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5화
구양봉막은 나보다 쉰한 살이 많다.
처음 봤을 때도 오늘내일하던 노인네였다.
귀정사로 보낸 것도 그를 잡아 두기 위함도 있었지만, 그냥 그곳에서 조용히 또 편하게 생을 마감하라는 의미도 있었다.
그런데 이 노인네, 아직까지 멀쩡하게 살아 있다.
올해로 정확히 팔순이다.
여전히 내가 보고 느끼기에는 오늘 밤 당장 죽어도 하나 이상하지 않은데, 안 죽는다.
결국 작은 사부가 귀정사를 떠나 우리 현화천으로 올 때 구양봉막도 함께 데리고 왔다.
현화천의 외원에서도 변두리, 현화천의 잡역을 하는 일꾼들 바로 옆에 초가 한 채를 내주었다.
우리가 공짜 밥을 주고 할 사이는 또 아니지 않은가.
그래서 그냥 항마연구각(降魔硏究閣)의 각주라는 이름도 내주었다.
그냥 혼자 온종일 마공의 파훼법을 연구하고 기록을 남기는 자리다.
몇 번 그에 관한 보고를 받았는데, 노인네가 무공에 미친 노인네가 맞긴 하다.
여전히 무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했나 보다.
마교의 마공에 대한 파훼법을 몇 달 동안 책자로 열 권을 넘게 남겼다고 한다.
사실 아무리 나쁜 짓을 많이 했어도, 언제 죽을지 모를 노인네 아닌가.
그래서 좀 편히 있다가 가라고 배려해 준 건데, 너무 열심이었다.
그리고 마월성과의 싸움을 위해 현화천을 떠나던 날.
난 구양봉막을 마차에 태워 데리고 왔다.
저 멀리, 우리와의 싸움을 위해 마월성 밖으로 나와 진열을 정비하고 있는 마인들이 눈에 들어왔다.
“어때 보이오?”
“천마신교의 혈수마종 육시위가 맞군. 어렸을 적부터 대단한 무재를 가지고 있던 녀석이라, 어쩌면 교주가 될지도 모른다는 말이 있던 아이네. 그래서 나도 눈여겨봤었지. 결국 마교를 도망쳐 중원에서 죽게 됐군.”
“나머지 두 명은?”
“누구?”
“저기 저 대머리하고 저기 대도를 든 덩치. 둘 다 극마의 벽을 깼다고 하더이다.”
“음, 처음 보는 놈들인데? 아무리 나라고 해도 마교 사람들 전부를 알 수는 없지 않겠나? 더군다나 수십 년 전에 떠난 몸인데.”
“그렇긴 하겠군. 저들의 무공은 어때 보이오?”
“뭘 물어? 자네도 이미 감지했으면서. 아수라혈천신공 맞아. 내가 평생 바쳐 익히고 연구한 신공이야. 틀릴 수 없지. 다만…….”
“다만?”
“새 전각을 지었는데, 기둥은 뒤틀려 있고 벽에는 벌써 쩍쩍 금이 가고 있군. 짝퉁이야. 어설픈 실력으로 구대 마교주께서 평생에 걸쳐 완성한 아수라혈천신공을 변조시키려다가 저렇게 같잖은 짝퉁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지. 가만 내버려 둬도 자멸할 거야.”
“나도 그러고 싶은데, 미치광이들이 주변 민가 사람들을 해친다고 하더이다.”
“그래서? 지금 저놈들과 전면으로 붙겠다고?”
“왜? 안 되오?”
“이길 수는 있지만 손해도 만만치 않을걸?”
“어찌 그리 생각하시오? 나와 만검존 그리고 왕대가 있는데.”
“자네 작은 사부를 부르지 그랬나? 그랬으면 혼자 다 쓸어 버렸을 텐데, 쯧쯧쯧.”
“쩝. 나도 살짝 후회하는 중이니, 이미 지나간 일은 언급하지 맙시다. 그런데 저들이 그리 강합니까? 짝퉁이라면서요?”
“저치들 눈을 봐. 죄다 혈광이 슬금슬금 흘러나오고 있는 거 보여?”
“짝퉁 아수라혈천신공 때문에 주화입마에 빠져 그러는 거 아니오?”
“휴우. 자네 내가 항마연구각에서 집필한 마공파훼대전집(魔功破毁大全集) 안 읽었지?”
“어험, 공사가 다망한지라.”
“거기에 기록했어. 혈광폭증단(血光暴增丹)이라고.”
“그게 뭐요?”
“가만, 이건 역대의 교주들하고 나만 아는 사실인데?”
“엥? 그건 또 무슨 말이오?”
“천마비고에서도 금기마공고에 있는 기록이야. 교주 외에는 아무도 볼 수 없다는 뜻이지. 나야 몰래 본 거고. 저기 마황이라는 자, 혈수마종 말이야. 저자가 아무리 천마신교에서 삼장로였다고 해도 혈광폭증단을 만들 수 없어. 제조법은 물론, 그 존재 자체도 몰라야 한다고.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만든 거지?”
“무림맹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군.”
“맹주? 이번 일을 맹주가 꾸민 일인가?”
난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일천 년 동안 이어진 마정대전(魔正大戰)을 통해 혈광폭증단을 사용했을 수도 있고, 그때 그 제조법을 알아내 무림맹에서 보관했을 수도 있었겠군. 음, 지독한 놈이네.”
“그래서 혈광폭증단이 어떤 거라는 말이오?”
“저 치들, 싸움이 시작되면 일신에 지니고 있는 무공의 최소 두 배에서 최대 삼십 배까지 그 힘을 사용하게 될 거야. 물론, 그렇게 힘을 모두 쏟고 나면 며칠을 버티지 못하고 끔찍한 고통 속에서 죽겠지만. 그래서 맹주란 자가 지독하다는 거야. 저들을 처음부터 그냥 죽일 작정이었던 것이지.”
“음…… 삼십 배? 진짜요?”
“내가 거짓말하는 거 봤나?”
“우리 피해가 꽤 되겠군요.”
“아무리 자네와 만검존, 왕대가 대단해도. 최소한 자네 뒤에 있는 저 수천 명의 무인 중 절반은 죽을 걸세. 최소한이 그 정도야.”
아! 씨X.
X 됐다.
지금이라도 작은 사부를 부를까?
그러면 너무 늦는데.
어쩌지?
“대장 나와라! 누가 대장이냐?”
왕대였다.
왕대가 홀로 성큼성큼 적과 우리 진영의 중간지점까지 가더니, 그렇게 호기롭게 외쳤다.
마월성 마인들 사이에서 더러운 욕설과 비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마황, 혈수마종 육시경이 눈에서 혈광을 뿌리며 걸어 나와 왕대와 대치했다.
“네가 나쁜 놈 대장이냐?”
“묻기 전에 자신을 먼저 밝혀라. 예법도 모르는 무식한 놈아.”
“난 왕대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지? 내가 무식한 거? 누가 말해 줬냐?”
“크하하하!”
“저 새끼 봐. 미친놈이야, 하하하.”
다시금 마월성 마인들 사이에서 엄청난 조롱과 비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왕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저 혈수마종을 노려볼 뿐이었다.
“쯧쯧, 대장전을 바라고 나온 모양인데. 불쌍한 놈이었군. 고통 없이 보내 주마.”
“난 어디에도 안 간다. 난 나쁜 놈을 혼내 주고 간다. 우리 주인님이 말씀하셨다. 넌 어린아이를 괴롭히는 나쁜 놈이라고. 왕대가 널 혼내 준다.”
“쯧! 죽어라!”
혈수마종이 몸을 날렸다.
동시에 그에게서 핏빛 기운이 터져 사방을 뒤덮었다.
땅과 하늘 그리고 대기.
오로지 그의 핏빌 혈기만이 존재하는 듯하였다.
확실히 마교의 삼장로 자리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닌 듯했다.
하지만 조금도 걱정되지 않았다.
왕대는 찐이니까.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쾅!
쾅쾅쾅!
콰콰콰콰콰콰콰쾅!
정말 순식간에 수십 방의 공방이 오갔다.
하늘이 울렸고, 땅이 흔들렸다.
조금 전까지 왕대를 비웃던 적들의 입이 쏙하고 닫히는 순간이었다.
“네 이놈!”
왕대의 엄청난 실력에 혈수마종이 대노하여 사자후를 터뜨렸지만, 왕대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아니, 계속하여 마교의 삼장로 출신에 혈광폭증단까지 복용한 혈수마종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마월성 마인들의 눈빛이 흔들리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콰콰콰콰쾅!
쾅쾅쾅쾅쾅쾅콰르르르릉!
쾅쾅쾅!
왕대와 혈수마종은 땅과 하늘을 오가며 수백 방의 공방을 펼쳤다.
연신 왕대가 몰아붙이고 있지만, 혈수마종도 만만치 않았다.
칼에 베여 뼈가 드러나고, 움직일 때마다 소나기 같은 피를 뿌렸지만, 그는 굴하지 않고 왕대와 싸웠다.
아! 그나저나 큰일이다.
왕대가 우위에 있음은 아군과 적군 모두 똑똑히 보고 있다.
수십 합, 혹은 수백 합 후에 혈수마종의 목이 떨어질 것이 자명해 보였다.
그렇다면 적들은 사기가 꺾이고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하지만 역시나 혈광폭증단 때문일까?
아니면 저들이 원래 마인이라서 그런 것일까?
저들의 눈에는 두려움 대신 가득한 흥분만이 보이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아군의 피해가 더 극심해질 수밖에 없다.
“방법, 없겠소?”
혹시나 해서 구양봉막을 향해 물었다.
그는 왕대의 싸움을 보느라 영혼이 빠져나간 상태였다.
“이 양반아, 좋은 방법 없겠냐고?”
내가 재차 다그치듯 물었다.
그제야 듣는 시늉을 하는 그였다.
“퇴각해. 후퇴. 그러면 절반은 살릴 수 있어. 하아! 난 싸움을 보고 싶지만, 그래도 자네가 집도 주고 밥도 줘서 알려 주는 거야.”
“그거 말고 다른 방법은?”
“없어. 자네 작은 사부가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다면 모를까. 없어. 방법 같은 건. 그러게 애초에 마교와 마공을 경시하지 말지 그랬어. 쯧쯧. 어이쿠, 왕대가 이긴다. 왕대! 힘내라! 우리 왕대! 최고다!”
구양봉막은 다시금 왕대의 싸움에 정신이 팔리고 말았다.
내 마음은 더더욱 초조해졌다.
그런데 그때.
“이런 육시랄 놈이!”
마월성의 또 다른 극마의 고수.
그가 대도를 마구 휘두르며 허공을 가로질렀다.
혈수마종이 위급해 보이자, 그가 나선 것이다.
하지만 그는 왕대의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초극쾌.
빛보다 빠른 움직임의 사내가 그를 가로막은 것이다.
만검존이다.
곧, 모두의 눈에 보였다.
대도를 휘두르며 용맹하게 몸을 날렸던 극마의 고수.
그가 순간 바보라도 된 것처럼 눈만 뻐끔거리며 하던 동작을 모두 멈추어 버린 상태가 되었다.
마치 만검존에게 목을 베라고 내준 것과 같은 모양새였다.
다른 이들의 눈에는 분명 그리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아니다.
확실히 만검존이 만검을 한 단계 위로 끌어올렸다.
만검의 공간장악 능력은 그 경지가 상승으로 향할수록 장악할 수 있는 공간의 너비가 넓어진다.
단, 같은 화경급의 고수라면, 분명 이를 파훼할 방법을 찾을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만검존은 장악하는 공간을 늘리는 대신 축소시켰고, 현재에 이르러서는 그 장악하는 공간이 자신과 적, 단 두 사람에게만 집중할 수 있게 만든 것이다.
이는 공간의 축소가 아니라, 힘의 집약이었다.
그렇게 대도를 휘두르던 극마의 고수가 얄짤없이 만검존에게 목을 내어 주려는 순간.
또 다른 극마의 고수.
대머리 극마의 고수가 쌍장에 세상을 파멸시킬 것 같은 무지막지한 장강을 뿜어대며 두 사람 사이로 끼어들었다.
곧.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쾅!
쾅쾅쾅쾅쾅쾅!
만검존과 극마의 고수 두 명.
세 사람 사이에서 땅을 송두리째 하늘로 날려 버릴 엄청난 폭발이 일어났다.
“자네, 가 봐야 하지 않나? 저러다 만검존인지 뭔지 죽을 거 같은데?”
“응, 안 가 봐도 됨.”
“죽으라고 내버려 두는 건가?”
“응, 안 죽어.”
“뭐, 내 알 바 아니지. 왕대! 힘내라!”
나는 한편으로 싸움을 보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깊은 고심에 빠졌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방법이 없었다.
왕대와 만검존의 싸움이 끝나면 전면전이 시작된다.
그렇게 된다면 결국, 오늘 수천 명이 죽어야 싸움을 끝낼 수 있다는 말인가?
내가 조금이라도 더 열심히 싸우면 수백 명의 목숨이라도 구할 수 있을까?
아니다.
마월성의 마인들의 기운이 점점 더 거칠어지고 있다.
이제는 마에 정신을 완전히 잠식당한 느낌이다.
어쩌면 오늘, 구양봉막이 말했던 피해보다 더 극심한 피해를 볼지도 모르겠다.
왕대를 상대로 한쪽 팔이 잘리고, 머리 한쪽이 완전하게 터져 나간 혈수마종이 미친놈처럼 죽지도 않고 계속 왕대를 향해 달려드는 모습을 보니, 더더욱 그렇다.
나의 교만함이, 결국 나를 믿고 따르는 많은 이들의 생명을 허무하게 앗아 갈……
“천주님! 천주님!”
처호, 처선, 공손병이다.
다급히 나를 향해…… 어?
“왔습니다. 저기를 보십시오.”
처선이 화색이 된 얼굴로 손을 뻗어 한쪽 방향을 가리켰다.
“저쪽에도 왔습니다. 보십시오, 천주님.”
공손병이 손으로 가리킨 방향도 보았다.
단 두 사람일 뿐이다.
하지만 천군만마를 얻은 듯하다.
고작 두 사람뿐이지만.
그 두 사람 덕분에.
“와아아아아아아아!”
“와아아아아아아아아!”
“수룡검 만세!”
“봉황검 금 여협께서도 와 주셨다!”
어쩌면 오늘.
우리는 대승을 거두게 될지도 모르겠다.
“네 이놈들!”
어라?
유령신검까지?
“나도 있다, 이놈들아!”
아! 극양신장은 올 수밖에 없지.
주소수에게서 하루라도 벗어나려면 와야지.
아! 대승이 아니다.
이건 필승이고 완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