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화
병막산 광천동 앞 큰 바위 위에서 눈을 뜬 나.
곧바로 갑돌산 집으로 신법을 펼쳤다.
그리고 그곳에 있었다.
“천 형.”
“마 형.”
몰아의 상태에 빠진 예지와 왕대 때문에 큰 소리를 낼 수는 없었다.
하지만 큰 소리를 낼 수 없다뿐.
천무휘와 의제, 한해북 모두 이미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되어 서로를 끌어안고 있다.
나와 천무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단숨에 서로를 향해 달려가 뜨거운 포옹을 했다.
천무휘가 오랜 폐관 수련을 깨고 출관했다.
당연히 화경의 벽마저 깬 천무휘다.
타고난 영웅인 천무휘에게 반전 따위는 있을 수 없다.
그가 화경의 경지에 오르는 건 너무나 자연스러운 수순에 불과한 것이리라.
“마 형, 해내셨군요. 경하드립니다.”
녀석, 누가 천재 아니랄까 봐 바로 알아보는군.
“고마워요. 천 형도 축하드립니다.”
우리는 말없이 한참이나 서로를 마주 보며 웃었다.
보고만 있어도 좋은 녀석이다.
정말 많이 보고 싶기도 했고.
“그런데 마 형, 외모가…… 많이 변했네요. 몰라볼 정도로 멋집니다.”
“하하, 뭐. 하하하.”
응, 그래도 네 발뒤꿈치보다 못생긴 거 다 알아.
갑자기 녀석이 또 얄미워졌다.
*
천무휘가 돌아오고 거짓말처럼 닷새 뒤 예지가 눈을 떴다.
하산을 두 달 앞둔 시점이었다.
그녀가 드디어 화경의 경지에 오른 것이다.
다시 보름이 지났을 때.
왕대도 눈을 떴다.
왕대가 눈을 떴을 때는 예지가 눈을 떴을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가 연출됐다.
서로 감격에 겨워 예지를 축하해 주던 것과 달리.
우리는 극도의 긴장 속 왕대의 상태를 살폈다.
그럴 만했던 게, 왕대가 눈을 뜨는 순간 십간산에 살던 새들과 짐승들이 모두 기괴한 소리를 지르며 난리를 쳤기 때문이다.
왕대에게서, 나와 천무휘 그리고 예지마저 섬뜩하게 할 무시무시한 마기가 터져 나왔다.
“주인님…….”
하지만 그 무시무시한 기운과 달리, 왕대는 여전히 왕대였다.
“괜찮아?”
“세상이…… 다르게 보여요, 주인님.”
“좋게? 나쁘게? 어떻게 보이는데?”
“몸은 가볍고, 기분은 좋고, 그냥 좋아요.”
“좋으면 됐어. 그러면 된 거야. 축하해, 왕대야.”
왕대가 극마의 고수가 되는 순간이었다.
지금으로부터 육 년 뒤.
광천마제 시절에는 그랬다.
천마신교가 중원을 침공한다.
그리고 당시 천마신교가 보유하고 있는 극마의 고수는 마교주를 포함하여 여섯 명이나 됐다.
만약 현시점에서도 마교가 여섯 명의 극마의 고수를 보유하고 있다면, 왕대를 포함해 이제는 천하에 일곱 명이나 되는 극마의 고수가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
하산(下山) 보름 전.
처호, 처선, 공손병이 갑돌산을 올라왔다.
처음 보는 중년인 한 명을 대동한 채였다.
황제보다 돈이 많다는 만리상단의 상단주 연국흥이 바로 그였다.
연국흥은 나에게 극진한 예를 갖추었다.
그가 나에게 극진한 예를 갖춘다고, 내가 그를 우습게 대할 수는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로 나 역시 그를 극진히 대접해야 했다.
관에는 황제가 있다.
무림에는 무림오대고수니 육대고수니, 궁극의 경지에 오른 이들이 있다.
그리고 상계.
무림인들이 한껏 경시한다지만, 천하를 먹여 살리는 건 무력도 권력도 아닌 돈이다.
그 상계의 정점에 선 사람이 바로 만리상단의 상단주 연국흥이다.
공손병은 연국흥의 아버지 때부터 만리상단과 연을 맺고 있었고, 그 인연이 아들인 연국흥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공손병이 나의 이야기를 꺼내었을 때, 그는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기다리다가 목이 빠지는 줄 알았습니다, 공 선생님. 제가 천성이 상인이라 밑지는 장사를 할 수 없어서, 먼저 말을 꺼내지 못하고 기다리기만 했는데, 정말 애가 타 미치는 줄 알았습니다, 하하하.”
만리상단이 천하제일상단이고 그 부와 힘이 엄청나다지만, 상계와 무림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어느 세력과 손을 잡느냐에 따라 상단의 운명이 바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연국흥의 선택은 바로 나였다.
“연 상단주의 도움으로 현화문 하남 지부는 모두 완공되었습니다. 전각이 아흔아홉 채이고, 대연무장 열한 곳, 소연무장과 연공실은 각기 서른두 개와 스무 개를 지었습니다. 또 곳곳에 화원과 연못…….”
현화문의 본문은 바로 지금 내가 있는 이곳이다.
다 쓰러져 가는 낡은 초가 한 채가 전부다.
하지만 지부, 거긴 전각이 아흔아홉 채나 된다고 한다.
당분간 내가 살 집이지만, 정말 크게도 지었다.
공손병에 이어 처호의 보고가 이어졌다.
“보름 후 탄성산에서 수라섬전도와의 대결에 대해선 이미 천하에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입니다. 개방과 하오문에서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무림맹에서도 수라섬전도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는지, 그들은 알아서 주군과 수라섬전도의 비무를 널리 퍼뜨려 주었습니다. 이미 탄성산 일대는 한두 달 전부터 중원 전역에서 몰려든 무인들과 사람들로 발 디딜 틈도 없을 정도입니다.”
처호에 이어 이번엔 처선이 말했다.
“주군의 사부님이신 유현 도사님과 우화궁의 우 여협, 그리고 작은 사부님이신 귀정사의 진공 스님. 또 무당과 아미파. 거기에 이미 주군께 충성을 맹세한 모든 이들과 아직 마음의 결단을 내리지 못한 이들까지 모두 찾아와 주군과 수라섬전도의 대결을 지켜보게 될 것입니다. 천수신권의 움직임은 예측할 수 없으나, 무림맹주가 올 것은 확실한 상황입니다.”
다시 처호가 말했다.
“최근 산서를 넘어 하북과 섬서에까지 영역을 넓히며 그 힘을 맹렬한 기세로 떨치고 있는 황룡회에서도 유령신검이 직접 황룡회의 고수들을 이끌고 대결을 참관할 것이라 하였습니다.”
오! 역시 유령신검이군.
사 년 전, 장위지가 와서 황룡회가 더 이상 숨지 않고 힘을 드러낼 것이라고 하더니, 제대로 하고 있는 모양이다.
“귀주에서도 화양문에서 극양신장이 직접 화양문과 화양문을 섬기는 무문의 고수들을 이끌고 탄성산에 올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렇겠지.
당연히 오겠지.
어떻게 해서든 주소수에게서 벗어나고 싶은 극양신장이니까, 좋은 핑곗거리가 생긴 거잖아.
세 아들까지 줄줄이 데리고 올 게 뻔하다.
“주군, 현 무림은 이제 무림육대고수에서 무림칠대고수라 불리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맹묵치 대협이오?”
“네, 그렇습니다.”
“선생들이 일부러 퍼뜨린 것이오?”
“아닙니다. 무림맹에서 맹 대협의 일을 조용히 처리하려고 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미 맹 대협에 관해 알고 있는 이들이 너무 많았기에, 그 입을 모두 막을 수는 없었나 봅니다. 어느 순간부터 세인들은 맹묵치 대협을 만검존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아!
광천마제 시절과 똑같은 별호를 얻게 되었군.
“아마 곧 화산파에서 천무휘 대협이 화경의 벽을 깬 사실을 공포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무림팔대고수의 시대가 될 것입니다.”
“아니오.”
“네?”
처호가 의이한 눈으로 물었다.
“아미파에서도 곧 한 명의 화경급 고수를 보유했다는 선언을 하게 될 것입니다.”
“아!”
처호, 처선, 공손병의 시선이 동시에 내 뒤에 있는 예지에게로 향했다.
“경하드립니다, 금 여협.”
세 사람은 그렇게 예지를 축하해 주었다.
다시 처호가 말했다.
“무림팔대고수가 아니라 무림구대고수의 시대가 되겠군요.”
“그것도 아니오, 하하하.”
내가 웃으며 말했다.
처호는 이제 의아한 눈이 아니라 기대가 가득한 눈으로 내 입을 주시했다.
“왕대가 극마의 벽을 깨었소.”
“왕 대협, 축하드립니다.”
다시 처호, 처선, 공손병의 축하가 이어진 후.
처호가 기쁜 얼굴로 말했다.
“무림십대고수의 시대가 열렸군요. 무림사를 거슬러 올라가도 몇 번 없었던 시대입니다.”
“그것도 아니오, 처호 선생.”
처호가 이번에는 또 누가 있을까 하며, 기대와 의아함이 가득한 눈으로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거 내 입으로 말하기는 부끄럽군요. 하하하.”
내 말이 끝나기도 전, 처호와 처선, 공손병이 놀란 눈을 뜨고 말았다.
그때 내 뒤에서 왕대가 끼어들었다.
“우리 주인님은 언제나 천하제일이시다!”
단호한 왕대의 음성.
세 선생은 아차 하는 얼굴이었다.
곧바로 나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했다.
“신들이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내가 화경의 벽을 깰 것이라고는 세 사람도 생각지 못했던 모양이다.
하긴, 사실 불가능한 일에 가까웠던 게 사실이지.
“하하하, 고개를 드십시오. 선생들을 탓하려는 말이 아닙니다. 나도 스스로 기적이라 생각하고 있으니, 괘념치 마세요들.”
내가 직접 한 명 한 명 일으켜 세운 후에야 세 사람은 푹 숙였던 고개를 들 수 있었다.
그리고 이를 바로 뒤에서 지켜보고 있는 만리상단의 상단주 연국흥.
이미 눈알이 반쯤 튀어나와 있다.
놀라도 무지막지하게 놀란 모양이다.
어찌 아니겠는가.
평생 한 명의 화경급 고수를 보는 것도 기연이라 불리는 세상인데, 지금 자리에 무려 네 명의 화경급 고수가 있으니 말이다.
더군다나 왕대 빼고는 죄다 이십 대의 젊은이들이고.
분위기가 조금 수습된 후 내가 물었다.
“그런데 조금 전 무림맹주가 나와 수라섬전도의 대결을 직접 참관할 것이라고 했나요?”
처선이 답했다.
“그렇습니다, 주군.”
“무림맹주의 움직임은 어떻게 예측할 수 있었지? 맹주의 움직임은 무림맹에서도 극비로 다루는 기밀로 알고 있는데.”
처선이 답했다.
“맹주무적대가 주기적으로 맹주의 움직임과 행방에 대한 보고를 저희에게 보내오고 있습니다.”
“맹주무적대?”
“아! 죄송합니다, 주군. 십합단이 삼 년 전 맹주전 직속 무력대로 편입했습니다. 그런 후에도 계속 승승장구하여, 현재는 맹주의 오른팔이라 불리고 있으며, 또 무림맹 내에서도 청룡검무대, 백호백도대와 더불어 삼대무력대의 명성을 떨치고 있습니다.”
아! 언묵, 언갈, 십합단 녀석들.
내가 해낼 줄 알았다.
처선이 말을 이었다.
“맹주가 십합단, 그러니까 맹주무적대를 제대로 신뢰하고 있습니다. 남궁세가의 절학을 맹주무적대에 주는 걸 넘어, 남궁세가에서도 쉬이 제조하기 어렵다는 한령단(寒靈丹)과 무애단(無涯丹)까지 그들에게 하사하였습니다. 덕분에 언묵과 언갈이 최근 초절정의 벽을 깼고, 나머지 대원들도 절정과 고수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실로 기적에 가까운 성과가 아닐 수 없습니다.”
듣는 것만으로 절로 웃음이 났다.
기억하는가? 십합단 녀석들.
그 찌질했던 녀석들에게 나는 두 가지 명령을 내렸다.
“내가 너희에게 내리는 첫 번째 명령은, 무림맹주에게 충성하라는 것이다.”
녀석들, 제대로 충성한 모양이다.
녀석들이니 할 수 있는 것이다.
꼼수라는 건 부릴 줄도 모르고, 오로지 우직하게 앞만 보고 전진하는 녀석들이기에 말이다.
그래서 두 번째 명령도 내렸다.
“맞아! 바로 그거야! 안 되겠다 싶으면, 뒤로 물러나. 가끔은 샛길로 가고, 뒷길로도 가고, 정 안 되겠다 싶으면 개구멍이라도 찾아. 우선 살아남으라고. 개죽음당하지 말고. 복수도! 충성도! 살아남아야 제대로 할 수 있는 거야.”
녀석들, 살아남는 걸 넘어 내 임무를 완벽히 수행해 냈다.
아니, 완벽을 넘어선 결과를 만들어 냈다.
그간 고생했을 녀석들을 생각하니 눈물까지 그렁그렁하다.
나중에 정말 크게 칭찬해 줘야겠다.
처호가 말을 이었다.
“극양신장, 유령신검, 만검존, 송암 도장, 아미삼검 등 말씀드린 대로 무림의 거의 모든 눈과 귀가 현재 주군과 수라섬전도의 대결에 쏠려 있습니다. 천하의 무림맹주라고 하여도, 그 어떤 술수도 함부로 부리지 못할 것입니다.”
이후에도 처호, 처선, 공손병은 사 년 동안 있었던 무림의 일들에 관해, 또 보름 후 있을 대결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런 후, 마지막.
공손병이 비장한 얼굴로 나에게 말했다.
“주군! 이제 하산하여 주십시오. 하산하여 천하에 보여 주십시오. 주군의 천하가 도래하였음을, 만천하에 위용을 떨쳐 증명해 주십시오.”
그렇다.
이제부터는 내 시간이다.
천하를 상대로 진짜 나를 보여 줄 것이다.
광마의 귀환, 시작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