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화
“신녀에게 어떤 능력이 있나요? 무슨 치유의 능력 같은 게 있는 거예요?”
절반이나 타 버린 머리카락을 싹둑 자르고, 처음 만났던 그날처럼 거짓 미소와 가짜 상냥함으로 나를 대하고 있는 주소수를 향해 물었다.
화양문을 떠나기 전날 밤의 이야기다.
“치유? 무슨 전설 속의 이야기 같은 그 치유 말하는 거예요?”
“네.”
“아니요. 신녀에겐 그런 능력이 없어요.”
어? 이상하다.
광마일기엔 죽었던 극양신장을 살렸다고 적혀 있는데.
“그럼 무슨 능력이 있는데요?”
“마 도사님이 보기엔 어때요? 맹인이었던 신녀가 눈을 떴을 때 청광이 번쩍였던 것 빼고, 무슨 특별한 능력 같은 게 있어 보였어요?”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신녀는 여전히 맹인이다.
기감으로 특별한 기운이 느껴지는지 살폈지만, 아무것도 감지할 수 없었다.
주소수가 피식 웃는다.
이건 가짜 미소가 아니다.
우리에게 대판 깨진 후 조금, 아주 정말 미세하지만 조금은 달라진 것 같다.
“사실 신녀의 능력에 관해선 철저한 비밀을 지키는 게 본 문의 율법이에요. 하지만 동맹의 세부 규약에 따라 마 도사님께는 그 어떤 것도 숨겨서는 안 되니 말씀드릴게요.”
“아! 뭐, 꼭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아니에요. 제가 이래 뵈도 꽤 양심 있는 여자랍니다.”
응, 아닌 거 알아.
그래도 확실히 이 아줌마가 변하긴 했다.
“우평산이라는 곳에 우리 신녀문이 있어요. 우리는 그곳을 신녀산이라고 부르죠. 저를 포함해 모든 신녀는 그곳에서 태어났어요. 저의 세 아들 역시나 그곳에서 낳았죠. 아들일 줄 알았으면 굳이 그곳까지 가서 낳을 필요는 없었지만, 몰랐으니까요.”
“아, 네.”
“신녀산은 예로부터 기이한 힘이 흐르고 있다고 알려졌어요. 지금에 와서는 아무도 모르지만, 우리 신녀문에는 그 사실이 정확히 기록되어 전해지고 있죠. 신녀문의 문도들은 우리만의 율법을 지키고, 그 산의 기이한 힘을 받아 아이를 낳게 되죠. 대략 오십 년에 한 번, 그렇게 신녀가 탄생하게 돼요.”
“전대의 신녀는 주 여협이셨고요.”
“네, 맞아요. 그렇게 탄생한 신녀는 마 도사님이 말대로 기이한 힘을 갖고 태어나요. 하지만 그 힘은 평생 단 한 번만 쓸 수 있죠.”
뭐야, 딱 한 번만 쓸 수 있는 힘이었어?
하긴, 그렇기도 하겠다. 사람을 수도 없이 살릴 수 있다면, 그건 신녀가 아니라 그냥 신이라 불러야 하지 않겠나.
납득이 된다.
그래도 신녀에게 사람 살리는 힘이 있다는 사실을 내가 먼저 말할 수는 없고.
“어떤…… 힘이죠?”
“반로환동.”
“네? 반로환동이요?”
어라? 이게 아닌데?
뭐지? 죽은 사람을 살리는 힘이어야 하는데?
“호호호, 놀란 얼굴이네요?”
“아, 네. 반로환동이…… 가능해요?”
“네. 믿기 힘들지만 사실이에요. 역대 문주님들 열아홉 명 중 열여덟 분이 실제 신녀를 통해 반로환동하게 됐으니까요.”
“환골탈태도 동시에 되는 건가요?”
“화경의 벽을 깰 때 겪는 환골탈태와는 조금 달라요. 말 그대로 반로환동. 외양이 젊어져요. 피부도 십 대 소녀의 그 뽀송뽀송하고 부드러운 피부를……. 호호호.”
아! 이게 아닌데.
앗! 잠깐.
“방금 역대 문주님들 중 열여덟 분만 반로환동했다고 하셨나요? 나머지 한 분은요?”
“음, 사실 그건 좀 믿기 어려운 내용이라.”
“궁금합니다.”
“신녀가 죽은 사람을……. 그러니까 두 번째 문주셨던 사조님께서 돌아가셨는데, 신녀가 이미 사망하신 그분을 되살렸다는 기록이 있어요. 너무 오래된 기록이라 온전히 다 믿기는 힘들고, 사망 직전까지 가셨던 분을 치료하지 않았나 싶어요. 반로환동을 하게 되면 이미 고갈되어 없어진 원기도 회복되니까요. 마치 소림사의 대환단을 복용한 것처럼요.”
모르고 있다.
주소수는 신녀의 진짜 능력, 아니 또 다른 능력, 그러니까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있는 능력에 대해 모르고 있는 것이다.
됐다.
내가 알려 줄 필요는 없다.
이 아줌마가 변했다고는 해도, 여전히 얄미운 건 사실이니까.
“신녀의 반로환동 능력은 언제 어떻게 쓰는 건가요?”
“말했잖아요. 역대 문주님들께서 쓰셨다고.”
“그, 그게……?”
“너무 이기적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저도 문주가 되기 위해 숱한 우여곡절을 겪었어요. 죽을 뻔한 적도 여러 번이고요. 그 대가죠. 아직 괜찮은데, 한 일이십 년 정도 지나면 저도 세월을 이길 순 없겠죠. 피부에 주름도 생기고. 휴우. 생각만 해도 끔찍하네요. 아무튼 좀 더 늙으면 제가 쓸 거예요, 신녀의 그 능력.”
이게, 신녀문이란 곳이 말이다. 역대 문주가 죄다 주소수 같았다.
신녀의 그 엄청난 능력을 죄다 문주 자신의 피부 미용을 위해 썼다는 말이 아닌가?
돌겠다.
역시 신비문파 중에서도 사파로 분류된 이유가 다 있는 법이다.
하나같이 이기적인 사람들만 문주가 됐던 것이다.
휴우. 뭐, 남의 문파 문주가 어떻니 저떻니 내가 왈가불가할 필요는 없고.
됐다. 화양문과의 동맹을 성공적으로 맺은 것만 생각하자.
사실 이건 비밀인데. 뭐, 주소수만 모르면 되는 비밀이다.
어젯밤. 그러니까 나와 우리 녀석들이 주소수와의 비무에서 이긴 날 저녁. 극양신장이 우리를 몰래 불렀다.
그곳엔 극양신장 말고도 오중도, 오중대, 오중체가 모두 있었다.
자기 엄마 머리카락을 홀라당 태워 먹고, 또 부인의 어깨에 칼빵까지 놓은 우린데, 극양신장과 그 세 아들은 우리를 열렬히 환영해 주었다.
산해진미가 차려진 술상까지 봐 우리를 반겼다.
극양신잔과 세 아들은, 나중에 술에 취해 감격의 눈물까지 흘리며 연신 우리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와! 자기 부인이고 자신의 어머니인데, 그런 주소수를 무참히 발라 버린 우리를 보며 그렇게 고마워하다니.
정말 이들이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내가 얼마를 상상하건 언제나 그 이상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어젯밤 우리는 주소수 몰래 늦은 밤까지 감격의 비밀 연회를 이었다.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이에요? 또 마두 잡으러 가실 거예요?”
“아니요. 잠시 때를 기다릴 참입니다. 저는 도를 닦고, 친구들은 수련에 임할 거예요.”
“때요? 무슨 때요?”
“차차 알게 될 것입니다.”
“아, 네. 무운을 빌겠어요. 이건 진심입니다, 마 도사님.”
“고맙습니다, 주 여협.”
화양문의 실질적 주인인 주소수와의 마지막 면담은 그렇게 끝났다.
우리는 다음 날 이른 아침 화양문을 떠났다.
*
갑돌산, 우리 집으로 돌아왔다.
변용까지 하여, 귀주에서 이곳 하남 갑돌산까지 조용히 이동했다.
먼지가 쌓이고 거미줄이 쳐진 것 빼고, 우리 집 현화문은 언제나 한결같았다.
십간산의 풀 내음은 언제나 내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준다.
다음은 만검존이다.
만검존을 만나 화경의 경지를 되찾아야 한다.
내 나이 스물넷.
만검존은 스물다섯에 만나게 된다.
광마일기에 기록된 그대로 움직일 생각이다.
열 달이다.
열 달 정도 기다렸다가 그를 만날 생각이다.
여전히 모른다.
그를 만나 어떻게 화경의 경지를 되찾아야 할지 말이다.
뭐, 지금까지 그래 왔듯 어떻게 되겠지.
우선 열 달 동안 나는 도를 닦고 의제와 한해북, 예지, 그리고 왕대는 수련에 임할 것이다.
시간은 빠르게 지났다.
*
십간산 중 정정산에서 나 홀로 도를 닦는 중이다.
우리 녀석들도 단독 수련할 때가 있고, 합동 수련할 때가 있고 그렇다.
오늘은 온종일 단독 수련에 임할…… 어? 뭐지?
가부좌를 틀고 마음을 평온하게 하여 도를 닦는 중인데 갑자기 심장이 요동친다.
무언가 엄청난 불안감이 엄습하여 생기는 심장의 반응이다.
이러면 안 되는데. 이곳에서만큼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길 바라는데.
내 심장의 박동이 점점 더 격렬해지고 있다.
난 곧바로 가부좌를 틀고 우리 집이 있는 갑돌산으로 달렸다.
*
현화문, 우리 집이 있는 곳으로 신법을 펼쳐 미친 듯이 달리던 중.
혈향이다.
안 돼. 이러면 안 되는데.
홀로 수련할 때면 항시 이곳 근처였는데.
난 곧바로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그곳.
아! 이건 진짜 아닌데.
우리 예지가.
죽었다.
상대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기습을 한 것 같다.
싸움의 흔적이 없다.
또한, 예지보다 월등한 고수다.
눈물이 나면서도 이러한 생각을 하고 있는 내가 밉다.
아니다. 해야 한다.
난 눈물을 훔치며 속으로 예지에게 말했다.
‘복수해 줄게.’
그 마음속의 말만을 남기고 다시 달렸다.
이제는 명확히 들렸다.
쾅쾅쾅!
쾅콰콰콰쾅!
콰콰콰콰콰콰콰콰쾅!
갑돌산을 넘어 십간산 전체가 진동하고 있다.
엄청난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눈으로도 보였다.
우리 집, 현화문.
그곳에서 무지막지한 고수…… 한 명은 왕대다.
그의 마기가 수백 장 밖에 있는 내게까지 또렷하게 느껴진다.
멈추지 않고 달렸다.
그리고 집에 도착했다.
아니, 집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게 이미 초토화가 되어 있다.
그보다.
의제와 한해북이…… 젠장!
피를 뿌리고 쓰러져 있다.
그리고 왕대가, 한 사내와 싸우고 있다.
나보다 먼저 이상함을 느끼고 의제와 한해북을 구하기 위해 달려온 모양이다.
하지만.
쉬이이이이이익.
툭.
허공에서 치열하게 싸우던 왕대가 힘을 잃고 땅으로 떨어졌다.
죽었다.
곧이어 왕대를 죽인, 아니 우리 예지와 의제 그리고 한해북과 왕대까지 모조리 죽인 개새끼가 땅에 착지해 나와 마주했다.
기이하게 생긴 도(刀)를 들고 있는 놈이다.
젊다. 고작 삼십 대의 나이다.
난 놈을 알고 있다.
수라섬전도(修羅閃電刀) 능치가 바로 저 찢어 죽일 개새끼다.
역시, 맹주에게 붙은 것인가?
아니, 이제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나를 죽였다면 모르겠지만, 놈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죽였다.
예지에게 약속한 대로, 복수할 것이다.
죽인다. 그것도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죽여 버릴 것이다.
“할 말, 없나?”
히죽히죽 웃으며 말하는 수라섬전도.
대답하지 않았다.
광마일기와 각혼필을 꺼냈다.
상황을 아주 빠르게 기록했다.
죽일 자에 대한 마지막 배려였을까?
수라섬전도는 이를 제지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갸우뚱하며 이상한 눈으로 날 쳐다볼 뿐이었다.
광마일기에 현 상황을 모두 기록한 후, 광천검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러자 수라섬전도가 다시 히죽 웃기 시작했다.
“의외군. 내가 왜 이런 일을 벌였는지 엉엉 울며 물을 줄 알았는데.”
이제는 오 갑자가 넘는 현화승천신공을 끌어올렸다.
수라섬전도도 순간 놀란 눈을 떴다.
상관없다. 놈이 놀라건 말건 죽일 것이다.
아니, 동귀어진이다.
언제나 그렇듯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된다.
그게 바로 동귀어진이고, 실패하지 않는다.
소리도 없이, 기합도 없이, 먼저 움직였다.
선공이다.
한 방에, 내 모든 것을 걸고 놈과 함께 죽을 것이다.
그래야 한다.
콰콰콰콰콰콰쾅!
콰콰콰콰콰콰쾅쾅쾅쾅!
쉽지 않았다.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
괜찮다.
놈도 나의 무지막지한 내공, 거기에 더해 몸을 사리지 않는 동귀어진의 수법에 당황해 제대로 된 힘을 쓰지 못하고 있다.
난 그 빈틈을 놓치지 않고 계속 공격을 퍼부었다.
눈 깜짝할 사이 수십 번의 공방이 오갔고, 갑돌산의 허리가 움푹 파여 버릴 정도로 큰 폭발이 연이어 일어났다.
아! 이게 나와 놈의 격차인가?
처음 조금은 당황했던 수라섬전도가 온전한 평정심을 되찾았다.
그런 후에도 나는 미친놈처럼 계속 달려들었다.
하지만 놈은 무표정한 얼굴로,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으며 내 공격을 모두 가볍게 받아 내었다.
결국.
푹.
그의 기형도(奇形刀)가 심장을 꿰뚫었다.
아! 왜? 도대체 왜?
“마 형…… 도망…… 치세요.”
수라섬전도의 기형도가 꿰뚫은 심장은 내 것이 아니었다.
한해북의 심장.
죽은 줄 알았던 한해북이 몸을 날려, 나를 대신해 수라섬전도의 칼을 받아 낸 것이다.
그제야 생각났다.
한해북 이 녀석을 처음 만났고, 또 그때의 마지막 순간.
천무휘와 적이었던 시절.
천무휘의 칼에 맞아 죽기 바로 직전의 그 순간에 우리는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
죽음을 앞둔 마지막 대화이기도 했다.
“의제.”
“네, 형님.”
“다음 생이 있다면 난 또 자네와 의형제를 맺을 걸세.”
“저도 마찬가집니다.”
“한 무사님.”
“네, 마 도사님.”
“함께하겠습니까?”
“풉. 다음 생에요?”
“네.”
“그때는 위장이 아닌 진짜 마 도사님의 호위 무사가 되겠습니다.”
“고맙소.”
이러한 죽음이 나에겐 수십 번의 회귀 중 하나일지 모르나, 한 형에게는 단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생명이다.
눈물이 쏟아졌다.
한해북은 그렇게 그때의 약속을 지켜 주었다.
수라섬전도와 싸울 의지도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대신, 대신 다음에는 꼭 오늘의 빚을 열 배 백 배로 갚아줄 것이다.
난, 광천검으로 내 목을 베어 버렸다.
이것이 나의 스물일곱 번째 죽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