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화
난 누구?
여긴 또 어디?
사부에게 삼재검법을…… 화양문과 동맹을 맺었다.
화양문을 떠나기 바로 전날.
화양문의 가모전.
주소수와 많은 이야기를 나눈 후.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이에요? 또 마두 잡으러 가실 거예요?”
“아니요. 잠시 때를 기다릴 참입니다. 저는 도를 닦고, 친구들은 수련에 임할 거예요.”
“때요? 무슨 때요?”
“차차 알게 될 것입니다.”
“아, 네. 무운을 빌겠어요. 이건 진심입니다, 마 도사님.”
“고맙습니다, 주 여협.”
그렇게 나는 화양문의 가모전을 떠나려…… 다시 몸을 돌렸다.
작별 인사까지 제대로 했는데, 내가 다시 방긋 웃으며 몸을 돌리자 주소수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난 미소를 지우고 제법 근엄한 얼굴로 주소수를 향해 말했다.
“화양문과 동맹을 맺은 동맹 지휘권자로서 주 여협께 첫 번째 임무를 하달하겠습니다.”
순간, 주소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이는 찰나에 불과했다.
그녀가 곧 정색을 하더니 나를 향해 부복했다.
동맹의 세부 규약에 명령 하달 시, 부복하여 그 명령을 받들게 규정되어 있다.
주소수는 이를 제대로 이행 중인 것이다.
내 목을 쳤던 것을 생각하면 아주 꼬숩고 통쾌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좀 보기 그렇다.
그래도 오중체 어머니고, 환갑이 넘은 노인 아니겠는가.
난 빠르게 주소수에게 다가가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주 여협. 부탁이 있습니다. 이번 일만 잘 처리해 주시면, 동맹 규약에서 부복에 관한 내용은 삭제하겠습니다.”
정말 힘을 다해 억제하려고 했지만, 주소수의 입꼬리가 실룩거리는 게 어지간히도 좋은 모양이다.
반대로 말하면, 그녀가 동맹 규약 중 가장 싫어했던 조항 중 하나가 바로, 내가 명령을 내릴 때 부복하여 그 명령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고 말이다.
아무튼 가까스로 억누르고 있지만, 지금 주소수의 기분은 날아갈 것 같고, 그 의지는 활활 타오르고 있다.
염라대왕의 목이라도 따올 기세다.
난 그녀에게 몇 달 뒤 갑돌산으로 와 줄 것을 명령했다.
*
현화문, 우리 집.
이곳에서 의제와 한해북, 금예지 그리고 왕대는 몇 달간 열심히 수련을 이어 갔다.
때로는 홀로, 때로는 서로 힘을 겨루며 그렇게 자신들의 무공을 가다듬었다.
나는 십간산을 두루 돌며 마음의 수양을 쌓았다.
그리고 바로 내일이 그날이다.
*
수라섬전도가 홀로 갑돌산을 올라왔다.
기형도를 어깨에 걸치고, 거침없이 거칠고 좁은 우리 갑돌산의 산길을 그렇게 오르고 또 올랐다.
나는 먼 곳에서 몸을 숨기고 또 기운까지 죽여 가며 그를 지켜보고 있다.
그에게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외양만 봐서는 결코 사람을 죽이러 가는 이의 모습이라고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목표한 장소에 가까워질수록 그의 보폭에 미세한 변화가 일어났다.
눈으로 보지 않으면 그 기운마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그는 은형술을 극대로 펼쳤다.
곧, 한 여인이 작은 바위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명상 수련을 하고 있는 곳에 다다른 수라섬전도.
마치 먹이를 포착한 맹수가 사냥을 하는 것처럼, 그렇게 몸을 잔뜩 웅크리는가 싶더니.
곧바로 몸을 날렸다.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쾅!
엄청나고 또 엄청났다.
단 한 번의 격돌로 주위의 땅과 바위, 나무 그 모든 것들이 터져 사방으로 비산했다.
기습을 하려다 오히려 엄청난 역습을 당한 수라섬전도는 열 장 뒤로 날아가 땅을 한 번 구른 후에야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 표정이 가관이었다.
그리고 내가 말했다.
“우리도 가자.”
내가 몸을 날렸고, 의제와 한해북, 예지, 왕대, 그리고 오십여 명이나 되는 구음신녀문의 여고수들이 뒤를 따랐다.
척!
처처처처처처처처처척!
금예지로 위장했던 주소수의 엄청난 반격에 놀랐던 수라섬전도 능치.
놈이 그 놀란 마음을 다 잡기도 전, 나와 우리 그리고 구음신녀문의 여고수들이 그를 완벽하게 포위했다.
산을 오르는 내내 무표정했던 수라섬전도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지는 순간이었다.
반면, 주소수는 가짜 미소도 또 거짓 상냥함도 없이 차가운 얼굴로 나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마 도사님 명령대로 죽이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저렇게 비겁하게 예쁜 여자를 기습하는 놈을 살려 두시려고요? 말씀만 하시면 바로 목을 베어 버리겠어요.”
자존심이 상했던 걸까?
아니면 두려움 때문이었을까?
주소수의 말을 들은 수라섬전도가 잔뜩 경계한 상황에서도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난 손짓으로 주소수를 말린 후 수라섬전도에게 몇 걸음 다가가며 말했다.
“너는 내가 제시하는 두 개의 길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여전히 잔뜩 경계하며, 맹수의 눈으로 나를 노려보기만 하는 수라섬전도.
대꾸는 없었다.
상관없이 내가 계속 말을 이었다.
“첫 번째. 이곳에서 죽는 것이다. 네가 어떤 발악을 해도 결과는 바뀌지 않는다. 이것이 네가 선택할 수 있는 첫 번째 길이다.”
역시 대꾸가 없다.
하지만 놈의 떨림이 점점 격렬해져 가고 있다.
“두 번째. 정확히 사 년 뒤인 신축(辛丑)년 무술(戊戌)월 신묘(辛卯)일. 이곳 십간산에서 십 리 떨어진 탄성산에서 나와 생사결을 펼치는 것이다.”
“마 도사!”
“오빠!”
내 제안에 먼저 반응한 것은 수라섬전도가 아닌 주소수와 예지였다.
하지만 난 그런 두 사람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손짓으로 제지했다.
여전히 시선은 수라섬전도에게 고정하고 있다.
수라섬전도는 소리는 내지 않았지만, 내 두 번째 제안을 들은 순간 이미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죽은 목숨이라 생각했는데, 살길이 생겼으니 어찌 놀라지 않았겠는가.
그걸 넘어, 비겁한 기습이 아닌 정당하게 날 죽일 수 있다고 확신하여 놀라고 기쁜 얼굴인 듯했다.
“결정하라. 대답이 없으면 첫 번째 선택을 한 것이라 간주하여, 즉시 네 목을…….”
“두 번째! 두 번째 제안을 받아들이겠다.”
내 말이 끝나기도 전, 수라섬전도가 다급히 말했다.
“좋다. 네 목은 사 년 뒤에 베겠다. 떠나라.”
떠나라 했음에도 그는 쉬이 움직이지 않았다.
주소수에게서 살기가 펄펄 풍기고 있었고, 구음신녀문의 여고수들 역시 길을 터 줄 생각이 없는 듯 꿈쩍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수라섬전도 스스로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믿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내가 손을 치켜올리자, 구음신녀문의 여고수들이 길을 터 주었고, 수라섬전도는 천천히 또 극도로 경계를 하며 그렇게 갑돌산을 떠났다.
사 년 뒤. 천하가 모두 지켜보는 가운데, 비참하게 놈의 목을 벨 것이다.
그것이 너에게 내리는 복수다.
*
“주인님, 손님이 왔습니다. 예쁜 여자에요.”
갑돌산에서 여섯 달째.
오랜만에 병막산 큰 바위 위에 앉아 도를 닦고 있는데 왕대가 찾아와 저리 말했다.
난 곧바로 왕대와 함께 갑돌산 집으로 향했다.
유령신검의 황룡회에서 사람을 보내온 것이다.
유령신검 월제의 유일한 여제자 장위지가 유령신검의 서신을 나에게 건네주었다.
아마도 처호, 처선, 공손병이 찾아가 밝힌 비사.
황룡회가 유령문이었을 당시 유령신검이 끔찍이도 따랐던 유일한 사형의 죽음.
그에 대한 답이 서신 안에 들어 있으리라.
(상략)
극양신장 오 대협과 동맹 맺은 소식은 들었다.
마 도사 자네는 정말 사람을 놀라게 하는 재주가……
(중략)
사형의 죽음에 그런 비사가 있었을 줄은……
(중략)
그렇게 나는 오랜 고심 끝에 결정했다.
우리 황룡회는 더 이상 숨지 않을 것이다.
본격적으로 천하를 향해 우리의 힘을 제대로 드러낼 것이다.
힘이 필요하다면 언제든 연락하여라.
내 친히 황룡회의 구름떼 같은 고수들을 이끌고 선봉에 서 적들을 도륙할 것이다.
(중략)
무림맹주.
사형을 죽인 원수.
창궁검제 남궁비혁의 목을 네게 양보한다고 약속했지만, 그 약속.
지키지 못할 것 같다.
부탁이다.
창궁검제의 목은 내가 벨 수 있게 양보해다오.
그것만 약속해 준다면, 내 모든 것을 네게 줄 수 있다.
나에겐, 아버지와 같은 사형이었고 친형과 같은 사형이었다.
위지가 자네의 답을 들고 돌아오길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리겠다.
무운을 비네, 마 도사.
-월제
“장 소저.”
“네, 마 도사님.”
“장 소저도 이 서신의 내용을 알고 있습니까?”
장위지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사형들과 사부님의 일부 심복들이 이 사실을 알고 있어요. 사부님께서 몇 달간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하며 괴로워하고 또 고민하셨어요.”
“음, 그랬군요.”
생각했던 것보다 유령신검의 충격이 더 컸던 모양이다.
그래도 다행이다.
무림맹, 남궁세가, 소림사와 곧바로 전쟁을 일으키지 않아서 말이다.
확실히 유령신검이 괴팍하긴 해도 냉철한 사람이다.
“답을 드리겠습니다, 장 소저.”
“세이경청하여 사부님께 정확히 전달하겠습니다.”
“맹주의 목. 극양신장께 양보해 드리겠습니다.”
“하아…….”
내 말에 장위지의 얼굴이 화사해졌다.
그녀 또한 근심 걱정이 꽤 대단했나 보다.
진심으로 기쁜 얼굴을 하고 있는 그녀였다.
사실 오히려 내 입장에선 두 손 들어 환영할 일인데 말이다.
황룡회 쪽에서 이리 기뻐해 주니, 나도 기뻤다.
“장 소저, 먼 길 오느라 수고 많았을 텐데 일단 안으로 들어가시죠. 제가 국수 한 그릇 말아 드리겠습니다.”
그날 우리는 모처럼 수련을 중단하고 즐거운 저녁 식사 시간을 가졌다.
장위지를 통해 황룡회에서 천하에 그 힘을 드러내기 위해 어떤 일들을 계획하고 있는지도 들을 수 있었다.
수십 년 동안 몸을 웅크리고 있었던 황룡회.
장위지의 입을 통해 들은 그들의 힘은 실로 입이 쩍 벌어질 정도로 엄청난 것이었다.
화경의 고수를 두 명이나 보유하고 있는 화양문이지만, 황룡회의 숨겨둔 힘을 모두 드러낸다면 결코 황룡회의 아래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는 곧, 천하가 곧 황룡회의 본격 무림 진출에 크게 요동칠 것을 뜻하는 일이었다.
이틀 뒤 장위지가 떠나고.
우리는 원래 하던 것처럼 일상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다시 석 달이 지났다.
이제 산동으로 갈 시간이다.
만검존(慢劍尊) 맹묵치가 그곳에 있다.
*
내 나이 스물다섯 살이 되었다.
광천마제 시절이라면 몇 달 뒤에야 만검존을 찾아가지만, 이번엔 조금 일찍 그를 만나기 위해 움직였다.
살피고 또 살피며 여러 번 생각을 해 봐도, 광천마제 시절 그와의 싸움이 꺼림칙했기 때문이다.
아니, 확신이다.
그에게도 맹주의 더러운 손길이 뻗쳐 있다.
그래서 조금 일찍 그를 만나 보려는 것이다.
물론, 오랜만에 우리 사부랑 초향 얼굴도 좀 보고.
하남 갑돌산에서 산동은 가깝지만, 절강까지 가려면 길을 크게 우회해야 한다.
그래도 기뻤다.
사부와 향이를 볼 수 있다는 마음에 발걸음은 언제나처럼 가벼웠다.
그렇게 사부와 향이를 다시 만났고, 오랜만에 국수도 말아 주고, 조금 버겁긴 하지만 향이와 놀아주는 시간도…… 어?
얘가 왜 이러지?
고작 열두 살인데 벌써 사춘기인가?
‘우르르 까꿍’이 안 통할 나이라는 건 나도 안다.
그래서 향이가 좋아하는 술래잡기나 마빡 때리기 놀이 같은 것도 하려 했지만, 반응이 영 아니었다.
나와는 시선도 잘 마주치려 하지 않고, 그냥 뚱한 얼굴만 하고 있다.
마음이 아팠다.
난 향이에게 언제나 죄인이다.
우리 향이를 웃게 해 줘야 하는데, 그렇게 해 주지 못하는 내 자신이 미웠다.
그래서 며칠 고심한 끝에, 방법을 찾았다.
꼬꼬맹이였다면 모를까, 우리 향이가 제법 똑똑한 아이다.
돈에 대한 개념이 트였을 거란 얘기다.
내가 안 된다면 돈으로라도 웃게 만들어 줄 것이다.
“짜잔! 어때? 이게 바로 황금 마차야. 공주님들이 타는 그 황금 마차. 하하하! 멋진 백마 두 마리가 끄니까 더 그럴싸하지 않아?”
향이는 마차를 잠시 보는가 싶더니, 내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여전히 뚱한 얼굴로 마차에 타 버렸다.
나도 서둘러 마차에 탔다.
마차는 곧바로 항주에서도 가장 번화한 시전으로 향했다.
중원 각지는 물론, 서역과 천축, 남월, 고려, 동영에서 건너온 물건들이 넘쳐나는 곳이다.
향이 또래의 여아들이 입을 쩍 벌리고 환장할 그런 곳이란 말이다.
그렇게 나와 향이는 그곳에서 구경도 하고 예쁜 물건들도 잔뜩 사고,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그래서 말이야. 그 뚱땡이 마두 녀석이 커다란 덩치를 감쪽같이 숨겼지 뭐야. 나랑 의제랑 한 형이랑 천무휘까지 눈을 씻고 찾아도 도저히 찾을 수 없었어. 그런데 어떻게 찾았는지 알아?”
뚱한 얼굴로 조금 전 내가 사 준 노리개만 만지작거리고 있다.
내게는 시선 한 번 주지 않는다.
그래도 난 굴하지 않았다.
“하하하하! 글쎄 그 뚱땡이 마두 녀석이 원래 은형술의 엄청난 고수였거든. 근데 숨는 것까진 잘했는데, 하하하! 이 녀석이 밥을 얼마나 처먹었는지, 그때 ‘뿌우웅!’ 방귀를 뀌어 버린 거야. 푸하하하! 웃기지 않아? 하하하하!”
응, 그렇다.
향이는 조금도 웃지 않았다.
여전히 내게는 시선도 주지 않고.
그래도 굴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아미파에서 국대 인경이란 아이가, 그렇게 엉엉 울고 또 연신 미안하다고 하면서. 퍽퍽퍽! 하하하! 비무에서 다른 아이들을 마구 두들겨 패서 비무 시험 일 등을 했어. 하하하하!”
“나중에 귀정사에 놀러 가면 작은 사부에게 멋진 무공 보여달라고 내가 말해 볼게. 우 여협도 대단하지만 우리 작은 사부도 정말 엄청난 고수라니까.”
조금 힘들었다.
지치기도 하고.
“요즘 위화궁 다른 어린 제자들과 함께 수련한다며? 어때? 친구들과 사이는 좋아? 위화궁에서도 비무 시험 같은 거 보고 그래? 향아? 향아? 그래도 어른이 말을 하면 듣는 척이라도…….”
향이가 처음으로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여전히 무표정한, 뚱한 얼굴이었다.
어린아이에 불과한데, 그 속마음을 읽을 수 없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긴장되지?
뭔가 내가 큰 죄를 진 느낌이었다.
아니, 큰 죄를 진 건 맞지만, 그래도 지금 열심히 하고 있잖아.
그런데 왜 저런 표정으로 날 보는 거냐고?
“왜…… 왜 그렇게 봐? 다른 친구들과 수련하는 거 싫어서? 아님, 배고파? 집으로 돌아갈까? 국수 말아 줄까? 아님, 요즘 뭐 힘든 거라도…….”
난 잘못한 것도 없는데, 불안하고 초조해 말이 많아졌다.
향이는 그런 나를 여전히 무표정하게 쳐다보기만 했다.
그러다 사흘 만에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