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화
쿠르르르르릉.
쾅쾅쾅!
암흑 속에 암흑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곳에서 한 사람, 아니 요괴다.
요괴 한 명이 튀어나왔다.
그런데 몰골이 말이 아니다.
곧 죽어도 하나 이상하지 않을 노요괴가 심각한 상처를 입고 튀어나왔고, 곧바로 바닥에 쓰러졌다.
그리고 그 요괴는.
여우 요괴다.
“아버지!”
요괴의 왕이자 백미호의 아버지, 천야(天爺)다.
“전하!”
“전하!”
백미호와 호요, 웅요가 다급히 그에게 다가갔다.
백미호는 울먹이며 쓰러져 있는 자신의 아버지를 꼭 끌어안았다.
“미호야.”
“아버지! 이게…… 이게 무슨 일이에요?”
“미안하다.”
“우선, 우선 치료부터.”
“아니다. 시간이 없다. 난…… 수많은 요괴들의 희생으로 이곳까지 올 수 있었다. 그들의 희생을 헛되이 할 수 없다.”
“아버지!”
결국 백미호의 눈에서 폭포수 같은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내가 하는 말을…… 쿨럭.”
요왕 천야는 검은 피를 한 사발이나 토한 후 말을 이어야 했다.
“이제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어라. 요계는…… 그놈에게 점령당했다.”
“그놈이라니요? 요계에 아버지보다 강한 존재가 있을 수 없잖아요.”
“계효보가…… 요괴로 넘어왔다. 이미 오래전.”
아! 뭐지? 무슨 상황이지?
갑자기 또 머리가 하얘지네.
계효보는 죽었는데?
분명 그 기운까지 내가 확인했는데.
계효보 맞는데?
쌍둥인가?
그럴 수는 없지.
아무리 요계라도 호구조사는 했을 거 아니야?
백미호가 그것도 조사하지 않고 인간계로 넘어왔을 리는 없고.
뭐냐고.
계효보가 왜 거기에 가 있냐고!
하얘졌던 내 머릿속이, 갑자기 분노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계효보는 죽었어요, 아버지.”
요왕 천야가 힘겹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설, 설마?”
“다른 계요다. 이곳의 시간으로 십 년이나 될까? 우리 요계의 시간으로는 이미 수십 년 전 계효보가 요계로 넘어왔다. 그런 후 빠르게 계요들을 통합하였고, 그중 한 녀석에게 자신의 힘을 나눠 주어 인간계로 보낸 것이다. 네가 죽인 계요는…… 쿨럭.”
“다른 닭 요괴였군요? 계효보의 힘을 전수받은 또 다른 계요요?”
“그렇다.”
“다른 요괴들은요? 아버지의 왕국에는 계효보 따위와 비교도 할 수 없는 강한 요괴들이 구름처럼 몰려 있잖아요. 다들 어디로 갔는데 아버지가 이런 상황에까지 오게 된 거예요?”
“모두 죽었다. 그들이 약해서가 아니다. 계효보가 강해서니라. 그는…… 놈은…… 죽지 않는 닭요괴…… 쿨럭. 불닭…… 불사지계(不死之鷄, 죽지 않는 닭요괴)가 되었다.”
그때 백미호의 울음이 뚝 끊기며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오빠…… 오빠는요?”
“미안하다. 네 오빠를 지켜 주지 못했다. 하지만 네 오빠는 끝까지 당당하게 계효보와 맞서 싸웠다.”
“아버지…… 흑흑.”
미호의 눈에서도 또 그 뒤에 시립한 호요와 웅요의 두 눈에서도, 뜨거운 눈물이 마구 쏟아져 내렸다.
“내가…… 쿨럭. 정말 이제는 시간이 없구나. 내 힘…….”
“안 돼요! 그러면 아버지 정말 죽잖아요! 절대로 안 돼요!”
“아니다. 내 힘을 전해 주기 위해 온 것이다. 수백 명의 홍요(鴻妖, 기러기 요괴)가 이 때문에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던졌다. 또 홍요들이 시공간 요술을 부릴 수 있도록 계효보의 군대를 막은 수천수만 명의 요괴들. 모두 나의 힘을 네게 전수해 주기 위함이니라. 그것만이…… 쿨럭. 우리 요괴의 마지막 희망이다.”
“아버지…… 흑흑흑.”
“네 오라비가 없으니, 이제는 네가 요계의 왕이다. 나의 힘을 받아, 계효보에게 죽임당한 요괴들의 복수를 하여라.”
“아니에요, 아버지!”
“미호야…….”
“아니, 받겠어요. 하지만 그건 제가 아니에요. 아버지도 이길 수 없는 계효보라면, 제가 아무리 아버지의 힘을 받는다고 해도 이길 수는 없어요.”
미호는 계속 울며 말했고, 그 말을 들은 천야는 눈동자가 크게 떨렸다.
하지만 이내, 그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했다.
“자네로군. 마악치란 자가.”
“그렇습니다, 요왕이시어.”
“듣던 것보다 많이 못생기지는 않았는데?”
아! 저 노요괴, 아직 살 만한가 보다.
이 상황에 농담도 다 할 줄 알고.
“저자를 말하는 것이냐, 미호야?”
미호가 서럽게 울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네. 악치에게 주세요. 악치라면 계효보에게 요괴들의 복수를 해 줄 수 있을 거예요.”
“그래. 그래 보이는구나. 허허. 우리 요계의 존망을 인간에게 맡기는 날이 다 오는구나, 쿨럭쿨럭.”
다시 검은 피를 한 사발이나 토한 요왕이 나를 향해 말했다.
“곧 요계의 군대, 아니 계효보의 군대가 시공간을 넘어 이곳으로 올 것일세. 그는 불사……. 그를 죽이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네.”
“그것이 무엇입니까?”
“생명정(生命晶)을 파괴하는 것일세. 쉽지 않을 거야. 나를 포함한 역대의 요왕 모두가 바랐지만, 그 누구도 얻지 못한 게 생명정이니까. 이미 계효보는…… 휴우. 인정하긴 싫지만, 가장 완벽한 요괴가 되었…… 죽지 않는 불사의 닭…… 쿨럭. 쿨럭.”
난 천야의 기침이 멎길 기다린 후 물었다.
“계효보는 언제쯤 올까요?”
“모르지만, 곧 알게 될 걸세.”
천야는 말과 함께 미호의 등을 힘없는 손으로 토닥여 주었다.
생명정과 계효보가 오는 날, 그 답은 모두 백미호에게 있다는 뜻이었다.
“준비됐나? 준비됐으면 내게로 오게.”
난 천야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두려워할 필요 없다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
“아니요. 전하의 힘은 제가 받을 수 없습니다.”
천야는 물론, 서럽게 울던 미호와 호요, 웅요가 모두 동시에 놀란 눈으로 나를 보았다.
“계효보만 죽인다고 끝나는 게 아니잖아요. 요계로 돌아가, 계효보로 인해 파괴된 요계를 다시 재건해야죠. 그러기 위해선 미호에게 전하의 힘이 필요합니다. 전하의 힘은 제가 아닌, 미호에게 주세요.”
“그러면 계효보의 군대는……?”
천야의 눈동자가 다시 한번 크게 떨렸다.
하지만 난 목소리에 힘주어 말했다.
“닭대가리는…… 제가 처리합니다.”
흔들리던 천야의 눈동자가 멈추었다.
나를 또렷이 바라보는 그의 눈에 요왕의 엄청난 위엄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는 찰나.
그가 미소 지었다.
여느 시골의 평범한 노인에게서 볼 수 있는 그런 편안한 미소였다.
“우리 미호가 남자 하나는 제대로 볼 줄 아는군. 아까 했던 말 취소네.”
“네?”
“자네…… 쫌 멋있군, 허허. 쿨럭.”
잠시 후, 미호는 자신의 아버지이자 요계의 왕인 천야에게서 모든 힘을 전수받았다.
그녀의 몸에서 백색 광채가 뿜어져 나오며, 우리네의 환골탈태 때와 비슷한 광경이 펼쳐졌다.
아니, 그보다 더 신비로웠다.
그리고 곧 그녀의 몸이 반인반호(半人半狐, 반은 인간의 모습이고 반은 여우의 모습)로 변했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원래 쉰여섯 개였던 그녀의 꼬리가, 드디어 일백 개로 늘어났다.
더 크고, 더 화려하고, 더 아름답고, 더 웅장하며, 더 강력해진.
그녀가 요왕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날.
“으…… 불닭…… 불닭…….”
우리의 애도 속, 요왕은 불닭을 마지막 유언으로 남기며 삶을 마쳤다.
*
현화천에 돌아오기 전에 이미 무림맹에 연통을 넣었다.
내가 현화천에 도착했을 때, 맹주인 예지는 물론 무림맹의 핵심 인사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나는 사부와 작은 사부는 물론 계속 이곳에 거주 중인 무적할매 그리고 의제와 한해북, 다시 우리 현화천의 주요 인사들을 모두 불러 모았다.
계효보의 존재와 요계의 침공.
이 사실을 모두에게 알렸다.
충격의 도가니였다.
처음에는 믿지 않으려 하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백미호가 직접 변신을 보여주자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빠르게 또 그 어느 때보다 더 신중하게 계책을 논의했다.
일단, 끌어모을 수 있는 힘은 모두 끌어모아야 했다.
밤샘 회의.
그리고 날이 밝기도 전, 전서구와 전서응 그리고 파발마가 끊임없이 우리 현화천을 떠나 천하 각지로 퍼져 나갔다.
문제는.
“북해빙궁의 힘까지 얻을 수 있으면 좋겠는데, 너무 멀군요. 소식을 전하고 그들이 도착하려면 일 년. 아무리 빨라도 반년 이상은 걸릴 테니, 그들은 포기해야겠어요.”
북해빙궁주가 언제든지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했었다.
그게 떠올랐지만, 방법이 없었다.
멀어도 너무 멀었다.
그곳까지는 전서구나 전서응도 보낼 수 없다.
전서구나 전서응은 훈련된 곳만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사 가능하다고 해도, 중원의 기후가 아닌 혹독한 북해의 기후에 전서구나 전서응이 살아남을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뭐, 불가능했다.
그렇게 모두가 북해빙궁만큼은 포기하려고 했을 때.
“천주님!”
말석에서 조용히 회의를 지켜보기만 하던 녀석이 결의에 찬, 조금은 상기한 얼굴로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달호다.
전령 달호.
언제나 나와 처호의 연락을 담당했던 녀석.
조금은 어수룩하지만, 발만큼은 무지하게 빠른 달호 녀석 말이다.
“허락해 주신다면, 신 달호. 죽음을 불사하고 북해로 달려가 보겠습니다. 충!”
난 자리에서 일어나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저 끄트머리에 있는 달호에게로 다가갔다.
아마도 내가 달호를 말리려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당연하다.
아무리 달호라 하더라도,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달호에게 명한다.”
“충!”
내 말에 달호가 곧바로 부복하며 충성을 외쳤다.
“지금부터 너를 나의 특별 전령으로 임명하고, 이를 천주대사(天主大使)라 명한다. 너의 입이 곧 나의 입이며, 나의 생각이 곧 너의 입을 통해 천하로 전파될 것이다.”
“조오오오온명!”
달호가 부복한 상태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가라! 북해로 가 북해의 빙신(氷神)과 얼음의 전사들을 이끌고 귀환하라. 천주대사에게 내리는 나의 첫 번째 명이다.”
“조오오오오온며어어어어엉!”
달호는 목이 터져라 외쳤다.
그런 후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향해 허리를 깊이 숙였다.
그게 끝이었다.
그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았다.
뒤조차 돌아보지 않고 그렇게 북쪽을 향해 달렸다.
*
“얼마 남았지?”
나와 백미호 단둘이 천주전 지붕 위에 앉아 밤하늘을 보고 있다.
“두 달 반. 그때면 요계에서 이곳으로 통하는 문이 열릴 거야.”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였다.
요왕 천야의 말.
모르지만 곧 알게 될 거라고 말했다.
요왕의 힘을 모두 전수받은 미호가 이를 느끼고 있는 것이다.
“장소가 확실히 이곳 맞아?”
“응. 십간산 위에 시공간의 문이 열릴 거야.”
“휴우. 시간 한번 무지막지하게 빠르게 가네.”
“떨려?”
“떨리긴. 나 마악치야.”
“칫, 알아. 네가 마악치인 거.”
“큭큭.”
“그나저나 사람들이 안 믿을 줄 알았는데, 빠르게도 모였네.”
“그러게. 나도 좀 놀라긴 했어. 극양신장 오 대협이랑 주 여협, 그리고 유령신검도 이미 왔고, 송암 도장이랑 아미삼검도 다시 은거에 들어간 걸 깨고 다 와줬고. 계속 천하 각지에서 몰려오는 중이야.”
“황궁에서도 사람을 보내온다며?”
“응. 황제가 친히 대제사장을 비롯한 술사 삼백 명과 황제친위대까지 보내 준다고 하네.”
“거기도 급하긴 했나 보다.”
“아무래도 황궁의 천문관이 무림맹보다는 한 수 위일 테니, 기이하게 변하는 밤하늘의 형태를 모를 수 없었겠지. 곧 그것이 이번 일과 연관되었음도 알았을 테고.”
“맞다. 네 사부님께서는? 아직 소식 없으셔?”
“백두산에는 진즉 도착했을 거야. 아마 백두신령이 고려의 다른 신령들과 함께 오려고 좀 늦나 봐. 사부는 걱정 안 해도 돼.”
백미호와 한참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을 때였다.
“천주님!”
천주전 아래에서 공손병이 급히 나를 찾았다.
미호와 함께 오 층의 천주전 지붕에서 뛰어 땅으로 착지했다.
“천주님.”
“무슨 일이에요, 공손 선생?”
늦은 밤 나를 급히 찾은 걸 보니, 뭔가 문제가 생긴 듯하다.
공손병의 안색 또한 좋지 않았다.
결국 그는 큰 결심이라도 한 듯 입을 열었다.
“중원 전역에서 괴상한 집단이 봉기했습니다.”
“그게…… 무엇인데요?”
아! X팔. 알 것 같다, 뭔지.
“계두교라는 이상한 종교가 봉기하여 천하를 들쑤시고 있다고 합니다.”
닭대가리 새끼, 끝까지 사람 피 말리게 하는군.
힘을 하나로 뭉쳐도 모자랄 판에.
휴우, 이건 또 어쩌지?
사부, 전 이제 어째야 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