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화
-주 여협!
너무 화가 나 전음으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주소수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여전히 거짓으로 꾸며진 부드럽고 상냥하며 인자한 미소를 짓고는 나를 빤히 쳐다볼 뿐이었다.
-약속이 틀리지 않습니까!
다시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주소수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답했다.
-무슨 약속요?
-신녀문의 신녀를 찾아주면, 우리와 동맹을 맺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랬죠. 그래서 지금 동맹을 맺었잖아요.
-그, 그치만…… 지금 이게……
-이보세요, 마 도사님.
-…….
-제가 동맹을 맺겠다는 약속을 했지, 동등한 입장에서 동맹을 맺는다고 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요?
빌어먹을.
누가 간사한 혀 아니랄까 봐, 지금 장난질인가?
아줌마만 아니었어도, 한 대 쳤을지 모르겠다.
물론, 내 목은 날아갔겠지만 말이다.
그만큼 화가 치밀었다.
-지금 말장난하십니까!
-말장난이라니요. 말씀이 심하십니다, 마 도사.
-신녀문의 신녀를 찾아 준 게 저입니다.
-저와 문도들 모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니, 제 말은 그게 아니지 않습니까!
분위기란 게 있다.
나와 주소수가 전음으로 언쟁을 벌이고 있지만, 자리에 있는 이들 중 이를 눈치채지 못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아, 왕대는 눈치채지 못한 것 같다.
아무튼 모두가 나와 주소수를 숨죽여 지켜보고 있었다.
화가 치밀고 흥분해 호흡까지 거칠어졌다.
주소수는 그런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빤히 쳐다보았고.
그러다 주소수가 전음이 아닌 입을 통해 나에게 말했다.
“마 도사님, 제 부군이 말씀하셨듯 마 도사님은 나이에 비해 정말 놀라운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저 또한 그런 마 도사님을 마음속으로 인정하고 존경하고 있습니다.”
“…….”
“하지만! 현실은 현실로 받아들여야 하지요. 그게 공평한 것이고 옳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그게 무슨……?”
“마 도사에게 어떤 세력이 있습니까?”
“저에게는…… 지금 자리에 있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화산에 수룡검 천무휘도 있습니다. 또 알려지진 않았지만, 천하에 통하지 않는 것이 없는 뛰어난 지략가도 있으며, 저를 따라 함께하려는 문파가 이미 수십 곳에 달합니다.”
“중소방파들을 말하는 건가요? 소림이나 무당, 남궁세가, 사천당가와 같이 누구나 이름만 들어도 인정할 만한 문파나 세가가 아닌 이름조차 잘 알려지지 않은 그렇고 그런 작은 문파들이요.”
“그, 그게…….”
“본 문은 귀주, 호남, 광서, 광동에 이어 여러 지역에 오백여 개가 넘는 문파와 세가가 따르고 있습니다. 또 천하에 통하지 않는 게 없는 지략가라고 했어요? 만리통, 천수뇌, 백암노사, 춘추선생, 뇌룡군자 등등등. 그 이름과 별호만 대어도 천하의 그 누구도 인정할 만한 뛰어난 군사와 선생들이 우리 화양문에는 넘쳐납니다.”
“저는…… 무당, 아미, 황룡회와 동등한 입장에서 이미 동맹을 맺었습니다.”
“마 도사.”
“……?”
“실망이군요. 지금 그들을 배경으로 삼으려는 건가요? 지금 이 동맹이 우리 화양문과 마 도사가 맺는 동맹인가요? 아니면, 무당, 아미, 황룡회를 뒷배로 삼고 있는 마 도사와 맺는 동맹인가요.”
“하지만 동맹을 맺게 되면, 그들과도 동맹을 맺게 되는 것으로…….”
순간, 주소수가 날카로운 음성으로 언성을 높였다.
“마 도사! 정신 차리시오!”
얼마나 그녀의 음성이 날카로웠는지, 대화의 주도권을 빼앗겨 정신없이 끌려다니던 내가 화들짝 놀라 정신을 차렸을 정도였다.
곧바로 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본 문의 정예는 삼천 명이나 되고, 본 문을 따르는 가신 세가와 문파를 합치면 최소가 일만오천 명이며, 최대 오만 명 이상까지 고수들을 모을 수 있습니다. 또, 부군과 나는 이미 화경의 벽을 깬 지 오래고, 두 아들을 포함해 본문에서 직접적으로 보유한 초절정의 고수만 스물두 명이나 됩니다. 더 이야기할까요?”
“그, 그러니까…….”
아! 정신없이 몰아치는군.
머릿속이 그냥 하얘졌다.
너무 방심하고 있었다. 일이 다 끝났다고 생각했다.
완전한 무방비 상태에서 당하니, 도대체 대처할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더군다나 무방비의 나를 공격한 것이 다른 이도 아니고 주소수라면, 내 지금 상황이 나 역시 이해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무서운 여자다.
“경험, 고수, 세력, 자금까지 본 문이 마 도사 당신보다 수십 배, 아니 수백 배는 더 강합니다. 그런데 지금 동등한 입장에서 동맹을 맺자고요? 오히려 제가 따져 묻고 싶군요. 마 도사에게 양심이란 것이 있는지 말입니다.”
씨X! 졌다. 완벽한 패배다.
눈물을 흘리지 않은 것만으로도 내가 대견할 정도다.
여기서 눈물까지 흘렸다면, 아!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쪽팔려서 다시는 고개를 들고 다니지 못했을 것이다.
주소수.
아마도 젊은 시절 천수신권과 무림맹주가 주소수한테 두들겨 맞았을 때 지금의 내 심정 같았으리라.
나만 그런 게 아니다. 의제, 한해북, 그리고 우리 예지까지.
주소수의 폭풍 같은 몰아침에 표정으로 완벽한 패배를 인정하고 말았다.
어쩌지? 빠져나갈 구멍 따위가 보이지 않는다. 이대로, 동맹을 깨 버려야 하나?
그런데 그때였다.
“호호호. 호호호호. 어머나. 죄송해요, 마 도사님.”
이 아줌마가 미쳤나?
갑자기 웃고 그래?
그냥 웃기만 하는 것도 아니다.
조금 전까지 무슨 말싸움의 왕이라도 되는 것처럼, 세 치의 혀로 검강을 마구 날리던 그 사악한 모습이 거짓말처럼 쏙 사라져 버렸다.
그래서 더 불안했다.
이 아줌마가 이번엔 또 무슨 수작질을 해서 나를 농락하려는 것인지 말이다.
“어머, 많이 놀라셨나 봐요? 이거 죄송해서 어쩌죠? 너무 중차대한 문제라 저도 모르게 흥분을 해서. 화 푸세요, 마 도사님.”
이 아줌마가 진짜!
와! 내가 힘만 세면 진짜 한 대 쳐 버리고 싶다.
물론, 현재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주소수의 간사하며 사악한 미소는 계속 이어졌다.
“화 푸시고. 그러니까 제 말은 꼭 그렇게 하자는 게 아닙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어라? 이건 또 뭔 소리지?
아니다. 방심하지 말자.
이미 이 상황까지 철저히 계산하고 나온 여자다.
아! 또 불안하네.
나만 불안한 게 아니다. 우리 애들도 불안해 얼굴까지 새파랗게 질려 버렸다.
그리고 극양신장. 저 양반은 지금 판이 자기한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음에도, 몸을 떨고 있다.
아들들만큼이나 자기 부인을 무서워하나 보다.
휴우, 아무래도 병 주고 약 주면서 나를 더 농락하려는 것 같긴 한데.
그래, 주소수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일단 더 들어나 보자.
“객관적으로 보나 상식적으로 생각하나, 사실 동등한 입장에서의 동맹이 어려운 건 맞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무림의 생리가 꼭 그렇게 일 더하기 일이 이라는 형식으로만 진행되지 않잖아요. 저도 잘 알아요, 마 도사님.”
“……?”
“그래서…… 음…… 이렇게 해 보면 어떨까, 제 부군과 상의를 해 봤어요.”
“뜸 들이지 마시고, 그냥 말씀하시지요.”
그녀가 씨익 웃는다.
아예 나를 자신의 한참 아래로 보는, 분명 나는 자신의 상대가 안 된다고 확신에 가득 차 웃는 비웃음이다.
더 자존심 상하는 건, 현재 이를 부인하지 못하는 내 마음이다.
“예로부터 무림에서 무언가 결정할 때 합의점을 찾지 못하면 한 가지 방법을 통해 의견을 통합하지 않았습니까?”
아놔, 이 아줌마가 끝까지 사람을 놀려 먹으려 하네?
지금 한 판 붙자는 소리 아닌가?
“어머, 마 도사님 표정이…… 또 오해하셨나 보네요. 제가 그렇게 경우가 없는 여자가 아니랍니다.”
아! 진짜, 진짜로 딱 한 대만 때리고 싶다.
얼마나 억울하고 화가 났는지, 눈물까지 나려 한다.
“말씀……하세요. 그래서 어쩌자는 거죠?”
“힘으로 결정하자는 것입니다. 아! 오해하지 마세요. 분명 말씀드렸잖아요. 제가 경우가 없는 여자가 아니라고요. 그리고 기분 나빠하지 말고 들어 주셨으면 해요. 제가 이미 환갑을 넘었습니다. 무림에서의 활동은 미비하지만 그래도 꽤 오랜 시간 날 선 칼과 피가 튀는 살벌한 위기를 이겨 내고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것이니까요.”
“…….”
“힘, 그러니까 비무를 통해 동맹을 어떻게 맺을지 결정하자는 것입니다. 물론, 말씀드린 대로 선배인 저와 후배인 마 도사님께 동등한 조건에서 비무를 하자면 정말 양심이 없는 여자겠죠.”
응, 아줌마 당신 양심 없는 여자 맞아.
“그래서요?”
“저는 혼자 나설 테니, 마 도사님은 친구분들과 함께 저를 상대하세요. 이 정도면 되겠죠?”
웃는다. 자신감에 찬 웃음이다.
나, 예지, 왕대. 초절정 극상의 고수가 세 명이다.
그리고 의제와 한해북 둘 다 이미 완연한 절정의 경지에 올라 있다.
얼핏, 우리가 유리해 보일 수 있다.
틀렸다. 절대 아니다.
화경의 고수라는 의미는 이미 내가 지겹도록 계속해서 설명해 왔다.
이건 완전히 우리가 불리한 싸움이다.
주소수를 절대로 이길 수 없다.
그냥 선심 쓰는 척, 나와 내가 지금까지 모은 힘을 모두 날로 먹겠다는 선언이나 다를 바 없다.
하지만 방법이 없다.
화양문의 힘을 얻어야 한다.
이건 비단 무림맹주와 천수신권과의 싸움을 위함이 아니다.
아니, 이미 내가 가진 전력으로 무림맹주와 천수신권은 압살할 수 있다.
대신, 엄청난 피해가 있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그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내가 이렇게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천하를 뛰어다니고 있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화양문은 엄청난, 다시 또 엄청난 힘이 될 테다.
또 있다.
아니, 사실 이게 더 중요한 문제다.
계효보 닭대가리 새끼.
지금 잠잠하지만 만약 백미호가 실패한다면.
놈은 제이의 계두교의 난을 일으킬 것이다.
과거 계두교의 난은 그냥 하나의 실험에 불과하다.
만약 계두교의 난이 다시 일어난다면, 그건 계효보가 확신에 차 일으키는 진짜 전쟁이 될 것이다.
얼마나 많은 힘을 가지고, 또 얼마나 많은 세력과 함께 나를 죽이고 천하를 집어삼키려 할지 모른다.
그래서, 내가 끌어모을 수 있는 힘은 모두 끌어모아야 한다.
그런데 이 아줌마가 지금 그러한 내 길에 똥을 뿌리고 있는 중이다.
돌겠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다.
“승패는 어떻게 결정합니까?”
내가 물었다.
그러자 주소수가 더 짙어진 미소로 답했다.
“저는 백 초식까지만 쓸게요. 그때까지 마 도사께서 살아 계시면, 마 도사님이 이기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백 초식만 막으면 된다고요?”
“네. 맞아요. 아! 그전에 마 도사님과 친구분들이 저를 죽이거나 제압하여도 당연히 마 도사님이 이기는 것이고요. 어때요? 이만하면 할 만하지 않아요?”
천사의 얼굴로, 천사의 미소를 지으며, 끔찍한 말을 하고 있다.
처음엔 뭔 소린가 싶었는데, 다시 들으니 지금 내 목을 걸라는 말이다.
나도 당황했고, 우리 애들도 당황하였다.
그리고 당황하긴 극양신장 역시 마찬가지였나 보다.
조용히 긴장한 얼굴로 우리 대화를 듣고만 있던 그가 급히 끼어들었다.
“부인, 그건 이미 저하고 말이 다 끝난 이야기 아닙…… 헙!”
극양신장은 자신의 말을 끝마칠 수 없었다.
주소수의 시선이 닿는 순간, 그는 입을 굳게 닫아 버렸다.
다시 주소수가 나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내 대답을 재촉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때, 또 다른 이가 끼어들었다.
우리 예지다.
“주 여협, 승패를 결정짓는데 굳이 목숨까지 걸 필요가 있겠습니까? 충분히 다른 방법으로 승패를 결정지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누가 생각해도 합당한 말이었고, 합리적인 의견이었다.
하지만 주소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다.
“금 소저.”
“네, 주 여협.”
“천수신권과 싸우는 일입니다.”
“네?”
“무림맹주와 싸우는 일이고요.”
“…….”
“소림사, 남궁세가, 무림맹, 거기에 화산과 종남 그리고 천하오대세가까지 가세한다고 하지 않았나요? 우리가 이길 가능성이 얼마나 된다고 보세요? 아니, 우리가 만약 그 싸움에서 이긴다고 하더라도.”
아무도 그녀의 말을 막지 못했다.
그녀가 잠시 우리 한 명 한 명과 눈을 마주친 후 다시 말을 이었다.
이미 주소수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만약 그 싸움에서 이긴다고 하더라도, 분명 엄청난 사람들이 죽어 나갈 거예요. 수천 명이 아니라, 수만 명이 죽을 수도 있어요. 여러분도, 나도. 내 부군도. 또 내 생명보다 귀한 아들들도. 그리고 우리 구음신녀문의 문도들도 분명 누군가는 죽을 것이고, 화양문의 위대한 고수들 역시 수없이 그 고귀한 생명을 잃게 될 것입니다.”
그녀의 목소리가 어느새 격앙되어 있었다.
“수천수만의 목숨이 걸린 싸움입니다. 우리 화양문은 문의 명운을 걸어야 하는 싸움입니다. 그런데 그런 싸움을 준비하며, 마 도사님은 목숨을 걸지 않겠다는 말인가요?”
대꾸할 수 없었다.
주소수의 말이 모두 맞는 말은 아니지만, 또 확실히 반박하기 힘든 말이기도 했다.
화양문 입장에서는, 나와의 동맹이 그들의 명운을 결정짓는 일임에는 부인할 수가 없다.
“여러분에게는 세 가지 선택권이 있습니다. 첫째, 동등한 동맹이 아닌 우리 화양문 밑으로 들어오는 동맹. 둘째, 비무를 이겨 동등한 입장에서 맺는 동맹. 마지막으로 셋째. 동맹을 맺지 않고 이곳을 떠나는 것입니다.”
그게 끝이었다.
주소수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가 준 세 개의 선택권, 그것은 내가 결정해야 한다.
“휴우, 주 여협.”
“좀 더 생각한 후 답을 주어도 괜찮습니다, 마 도사님.”
“아닙니다. 결정했습니다.”
“…….”
“주 여협의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다. 비무, 하시죠.”
비무는 곧바로 시작되었고.
그녀는 진짜로 날 죽였다.
그것이 나의 스물여섯 번째 죽음이었다.
아! 너무 허무하게 죽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