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화
“그런데 마 대협께서는 어떻게 이곳까지 오게 된 건가요?”
만검존이 여전히 환히 웃으며 그렇게 물었다.
나에 대해 무언가를 캐내려는 그런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저 순수한 궁금함으로 보였다.
“맹 대협께서 이곳에 계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혹, 무림맹에서 알려 주었나요?”
무림맹?
뭐지? 만검존이 무림맹 소속인가?
아닌 것 같은데.
“아니요. 그건 아니고. 우연히 만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고, 이곳 평치산에서 오랜 시간 만검을 수련 중인 무사님이 계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 그렇군요. 하하. 이거 부끄럽습니다. 만검을 익힌다고 하면, 다들 좋게 말하지는 않았을 텐데요.”
나보다 열 살이 많은 만검존이다.
잘생겼다.
천무휘처럼 조각 같은 미남은 아니다. 그냥, 웃는 게 멋진 또 괜히 보고 있으면 훈훈해지고 마음이 따뜻해지는 그런 미남이다.
그렇게 잘생긴 주제에 또 순박하기까지 하다.
머리를 긁적이며 부끄러운 듯 저리 말하고 있는 게 그리 보였다.
그리고 중요한 문제를 물어볼 때다.
“대성…… 하셨군요?”
내 물음에 만검존이 머리를 긁적이던 손을 내리더니, 나를 보며 방긋 웃는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인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였다.
“경하드립니다, 맹 대협.”
“부끄럽습니다. 감사합니다, 마 대협. 하하.”
착해 보인다. 아니, 착한 사람이다.
난 왜 저 사람을 죽였을까?
아니, 만검존은 도대체 왜 나에게 도전장을 보냈을까?
미안하다는 말은 뭐였고, 왜 나를 죽일 수 있었으면서 주저했던 것일까?
그보다, 조금 전 챙기던 것을 보았다.
봇짐이다.
벌써 하산을 하려는 것인가?
분명 몇 달 뒤에 나와 이곳에서 싸웠는데.
그때까지 이곳에 은거하고 있던 거 아니었나?
뭔가 좀 다르고 이상했다.
광마일기에 적힌 부분과 다른 내용이다.
내가 놓쳤거나, 바뀌었거나.
둘 중 하나다.
“혹, 수련을 마치고 하산하려던 길이셨습니까?”
“아! 그건 아닙니다. 근자에 만검에 대한 성취가 있었지만, 그것을 온전히 제 것으로 만들려면 족히 몇 달은 더 수련해야 합니다.”
“그런데 봇짐은……?”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제겐 아들이 있습니다. 부인도 있고요. 평치산 아랫마을에 살고 있는데, 여인 한 명과 어린 아들 단둘이 살기에는 좀 흉흉한 세상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십 년 가까이 이곳에서 수련하는 동안, 친구가 제 가족을 보살펴 주고 있습니다. 무림맹 산동 태안 지부에서 꽤 높은 직책을 맡고 있는 친구라, 큰 도움을 받고 있지요.”
무림맹이다.
뭔가 냄새가 난다.
아! 그러고 보니 아까 그래서 나에게 무림맹에서 온 것 아니냐고 물어봤던 거군.
만검존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러고 보니 두 번째군요. 제가 만검을 대성한 사실을 알린 첫 번째 사람이 제 친구 녀석이고. 마 대협께 두 번째로 이 사실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하하.”
무림맹에 이미 또 다른 화경의 고수가 탄생했음이 보고됐을 것이다.
“아무튼 그 친구 녀석이 무림맹 본 맹에 일이 있어서 한 달 정도 하남에 다녀와야 한다고 해서요. 그래서 그 친구 없는 한 달 동안 집에 내려가 있을 참입니다. 혹…….”
만검존이 살짝 부끄러워하며 말을 이었다.
“누추하지만 따로 묵을 곳을 정하지 않으셨다면, 저희 집에서 머무시는 건……. 아이고, 제가 조금 주제를 넘었습니다. 변변치 못한 집구석에 마 대협과 같이 유명하신 분을 초대하려고 하다니. 죄송합니다. 그냥 못 들은 것으로 해 주십시오.”
지금까지 봐 왔던 화경의 고수들과는 완전히 다른 부류다.
산속에 혼자만 살아서 그런가?
도도함, 넘치는 자신감, 그런 게 조금도 없다.
그나저나, 냄새가 나도 너무 난다.
무림맹에 만검존이 화경의 고수가 된 사실이 보고됐다.
그런 후 그 친구라는 자는 무림맹 본 맹을 방문한다고 한다.
너무 공교롭지 않은가?
아무래도 광천마제 시절 내가 만검존과 싸웠던 이유가 어쩌면 그것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구 할 이상의 가능성이다.
하지만 심증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맹 대협, 초면이지만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네? 부탁요?”
“네. 맹 대협 댁에 방 한 칸만 내주십시오. 그리고…….”
“……?”
“제 신분은 당분간 비밀에 부쳐 주실 수 있겠습니까?”
만검존이 고개를 갸우뚱한다.
하지만 그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왜 그러한지 묻지도 않고, 그가 방긋 웃으며 답했다.
“어려울 일이 있겠습니까? 친구와 아들 그리고 아내에게도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마 대협께서 때로는 사악한 마두를 잡기 위해 위장과 매복도 한다고요. 얼마든지 저희 집을 이용해 주십시오. 영광입니다. 마 대협의 신분에 대해서는 가족에게도 함구하겠습니다.”
*
만검존과 그 주변을 감시해야 했다.
하지만 만검존의 허락 없이 그를 감시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왜?
그가 화경의 고수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그가 공간장악에 있어서는 천하제일에 가장 가깝기 때문이다.
그가 완벽히 통제하고 있는 그의 주변을 그의 기감을 벗어나 어슬렁거린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그의 허락을 구하고 그의 집에 머물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그의 집에 도착했다.
그의 아내는 만검존이 산을 내려가며 말했던 것보다 훨씬 더 미인이었다.
그리고 아들 녀석도 미남인 아버지와 미녀인 엄마를 닮아 인물이 상당히 훌륭했다.
거기에 총명하고, 무재는 두말할 나위가 없고, 무엇보다 만검존을 닮아 그런지 성격도 좋고 착한 아이였다.
만검존의 집은 생각했던 것보다 꽤 크고 넓었다.
산동 태안에서는 꽤 유서가 깊은 무가였다고 한다.
그래서 만검존이 십 년 동안 평치산에서 수련을 하였어도, 돈 걱정을 크게 하지 않을 수 있었다고 한다.
시비나 일꾼이 있고 비단옷에 장신구를 치렁치렁 달고 그런 것은 아니지만, 밥 굶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정도라 하였다.
또 무림맹 태안 지부에 있는 친구 덕분에, 이곳은 무림맹 무사들이 수시로 순찰을 돈다고 하였다.
태안이라는 대도읍에 속한 마을로, 마을의 규모가 꽤 컸지만, 워낙 오래됐고 한때 그 명성이 상당했던 무가였기에, 흑도 패거리나 도적들이 함부로 담장을 넘을 생각도 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래저래 안전하고 궁핍하지 않으며, 평온한 삶을 살고 있는 평범한 가정이었다.
만검존도 두서 달에 한 번씩은 마을로 내려와 가족들과 하룻밤을 보냈고, 부인과 아들 역시 일 년에 한두 번은 평치산을 올라 만검존과 하루 이틀을 보냈었다고.
평범하면서도 매우 행복해 보이는 가족이었다.
-형님, 형님!
담벼락 너머로 의제의 전음이 들려 왔다.
난 곧바로 고개를 돌렸다.
담벼락을 향해서가 아니라, 오랜만에 아들의 무공을 봐주고 있는 만검존을 향해서다.
분명 알았을 텐데.
만검존은 일부러 모른 척했다.
어쩌면 지금 내게 전음을 보낸 상대가 우각도협 곽우적이라 추측하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일부러 저리 모른 척해 주는 것일 수도 있다.
내 신분에 대해 함구해 주기로 약속했으니 말이다.
-자시(子時, 밤 12시)에 내가 객잔으로 찾아가겠다.
-알겠습니다, 형님.
의제가 떠나는 게 기감으로 잡혔다.
여전히 만검존은 아들의 무공을 봐주고 있을 뿐이다.
난 그런 만검존에게도 전음을 보냈다.
-세상에 우각도협이란 별호로 알려진 제 의제 녀석입니다. 천무휘를 뺀 다른 친구들 모두 지금 동목객잔에 묵고 있습니다. 오늘 자정에 잠시 동목객잔에 다녀와야겠습니다.
아들의 무공 자세를 고쳐주던 만검존이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고개를 살짝 끄덕여 준 후 다시 아들의 수련을 도왔다.
참, 화경의 고수가 소박하기도 하고, 순박하기도 하고.
지금 당장 태안 제일 문파에 쳐들어가 박살을 내고, 산동제일문을 개파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을 신공을 일신에 지니고 있으면서도, 그는 집에 돌아온 후 저렇게 아들 녀석과 시간을 보내는 중이다.
“자! 이 아저씨도 한칼 하는데, 어때, 소강아? 아저씨랑 비무 한번 해 볼래?”
“정말요? 그럼 아저씨께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아빠, 괜찮지?”
“하하, 물론이다. 열심히 배워야 한다. 감사함을 잊어서는 안 되고.”
“알았어요, 아빠. 아저씨! 고맙습니다. 잘 부탁드려요.”
“그래, 좋다. 한판 멋지게 붙어 보자.”
“네! 하하하!”
한 식경 뒤에 느낀 바가 있다.
역시 호부 밑에 견자 없다는 옛말이 거짓이 아님을 깨달을 수 있었다.
만검존 맹묵치의 아들 맹소강.
천재다.
내가 봤던 수많은 아이 중, 천무휘의 무재에 가장 근접한 아이가 바로 맹소강이었다.
*
동목객잔, 자정.
“개방에 의뢰해 맹묵치와 그 집안 그리고 주변 인물에 대한 정보를 얻었습니다.”
“한 형, 맹묵치의 친구가 무림맹에 있다고 하던데요? 무림맹 산동 태안 지부에서 꽤 직책이 높다고 들었어요.”
“네. 태안지부의 이인자로 지부부장 자리를 꿰차고 있습니다. 별호는 우쾌검(雨快劍)고 이름은 조회한이란 자로, 맹묵치가 평치산에서 십 년 가까이 은거하며 수련하던 기간 동안, 맹묵치의 부인과 아들을 각별히 돌봐주었다고 합니다. 두 사람 우정이 꽤 대단하다고 인근에 칭찬이 자자할 정도랍니다.”
한해북의 설명이 이어졌다.
“어렸을 적에는 조회한이란 자도 맹묵치와 함께 만검을 수련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조회한은 일 년도 안 되어 수련을 포기하고, 대신 쾌검을 익혀 무림맹 하급 무사로 입맹하였습니다. 특이한 점은…… 음, 이건 아무리 봐도 좀 이상하네요.”
한해북이 개방에서 얻은 정보로 본인이 직접 작성한 서류를 보며 고개를 갸우뚱한 후 말을 이었다.
이곳 개방 태안 지부 거지들도 글자를 모르는 모양이다.
아무튼 한해북의 표정이 조금 기이했다.
도대체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이었다.
“개방에서 분류한 그의 무공 경지가 일류 초입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일류 무사급이라고요?”
“네, 마 형.”
“아까 하급 무사로 무림맹에 입맹하였다고 했을 때도 좀 이상했는데. 고작 일류 초입의 경지로 태안이라는 거대 도읍의 무림맹 지부 이인자가 됐다는 말이에요?”
“네. 그래서 저도 이곳 개방 분타주에게 몇 번이나 확인했지만, 사실이라는 답변만 받았습니다.”
“음, 확실히 뭔가 이상하긴…… 그렇군.”
그거다.
만검존.
맹주는 만검존의 가능성을 어쩌면 진즉 알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만검존의 친구인 조회한에게 그에 대한 감시를 맡겼고, 그 대가로 태안 지부의 지부부장 자리를 주었을지도.
물론 이건 아직까지 추론에 불과하다.
한해북은 그 외에도 개방에서 얻은 많은 정보를 나에게 설명해 주었다.
하지만 역시나 의심할 만한 인물은 단 한 명.
만검존의 친구 조회한이다.
“예지야, 의제, 한 형. 할 일이 있습니다.”
“형님, 무엇이든 말씀만 하십시오.”
“오늘부터 그 조회한이란 자를 열두 시진 감시해서 나에게 보고해 줘. 곧 무림맹으로 떠난다고 하니까, 무림맹 근처까지 미행하고, 그가 돌아오는 것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살펴줘.”
예지가 물었다.
“무림맹 내에서는?”
“안 돼. 그건 너무 위험해. 무림맹까지 따라 들어가지는 마. 위험도 위험이지만, 발각되면 일을 그르칠 수 있어.”
“알았어, 오빠.”
세 사람에게 추가 설명을 이었다.
잠시 후.
“주인님, 저는 무얼 하면 되겠습니까?”
왕대다.
아! 이 녀석에게는 뭘 시키기가 좀 그런데.
그렇다고 자기도 간절히 이 계책에 참여하고 싶어 하는 초롱초롱한 눈동자를 외면하기도 뭐하고.
어쩌지?
“왕대…… 음, 그러니까…… 응…… 너는…….”
아이 씨! 뭘 시키지?
나도 나지만, 예지와 의제 그리고 한해북까지 덩달아 나와 왕대의 눈치를 보고 있다.
왕대가 실망할 것을 걱정하는 것이다.
내가 주저할수록 왕대는 다른 사람보다 더 엄청난 임무를 맡기기 위해 그런다고 생각했는지, 눈에서 이젠 별이 쏟아지고 있다.
뭐든 시키긴 시켜야 하는데.
“어려운 일인데…….”
“할 수 있습니다, 주인님!”
“그, 그래?”
“넵! 지옥으로 가 악귀의 목을 따 오라고 해도 따오겠습니다.”
“아! 뭐, 그렇게까지 할 건 아니고. 그래, 수련. 넌 당분간 평치산에 올라가 홀로 지옥 수련에 임해. 왜 그래야 하는지 알아?”
“제가 멍청해서 주인님의 깊은 뜻을 모르겠습니다.”
“알려 주지. 네가 강해져야 해. 우린 지금 어쩌면 천하를 뒤흔들 엄청난 적들과 싸우고 있어. 우리 모두 죽을지도 몰라. 죽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적보다 더 강해져야 합니다.”
“맞아, 그거야. 하지만 나는 맹묵치를 감시해야 하고, 예지와 의제 그리고 한 형은 조회한이라는 자를 감시해야 해. 남은 건 누구지?”
“접니다, 주인님!”
“그렇지. 네 어깨에, 네가 얼마나 더 강해지냐에 따라, 나는 물론 우리 모두의 목숨이 걸려 있어. 아니, 천하의 운명이 모두 네게 달려 있어. 네가 맡은 임무가 얼마나 중차대한 것인지 알겠지?”
왕대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이 녀석, 지금 진심이다.
기왕 하는 거, 좀 제대로 하자.
나는 눈에 힘까지 잔뜩 주며 왕대의 어깨를 한 손으로 꽉 잡았다.
그런 후 비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천하를 구하는 영웅이 되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