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6화
“어디 가냐?”
“향이 찾으러 가요.”
“앉아.”
“싫어요. 우리 향이가 혹시라도 나쁜 놈들한테 걸려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전…… 저는 더 살 수 없어요.”
“앉아, 이놈아. 나도 손님이야. 이 년 만에 온 손님한테 뭐 하는 짓이야?”
“이 년? 햇수로 이 년이지. 지난달에도 왔었잖아요.”
“그거나 저거나. 아무튼 앉아. 향이는 안전하니까.”
“누구를 딸려 보냈어요?”
“당연하지. 내 제자인데, 나라고 걱정 안 되겠냐?”
“누굴 함께 보냈는데요?”
“맹소강.”
미친! 미쳤다!
이 할망구가 분명 치매에 걸린 게 분명해!
맹소강이라니!
더 위험하잖아, 이 할망탱구야!
목까지 차오른 이 소리를, 차마 뱉을 수는 없었다.
“인경이도 함께 갔어. 아미파 국인경. 셋이 함께 있는데 뭐가 걱정이야?”
“셋이라고 해 봤자, 다들 꼬맹이잖아요. 우 여협 통계학이 뭔지 알아요? 우리 현화전주인 공손 선생이 요즘 통계학이란 걸 익히며 통계를 내 봤는데, 무림초줄이 무림에 나가 죽을 확률이 얼마나 되는지 알아요? 삼 할이에요, 무려 삼 할. 열이 나가면 셋이 죽어 돌아오는 게 무림초출의 아이들이라고요!”
“향이도, 소강이도 작년에 절정의 벽을 깼어. 너나 천무휘보다 훨씬 더 어린 나이에 그 경지에 오른 거라고. 국인경 그 아이도 완연한 절정의 고수고. 꼬맹이는 무슨 얼어 죽을 꼬맹이고 죽긴 누가 죽어?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그, 그래도…….”
“우냐?”
“울긴 왜 울어요? 걱정이 되니까 그렇지.”
“쯧쯧. 어찌 천하제일인이라는 칭호를 얻었다는 놈 소갈딱지가 이 모양인지.”
그렇다.
탄성대전 이후 세인들을 나를 향해 종종 천하제일인이라 부르곤 한다.
뭐,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가봐야겠어요.”
“왜? 네가 거길 왜 가?”
“암중 호위 몰라요? 혹시 모르니 제가 암중 호위, 그거 할 거예요.”
“젊은 아이들끼리 호기롭게 나선 길인데, 홀아비 냄새 펄펄 풍기는 네가 계속 뒤따라 다녀 봐라. 향이가 퍽이나 고마워하겠다. 그러다 우리 향이 무림에서 왕따 당해. 향이가 왕따 당하는 꼴 보려면 가고.”
털썩.
결국 울상이 되어 엉덩이를 의자에 돌려놓고 말았다.
맹소강 이 녀석!
우리 향이 손끝에 생채기라도 하나 생겨 봐라.
내 친히 그 죄를 네놈에게 물을 것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건!
소강아, 소강아.
제발…… 제발 뽀뽀는 하지 마라.
“진짜 우냐?”
“안 운다고, 쫌!”
“이게 사람들이 천하제일, 천하제일 하니까 뵈는 게 없나? 어디서 반말이야?”
“아니, 그게 아니고요. 아니에요. 됐어요. 그냥 가 보세요. 어차피 사부 만나러 온 거잖아요. 작은 사부랑 원로원에서 바둑 두고 계실 거예요. 혼자 있고 싶어요.”
“네가 가지 말라고 해도 갈 거다. 그전에, 하던 말은 마저 하고.”
“뭐요?”
“무림맹.”
“무림맹이 뭐요?”
“이 녀석이, 아까 했던 말은 귓등으로 들었나?”
“그러니까 왜요?”
“존치하라고. 현화천이 아무리 대단해도, 모든 일을 혼자서 처리할 수는 없는 거야. 그간 남궁비혁이 무림맹을 뒤흔들어 놓았지만, 무림맹이 무림사에 일천 년 동안 유지되었던 건 다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이기도 해. 마교의 발동과 같은 위험에 모두 함께 미리 대비하려는 경각심을 갖게도 해 줄 테고.”
“그러다 제이의 남궁비혁이 생기면 어쩌려고요.”
“진짜 내 말을 귓등으로 들었군. 네 사람을 앉히라고. 금 소저. 아미검후 금예지 소저. 적전제자 아니고 속가제자라며? 현화천 사람도 아니고. 그러니 반발도 적을 것이고, 당금 무림에 그만한 인물이 또 누가 있겠냐? 그러면 되잖아.”
“아, 그렇긴 하네요. 알았어요.”
“내 말 듣긴 한 거냐?”
“들었어요. 알았다고요.”
“못난 놈 같으니라고. 됐다. 난 유현 도사님 보러 갈 거다. 알아서 해라.”
“네. 가세요. 마중 안 나가요.”
“바라지도 않았다, 이놈아. 그러게 진즉 향이한테 잘해 주지. 한심한 놈, 쯧쯧쯧.”
나만큼 향이한테 잘해 준 사람이 어디 있다고 저런 소리를 하고 가는 거야?
그냥 사람 속을 왕창 뒤집어 놓고 현화천을 떠나는 무적할매였……. 어?
가다가 왜 멈춰?
혼자 있고 싶다고 했잖아.
그만 가세요, 할매.
“상대의 검이 어디로 날아올 줄은 아는 녀석이, 한낱 여인의 마음이 어디로 향해 있는지 몰라? 답답한지고, 답답해. 사내라는 녀석들은 어떻게 죄다 저리도 여자의 마음을 모를까.”
저건 또 뭔 소리야?
무적할매는 그렇게 이해하기 힘든 말만을 남겨 두고 사부에게로 갔다.
*
무적할매가 현화천을 방문한 지 어언 석 달이 됐다.
이 할매, 떠날 생각이 없다.
하나밖에 없는 제자 걱정은 하긴 하는 걸까?
매일 사부 옆에 붙어 하하 호호.
혼자 즐겁다.
그래서.
큭큭큭. 그래도 내가 또 응?
우리 향이를 그냥 보낼 수는 없지 않겠나?
그래서 오랜만에 살왕에게 연락했다.
면왕 할배 말고, 신살왕 말이다.
암중 호위하는 데 살수들만큼 적합한 이들이 또 없지 않겠는가?
반값에 내 의뢰를 받아들였고, 현재 향이와 맹소강 그리고 국인경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 살왕과 특급 살수들의 호위를 받는 중이다.
이들에 대한 정보도 매일 보고받고 있다.
녀석들.
내가 걱정한 게 다 무색해질 정도로 잘하고 있다.
아직 마두라고 부르기에는 뭐하지만, 꽤 고수급에 질이 나쁜 악당을 여럿이나 잡았다고 한다.
역시 우리 향이다, 하하!
하지만 웃고 있을 수만도 없다.
좋은 소식이 있다면 언제나 나쁜 소식도 있는 법.
우리 향이와…… 맹소강 이 녀석!
둘 사이 웃음이 끊이는 날이 없을 정도로 친하게 지내고 있다고 한다.
속 뒤집어지는 줄 알았다.
휴우. 그래도 맹소강만 한 남편감은 없는데.
이 땅의 모든 아버지들은 어떻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들을 생판 모르는 늑대 녀석들에게 줄 수 있는지, 나는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겠다.
이해하고 싶지도 않고.
그냥 기분이 그렇다.
매일이 우울이다.
“천주님! 천주님!”
정말 오랜만이다.
천주전으로 처호, 처선, 공손병 세 사람이 저런 얼굴로 들어온 게, 뭔가에 많이 놀라고 급한 얼굴이다.
뭐지? 마교가 쳐들어오기라도 한 건가?
“천무휘. 수룡검 천무휘 대협이 돌아왔습니다.”
심장이 철렁했다.
난 곧바로 신법을 펼쳤다.
초광극쾌의 속도로, 그렇게 그곳으로 향했다.
*
수룡검의 귀환이라는 소리에 현화천 앞 광장은 이미 인산인해였다.
의제와 한해북도 현장에 도착해 있었다.
그리고 그런 두 사람을 마주하고 있는 한 사나이.
야인(野人)이 따로 없었다.
덥수룩하게 자란 머리와 짐승의 가죽을 대충 이어 만든 옷.
하지만 그의 수려한 외모는 그따위로 감출 수 없었다.
천무휘다.
녀석이 진짜 돌아왔다.
난 곧바로 천무휘를 향해 달려…… 어?
툭.
천무휘가 무릎을 꿇었다.
잘생긴 얼굴보다 더 잘생긴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다.
의제를 향해 꿇은 무릎.
의제를 향해 흘리는 눈물.
“미안합니다…… 곽 형. 정말…… 정말로 미안합니다, 곽 형. 흑흑흑.”
천무휘의 슬픈 울음소리는, 의제와 한해북 그리고 나까지 나서서 말렸지만, 오랜 시간 이어졌다.
*
천무휘가 화산파를 뛰쳐나가 야인 생활에 들어간 것은 화산파의 악행을 알았을 때였다고 했다.
그 충격이 너무 커, 무엇을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고 한다.
또한 우리를 볼 면목이 없어서 숨고 피했다고 했다.
그러다 마음을 잡고 산을 내려왔을 때.
천무휘는 화산파의 악행보다 더 충격적인 사실을 접했다고 한다.
탄성대전이 끝나고, 무림맹과 소림, 남궁세가 등의 악행이 하나하나 밝혀졌다.
그리고 그중에는 화산파의 지난날 악행들 역시 모두 드러나는 중이었다.
우리에게 사과하기 위해, 우리에게 돌아오기 위해 개방에 잠시 들러 상황을 파악하려고 했을 때.
개방에서 그에게 전하지 말아야 할 정보를 전하고 만 것이다.
화산의 악행을 조사하던 중, 이십여 년 전 의제의 가문인 대도곽가가 멸문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개방에서는 이를 나에게 즉시 보고했고, 나는 개방에 이를 절대로 외부에 누설하지 말라는 함구령을 내렸다.
그런데 이 거지 녀석들이, 천무휘가 내 사람이라고 생각하여 말한 것인지 아니면 일부러 누설한 건지.
아무튼 거지새끼들이 그것을 천무휘에게 말했다.
그래서 천무휘는 큰 충격에 빠져 다시 산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의제에게 너무 미안해서.
그동안 자신에게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목숨을 맡겨도 될 우정까지 보여 준 의제에게 너무 미안해서.
볼 면목이 없어서.
도저히 산을 내려올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다 너무 괴로워, 의제에게 사과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아 결국 산을 내려오게 된 것이라고.
천주전에 나와 의제, 천무휘, 그리고 한해북까지.
딱 우리 넷만이 모였다.
천무휘는 여전히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구고 있고.
의제는 괜찮다며, 웃기까지 하며 그런 천무휘의 등을 두들겨 주고 있었다.
“곽 형, 가시죠.”
“어디를요?”
“화산. 화산으로 가요.”
천무휘의 말에 의제는 깊은 고심에 빠졌다.
하지만 곧바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마음만으로 고맙습니다, 천 형. 진심이에요. 그간 천 형이 제게 보여 준 우정이 더 크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도 복수보다는 제가 천 형과 계속 친구로 남기를 바라실 거예요. 전, 괜찮습니다. 천 형만 계속 함께 있어 준다면요.”
그때, 천무휘가 의제의 두 손을 꽉 잡았다.
이미 시뻘게진 그의 눈은 그가 지금 얼마나 진심이고 간절한지를 보여 주고 있다.
“도와주세요, 곽 형.”
“네? 그게 무슨……?”
“화산은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뼈를 깎고 살을 도려내는 고통 없이는 다시 태어날 수 없습니다. 도와주세요.”
천무휘의 의도는 명확했다.
사실 지난 탄성대전으로 화산파가 입은 피해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십 년 봉문으로 그 위세가 많이 줄어들긴 하겠지만, 화산제일검 극혼검왕 범철승이 정정하고 매화검수들이 멀쩡하다.
아니, 그들은 십 년이란 시간을 통해 더 강해질 것이다.
십 년 봉문을 풀었을 때, 화산은 순식간에 더 강한 화산으로 그 위세를 떨칠 것이 명확하다.
천무휘가 말하는 것은, 그들의 마음이다.
그들이 앞으로 가야 할 길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정의(正義), 협의(俠義), 정도(正道).
그 길을 가기 위해서는,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는 게 우선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진심으로 뉘우치기 위해서는, 분명 천무휘의 말대로 피를 보는 고통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의제의 아버지를 죽이고, 대도곽가를 멸문시킨 원흉은.
화산파의 장문인 자하검군(紫霞劍君) 이백면과 그의 제자 감붕이다.
이들은 다시 천무휘의 사숙이자 사형과 같은 존재들이다.
천무휘의 눈에서 눈물이 하염없이 계속 흐르고 또 흐른다.
의제가 그런 천무휘의 손을 맞잡았다.
평소의 의제에게서 좀처럼 보기 힘든 진지한 얼굴이었다.
“괜찮……겠어요?”
의제의 물음에 천무휘가 이제는 실핏줄이 터질 것 같은 눈으로, 소나기 같은 눈물을 펑펑 흘리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가요, 곽 형. 화산파로.”
<<광마일기>>
(상략)
나와 의제는 사패천의 고수를 구름 떼같이 이끌고 화산을 올랐다.
화산파는 감히 항거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리고 의제는.
아버지를 죽인 원흉인 감붕과 감붕의 사부인 화산파 장문인 자하검군 이백면 두 사람의 목을 베는 것으로 아버지와 가문에 대한 복수를 끝냈다.
대도곽가가 그러했듯 화산파를 멸문시켜야 했다.
어른이고 애고, 죄다 죽여도 속이 풀리지 않아야 했다.
하지만 의제는 그러하지 않았다.
결국, 의제는 단 두 사람의 목을 벤 후 화산을 내려갔다.
하지만 나는 남았다.
의제만 산 아래로 내려보낸 후.
나의 광기가 발동됐다.
화산의 장로들과 매화검수를 비롯한, 제대로 무공을 익혔다는 놈들 수십의 목을 베었다.
그날 화산에 핀 매화는 핏빛이었다.
(하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