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화
만검존은 떠났다.
작은 사부가 있는 귀정사로 갔다.
의제도 떠났다.
어느새 몸집이 엄청나게 불어나 버린 우각당, 아니 이제는 우각회를 살피러 잠시 떠난 것이다.
한해북도 대두장의 소장주, 그러니까 한해북의 의형 탁허항이 혼인한다는 소식을 듣고 잠시간 복건으로 가 있겠다고 했다.
우리 예지도 갔다.
아미파를 너무 오래 떠나 있었기에 사부의 건강도 챙길 겸 잠시 다녀오겠다고 했다.
남은 건 나와 왕대다.
“왕대야.”
“네, 주인님.”
“가자!”
“넵!”
“어디로 가는지 안 물어봐?”
“주인님이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따라가겠습니다.”
녀석.
여전하다.
“집으로 가는 거야. 이젠 내 집이지만 네 집이기도 해.”
집이라는 말에, 커다란 바위처럼 굳건하기만 한 왕대의 눈이 순간 그렁그렁해졌다.
난 왕대의 마음을 조금 이해할 것 같았다.
환히 웃으며, 그렇게 녀석의 어깨까지 툭 치며 집으로 가는 발걸음을 뗐다.
*
달라진 게 없다.
우리 집, 현화문은 언제나 똑같다.
아니, 이제는 사부가 없고 대신 왕대가 있다.
집에 도착해 처음으로 한 일은 대청소다.
열심히 청소를 했다.
그런 후 이튿날부터는 벽곡단을 만들었다.
왕대와 십간산을 죄다 돌며 벽곡단에 쓰일 재료들을 모았다.
어려서부터 줄곧 먹던 벽곡단이다.
아! 입맛이 이젠 너무 변했다.
사부님께 배워 만들던 그대로 만들었지만, 역시나 맛이 없다.
그래도 먹어야 한다.
삼 년을 넘어 거의 사 년간 이걸 먹어야 하니 적응해야 한다.
그렇게 칠 일 만에 무려 사 년 치, 그것도 다섯 명이 먹을 벽곡단을 완성했다.
“맛없지?”
“네, 주인님.”
우리 왕대는 언제나 솔직하다.
“너무 맛이 없어서 먹기 힘들면, 아랫마을에 가서 맛난 거 사 먹고 와도 돼. 아니면 사냥을 해도 되고.”
“아닙니다. 맛이 없는 것보다 주인님과 똑같은 걸 먹을 수 있는 게 더 좋습니다.”
왕대는 참 고마운 녀석이다.
“왕대야, 그저께 달호라는 사람이 왔었잖아?”
“네, 주인님. 예의를 갖춰 인사했습니다.”
“그래, 잘했어. 그런데 그 달호가 뭘 가지고 온 줄 알아?”
“모릅니다.”
“일전에 봤던 작은 사부님과 그리고 구양봉막 할배가 몇 달 동안 고심하고 고심해서 완성한 네 아수라혈천신공의 부작용에 대한 치료법이야. 단순히 치료만 하는 게 아니라, 네 무공도 훨씬 더 고강하게 해 줄 거야.”
“넵. 그럼 저는 그걸 익히면 됩니까?”
“응. 열심히 할 수 있어?”
“주인님께서 원하신다면, 목숨을 걸고 수련하겠습니다.”
“죽으면 안 돼. 주화입마에 빠져도 안 되고.”
“죽지 않습니다. 죽으면 주인님을 모시지 못합니다. 주화입마에 빠지지도 않습니다. 그러면 주인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맞아. 우리 함께 열심히 수련해서, 지금도 어딘가에서 힘겨워하고 있을 천하의 모든 어린이를 도와주자.”
“넵! 아니, 존명!”
나와 왕대의 수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
한 달이 지났다.
왕대는 정말 열심히 수련했다.
왕대가 수련할 때면 나는 참선을 했다.
화경이 되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무공과 다르게 참선을 하면 도가 쌓인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
그리고 며칠이 더 지났을 때.
의제가 돌아왔다.
칠문삼방육파오당(七門三幇六派五堂).
우각회의 기치 아래 모인 무문들이다.
그 무인의 숫자만 일만이천 명을 넘는다고 했다.
광천마제 시절의 규모를 이미 넘어섰다.
고수나 많은 부분에 있어서 아직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당당히 강서제일세(江西第一勢)가 된 우각회다.
오로지 우각도협 곽우적이라는 이름 하나로 이룩한 성과였다.
이제 우리는 세 사람이 벽곡단을 먹으며 수련에 임했다.
*
석 달이 지났다.
한해북이 돌아왔다.
복건이 멀기도 하지만 한해북이 예정보다 더 늦은 이유는 첫 조카를 보기 위함이었다.
혼인인 줄 알고 간 대두장.
처음 만난 형수.
이미 만삭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두 달 더 머물며 조카가 세상 밖으로 나오는 것까지 보고 오느라 많이 늦었다.
혹시나 해서 물어봤는데, 조카도 엄청난 대두라고 한다.
이제 우리는 네 사람이 함께 수련에 임했다.
*
보름이 더 지났을 때 예지가 돌아왔다.
사내놈들 넷이서 지내다 보니 삭막하기 그지없던 우리 현화문에 봄이 찾아온 듯했다.
퀴퀴한 냄새도 갑자기 향기로워졌고, 칙칙했던 집안도 야명주라도 박아 놓은 듯 밝게 변했다.
국대 인경이 아미삼검의 은거지로 가 친히 그녀들의 가르침을 받는다는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몇 년 후 천하는 조금은 뚱뚱한, 아니 많이 뚱뚱한 칠룡사봉을 보게 될지도 모르겠다.
예지까지 가세하자 우리 녀석들은 더더욱 힘을 내어 수련에 임했다.
*
예지가 돌아오고 일 년이 지났다.
내 나이 어느덧 스물여섯이 되었다.
우리의 일과는 매일 똑같다.
친구들은 수련을 하고 나는 참선을 한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광천검을 휘둘러 보고 싶었다.
그래서 가부좌를 틀고 광천검을 출검했다.
새하얀 빛이 뿌려졌다.
검고 사악해 보이는 그런 빛과 기운이 아닌, 새하얗고 따스하며 포근한 빛과 기운이 광천검을 통해 발산된 것이다.
기뻤다.
사부님의 말씀이 맞았다.
‘현화(玄化), 검음은 변한다.’
내 마음의 수양이 쌓이면 절로 변하게 될 것이라는 사부님의 말씀이 현실로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나는 그렇게 미소를 머금고 다시 가부좌를 틀었다.
*
일 년이 더 지났다.
이제 스물일곱 살이다.
난 벽곡단마저 거의 끊게 되었다.
한번 가부좌를 틀면 보름 넘게 움직이지 않았다.
참선의 세계가 이리도 좋은 줄 알았다면, 진즉 참선만 할 것이라며, 속으로 그간 아등바등 치열하게 보냈던 시간이 다 아깝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어느 날, 사부님이 돌아오셨다.
무적할매와 향이를 대동하여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나의 바뀐 모습에, 사부님은 뜨거운 눈물까지 쏟으며 기뻐하셨다.
무적할매는 우리가 부탁하지도 않았지만, 우리의 무공에 큰 도움을 줬다.
거의 한 달 동안 갑돌산에 머물며 의제와 한해북 그리고 예지, 심지어 마공을 익힌 왕대의 수련까지 봐주었다.
화경의 끝자락, 어쩌면 현경에 이미 한 발을 담근 무적할매의 가르침이다.
한 달 사이 우리 녀석들의 무공은 그야말로 눈이 부신 발전을 기록할 수 있었다.
우리 녀석들이 열심히 무적할매에게 무공을 배우는 사이, 나는 참선을 포기하고 초향과 놀아주었다.
바닷가와 다르게 산과 계곡이 전부인 십간산.
벌써 열네 살이나 된 향이가 지루해하면 어쩔까 걱정했는데, 의외로 한 달 내내 웃음이 떠나지 않을 정도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예지의 말처럼 사춘기는 지나니 원래의 초향으로 돌아왔다.
개구리도 잡고, 냇가에서 물고기도 잡고, 영초를 캔다고 십간산을 온종일 돌아다니고, 산과 계곡에서 할 수 있는 건 모두 향이와 했다.
너무나도 즐거운 시간이었다.
사부님께서는 당분간 현화문을 우리에게 내주겠다고 하시고는, 무적할매와 함께 절강 항주 위화궁으로 돌아갔다.
*
사부와 무적할매, 초향이 다녀간 후 석 달이 지났을 무렵.
아미파와 무당파에서 며칠의 간격을 두고 사람들이 찾아왔다.
아미삼검과 송암 도장이 그들이었다.
의외인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국대 인경이었다.
아! 일전에 내가 했던 말은 취소해야겠다.
하마터면 몰라볼 뻔했다.
국대 인경, 그러니까 국인경이 날씬해졌다.
얼굴도 예뻐지고.
무공은 내가 예상했던 것 그대로다.
아마 국인경 나이대로 살피면, 천하에 그 적수를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아미삼검과 송암 도장은 일부러 약속을 하고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아미파와 위화궁은 세상이 알지 못하는 사이 꽤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근래에 나와 예지 덕분에 그사이가 더더욱 가까워졌고, 그 친분을 다지는 의미로 아미삼검이 위화궁을 방문했다가 아미파로 돌아가는 길에 우리 현화문에 들른 것이라 했다.
장문인도 아닌 아미삼검이 직접 위화궁을 방문했다는 것은, 아미파가 위화궁과의 관계를 진심으로 생각함을 의미한다.
아! 생각지 못했던 인연도 있다.
우리 향이와 국인경이 위화궁에서 함께 지내며, 둘도 없는 친구가 됐다고 한다.
국인경이 향이를 언니라고 부르며 너무나 잘 따랐다고.
나중에 꼭 향이와 함께 무림행을 하고 싶다고도 했다.
송암 도장이 우리를 찾아온 것은, 그저 나와 우리의 안부가 궁금해서 찾아왔다고 했다.
가만 보니 많이 심심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무지막지한 고수들이 네 사람이나 찾아왔는데 그냥 돌려보낼 수는 없지 않겠나?
일신에 지닌 능력에 비해 사문으로 돌아가면 할 일도 없는 사람들이고.
그래서 슬쩍 부탁을 했다.
아미삼검은 두 달, 송암 도장은 석 달이나 머물며 우리 애들의 수련을 도와준 후에야 갑돌산을 떠났다.
우리 녀석들은 또 한 번 기연이라 불릴만한 엄청난 성과를 올릴 수 있었다.
*
아미삼검과 송암 도장이 떠나고 두 달 뒤.
내 나이 스물여덟이 되었다.
수라섬전도와 대결이 몇 달밖에 남지 않았다.
예지는 육체적 수련을 멈춘 지 이미 오래다.
왕대 역시 마찬가지다.
왕대가 온종일 가부좌를 틀고 앉아 두 눈을 감고, 또 마기를 슬금슬금 풍기며 묵상하는 모습은 스산하기도 하고 이질적이기도 하고 또 기괴해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한 달과 보름 전.
의제와 한해북이 드디어 초절정의 벽을 깼다.
그러던 어느 날, 작은 사부가 찾아왔다.
구양봉막까지 데리고 갑돌산을 오른 작은 사부였다.
몇 년 만에 본 나를, 또 몰라보게 변한 나를 보며 작은 사부는 사부보다 더 격하게 한참이나 울며 기뻐하였다.
작은 사부와 구양봉막은 무려 넉 달이나 갑돌산에 머물렀다.
두 사람은 먼저 왕대부터 살폈다.
구양봉막은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자신의 상식과 무리를 완전히 벗어날 정도로 변해 버린 왕대를 보며 그리 놀란 것이다.
구양봉막은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첫날을 제외하고는 왕대와 대화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멀리 떨어져 계속 한숨만 쉬며 왕대가 심신 수양하는 모습만을 지켜볼 뿐이었다.
왕대를 며칠간 도운 작은 사부는 내 부탁으로 예지의 수련까지 도와주었다.
이미 예지는 화경과 초절정의 경계가 사라진 상태였다.
이는 내 눈에도 보였고, 당연히 작은 사부의 눈에도 보였다.
작은 사부와 예지는 정확히 아흐레 동안 서로 마주 앉아 논담을 이어갔다.
그리고 정확히 열흘째 되던 날.
가부좌를 튼 상태로 예지가 눈을 감았다.
예지의 무아지경이 얼마나 오랫동안 이어질지 작은 사부도 장담할 수 없다고 했다.
의제와 한해북이 자신의 수련까지 절반씩 포기하며 예지의 호법을 섰다.
그런 후 작은 사부의 시간은 온전한 내 것이 되었다.
무려 석 달하고도 스무날 동안, 나는 작은 사부와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십간산을 이리저리 거닐기도 했고, 때로는 흐르는 계곡물을 바라보며 대화를 나누었다.
더없이 기쁜 시간이었다.
산에 관해 이야기하고, 하늘에 관해 이야기했다.
다시 흙에 관해 이야기했고, 사람의 이야기도 나누었다.
그리고 그 모든 대화는 종국에, 내가 바라고 꿈꾸는 그러한 세계로 이어졌다.
내가 눈을 떴을 때, 작은 사부는 갑돌산을 이미 떠난 후였다.
하지만 작은 사부가 보였고, 사부를 볼 수 있었다.
길게 숨을 들이마셨더니, 그들의 체취마저 느낄 수 있었다.
일백 년 전 천하제일인이셨던 나의 태사조, 현화검존이 바라보던 세상이 어쩌면 지금 내가 보는 것과 같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저나 오래도 걸렸군.
왔다, 그 녀석.
얄미우면서도 너무나 보고 싶던 그 녀석 말이다.
천무휘가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