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화
“어머, 그런 일이 있었어, 오빠? 호호호.”
절강에서 산동으로 가는 길.
위화궁에 닷새 동안 머물며, 내가 겪었던 일을 말해 주었더니, 예지가 배꼽까지 잡아가며 웃었다.
난 심각한데, 뭐가 저리도 웃긴 지 모르겠다.
닷새 동안 향이에게 들은 유일한 말이 ‘뭐?’였다.
“예지야, 나 심각해. 업보란 게 있어. 난 항상 향이에게 죄인이고, 그렇기 때문에 향이를 언제나 즐겁게 해 줘야 하는 의무가 있다고. 그런데 이젠 어떻게 향이를 즐겁게 해 줄 수 있을지 모르겠어서 정말 답답하단 말이야.”
“풋. 오빠, 걱정하지 마.”
“방법…… 있어? 도대체 그 쪼그만 아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대체 모르겠단 말이야.”
“응. 난 답을 알고 있지.”
“알려 줘, 어서. 부탁이다, 예지야.”
“음…… 오빠는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뻐? 그 백미호라는 여자? 아니면 북해로 갔다던 설민민이라는 여자? 몇 달 전에 봤던 장위지 소저도 엄청 예쁘던데.”
“금 여협! 당금 천하의 제일미인은 당연히 금 여협이십니다.”
“호호호! 호호호호! 우리 오빠 그렇게 안 봤는데, 아주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거짓말을 잘하네. 호호호.”
“아이, 그러지 말고 좀 알려 줘, 예지야.”
“시간.”
“응? 시간? 그게 뭐?”
“시간이 해결해 줄 거라고. 그 나이대의 소녀들이 원래 그래. 좋아해도 좋다고 말하지 않고, 싫어도 말 대신 짜증만 내고. 나도 향이 만했을 때는 똑같았어. 괜히 사부님에게 짜증도 내고, 뭐라 말해도 무시하고. 온종일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도 않고.”
“정말? 우리 예지는 안 그랬을 것 같은데.”
“에이, 나라고 다를 게 있나. 다 똑같지. 그 나이대의 소녀들이 원래 좀 그래. 일이 년 정도 지나면, 아니 삼사 년?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시간이 다 해결해 줘. 그때는 어린아이가 아닌 진짜 소녀가 되는 거고. 그리고 그렇게 시간이 또 흐르면 소녀가 아니라 진짜 여인이 되는 거야.”
“아! 그렇구나. 남자들하고는 조금 다르구나.”
“남자는 안 그래?”
“뭐, 우리도 사춘기를 겪긴 하지. 반항도 해 보고. 괜히 힘자랑도 하고.”
“비슷하네.”
“응, 안 비슷해.”
“비슷한데?”
“아니야. 내가 보기엔 소녀들이 조금 더 무서운 거 같아. 사춘기 때 남자들은 많이 단순하거든.”
“아! 그래. 그건 좀 다르다, 인정. 호호호.”
*
만검(慢劍).
느릴 만(慢), 칼 검(劍).
사람들은 말한다.
‘아니, 칼을 느리게 휘둘러 어떻게 상대를 이길 수 있어?’
틀렸다.
만검은 칼을 느리게 휘두르는 게 아니다. 그렇게 보일 뿐이지.
그러면 또 말한다. ‘뭔 개소리야?’
개소리 아니다. 만검은 현존하는 무공 중 가장 난해하고 어려운 상승 무학 중 하나다.
수백 년 동안 만검이 실전된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대부분은 그 기본 개념조차 이해하지 못해서 익히는 것 자체를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일부, 극히 일부가 만검의 기본 개념을 이해해 익히려 시도했지만, 너무 어려워 포기하거나 대성하지 못했다.
그렇게 만검은 무림에서 수백 년이나 자취를 감췄다.
그러다 그것이, 광천마제 시절 딱 한 번 세상에 빛을 발했다.
만검존 맹묵치가 수백 년 동안 아무도 대성하지 못했던 만검을 대성하여 화경의 벽을 깼다는 소문이 천하를 진동시킨 것이다.
‘그래서 만검이 뭐냐고? 검을 천천히 휘두르는 게 만검 아니야? 그렇게 천천히 움직여서 닭이라도 한 마리 잡겠어?’
또 이렇게 물을 것이다.
응, 아니다.
닭이 아니라 어쩌면 용을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게 만검이다.
광마일기에 분명, 광천마제였던 내가 최고라 인정했던 세 사람이 바로 천무휘와 마교주 그리고 만검존 맹묵치였으니 말이다.
만검은 보이기에 그렇게 보여 만검이라 부르지만, 정확한 명칭은 만검이 아니다.
엄밀히 말해 만검은 공간장악공(空間掌握功)이라 불리는 게 맞다.
쉽게 설명하면 이렇다.
시전자가 만검을 발동한다.
그러면 그 만검의 시전자를 보는 적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하아! 저 새끼 저렇게 느리게 움직여서 뭘 어쩌자는 거야? 너무 느리고 지루해 하품이 다 나오네. 저 새끼가 칼 한 번 휘두르기 전에, 나는 저 새끼 몸을 천참만륙내고 다시 그 고기를 다져 만두를 빚을 수 있겠다.’
그렇게 적들은 만검의 시전자를 비웃으며 칼을 뽑으려 한다.
하지만 그때야 깨닫게 된다.
자신은, 만검을 시전하는 시전자보다 훨씬 더, 거의 멈춘 것과 같이 느리게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것을 깨닫는 순간, 그렇게 천천히 또 느리게 움직이던 만검이 자신의 목을 베고 심장을 꿰뚫고 있다는 사실을.
만검은 공간의 장악이고 시간의 장악이다.
만검의 시전자는 그 경지에 따라 다르지만, 일정한 공간을 자신의 것으로 장악한다.
그리고 그가 장악한 공간의 시간과 흐름을 그의 뜻에 따라 조정할 수 있다.
사술이나 초능력 따위가 아니다.
무공이다.
그래서 더 어려운 것이 만검이다.
만검의 경지가 상승의 경지로 가면 갈수록, 그가 장악할 수 있는 공간은 더 넓어진다.
대성의 경지에 이르면, 모든 시간과 사물을 멈추고 홀로 움직일 수 있다는 전설이 전해지기도 한다.
그렇기에 만검은 무적이며, 만검을 향해 칼을 겨룬 상대는 결코 살아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
어쩌면 어제.
아니면 내일.
만검은 그 대성의 경지, 화경의 벽을 이미 깨 버렸다.
*
<<광마일기>>
(상략)
의제와 함께 마두들을 때려잡고, 또 길을 막아서는 정파 놈들을 사정없이 도륙했다.
이때 난 이미 대마두란 명성을 버렸다.
시산마검 왕대까지 죽인 후, 사람들은 나를 향해 마두들의 왕이라는 의미로 대마왕이라 불렀다.
거칠 것 없이 천하를 종횡무진했다.
무림오대고수란 작자들만 만나지 않는다면, 나에게 무서울 것은 없었다.
아니, 내심 무림오대고수란 놈들도 한 번 만나보길 바랐다.
내 자신감이 내 실력을 넘어 배 밖으로 튀어나왔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난 거칠 게 없었고, 나의 악명은 점점 더 천하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중략)
만검존?
별 미친놈이 다 있다는 생각을 했다.
나에게 도전장을 보내왔다.
도전하는 놈이 직접 찾아오지 않고, 서신 한 장만 달랑 보낸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더 웃긴 건, 놈이 만검을 대성한 만검의 고수라는 것이었다.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았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아니, 칼을 그렇게 천천히 휘둘러서 무얼 어쩌겠다는 건지.
당시의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동시에 잘됐다 싶었다.
무림맹에서 인정하고 공포한 화경의 고수.
만검존의 목을 베어 버리면, 나의 명성은 곧바로 하늘 끝까지 치솟고, 무림오대고수란 작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만검이 무엇인지조차 몰랐고, 무서울 게 없는 나였다.
그렇게 의제와 단둘이 산동 태안으로 향했다.
(중략)
도전장을 보낸 놈의 상태가 이상했다.
나를 향해 칼을 뽑아 들고서는 ‘미안하오’라고 말했다.
표정은 그 말보다 훨씬 더했다.
내가 뭐라 말이라도 붙이면, 나에게 미안해 울음이라도 터뜨릴 것 같았다.
뭐지? 진짜 미친놈이었나?
당시도, 다 죽어 가며 광마일기를 쓰고 있는 지금까지도 그때 녀석이 했던 말과 표정의 의미를 알 수 없다.
(중략)
괴물이었다.
아니, 그와 칼을 맞댄 순간 난 그가 인간이 아니라 어쩌면 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다.
십삼 년이 지난 지금까지 당시 내가 겪었던 만검의 충격은 조금도 가시지 않고 있다.
만검은, 어쩌면 정말 인간이 아닌 신이 만든 무학이 아닐까 지금도 생각하고 있다.
정말로 엄청난 충격의 연속이었다.
(중략)
둘 중 하나다. 아니, 둘 다다.
첫 번째로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만검존은 냉철하지 못했다.
나를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수십 번이나 되었지만, 끝내 나를 죽이지 않았다.
도대체 왜?
모르겠다.
그때도 지금도 그 이유는 모른다.
내가 살 수 있었던 두 번째 이유는 내가 무공에 있어서는 천재라는 이유다.
난 만검존이 나를 죽이길 주저하는 사이, 빠르게 만검이란 기괴하고 신비하면서도 난해한 무학을 간파해 갔다.
지금도 온전히 그 무학을 다 이해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핵심, 그 정수만을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에서 이해한 것이다.
하지만 단지, 만검의 정수를 이해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화경의 벽을 깰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만검존의 죽음이었다.
(하략)
*
광마일기에 무공에 관한 기록은 거의 없다.
기록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단 하나, 만검에 관해서 만큼은 그 깨달음에 관해 마치 심득을 기록한 것처럼 꽤 많은 분량으로 기록되어 있다.
나는 산동 태안으로 가며 만검에 대한 기록을 읽고 또 읽었다.
현재 나는 초절정 극상의 경지지만, 내 무학에 대한 이해와 깊이는 이를 넘어선 지 오래다.
우리 현화문의 무공들은 물론 작은 사부에게 많은 것을 얻고 배웠다.
무적 할매에게도 적지만 중요한 깨달음들을 얻은 것 또한 사실이다.
거기에 더해 천하를 누비며 또 많은 싸움을 치르며 얻은 것 역시 적지 않다.
내 무학에 대한 이해와 깊이는 이미 화경의 끝자락, 어쩌면 현경의 경지에 한 발을 디디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만검에 대한 이해 역시 그러한 수준에 올라 있다.
만검에 대한 기초와 또 그에 대한 세세한 지식은 부족할지 모르나 최소한 만검의 정수에 대한 이해와 깨달음은 현재의 내가 만검존의 그것보다 한 수 어쩌면 몇 수 위라는 뜻이다.
“형님, 이곳입니다. 이곳이 평치산이라고 하네요.”
만검존 맹묵치가 은거하며 수련하는 평치산에 도착했다.
우리는 인근 객잔에 짐을 풀고 간단한 요기까지 마쳤다.
하지만 평치산을 오르는 건 나 하나다.
아마도 이미 화경에 경지에 올랐을 맹묵치다.
괜히 우르르 몰려가 그를 자극할 필요가 없다.
아니, 그냥 나 혼자 먼저 그를 만나 보고 싶었다.
*
광마일기에 그가 은거하는 장소가 명확히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래도 계효보의 난 때 사부와 함께 한 번 왔었다.
쉽게 찾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게 평치산을 올랐는데.
휴우, 젠장.
쉽게 찾을 수 없었다.
정말 한참을 돌고 돌아 해가 지기 전, 간신히 그의 은거지를 찾을 수 있었다.
내가 일부러 헛기침을 하여 인기척을 내고는 그의 움막 마당으로 들어섰다.
수련 중은 아니었고, 마당에서 무언가 이것저것 챙기고 있던 만검존이 느닷없는 나의 방문에 하던 일을 멈추고 구부렸던 허리를 폈다.
“뉘신지……?”
“지나가던 나그네입니다.”
“아, 네. 혹 길을 잃으신 건지요?”
“맹묵치 대협이 맞으십니까?”
아주 미세하지만 살짝 놀란 얼굴과 경계의 눈빛이 교차했다.
대꾸는 없었다.
그래서 내가 말을 이었다.
“현화문이라는 도문에서 도를 닦는 마악치라고 합니다.”
그때였다.
“아! 현화도사 마악치 대협이셨군요.”
어라? 나를 알아?
산속에 처박혀 수련만 하던 인간이 나를 어찌 알지?
그보다, 경계심이 완전히 풀린 걸 넘어 환히 웃는다.
진심으로 나를 만난 게 반가운 얼굴이다.
“저를…… 아십니까?”
“알다마다요. 제 아들 녀석도 천무휘 대협…… 어험. 천 대협과 마 도사님, 우각도협, 구절협 또 봉황검 금 여협도 함께하신다지요? 아들 녀석이 여러분의 굉장한 추종자입니다, 하하.”
“아! 그렇군요.”
뭐지? 내가 잘못 안 건가?
아닌데? 이 인간, 분명 십 년 가까이 여기서 수련만 했다고 했는데.
그보다, 아들이 있었어?
뭐야? 내 기감에는 만검존 한 명밖에 잡히지 않는데, 아들이 있다고?
광마일기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은데.
분명 광천마제 시절 내가 놓친 게 있음이 확실하다.
그보다, 저 녀석 진짜로 날 좋아하나?
아주 입꼬리가 귀에 걸렸네.
만검존의 미소를 보고 있자니, 그 미소가 나에게까지 번지는 듯했다.
광마일기에도, 지금 실제로 만남에도.
만검존은 어쩌면 정말로 좋은 녀석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