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화
“누굽니까?”
무림맹 태안지부를 벗어나 만검존의 집으로 돌아왔다.
내내 침묵을 유지하던 그가 내뱉은 첫 마디가 이거였다.
“누구를 물으시는 겁니까, 맹 대협?”
“제 친구를 변절시킨 놈이요.”
“음…….”
난 잠시 뜸을 들였다.
사실을 말해 주면 만검존이 어떻게 나올지 몰라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현시점에서 만검존이 지랄발광이라도 한다면, 아무도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곧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만검존은 그런 부류의 사람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무림맹주, 창궁검제 남궁비혁입니다.”
만검존은 역시나 차분했다.
고개만 몇 번 끄덕이며 무림맹주의 이름만 머리로 새기는 듯했다.
그렇게 약간의 시간이 지났다.
“마 도사님, 이제 어떻게 해야 하죠?”
“생각해 둔 바가 있긴 한데…….”
“부탁드립니다. 말씀해 주십시오.”
난 그날 만검존과 오랜 시간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관한 이야기였다.
*
만검존은 여드레 전 평치산으로 돌아갔다.
만검존이 떠남과 동시에 나도 그의 집에서 나왔다.
대신 그의 집에는 새 사람이 들어왔다.
만검존의 부인, 그녀의 이종사촌 여동생이 곧 시집을 가는데, 시집가기 전 어렸을 적 가장 친했던 언니인 만검존의 부인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 위해 이곳에 며칠간 머무는 중이다.
응, 위장이다.
실은 우리 예지가 사촌 여동생으로 위장해 그 집에 머무는 중이다.
그렇게 여드레가 됐을 때.
조회한이 찾아왔다.
나와 의제, 한해북은 조용히 몸을 숨긴 채 상황을 지켜보았다.
“제수씨, 잘 지내셨어요?”
“네, 무림맹에 가셨던 일은 잘되셨나요?”
“네, 덕분에요. 하하.”
간단한 인사가 오간 후.
“그런데 묵치 이 친구는 안 보이네요?”
“여드레 전에 산으로 돌아갔어요.”
“아! 이 친구, 하여간 못 말린다니까. 며칠만 더 참지, 허 참. 그런데 못 보던 분이 계시네요?”
“아, 제 이종사촌 여동생이에요. 소향아, 이리 와 인사드려라.”
예지까지 인사를 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초절정 극상의 고수인 예지가 작정하고 무공을 숨겼으니, 고작 일류 무사 초입의 조회한이 알아볼 리 만무할 테다.
“그럼 묵치 이 녀석 보려면 평치산을 또 올라가야겠네요.”
“그러게요. 어쩌죠?”
“하하! 뭐, 하루 이틀 일도 아닌데요. 괜찮습니다.”
둘은 잠시 일상의 대화를 조금 더 나눈 후에야 헤어졌다.
그리고 그날 밤.
복면을 한 흑의인 서른 명이 맹묵치의 집을 포위하고, 또 몇몇이 담장을 넘었다.
만검존의 아내와 아들 소강은 물론, 우리 예지까지 속절없이 그들에게 납치되었다.
아니, 납치되어 주었다.
*
다음 날 조회한이 홀로 평치산을 올랐다.
혹시 몰라 뒤를 살폈지만, 역시나 혼자였다.
무공은 일류 무사급 초입에 불과하지만 그 간덩이 하나는 알아줄 만하다.
하긴, 평범한 인간이 자기 친구를 두고 무림맹의 맹주와 거래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무튼 오늘도 나와 의제, 한해북은 은형술을 극대로 펼쳐 그의 뒤를 밟았다.
당연히 그의 목적지는 만검존이었다.
“어이! 친구, 잘 지냈나? 하하.”
“왔는가.”
“무슨 일 있어? 표정이 별로 좋지 않군.”
“아니, 그냥. 그런데 무슨 일이지?”
“어허, 이거 섭섭하군. 내가 꼭 무슨 일이 있어야 이곳에 오는 사람인가?”
만검존은 내가 신신당부한 만큼 최대한 자연스럽게 조회한을 대하고 있다.
하지만 그게 노력한다고 다 되는 건 또 아니다.
천무휘도 처음에는 연기가 굉장히 어색했었다.
뭐, 나중에는 내가 다 놀랄 만큼 능청스럽게 연기를 잘 해냈지만 말이다.
지금 만검존이 딱 천무휘의 첫 연기를 보는 듯했다.
많이 어색하고 딱딱하고, 그냥 그랬다.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생각을 품은 채 짧은 인사와 대화를 나누었고.
“이보게, 묵치. 할 말이 있네.”
“……?”
“이곳 산동에 지금 마악치란 자가 와 있네. 정확한 위치는 아직 맹에서도 파악하지 못하지만 멀리 있지 않을 것이란 추측일세.”
“마악치? 현화문의 마악치 말인가? 일전에 자네가 말했던 그 유명한 협객 말이야.”
“맞아, 그 마악치. 그런데…… 음, 놀라지 말고 들으시게.”
만검존이 고개를 끄덕이자 조회한이 곧바로 말을 이었다.
“실은, 내가 지금까지 알던 마악치. 그러니까 자네에게 말했던 그 협행을 하던 마악치가, 실제는 사악한 마두였다는군.”
“음…….”
“믿기 힘들다는 것 아네. 하지만 맹에서 몇 번에 걸쳐 확인한 사실일세. 사람 죽이기를 즐기고, 여인들을 노리개처럼 농락하는 파렴치한에, 아이들마저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목숨을 빼앗는다는 사실을 여러 차례에 걸쳐 확인하였다네.”
아니, 저 개새끼가.
아! 일단 참자.
“못 믿을 건 또 뭔가?”
“응? 그럼…… 내 말을 믿는다는 건가?”
“허허, 이 친구. 마악치란 사람에 대해 이야기해 준 게 자네 아닌가? 그런데 자네가 다시 그 사람을 다르게 이야기하고, 그것이 무림맹에서 확인한 사실이라는데, 내가 믿지 못할 건 또 무엇인가 말일세.”
“하하! 하하하. 그렇지?”
“그런데 갑자기 그 이야기는 왜 나에게 하는 건가?”
“실은…… 일전에도 말했지만, 그 마악치의 무공이 엄청나게 고강하다네. 거기에 더해 현재는 봉황검 금예지라는 아미파의 초절정 극상의 고수까지 함께하고 있어. 더 큰 문제는, 그들 무리에 마공을 익힌 마인이 섞여 있다는 사실이야.”
“웬만한 문파보다 전력이 더 강하다는 말로 들리는군.”
“맞아. 내 말이 딱 그거야. 무림맹에서 나서도 엄청난 인명 피해를 감수하지 않는 이상, 그자를 잡을 수 없다네. 무림맹의 맹주가 친히 나서기 어렵다는 사실은 자네도 이해할 것이고 말일세.”
“나에게 그자를 잡아 달라는 말인가?”
“묵치, 자네라면 가능하지 않은가? 자네의 만검이라면 말일세. 천하를 구하는 일이고, 어려운 이들을 돕는 일일세. 도와주면 안 되겠나?”
“미안하네. 자네를 못 믿는 건 아니지만 또 그 말을 모두 믿기도 힘든 것도 사실일세. 무엇보다, 난 그 마악치라는 사람과 어떤 은원도 없네. 내가 그와 싸울 명분이 없어. 그리고 자네도 알다시피 나는 지금 수련 중일세. 무림맹에서는 다른 사람을 찾아보는 게 좋을 걸세.”
“이봐, 묵치. 지금 이게 얼마나 중차대한 일인지 모르나?”
“모르네.”
“묵치!”
조회한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만검존은 여전히 평온한 얼굴로 그런 조회한을 쳐다볼 뿐이었다.
이에 조회한이 뜨끔했는지, 서둘러 화난 얼굴을 풀었다.
“친구의 부탁일세. 그래도 어렵나?”
“다른 부탁이라면 모를까. 아마 마악치란 자와 싸우게 되면, 분명 피를 봐야 할 텐데. 사람을 죽이는 일은 아무리 자네의 부탁이라도 어렵네. 대신 다른 부탁은 무엇이든 들어주지.”
“나에게 필요한 건 마악치의 목이라고.”
“자네…… 그와 무슨 원한이라도 졌나? 아니면, 그의 목을 베면 무림맹에서 좋은 자리를 주겠다고 약속이라도 받았나?”
“그러면 또 어떤가? 친구가 이렇게 간절히 부탁하는데, 일신에 능력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돕지 않는다면, 그것이 친구인가? 자네가 내 평생지기 친구 맞아?”
“나도 그러고 싶네. 평생지기 친구. 늙어 죽는 그날까지 이렇게 나란히 앉아 소소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그런 친구 말일세. 자네와 그런 친구로 남고 싶었는데…….”
“무슨 말이야?”
“아닐세. 이만 산을 내려가 보세. 나도 다시 수련이나 해야겠네.”
만검존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조회한에게 등까지 보여 성큼성큼 걸어가는 것이, 실제로 수련할 준비를 하는 것 같았다.
그러자 조회한의 온몸이 부르르 떨려 왔다.
분노한 것이다.
곧, 그 역시 자리에서 일어섰고.
“자네 부인, 아들.”
딱 이 말만을 했다.
그러자 성큼성큼 걸어가던 만검존의 걸음이 멈추었다.
조회한은 그런 만검존의 등을 보며 말을 이었다.
“자네 부인의 이종사촌이란 여인도 있더군. 세 사람 모두 현재 본 맹에서 극진히 대접하고 있네.”
만검존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은은한 분노가 그의 표정에 드러나고 있었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것이지?”
“말 그대로야. 세상이 흉흉해 우리가 안전하게 자네의 가족들을 보호하고 있다는 말을 한 것일세.”
“회한, 자네…… 자네가 정녕…….”
“약속하지. 내 목을 걸고 하는 약속이야. 다른 사람도 다 필요 없고. 정확히 마악치. 그놈 딱 한 명의 목만 따. 그러면 자네의 부인과 아들은 끝까지 극진한 대접을 받다가 집으로 돌아갈 테니까.”
“진심인가? 자네, 지금 나에게 진심으로 협박하는 건가?”
“협박이라, 하하. 우리 사이에 그런 말은 어울리지 않지. 말했잖아. 극진한 대접을 하며 보호하고 있다고. 제수씨와 소강이가 불편하지 않게, 시비까지 두 명이나 붙여 줬어. 물론, 자네가 약속을 지킬 때까지만이야. 만약…….”
“…….”
“만에 하나 자네가 조금 전처럼 마악치의 목을 베지 않는다고 하거나, 일에 실패하게 되면…… 나도 제수씨와 소강이의 안전을 약속할 수 없다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다 잘되자고 이러는 거야. 자네는 악적 마악치의 목을 베어 천하에 명성을 떨치고, 아니 명성을 떨치는 정도가 아니라 천하를 진동시킬 거야. 마악치의 목만 베면 말이야. 무림맹에서도 곧바로 자네를 무림육대고수, 그것도 아니지. 이제는 무림칠대고수지. 자네가 화경의 고수가 된 것을 무림맹에서 정식으로 인정하고 이를 공포할 것일세.”
만검존은 대꾸하지 않았다.
분노하지도 않고, 흥분하지도 않았다.
그냥 조용히 조회한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얼마나 좋아? 하루아침에 금은보화를 집안 가득 쌓아 놓고, 자네를 따르겠다는 고수들이 천하 각지에서 구름처럼 몰려들 것이라니까! 이봐, 묵치. 그냥 내가 하자는 대로 좀 하자고. 이게 다 자네와 제수씨, 그리고 소강이를 위한 길이라고.”
조회한은 간절한 얼굴로 그렇게 입에 침까지 튀어 가며 만검존을 설득했다.
조회한의 말을 잠자코 듣던 만검존.
그의 말이 모두 끝났음에도 한참이나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저 조회한과 눈을 마주한 상태로, 꽤 오랜 시간을 그냥 그렇게 보냈다.
조회한 역시 더는 설명을 잇지 않았다.
그는 알고 있는 것이다.
오랜 친구였기에 가능할 일이었다.
만검존이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
하지만 틀렸다. 지금 만검존이 결정할 선택은, 그의 선택이 아니라 나의 선택이다.
“마악치.”
“응? 뭐라고?”
“마악치 한 명. 다른 사람까지 죽이진 않겠다.”
“정말? 정말 해 줄 거야? 하하하! 내가 그럴 줄 알았어. 난 자네를 믿었다고! 우리가 이러니까 죽마고우 아니겠어? 하하하! 고마워, 정말 고맙다고! 하하하하!”
“그 전에!”
“……?”
“아내와 아들이 안전한지 확인해야겠다.”
“어? 그, 그게…… 말했잖아. 시비까지 두 명이나 붙여 줬고, 정말 극진하게 대접하고 있어. 전각을 지키는 고수만 서른 명이 넘는다니까? 믿어도 돼.”
“아니, 이제 아무도 믿지 못하겠어.”
“나야, 나. 조회한이라고. 자네 불알친구 조회한.”
“그래서 더 못 믿겠어. 마악치의 목은 확실히 베겠다. 직접 그 수급을 자네 손에 쥐여 주지. 하지만 분명히 그전에 내 아내와 아들의 안전을 직접 확인해야겠다.”
“그, 그게…….”
조회한의 눈동자에 지진이 일어났다.
머리 굴리는 소리가 먼 이곳까지 들려오고 있다.
짧은 시간, 엄청난 고민에 빠진 그였다.
하지만 결국.
“다른 생각 갖고 있는 건 아니지? 고수들이 지금은 자네 부인과 아들을 지키고 있지만, 자네가 다른 마음을 품는 순간 그들은 호위 무사가 아니라 살인마로 변할 수 있어.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지?”
“내 아내와 아들의 안전이 우선이다. 그것만 확인하면, 곧바로 마악치의 목을 베러 움직이겠다.”
“그래, 맞아. 안전이 최고지. 안전.”
조회한이 다시 빠르게 고민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좋아. 그럼 얼굴만 보는 거야? 곧바로 마악치 잡으러 떠나야 하고?”
만검존이 고개를 크게 끄덕여 답했다.
그러자, 그제야 조회한의 얼굴에도 일말의 불안함을 머금은 화색이 도는 듯했다.
멍청한 새끼.
무려 일 년이나 만검을 수련했다면서, 만검이 무엇인지 조금도 모르는 놈이다.
만검은, 시공간을 장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