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화
“주군, 처선입니다.”
“어, 처선. 어서 와.”
처선이 기쁜 소식을 가지고 왔다.
지금 이곳, 내가 있는 땅.
원래는 허허벌판과 논마지기, 밭뙈기가 전부였다.
제대로 지정된 행정 명칭 자체가 없는, 그냥 탄성산 자락이라 불리는 땅이었다.
“보통 뇌물을 잔뜩 먹여도 반년은 걸리고, 정상적인 절차를 거치면 이삼 년은 족히 걸려야 하는데. 어제 현청 대인을 만난 후 하루 만에 하남 허창 소속의 현화현(玄化縣)으 등록을 승인받았습니다.”
현청 자체도 어제 처음으로 문을 열었다.
“뇌물 좀 많이 먹였어?”
“아닙니다. 철전 한 닢 주지도 않았고, 현청 대인도 바라는 눈치가 아니었습니다. 하오문에서 보낸 정보에 의하면…….”
“뭔데?”
“글쎄 어제 이곳으로 부임한 현청 대인이 황제의 최측근 중 한 명이라고 합니다.”
“아! 황제가 보낸 자로군.”
“네, 그렇습니다. 아마 황제도 이곳의 상황과 주군의 움직임을 크게 주목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아무리 관과 무림이 서로에게 관여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언제나 무림의 상황을 주시하고 있는 황궁이니까요.”
“뭐, 좋게 생각해도 되려나?”
“네. 그렇습니다. 아버지와 공손 선생 모두 그렇게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처선, 어디 아파? 눈 밑의 검은 그림자가 길게 내려왔어.”
“아! 그게…… 죄송합니다, 주군.”
“휴우. 바쁜 거 알지만, 쉬엄쉬엄해. 처호 선생하고 공손병 선생한테도 일하는 시간과 쉴 시간을 정확히 정해서 나한테 보고하라고 해. 이거 개파하기도 전에 사람 잡겠군.”
“존명. 주군의 명에 따르겠습니다.”
요즘 세 사람이 가장 바쁘다.
밤새 그들의 전각에 불이 켜져 있는 게, 거의 한숨도 자지 않고 일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쉴 시간과 일할 시간을 정해 내게 보고하라고 한 것이다.
내 말은 들을 테니, 강제로라도 좀 쉬게 해 줘야겠다는 생각으로 말이다.
수라섬전도와의 대결 이후 엄청난 일들이 있었다.
일단, 첫 번째로 우리 개파할 문에 길게 늘어선 줄이다.
사실 처음 이곳으로 오고 수라섬전도와의 대결을 끝마친 후 처호, 처선, 공손병에게 보고를 받았을 때 살짝 실망했었다.
내가 실망한 이유는, 나를 따르기로 한 수하, 그러니까 우리 현화문을 주군으로 모시겠다고 충성 맹세를 한 문파나 세가가 그리 많지 않다는 것 때문이었다.
수는 엄청났다.
오십이 문(五十二門), 삼십이 방(三十二幇), 사십삼 파(四十四派), 십구 당(十九堂), 십일 회(十一會), 삼십팔 가((三十八家), 이십팔 장(二十八莊).
혼자나 몇몇이 떠돌던 고수까지 합하면, 그 수는 헤아리기도 힘들 정도로 많았다.
문제는, 그들이 군신의 관계가 아닌 무당, 아미, 황룡회, 화양문 같이 동등한 입장에서 동맹을 맺었다는 것이다.
거의 일 할만이 군신의 관계로 나에게 충성 맹세를 했다고 한다.
그들 대부분이 선도연가, 몽중방과 같이 정파였으나 구파일방과 오대세가 혹은 무림맹의 눈 밖에 나서 핍박받던 문파거나, 원래 사파라서 정파 눈치를 극도로 살피며 숨죽여 살았던 자들이었다.
그 외 구 할에 달하는 문파와 세가들은 동등한 입장의 동맹을 원했고, 처호 등이 이를 고스란히 수용했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조금 실망했는데, 처호가 웃었다.
아니나 다를까, 수라섬전도와의 싸움을 끝낸 바로 다음 날 새벽부터 우리 문 앞에 끝도 보이지 않을 긴 줄이 늘어선 것이다.
나의 신위를 보고, 동맹 협약을 바꾸기 위한 자들이 그렇게 몰려들었다.
동등한 동맹이 아닌, 스스로 가신 세가와 가신 문파가 되겠다고 자청하는 이들이었다.
우리가 강요한 건 당연히 아니고, 무림의 속성이 원래 그렇다.
힘센 놈이 형이라는 사실. 그걸 그들 스스로 깨닫고, 한 명이 나서서 줄을 서기 시작하니 우르르 몰려 줄을 서는 것이다.
우리야 그럴 생각이 없지만, 혹시라도 나중에 불이익을 당할까 봐 말이다.
또, 지금껏 나에게 줄을 대야 할지, 아니면 계속 무림맹과 구파일방 오대세가에 줄을 서야 할지 결정하지 못하고 고민하던 무문들.
그들이 나와 수라섬전도의 대결을 직접 목격하고, 결정을 내린 것이다.
그렇게 엄청난 사람들이 우리 문 앞에 줄을 섰고.
분명 그들 중 무림맹의 간자가 있을 것이다.
언젠가 나를 배신하기 위해 몸을 담으려는 자들 또한 있을 것이고.
그래서 처호, 처선, 공손병이 그러한 것들을 가리기 위해 눈코 틀새 없이 바쁘게 일하는 중이다.
몸에 좋은 약이라도 구해서 보내 줘야 할 것 같다.
*
개파식 준비로 한창 바쁘게 지나가던 어느 날이었다.
이미 우리 문에는 가신 세가와 가신 문파에서 보낸 고수들이 가득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문밖에는 우리와 연을 맺기 위해 끝도 없는 줄이 늘어져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무려 사흘이나 줄을 선 후에야 우리 문을 넘을 수 있었던 어느 작은 상단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무공을 익힌 무림인이 아니었다.
그냥 수레 세 대를 이끌고 찾아왔다.
특별할 것이 없었지만, 특별한 손님이었다.
그들은 문에 가까이 오면 올수록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기어이 우리 문의 정문을 넘었을 때는, 수레를 끌고 온 자들 모두가 서글피 울어댔다.
충성을 맹세하러 온 것도 아니고, 동맹을 맺으러 온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감사함을 표하기 위해 왔다고 했다.
처선의 급한 보고에 외원으로 향했더니, 그들은 나를 보자마자 땅에 엎드려 통곡을 했다.
많은 눈이 지켜보는 상황에서 나는 당황했지만, 곧 안도할 수 있었다.
안도를 넘어 나까지 울컥해지는 순간이었다.
지난날, 고려에서 복건으로 넘어오는 배.
고려 앞바다에서 해적들에게 죽은 이들을 위해 나는 정성스레 제사를 지내 주었다.
그들이 감사함을 표하기 위해 수레에 선물을 가득 싣고 찾아온 것이었다.
그들의 울음에, 지켜보던 모든 사람이 함께 울어야 했다.
그리고 다음 날, 노파 한 명이 우리 문의 정문을 넘었다.
꾀죄죄한 몰골의 노파는 무려 사흘이나 살벌한 고수들 틈에서 줄을 선 후에야 우리 문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모두가 의아해했다. 왜 저런 시골 노인네가 이곳을 찾았는지 말이다.
그리고 다시 처선이 급히 나를 불렀다.
나를 본 노파는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손에 꼭 쥔 봇짐을 나에게 건넸다.
말주변이 없다며, 그냥 연신 고맙다고만 했다.
소림만두집 기억하는가?
하오문의 정보원이 나에게 ‘하룻밤이 어떻느니, 사랑이 어떻느니.’하며 오해받게 만들었던 웃지 못할 사건 말이다.
그리고 그때 우리는 소림만두집을 벗어나 오중산에서 일화오악이라는 마두들을 때려잡고 사람들을 구해 줬다.
그때 그곳에 손녀와 함께 있던 할머니란다.
조손 가정으로, 할머니와 손녀 단둘이 살다가 마침 그때 장성한 손녀를 오중산 너머의 마을로 시집보내는 길이었다고 했다.
하나밖에 없는 손녀가 시집가는 길 죽을 뻔했고 그걸 내가 구해 줬는데, 당시 너무 놀라 감사하다는 인사 한마디 못 한 게 몇 년 동안 마음에 걸려 나의 대결과 개파 소식을 듣고 먼 길을 찾아왔다고.
사천에서 하남까지다.
노파의 나이를 생각한다면 목숨을 건 여정이었을 것이다.
노파가 내게 건넨 봇짐 속에는 달걀 몇 알과 감자, 옥수수 등이 담겨 있었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이를 보고 있는 모두의 눈에서 눈물이 쉴 새 없이 계속 그렇게 흘러나왔다.
어느 날에는 사람들 수십 명이 떼로 몰려왔다.
역시나 손과 등에는 봇짐을 지고 있는 사람들이었는데, 옷차림은 제법 괜찮았으나 왠지 그냥 조금은 측은해 보이는 사람들이었다.
작은 상단과 노파의 일도 했기에, 처선은 줄 선 그들을 먼저 불러들였다.
곧, 처선이 다시 나를 급하게 찾았다.
수십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나를 보자마자 또 땅에 엎드려 통곡을 했다.
왕대가 살던 염우촌의 노예들이었다.
염우촌의 재산을 나누어 주었고, 그들은 우리가 나누어 주었던 그 돈으로 땅을 사 개간을 하고 지금은 농사를 지으며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했다.
그 감사함을 표하고자, 그들 역시 목숨을 걸고 먼 길을 와 나에게 눈물로 고마움을 표하는 것이었다.
또 한 번 우리 문에 감동의 눈물이 몰아치는 순간이었다.
그들 외에도, 나와 천무휘, 의제, 한해북 그리고 예지까지.
우리가 마두를 잡으며 도움을 주었던 사람들의 수는 일일이 다 헤아리는 것을 넘어 기억하는 것조차 어렵다.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지만, 그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자신의 목숨을 넘어 가족의 목숨까지 내가 구해 준 것이 아니겠는가.
하루가 멀다 하고 중원 전역에서 나에게 고마움을 표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계속 몰려들었다.
그리고 이들의 사연은 순식간에 우리 문을 넘어 중원 곳곳으로 퍼졌다.
우리 문의 명성이 개파하기도 전에 더더욱 드높아지는 고마운 일이었다.
*
개파를 앞둔 닷새 전.
우리 식구들이 모두 모였다.
나, 사부, 작은 사부.
의제, 한해북.
처선, 처호, 공손병.
만검존도 합류했다.
사문이 없던 만검존도 정식으로 우리 문에 입문하기로 결정하였다.
만검존도 만검존이었지만, 맹소강과 만검존의 부인이 적극적으로 권유했다고 한다.
그리고 무적할매와 천무휘, 예지도 함께 자리했다.
사실 엄연하게 말하자면, 무적할매와 천무휘 그리고 예지는 외인이다.
무적할매는 위화궁, 예지는 아미파 소속이다.
천무휘 역시 정확히 화산에 적을 둔 것은 아니지만, 천하가 모두 그렇게 알고 있고 스스로 이를 부정하지 못한다.
그가 우리 문에 정식 입문할 수 없는 이유다.
그래도 내 사람들이라 그들까지 모두 불렀다.
한 가지 중요한 문제를 결정하기 위함이다.
문의 이름.
현화문 하남 지부는 임시 명칭이다.
또 심각한 문제가 있다.
우리 현화문에서 입문한 모든 이들을 제자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아예 현화문이 아닌 새로운 문파를 만들기로 했고, 그 문파의 이름을 결정하는 문제를 논의하려 모인 것이다.
그리고 그날, 긴 토론 끝에 만장일치로 우리 문의 이름이 결정되었다.
현화천(玄化天).
우리 현화문과 같지만 다른 이름.
다시, 모든 이들의 추대로 나는 현화천의 천주(天主)가 되었다.
예의상 몇 번 사절하는 척만 했다.
좋아 죽겠어서 입꼬리가 자꾸 올라가는 거 참느라 고생 좀 했고.
그리고 그날 현화천의 주요 직책까지 모두 결정하였다.
천주 마악치.
원로원 사부, 작은 사부.
좌호법 만검존, 우호법 왕대.
부천주 의제, 한해북.
군사전 전주 처호, 부전주 처선.
현안전 전주 공손병.
사부와 작은 사부는 나이도 나이지만, 그냥 대접받으며 편히 쉬라고 원로원의 원로 자리를 주었다.
아! 작은 사부는 귀정사의 주지 스님 자리를 다른 스님에게 물려주고 완전히 이사를 왔다.
만검존과 왕대도 같은 맥락이다.
사실 만검존에게 내가 이래라저래라하기는 조금 껄끄럽지 않겠는가?
자기는 열심히 하겠다고, 무슨 일이든 시켜달라고 했지만.
어디 화경의 고수, 그중에서도 만검이라는 사기급 신공을 익힌 그에게 아무 일이나 시킬 수는 없고.
또 만검 익히느라 가족들과 함께 지난 시간도 많이 없었던 그가 아니겠는가.
그래서 원로원만큼이나 존경은 존경대로 받으면서, 할 일은 없는 좌호법 자리를 주었다.
좌우호법 자리가 원래 어느 문파건 최고의 땡보직이다.
왕대는?
그가 극마의 고수라는 사실도 있지만, 그보다 왕대에게 무슨 일을 맡기기 좀 그렇지 않겠는가?
극마의 고수가 되며 상태가 거의 정상에 가깝게 좋아졌고, 사부와 작은 사부가 계속 보살펴 주는 중이다.
그래도 녀석에게 무슨 임무를 맡기고 그러는 게 너무 불안해서 그냥 아무 일도 하지 말고 편히 지내라는 의미로 우호법 자리를 주었다.
녀석 역시 염우촌에서 얼마나 마음고생 몸 고생이 많았는가.
이제는 편히 쉬어도 될 녀석이다.
더군다나 극마의 고수가 호법인데, 설마 딴짓할 놈도 없을 테고 말이다.
그리고 의제와 한해북.
내가 그랬듯 의제도 마찬가지다.
광천마제 시절 사패천의 천주는 나였고, 부천주는 의제였다.
현화천이라고 다를 게 있겠는가?
내 옆자리는 언제나 또 영원히 의제의 것이다.
그리고 우리 한해북.
이제는 의제와 한해북에게 차별을 둘 수 없는 사이가 됐다.
의제도 그렇게 생각하고 나 역시 그리 생각한다.
부천주가 둘이라는 게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내 마음이다.
내가 천주니까.
그리고 처호, 처선.
사패천 당시 군사전의 전주는 처선이었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 처호가 살아 있으니 군사전의 전주는 당연히 처호다.
공손병 역시 마찬가지다.
그 역시 광천마제 시절 사패천의 정보를 담당하던 현안전의 전주였고, 이번에도 그에게 현안전의 전주 자리를 주었다.
그렇게 우리의 정식 개파식이 점차 다가오고 있었다.
아! 그나저나 백미호는 잘하고 있으려나?
요즘 너무 연락이 없네?
내가 먼저 연락을 해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