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화
극양신장의 화양문으로 가는 길.
물도 마시고 잠시 쉬기로 했다.
쉬려고 걸음을 멈춘 건데, 우리 녀석들 열심이다.
항상 저렇게 수련을 한다.
객잔에서 묵을 때도, 늦은 밤까지 수련에 임하는 녀석들이다.
그건 왕대라고 다르지 않다.
물론, 가장 열심인 건 언제나 예지다.
그리고 난, 우리 녀석들이 수련을 할 때면 언제나 한쪽에 조용히 자리를 잡고 앉아 명상을 한다.
무공에 관한 명상이 아니다.
알지 않는가?
나는 아무리 수련을 하고 깨달음을 얻어도 상승의 경지로 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그래서 언제나 우리 녀석들이 열심히 무공 수련을 할 때면, 나는 언제나 이렇게 우리 현화문의 도를 쌓는 수양을 한다.
내 마음의 수양이 조금 쌓였는지 어떤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그냥 좋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어렸을 적부터 계속해오던 것이라 그런지, 자연스럽고 몸과 마음이 모두 편안해진다.
이런 내 모습을 보면 좋아하실 우리 사부님을 떠올리니 기쁘기도 하고.
아! 그리고 우리 예지 말이다.
정확히 지난 회귀보다 내공이 반 갑자 늘었다.
물론 지금도 자신의 화기를 내공으로 계속 전환 중이다.
내공이 반 갑자 늘어난 이유는, 내가 신가산에서 캔 심토만력근의 반쪽을 복용했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내가 절강 항주를 두 번째 방문했을 때에는, 그러니까 복건에서 왜구를 토벌하고 항주를 들렀을 때 말이다.
그때는 역시나 폐관 수련 중이어서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당시 며칠 동안 항주에 머물렀다가 떠나며, 사부에게 예지와 향이 주라며 반으로 갈라 잘 말린 심토만력을 주었다.
그걸 복용해서 우리 예지의 내공이 반 갑자 늘어난 것이다.
아무튼, 예지의 내공이 늘어난 것도 늘어난 것이지만.
이번 주소수와의 싸움!
그녀를 완벽히 이길 방법이 무적할매 열여덟 개, 작은 사부 열여덟 개, 도합 서른여섯 개나 된다.
어떤 방법을 쓸지 고르는 것도 어렵다.
물론, 그걸 고를 때마다 내 얼굴에서는 나도 모르게 사악한 미소가 빵끗빵끗 피어나지만 말이다.
기다려라, 주소수.
아! 그전에.
“자! 모두 잠깐 모입시다. 오늘부터 제가 몇 가지 합격술에 대해…….”
*
화양문, 가모전.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저녁을 먹고, 주소수와 단둘이 자리를 했다.
많은 이야기가 오가고, 신녀를 찾을 수 있다는 말에 주소수의 눈이 그렁그렁해졌다.
“조건이 있습니다.”
“말……해라.”
“첫째, 화양문과 동맹을 맺고 싶습니다.”
“신녀를 찾아만 준다면, 적들과의 싸움에 우리 화양문이 선두에 서겠다.”
“둘째는…… 어험.”
“……?”
“이번 일로 중체를 때리지 말아 주십시오.”
응, 그렇다.
여기까진 지난 회귀와 똑같다.
하지만 큭큭큭.
“아! 잠깐만요.”
“또 뭐가 있나?”
“네. 혹시 몰라서…….”
“……?”
“설마…… 설마 그러시진 않겠죠? 에이, 아니에요. 아닙니다.”
“뭐지? 정확히 말하라.”
“에이, 아닙니다. 설마 천하의 화양문 가모께서, 거기에 구음신녀문이라는 위대한 문파의 문주께서, 설마 말장난 같은 거 하실 리는 없겠죠.”
“그게 무슨 말이냐?”
“아니라니까요, 하하하.”
내가 손사래까지 치며 말을 끊었다.
그러자 신녀를 찾을 수 있다는 기대와 감격에 대한 벅찬 감정이 다 가시기도 전.
주소수의 얼굴이 차갑게 변해 날 째려보았다.
제대로 말을 하지 않으면, 한 대 칠 기세다.
그래서 못 이기는 척, 말을 이었다.
“아니, 그러니까요. 제 말은. 첫 번째 조건 말이에요. 화양문과 저와의 동맹에 관해서…… 음, 그러니까…… 하하! 이런 생각을 한 제 머리를 한 대 쥐어박고 싶네요. 설마 천하의 주소수 여협께서 애들 말장난도 아니고, 동맹은 동맹이지만 동등한 입장에서의 동맹은 맺을 수 없다 라고 할 리가…… 하하. 그럴 리가 없는데 말이죠, 하하하!”
“…….”
대꾸하지 않는다.
날 노려보며, 얼굴이 시뻘게져, 큭큭큭.
볼살만 실룩거린다.
또 입술이 연신 달싹거리는 게, 무언가 숨기려다 걸려 변명을 하려는데 하지 못하는, 그냥 딱 봐도 도둑질하다가 걸려 창피하다는 얼굴이었다.
난 여전히 얄밉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니죠?”
그러자 그녀가, 화를 간신히 참고 있지만 음성까지는 제대로 화난 감정을 모두 숨기지 못하고 말했다.
“아니다. 그럴 리가 없지 않겠느냐?”
“어? 화나셨어요?”
“아니다. 내가 왜 화를 내겠느냐?”
“아하! 그렇죠? 당연히 이 기쁜 순간 왜 화를 내시겠어요? 그렇죠?”
“물론, 신녀를 찾아야 한다. 만약 신녀를 찾지 못한다면…….”
다음 날, 주소수와 구음신녀문에서 사십이 년 동안 찾지 못했던 신녀를, 내가 찾아 주었다.
감격의 도가니가 따로 없었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다.
내 목표는, 화양문과 구음신녀문을 통으로 먹는 것이다.
왜? 지난 회귀 때, 주소수가 내 목을 잘라 버렸으니까.
원래 동등한 입장에서 동맹을 맺으려고 했는데, 이게 다 주소수의 욕심 때문이다.
뿌린 씨는 거두어야지.
*
태양전(太陽殿).
우리와 극양신장 오대극, 그리고 주소수가 자리했다.
역시 지난 회귀와 똑같은 말들이 오가고.
“어험, 어험. 동맹에 대한 공식 제안과 결의는 내가 했으니, 어험, 어험. 그 구체적이고 세세한 사안들은 부인께서 좀 전달해 주시겠소?”
극양신장 오대극이 한없이 주소수의 눈치를 보며 저리 말했고.
주소수가 가짜 미소와 거짓 상냥함을 앞세워 우리 앞으로 나섰다.
“동맹…… 아! 당연히 동등한 입장에서의 동맹이죠.”
아직 주소수의 깊은 간계와 야심에 대해서까지는 모르는 우리 녀석들의 얼굴이 환해졌다.
하지만 절대 이게 끝이 아니다.
“그리고 동맹의 세부 규약에 대해 제가 임의로 정리를 해 보았습니다. 마 도사님과 친구분들께서도 충분히 납득할 만한 내용입니다. 물론, 제가 작성한 동맹의 규약 중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충분히 수정이 가능합니다.”
그녀가 몇 장에 달하는 서류를 나에게 건넸다.
그리고 난 그걸 거들떠보지도 않고 뒤에 있는 한해북에게 넘겼다.
뻔한 내용이기에 볼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일 다경이도 지나기 전, 한해북에게서 반응이 왔다.
“마, 마 형, 이건…… 이건 누가 보더라도 동등한 입장에서의 동맹이 아닙니다. 이건…… 하아!”
한해북도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었는지, 한숨을 길게 쉬며 주소수를 한 번 쳐다본 후에야 다시 나에게 말을 이었다.
“이건 그냥 우리를 화양문의 무력대 정도로 부리겠다는 내용입니다.”
난 주소수가 나에게 서류를 넘기기 전부터 계속 웃고 있었다.
한해북이 서류를 검토할 때도, 여전히 시선은 주소수에게 고정한 채 미소를 잃지 않았다.
한해북이 충격적인 동맹의 규정에 대한 답을 내놓은 지금까지도 계속 미소를 짓고 있다.
“주 여협, 들으셨죠? 주 여협께서 작성하신 동맹에 관한 세부 규약이 매우 불공평하다는데요?”
“어머? 그럴 리가 있겠어요? 아닌데. 뭔가를 잘못 보신 거 아닌가요, 한 대협?”
그녀 역시 시종일관 미소를 짓고 인자함과 상냥함을 잃지 않고 있다.
거짓 미소며 가짜 인자함과 상냥함이다.
무엇보다.
그녀는 자신감이 철철 흘러넘치고 있었다.
힘으로 나를 누를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내 목을 베어, 지금까지 내가 이룩한 모든 것을 빼앗을 계획인 것이다.
주소수가 한해북을 향해 물었지만, 답은 내가 했다.
“주 여협, 저도 동맹에 관한 세부 규약을 임의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한번 보시겠습니까? 아마 주 여협께서 작성하신 세부 규약보다 훨씬 공평하고 합당한 내용이리라 생각합니다.”
그녀가 나를 보며 방긋 웃는다.
맹랑한 녀석을 봤다는 그런 얼굴이다.
하지만 어떻게 해도 자신을 넘을 수 없다는 넘치는 자신감 또한 내포된 미소다.
“어디 한번 볼까요?”
난 품속에서 서류를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그리고 일 다경.
아니, 반 다경이 지나기도 전.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도 미소를 잃지 않던 그녀의 얼굴이 붉게 변하며 실룩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건넨 서류를 찢어 버릴 기세다.
화가 무지막지하게 난 모양이다.
결국 그녀의 음성이 뚝뚝 끊기며 이어졌다.
“이거…… 지금…… 나랑…… 장난하는…… 우리 화양문을 통으로…… 그냥 통으로 집어삼키겠다는 뜻이…… 뜻입니까, 마 도사님?”
억지로 미소를 지으려 했지만, 어디 그게 쉽나?
오만상이 뭔지 현재 주소수의 얼굴이 그랬다.
난 여전히 평온했고, 또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전 최대한 공평하고 합당하게 작성한 것인데요. 화양문을 통으로 집어삼키다니요? 큰일 날 말씀을 하시네요, 하하하.”
그녀의 손끝이 부들부들 떨렸다.
얄밉게 웃으며 말하는 나를, 일 장에 쳐죽일 그런 분노를 간신히 정말 간신히 인내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다시 얄밉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 제 세부 규약도 마음에 안 드시고, 주 여협께서 제시하신 규약은 또 저희 입장에서는 수용하기 어렵고. 참 난감하네요.”
그때였다.
주소수의 얼굴이 다시 환하게 펴졌다.
내가 미끼를 덥석 물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주소수는 화색이 되어 나에게 말했고, 나는 대답 대신 고개만 갸우뚱했다.
“무림의 오랜 방식으로 결정하는 거예요.”
“네? 무림의 오랜 방식요? 그게 뭔데요?”
“뭐긴 뭐겠어요? 비무를 통해 동맹의 규약을 결정하는 것이죠.”
“극양신장 오 대협과 제가요?”
“에이, 마 도사님도 참, 제가 그렇게 양심 없는 여자로 보이세요?”
응, 그렇게 보여.
“그럼 어느 분께서 비무에 나서실 참이신가요?”
“동맹에 관한 세부 규정에 대한 본문의 입장은 제가 대표하고 있으니 제가 나서야죠.”
“아! 주 여협께서…….”
슬쩍 두려운 빛을 내비쳤다.
당연히 일부러 그런 것이고.
아무튼 그러자 주소수의 미소가 저도 모르게 더 짙어졌다.
“호호, 말씀드렸잖아요, 마 도사님. 제가 그렇게 양심 없는 여자가 아니라고요, 호호호.”
“그럼 어떻게 하자는 말씀이십니까?”
그녀가 비무의 규칙에 대한 설명을 이었다.
내 목을 걸라는 말이었고, 당연히 이번에도 우리 예지가 나서서 이에 항의했다.
하지만 결과는 바꿀 수 없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는 세 가지 선택권이 있습니다. 첫째, 제가 제안한 동맹 규약을 받아들여 맺는 동맹. 둘째, 비무에 이겨 마 도사님이 제시한 규약에 따르는 동맹. 마지막으로 셋째. 동맹을 맺지 않고 이곳을 떠나는 것입니다. 선택은 여러분의 자유입니다.”
그게 끝이었다.
주소수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가 준 세 개의 선택권, 그것은 내가 결정해야 한다.
“휴우, 주 여협.”
“좀 더 생각한 후 답을 주어도 괜찮습니다, 마 도사님.”
“아닙니다. 결정했습니다.”
그렇다.
지난번엔 이렇게 개죽음을 당했다.
하지만 하하하!
아! 웃겨 죽겠는데, 진짜 혀까지 깨물며 웃음을 참고 있다.
난, 정색을 하고 시선을 극양신장에게로 돌렸다.
초조한 상태로 깊은 고민에 빠져 있던 극양신장은, 내 시선이 닿자 미세하지만 놀란 눈을 떠 그런 나를 보았다.
“무슨 할 말이…… 있는가?”
“주 여협의 말을 화양문의 정식 입장으로 받아들여도 되는지 문주이신 오 대협께 확인하고 싶습니다.”
쉽게 답할 수 있는 문제다.
하지만 극양신장은 쉬이 답하지 못했다.
나를 보는 그의 눈에서 깊은 고심과 극심한 갈등이 느껴졌다.
그렇게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에야 극양신장이 답했다.
“마 도사.”
“네, 오 대협.”
“비무…… 안 하면 안 되겠나?”
그 목소리에 극도로 나를 염려하는 마음이 묻어 있었다.
나도 그런 극양신장을 배려해 아주 잠깐이지만 고민하는 척한 후에 답했다.
아주 힘있는 목소리로.
“하겠습니다, 비무. 주 여협의 말대로 제 목을 걸지 않고 어찌 천하를 구하려 들겠습니까?”
결국 극양신장에게서 작은 한숨이 길게 새어 나왔다.
“휴우,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부디 자네들의 무공 경지가, 내가 판단한 것보다 낫기를 바랄 뿐일세.”
죽지 않길 바란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이게 아니다.
내가 원하는 답은.
“오 대협! 저는 목숨을 걸었습니다. 오 대협께서도 명확한 답을 주십시오.”
내 말에 극양신장이 다시 약간의 시간을 보낸 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더니 목소리에 내공까지 은은히 실어 큰 목소리로 선언하듯 말했다.
“비무와 동맹에 관한 부인의 말은 나 오대극과 화양문의 공식적인 입장임을 증명한다. 또한, 비무의 결과가 어떻게 나든, 본 화양문은 이를 절대 인정하고 따른다. 만약 이를 어길 시, 나 오대극은 신분의 고하와 나와의 관계를 막론하고 목을 베어 엄히 처벌할 것이다.”
그는 살짝 격앙되어 있었다.
그렇게 격앙된 눈으로 잠시 입을 멈추고 주소수를 바라보았다.
극양신장의 시선이 닿은 주소수는 살짝 고개를 숙여 그의 말에 전적으로 따를 것임을 확인해 주었다.
이에 극양신장이 더 커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는 화양문의 모든 문도에게 해당하며, 내 부인과 세 명의 아들도 당연히 포함된다. 이 모든 사실을, 나는 오늘 돌아가신 아버지와 화양문의 역대 문주님들의 명예를 걸고 맹세한다.”
무림에서 명예는 목숨보다 중요하다.
일부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다만, 대부분이 그렇다.
특히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 황룡회나 화양문 같이, 그 역사가 길고 규모가 큰 세력일수록 이런 성향은 더 짙게 나타난다.
더군다나 자신의 목숨이나 자신의 명예가 아닌, 아버지와 역대 문주들을 언급했다.
극양신장이 아무리 공처가라 하지만 가차 없이 목을 베어 버릴 것이라는 뜻이다.
됐다.
판은 완벽히 깔렸다.
나는 다시 시선을 주소수에게로 향했다.
여전히 가짜 미소와 거짓 상냥함으로 나를 보고 있는 그녀다.
또한 자신감 역시 철철 넘쳐 흐르는 게 눈에 보였고.
그녀를 향해 말했다.
“주 여협의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다. 비무, 하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