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문무공-62화 (62/149)

제  목: [연재] 독문무공(62)

19. 충성서약(忠誠誓約)

제남이라는 도시에는 오군도독부가 있다.

이 오군도독부는 오군을 총괄하는 오군도독과 각 군을 지휘하는 다섯명의 도독동지가 있는 군부의 핵심이었다.

이 오군도독부의 오군도독인 왕유상은 사저로 들다가 흠칫 놀라고 말았다.

자신의 거처에 매달려 있는 한자길이의 자주색 띠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저것은 영웅군부의 부주가 나타났으니 정해진 곳으로 오라는 신호가 아닌가?’

그 것은 자신의 선조대대로 내려온 표식이었다. 왕유상은 본성이 진가로 백여년전에 장사에서 일어난 진우량의 후손이었다.

진우량은 명을 건국한 주원장과 사천의 장사성과 더불어 천하의 패권을 다투었으나 결국은 좌절을 하였고 패자의 말로는 비참하여 모든 식솔들까지 죽거나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진우량에게는 당시 뛰어난 동생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진유량이었다.

진우량은 영웅군부의 소부주로 당시 항몽의 전쟁에 나서 세를 불리고 하였지만 결국 주원장에게 밀리기 시작하였다.

진우량의 아버지 진산월에게는 진우량 말고도 늦게 얻은 진유량이라는 뛰어난 아들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태을자였다.

진우량의 아버지 진산월은 영웅군부를 총동원하여 진우량의 항몽을 도왔다. 결국 진우량의 군대는 영웅군부였다고 할 수 있었다.

하나 진산월의 고민은 진유량이라는 걸출한 뛰어난 아이를 그대로 두었을 경우 발생할 형제간의 다툼이 문제였다.

언제까지 신산월이 살아 있을 수는 없고 결국 진산월 사후에는 문제가 발생할 수가 있었다. 더구나 진우량은 상당히 속이 좁았다. 그런 면은 어린 진유량도 마찬가지 였다. 그러니 두형제는 부딪칠 것은 뻔하였다.

그런 진우량 곁에 뛰어난 사람을 그대로 두는 것은 결국 진우량에게 진유량을 제거하라는 것이나 다름이 없기에 고민을 하다가 결국 화산파의 자하도장에게 출가를 시켰다.

자하도장은 진산월과의 친분 때문에 결코 화산에 태을자의 신분을 밝히지 않았다.

태을자도 진산월의 고심과 진우량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결코 입밖에 내지 않았다.

그러나, 진우량의 몰락으로 결국 진산월을 비롯한 모든 사람이 위험에 처하자 진산월은 진우량의 다섯 아이들을 영웅군부의 호법장로에게 맡기고 영웅군부의 부주령을 태을자 진유량에게 보내었다.

영웅군부의 비밀은 이미 명군에 알려졌고 결국 명군은 진우량의 잔당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하였다.

그러나 호법장로만은 유일하게 진산월이 관여를 시키지 않았기에 호법장로가 관리하던 세력은 고스란히 보존이 될 수가 있었다.

진우량의 다섯아들은 호법장로의 보호 속에 호법의 손자가 되어 살게 되었다.

호법장로의 성이 왕씨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성을 왕씨로 고쳤다.

영웅군부의 역사는 천오백년에 이르고 있었다. 전국시대 말엽 상왕(商王) 여불위는 자신을 지켜줄 호위세력으로 낭인을 고용하여 영웅대라는 단체를 만들었는데 그 수효가 무려 천오백에 이르렀다. 그 들의 수장은 진공명이라는 낭인이었는데 진이 통일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여불위의 몰락으로 오히려 진의 군대에 쫓기게 되었다.

승상인 이사는 이들에 대한 추적을 하였고 이들은 결국 암흑 속으로 숨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들은 추적을 피하여 장강유역에 흩어져서 터를 잡았다. 그러나 그들은 기회를 노렸지만 항상 때를 만나지 못하여 역사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암흑 속에서 천오백년을 숨어 살았고 원이 물러가는 시점에 마침내 나섰으니 실패로 돌아가 멸문에 비슷한 타격을 입고 말았다.

태을자는 영웅군부의 부주가 되었지만 이미 그대에는 화산의 장령제자가 되어 있었고 명군의 영웅군부에 대한 탄압이 극심하기에 호법장로에게 아이들을 키우게 하고는 영웅군부의 부활을 꿈꾸지는 않았다.

태을자의 생각에는 위험한 영웅군부의 부활을 하기보다는 그 비밀을 묻고자 하였다.

방치 속에 영웅군부는 잠자고 있었다. 그러나 태을자의 머리는 혹시라도 하는 생각에 조카들을 군부에 투신시키게 만들었고 예상대로 그의 도움을 받은 그의 조카들은 군에서 고속승진을 하였다.

영웅군부의 사람들을 군 내부에 승진시켜 왕대장군부라는 군벌을 형성하였다. 그 왕 대장군부는 삼십년전에 형성된 이래로 현재는 명 군부의 최고 실세로 자리하고 있었다.

그들은 태을자와 영웅군부에서 전달된 무공으로 군부내 무위를 드날리며 최고의 장군부가 되어 이제 휘하에 십만의 직속군대와 오군도독이 되어 백만 황궁을 통솔하는 자리에 이르게 되었다.

휘하에 이제 오대 장군부라고 하여 왕씨 오형제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구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 다섯형제는 항상 영웅군부의 오대수좌로서 부주인 진유량의 통제하에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나이 여든에 죽자 그의 아들들이 가문의 업을 이어받았다.

왕유상은 곧 처소에 들어 나머지 네명의 사촌을 부르는 서신을 보내었다.

“이제 와서 무엇을 하라는 것입니까?”

그들은 자신들에게 숙조부가 있다는 것만 들었지 누구이라는 것은 듣지 못하였다.

그렇기에 그들로서는 불만이었다.

이미 조부의 원한은 잊은지 오래였다. 그들에게는 영웅군부에 대한 일은 오히려 숙원이기보다는 하나의 멍에로 느끼고 있었다.

“부주가 숙조부라고 들었습니다. 무슨 말씀을 하는지 들어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들에게 있어 영웅군부는 잊고 싶은 과거이기도 한 것이다.

“하나 호법장로가 있고 그들이 영웅군부의 실권을 쥐고 있지 않습니까?”

그들에게 있어 보이지 않는 곳에 존재하는 호법장로의 존재는 또한 두려운 존재였다. 호법장로는 오직 영웅부주의 명만을 듣는 존재였고 이 호법장로 밑에는 팔대호법이 존재하는데 이들은 암중에서 영웅군부의 반란을 획책하는 세력을 색출하여 제거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들이 그렇게 대화를 나누는 순간 나타난 사람들을 보자 경악을 하였다.

그들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리에 앉아라.”

가운데에 있는 청수한 문사차림의 노인이 말을 하였다. 도복을 벗어 던진 태을자였다.

“나는 너희들의 숙조부되는 진유량이라 한다.”

그말에 이미 예순이 넘은 노장군들이 머리를 조아렸다.

“숙조부님을 뵈옵니다.”

그들은 인사말을 입을 모아 외쳤다.

“이제 영웅군부의 자리로 모인 이상 사사로운 관계가 아니라 부주와 영웅군부의 산하 오대수좌로서 이야기를 할 것이다.”

그렇게 말하자 그들은 긴장하는 얼굴이 되었다.

“너희들에게 일단은 영웅군부의 인원을 점검하고 언제건 출정할 준비를 하라는 것이다.”

그들은 태을자의 신분을 모르기에 숙조부이자 영웅군부의 부주로서만 알고 있었다.

“너희들에게 말하고 싶은 영웅군부의 일원으로서 더 이상 개인의 영달이나 행복을 위해 개별적인 행동을 해서는 안되다는 것이다. 이 자리는 영웅군부의 새로운 출발의 자리이다. 그렇기에 너희들의 충성의 맹약을 받고 싶다.”

그 것은 부주가 되었을 때 전 영웅군부의 무사들에게 받는 행사였다.

그 일을 말하자 그들은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명목상 명군의 장수이기에 그들에게는 은연중에 명황실에 대한 충성의식이 들 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말하자 문사노인의 뒤에서 한사람이 앞으로 나와 은으로 된 잔을 손에 들고 나타났다. 그는 바로 호법장로로 전대 호법장로에게 장로직을 이어받은 인물이었다.

“이 잔에 피를 한방울씩 떨어뜨려 피의 맹세를 하면 됩니다.”

그렇게 말하고 잔을 내밀었다. 그들은 피의 맹세가 무엇인지 들었기에 결국 잔을 받아들고 팔을 걷어 피를 내어 잔에 받을 수밖에 없었다.

각기 피를 내어 잔에 받은 다음 사람에게 잔을 건네었다.

이렇게 받은 피가 절반정도 차 올랐고 그 잔이 호법장로에게 건네졌다.

그 잔에 품에서 작은 병을 꺼내 거의 가득차게 맑은 액체를 부었다. 그 것은 독한 화주였다.

그 잔을 태을자 진유량에게 건네자 받아들어 마시기 시작하였다.

“충성을 맹세합니다. 부주.”

그들은 피를 마시자 오체투지하여 충성을 맹세하였다.

“이로서 그대들의 목숨은 본부주의 것이며 그대들의 목숨을 영웅부의 중흥을 위하여 귀히 쓸 것을 천지신명(天地神明)께 고하노라.”

그날로 왕유상 대장군부의 후원에는 열명의 괴인들이 거하기 시작하였다.

“이번에 관부의 힘을 이용하여 천지문의 천지쌍마에게 협조를 부탁하도록 하여라.”

왕유상은 자신을 부른다는 전갈에 급히 후원으로 들었다.

“무슨 일로 그들에게 협조를 청한다는 것이옵니까?”

왕유상은 갑작스러운 지시에 어떻게 할 줄을 몰라 되물었다.

“일단 그들에게 북원을 치기위해 군자금이 소요되는데 백성들에게 더 이상 조달이 어려운바 중원의 부자들에게 조달을 받기로 하였다는 글을 보내어라. 그 조달을 받고자 하는 세력이 천지문과 사황성, 천하문, 남경상림과 사천상행이라고 하여라.”

그말에 왕유상은 실로 대담한 일이라 말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에게 정당한 방법으로 조달을 받기는 곤란한바 일단 천지문에서 우리의 일에 협조를 한다면 그 부과대상에서 제외하기로 하였다고 하여라. 또한 무림과의 관계를 고려하고 지정학상 너무 멀어 사천상행은 제외한다고 하여라. 그리고 관부와의 밀접한 관련성 때문에 남경상림도 다소 곤란하기에 천하문과 사황성을 그 목표로 하니 합작하자고 하여라.”

그말에 왕유상은 실로 너무나 섬뜩한 구상이라 말을 못하고 이일의 결과를 생각하였다.

“이렇게 제의한다면 그들은 반드시 너에게 협조한다고 할 것이다. 이렇게 한 후에 사황성에 대한 대대적인 소탕을 하여라. 물론 사황성보다는 곳곳에 있는 암흑가를 일망타진하는 것이다. 이런 주청을 황제에게 하여 재가를 받아 시행하여라. 물론 이유는 일단 북원과의 전쟁을 해야 하는데 그들 중에 북원의 간자가 암흑가로 흘러 들어 후방을 교란한다는 첩보를 접하였다고 하면 될 것이다.”

실로 태을자의 말은 관을 이용하여 사황성의 하부조직을 타파하겠다는 의도였다.

“하오나 자칫 관부가 무림에 관여한다는 인상을 줄 수가 있습니다.”

“일단 사황성이 아니라 암흑가를 물리친다고 하면 될 것이니 문제는 없다. 또한 천하문에 대하여는 일단 천지문과의 협조를 이끌어 내면 다시 대응방안을 알려주겠다. 그들을 토벌하여 일단 우리의 자금을 확보하는 방안을 수립할 것이다.”

태을자는 자신의 신분과 진정한 목적은 말하지 않았다.

“또한 강호에 승천검황이라는 인물이 있다. 그 인물에게 승천검황이라는 이름은 감히 황제의 위엄을 거스리는 이름이니 명호를 사용하지 말 것을 경고하여야 하며, 이런 이름을 그간 사용하였으니 스스로 그 간의 죄를 청하여 앞으로 십년간은 중원에 나다니지 말아야 한다는 내용의 상소를 황제에게 올려라. 그렇게 하는 것은 문제가 있느냐?”

왕유상은 실로 시키는 것마다 터무니 없는 것이라 이해가 안되었지만 아예 불가능한 것은 또 아니기에 하겠노라고 하였다.

“이일은 네가 하기보다는 너의 문인 중에서 믿을만한 자를 시켜서 하도록 하여라.”

지성룡은 황영지와의 꿈 같은 사랑을 속삭이고 황영지의 방에서 물러나와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황영지는 실로 뜨거운 여자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정숙해 보이는 것과는 반대로 실로 한번 문을 열자 적극적으로 지성룡에게 매달리면서 호응해 왔다. 그 뜨거운 열정에 지성룡도 이성을 잃고 생각지도 않은 운우지락을 나누고 말았다.

처음 황영지를 찾아갈 때만 하여도 단지 이야기나 나누려고 하였다. 그러나 황영지의 반응에 그간 잠들어 있던 욕정이 살아나 열정에 휩싸여버렸다. 실로 예정에 없던 열정이었다.

밖으로 나오자 방금전에 있었던 일이 꿈과 같이 아득하였다. 단지 온몸이 노곤한 것이 그 일이 현실이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자신의 방으로 들어와 잠자리에 든 지성룡은 쉽게 잠이 오지 않고 있었다.

자신이 한일이 실로 너무나 엄청난 일이기 때문이었다. 혼인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창기도 아닌 여인을 취하였으니 암담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실로 뭐라 말을 할 수도 없었다. 물론 자신이 책임을 지면 되지만 그런 일을 하였다는 사실에 내심 마음이 걸리지 않을 수가 없는 지성룡인 것이다.

한여인의 남자가 된다는 것은 그 여인의 일생을 책임져야 하기에 마음이 무겁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결국 지매를 취한 이상 지매는 이제 내 여인이다.’

그렇게 생각을 하였지만 이일에 대하여 주변의 사람이 알면은 다가올 질책을 생각하자 마음이 무겁지 않을 수 없었다.

이일을 알게 되었을 때 승천검황을 비롯한 부적철검과 무상도를 볼 면목이 없었다. 그들에게 뭐라 변명을 하고 황영지가 당할 무안을 생각하자 내심으로 걱정이 되었다.

‘숨겨야 한다. 그리고 가급적 빨리 혼사를 서둘러야 한다. 개봉에 최대한 빨리 돌아가 혼사를 서둘러야 하겠다.’

하나 지성룡은 무적철검과 무상도가 최소한 두세달은 이곳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난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문제는 잠자리에 누워서도 오히려 황영지와의 열정이 다시 그립다는 것이었다.

그의 눈앞에는 황영지의 자태가 다시 눈에 보이듯이 어른 거렸다.

이런 지성룡과 황영지의 영정은 승천검황과 대화를 마치고 돌아오던 무적철검과 무상도의 귀에 잡히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방안에 있던 승천검황도 알 정도였다.

그들은 이들이 일을 저지르자 서로 무안하여 마주보다가 아무소리 없이 침실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어느사이에 이들이 야합(野合)을 하고 만 것이다.

그들이 지성룡과 황영지의 결합에 대하여 반대는 않지만 이런 식의 야합을 원한 것은 아니었다.

무적철검과 무상도는 황영지가 이런 식의 처신을 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하였기에 실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런 일을 알았다고 하여 아는 체를 할 수도 없었기에 둘은 방으로 들어가 끙끙 대면서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저러다가 덜컥 임신이라도 한다면 그런 망신이 없었다.

이런 일을 초래한 지성룡을 탓한들 이미 쌀이 익어 밥이 되어버렸으니 의미가 없었다.

더구나 자신들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옆에 있는데 일어난 일이니 자신들도 할말이 없었다.

그러니 속만 태울 수밖에 없었다.

이미 야합이 이루어진 마당에 중간에 무슨 일이냐고 면박을 줄 수도 없어 모른 척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자신들이 곧바로 이곳에서 움직일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자 난감하였다.

한편 승천검황도 대화를 마치고 나서 지성룡과 황영지의 야합을 알자 기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젊은 혈기이지만 혼사도 치루지 않고 야합을 한 것은 실로 중대한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물론 언제 죽을지 모르는 무인들에게 혼사니 뭐니 하는 격식은 중요하지 않다고 할 수도 있지만 층층의 어른들이 있는 지성룡이 이런 일을 하였을 때의 뒷일을 생각하면 암담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저 빨리 돌아가서 혼사를 서두르는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지성룡이 한갓 여자로 인하여 이성을 잃고 행동하자 내심으로 실망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점잖은 체면에 남녀간의 상열지사를 꺼내어 질책하는 것도 민망한 일이엇다. 그들이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고 있는데 들추어서 야단칠 수도 없었다. 오히려 점잖치 못하게 엿들었다는 인상만 줄 수도 있는 일이었다.

더구나 일이 이렇게 되면 꼬이지 않을 수 없었다.

무적철검과 무상도에게 당분간 사황성에 머무르라고 하였는데 그들이 개봉에 가야 혼사가 가능해지기 때문이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지성룡에 대하여 결국 화가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놈의 자식을 내 가만히 두지 않겠다.’

결국 마음 한구석에서 욕지기가 솟아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평온한 듯 하였지만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판국에 일을 복잡하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이 와중에 사랑타령이나 하고 있을 여유가 없는데 그런 짓을 하였으니 승천검황도 불끈 화를 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일을 이 모양으로 만든 두 것들이 알아서 해라.’

승천검황은 화가 나서 그렇게 내심으로 말하고 생각하기도 귀찮아서 자리에 눕고 말았다.

황영지는 일이 벌어지고 지성룡이 나가자 자신이 저지른 일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실로 처녀로서는 말하기도 부끄러운 일을 저지른 것이다. 일이 이렇게 만든 것은 지성룡의 책임보다는 자신의 책임이 더 컸다. 더구나 열락에 헤매는 자신을 보고 지성룡이 어떤 생각을 하였을까 생각하자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그리고 무적철검과 무상도가 알았을 때의 반응을 생각하자 난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얼굴을 들고 살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성룡에게 확답을 받았다고 생각은 들지만 어른들 사이에 구체적인 이야기도 오가기 전에 일을 저지른 자신이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지성룡과의 일에 대하여 후회는 하고 싶지는 않았다.

만일 일이 잘못된다면 혼자 살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를 자신이 사랑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지성룡을 보지 못하고 혼자 산다고 생각하자 그런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 마음이 아파오기 시작하였다.

그러면서 그 동안 지성룡과 처음 만났을 때부터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고작 한달 남짓한 기간이지만 자신이 지성룡에게 얼마나 익숙하여 졌고 자신이 그를 사랑하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의 몸에 남아있는 지성룡의 흔적들이 그 결과였다.

그리고 자신이 결코 그를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사실을 절감하고 있었다.

아침을 먹는 그들은 서로 어색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내내 말이 없었고 그들은 그 일을 입 밖에 내지는 않았지만 무언의 질책과 쑥스러움에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모두 어떤 말을 하여야 할 지 몰랐다.

충분히 서로가 상황을 인식하기에 아무런 말이 없었다. 이일은 말을 꺼내는 순간 어떻게 될 지 모르기에 서로간에 참고 말을 못하는 것이다.

황영지는 고개를 숙이고 완전히 죄인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렇기에 승천검황은 지성룡을 다그치고 싶은 것을 내내 참고 있었다.

무적철검과 무상도는 황영지를 탓하고 싶어도 이일이 입에 올려졌을 때 여자로서 느낄 수치심를 생각하여 말을 함부로 못하였다.

불현듯 이일을 문제삼다가 황영지가 수치감을 못이겨 잘못된다면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이일을 차마 꺼내지 못하는 것이었다. 지성룡은 황영지가 고개를 들지 못하자 내심으로 황영지가 느낄 수치심을 생각하자 자신을 자책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황영지와 눈이 마주친 순간 괴로워 하는 황영지의 표정은 차마 볼 수가 없었다.

이렇게 아침 나절이 흐르자 지성룡은 도저히 안에 있을 수가 없어 수하들을 만난다고 말하고 사황성 밖으로 나가고 말았고 황영지는 방안에 틀어박히고 말았다. 도저히 수치심에 그들과 같이 있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들의 이런 태도에 그들은 차마 나오려는 질책을 다시 삼킬 수밖에 없었다.

이들의 행위는 잘못된 것이지만 젊은 혈기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도 하였다.

이렇게 생각하고 이일은 덮을 수밖에 없었다.

밖으로 나가 천하삼단의 사람들을 만나고 돌아온 지성룡은 다시 영빈각으로 곧바로 가기가 쑥스러워 사황성의 정문을 들어오다가 문지기에게 사마의 거처를 물었다.

“성주님의 거처에 가시려고요. 그러면 안으로 기별을 넣겠습니다.”

지성룡은 사마의 상세가 걱정되기에 영빈각에 조금이라도 늦게 가고 싶어 딴 짓을 하였다.

이대로 가기에는 면목이 없기에 조금이라도 가는 시간을 늦추고 싶었다.

“저를 따라오시지요.”

외당 당주는 일을 보고 받자 직접 나와서 안으로 인도하기 시작하였다.

지성룡은 안으로 들어갔다.

사마가 머무는 곳으로 가다가 몇 번의 제지를 받았지만 대부분이 어제 지성룡을 보았기에 통과를 하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마침내 사마가 머무는 대전에 다다랐을 때 기별을 받은 영소혜가 밖으로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상세는 좀 차도가 있으시오?”

“네, 그러하옵니다. 일단 안으로 드시지요. 마침 아버님도 운공요상을 하시다가 조금 쉬시고 있사옵니다.”

영소혜는 방문을 열고 지성룡을 안으로 들어가게 하였다.

사마는 지성룡을 보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움직이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어 보였다.

“몸은 괜찮습니까?”

지성룡이 들어가며 먼저 묻자 사마는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사마는 생각보다 내상이 빠르게 회복되고 있었다. 초기에 바로 치료를 하였고 요상약을 먹자 그 약효가 생각보다 뛰어났기 때문이다.

“자네 덕분에 많이 나아졌네. 이제 움직이는데는 지장이 없네.”

“그래도 모르니 무리하지는 마십시오. 일단 진맥을 해보고 싶습니다.”

그러자 사마는 자리에 앉아 아무런 거리낌이 없이 손을 내밀었다.

지성룡은 사마의 옆에 앉아 손을 잡고 진맥을 하였다.

다시 상의를 벗게 하여 진기를 점검하였다.

“아직도 어혈(瘀血)이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 어혈을 제거하다보면 상처가 덧날 수 있사오니 지금은 손을 대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러니 일단 운공요상을 계속해 주시고 내일 오후쯤에 상세를 한번 더 점검한 연후에 제거하도록 하겠습니다.”

“자네가 아니었다면 큰일을 당하였을 것이네. 무공만이 아니라 의술까지 뛰어난 줄은 몰랐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네.”

지성룡은 이런 치하에 익숙하지 않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종을 잡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대놓고 치하를 하자 오히려 민망하였다.

“그저 그 자리에 있었던 것 뿐이오니 괘념치 마십시오.”

지성룡은 듣기가 민망하여 짧게 말하였다.

영소혜는 지성룡이 치하에 몸 둘 바를 몰라 하자 오히려 지성룡의 순수한 성품이 좋았다.

사마도 지성룡을 보면 볼수록 호감이 가기에 내심으로 안타까웠다.

흑도와 백도라는 구분만 없다면 영소혜의 짝으로서 탐이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흑도에 몸담고 있지만 사위감으로는 흑도의 인물보다는 아무리 그래도 백도의 인물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것은 부모 된 입장에서 당연하였다.

“그래도 자네의 고절한 의술 덕분에 이렇게 나을 수가 있었네. 고맙네.”

그렇게 말을 하자 지성룡은 결국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지성룡을 배웅하고 들어온 영소혜는 사마의 말에 무슨 뜻인지를 몰라 대답을 못하고 바라보기만 하였다.

“나는 마음 같아서는 참룡검객에게 사황성을 맡기도 싶다. 문제는 그가 천하문의 인물이라는 것인데 그만 좋다면 사황성을 넘기고 싶구나.”

사마는 이번 일로 상당히 의기소침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더구나 영소혜에 관한 일이 걱정되었다.

영소혜의 마음이 지성룡에게 쏠리고 있다는 것을 알자 어떤 수를 써서라도 영소혜를 맡기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나 우리는 흑도이옵니다. 그가 흑도인 우리를 꺼려할 텐데 그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영소혜는 원하는 일이지만 현실적으로 어려운 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기는 하다만 너를 위한 일이니 어떻게든 해보자.”

영소혜는 자신을 위해 사마가 그런 결심을 하였다고 생각하자 기쁘기 짝이없었다. 그러나 당장 황영지가 그림자처럼 붙어 잇는 것을 생각하자 곧 얼굴이 침울해지고 말았다.

그 일을 생각하자 부풀어 오르던 마음이 싸늘하게 식어가는 것을 느꼈다.

내내 마음 한구석에 질투심이 피어 오르고 그녀의 머리는 내내 그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온데 아버님 남경상림의 고희연에 소녀는 가지 않을 생각이옵니다.”

“아니다. 이번 기회에 아예 천마를 만날 생각이다. 나도 갈 것이니 그리 알아라.”

사마의 말에 영소혜는 사마의 내심을 알게 되었다.

“하오면 아예 공성지계(空城之計)를 쓰실 것입니까?”

사마가 말하는 것은 사황성의 요인 대부분을 이끌고 간다는 의미였다. 비어있는 사황성은 건물에 불과할 따름이었다. 이런 것을 간파한 영소혜는 사마의 내심을 읽자 그 동안 요상을 하면서도 많은 생각을 하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사황성은 남경 근처에도 분타가 있기에 그 곳으로 몰려간다고 하여 크게 문제될 것은 없었다.

“그리하여도 상관은 없지만 사황성을 내어줄 수도 있지 않습니까?”

“물론 그전에 빨리 내분을 수습하여야 한다. 내일 오후에 치료를 하고 나면 모레쯤부터 반란에 가담한 자들을 치죄하고 이일을 천하에 공표할 생각이다. 아울러 천지문에 대한 사황성 영역에서의 활동을 금하도록 하는 것도 공표할 생각이다. 과연 그들이 어떠한 일을 하는지 지켜볼 생각이다.”

“예, 그렇게 하도록 조치를 지금부터 취하겠습니다. 하온데 같이 갈 인원을 얼마로 하여야 하옵니까?”

“사황성의 육천중에서 암중에 이천 오백을 이동시키고 오백 정도를 동행시키도록 하여라.”

“하오면 정예로 그렇게 하옵니까?”

“그렇게 하여라. 앞으로는 사황성이 총단이 아니라 나와 네가 있는 곳이 총단이다.”

사마의 말은 실로 많은 의미가 있는 이야기였다. 사마에게 이번 일은 실로 많은 생각을 하게 하였다.

지성룡이 영빈각에 돌아왔을 때는 아무도 나와 있는 사람이 없었다. 조용히 황영지의 방으로 갔다.

황영지는 지성룡이 들어오자 침상에 누워있다가 일어났다. 울었는지 얼굴이 퉁퉁 부어 있었다.

“지매, 아무 걱정 마시오.”

지성룡은 침상에 앉아서 가볍게 손을 뻗어 황영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이미 모두가 우리들의 일을 아는 것 같아요? 어떻게 해야 해요?”

“걱정하지 마시오. 내가 모든 것은 알아서 지매에게 누(累)가 가지 않도록 할 것이오.”

지성룡은 황영지를 끌어당겨 안았다.

황영지는 힘없이 끌려와서 지성룡에게 기대었다.

“상공, 사실 저는 밤새 한잠을 자지 못했어요. 제가 고민한 것은 상공과 이렇게 된 것을 후회해서가 아니예요. 그저 모든 사람에게 미안해서예요. 그리고 조금은 부끄럽고요.”

“그렇지만 지매가 잘못한 것은 아니오. 중요한 것은 내가 지매를 사랑하고 지매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이오. 그러니 아무런 걱정을 하지 마시오. 자 이제 나갑시다. 설마 우리를 죽이기야 하겠습니까? 그저 한소리를 듣더라도 터놓고 용서를 구합시다.”

그들은 이런 분위기를 해소하는 것은 사실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에 당당하게 행동하자고 말한 것이다.

“나도 아침 나절에 많은 생각을 하였소. 그러나 결론은 당당하게 행동하는 것이었소. 우리가 한 일이 인륜에는 다소 어긋나는 일이지만 그 것은 다 사람이 만든 것이오. 다소 부끄러운 일이나 죄가 되는 일은 아니었소. 그러니 죄인처럼 그렇게 고개를 숙이지 마시오.”

그렇게 말하자 황영지는 지성룡을 응시하더니 입술을 깨물었다. 뭔가 다짐을 하는 것 같았다.

지성룡은 가볍게 황영지의 볼에 입을 맞추었다.

“나는 할아버지에게 지금 가서 사실대로 말하고 이해를 구하겠소.”

“저도 그렇게 하겠어요.”

지성룡은 황영지를 일으켜 세워주었다.

황영지는 일어나서 지성룡을 꼭 껴안았다. 지성룡도 마주하여 껴안아 호응을 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방을 나가 손을 놓고 각기 다른 방을 향하여 다가갔다.

지성룡은 승천검황의 방문 앞에서 기척을 내고 안으로 들어갔다.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지성룡은 승천검황이 침상위에 앉아 있자 용기를 내서 말하였다.

“어제 밤에 다소 불미스러운 일을 벌여 송구하게 생각하옵니다. 하오나 그 일은 결코 장난이나 황소저를 능멸하여 한일이 아니라 황소저와 저의 마음이 통하여 일어난 일입니다.”

지성룡은 거침없이 말을 내뱉었다. 실로 쑥스럽기 그지없는 일이지만 어찌되었건 이렇게 지지부진한 상태로 보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았다.

매도 먼저 맞는 것이 낫다고 얼른 결말을 짓고 싶었다.

“물러가거라. 그 일은 너희들의 일이니 나는 관여하고 싶지 않다. 하나 사내라면 자신이 저지른 일은 책임져야 하는 것, 이후에 일어나는 모든 것은 너의 몫이다. 남녀간에 일어나는 일은 네 스스로 처리 하여야 할 것이다.

내가 관여할 일이 아니니 긴말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사내란 남녀간의 일에 대하여 결코 부끄럽게 생각하지 말고 당당하게 처신하여라. 자신이 감당할 자신이 있다면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니 당당하게 자신이 한 일은 책임을 져야 한다.”

승천검황은 어제 밤의 기분 같아서는 한 소리를 하고 싶었지만 지성룡도 이제 나이가 스물이나 되는 피 끓는 청춘이었다. 그러니 일방적으로 뭐라 할 수만은 없었다.

강호 생활을 하다 보면 수도 없는 남녀관계가 발생할 것인데 일일이 이런 일에 관여할 수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지 그 상대가 무적철검과 무상도의 공동전인이기에 문제가 되는 것일 뿐이었다.

승천검황의 말은 이런 종류의 문제에 대하여는 관여하지 않겠다는 말이었다.

승천검황은 아침을 먹고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까 내심 고심을 하였고 그 만한 나이 때에 어떤 방법으로든 한번쯤 여자를 경험하는 것이 상례였다. 그 것을 알았다고 이렇게 화를 낼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일 그 여자가 지체가 낮았다면 다 컸구나 말하고 껄걸 웃고 말았을 것이었다. 그 것과 다른 일이 아닌데 이렇게 관여하여 고심할 이유가 없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이만 물러 가겠사옵니다.”

지성룡은 조용히 물러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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