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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두가 된 이유-230화 (230/245)

230화

오십만 명이 넘는 무인들.

오늘 천하에서 무림인이라 불릴 만한 이들 대부분이 이곳에 집결하였다.

하지만, 그 어마어마한 숫자가 모였음에도 침 넘기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열다섯 장을 사이에 두고 마주 선 유령신검과 창궁검제.

오로지, 이 싸움 하나에.

그토록 시끄러운 무림인들이 숨넘어가는 소리까지 죽여 가며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유령신검이 자신의 상대로 나오자 창궁검제의 얼굴에 미소가 그려졌다.

“유령신검이군.”

그 한마디.

비웃음이었다.

또 그냥 자신감도 아닌 완벽한 자신감이었다.

그게 나에게 보였고, 모두에게 보였다.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누가 뭐래도 창궁검제 남궁비혁은 무림맹주였고 남궁세가의 세가주니 말이다.

모두가 그렇게 초조하게 두 사람을 보았지만, 유령신검은 여전히 차갑기만 했다.

“왜 그랬지?”

이 한마디.

창궁검제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를 지켜보고 또 듣고 있는 오십만에 달하는 무림인들 역시 이해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그러자 유령신검이 여전히 시선을 창궁검제에게 고정한 채 말했다.

“내 사형의 죽음. 네가 그리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자네에게 사형이 있었나? 난 금시초문인데?”

뻔뻔한 맹주.

히죽히죽 웃으며 저리 말한다.

“사십육 년 전. 우리 산서에 망나니 두 명이 왔다. 술을 마시고 무림인과 민간인을 가리지 않고 행패를 부렸다. 당시 내 사형은 그들을 나무랐다. 하지만 두 망나니는 오히려 사형에게 살수를 뿌렸다. 사형이 무력으로 이들을 제압하고, 다시금 훈계했다. 그때 그들은 잘못을 뉘우치고 올바른 길을 선택했어야 했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 그게 나라는 말인가?”

“하지만 넌!”

격앙된 목소리.

이어 유령신검이 처음으로 창궁검제에게서 눈을 떼어 저 멀리 소림사 진영의 중심으로 옮겼다.

모두가 유령신검의 시선을 따라간 곳,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는 천수신권이 있었다.

유령신검은 잠시 천수신권을 노려보는가 싶더니, 다시금 창궁검제를 향해 말했다.

“한 달이 더 지나기도 전, 사형은 복면을 쓴 수십 명의 괴인에게 죽임을 당했다. 난 그들의 정체를 사십 년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당시도! 지금도!”

시간이 정지된 것 같은 고요함.

오로지 유령신검의 분노한 목소리만이 쩌렁쩌렁 울렸다.

“천하를 향해 정의와 협의를 외치는 너희 남궁세가! 당시 소가주였던 네놈이 남궁세가 산서 분가의 고수들을 이끌고 사형을 엄습해 죽였다. 그리고 오늘! 나는 너에게 그날의 복수를 할 것이다.”

유령신검의 말은 적군과 아군을 가리지 않고 모두를 충격에 빠뜨리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짝짝짝.

창궁검제가 박수와 함께 세 걸음 앞으로 나오며 웃었다.

“재미난 이야기로군. 그런데 말이야. 증거 있나? 아니면 증인이라도?”

유령신검은 당연히 대꾸하지 못했다.

그저 분노한 눈으로 창궁검제를 노려볼 뿐이었다.

그리고 곧.

창궁검제도 분노한 음성으로 호통을 쳤다.

“네 이놈! 아무리 서로를 죽이지 못해 싸우는 상황이라도, 최소한으로 지켜야 할 선이라는 게 있다. 증거도 증인도 없이 어찌 있지도 않았던 일을 꾸며 나와 본 세가를 욕보이는가!”

“증거나 증인 따위는 필요 없다. 난 오늘, 너를 죽여 사형의 복수를 할…….”

그때였다.

쾅!

우리 측 진영 후미에서 엄청난 기운이 솟구쳐 하늘을 날더니, 단숨에 진영의 앞부분에 착지하였다.

단 한 번의 동작으로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을 수밖에 없는 고절하면서도 의도된 신법이었다.

심지어.

아! 저 아줌마가 은근히 관심받는 걸 좋아하나 보다.

전장에 나오는 아줌마가, 무복은 둘째치더라도 화려한 의복에 치렁치렁 비싼 장신구까지 한가득 달고 나왔다.

화장도 평소보다 몇 곱절 짙고.

그렇다. 구음신녀문의 주소수였다.

“증인! 여기 있다.”

주소수의 등장에 창궁검제가 인상을 잔뜩 구겼다.

“화양문의 가모 아니신가? 극양신장은 어디로 가고 여인이 나서는가?”

좀 위험한 발언이었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엄청난 수의 여고수들도 일단 상황을 주시하고만 있었다.

주소수가 다시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표독스러운 미소와 함께 말했다.

“흥! 사십여 년 전, 귀주에서 침을 질질 흘리며 나를 꼬시려고 발악할 때는 언제고, 이제는 완전히 모른 척이네?”

“말이 심하군.”

“기억 안 나? 그때 나한테 엄청나게 맞았던 거. 너하고 저기 저기 빡빡머리 천수신권. 둘 다 그 이름도 없었던 작은 산장에서 나한테 맞아 바닥을 구르며 엉엉 울면서 살려 달라고 빌었잖아. ‘엉엉. 살려 주세요, 여협. 잘못했어요, 여협. 엉엉엉. 살려 주세요.’ 호호호! 너랑 천수신권이 그때 나한테 그렇게 울고불고했던 거, 정말 기억 안 나? 호호호호!”

“갈! 여인이라도 참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말을 삼가라!”

창궁검제가 짐짓 위엄을 갖춰 호통을 쳤다.

하지만 그게 어디 주소수에게 통하겠는가?

주소수는 가볍게 비웃음을 날려 준 후, 소림 진영에 있는 천수신권을 향했다.

“너! 너는 기억나지? 그때 저 남궁 뭐시기가 피투성이가 되어 바닥을 구른 후에야 짜잔 하고 등장해서 구해주려고 하다가, 같이 두들겨 맞았잖아. 쌍코피 터지고, 눈물이랑 콧물까지 범벅이 되어 나한테 손바닥이 발바닥이 될 때까지 빌었던 거. 너는 기억하지?”

무려 오십만 명이 넘는 시선이 일제히 천수신권에게로 향했다.

아! 저 땡중, 고수다.

웃는다.

그냥 미소가 아니라, 정말 재밌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또 너무 웃긴 사람을 보았다는 듯.

그렇게 웃기만 한다.

“둘 다 오리발이군. 됐어. 창피하겠지. 숨기고 싶겠지. 그래서 나와 내 부군이 그 산장을 떠난 후, 살인멸구를 위해 산장 사람들과 산장에 머물고 있던 손님 십여 명을 모두 죽였겠지. 안 봐도 뻔하다. 귀주에서 그런 짓을 저질렀는데, 산서에 가서 달라졌겠어? 사악한 악마들.”

“갈! 네 이년! 네가 정녕 사지가 찢어 죽어야 정신을 차리겠느…….”

창궁검제가 제대로 분노한 목소리로 당장에라도 달려가 주소수를 찢어 죽일 듯 호통을 쳤다.

하지만 그는 말을 끝맺을 수 없었다.

콰아아아아아아앙!

갑자기 우리 진영에서 또 다른 인영이 하늘로 솟구쳤다.

조금 전 주소수의 신법이 고절하고 우아했다면, 이번에 펼쳐진 신법과 기세는 그야말로 하늘과 땅을 모두 압도할 만한 그냥 괴물 같은 신위였다.

하늘 위로 치솟은 사내.

곧이어 수십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하늘 위에 두 개의 태양이 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극양신장이 제대로 분노하여, 천지만물을 모두 집어삼킬 무지막지한 화염을 뿌리며 하늘에 떠오른 것이었다.

이게 사실 그렇다.

아무리 집 안에서 서로 죽일 듯 싸우고 원망하고 증오해도 말이다. 일단 집 밖에서 누군가 내 가족 욕을 하면, 그것만큼 화가 나는 일이 없다.

주소수와 극양신장의 사이는 누가 뭐라고 해도 부부가 맞는 모양이다.

하지만 극양신장의 분노는 창궁검제에게 닿지 못했다.

“오 대협!”

“여보!”

유령신검이 양보를 부탁하는 눈빛을.

동시에 주소수가 나무라는 음성으로 극양신장을 부른 것이다.

쾅!

하늘 높이 떠올랐던 극양신장이 땅으로 착지했다.

그의 몸에서는 여전히 무지막지한 화염이 치솟고 있었다.

하지만 창궁검제를 유령신검에게 양보할 생각인 듯, 공격할 자세를 취하지는 않았다.

대신 극양신장이 창궁검제를 향해 눈을 부라리며 모두가 들으라는 듯 목소리에 내공을 실어 선언했다.

“오늘부로 남궁 성씨를 가진 자는 내 눈에 띄지 마라. 남궁 성씨를 가진 자는 보이는 족족 그 혀를 뽑아 소금에 절여 버릴 것이다.”

실로 엄청난 기세로 그렇게 창궁검제와 남궁세가를 협박하는 극양신장.

“그만 가요. 저놈은 어차피 월 대협 손에 죽어요.”

주소수가 그런 극양신장을 말리며 팔짱을 끼고 우리 진영으로 돌아왔다.

아니, 몇 걸음을 걸었을 때 극양신장이 걸음을 뚝 멈추고는 다시 뒤를 돌아 창궁검제를 향했다.

그리고.

“그날 분명히 보았다. 그날 뒤늦게 부인을 말리기 위해 나왔을 때, 나를 보던 너와 천수신권의 눈빛. 나를 보자마자 겁에 질려 덜덜 떨며 오줌까지 지렸지. 그때 나의 부인에게 추근댔던 너희를 내가 왜 죽이지 않았는지 아느냐? 불쌍해서였다. 너희가 지린 오줌이 더러워서였고.”

창궁검제는 노련하다.

능구렁이다.

하지만 이번 극양신장의 말만큼은 그 화를 다 숨기지 못했다.

그가 분노하여 부들부들 떠는 게 똑똑히 보였다.

심지어, 당장에라도 극양신장을 죽이겠다는 듯 움직이려 했다.

그 길을 막은 것은 당연히 유령신검이었다.

“끝까지 오리발을 내밀겠다면 내밀어라. 하지만 오늘 네가 죽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너부터…… 죽이고 저 연놈의 목을 베겠다.”

창궁검제에게서 무지막지한 기운이 폭발하였다.

그가 검을 뽑자, 그 검에서 무려 삼십 장에 달하는 청룡이 치솟아 세상을 집어삼킬 듯했다.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모든 것을 압도했다.

적진과 우리 진영을 가리지 않고, 창궁검제의 무지막지한 신위에 모두가 입을 쩍 벌리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동시에.

유령신검이 사라졌다.

콰콰콰콰콰콰콰쾅!

쾅쾅쾅쾅쾅!

콰콰콰콰콰콰쾅쾅쾅!

실로 엄청났다.

하늘을 뒤덮을 것 같은 청룡은 사방을 날아다니며 보이지 않는 유령과 격돌했다.

그때마다 땅이 터지고 하늘이 터지는 무지막지한 폭발이 일어났다.

한 번 한 번, 유령과 청룡이 격돌할 때마다 지진이 일고 하늘에 천둥과 번개가 몰아쳤다.

그야말로 신의 싸움이라 불릴 만한, 실제로 그리 볼 수밖에 없는 엄청난 대결이 모두의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것이었다.

유령신검은 보이지 않았다.

가까이라면 모를까, 수십 장 밖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는 나조차 그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그럼에도 창궁검제의 손발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뿜어 대고 있는 검의 청룡은, 정확한 목표를 찾으며 맹렬한 기세로 공격을 이어 갔다.

그렇게 일백 합이 지나고, 다시 이백 합과 삼백 합이 지났을 때.

서서히 싸움의 우위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완벽하게 자신의 몸을 숨겨 청룡의 공격을 피하고, 다시 빈틈을 집요하게 공격하던 유령신검.

그의 모습이 흐릿하지만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동시에, 창궁검제의 거대한 청룡은 이제 짙은 죽음의 기운까지 뿜어대며 유령신검의 마지막 숨통을 끊어 놓으려 했다.

“천주님!”

“마 천주!”

유령신검이 본격적으로 밀리기 시작하자, 내 옆에 있던 만검존부터 시작해 예지와 극양신장, 주소수 등 여럿이 나를 다급히 불렀다.

도와주려는 것이다.

하지만 난 그들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여전히 유령신검과 창궁검제의 싸움을 지켜보며, 왼손을 들었다.

나서지 말라는 손짓이고 명령이다.

내 명령에 모두는 조바심을 내고 또 초조해하면서도 경거망동을 삼갔다.

전장에서 항명은 죽음이다.

읍참마속(泣斬馬謖)이라 하여, 삼국시대 제갈공명은 자신이 가장 아끼는 수하였던 마속의 목을 베었다.

그의 명을 어겼기 때문이다.

군율은 지엄하고, 승리를 위해서 장수의 명은 반드시 따라야 한다.

모두가 알고 있고, 그렇기에 유령신검의 목숨이 경각에 달한 상황 속에서도 나서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난, 며칠 전 유령신검과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월 대협, 이길 수 있어요?”

“이겨야 하지 않겠나?”

“지면 목숨은 둘째치고, 저승에 가서도 쪽팔려서 사형 얼굴 못 볼 거예요.”

“훗, 그렇지. 그러니 꼭 이겨야지.”

“웃는 거 보니, 숨겨 둔 비장의 무기가 있군요?”

“사형이 살아 있을 때 나에게 자주 이런 말을 했다네.”

“무슨 말이요?”

“우리 유령문의 무공에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고.”

“그게 뭔데요?”

유령신검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미 알 텐데?”

나도 피식 웃으며 답했다.

“몰라요. 몰라서 묻는 거예요.”

다시 유령신검이 짙은 미소와 함께, 젊은 날 자신의 사형과 나누었던 대화를 회상하는 얼굴로 말했다.

“우리 유령신공은 진짜 강한 적을 만나게 되면 무너지게 된다고, 자연의 기운에 동화되어 나와 나의 기운을 사라지게 만들어야 하는데, 그 대자연의 기운마저 찢어발길 진짜 고수를 만나게 된다면, 나와 내 기운을 숨기는 것은 분명한 한계에 부딪히게 된다고 했네.”

“설마…… 사형 분께서 그 해법을 찾으신 거예요?”

유령신검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고개를 두 번이나 끄덕이며 내게 말했다.

“미완성이었지. 만약 사형이었다면, 나보다 십 년이나 이십 년은 먼저 완성했을 거야.”

“그럼 지금은…….”

그가 이제는 더없이 환이 웃으며 말했다.

“완성했네. 사형이 남겨 두고 간 그 숙제, 다행히 내가 최근에 완성할 수 있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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