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화
“천 형.”
“네, 마 형.”
천무휘와 예지가 오랜만에 우리 현화천으로 놀러 왔다.
이미 며칠이 됐다.
의제와 한해북까지 함께 우리는 요 며칠 정말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는…… 개뿔!
며칠 동안 또 예지를 사이에 두고 치열한 신경전을 벌였다.
“부탁이 있어서 천 형만 따로 불렀어요. 오랜만에 놀러 왔는데 이런 부탁 해서 미안해요.”
“하하. 마 형도 가끔 보면 쓸데없는 것에 미안해하고 그런다니까요. 우리가 남도 아니고, 뭐든 필요하면 말해요.”
응, 아니야. 이번엔 네가 틀렸어.
진짜 미안해서 그래, 무휘야.
이건, 아! 정말 미안하다, 천무휘.
나중에 나 한 대 때려도, 그냥 참고 맞을게.
아니, 열 대 때려도 돼.
진짜 미안해.
“우리 현화천에 스스로 천하제일고문가라는 자가 찾아와 투신하겠다고 했어요. 옥면화화랑 홍민이란 자입니다.”
천무휘가 고개를 갸우뚱한다.
“들어 본 적 없는데요?”
“현안전 공손병 전주의 말에 따르면, 유명하지는 않지만, 암암리에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실력자가 맞다고 해요. 그런데 문제는, 아직 그자의 의도가 순수한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아, 그래요? 그런 일을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이 정말 있군요. 그래서 제가 무얼 하면 되는데요?”
“의제나 한해북은 부천주직을 맡고 있으니 그자에게 붙여 속내를 알아보게 하기 어렵고. 예지는…… 예지가 고수지만 상대도 천하제일고문가라 불리는 자잖아요. 위험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요.”
“그렇죠. 우리 예지에게 그런 위험한 일을 시키면 안 되죠.”
응, 아니야.
예지는 하나도 안 위험해.
홍민은 예지 쳐다도 안 봐.
네가 더 위험해.
“그래서 천 형이 좀 나서줬으면 좋겠어요. 그냥 돌려보내기에는 너무 아까운 인재고. 또 그냥 받아들이려고 하니, 조금 꺼림칙하고. 천 형이…… 음, 그러니까…….”
“정확히 제가 어떻게 하면 되죠?”
“그냥 평범하게 다가가서 같이 식사도 하고, 거리도 거닐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누고. 아! 그렇지. 저기 탄성산 아래로 흐르는 물이 탄성호수로 이어지는데, 거기 경치가 끝내주더라고요. 제가 좋은 자리 미리 마련해 놓을 테니까, 거기서 그 홍민이란 자와 술도 한잔하고. 뭐, 그냥 평범하게 이런저런 대화도 나누고…….”
“아! 알겠어요. 무슨 말인지. 그렇게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다 보면, 상대의 마음도 알고, 그 속내도 알고. 혹시 다른 꿍꿍이가 있는지 없는지, 저에게 한번 떠보라는 말이죠?”
“네, 천 형. 해 줄 수 있어요?”
“에이, 난 또 무슨 엄청나게 어려운 일이라고. 그냥 그 홍민이란 자와 하루 함께 보내라는 거잖아요. 하하하! 염려 마세요.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그자와 꼭 붙어 있을 테니까요.”
“잠, 잠깐!”
“네? 왜요?”
“꼭 붙어 있지는 마요. 너무 늦은 시각까지 있지도 말고요.”
“그게…… 왜요?”
“그, 그냥요. 그러니까…… 아! 신통력. 내 신통력이 지금 그렇게 말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적당히 거리를 두고. 날이 어두워지면 즉각 헤어지고. 또…… 맞다. 절대로 방 같은 데 단둘이 들어가고 그러지는 말아요. 알았죠, 천 형?”
“아! 마 형의 신통력이 그리 말한다면 절대로 지켜야죠.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당장 내일 제가 홍민이란 사람과 만나볼게요.”
“고마워요, 천 형.”
미안하다, 천무휘.
나중에 열 대가 아니라 백 대 때려라.
그냥 다 맞아 줄게.
이번 생이 아닌 전생의 약속이지만, 지킬 건 지켜야 하지 않겠나.
그래서 나는 눈물을 머금고, 천무휘를 홍민에게 보냈다.
명복을 빈다, 내 친구 무휘야.
*
소림사의 힘은 실로 대단했다.
내가 무얼 상상했건, 소림사는 언제나 그 이상을 보여 줬다.
단지 물리적인 힘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소림사가 움직이고, 천수신권이 전면에 등장하자.
해체 직전이었던 무림맹이 순식간에 똘똘 뭉치기 시작했다.
심지어 우리 현화문과의 관계를 끊고 무림맹으로 투신하는 고수와 문파들까지 적지 않게 생겨났다.
무림맹은 수백 년 이래 가장 강력한 힘을 끌어모으는 중이다.
그리고 이건, 또다시 무림의 핵이라 불리는 하남의 세력 판도를 바꾸어 놓았다.
이제는 일 대 이다.
원래도 그랬지만, 사실 그전의 소림사는 두문불출이었고 무림맹은 비실댔다.
그런데 지금 하남 무림은, 우리 현화천 하나가 강력해진 무리맹과 더 강한 소림사라는 두 세력을 동시에 상대하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남궁비혁이 무림맹주직을 내려놓고 안휘의 남궁세가로 돌아가고 몇 달.
그 자리는 천수신권이 차지했고, 그에 의해 무림맹이 움직이고 있다.
그리고 그가 맹주직에 앉은 후, 요 몇 달 사이 무림맹과 우리 현화천은 곳곳에서 크고 작은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또 곳곳에서 대놓고 우리와 반목하며 무림맹을 지지하는 세력이 등장했다.
화산파가 그 첫 번째였다.
현재 화산에 가 있는 천무휘가 꽤 큰 충격을 받았을 것 같아, 더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다음으로 종남파가 무림맹 지지 선언을 했고, 곧바로 남궁세가를 비롯한 오대세가가 동시에 무림맹의 지지를 선언했다.
단순히 무림맹 입맹이 아닌, 그들의 지지 선언에는 분명한 전언이 포함되어 있다.
우리 현화천을 적대시한다는, 현화천이 무림맹에 굴복하여야 한다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경고가 담겨 있었다.
우리라고 가만히 있지 않았다.
무당과 아미파에서 무림맹 탈맹 선언을 함과 동시에 우리 현화천지지 선언을 했다.
곧바로 극양신장의 화양문과 유령신검의 황룡회가 이어서 지지 선언을 했다.
곤륜, 공동, 청성, 점창과 개방에서는 아무런 선언도 없었다.
다만, 개방과 하오문에서 은밀히 나에게 사람을 보내 왔다.
표면적으로 움직일 수는 없지만, 우리를 돕겠다는 약속을 하고 떠났다.
천수신권이 무림에 등장하고 몇 달이 지나기도 전, 무림은 소림을 위시한 무림맹과 우리 현화천이라는 양강 대결 구도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천주님.”
처호, 처선, 공손병이 의미심장한 얼굴로 천주전을 찾아왔다.
“무슨 일이죠?”
“십합단, 현재는 창궁무적대의 언묵 단주에게서 전갈이 왔습니다.”
“지금 맹주직에서 물러난 남궁비혁을 따라 남궁세가에 가 있죠?”
“얼마 전까지는 그랬습니다.”
“남궁비혁이 또 다른 곳으로 움직였단 말인가요?”
“무림맹으로 복직하였고, 십합단 역시 그를 따라 무림맹에 복직하였습니다.”
“그게 가능해요?”
“천수신권이 그를 불러들였다고 합니다. 무림맹은 물론, 무림맹 밖에서도 남궁비혁의 복직을 두고 이견이 없었다고 합니다. 곧 부맹주직에 오를 것으로 예상한다는 언묵 단주의 전갈이었습니다.”
“음, 천수신권과 소림이 대단하긴 진짜 대단하군요.”
“소림의 힘과 명성은 일천 년 무림사에서 언제나 태산북두라 불렸으니 그럴 만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들이 대단하다고 하여도 천주님께 비할 바는 아닙니다.”
“우리 처호 선생이 듣기 좋은 말도 해 주고, 고맙네요.”
“전 언제나 사실만을 말씀드립니다, 천주님.”
그렇다.
우리 처호는 광천마제 시절의 처선과 똑같다.
빈말은 일절 하지 않는다.
나를 실제 그렇게 판단하고 있다는 뜻이다.
고맙고 기뻤다.
내가 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뜬금없이 남궁비혁은 왜 무림맹으로 불러들인 거죠? 겉으로야 반발이 없다고 해도, 내심 거부감을 갖는 사람들도 분명 있다는 것을 천수신권이 모를 리 없을 텐데요.”
“언묵 단주의 보고에 따르면 본격적으로 그들이 움직일 생각인 모양입니다.”
처호에 이어 공손병이 말했다.
“언묵 단주의 전갈을 받은 후 곧바로 개방과 하오문 그리고 본 천의 정보력을 총동원했는데, 그 말이 사실인 것으로 보입니다. 무림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아무래도 곧, 천하 무림이 이곳 탄성산으로 몰려들 듯합니다.”
“끝장을 보겠다는 뜻이군요.”
“그렇습니다, 천주님. 최후의 대결을 준비하셔야 합니다.”
“우리 측 준비는요?”
이번엔 처선이 답했다.
“치밀한 연락망을 수시로 시험 가동하여 즉시 움직일 채비를 갖추고 있습니다.”
“본 천의 모든 이들에게 배첩을 돌리세요. 함께 싸우자고.”
“존명!”
*
배첩을 돌린 후 가장 먼저 우리 현화천을 찾아온 이들은 다름 아닌 사파인들이었다.
흑봉, 염사, 태랑, 소혼, 혈불.
사도오두(邪道五頭)라 하여, 사도를 이끄는 이들이었다.
그들은 내게 감정에 북받친 상태로 간청하였다.
“천주님과 현화천의 이름으로 천하 각지에 산재하는 사파인을 모으게 허락해 주십시오!”
“천주님께서 허락만 해 주신다면, 선봉에서 적들을 맞아 용맹하게 싸울 사파의 고수 삼십만 명을 모아 오겠습니다!”
삼십만 명.
과장이 아니다.
언제나 무림에 영웅이라 불리며 명성을 날리는 것은 정파의 고수들이다.
알려진 문파도 죄다 구파일방 오대세가 같은 곳 아니겠는가?
그래서 무림 하면 그냥 정파라고 생각하는 게 잘못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숫자를 정확히 셈하여 본다면, 무림사에서 사파인들은 언제나 정파의 숫자에 부족함이 없었다.
제대로 무공조차 익히지 못한 왈패들까지 합친다면, 정파의 몇 곱절은 되고도 남을 것이다.
사도오두, 사파의 다섯 대가리.
사파에서 가장 영향력 있고, 가장 유명한 자들.
또 나에게 충성 맹세를 함으로써, 더 이상 정파의 눈치를 봐도 되지 않을 자들이 바로 이들이었다.
그들이 지금 천하의 모든 사파를 하나로 뭉칠 수 있게 허락을 구하는 중이다.
“좋소. 그리해 주시오. 기대하고 있겠소.”
“감사합니다, 천주님!”
내가 쉽게 허락하자 사파의 다섯 우두머리는 감개무량하여 몇 번이나 고개를 조아린 후에 천주전을 떠나 천하 각지로 흩어졌다.
난 의제와 한해북, 그리고 왕대에게 그들을 도우라 명했다.
*
어느 날 시전에 이런 소문이 돌았다.
현화천은 가짜다.
현화지존이라 불리는 현화천의 천주 마악치는 현화문의 제자가 아니다.
현화문이 어디에 붙어 있는지도 모르는 가짜다.
뭐, 뻔했다.
무림맹의 수작질이었다.
곧이어 이런 소문도 있었다.
왕대는 마교에서 보낸 간자다.
마악치가 중원 무림을 마교에 통으로 바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
아니다.
마악치가 지금 사파인들을 끌어모으고 있다.
사파천하를 만들 속셈이다.
지옥이 될 것이다.
아니, 이미 지옥이다.
사파 세력을 규합해 무림맹을 무너뜨린 후 무림을 마교에 바칠 것이다.
사람이 살 수 없는 끔찍한 지옥이 도래하게 될 것이다.
소림사의 천수신권께서 그런 현화천의 악랄한 음모를 막으려 하신다.
칼을 들 수 있는 모든 자는 당장 무림맹으로 모여라.
부처님께서 너희를 보우하실 것이다.
부처님의 가호와 축복이 있을지어다.
현화천을 막기 위해 모두 함께 들고 일어나야 한다.
현화지존 마악치는 실제 인간이 아닌 마귀다.
기타 등등등.
뭐, 예상했던 일이라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이미 준비해 놓은 계책으로 어느 정도 수습도 했고.
무림맹에서는 있지도 않은 명분을 만들 속셈인 것이다.
확실히 음흉한 남궁비혁이 무림맹으로 돌아오자마자 일 하나는 제대로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를 바라보는 민심.
믿는 이는 믿고, 그렇지 않은 이들은 믿지 않았다.
어차피 사람이란 게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존재 아니겠는가.
아무리 명확한 증거와 사실을 보여주고 말해도, 그들은 보지 않고 듣지도 않을 것이다.
내가 입으로 똥을 싼다고 해도 믿고 싶은 사람은 믿을 것이란 뜻이다.
상관없다.
결국 이 싸움은 누군가 죽어야 끝이 날 테다.
이런 뜬소문 따위야, 무엇이 진실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무림에서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는 방법은 명확하다.
살아남아라.
그러면 그자의 말이 진실이 될 것이다.
그게 바로 무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