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화
뚜벅 뚜벅.
주소수가 온몸을 부르르 떨며, 또 눈에서 화염을 쏟아 내며,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나에게 다가온다.
무섭다.
그녀의 오른손에는 이미 기운이 몰려 빛이 뿌려지고 있다.
무섭다.
“누구냐? 누가…… 본 녀를 이어 본 문의 신녀가 될 아이냐? 답하라.”
“그, 그게…….”
아! 개 무섭다.
뭐야? 도대체 뭐냐고?
“답을 하지 않으면…… 죽는다. 지금.”
젠장! 분명 맹인이 있어야 하는데.
왜 없지?
“답이 없구나. 너는…… 네가 놀린 혀의 대가로, 죽어야 한다.”
그녀의 손에서 결국 무지막지한 강기의 사편이 뿜어져 나오려 했다.
“잠깐!”
움찔하는 주소수. 하지만 조금도 짙은 살기가 사그라들지는 않았다.
내 말 한마디로, 내 존망을 결정하려는 잠시의 멈춤일 뿐이다.
다급하지만 냉철해야 했다.
광마일기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신녀는 있고, 분명 맹인이다.
감히 범인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신비한 능력을 갖고 있기까지 하다.
그런데 지금 이곳에 없다는 건.
내 잘못이 아니다.
“다 모였습니까?”
“뭣이?”
“제가 분명 말씀드렸습니다. 신녀문의 문도는 한 명도 빠지지 않고 모두 모이라고요.”
“나도 분명하게 말했다. 본 문의 문도는 모두 모였다고. 어설픈 변명 따위로는 네 목숨을 부지할 수 없다.”
아이 씨, 도대체 뭐지?
분명 있어야 하는데.
그런데 그때였다.
나와 주소수 사이의 살얼음판 같은 대치를 지켜보던 신녀문의 문도 중 중년의 한 여인이 조심스레 한 걸음 앞으로 나와 주소수를 향해 말했다.
“문주님, 혹 마악치 도사가 말하는 게 노도(勞徒)를 말하는 것은 아닐까요?”
움찔했다.
중년 문도의 저 말에, 주소수가 극명하게 움찔한 것이 내 눈에 잡혔다.
뭔가 있군.
그렇지, 없을 리가 없지.
“노도요? 노도가 뭐죠?”
내가 다급히 끼어들어 물었다.
주소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역시, 무언가 놓친 것은 내가 아닌 그녀였다.
민망했는지, 주소수는 입을 꼭 닫았고, 대신 중년의 문도가 답을 해 주었다.
“노도는 태어날 때 몸이 불편하거나 예기(豫期)가 좋지 않은 아이들을 정식 문도로 인정하는 대신, 본 문을 위해 일을 하게 하는 문도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말씀하신 것은…….”
난 시선을 중년의 문도에게서 떼어 주소수를 향하며 말을 이었다.
한마디 한마디, 강하게 질책하는 어조로 말했다.
“신녀문의 문도가 다 모인 게 아니라는 뜻이군요? 주, 소, 수, 여, 협?”
“어험, 어험. 정식 문도는 다 모였다. 장애가 있거나 불길한 기운을 가지고 태어난 아이들 사이에서 어찌 신녀가 나올 수 있다는 말이냐?”
몸이 불편한 아이라.
그렇다.
맹인.
내 얼굴에 미소가 절로 번졌다.
주소수를 빤히 쳐다보며, 노골적으로 질책과 비난하는 눈길로 말이다.
그럴수록 주소수는 연신 헛기침을 하며 내 눈을 피했다.
그래도 부끄러운 게 뭔지는 아는 사람인 것 같다.
“지금 당장. 신녀문의 노도를 전부 불러 주세요.”
내 말에도 주소수는 민망했는지 쉬이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그러자 좀 전의 중년 문도가 주소수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노도들을 부를까요?”
“어험, 어험. 뭐, 정 그렇다면 불러야지.”
“네, 즉시 소집하도록 하겠습니다.”
*
노도들은 먼 곳에 있지 않았다.
신녀문의 문도들이 대부분 이곳 주소수의 장원에서 지내듯, 그녀들 또한 이곳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문주의 소환 명령에 일을 하던 노도들이 서둘러 연무실 안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스무여 명의 그녀들 중, 역시나 있었다.
나도 모르게 입가에 짙은 미소가 지어지는 순간이었다.
“자, 다 모였다. 이번엔 진짜다. 이제 찾아라. 신녀를 찾지 못하면, 살아서 이곳을 나갈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뭐 하냐?”
뻔뻔하긴.
들을 가치도 없었다.
난 이미 신녀를 찾았고, 주소수가 나에게 으름장을 놓는 사이 이미 신녀의 앞에 다가섰다.
앞이 보이지 않지만, 내가 한 걸음 앞까지 다가서자 기운을 느낀 모양이다.
열댓 살 정도의 어린 소녀였다.
내가 바로 그녀의 앞에 서자, 흠칫하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서는 모양이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나이가 지긋한 노도가 그런 그녀의 어깨를 감싸며 위로해 주었다.
내 얼굴의 미소는 상관없이 계속 짙어져만 갔다.
이걸 그냥 이렇게 넘길 수는 없지 않겠나.
고개를 돌려 숨까지 죽이며 상황을 지켜보는 주소수를 쳐다보았다.
내 시선이 닿자 흠칫 놀라며, 또 민망함에 얼굴까지 붉히는 그녀였다.
그럼에도 반신반의하는 얼굴이며, 또 기대감을 숨기지 못했다.
난 그런 주소수에게 씨익 비웃음을 날려 준 후, 다시 신녀를 향했다.
“현화문의 마악치 도사입니다.”
어린 신녀는 많이 두려운 모습이었다.
쉬이 대답도 하지 못하고 움츠러드는 모습이었다.
난 현화승천신공을 부드럽게 끌어올려 그녀의 주변을 감쌌다.
잔뜩 긴장해 딱딱히 굳었던 신녀의 몸이 조금은 풀리는 모습이었다.
“부탁이 한 가지 있습니다.”
“네. 말씀……하세요, 도사님.”
대답도 잘한다.
좋다. 더없이 좋다.
아주 좋아!
“눈을…… 떠 주세요.”
“네? 하지만 저는…… 눈을 뜰 수 없어요. 보시다시피 앞을 볼 수 없습니다.”
“압니다. 앞을 볼 수 없다는 것. 하지만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다는 것까지 알고 있습니다.”
미세하게 계속 몸을 떨던 신녀의 떨림이 순간 멈추었다.
주소수와 신녀문의 문도들이 모두 숨까지 죽여 가며 나와 신녀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다.
한 명 한 명 엄청난 고수인 그녀들이, 신녀의 변화를 감지하지 못했을 리 없다.
난 더욱 자신감이 들었고.
“도사님께서 그걸 어찌…… 아셨나요?”
“현화문의 도사입니다. 신통력이 있지요. 남들은 이런 이야기를 믿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에겐 진짜 신통력이 있습니다. 당신에게 남들이 믿지 못할 신비한 능력이 있는 것까지 알 수 있습니다.”
“아…….”
처음에 내가 다가섰을 때는 잔뜩 긴장했던 신녀였다.
하지만 현화승천신공의 기운과 신비한 능력이라는 공감대 때문인지, 그녀에게서 더 이상 긴장감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아니, 미세하지만 그녀의 얼굴에게서 행복한 미소가 그려지고 있었다.
“현화문의 마악치 도사님이라고…… 소문은 많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소문으로 들었던 것보다 더 현묘하고 대단한 분이시네요.”
“제 말이 맞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녀가 대답 대신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이를 보고 있던 주소수와 신녀문의 문도들이 경악에 가까운 놀라움을 표하는 순간이었다.
물론, 이 상황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그 어떤 소음과 동작도 취하지 않았다.
그저 눈빛으로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는 그녀들이었다.
이제 화룡정점을 찍을 때다.
“부탁입니다. 눈을 떠 주세요.”
“도사님, 하지만 저는 태어나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눈을 떠 본 적이 없습니다.”
“떠 보려 한 적은 있나요?”
그녀가 고개를 살며시 가로 젓는다.
“그럼 지금이 첫 시도겠군요. 해 보십시오. 제 신통력을 믿는다면, 또 구음신녀문을 사랑한다면, 용기를 내어 주세요.”
“제가…… 제가…….”
“눈! 뜨세요!”
그녀의 어깨를 내 양손으로 강하게 잡았다.
동시에 상당한 양의 현화승천신공을 그녀에게 주입하였다.
그러자 이질적이지만 자연스러운 그 기운에, 신녀가 화들짝 놀랐다.
놀라기만 한 것이 아니라, 눈을 크게 떠 버렸다.
번쩍!
광마일기에 기록된 그대로다.
그녀가 눈을 뜨자마자, 푸른 빛이 커다란 연공실 내부를 모두 덮어 버릴 듯 그렇게 퍼져 나갔다.
지금까지 숨죽여 상황을 지켜보던 주소수와 신녀문의 문도들도 어찌나 놀랐던지, 결국 헛바람까지 일으키고 말았다.
“축하합니다. 오늘부로 당신이 구음신녀문의 새로운 신녀입니다.”
난 신녀에게 축하의 인사를 건넨 후, 몸을 돌려 주소수를 보았다.
감격과 놀람이 교차하고 있었다.
아니, 그녀는 주체할 수 없는 감정에 결국 뜨거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구음신녀문은 사십이 년 만에 다시금 신녀를 되찾게 되었다.
*
태양전(太陽殿).
극양신장의 부름으로 우리는 태양전으로 향했다.
그 많던 고수들은 물론, 오중체의 두 형들까지 배제한 자리였다.
대신 극양신장 옆에 딱 한 사람이 자리하고 있었다.
주소수다.
나, 의제, 한해북, 예지, 왕대가 그런 두 사람 앞에 섰다.
구음신녀문의 존망까지 결정하게 될 수 있었던 문제를 내가 해결했으니, 나와 우리 녀석들은 극양신장 앞에서도 의기양양할 수밖에 없었다.
분위기는 매우 좋았다.
극양신장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뻔하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상황은 모두 보고 받았네. 우리 화양문의 원로들과 장로들 그리고 내 두 아들, 아니 중체까지 세 아들을 모두 불렀고. 주요 무력대의 대주들과 핵심 인사를 긴급 소집하여 극비리에 토론을 하였네.”
내가 당당하게 물었다.
“어떤 결정을 내리셨습니까?”
“하하하! 자네.”
“네, 오 대협.”
“대단하군. 대단해. 내가 자네 나이였을 때도 대단했지만, 자네는 그 시절의 나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큰일을 벌이고 있군. 내 요 며칠 마 도사 자네에 대한 보고를 받으며 몇 번이나 놀랐는지 모른다네.”
“하하, 황룡회의 유령신검 월제 대협도 비슷한 말을 하였습니다.”
“그런가? 허허. 그럴 수밖에 없겠지, 하하하.”
크게 웃고 있지만, 경박하지 않다.
극양신장에게서는 여전히 엄청난 위엄이 자연스레 흘러나오고 있다.
마치 숨을 쉬듯 그에게 있어서 절대자의 위엄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더군다나 오늘은 이전과 다르게 더없이 호협하고 호탕한 기운까지 느껴지고 있었다.
물론, 이 모든 일의 결정이 어떻게 내려졌는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겠다.
주소수가 그의 옆에서 여전히 가짜 미소를 짓고 있으니 말이다.
“화양문이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 듣고 싶습니다.”
내가 다시금 당당히 물었다.
그러자 극양신장도 큰 웃음을 멈추고, 자세를 바로잡았다.
진지하면서도 근엄한 얼굴로 그가 입을 열었다.
“본 화양문은 현화문의 마악치 도사에게 정식으로 동맹을 제안하겠네.”
나도 또 우리 녀석들도, 순간 미소를 지었다.
난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 큰 목소리로 극양신장의 제안에 답했다.
“현화문의 도사 마악치. 화양문의 문주이신 극양신장 오대극 대협의 제안을 수용하겠습니다.”
“하하하하! 하하하하하!”
극양신장이 크게 기뻐하며 대소를 터뜨리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그때.
“으흠, 으흠.”
극양신장의 바로 옆에 있던 주소수가 무언가를 일깨워 주기라도 하듯, 헛기침을 연달아 했다.
그러자 대소를 터뜨리던 극양신장이 거짓말처럼 웃음기를 싹 지웠다.
뭐지?
표정이 바뀌었다.
“그런데 말일세, 마 도사.”
정말 뭐야?
사람들이 뭔가 미안한 부탁을 할 때나 짓는 그런 표정이다.
이거 갑자기 불안해지는데?
뭔 소리를 하려고 저러는 거지?
“네? 왜요?”
“그게 말일세. 그러니까…… 어험. 어험. 그게…… 어험.”
아!
진짜 뭐야?
조금 전까지 절대자의 위엄이 철철 흘러넘치던 양반이, 갑자기 좀생이처럼 헛기침을 하질 않나.
더 불안한 건, 극양신장이 자꾸 자기 옆에 있는 주소수의 눈치를 본다는 것이었다.
설마, 주소수가 또 무언가 간사한 계략을 꾸민 건가?
아니지. 그럴 수 없지.
구음신녀문의 염원이었던 신녀까지 찾아주었는데, 그럴 수는 없지. 양심이란 게 있다면 말이야.
‘구음신녀문의 혀는 간사하고, 칼에는 자비가 없습니다.’
아! 하필 이때 공손병의 경고가 떠오르는 건 뭘까?
불안하다.
동맹도 정식으로 맺었는데, 계속 불안하다.
“여보?”
결국 주소수가 여전히 가짜 미소를 지은 채, 극양신장을 재촉했다.
절대자의 위엄이 철철 넘쳐흘렀던 극양신장은, 이내 뭐가 그리도 불안한지 식은땀까지 흘리기 시작했다.
내 눈치를 보고, 또 옆에 있는 주소수의 눈치를 사정없이 살피고.
도대체 뭐냐고.
나와 우리 녀석들도 숨죽여 상황을 파악하려 했지만, 쉬이 그 의도를 알 수 없었다.
“어험, 어험. 동맹에 대한 공식 제안과 결의는 내가 했으니, 어험. 어험. 그 구체적이고 세세한 사안들은 부인께서 좀 전달해 주시겠소?”
결국, 해야 할 말을 못 하고 그걸 주소수에게 떠넘기는 극양신장이었다.
아! 저 인간.
광마일기부터 고쳐 써야겠다.
절대자의 위엄이 아니라, 공처가(恐妻家)의 전형이었다.
내가 사람을 잘못 봐도 한참 잘못 봤다.
절대자의 위엄은 개뿔!
그나저나 내 알지 못할 불안감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극양신장의 말에 따라 한 걸음 앞으로 나와 나를 마주하고 있는 주소수의 가짜 미소가 짙어질수록, 내 불안감은 극도로 커지는 중이었다.
결국, 거짓 상냥함과 가짜 미소를 짓고 있던 주소수의 입이 열렸다.
난 그녀의 입에서 무슨 폭탄 발언이 나올지 몰라 신경을 곤두세워 집중하였다.
곧, 그녀의 사악한 계략이 드러났다.
“동맹은 동맹이지만, 규모나 세력 등을 고려해 동등한 입장에서의 동맹은 맺기 어렵습니다, 마 도사님.”
젠장! 빌어먹을! 이 사악한 아줌마 같으니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