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4화
천수신권과 마주 섰다.
이 싸움에 모든 것이 걸렸다.
백만 개의 눈동자가 조금 부담스럽기는 했지만 떨리지는 않았다.
오히려 담담했다.
그건, 내가 천수신권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 때문이다.
그리고 그때.
내 마음을 알아서였을까?
사부에게서 전음이…… 어? 전음?
우리 사부가?
-악치야.
-사부? 사부, 전음할 줄 알았어요?
-요즘 부쩍 님 자를 자주 빼먹는구나, 허허허.
-앗! 죄송해요, 사부님. 근데 진짜 전음은 언제 배우신 거예요?
-어제 우 여협이 가르쳐 줘서 배웠다. 꽤 재밌는 방법으로 말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배운 건데, 이렇게 써먹는구나. 허허허.
아! 우리 사부 말이다.
전음을 어제 처음 배웠단다.
근데 혜광심어(慧光心語)다.
하하하!
지금 내가 웃겨서 웃는 게 아니다.
하하하!
뭐, 우리 사부니까 가능하다.
이젠 놀랍지도 않다.
-그런데 왜요? 무슨 하실 말씀이 있으세요?
-전장이란 곳에서 이런 나의 생각이 옳은지 모르겠다. 다만…….
-다만 뭐요?
-난 우리 악치가 살생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음, 아! 어쩌지?
그나저나 사부가 역시나 내 경지를 정확히 꿰뚫고 있나 보다.
나와 천수신권 사이에 얼마만큼의 간격이 있는지도 보고 있고.
나에게 ‘죽지 마라, 다치지 마라’가 아니라, ‘죽이지 말라’고 하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그런데 진짜 어쩌지?
천수신권 저 인간을 죽이지 마?
진짜 제일 나쁜 놈인데?
살려두면 또 무슨 나쁜 짓을 꾸밀지 모르는데?
저 인간 때문에 죽은 사람이 수천수만 명은 될 텐데?
그래도 살려 줘야 하나?
하지만 고민할 필요 없다.
사부의 말이다.
그리고 사부의 말은 언제나 옳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지금은 더더욱 확신할 수 있다.
현재의 내 경지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그렇기에.
난 그저 따르면 된다.
-네, 사부님. 죽이지 않을게요. 그런데 저 땡중이 나쁜 짓을 좀 많이 했어요. 사람도 많이 죽고, 지금도 언어조차 통하지 않는 먼 이국땅에서 노예로 사는 사람들이 수천 명은 넘을 거예요. 그래서…… 몇 대는 때려 줘야겠어요. 그건 허락해 주세요.
-꼭 때려야 한다면…… 몸과 마음 그리고 영혼까지 지난 잘못을 참회할 수 있게 때려야 한다.
-사부님? 그게…… 좀 쉽게 설명을…… 어떻게 때리라는 말씀이시죠?
-매우…… 쳐라!
큭큭큭큭.
머리털 나고 처음이다.
사부가 나더러 누굴 때리라는 게.
그것도 그냥 때리라는 게 아니라, 매우 치란다.
내 일생을 통틀어 사부의 표현 중 가장 격렬한 표현이다.
그리고 그때, 천수신권에게서 변화가 일었다.
뭐지, 저 인간? 진짜 부처님 흉내라도 내려는 것일까?
나를 무시하기에 대화조차 시도하지 않는 건, 뭐 그냥 알겠다.
그런데 저 인간, 갑자기 허공으로 몸을 천천히 띄우는가 싶더니 이내 하늘 위, 일백 장 위의 하늘까지 올라가 가부좌를 튼다.
손동작까지 꼭…… 좌불상을 보는 듯하다.
이내 서서히, 은은히, 또 신비로운 황금빛이 그의 전신을 통해 흘러나왔다.
아까의 금강불괴 령무랑은 같지만 다른 느낌의 황금빛이다.
심지어 천수신권 이 노인네.
눈까지 지그시 감는다.
그냥 딱 절간에 있는 좌불상을 보는 듯하다.
여기저기서 그런 천수신권의 모습에 감탄성을 흘리고, 또 나무아미타불을 읊어댄다.
하! 주소수 못지않은 관심종자가 또 있었군.
가장 중요한 건, 놈이 나의 경지를 조금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저런 허세를 부릴 수 있는 것이다.
뭐, 모르면 깨우쳐 줘야지.
난 곧바로 땅을 박차고 하늘을 향해 치솟았다.
그러자 모으고 있던 오른손을 쭉 뻗는 천수신권.
그의 손에서 수장(手掌)의 형상을 한 강기가 뻗어 나왔다.
처음에는 그저 손바닥만 했던 그 장강(掌剛)이, 점점 커지는가 싶더니, 이내 나에게 다다랐을 때에는 무려 석 장 크기의 어마어마한 장강이 되어 나를 덮쳤다.
다시 말하지만, 천수신권 원욱의 별호는 천수신권이다.
장법이 아닌 권법의 고수란 뜻이다.
그리고 이는, 지금 저 노인네가 날 진짜 우습게 봐서 허세를 부리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쾅!
쿠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릉.
가뿐히 놈의 장강을 피했고, 그것이 땅을 가격했다.
광야를 넘어 저 멀리 탄성산까지 통으로 흔들릴 정도의 어마어마한 충격이었다.
하지만 당연히 이를 피해 버린 나에게는 조금의 충격도 주지 못했다.
나는 초극쾌를 넘어선 초광극쾌(超光極快)의 빠르기로 하늘 위에 떠 있는 천수신권을 향해 계속 달렸다.
곧바로 천수신권의 장강이 터져 나왔다.
하나, 둘, 열, 쉰, 일백…… 일천 개의 장강.
무려 하나하나가 열 장에 달하는, 그냥 보고만 있어도 질려버릴 엄청난 그의 장강이 온 하늘을 가득 채웠다.
하지만, 맞지 않으면 도로아미타불.
난 천수신권의 천수신장을 엄청난 속도로 달리면서도, 가뿐하게 모두 피해 버렸다.
콰콰콰콰콰콰콰쾅!
쾅쾅쾅!
콰르르르르르르르르르쾅쾅쾅!
무려 일천 개의 천수신장이 나를 맞추지 못하고, 애꿎은 땅과 허공에서 폭발했다.
땅이 수십 장이 터져 나가고, 일백 장 밖에서 싸움을 관전 중인 오십만 무인들이 혼비백산할 정도의 무지막지한 폭발이었다.
그리고 난, 이미 천수신권의 코앞에 와 있었다.
번쩍.
천수신권이 눈을 번쩍 떴다.
무슨 허세고 뭐고가 아니다.
놀라서 그리 눈을 뜬 것이다.
놈은 곧바로 장법을 버리고 권법, 그러니까 천수신권의 천수신권을 펼치려 했다.
하지만.
늦었다.
찰싹!
콰아아아아아앙!
허공에서 있는 힘껏 오른팔을 휘둘러 천수신권의 왼뺨을 갈겨 버렸다.
위에서 아래 방향으로 그렇게 갈겼고.
천수신권의 왼뺨에서 엄청난 폭발이 일어남과 동시에.
쉬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잉!
모르는 이가 봤다면, 하늘에서 유성이라도 떨어지는 줄 알았을 테다.
무지막지한 속도로, 공기의 마찰로 인해 불의 꼬리까지 그리며, 그렇게 천수신권이 땅으로 추락했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천수신권이 땅에 곤두박질쳤다.
무려 삼십 장의 깊이, 지름 일백 장에 달하는 구덩이가 파였다.
당연히 천수신권은 그 구덩이에 꽂혔고.
하지만 역시.
곧바로 펄쩍 뛰어 자세를 잡는다.
이젠 허세 따위는 없다.
놈도 제대로 놀라고 두려운 얼굴이었다.
그러면서 전력을, 진짜 자신의 제대로 된 전력을 끌어올리는 게 보였다.
자세까지 처음 권법을 수련하는 어린아이의 그 가장 기본적이지만 가장 완벽한 자세를 취했다.
나를, 진심으로 상대하려는 게 역력히 보였다.
다시 초광극쾌!
쉬이이이이이익!
찰싹!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쾅!
쿠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릉.
왼쪽 뺨을 또 때렸다.
놈이 주먹을 뻗기도 전, 내 오른손바닥이 놈의 왼쪽 뺨을 정확히 갈겨 버린 것이다.
탄성산 광야에 일백 장에 달하는 고랑이 파였다.
천수신권이 몸으로 판 고랑이다.
그 깊이는 여전히 삼십 장이나 되는 고랑이었다.
그리고 그 끄트머리.
왼쪽 뺨이 퉁퉁 부은, 어라?
쌍코피도 흘리네?
천수신권이 경악한! 말도 안 된다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그런 눈으로, 다시금 빠르게 천수신권의 기수식을 취했, 취해 보았지만.
찰싹!
놈의 왼쪽 뺨을 후려갈겼다.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쾅!
쿠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릉.
땅이 흔들렸고, 하늘이 울렸다.
다시 일백 장의 고랑이 길게 파였다.
그 끄트머리에는 이제 만신창이가 된 천수신권이.
“잠……!”
아마 ‘잠깐!’이라고 외치고 싶었나 보다.
찰싹!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쾅!
쿠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릉.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쾅!
쿠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릉.
찰싹!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쾅!
쿠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릉.
몇 대를 더 때렸다.
왼쪽 뺨이다.
천수신권의 왼쪽 뺨이 폭발하고, 다시 대지가 흔들리고, 또 하늘이 진동하는 소리밖에 나지 않았다.
내 신위에, 또 허무하게 나에게 왼쪽 뺨을 계속 내주는 천수신권을 보며.
오십만이 넘는 무인들은 눈알이 튀어나오고 입만 쩍 벌린 채,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했다.
모두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고, 그렇게 나의 일방적인 귀싸대기를 감상 중이다.
척.
반항의 눈동자 자체가 사라졌다.
그래서 축 늘어져 바닥에 철퍼덕 앉은 천수신권의 뒷덜미를 잡았다.
그런 후, 훌쩍.
삼십 장 깊이의 고랑에서 그를 잡고 땅 위로 올라왔다.
초점이 풀린 눈.
너무 아프고 너무 놀라고, 그래서 눈물조차 흘리지 못하고 있는 천수신권.
패배감을 넘어, 영혼까지 탈탈 털려 버린 얼굴이다.
하지만, 이렇게 끝낼 수는 없다.
찰싹!
내공을 싣지 않았다.
그냥 손바닥으로 때린 거다.
찰싹!
찰싹!
찰싹!
무려 오십만이 넘는 무인들이 살벌한 병장기를 들고 모인 전장이다.
하지만 이 넓은 광야에, 또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였음에도.
천수신권의 왼쪽 뺨과 내 오른손이 부딪히는 마찰음 외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정확히 아흔아홉 대를 때렸다.
천수신권은 축 늘어진 몸이었지만, 나에게 멱살이 잡혀 쓰러지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저 초점이 풀린 눈으로 나를 불쌍하게 쳐다보고만 있었다.
“아프냐?”
내가 물었다.
그러자 정신이 나간 줄 알았던 천수신권이 정말 힘겹게, 또 간신히 알아들을 수 있게 말을 했다.
“악……마…….”
“나도 아프다.”
찰싹!
정확히 일백 대의 귀싸대기를 날린 후에야 잡았던 놈의 멱살을 놓아주었다.
털썩.
맥없이 쓰러지는 천수신권.
하지만 죽지도 않았고, 혼절하지도 않았다.
반듯하게도 아니고 옆으로 쓰러져 누운 모양이었는데.
“흑흑흑흑. 흑흑흑.”
그렇게 옆으로 누운 상태로 천수신권이 울었다.
왜 우는가?
참회하는 것인지, 아니면 아파서 우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야망이 모두 물거품 된 게 억울해서 우는 것인지.
그건 천수신권만이 알 일이다.
내가 할 일은 여기까지다.
만에 하나, 오늘 이후로 조금이라도 이상한 낌새가 보인다면.
그 즉시 천수신권은 죽게 될 테다.
“나무아미타불. 마 도사님은 멈추시오!”
이미 멈췄는데 또 뭘 멈춰?
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사대금강이다.
그 뒤로 소림사의 방장 원혼 대사와 몇몇 노승들이 이들을 말리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사대금강이 격분해 내공을 전력으로 끌어올리고 나를 향해 무섭게 날아들…… 콰콰콰쾅!
정확히 주먹 네 방.
작은 사부다.
멋지게, 또 호기롭게, 다시 맹렬한 기세로 나를 향해 날아들던 사대금강이.
허공에서 각각 작은 사부의 주먹질 한 방씩을 맞고.
쉬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잉.
날아간다.
새처럼.
아! 언제 떨어지지?
내공이 약해 안력을 끌어올릴 수 없는 무인들은 보이지도 않겠다.
수십 장을 넘어 수백 장, 일천 장 밖으로 새가 되어 훨훨, 아주 훨훨 그렇게 자유를 찾아 날아가는 사대금강이었다.
쾅!
사대금강이 그렇게 보이지 않는 곳까지 날아가고, 작은 사부가 나를 등지고 땅에 착지했다.
노기 띤 얼굴.
작은 사부가 노한 얼굴로 소림사의 방장 원혼 대사를 노려보았다.
“더할 참이더냐?”
그 한마디.
오십만이 넘는 무인들은 극도의 초조와 긴장한 상태가 되어 상황을 지켜보고 있고.
소림사의 방장 원혼 대사.
두려움과 충격, 경악.
덜덜 몸을 떨고 있다.
다른 노승들 역시 마찬가지다.
결국.
터벅터벅.
원혼 대사가 다섯 걸음을 앞으로 나왔다.
그러고는 곧.
털썩.
무릎을 꿇고 양손으로 땅을 짚으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 죄송합니다, 사형. 용서해 주십시오, 흑흑.”
어깨가 크게 떨리고 있는 원혼 대사.
그의 울음소리가 모든 이들의 마음을 후벼파는 듯했다.
하지만.
“그리 간단히 끝낼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은 소림의 방장인 네가 잘 알지 않느냐? 어찌할 셈이냐?”
무릎을 꿇은 상태 그대로 원혼 대사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은 이미 눈물범벅이었다.
모두가 그의 입을 주시했다.
그는.
“소림사는…… 오십 년…… 봉문을 하겠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사형.”
“내가 아니다. 현화천의 천주에게 용서를 구하고 자비를 구하라.”
원혼 대사의 눈물 가득한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용서해 주십시오, 천주님.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원욱 사형을…… 살려 주십시오. 흑흑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