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8화
“네 이놈들! 다 죽여 버리겠다!”
화산의 제자 중 누군가는 놀랐고, 또 누군가는 그녀의 등자에 기대에 부푼 얼굴을 했다.
천예휘가 폐관을 깨고 출관했다는 것.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기 때문이다.
화경의 경지.
화산파가 한 명이 아닌, 두 명.
아니, 천무휘를 이미 배신자, 그리고 적이라 간주하고 있는 흐름 속.
천무휘가 아닌 뼛속까지 화산파의 사람인 천예휘가 화경의 고수가 되어 돌아온 것이다.
장문인과 감붕의 죽음으로 짙게 눌렸던 슬픔과 억압이, 그녀의 등장만으로 깨지고 부서졌다.
슬픔과 억압, 패배감 대신 화산에 새로운 희망이 찾아든 것이다.
그런데 호기롭게 우리를 향해 검까지 뻗어 날아들던 그녀.
그녀를 막은 건 천무휘였고.
찰싹!
뺨을 때렸다.
천무휘가.
천예휘의 뺨을.
있는 힘껏 후려갈겼다.
천예휘가 허공에서 뒷걸음질을 쳐 일 장 뒤로 물러서 땅에 착지했다.
자신의 왼뺨을 만지며 놀란 얼굴을 했다.
“오빠…….”
“정신 차려!”
천무휘의 호통.
그러자 놀란 얼굴이었던 천예휘가 인상을 심하게 구겼다.
화가 났다.
“오빠야말로 정신 차려. 내가 말했지. 저놈들하고 어울리지 말라고. 결국 저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 봐. 우리를 친 자식처럼 대해 주던 장문인 사숙을 죽였어. 보라고!”
“장문인 사숙은 가셔야 할 길을 가신 것이다. 당당하게 스스로 그 길을 가셨다. 너야말로 장문인 사숙의 죽음을 욕보이지 마라.”
“미쳤어. 오빠는 지금 악마들에게 홀려 미쳤다고!”
찰싹!
천무휘가 다시 천예휘의 뺨을 때렸고.
천예휘는 다섯 걸음이나 뒤로 물러나야 했다.
이미 그녀의 왼뺨은 빨갛게 부풀어 올랐다.
하지만 이번에 그녀는 놀라지도, 또 화를 내지도 않았다.
대신 심호흡을 하며 검을 쥐어 잡았다.
오히려 인상을 구긴 건 천무휘다.
그녀의 의도를 알았기 때문이다.
“그만……둬라. 오라비로서 내리는 명이다.”
“오빠야말로 그만 비키시지. 오빠가 익힌 가문의 검술은 화산의 아류야. 그리고 난, 정종의 화산검을 익혔어. 오빠를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 그러니 비켜. 죽기 싫으면.”
“넌…… 넌 정말 끝까지…….”
천무휘는 말을 끝낼 수 없었다.
천예휘가 옥녀매화신공을 끌어올리며 곧바로 검을 뻗어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곧.
찰싹!
천예휘의 뺨.
악에 받친 음성.
“죽어!”
찰싹!
경쾌한 타격음.
“이젠 오빠고 뭐고…….”
찰싹!
“진짜 죽이겠어!”
찰싹!
아! 갑자기 광마일기의 글귀가 떠오른다.
화산검후는 집요했다.
사악했고, 잔인했으며, 정말 제정신일까 싶을 정도로 끈질겼다.
물러서는 법 따위는 애초에 배우지 않은 움직임으로, 오로지 나를 죽이겠다는 일념으로 계속 칼을 휘두르며 나를 쫓았다.
-광마일기 中
지금 천예휘가 바로 그때의 그 모습이리라.
계속 천무휘에게 뺨을 맞아 가면서도, 눈이 뒤집혀 오로지 전진뿐이다.
엄청 아플 것 같은데.
아니지. 광녀에게 아픔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지.
그렇게 천예휘는 한 대, 두 대, 세 대…… 쉰아홉 대, 예순 대, 예순한 대…… 아흔아홉 대.
그래도 친구 동생인데, 이제 와 이런 말을 하긴 뭐하지만.
진짜 미친년이다.
그런데 그때!
정확히 천무휘가 검도 뽑지 않은 상태로 그녀를 상대하며 아흔아홉 대의 뺨을 때렸을 때였다.
오! 그래도 화경의 고수라 이건가?
아흔아홉 대의 뺨을 맞은 후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서는가 싶었는데.
속임수였다.
천예휘는 뒤로 물러서는 척하며, 곧바로 나를 향해 칼을 뻗어 왔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하하하하하!
그냥 이렇게 끝나는가 싶어 살짝, 아니 좀 많이 아쉬웠는데.
하하하하하하!
푸하하하하하하!
계집이 제 발로 나에게 복수의 길을 열어 주고 있지 않은가?
아! 원시천존님, 부처님, 하느님, 기타 등등님들, 모두 감사합니다.
“죽어라, 악적!”
표독스러운 얼굴로 나를 향해 검을 뻗는 천예휘.
그리고.
찰싹!
콰아아아앙!
쉬이이이이이이잉.
쿠당탕탕탕탕.
스무 장 뒤로 날아가 땅을 정확히 열다섯 번 구른 후에야 멈출 수 있었던 천예휘다.
“마 형, 괜찮아요?”
천무휘가 곧바로 나에게 와 물었다.
아! 이거, 그래도 좀 미안하군.
“아이고, 죄송해요, 천 형. 천 소저의 검이 너무 갑작스러워 힘 조절을…….”
“아닙니다. 다치지 않아 다행이에요.”
쪼끔 많이 천무휘에게 미안했다.
대신, 그거의 일천육백칠십오만 배 더 기뻤다.
양팔을 쫙 뻗고, 소리라도 지르며 기뻐하고 싶은 걸 지금 진짜 죽을힘을 다해 참고 있는 중이다.
아! 더는 못 참겠다.
웃음이 계속 나오는데.
“천 소저에게 어서 가보세요.”
“아, 네. 죄송해요, 마 형.”
천무휘가 그렇게 쓰러진 천예휘를 향해 간 후에야 나는 억눌렀던 웃음을 조금 지을 수 있었다.
“마 형, 조금 건 조금 심했어요. 누가 보면 천예휘랑 무슨 엄청난 원수라도 지은 줄 알겠어요.”
“큭큭. 나중에…… 큭큭. 나중에 말해 줄게요, 한 형. 큭큭큭.”
“보는 눈이 많아요. 뭐가 그렇게까지 좋은지는 모르겠는데, 일단 우리는 떠나죠. 곽 형은 이미 산을 내려갔어요.”
“아! 그래요? 그럼 우리도 가죠. 화산은…… 천 형에게 맡기면 될 것 같아요.”
“네, 마 형.”
화산검후 천예휘.
고마운 줄 알아라.
내가 요즘 참선을 많이 해서, 아주 착한 사람이 됐거든.
광천마제였다면, 어림없었다.
그래도 이젠 착한 사람이니.
이걸로 너에 대한 복수는, 퉁 쳐 주겠다.
부디 다음에 만났을 때는 착한 사람이 되어 있길 바란다.
*
우리는 하남 허창의 현화천으로 가지 않았다.
곧장 강서 남창으로 향했다.
의제의 부모님을 만나기 위함이다.
내가 놀란 건.
원래 의제 부모님의 봉분은 그저 평범하기 그지없는 그런 봉분이었다.
그런데 오늘 와 보니, 그 봉분이 무슨 황제의 무덤이라도 되는 것처럼 커지고 주변까지 으리으리한 조형물들로 가득했다는 거.
심지어 산을 지키는 무인도 따로 우각회에서 파견해 그곳에 상주하고 있었다.
뭐, 그건 그거고.
아무튼 나는 원래 조촐하더라도 지극정성을 다해 제사를 지낼 참이었다.
그런데.
오만 명이 모였다.
우각회 녀석들은 물론, 강서와 인근 지역의 무문에서 모두 사람을 보내온 것이다.
급작스러운 제사였음에도 모인 사람들의 수도 그렇고, 분위기도 그렇고.
참, 우리 의제가 성공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곳은 몰라도, 복건의 한해북처럼 강서에서만큼은 의제가 천하제일인 해도 될 듯하다.
하늘에서 이를 지켜보고 계실 의제의 부모님도 매우 흡족해하실 것이다.
나도 너무나 기뻤다.
*
평화가 깃든 무림.
뭐, 여전히 여기저기서 하루가 멀다 하고 싸우고는 있지만, 내 입장에서는 아주 평화로운 무림이다.
그렇게 무림의 평화와 함께 내 나이도 어느덧 서른두 살이 됐다.
무림맹은 존치하게 됐다.
맹주는 아미검후에서 이제는 봉황검후라 불리게 된 금예지다.
살짝 반발이 있었다.
아무리 속가제자라 해도 아미파의 제자였던 예지를 두고 말들이 많았다.
여자라는 것도 한몫했고, 또 나이를 문제 삼은 이들도 있었다.
무림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예지보다 어렸던 맹주도 분명 있었다.
하지만 여인이 맹주가 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미 말했듯 작은 반발이었을 뿐이다.
아미파에서 예지에게 정식 하산을 허락했고, 그렇게 예지는 아미파를 떠나게 됐다.
속가제자임으로 파문이 아닌 하산이었고, 이는 뭐 누구나 다 알 듯 형식적인 문제였다.
일반과 다르게 무림의 특성상 여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예지가 맹주가 되는 것을 강하게 반대할 수는 없었고.
무엇보다 내가 밀어준다는데, 어떤 미친놈이 간이 배 밖으로 나와서 반대하겠는가?
예지는 그렇게 무림 최초의 무림맹 여성 맹주가 되었다.
아!
살짝 진지하게 곤혹스러웠을 때가 있긴 있었다.
예지가 어느 날 예고도 없이 우리 현화천을 찾아와, 자기 맹주 안 하겠다고 그랬다.
천하는 내 말을 듣지만, 나는 또 우리 예지가 싫어하는 걸 시킬 수는 없지 않겠나.
그래서 다른 사람을 물색하려고 했는데.
아미파에서 장문인과 장로들이 단체로 찾아와 그런 예지를 말리고, 설득하고, 아무튼 그랬다.
우리 예지가 무림 맹주다.
아마도 언제나 그랬듯, 우리 예지는 천하를 모두 심쿵하게 만들 정도로 멋진 맹주가 될 것이다.
*
송암 도장이 뜸했다.
그래서 무당에 연통을 넣었더니, 은거에 들어갔다고 했다.
심심하기도 하고, 놀러 갔다.
무당파로.
혹시나 해서 무림맹에도 이 사실을 슬쩍 흘렸는데, 큭큭큭.
우리 예지가 만사 다 제쳐 두고 무당산으로 왔다.
천무휘 녀석이 빠진 게 좀 그렇기는 했지만, 오랜만에 우리 네 사람이 뭉쳐 하하 호호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날.
무당산의 뒤쪽, 송암 도장이 홀로 은거하는 그 산.
이름 없는 그 산 말이다.
광천마제 시절에 내가 광천산이라 이름을 붙여 줬던 그 산.
이번에도 나는 그 산을 광천산이라 명명했고, 그날 이후 무당파 제자들은 물론 천하가 모두 그 산을 가리켜 광천산이라 부르게 됐다.
산이 유명해지다 보니 유람이나 기도, 혹은 기연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산을 오르는 사람이 많아졌다.
아니, 그냥 인산인해였다.
그래서 송암 도장에게 쪼금 미안했다.
이 양반, 작정하고 조용히 수련에 임하려고 했는데, 나 때문에 산을 옮겨야 한다며 투덜거렸다.
뭐, 그래도 나와 우리 녀석들은 덕분에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
무적할매는 위화궁이 자기 집인 걸 잊은 듯하다.
그냥 계속 우리 현화천에 눌러앉아 있다.
그래서 위화궁에 무슨 일이 생기고, 또 중차대한 보고를 해야 할 때면, 위화궁의 궁녀들이 일부러 우리 현화천을 찾아오기도 했다.
그리고 그날.
이제 열아홉 살이 된 향이도 그녀들과 함께 우리 현화천을 방문했다.
열아홉 살이 된 우리 향이는 한 떨기 꽃을 보는 듯했다.
보는 것만으로 배가 부르다는 말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문제는.
아나! 우리 현화천에 온 첫날부터 맹소강 녀석이 향이 옆에서 떨어질 줄 모른다.
그나마 마음의 위안은, 국인경이 항상 그들과 함께 있으면서, 혹시 모를 맹소강의 음흉한 악행을 감시와 예방해 주고 있다는 것이다.
아! 우리 향이가 맹소강 저 녀석에게 시집갈 거 생각하면, 벌써 베개가 흥건해질 정도로 눈물이 쏟아진다.
팔불출이라고 해도 좋다.
뭐, 내가 가장 아끼고 사랑해 줘야 할 우리 향이니, 이런 내 마음은 당연한 것이다.
그래서 그날 늦은 밤, 나는 의제와 한해북을 대동해 맹소강의 처소를 찾아갔다.
삼국시대에 관우와 장비 그리고 여포가 썼다는 신병을 똑같이 복제해 만든.
청룡언월도, 장팔사모, 방천화극.
그것을 각자 한 자루씩 어깨에 걸치고, 흉흉한 분위기를 풀풀 풍기며, 그렇게 막 잠자리에 들려던 맹소강을 찾아갔고.
나와 의제, 한해북은 밤새도록 돌아가며 맹소강에게 유교의 경전이니 삼륜오강이니, 잘 알지는 못하는 그것들을 가르쳤다.
아주 강압적으로.
그렇다.
그날 맹소강은 우리를 통해 뼈에 그 가르침을 새기게 됐다.
아니, 우리의 협박을 제대로 인지했을 것이다.
혼인 전에 뽀뽀하면 죽는다.
*
-잡았어.
-어? 미호야. 오랜만이네.
-잡았어, 악치야.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지금 어디야?
-천산.
-살아…… 있어?
-죽였어.
-바로 갈게.
계효보가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