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7화
광천마제 시절과는 달리 화산을 오르는 사람은 우리 넷이 전부였다.
나, 의제, 천무휘, 한해북.
화산으로 올라가는 길에는 잡풀이 무성하게 자랐다.
봉문을 했기에, 일 년 넘게 화산을 오가는 이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산 중턱에 이르러서는, 그 길을 지켜야 할 화산의 제자들 역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새로운 제자는 받지 않고, 속가제자도 모두 돌려보내야 한다.
무림은 물론, 상계와 민간과의 교류도 할 수 없다.
향배객이 산을 오를 수도 없고, 본산의 제자가 산을 내려와서도 안 된다.
그저 굶어 죽지 않을 최소한의 음식만을 들일 수 있는 게 봉문이란 조치다.
그렇게 화산 본산에 도착하고 난 후에야 우리는 화산파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무량수불. 본 문은 현재 봉문 중으로 외인의 출입을 엄격하게 금……. 어? 천 사숙!”
우리보다 댓 살 정도 어린 화산파의 제자다.
사실 천무휘의 나이로 보면 장문인을 사숙이 아닌 사조라 칭하고, 감붕 항렬의 제자들에게는 사숙이라 칭하는 게 맞다.
하지만 천무휘의 아버지가 현 장문인, 장로들과 호형호제하였기에, 천무휘의 배분이 화산에서 그리 통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천무휘를 본 이십 대 중반의 제자가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란 얼굴을 했다.
그러더니 곧.
“현, 현화지존…… 마악……치…….”
나를 보고는 아예 귀신이라도 본 것과 같은 얼굴을 했다.
“소용 사질이었던가?”
천무휘가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그제야 자신의 실태를 깨달은 화산의 제자가 서둘러 정신을 조금 차리고 답했다.
“그, 그렇습니다, 사숙.”
“곧바로 장문인께 가 전하시게. 대도곽가의 곽우적 대협이 이십여 년 전의 복수를 하기 위해 찾아왔다고.”
소용이라는 화산의 제자는 또다시 귀신 본 얼굴을 했다.
무슨 의미인지를 제대로 깨닫지 못한 모양이다.
이내 놀란 얼굴 그대로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내 옆에 있는 의제를 보았다.
“곽, 곽우적. 우각도협 곽…….”
“소용 사질.”
“앗! 넵. 네, 천 사숙.”
“전하시게. 지금 당장.”
그렇게 소용이라는 자는 헐레벌떡 뛰다가 발걸음이 느려진다.
이내 걸음을 완전히 멈추어 섰다.
천천히 몸을 돌리는 소용이라는 젊은이.
그의 얼굴에 조금 전 그 놀랐던 표정은 온데간데없다.
오히려 잔뜩 화가 난 얼굴로 천무휘를 쳐다본다.
“잠시…… 우리 화산이 잠시 수모를 당하고 있지만, 이는 말 그대로 잠시뿐입니다. 우리 화산은 만만한 곳이 아닙니다. 배신자가 발을 디딜 땅을 내줄 만큼 그렇게 호락호락한 곳이 아닙니다, 사숙. 아니, 천무휘 대협.”
그는 그 말만을 남기고 다시 걸음을 떼었다.
우리는 잠시 그가 사라진 곳을 보고만 서 있었다.
곧, 의제가 천무휘의 어깨를 잡으며 말했다.
“이제라도 돌아가시죠, 천 형. 저는…… 괜찮습니다.”
“미안합니다, 곽 형. 끝까지…… 뉘우치는 모습을 보여드리지 못하네요. 제가 짊어질 것은 짊어지겠습니다. 또 우리 화산이 치른 행위에 대한 대가는 받아야 합니다. 마음 쓰지 마십시오, 곽 형. 곽 형은 곽 형이 해야 할 일을 하고, 저는 제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입니다.”
천무휘는 스스로 자신의 집에서 배신자가 되는 것을 감수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이를 알기에 의제가 말리려는 것이었고.
두 사람의 우정에 내가 다 부끄럽고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
천무휘가 먼저 걸음을 떼었다.
의제가 곧바로 그런 천무휘의 뒤를 따랐고, 나와 한해북이 나란히 그런 두 사람의 뒤를 따라 화산파로 향했다.
*
댕댕댕댕댕!
부우우우우우우웅!
봉문 중 화산파가 다른 문파를 공격할 수는 없어도, 다른 문파는 화산파를 공격할 수 있다.
그것이 봉문이다.
당연히 화산파도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우리가 화산파에 도착하자, 사방에서 호각과 경계의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미 장문인과 장로들을 비롯하여 거의 대부분의 제자가 화산의 중심에 모여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휘야, 네가 어떻게…… 네가 어떻게 저들과 함께인 것이냐?”
장문인 자하검군 이백면이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또 떨리는 음성으로 천무휘를 향해 물었다.
그 옆에 있는 장로들 역시 마찬가지였고.
수많은 화산의 제자들은 적대감마저 드러내고 있었다.
“이십여 년 전 강서 남창에서의 일. 감붕 사형이 술에 취해 행패를 부리다 대도곽가의 가주에게 혼이 났고, 사숙께서 친히 고수들을 보내 대도곽가를 멸문시킨 일이 사실입니까?”
천무휘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하지만 슬픈 눈물을 흘리며 물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천무휘에게 적대감을 고스란히 드러내던 수많은 화산의 제자들이 순간 놀란 얼굴로 장문일을 쳐다보았다.
“음, 그건…… 그런 일이…….”
“모두 알고 왔습니다. 아니, 제 친구가 그 당사자입니다. 아버지를 잃고, 가족을 잃고, 가문을 잃었습니다. 제 친구가…… 사숙!”
얼마나 화가 났는지, 또 얼마나 슬펐는지.
천무휘의 음성에는 분노의 기운이 가득 실렸다.
화산에 터를 잡고 살아가던 새들이, 그 엄청난 소리에 놀라 모두 하늘로 날아갈 정도였다.
장문인 자하검군도 더는 그 사실을 숨기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잠시의 회피는 가능할지 몰라도, 이미 천하를 거머쥐고 있는 내가 그 일을 하나하나 샅샅이 밝힐 능력이 있다는 것을 그 또한 모르지 않는다.
결국.
“사실……이다. 면목이 없구나.”
“사부님!”
이미 사십 대 중반이나 된 감붕.
이제는 더 이상 어린 후기지수도 아닌 화산파의 중역이라 할만한 감붕이 자하검군을 향해 소리쳤다.
그걸 인정하면 어떻게 하냐는 탓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자하검군은 그런 감붕을 쳐다도 보지 않았다.
오히려 시선을 천무휘에게서 떼어 의제에게로 향했다.
“자네가…… 알고 있었네. 자네가 그 대도곽가의 소가주였다는 사실을.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겠네. 하지만 대가를 바란다면 얼마든지 치르겠네.”
의제가 앞으로 나섰다.
“그 대가라는 게 무얼 뜻하는지 아는가?”
서슴지 않고 하대를 하는 의제.
아주 가끔이지만, 의제가 이렇게 정색을 하고 무게를 잡을 때는, 그 위엄이 우리 넷 중 최고라 할 수 있다.
지금이 바로 그때였다.
“아네. 다만…… 기회를 주었으면 하네. 내 목숨 하나로…… 아무것도 모르는 제자들을 살릴 수 있길 간절히 바라네.”
“너와 감붕. 두 사람의 목숨만 받겠다. 꿇어라.”
충격의 도가니였다.
의제가 자하검군에게 하대를 할 때도 그랬지만, 당당히 또 강압적으로 꿇으라는 말을 했을 때.
모두는 그저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아 어쩔 줄 몰라 하고만 있었다.
오로지 감붕이란 놈만.
“사부님! 어찌 그러십니까? 아무리 현화천의 기세가 하늘을 찌른다고 하여도, 이렇게 우리 화산을 탄압할 수는 없습니다!”
죽기 싫어 발악하는 것 같았다.
화산이 어쩌고 현화천이 어쩌고는 그냥 핑계다.
간절히 죽기 싫은 놈이다.
다른 이를 죽일 때는 그렇게 무자비했으며 말이다.
의제가 그런 놈을 향했다.
비릿한 미소까지 머금은 의제.
“기회를 주겠다. 날 꺾어라. 너와 네 사부. 둘이 함께 덤벼 나를 꺾으면, 나의 복수는 영원히 없던 일로 하겠다.”
감붕에게는 기회였다.
그는 지체하지 않고 자하검군을 향했다.
“사부! 사부! 정신 차리십시오! 사부와 저 두 사람의 목숨이 아닌, 우리 화산의 명예가 달린 일입니다! 사부님!”
하지만 자하검군은 고개를 푹 숙였다.
다시 두 걸음 앞으로 나와, 의제를 향해 무릎을 꿇으려는 그때! 일장로 극혼검왕 범철승이 그의 어깨를 잡았다.
힘으로 그가 무릎 꿇지 못하게 한 것이다.
“사, 사형…….”
“장문인. 싸우시게. 싸워 이기시게. 그런 후 스스로 목숨을 끊어 죗값을 치르시게. 그것이 그대가 화산을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일세.”
자하검군이 뚝뚝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이는 잠시.
그가 고개를 들고 다시 몸을 곧추세웠다.
그에게서 화산파의 자랑, 엄청난 자하신공이 몰아치는 순간이었다.
“곽 대협. 빈도는 그날의 일을 평생 후회하였소. 핑계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그날의 일이 제갈세게에 알려지고, 다시 남궁세가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소. 그때부터 창궁검제 남궁비혁의 협박에 시달려야 했소. 결국…… 나로 인해 화산이 이 꼴이 난 것이오.”
자하검군의 고백은 모든 이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조금 전까지 당당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던 극혼검왕마저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난 오늘 스스로 목숨을 끊어 그대의 부친과 대도곽가의 무인들께 사죄할 것이오. 다만…… 염치없지만, 화산을 위해 다시금 대도곽가의 유일한 전인인 그대에게 칼을 겨눠야 하겠소. 진심으로 미안하오.”
의제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만 살짝 끄덕였을 뿐이다.
그리고 곧.
의제와 자하검군 그리고 감붕까지 가세한 싸움이 일어났다.
자하신공을 극성으로 끌어올린 자하검군.
감붕 역시 만만치 않았다.
장문인의 제자로, 차기 장문인 감으로 내정된 것이 다를 바 없는 무위였다.
심지어 그는 매화삼십이수를 이끄는 수장이기도 했다.
콰콰콰콰콰콰콰쾅!
쾅쾅쾅!
쿠르르르르르르르릉.
쾅쾅콰콰쾅!
의제는.
이미 진즉에 초절정 극상의 반열에 오른 상태다.
아니, 이미 한참 전에 화경의 반열에 한 발을 담그고 있는 몸이다.
일백 합의 공방이 오가기도 전.
자하검군의 목이 깨끗하게 잘렸고, 사지가 모두 잘린 감붕이 땅 위에서 검은 피를 토하며 팔딱거리고 있었다.
그의 팔딱거림은 오래 가지 못했다.
그렇게 두 사람이 인생의 끝을 맞이했다.
엄청났지만, 확실했던 싸움.
그게 끝났을 때, 화산은 고요했다.
아무도 울지 않았고, 아무도 화내지 않았다.
충격과 혼란, 그리고 뜻 모를 슬픔만이 화산에 내려앉았다.
의제는 죽은 두 사람의 시체를 잠시간 무표정하게 내려다보았다.
그런 후.
“고맙습니다, 천 형.”
“아니에요. 제가 죄송하고 고마워요, 곽 형.”
천무휘는 다시 눈물을 폭포수처럼 흘렸다.
의제는 이번에는 울지 않았다.
천무휘의 어깨를 두 번 두들겨 준 후.
그는 장내를 가득 메우고 있는 화산파의 제자들을 주욱 둘러보았다.
그게 끝이었다.
화산에 더 이상 아무런 미련도, 증오도, 그 어떤 감정도 남기지 않고 모두 털어 버린 의제였다.
“가시죠, 형님.”
“그래, 가자 의제. 수고했어.”
현화천이 있는 하남 허창이 아니라, 강서 남창으로 가야겠다.
그곳에 의제의 부모님 묘가 있다.
오랜만에 정성을 제대로 들여 제사를 지내야겠다.
아! 가기 전에.
난 천무휘에게로 다가갔다.
“천 형, 괜찮아요?”
“네, 마 형.”
녀석이 눈물을 주르르 흐르며, 또 한편으로는 미소를 지으며 그리 답했다.
“같이 가요.”
천무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업보 이야기한 적 있죠? 여기에 제 업보가 있어요. 화산을…… 새로이 일으켜 세울 겁니다. 제가 꼭 그렇게 만들 거예요.”
“천 형…….”
이 녀석, 진심이다.
아니,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다.
우리에 대한 화산파의 미움과 증오, 복수심을 모두 혼자 감당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걸 감당하며 화산파까지 개혁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이 녀석은 진짜 대단하면서도 멋진 녀석이다.
그렇게 우리는 슬프지만 감동적인 이별을…….
“네 이놈들! 다 죽여 버리겠다!”
갑자기 엄청난 사자후가 화산에 울려 퍼졌다.
단순한 사자후가 아닌, 분노와 살기가 가득 담긴 그런 사자후였다.
그리고 우리는 곧, 눈깔이 제대로 뒤집혀 정말로 우리 모두를 단숨에 난도질해 죽이려는 그녀를 보았다.
천무휘의 여동생 천예휘다.
그런데 저 계집, 벌써 화경의 경지에 올랐군.
아니, 이제 막 화경의 반열에 오른 듯하다.
폐관수련 중이라고 들었는데, 지금 막 출관한 모양이다.
광천마제 시절보다 정확히 일 년 빠르다.
그런데 어쩌지?
지금 이런 분위기 속에, 저 계집을 두들겨 팰 수도 없고.
아! 난감하네.
그런데 그때.
찰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