퍼지며 가공할 검광도광(劍光刀
光)이 대청을 살벌하게 메웠다.
일 대 오의 숨막히는 접전이었다. 상식적으로 판단할 때 수적으로는 일방적인 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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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될 것 같았다. 그러나 전세는 팽팽했다.
원계묵의 무공은 가히 예술적이었다. 그의 도는 자유자재로 춤추고 있었다. 장도가
허공을 가를 때마다 형언할 수 없이 막강한 도기(刀氣)가 뿌려졌다. 그의 도법은 단
순명쾌했다. 그저 일직선으로 긋고 가르며 허공을 쪼갰다. 그러나 쉽게 보면 오산이
었다. 그의 도법은 단순함 가운데 무궁무진한 변화를 내포하고 있었다.
때로는 갈대처럼 가볍게 뻗어나갔고, 어떨 때는 태산같은 묵중함으로 오 인의 검을
눌러버렸다. 또 어떤 때는 단지 기(氣)만으로 그들을 휘청거리게 만들었다. 그로 인
해 싸움은 절대의 우세도. 열세도 아닌 팽팽한 국면을 유지했다.
장천린은 내심 감탄하고 있었다.
'굉장한 도법이다. 이대로 가면 장차 아우는 천하제일도(天下第一刀)가 될 것이다.'
그는 딴 사람처럼 변한 원계묵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에는 다소 둔해 보이는 원제가 일단 싸움에 임하니 야수와 같구나. 마치 싸움
을 위해 태어난 무인 같구나.'
이때였다. 원계묵의 입에서 음산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흐흐흐......! 무엇이 구려서 얼굴을 가리고 있느냐? 이제 그만 탈을 벗어라!"
우우우우... 웅!
그의 장도가 움직이며 마치 아수라의 울음소리 같은 파공음이 울렸다.
장천린은 안색이 변했다.
그는 보았다. 원계묵의 도가 괴이하게 뻗는 순간 칼 그림자가 사방으로 퍼지며 마치
환상처럼 아수라(阿修羅)의 형상을 만드는 것을!
'저것이 바로 수라구류도(修羅九流刀)!'
"크윽!"
연달아 비명이 터졌다. 다섯 명의 복면인들이 뒤로 주르륵 밀려나고 있었다. 그들의
검은 모두 두 동강이가 나 있었다. 또한 그들의 손아귀에서는 피가 철철 흐르고 있
었다. 복면 사이로 보이는 그들의 눈에는 경악과 공포가 떠올라 있었다.
"하하하, 과연 마도 원계묵답군. 정말 대단하네."
짝짝! 하는 박수소리와 함께 대청 안으로 삼 인이 들어섰다. 그 중 두 사람은 태진
왕과 백연연이었는데 나머지 한 명은 금포를 입은 노인이었다.
금포노인은 지극히 평범한 용모였다. 키는 중키에 그 나이라면 흔히 볼 수 있는 수
염을 특징없이 기르고 있었다. 얼굴도 둥그스름하여 저잣거리를 걷노라면 하루에도
수십 명을 볼 수 있는 그런 평범한 인상이었다. 나이는 대략 오순 가량 되어 보였다
태진왕은 여전히 박수를 치며 걸어 들어왔다.
"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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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천린은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태진왕은 간만에 쾌활하게 말했다.
"미안하네. 백군(白君), 요 며칠 간 자네에게 소홀했네. 내 사과하지."
그는 다섯 명의 복면인들을 향해 손을 저었다.
"너희들은 물러가 있거라."
"예!"
오 인은 즉시 몸을 날려 사라졌다. 태진왕은 원계묵을 향해 돌아서며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웠다.
"내 마도에 대한 소문은 귀가 따갑도록 들었다네. 오늘 보니 과연 명불허전이군. 금
의위의 다섯 고수가 손도 못쓰고 당하다니 말일세. 하하하하......!"
태진왕은 몹시 유쾌한 듯 연신 너털웃음을 쳤다.
원계묵은 썩 내키지 않았으나 할 수 없이 허리를 약간 숙이며 예를 표했다.
"황송합니다."
"자, 이리들 오게."
태진왕은 일행을 이끌어 대청 안쪽으로 걸어갔다. 대청 안쪽은 중청(中廳)이었는데
미리 마련해 놓은 듯 여러 사람이 앉을 수 있는 의자와 팔선탁자가 놓여 있었다.
"모두 자리에 앉게."
일행이 자리잡자 태진왕은 금포인을 가리키며 소개했다.
"이 분은 엽천우(葉天羽) 대인이네. 황실 금의위의 수반이지."
'금의위의 수반!'
장천린과 원계묵은 가벼운 충격을 느꼈다.
금의위(錦衣衛)라면 황제의 직속기관으로 대내(待內)의 고수들을 장악하고 있는 막
강한 권력체다. 그들이 행사하는 권력은 육부(六部)의 상서를 능가하며, 때에 따라
서는 승상(承相)을 체포할 수도 있었다.
황제의 친명을 받아 역모자나 간언(間言)을 일삼는 관리들을 체포, 구금할 뿐더러
갖은 고문과 실력행사를 통해 정보를 캐내는 비밀기관이므로 사실상 직위에 관계없
이 무시무시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다.
승상은 물론 설사 황족이라 해도 국법에 저촉되면 금의위가 출동하여 즉각 체포하게
된다. 그러므로 관리들에게 있어 그들은 공포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장천린은 내심 중얼거렸다.
'으음. 금의위의 실권을 태진왕이 잡고 있다더니 소문이 사실이었구나.'
그는 몸을 일으키며 포권했다.
"소생 용백군이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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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천우는 담담히 미소지으며 말했다.
"용공자의 외조부이신 양응시 대감은 노부도 옛날부터 존경해 왔소이다. 그 어른의
혈육을 만나니 실로 감회가 깊소이다."
이때 태진왕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지시했다.
"연연, 차를 준비하거라."
"네."
백연연은 공손히 대답한 후 밖으로 나갔다. 태진왕은 자애스런 눈빛으로 장천린을
바라보며 말했다.
"백군, 자네가 한 말에 거짓이 없다는 것을 오늘 아침에야 확인했네. 내가 무엇 때
문에 자네에 대해 조사했는지 궁금해 할 것이네."
태진왕은 숨이 찬 듯 기침을 몇 번 한 후 고개를 돌려 엽천우를 바라보았다.
"음... 엽대인께서 대신 설명해 주시겠소?"
"명 받들겠습니다."
엽천우는 예의 잔잔한 표정으로 장천린을 향해 입을 열었다.
"용공자는 현재 조정이 처해있는 상황을 잘 아실 것이오. 안으로는 환관과 간신들로
인해 황상의 이목이 가려졌고, 밖으로는 누르하치가 위협하고 있소이다. 뿐만 아니
라 남쪽으로도 왜구들이 골치를 썩히고 있소."
장천린은 묵묵히 듣기만 했다.
"게다가 조화성은 혼란을 틈타 무림의 세력을 등에 업고 누르하치와 암중에 동맹까
지 맺었소."
엽천우는 길게 탄식했다.
"만약... 이대로 방치하면 조정의 앞날은 결코 장담할 수가 없소."
이때 백연연이 향차를 끓여 가지고 왔다. 그녀가 차를 돌리는 동안 잠시 대화가 끊
겼으나 다시 이어졌다.
"태진왕 전하께서는 이러한 난관을 뚫기 위해 한 가지 계획을 세우셨소."
장천린은 찻잔을 내려다보고 있었으나 엽천우의 말을 한 마디도 놓치지 않고 있었다
"즉 황실을 보호하고 사직을 지키기 위한 특수 정예부대인 이십만황실친위대(二十萬
皇室親衛隊)를 조직할 계획을 세우신 것이오."
장천린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실로 엄청난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회의를 금치 못했다. 그 계획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현재만 해도 백만
대군을 보유하고 있으며 거기에 들어가는 군비는 상상을 불허할 정도였다. 게다가
탐관오리가 득실거리니 황실의 재정(財政)은 오래 전부터 말이 아니었다.
'이 상태에서 다시 이십만 황실친위대를 조직한다면 거기에 소용될 막대한 자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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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원키 위해 백성들의 부담이 커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라 살림은 더욱 더 피폐
해질 것이 아닌가?'
엽천우는 엄숙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실상 백만대군이 있고 십삼행성(十三行省) 도지휘사 아래로도 수십만 정병이 있지
만 숫자만 많을 뿐 막상 실전에는 허수아비나 다름없는 오합지졸들이오. 그런 의미
에서 이십만 황실친위대의 조직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오."
장천린은 마침내 입을 열었다.
"하지만 문제는 자금입니다. 설사 자금이 있다해도 이십만의 엄청난 인원을 어디서
보충한단 말씀입니까?"
엽천우는 담담히 말했다.
"인원 문제는 이미 확보해 놓고 있소이다. 일 년 이내면 이십만 대군을 조직할 수
있소. 그러나 용공자가 말했듯이 가장 큰 문제는 자금이오."
엽천우의 말에 장천린은 내심 느껴지는 게 있었다.
'그렇군. 결국 나로 하여금 자금 문제를 상의하려는 것이었군.'
엽천우는 눈에 기이한 광채를 흘리며 말했다.
"당금 중원에서 그 정도의 자금력을 보유하고 있는 사람은 오직 세 명이 있소. 첫째
는 만금산장의 주인으로 강남제일의 상인인 금백만이며 둘째는 강북 용문전장의 주
인인 상관홍이오."
장천린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라면 그만한 능력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군비를 조달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소. 더욱이 금백만은 이 년
전에 죽었소이다."
장천린은 담담히 물었다.
"또 한 명은 누구입니까?"
엽천우는 신비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한 번 알아 맞춰 보시겠소?"
장천린은 생각에 잠겼다. 중원의 거부라면 그가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강남의 심재궁(甚財宮)이나 육만춘(陸滿春)도 거부이긴 하나 금백만과는 비교도 되
지 않는다.'
그는 강남에서 강북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아는 한 모든 거부와 거상들을 떠올려 보
았다. 그러나 마땅한 인물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저으려다 갑자기 안색이
변하고 말았다.
'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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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천우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지금으로부터 사십 오 년 전 강남 귀주성에서 금값이 한 차례 폭락한 적이 있었소.
그 뿐 아니라 귀주성에 나돌아다니던 돈의 반 이상이 모조리 어느 한 곳으로 쓸려
들어간 일이 있었소."
"......!"
"그것은 누군가 막대한 황금을 귀주성에 뿌리고 모두 돈으로 바꿔갔기 때문에 생긴
일이었소이다."
장천린의 안색이 침중해졌다. 그는 무거운 음성으로 말했다.
"황금의 손이라 불리우는 탁일비(卓逸丕)를 말하는 것입니까?"
엽천우의 얼굴에 탄복의 빛이 떠올랐다.
"그렇소이다."
장천린의 안색이 걷잡을 수 없이 흔들렸다.
황금의 손 탁일비! 그를 생각해 내지 못했다니.......
천륭객점의 주루는 텅 비어 있었다.
일층과 이층은 저녁시간이라 한창 북적대고 있었으나 삼층만은 음식과 술값이 비싼
특별석이므로 대체로 한산한 편이었다.
오래 전부터 장천린과 원계묵은 창가에 앉아 대작하고 있었다.
장천린은 계속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원계묵은 연거푸 술 석 잔을 마신 다음 술잔
을 탕! 소리가 나게 내려놓으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형님, 대체 태진왕이 형님께 원하는 것이 무엇이오?"
장천린은 비로소 입을 열었다.
"이십만 황실친위대에 필요한 군비를 조달해 달라는 것이네."
"왜 하필 형님께 그걸 부탁한단 말입니까?"
원계묵은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그는 자칫하면 자신의 일이 한없이 뒤로 미루어
질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나의 외조부님이 대명의 충신이었던 양응시 대감이기 때문이네
. 즉 나에 대한 신뢰감 때문이지."
원계묵은 화를 참을 수 없는 듯 술병을 들어 통째로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는 손등
으로 입술을 문지르며 장천린을 노려보았다.
"그래서 형님은 어떻게 하실 작정이시오?"
장천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뇌리에는 태진왕의 말이 떠오르고 있었다.
- 탁일비는 막대한 황금을 소유하고 있다. 그것이 어느 정도인지 추측할 수도 없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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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경이네. 그런데 그는 지금 칠순이 넘어 수명이 다해가고 있지. 게다가 그에게는
일 점의 혈육도 없네. 얼마 전 그는 황실의 금의위로 서찰을 보내 왔었네. 그 내용
은 누군가로부터 목숨의 위협을 받고있다는 것이었네. 허허허! 그것을 해결해 주면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황금의 삼분지 일을 주겠다고 제의해 왔네. 백군(白君), 자네
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바로 그 삼분지 일의 자금을 이용해 사업을 벌여 군비를
조달해 달라는 것이네. 매년 필요한 자금만 보태면 되네. 그 외에 남는 것은 모두
자네가 가지게. 이것이 내가 제안하는 것이네.
장천린은 태진왕의 말에 큰 흥미를 느꼈다.
실상 그는 삼분지 일에 해당하는 황금이 정확히 얼마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예상하건대 막대한 양일 것이다.
하지만 태진왕의 부탁을 받아들이기에는 난점이 있었다. 그는 지난 일 년 반 동안
취옥교의 행방을 수소문했다. 그 결과 그녀가 있는 곳을 알아내게 되었다. 그곳은
북해(北海) 사태청이란 곳이었다.
그런데 황금의 손 탁일비가 있는 곳은 해남(海南)이었다. 그야말로 남북으로 근 이
만 리나 떨어진 곳이었다. 장천린으로서는 결정하기가 어려웠다. 대의를 택할 것인
가, 사랑하는 여인을 택할 것인가?
한편 원계묵은 짜증이 나고 있었다. 그래서 연거푸 술만 퍼마셔대고 있었다. 지금
그의 내부에서는 불만이 꽉 차 오르고 있었다. 비록 대놓고 말을 하지는 않았으나
끓어오르는 울화를 억누르기가 힘들었다.
이때, 주루로 오 인이 올라왔다. 그들의 복장은 기괴했다. 죽립(竹笠)을 눌러쓴 데
다 면사로 얼굴 아랫부분을 완전히 가리고 있었다.
그들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두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자리
를 잡았다.
오 인의 사나이들은 죽립을 벗어 탁자에 올려놓은 후 점원을 불렀다.
"이봐, 이곳에서 가장 자신있는 요리를 가져와라."
"예예! 나리님들."
점원은 이마가 바닥에 닿도록 굽실거린 후 주방으로 달려갔다.
잠시 후 오 인은 거리낌없이 웃고 떠들며 식사하기 시작했다. 괴이한 것은 그들이
얼굴의 윗부분을 가린 면사를 여전히 벗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우, 저들의 죽립은 이만저만 무거운 게 아닌 것 같군. 이마에 저렇게 자국이 남
았으니 말일세."
장천린의 전음에 원계묵은 오 인을 주시했다. 과연 그들의 이마에는 뚜렷하게 눌린
자국이 보였다. 그는 눈썹을 꿈틀했다.
'보통 죽립은 가벼워 저런 자국이 남지 않는다. 그렇다면......?'
원계묵은 고개 돌리며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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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봐! 점소이!"
"부르셨습니까, 나으리?"
점원이 쪼르르 달려와 굽실거렸다.
"자네, 동경 있나?"
"동경이요?"
점원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원계묵은 씩 웃었다.
"좀 있다 여자를 만나러 가야하는데 얼굴 좀 살펴보려고 말이야."
점원은 히죽 웃으며 말했다.
"헤헤! 알겠습니다요. 곧 갖다드립죠."
점원은 몸을 돌리며 내심 비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흥! 아무리 들여다봐야 그 얼굴이 그 얼굴이지.'
잠시 후 손바닥만한 동경을 건네 받은 원계묵은 얼굴을 비추었다. 동경 속에 매부리
코에 비정해 보이는 삭막한 얼굴이 나타났다. 그는 손으로 머리칼을 매만졌다. 그러
나 정작 그의 의도는 다른 데 있었다. 그는 동경을 들여다보는 척하며 석양빛을 다
섯 명의 사나이가 있는 탁자 쪽으로 반사시켰다.
반짝!
동경에 반사된 빛이 탁자에 놓여있는 죽립을 스치자 금속의 광채가 빛났다. 원계묵
은 동경을 내려놓았다. 그의 입가에 차가운 선이 그려지고 있었다.
이때 계단이 가볍게 울리는 소리와 함께 한 명의 소녀가 올라왔다. 그녀는 십 오륙
세 가량의 앳띤 소녀로 옆구리에 꽃바구니를 끼고 있었다. 희고 갸름한 얼굴에 입술
양쪽으로 보조개가 살짝 패인 귀여운 미소녀였다.
소녀는 흑진주같이 까만 눈동자를 사르르 굴려 좌중을 살피더니 꽃바구니를 가슴 쪽
에 돌려안고 걸어왔다.
"공자님, 꽃 한 송이만 팔아주세요."
소녀는 장천린을 향해 장미 송이를 내밀며 애처로운 음성으로 말했다. 귀엽고 앳띤
용모에 슬픔이 배인 듯한 표정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연민지정을 불러 일으켰다.
원계묵은 힐끗 소녀를 보더니 손을 저었다.
"필요 없다. 다른 곳으로 가봐라."
"아우, 오늘 가인(佳人)을 만나러 가는데 꽃 한 송이쯤 있는 것이 좋지 않겠나?"
장천린의 말에 원계묵은 웬 가인? 하는 표정이었으나 이내 깨달은 듯 머리를 긁적였
다. 장천린은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아가씨, 그 꽃 얼마냐?"
소녀는 얼른 장미를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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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문이에요, 나리."
장천린은 동전을 건네주는 척하다가 슬쩍 소녀의 손목을 잡았다.
"어머!"
소녀는 깜짝 놀래며 금세 얼굴이 빨개지고 말았다.
"후후, 꽃보다도 네 손이 더 고운 것 같구나."
장천린은 소녀의 작은 손을 어루만졌다. 그의 행동은 누가 보아도 파렴치한이었다.
소녀는 울상이 된 채 더듬거렸다.
"나리, 이 손... 좀......."
원계묵은 의아했다. 평소의 장천린이라면 절대로 그런 행동을 할 리가 없었다. 장천
린은 소녀의 손을 어루만지며 물었다.
"원래 이곳에는 추련(秋蓮)이 늘 꽃을 팔러왔는데 너는 처음 보는 것 같구나. 혹 추
련이가 어디 아픈 것 아니냐?"
"그... 그렇습니다."
소녀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녀는 왠지 허둥대는 표정이었다.
"그렇군, 이만 가봐라."
장천린이 손을 놓아주자 소녀는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그런데 그녀는 장사의 미련
이 남았는지 주춤주춤하다가 이번에는 다섯 명의 사나이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나으리들, 꽃 한 송이만 팔아주세요."
사나이들 중 한 명이 그녀를 돌아보며 물었다.
"동전 한 문이라고 했느냐?"
"네에."
"허어, 굉장히 싸구나."
죽립인은 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좋아. 사 주고 말고!"
사나이는 소녀의 손목을 낚아채더니 덥석 안아 자신의 무릎에 앉혀 놓는 것이 아닌
가? 소녀는 놀라 비명을 질렀다.
"아앗! 나으리......!"
사나이는 음침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흐흐... 꽃을 사 주면 될 거 아니냐? 아니지, 한 문씩 벌어 뭐하겠느냐? 오늘 밤
잘만 모시면 은자 열 냥을 주마."
"하하핫......!"
탁자에 둘러앉아 있던 네 명의 사나이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소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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끌어안은 작자는 더욱 노골적으로 지껄여댔다.
"흐흐! 힘겹겠지만 우리 다섯 사람을 모두 모시면 자그마치 오십 냥이 된다. 어떠냐
?"
말하면서 그는 투박한 손을 마구 움직였다. 그의 손은 소녀의 봉긋한 가슴에서 둔부
, 허리 할 것 없이 무차별로 주물러대고 있었다. 소녀는 전신을 바르르 떨었다. 사
나이의 손은 마침내 소녀의 가슴 속으로 쑥 들어갔다.
"아앗!"
소녀는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쳤다. 그러나 사나이가 소녀의 허리를 꽉 잡고 있었으
므로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그 사이에도 옷 속으로 파고든 손은 소녀의 채 여물지
도 않은 유방을 마구 주물러대고 있었다. 나머지 사나이들은 그 광경을 재미있다는
듯이 히죽거리며 바라보고 있었다.
"아악! 제발 놓아주세요!"
소녀가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는 바람에 점원이 달려왔다. 그는 손바닥을 비비며 애
원했다.
"나으리들, 제발......."
"꺼져."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점원은 비명을 지르며 나가 떨어졌다. 사나이가 발길로 그의
배를 걷어찬 것이었다.
"아이구......! 나 죽네!"
점원은 배를 움켜쥐고 데굴데굴 굴렀다. 그때였다. 사나이는 소녀의 옷을 잡아 당겼
다.
"악!"
소녀는 다급한 비명을 내질렀다. 허름한 마의가 찢겨 나가며 그 사이로 백옥처럼 뽀
얀 유방이 그만 드러나고 만 것이었다.
"흐흐흐......!"
"킬킬! 아직 익진 않았지만 그래도 꽤 쓸 만한걸?"
사나이들의 눈빛이 면사 사이로 짐승처럼 번들거렸다. 그들의 눈은 일제히 소녀의
유방을 향해 고정되었다. 그러자 예의 작자는 더욱 신이 난 듯 소녀의 유방을 덥석
움켜쥐고 희롱했다.
중인환시리에 벌어진 이 같은 횡포에 드문드문 자리에 앉아있던 주객들은 눈치를 보
며 슬며시 일어서고 있었다. 잠시 후 그들은 모두 꽁무니를 빼고 사라져 버렸다. 사
나이들의 방약무인한 태도에 겁을 집어먹은 것이었다.
"아악! 제발... 으흐흑......."
"흐흐! 왜 이리 앙탈이냐? 나리께서 즐겁게 해 주겠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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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나이의 횡포는 더욱 심해졌다. 어느새 소녀의 옷이 거의 벗겨져 나가고 있었다.
꽃바구니는 저만치 떨어져 나뒹굴었고 소녀는 반라가 된 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사나이의 손은 이제 소녀의 사타구니 사이로 들어가고 있었다.
이때, 원계묵의 손이 움직이더니 탁자 옆에 세워 두었던 장도를 잡았다. 장천린은
술잔을 들어올리며 담담히 물었다.
"참견할 건가, 아우?"
원계묵의 눈은 야수처럼 번들거렸다.
"저놈들의 정체를 파악했습니다. 놈들은 날 끌어들이기 위해 일부러 저러는 겁니다.
장천린은 무심한 표정으로 물었다.
"저들은 누군가?"
"조화성 제삼신마전(第三神魔殿)의 웅이오괴(熊耳五怪)란 자들입니다. 평소엔 제법
영웅인 척하고 다니나 기실은 살인 전문가들입니다."
원계묵의 눈이 음산하게 빛나고 있었다. 장천린은 술잔을 들이킨 후 중얼거렸다.
"그랬었군. 하지만 먼저 살기를 드러낼 필요가 있을까? 이 객점에는 본래 꽃파는 추
련이란 아이는 없네."
원계묵의 안색이 변했다.
"또 하나... 저 소녀의 손은 무공을 익힌 손이었네."
원계묵은 섬뜩해지고 말았다.
'대체 형님은.......'
비로소 그는 장천린이 소녀의 손을 잡았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동시에 그에 대해
새삼 불가사의한 느낌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계묵은 몸을 일으키더니 뚜벅
뚜벅 걸어갔다. 그의 손에는 장도가 잡혀 있었다.
"이봐, 너무 하는군."
원계묵은 다섯 사나이들 앞에서 차갑게 말했다.
"뭐냐, 네놈은?"
소녀의 둔부를 쓰다듬고 있던 사나이가 힐끗 그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그의 손은 소녀의 사타구니 사이를 더듬고 있었다.
"흐흐! 이 계집이 탐이 났느냐?"
사나이는 이번에는 위치를 옮겨 소녀의 유방을 슬슬 쓰다듬었다. 소녀는 안색이 새
파랗게 질린 채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있었다. 갑자기 사나이가 소녀의 유방을 꽉
움켜쥐며 외쳤다.
"당장 꺼지지 않으면 모가지를 비틀어 주마!"
"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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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는 통증을 참을 수 없는 듯 비명을 질렀다. 원계묵은 눈썹을 찌푸리며 차갑게
내뱉았다.
"연극은 그만 두는 게 어떠냐, 웅이(熊耳)의 다섯 귀신들!"
"뭣?"
다섯 사나이의 몸이 굳어졌다. 하나 그것은 순간일 뿐이었다.
"아악!"
소녀가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원계묵에게 던져졌다. 그 순간 다섯 사나이들은 탁
자 위의 죽립을 잡더니 전광석화처럼 원계묵을 공격했다.
파츠츳......!
다섯 개의 죽립이 풍차처럼 회전하며 원계묵을 쪼개갔다. 원계묵은 소녀로 인해 시
선이 차단되어 있었다. 그는 미끄러지듯 물러서며 소녀를 잡아 뒤로 돌렸다. 거의
동시에 장도를 도집째 들어 막아냈다.
쨍!
죽립과 장도가 부딪친 순간 날카로운 금속성이 울렸다. 죽립이 부서져 나가며 시퍼
렇게 빛나는 톱니를 지닌 철륜(鐵輪)이 드러났다.
"뒈져랏!"
"차... 앗!"
위잉! 쌔애애앵!
다섯 개의 철륜이 상중하, 좌우로 원계묵을 공격했다. 원계묵의 눈에서 새파란 광채
가 뿜어져 나왔다.
"흐흐흐흣!"
그는 괴소를 흘리며 장도를 뽑아 선풍처럼 휘둘렀다.
위... 잉!
귀청을 찢을 듯한 경풍소리가 울렸다. 그것은 실로 무자비한 공격법으로 상대방의
동작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이었다. 웅이오괴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설마 그가 이렇
게 무모하게 맞설 줄은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카카캉! 쩌정!
현란한 불꽃이 퉁겼다.
"크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삼 인이 두 동강이가 나며 날아갔다. 그들의 철륜도 박살이 나
날아가 버렸다. 원계묵도 무사하지 못했다.
그의 옷자락은 갈기갈기 찢겨 너덜거리고 있었다.
괴이한 것은 찢긴 옷자락 사이로 드러난 그의 피부였다. 분명 철륜 조각이 적중되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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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나 불그스름한 흔적만 남아있을 뿐, 피 한 방울 보이지 않았다.
"빌어먹을......! 현문강기(玄門 氣)를 익혔구나!"
살아남은 두 명은 이를 부드득 갈며 재차 공격했다.
위이이잉!
두 개의 철륜이 가공할 광채를 뿌리며 원계묵의 옆구리와 목을 향해 날아왔다. 원계
묵의 눈은 찬 빛을 뿌리며 그들의 동작을 주시했다.
"가거라! 수라구류도의 제 일초 수라초현(修羅初現)!"
우우우웅!
무시무시한 도기(刀氣)와 함께 아수라의 환영이 일어났다. 환영은 순식간에 방원 일
장여를 뒤덮었다.
"크아악!"
참혹한 비명이 아수라의 환영 속에서 들렸다. 뒤이어 무엇인가 투툭, 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환영이 걷히자 장도를 늘어뜨린 원계묵의 모습이 드러났다. 두 사나이는
정확히 허리가 양단된 채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원계묵의 얼굴에는 일점의 변화도 없었다. 그는 무심한 표정으로 장도를 쓰윽 쓰다
듬을 뿐이었다.
주방 쪽에서 그 광경을 목격한 점원은 안색이 퍼렇게 질린 채 부들부들 떨다가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한편 꽃팔이 소녀도 안색이 백짓장이 된 채 굳어 있었다.
원계묵은 그녀를 돌아보았다.
"가... 감사합니다. 나으리......."
소녀는 기어 들어가는 음성으로 말했다.
"음."
원계묵은 신음을 발하며 몸을 돌렸다. 그러자 그의 넓은 등이 소녀에게 향해졌다.
손만 뻗으면 명문혈에 닿을 정도의 거리였다. 문득 소녀의 눈동자에서 새파란 독기
가 뿜어졌다.
"죽엇!"
어느 틈에 소녀의 손에는 독비(毒匕)가 쥐어져 있었다. 그녀는 비수와 일체가 되어
원계묵의 등을 향해 찔러갔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른 동작이었다.
"악!"
소녀의 입이 딱 벌어졌다. 분명 비수는 원계묵의 명문혈에 적중되었다. 그런데 박혀
들기는커녕 무서운 반탄력에 의해 비수가 퉁겨 나간 것이 아닌가? 소녀의 안색이 하
얗게 질림과 동시에 입이 딱 벌어졌다. 그 순간 그녀의 입에서 피화살이 뿜어져 나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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쿵! 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는 모로 쓰러졌다. 동체가 바닥에 떨어진 순간 목이 분리
되어 나가며 떼구르르 굴렀다.
실로 경악할 일이었다. 어느새 원계묵은 장도를 휘둘러 그녀의 목을 베어 버린 것이
었다.
장천린은 그 모든 것을 지켜보았다. 그의 미간에 미세한 주름이 잡히고 있었다.
'아우는 정말 잔인하군. 일부러 틈을 보여 공격을 유도한 후 죽여버리다니.......'
원계묵이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장천린의 심중을 눈치챈 듯 무뚝뚝한 음성
으로 말했다.
"잔인하다고 여기십니까?"
"부인하지 않겠네."
원계묵은 입술을 씰룩였다.
"저는 사부와는 다릅니다. 평소의 그 분은 누구에게도 허점을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단 한 사람에게 허(虛)를 보임으로써 돌아가셨습니다."
원계묵의 음성은 스산하게 깔렸다.
"이후로 나는 날 노린 놈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살려두지 않겠다고 맹세했습니다."
장천린은 눈썹을 찌푸렸다. 그때였다. 계단 쪽으로부터 한 가닥 웃음이 들려왔다.
"후훗... 이번에야말로 현장에서 걸렸구려."
장천린과 원계묵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계단 어귀에 관복을 입은 초로의 인물이
서있었다. 단정하게 기른 짧은 수염과 혜지가 엿보이는 눈빛. 바로 제형안찰사사의
형부도독 단위제였다.
장천린은 몸을 일으키며 포권했다.
"또 만났군요. 아마도 인연이 깊은 것 같습니다."
단위제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그런 것 같습니다."
그는 바닥에 뒹굴고 있는 여섯 구의 시신을 훑어본 후 원계묵을 향해 말했다.
"원대협의 도법은 실로 대단합니다. 본인의 눈이 하마터면 찢어질 뻔했소이다."
원계묵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위제는 시신들을 차례로 살펴보며 혀를 찼다.
"허허, 참혹하군. 게다가 단 일도에 당했군."
장천린은 낭랑한 음성으로 말했다.
"도독께서 직접 보셨다시피 이 상황이 아우의 죄가 아님을 인정하셔야 할 것입니다.
단위제는 그를 바라보며 기이한 표정을 지었다.
"허허, 정당방위란 말씀이시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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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신 그대로입니다."
"헛헛, 안타까운 일이지만 본인이 보기에도 그런 것 같습니다."
그 말에 장도를 바짝 움켜쥐고 있던 원계묵의 얼굴에 긴장이 풀어졌다. 그는 여차하
면 단위제를 벨 독한 마음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문득 계단이 쿵쾅거리는 소리와 함께 십여 명의 관병들이 올라왔다. 그러자 주방 쪽
에 숨어있던 점원이 달려나오더니 손가락으로 원계묵을 가리켰다.
"저... 저 자가 살인을 했습니다!"
관병들은 안색을 굳히며 원계묵을 둘러쌌다. 그들 중 나이가 좀 들어 보이는 중년의
관인이 호패를 꺼내 보이며 딱딱하게 말했다.
"실례지만 관청까지 가주시겠소?"
원계묵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관청?"
그의 눈에서 야수 같은 안광이 일어났다. 굳이 충돌할 생각이 없을 뿐, 관부인들의
권력이나 심지어는 국법조차도 개의치 않는 위인이었다. 그는 장도의 손잡이를 잡으
며 잠시 망설였다. 모두 베어 버릴 것인가? 아니면.......
"하하핫......! 잠깐만."
단위제가 앞으로 나섰다. 그가 영패를 꺼내 보여주자 관병들은 기겁을 하며 털썩털
썩 무릎을 꿇었다. 중년관인은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대영반(大領盤)님을 뵈옵니다......!"
'......?'
장천린은 의아심을 금치 못했다. 단위제는 산동성 제형안찰사사 소속의 형부도독이
었다. 비록 산동성 내에서는 막강한 권력을 지니고 있었으나 북경성의 관인들을 부
복케 할 정도의 신분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저 사람에게 또 다른 신분이 있었단 말인가?'
단위제는 관인에게 지시하고 있었다.
"이번 사건은 내가 처리할 테니 너희들은 이곳의 시체나 치우도록 해라."
"명을 따르겠습니다!"
중년관인은 병사들을 지휘하여 시체를 처리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단위제를 대하는
태도는 그야말로 신을 대하는 것과도 같았다. 단위제는 몸을 돌려 장천린을 바라보
며 말했다.
"용대인, 자리를 옮겨 술 한잔 하시겠소이까?"
장천린은 빙긋이 웃었다.
"관청만 아니라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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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하! 원, 농담도!"
단위제는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원계묵에게도 청했다.
"원대협도 함께 가십시다."
원계묵은 장천린을 바라보았다. 장천린이 고개를 끄덕이자 비로소 장도를 어깨에 둘
러멨다. 단위제는 입가에 기묘한 웃음을 흘리며 계단을 향해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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