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화
조회한이 앞장서고 만검존이 뒤를 따랐다.
평치산을 내려와서는 말까지 타고 한참을 이동했다.
그렇게 도착한 어느 인적도 없고 이름도 없는 산의 산기슭.
이른 변두리에 도대체 왜 이렇게 멋진 곳이 있나 싶을 정도로 괜찮은 장원이 나타났다.
만검존은 그곳으로부터 일백 장 정도 떨어져 말을 멈추어 세웠다.
조회한 혼자 그 장원 안으로 들어갔고, 약 한 식경 정도가 지난 후에야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만면에 미소를 가득 머금은 그였고, 동시에 굳게 닫혔던 장원의 대문이 활짝 열렸다.
“하하하! 묵치, 들어가자고. 제수씨하고 소강이가 기다리고 있어. 그 사촌 여동생이라는 소저도 함께 있고.”
그렇게 두 사람이 장원 안으로 들어갔다.
나와 의제, 한해북은 은형술을 펼친 채 담을 넘었다.
우리는 곧 장원 안의 사정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묵치. 약속은 약속이니, 여기까지만. 조금 떨어진 상태로 얼굴만 확인하라고.”
“여보!”
“아빠!”
십여 장의 거리를 두고, 그렇게 만검존과 그 가족이 재회했다.
하지만 단순한 재회가 아니다.
주변을 삼십여 명의 고수들이 지키고 있다.
무엇보다, 만검존의 부인과 아들 소강을 두 사람이 잡고 있다.
왼팔로 온몸을 꽉 감쌌고, 다시 오른손으로는 그들의 목에 예리한 단검을 가져다 댄 상태였다.
여차하면 곧바로 부인과 아들의 목을 그어 버리겠다는 경고였다.
“묵치, 이해해. 자네가 좀 고수여야지. 보라고. 제수씨하고 소강이 신색이 훤하잖아. 지금은 어쩔 수 없이, 이러는 거고. 말한 대로 마악치 목만 베어 버리면, 제수씨하고 소강이는 곧바로 집으로 돌려보내 줄게. 알지?”
주위를 지키고 있는 삼십여 명의 고수들.
아! 무림맹 개새끼들.
어째 눈에 익는가 싶더니, 누군지 알겠다.
이삼 년 전 나와 의제, 한해북, 천무휘가 한참 마두들 때려잡고 돌아다닐 때 말이다.
그때 대부분은 그 자리에서 목을 베었지만, 몇몇은 무림맹 지부나 주변 무림 문파 아니면 관(官)으로 보냈다.
삼십여 명의 고수 중 일부가 바로 그 당시 우리가 잡아서 무림맹 지부로 보냈던 마두들이다.
진즉 목을 쳤을 줄 알았더니, 살려두었다가 이런 일에 쓰는군.
참, 무림맹주도 대단한 새끼다.
하지만 지금 놈들에게 신경쓸 상황이 아니다.
아니, 곧 죽을 놈들이니 신경쓸 필요도 없다.
“하하, 묵치. 이제 봤으니 가야지? 가자고. 악적 마악치를 잡으러. 응? 제수씨하고 소강이는 걱정하지 말고. 어서, 가자고.”
조회한이 슬슬 달래기도 하고 설득도 하고, 그렇게 만검존에게 말했다.
하지만 만검존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내와 아들만 뚫어져라 쳐다볼 뿐이었다.
“이봐, 묵치. 그만 가자니까. 걱정할 거 하나도 없어. 마악치 목만 베면, 모든 일이 다 잘 풀릴 거야. 나를 믿으라고.”
계속 조회한이 그런 만검존을 설득했다.
하지만.
“꼭 이렇게까지 해야 속이 후련했냐?”
“응? 그, 그게…… 갑자기 왜 이래?”
아내와 아들에게 고정되었던 맹묵치의 시선이 처음으로 그들에게서 떼어졌다.
맹묵치가 천천히 몸을 돌려 조회한을 향했다.
조회한도 순간 무엇이 잘못됐음을 느낀 듯했다.
갑자기 식은땀을 마구 흘리며,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덜덜 떨어대기 시작했다.
주변을 지키던 고수들, 아니 마두들도 잔뜩 긴장한 상태가 되었다.
“움직이지 마라! 움직이면 네 아내와 아들은 죽는다!”
늙은 마두의 협박.
조회한은 이미 사색이 되어 입도 제대로 열지 못하는 상태였다.
만검존이 자신의 아내와 아들을 인질로 잡고 있는 마두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인질을 직접적으로 잡은 마두 말고도, 예지를 뒤에서 감시하는 마두와 그 주변의 마두까지.
열 명 정도의 가장 강한 마두들이 그곳에 있었다.
“죽인다! 우리가 죽어도, 네 아내와 아들은 죽이고 죽는다! 그러니 허튼짓 할 생각하지 마! 그냥 가라고!”
마두가 다시 고함을 질렀지만, 만검존은 떠날 생각 따위는 없었다.
그리고 그게 시작이었다.
수백 년 동안 무림에 자취를 감추었던 만검이, 다시금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하품이 나올 정도로 아주 아주 느리게.
만검존이 자신의 검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천천히, 정말 너무나도 느리게 그의 검이 검집을 벗어났다.
인질을 잡고 있던 마두들, 또 주변에 있던 마두들.
그들의 얼굴에 미소가 드리우는 순간이기도 했다.
저렇게 느린 검이라면, 저렇게 느리다면, 두려워할 필요가 전혀 없다고 판단했기에 웃을 수 있었으리라.
사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사람들은 모르고 있었다.
만검존이 만검을 펼치려고 마음먹은 그 순간.
모든 것이 멈추었다는 사실을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심지어, 대기의 이동마저 멈추었다.
장원 마당에 불어오던 바람이 멈추었음을, 그때는 아무도 인지하지 못했다.
장원 뒤편 산에서 들려오던 새 소리가 더 이상 들려오지 않음을,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귀는 먹먹해졌고, 시원한 공기는 더 이상 폐부로 스며들지 않았다.
그럼에도, 모두.
그저 눈으로만 만검의 느린 움직임을 보며 안도하며 비웃고 있었다.
그렇게 만검은 천천히, 또 아주 천천히, 자신의 아내와 아들을 인질로 잡고 있는 마두들에게로 다가갔다.
아마 마두들은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큰 목소리로 외치고 싶었을 것이다.
“당장 그 여자와 어린놈을 죽여!”
이렇게 말이다.
하지만 그 말을 하려는 입술이 움직이지 않음을.
자신의 뇌가 내리는 명령과 다르게 움직이지 않는 입술을.
그제야 깨달았을 것이다.
그건 또 다른 의미로, 그들이 그제야 만검의 위력을 실감하게 된다는 뜻이기도 했다.
스으으으윽.
아주 느리지만, 너무 느려 지루하게 느껴질 정도지만.
분명하게 아들을 인질로 잡고 있던 마두의 목이 베어 땅으로 떨어졌다.
옆에서 아내를 인질로 잡고 있던 또 다른 마두.
경악한 눈으로 이를 보고 있음에도.
또 안간힘을 써 가며 만검존의 아내를 죽이려 해도, 꿈쩍도 하지 못했다.
만검존은 천천히 그의 목을 베었다.
마두는 경악한 눈을 뜬 채, 자신의 목이 어떻게 베이는지를 아주 천천히 또 똑똑히 목격하며 그렇게 죽었다.
다른 마두들 그리고 조회한까지.
비명을 지르려 했다.
도주를 하려고 했다.
젖 먹던 힘까지 써 이곳을 벗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아무도 그러하지 못했다.
고작 한 발.
그 한 발자국을 아무도 떼지 못하고, 모두가 만검존의 검에 목이 베이고 심장이 꿰뚫려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툭.
투투투투투투투투투툭.
만검존이 만검을 멈추자.
모든 것이 원래로 돌아왔다.
목이 베이고도 차마 쓰러지지 못했던 마두의 시체들이, 잘 마른 수수깡이 쓰러지듯 일시에 쓰러졌다.
대기는 다시 흐르기 시작했고, 먹먹했던 귀로 저 멀리 산속의 새소리가 들려왔다.
폐부로는 시원한 공기가 유입되었고, 눈에 들어오는 모든 사물이 원래의 그것처럼 자유롭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만검이다.
“여보!”
“아버지! 엉엉엉.”
만검존의 아내와 아들이 동시에 눈물을 뿌리며 그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만검존 역시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그들을 꼭 안아 주었다.
나와 의제, 한해북도 이미 은형술을 풀고 현장으로 갔다.
그런 우리 곁으로 예지가 다가오며 허탈한 음성으로 말했다.
“휴우. 잔뜩 긴장하고 있었는데. 결국 내가 할 일은 아무것도 없었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예지도 크게 놀란 얼굴이었다.
예지만 그런 게 아니다.
의제와 한해북까지 놀람을 넘어 경악한 얼굴이었다.
어찌 아니겠는가?
만검의 무지막지한 위력을 눈으로 직접 목격했는데 말이다.
오늘은 이들에게 큰 충격일지 모르나, 이는 앞으로 무공 발전에 큰 밑거름이 될 일일 것이다.
그렇게 의제, 한해북, 예지 그리고 나까지.
우리는 만검의 충격을 느끼면서, 만검존과 그의 아내, 아들의 뜨거운 상봉을 한참이나 지켜보아야 했…… 쾅!
콰콰콰콰쾅!
콰콰콰콰콰콰쾅!
“으아아아악!”
“아아악!”
쾅쾅쾅!
장원 밖에서 엄청난 폭발이 일었다.
끔찍한 비명이 사방으로 울려 퍼졌고, 우리는 곧바로 그곳으로 몸을 날려야 했다.
쾅!
콰콰콰쾅!
“으아아악!”
“살려 줘!”
“아아악!”
왕대였다.
무림맹 태안 지부 지부장이 무인들 수십 명을 이끌고 이곳으로 오다가 길목을 지키고 있던 왕대와 마주친 것이다.
그리고 뭐, 결과는 뻔했다.
우리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칠 할 가까운 무림맹 무인들이 왕대의 손에 의해 처참한 몰골로 죽은 후였다.
“왕대, 그만.”
내 말에 쉴새 없이 손을 놀리던 왕대가 동작을 멈추었다.
갑작스레 대부분의 무인들을 잃은 태안 지부 지부장.
그리고 간신히 그때까지 죽지 않았고 살아남은 다른 무인들까지.
모두 순식간에 일어난 엄청난 일에, 귀신이라도 본 것과 같은 얼굴로 꼼짝도 하지 못했다.
난 지부장에게 다가갔다.
“난 대화를 하고 싶은데.”
왕대의 괴물 같은 위력에 놀란 지부장은 쉬이 대답하지 못했다.
그래서 난 왕대를 불렀다.
“왕대야, 하던 거 계속해야겠다.”
그때였다.
“대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 혀어어어어어어어어업!”
지부장이 정말 원기까지 끌어내 목청을 높였다.
“음, 이제 좀 대화가 통할 것 같군.”
지부장을 포함, 살아남은 무림맹 태안 지부의 무인들을 모두 장원에 가두었다.
*
그날 저녁.
의제와 예지가 마을 객잔으로 가 이것저것 먹을 것을 잔뜩 사 왔다.
그사이 한해북과 왕대가 무림맹 무인들을 시켜 장원을 깨끗이 치웠다.
시체들까지 말끔히 뒷산에 묻어 주기까지 했다.
아무튼 그렇게 저녁 식사를 하는 중이다.
“사실 정말 많이 놀랐어요. 만검이 그렇게 대단한 무공인 줄은 정말 몰랐거든요. 오늘 크게 개안을 한 느낌입니다.”
“과찬이십니다.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저야말로 구절협 한해북 대협의 명성은 오래전부터 들었던 터라, 이렇게 함께 자리하게 된 것만으로도 큰 영광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궁금한 거 물어봐도 돼요?”
“물론입니다, 봉황검 금 여협.”
“그냥 금 소저라고 불러주세요, 맹 대협.”
“아, 네. 그리하겠습니다.”
예지는 낮에 본 만검에 대해 궁금한 게 무척 많았나 보다.
꽤 많은 질문을 쏟아냈고, 만검존도 자신의 만검을 알아봐 주는 예지에게 고마워하며 상세히 만검의 묘리를 설명해 주었다.
“제 머리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익히기 힘든 무공이네요. 그렇게 복잡한 무공을 대성하시다니, 맹 대협께서는 정말 대단하십니다. 하하하!”
“부끄럽습니다. 천하의 우각도협 곽우적 대협의 경동팔무도법이야말로 이미 천하가 모두 인정하는 신공이 아니겠습니까?”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맹 대협. 아직은 맹 대협의 만검에 조금은 부족할지 모르지만, 언젠가는 당당히 맹 대협의 칼을 받을 날이 있을 테니, 기대해 주십시오.”
“네. 꼭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하하하.”
큰 싸움을 치른 이후라기엔 분위기가 굉장히 좋았다.
모든 게 다 잘되었기에 그럴 수 있었다.
내일이면 지금 잡혀 있는 무림맹 태안 지부 사람들도 풀어줄 것이다.
그들은 내일 알아서 이번 일이 자신들이 꾸민 일임을 자백하고 죄인을 자청하게 될 테다.
이미 개방에서 사람들까지 다녀갔다.
뭐, 모든 진실을 다 밝힐 수는 없다.
아직 맹주와 전면전으로 붙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맹주야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알고나면 열불이 끓어오르겠지만, 그 역시 이번 일의 진상을 모두 밝힐 수는 없을 것.
이번에도 일이 잘못된 걸 알게 된 맹주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너무 궁금하다.
됐다.
맹주의 목은 언젠가 떨어지게 될 테다.
그때까지 무슨 수작을 부린다 해도, 이젠 내 손바닥 안이다.
언젠가부터 이상하게도 맹주가 더 이상 내 상대가 아니라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진 것이다.
“하하하하. 그때 그랬다니까요.”
“어머, 정말요? 거짓말 같아요.”
“정말이라니까요.”
“하하하하.”
“호호호.”
술이 몇 순배 돌자 분위기는 더 좋아졌다.
많이 놀랐던 만검존의 아내까지 얼굴에 미소가 피어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툭.
맹소강이다.
낮부터 지금까지 거의 한마디도 하지 않았던 녀석이다.
처음에는 많이 놀라 그런가 싶어서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했는데, 표정이 조금 이상했다.
지금도 나에게 슬그머니 다가와 내 옆구리를 툭 치는 게, 뭔가 겁을 먹은 표정은 절대 아니었다.
“아저씨.”
“왜?”
“들었어요?”
“뭘?”
녀석.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대단한 고수들인지 모르나 보다.
다른 사람 못 듣게 한다고 나에게 속삭이듯 말하는 게 귀엽다.
“아니, 지금 못 들었어요?”
“그러니까, 뭘?”
“봉황검 금예지 여협이시라고요. 봉황검! 화산파의 수룡검 천무휘 대협하고 쌍벽을 이루는 봉황검이 왔어요.”
얘가 뭔 소리를 하려고 이러지?
“그리고 저분은 우각도협 곽우적 대협, 그리고 저분은 구절협 한해북 대협이시라고요.”
우리 녀석들을 바라보며 나에게 속삭이는 우리 소강이 말이다.
눈에서 검강이라도 쏟아질 것 같다.
“와아아! 아저씨도 지금 속으로 엄청 놀랐죠? 저렇게 유명한 분들이 지금 눈앞에 있으니까요. 그나저나 우리 아빠가 좀 무신경한 건 알았는데, 떨리지도 않나 봐요. 저렇게 유명한 협객들하고 떨지도 않고 자연스럽게 대화하는 거 봐요. 아저씨도 떨리죠? 저렇게 유명한 분들을 실제로 보니까요.”
이 녀석,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내가 슬쩍 턱짓으로 왕대를 가리켰다.
“그럼 저 사람은 누군데?”
“왕대 대협. 아저씨가 잘 모르는 모양인데. 이미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아요. 신비의 고수. 최근 협행에 합류한 비밀 고수라고 해요.”
“아! 그래? 그럼 나는?”
“네? 뭐가요?”
“저들하고 함께 다니는 나는 누군데?”
“에이, 아저씨 왜 이래요? 장난치지 마세요. 저 지금 제 우상님들 보느라 바빠요. 언제 떠나실지 모르니까, 그때까지 눈에 고이 담아둬야 해요. 아저씨도 저 그만 쳐다보고 어서 저분들 눈에 담으세요. 이거 평생 자랑할 거리에요.”
그렇게 맹소강은 다시 우리 녀석들의 말 한마디, 행동거지 하나라도 놓칠세라 눈에 힘까지 줘 가며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뭔가 뜨끔했나 보다.
갑자기 움찔하나 싶더니, 이내 귀신이라도 본 것과 같은 얼굴로 천천히, 천천히 고개를 돌아 나를 쳐다보았다.
“아, 아저씨…… 아저씨 설마…… 아저씨가 설마…….”
이 녀석, 이러다 울겠다.
그만 놀려야겠다.
난 크게 웃으며 녀석을 꽉 안아 주었다.
“그래 인석아. 내가 바로 현화문의 마악치다, 하하하하!”
“으아아아앙!”
맹소강이 아무리 총명해도 고작 열두 살 아이다.
놀란 마음에 울음을 터뜨리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이다.
뭐, 덕분에 우리는 다시 한바탕 크게 웃을 수 있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