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화
난 누구? 여긴 또 어디?
광마일기를 읽었다.
그리고 내 몸에 다섯 글자의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삼십이합망(三十二合亡), 서른두 번째 공격에 죽음.’
*
아! 이건 뭘까?
그래도 명색이 초절정 극상의 고수가 세 명이었는데, 서른두 번째 공격에 죽었다고?
질 가능성이 높은 싸움이었지만, 그래도 너무 쉽게 당했다.
그나저나 진짜로 죽일 줄 몰랐는데, 진짜로 죽였네.
하아! 돌겠다.
‘구음신녀문의 혀는 간사하고, 칼에는 자비가 없다.’
공손병이 괜한 소리를 할 사람이 아니지.
그나저나 진짜 나를 죽였다는 소리는, 어쩌면 주소수가 다른 마음을 품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해석할 수도 있겠다.
나를 죽여, 내가 죽기 전까지 모은 힘을 모두 화양문의 기치 아래로 모으는 것.
그렇게 천수신권, 무림맹주와 싸워 이긴 후, 화양문의 천하를 만들겠다는 생각.
다시 극양신장을 천하의 주인으로 만들겠다는 야심.
어차피 극양신장이 천하의 주인이 된다면, 그건 역시나 외양이 그렇다는 것일 뿐.
진짜 천하의 주인은 주소수 본인이 되는 것 아니겠는가.
뭐, 망상에 가까운 추측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대가 주소수라면, 분명 그럴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을 수 없다.
괜찮다.
이미 한 번 겪었다.
방법을 찾으면 된다.
주소수의 혀가 아무라 간사하고, 그녀의 칼이 아무리 무자비해도, 나에게는 신통력이 있지 않겠나?
회귀라는 신통력, 큭큭.
이번엔 제대로 박살을 내 버리겠어, 아줌마!
그나저나 우리 사부 배고프겠다.
얼른 가서 국수나 좀 끓여 줘야겠다.
*
알몸의 상태로 고추를 덜렁거리며 광천동을 나섰다.
사부가 있는 갑돌산은 바로 앞이다.
광마일기에 지도가 자세히 그려져 있어 쉽게 찾아갈 수 있다.
알몸이지만 집에 도착할 때까지 누굴 만날 일은 없다.
그래서 거침없이 덜렁덜렁, 큭큭큭.
내가 봐도 미친놈 같군.
그렇게 길도 없는 산길을 가는데, 그 바위가 있다.
아니, 바위가 중요한 게 아니라.
허거거거걱! 뭐가 저렇게 예뻐?
아니, 이건 예쁘다는 말로는 설명이 안 된다.
아! 그녀다.
백미호가 큰 바위 위에 홀로 앉아 있다.
광마일기에 그 아름다움에 대해 몇 쪽이나 기록되어 있지만, 실제로 보니 떨린다.
어떻게 인간이 저렇게 아름다울 수 있지?
아니지. 요괴지.
그래도 이건 좀 심하게 아름답다.
나를 빤히 쳐다보는 그녀.
그러더니.
“뭐 해? 어서 이거 입어.”
나에게 무언가를 휙 던진다.
아! 나 알몸이지.
백미호가 던진 건 옷이다.
“어, 그래.”
서둘러 몸을 돌리고 그녀가 준 옷을 입었다.
“와서 앉아.”
“엉.”
큰 바위 위로 올라가 그녀 옆에 앉았다.
뭔가 좀 화가 난 얼굴이다.
내가 뭘 잘못했나?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마치 내 머릿속을 읽은 것처럼 그녀가 입을 열었다.
“이번엔 또 왜 죽었어?”
“어? 그, 그게…….”
“극양신장이 죽인 거야? 화양문에 간다고 했잖아.”
“아니, 그게…… 휴우. 설명하자면 좀 길어. 지금 내 머리도 복잡해. 그런데 왜 이렇게 화가 났어?”
설마 조금 전에 본 내 그게 마음에 안 들었나?
이게 살짝 겸손하긴 하지만 그래도 화가 나면 무시무시한데.
“다 잡았었어. 이번엔 진짜 잡을 수 있었다고. 그런데 그때, 네가 죽어 버린 거야.”
“설마…… 진짜로? 진짜 계효보를 잡을 뻔했어?”
“못 믿겠지?”
“쪼금. 아주 쪼오오오금 그래.”
“휴우, 진짜야. 거의 다 잡았는데, 네가 죽어 버리는 바람에…… 계효보가 우리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어.”
“뭐야? 내가 죽고 다시 회귀하면, 계효보도 이곳에서 생기는 거야?”
“응. 확실해. 지금 호요랑 웅요랑 이곳 십간산 일대를 샅샅이 뒤지고 있어. 물론, 우리가 북해에서 이곳으로 달려오는 사이 이미 도망쳤겠지만.”
“정말이야? 정말 계효보를 잡을 수 있어?”
너무 놀랐다.
솔직히 조금은 기대했지만, 정말 아주 조금만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백미호는 진심이다.
정말 너무 아쉬워하고 있다.
실제 계효보를 거의 잡을 뻔했기에 나올 수 있는 표정이었다.
심장이 갑자기 요동쳤다.
계효보를 진짜로 잡을 수 있다는 말에, 무언가 형언하기 어려운 감정이 내 온몸을 지배하였다.
“제발 쫌!”
“어? 왜?”
“죽지 좀 말라고.”
“아, 그래. 미안. 미안해.”
나에게 한마디 한 게 오히려 미안했나 보다.
백미호가 조금은 측은한 얼굴로 나를 본다.
“고생했어.”
“아, 아니야. 아하! 진짜 아깝다. 놈만 처리하면 정말 두 다리 뻗고 편히 잘 수 있을 것 같은데. 너도 이제 고생하지 않아도 되고. 내가 죽어 버리는 바람에 다 틀어졌네.”
“아니야. 나도 너무 아쉬워서 너한테 한 소리 한 건데. 이젠 가능해. 확신할 수 있어.”
“어떻게 된 건지 물어봐도 돼?”
“놈의 움직임, 생각을 읽을 수 있게 됐어.”
“요술로?”
“아니. 계속 놈을 쫓다 보니, 닭이 어떻게 행동할지 또 어디로 도주할지 등에 대해서 예측할 수 있게 됐다는 말이야.”
“바뀌지 않을까? 닭대가리가 나를 통해 더 강한 힘을 얻게 되면 쫓는 것도 쉽지 않을 텐데.”
백미호가 고개를 살며시 가로 젓는다.
“광마일기에 기록된 네 추론이 맞아. 닭은 네가 죽어 갈 때, 또 죽은 후에 네 능력을 흡수해. 하지만 지지난번과 지난번의 네 죽음 때는 놈이 네 곁에 다가갈 수 없었어. 우리에게 쫓기기 바빴지.”
“그렇다는 건…….”
“응. 맞아. 놈은 네 힘을 흡수하지 못했다는 뜻이야.”
“아!”
갑자기 아름다운 백미호가 아름다운 게 아니라 위대해 보인다.
“존경합니다, 백 소저.”
“풉, 됐어. 나도 너무 아쉬워서 짜증 한번 내야 속이 풀릴 것 같아 널 찾아온 거야. 얼굴도…… 오랜만에 보고.”
갑자기 얼굴은 왜 붉어지고 그래?
아까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내 몸을 볼 때는 거칠 것 하나 없다는 듯 그렇게 봤으면서.
설마……?
하하.
아! 심장이 또 쿵쾅쿵쾅 뛰네.
“잡을 수 있겠다. 그치?”
“아마도. 아니, 그래야지.”
“한 가지는 꼭 조심해야겠다.”
“말하지 않아도 생각하고 있어. 놈은 네가 죽을 때를 기다렸다가 어떻게든 찾아가려 할 거야. 하지만 걱정하지 마. 절대 그렇게 두지 않을 테니까.”
“미호야.”
그윽한 눈길로, 또 부드러운 음성으로 그녀를 불렀다.
“……?”
“가장 힘든 일을 너에게만 떠넘긴 것 같아 미안해.”
말을 함과 동시에 그녀의 손을 살포시 잡았다.
아! 거부하지 않는다.
심장이 터질 것 같다.
그녀의 얼굴이 더 붉게 달아올랐다.
나와 눈도 마주치지 못하는 그녀다.
“아니야. 어차피 우리 요괴의 일이잖아. 내가 처리해야…….”
그녀의 말이 끝나기 전, 난 살포시 얼굴을 그녀에게 천천히 다가…… 젠장!
“공주님! 찾았습니다! 계요가 북쪽으로 도주한 흔적을 찾았습니다!”
웅요다.
눈치라고는 일도 없는 미련곰탱이 같은 녀석.
“악치야.”
“응, 미호야.”
“나 가 봐야 할 것 같아.”
하아!
하던 것 마저 하고 가라고 하면 미친놈이라고 그러겠지?
“응. 몸조심하고.”
“그래. 너도.”
그렇게 백미호가 떠났다.
난 백미호가 떠난 방향을 보며 한동안 움직일 수 없었다.
*
사부에게 국수…… 삼재검법…… 절강 항주로 갔다.
초향과 실컫 놀아 주고, 국수도 맛있게 끓여 줬다.
주소수를 상대할 첫 번째 방법.
주소수보다 훨씬, 아예 상대도 안 될 무지막지한 엄청난 고수에게 그 해법을 얻는 것이다.
그리고 나에겐 어쩌면 당대의 천하제일일지도 모를 무적할매가 있다.
“우 여협.”
“왜 그런 눈으로 보냐? 하던 대로 해. 건방진 눈으로 보란 말이야.”
“제가 또 언제 그랬다고 그러세요?”
“됐고. 뭐? 국숫값이라도 줘?”
“에이, 우리 사이에 무슨 섭섭한 말씀을. 하하.”
“우리 사이가 어떤 사인데?”
“어험. 뭐, 그게…… 어험. 우 여협.”
“왜?”
“궁금한 게 있습니다. 진지한 질문입니다.”
“……?”
“초절정 극상의 고수 셋과 절정의 고수 두 명이 화경의 고수 한 명과 싸우면 누가 이길까요?”
“반반.”
“네?”
“반반이라고. 똑똑한 놈이 이기게 되어 있어.”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을……?”
“독을 써. 암기도 쓰고. 그러면 화경의 고수가 만독불침이 아닌 이상 타격을 받을 거 아니야. 그때 다섯 놈이서 합공을 하면, 제아무리 화경의 고수라도 버티기 힘들겠지.”
아! 괜히 물어봤나?
아니다. 의심하지 말자.
광천마제 시절의 나를 일방적으로 두들겨 팬 할매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무적할매가 주소수의 머리 꼭대기에 있다고 해도 절대 과장이 아니다.
“또 다른 화경의 고수가 참관인으로 지켜보는 자리입니다. 독과 암기는 쓸 수 없고, 정확히 말하자면 목숨을 건 정식 비무입니다. 그러니까 비무의 규칙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난 주소수와의 비무에 대해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물론, 주소수란 이름은 빼고 그 규칙과 형식에 대해서 말이다.
“그런데 그건 왜 묻냐? 좁쌀만 한 내공 한 자락 없는 녀석이.”
“아! 그냥 알려 주시면 안 돼요?”
“내가 왜?”
“알려 주시면, 우리 사부님이 좋아하는 수양 장소라든지 좋아하는 산책 장소, 음식, 취향 이런 거 다 알려 드릴게요.”
“마 공자, 비무의 규칙이 어떻다고 말했지?”
이 할매, 아주 그냥 사부 말만 나오면 사람이 바뀌어 버린다.
덕분에 나는 주소수를 상대할 열여덟 가지의 완벽한 방법을 얻을 수 있었다.
*
심토만력근.
와!
혹시나 해서 신가산에 와봤다.
그런데 진짜 있다.
심토만력근 기억하는가?
우리 현화문의 사조 중 한 명이 기록했던 영약 말이다.
그런데 매번 계효보가 먼저 캐어 복용해서 나중에는 포기해 버렸던 그 영초.
닭대가리가 백미호와 호요, 웅요에게 쫓긴다는 말을 듣고서, 혹시나 해서 와 봤다.
와! 닭대가리가 진짜 정신없이 쫓기긴 하는 모양이다.
심토만력근까지 그대로 있다.
땅을 파는 게 진짜 죽을 만큼 힘들었지만, 아니 하나도 안 힘들다.
무려 일 갑자의 기운을 머금은 영약이다.
뛸 듯 기뻤다.
반으로 쪼개 잘 말려 두었다가, 나중에 절강 항주에 다시 들릴 때, 백두산에서 만년산삼 말린 거랑 함께 우리 예지랑 향이 줘야겠다.
난 심토만력근을 품에 조심스레 품고 신가산을 떠나 작은 사부가 있는 귀정사로 향했다.
대박이다, 하하!
*
“작은 사부, 그러니까 비무의 규칙이…….”
우리 작은 사부.
무적할매와 더불어 당대의 천하제일인에 가장 가까운 사람.
주소수 따위와 비교할 수 없다.
난 작은 사부에게 주소수를 상대할 열여덟 가지의 완벽한 방법을 구할 수 있었다.
*
몽고 사막.
작은 사부, 송암 도장, 아미삼검의 도움으로 원곡과 제갈가단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곧바로 죽였다.
이제 그들의 입을 통해 들어야 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부디 다음 생에서는 착한 사람으로 태어나길 다시금 기도해 주었다.
*
팔적산.
포쾌문의 금의포쾌 여적위의 도움으로 유령신검의 수제자 칠흑야검의 일을 해결할 수 있었다.
그 후 유령신검과 동맹도 맺었다.
천하제일고문가 홍민을 다시 만날 이유는 없었다.
원곡은 이미 죽고, 그에게 도움받을 일도 없기 때문이다.
난 처선과 함께 처호, 공손병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공손병은 이번에도 나에게 충성 맹세를 했다.
여전히 감격스러웠다.
그리고 처호, 처선, 공손병은 유령신검의 황룡회와 동맹의 세부 사항을 협상하고, 거기에 더해 유령신검 사형의 죽음에 대한 사실을 알려 주기 위해 황룡회로 보내는 것을 결정했다.
나는 지난 생처럼 극양신장의 화양문과 동맹을 맺으러 가기로 결정하였다.
그렇게 처호, 처선, 공손병은 산서의 황룡회로.
나는 귀주의 화양문으로 가기 전.
중요하게 할 일이 있다.
주소수를 상대해야 할 일들이다.
“동맹에 관한 세부 사항을 미리 작성해 달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소, 처호 선생.”
“죄송하지만 주군, 동맹에 관한 세부 사항은 기나긴 협상을 통해 수백 수천 번의 수정을 거쳐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어찌 임의로 작성하라는 말씀이십니까?”
“아! 그건 걱정하지 마시오. 다 방법이 있으니까. 그러니 동맹에 관한 세부 사항을 적되, 철저히 우리에게 유리한 입장의 내용으로 적어 주시면 됩니다.”
처호, 처선, 공손병은 무려 사흘에 걸쳐 화양문과 우리의 동맹에 관한 세부 사항을 작성하였다.
완성된 동맹의 내용을 보니, 하하하!
완전 마음에 든다.
이건 동등한 입장의 동맹이 아니다.
일방적으로 내게 유리한 동맹이다.
감히, 내 앞에서 잔꾀를 부리려고 하다니.
사람 잘못 봤다.
기다려라, 주소수!
이제부터 반격이다.
화양문을 통으로 먹어 주겠어.
구음신녀문까지.
푸하하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