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화
그녀의 경지를 알 수 없었다.
이상하다.
저녁 식사를 하는 내내 은밀히 계속 살폈음에도, 조금도 그녀의 무공을 가늠할 수 없었다.
그녀가 익힌 무공의 특수성 때문인가?
그녀의 독문무공은 구음사편신녀공(九陰蛇鞭神女功)이라고 했다.
사편(蛇鞭), 즉 긴 채찍 형태의 무기로, 끝에 뱀 머리의 형상을 한 짧은 검이 달렸다고 한다.
편(鞭, 채찍) 형태의 무기는 휴대가 편하다.
보통 허리에 감고 다니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그녀의 허리에는 그 어떤 채찍 비스무리한 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 그러고 보니 하오문 귀주 분타주가 했던 이야기.
홍화루 당시 극양신장이 채찍질을 당해 상처를 입고 찾아왔다는 거. 그게 그거였나?
그런데 진짜 채찍 같은 건 보이지 않는다.
구음사편신녀공은 당연히 구음신녀문의 구음신녀공(九陰神女功)을 토대로 만들어진 무공이다.
오중체의 말에 따르면 구음신녀공은 극음 계열의 무공이라 하였고.
그 특수성 때문인가?
확실히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원곡의 자백, 그리고 오중체의 실토에 따르면 주소수는 분명 무지막지한 고수여야 하는데.
아무리 젊었어도, 사십여 년 전에 천수신권과 무림맹주를 개 패듯 두드려 팼던 고수 아니겠는가.
하지만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그녀는 전혀 그런 느낌이 아니다.
말 그대로, 그냥 인자하고 상냥하고 아름다운 천사 아줌마다.
그녀의 경지가 내가 상상하는 범위를 훨씬 넘어서 감지할 수 없는 건가?
아닌데. 그럴 수는 없는데.
도대체 모르겠다.
지금도 나를 보며 웃고 있는 그녀가 그저 친근하고 따스하게만 느껴진다.
“마 도사님?”
“앗! 죄송합니다. 잠시 딴생각을.”
“괜찮아요, 호호. 생각이 많을 나이죠.”
“아, 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죠? 따로 자리까지 필요하다 하시고. 우리 셋째 녀석이 마 도사님께 큰 실례라도 저질렀나요? 제가 엄하게 가르치려고 노력은 했지만, 마음이 약해서 모질지 못했나 보네요.”
하아! 오중체가 들으면 땅을 치며 억울하다고 하겠네.
“아닙니다. 중체는 매우 훌륭한 친구입니다. 훗날 분명 무림의 큰 기둥으로 성장할 것입니다.”
“호호호, 말씀만이라도 감사해요, 마 도사님.”
“가모님.”
“네, 마 도사님.”
“중차대한 이야기를 상의하고자 이렇게 자리를 부탁드렸습니다.”
“중차대한 문제라면……?”
“무림의 상황이 심상치 않습니다.”
그녀는 대답 대신 고개만 갸우뚱했다.
“무림맹주와 천수신권 원욱 대사가 무언가를 꾸미고 있는 듯합니다.”
역시 대답이 없다.
자신이 개 패듯 두들겨 팼던 두 사람이 무림의 정상이 되었고, 다시 그 두 사람이 무언가를 꾸미고 있다면 응당 반응이 있어야 했다.
당연하지 않겠나.
두 사람이 자신에게 복수할 것이 뻔한데.
하지만 주소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만 해댔다.
그러더니.
“마 도사님, 그런 문제라면 제가 아니라 문주인 제 부군과 상의를 하셔야 할 것 같은데요.”
“다 알고 왔습니다.”
“네? 무엇을요?”
뻔뻔한 건지, 아니면 진짜 모르는 건지.
기억을 잃었나?
아니다.
주소수는 지금 연기하는 것이다.
숨겨 둔 패를 던질 때가 됐다.
“신녀문.”
“네?”
“구음신녀문의 문주님께 도움을 요청하고 싶어 화양문을 찾아왔습니다.”
“…….”
반응이 왔다.
무언가 움찔했다.
또 마구 끓어오르는 무언가를 역시나 속으로 꾹 누르는 것이 역력해 보였다.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인지……?”
“여기저기 알아보고 왔습니다. 믿을 만한 정보통을 통해 얻은 정보입니다, 구음신녀문의 문주 주소수 여협.”
빠득.
소리는 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이마에 큰 혈관 하나가 툭 불거지는 게 보였다.
그리고는 곧.
“오중체 이 망할 놈의 새끼. 이젠 하다 하다 어미를 팔아먹다니.”
그녀가 변신하였다.
이건 진짜 변신이다.
외모는 그대로인데, 분위가 완전 바뀌었다.
조금 전 그 선녀는 온데간데없고, 악귀가 금방이라도 나를 잡아먹을 듯 노려본다.
아! 이거였군.
그냥 노려보기만 하는데, 오금이 저린다.
오중체가 왜 그렇게 엄마 얘기에 덜덜 떨었는지 알겠다.
눈빛이, 진짜 살벌하다.
“마악치라고 했나?”
반말을 하는데, 너무 자연스럽다.
일천 년 동안 반말만 하며 살았던 뱀 요괴를 마주하는 듯하다.
“네, 넵.”
아! 긴장하면 안 되는데.
나도 모르게 긴장해 대답했다.
“어디까지 알고 왔지?”
정신 차리자.
지금이 이 담판을 결정지을 주요한 시점이다.
뱀의 이빨에 물리면 끝이다.
“주 여협께서 구음신녀문의 문주이자, 실질적인 화양문의 주인이라는 것까지 알고 왔습니다. 화양문과 동맹을 맺고 싶습니다. 이미 무당, 아미, 유령신검의 황룡회 등 여러 곳과 동맹을 맺었습니다.”
“흥! 네 이야기는 나도 귀가 따갑게 들었다. 대단한 녀석이라 생각했지. 그런데 무당과 아미 그리고 황룡회와 손까지 잡은 줄은 몰랐군. 하지만 그게 우리와 무슨 상관이지?”
“무림맹주와 천수신권이 무림을 정복할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놈들이 무림을 정복하건 우주를 정복하건 우리와는 상관없다.”
“그들이 왜 그러한 음모를 꾸미고 그러한 야심을 품게 된 줄 아십니까?”
“내 알 바가 아니다.”
“사십여 년 전, 귀주의 작은 산장에서 있었던 사건이 모든 일의 출발점이었습니다.”
주소수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처음으로 크게 놀란 얼굴을 하는 그녀였다.
하지만 놀람은 잠시.
순식간에 분노와 짜증이 그녀의 온몸을 지배했다.
얼마나 화가 났는지, 온몸을 부르르 떨기까지 하는 주소수였다.
“찢어 죽일 새끼들. 그때 진즉 죽였어야 했는데. 사십 년도 더 지난 일을 아직까지 마음에 품고 있다니. 내 이것들을…….”
“함께하시죠, 주 여협. 그들의 힘이 더 커지면 커질수록, 화양문의 위협 또한 커지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사실입니다.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녀는 대꾸하지 않았다.
아니, 이젠 대놓고 나를 무시했다.
시선까지 피하고는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 버린 것이다.
분노와 냉정함이 그녀의 머리와 가슴을 온통 뒤집어 놓고 있는 것 같았다.
난 잠시 그녀가 생각을 정리할 수 있게 기다려 주었다.
미친 게 아니고서야 선택의 여지는 하나밖에 없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녀의 고심은 계속 이어졌다.
불안한 마음에.
“주 여협.”
그녀를 불렀다.
하지만.
“쉿! 마 도사는 그만 물러가라.”
“네? 하지만 아직 중요한 이야기는 제대로 상의하지도 않았습니다.”
순간! 그녀가 먹잇감을 죽이기 전의 맹수처럼 살의가 가득한 눈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우리 일은 우리가 알아서 해결한다. 지금 내 머릿속에 네 목을 베어 그 수급을 무림맹으로 보낼까 하는 생각까지 있는 걸 간신히 참고 있다. 그러니…… 내 마음이 바뀌기 전에 어서 물러가라. 내일 해가 밝는 즉시, 본 문에서 가장 먼 곳으로 떠나라. 너희 중 그 누구라도 내 눈에 다시 띄면, 나도 어떻게 할지 모르니.”
아! 이 아줌마. 중체네 엄마.
무섭다.
오중체 녀석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그냥 재미난 이야기 정도로만 받아들이고 있었는데, 갑자기 중체 녀석이 눈물 나게 불쌍하다.
기세나 기운이 그러한 것이 아니라, 생각 자체가 너무 위험하다.
설마 진짜로 내 목을 베어 무림맹주에게 바칠 생각을 할 줄은 몰랐는데.
돌겠네.
하지만 이대로 물러날 수도 없다.
나에겐 아직 꺼내지 않은 패가 하나 있지 않은가.
결정적인 패.
“주 여협,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하게 해 주십…….”
쾅!
갑자기 그녀가 기운을 폭발시켰다.
동시에 그녀를 중심으로 엄청난 기의 폭발이 일어났다.
어마어마하다.
구음신녀공이란 게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초절정 극상의 경지를 되찾으며, 이제는 오 갑자를 넘어 육 갑자에 육박하는 내 내공으로 그녀의 기세를 감당하는 게 쉽지 않았다.
내가 품은 내공이 현화승천신공으로 생성된 내공이 아니었다면, 정신적으로 굴복했을지 모를 무지막지한 그녀의 기운이고 기세였다.
실로 구음신녀공이 얼마나 무서운 무공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난 두 발을 당당히 땅에 딛고 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역시나 현화승천신공 덕분이다.
그런 내 모습에 주소수도 순간 조금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설마 내가 자신의 기운을 이렇게 당당하게 맞설 줄은 몰랐나 보다.
하지만 이는 찰나에 불과했다.
그녀의 얼굴이 더더욱 짙은 사악함으로 물들어 갔다.
곧이어, 아까 내가 그토록 찾았던 채찍, 그 사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의 손을 타고 뻗어 나가는 강기.
형성강기(形成剛氣)다.
강기가 채찍의 형태로 빛을 뿌리며 뻗어 나가더니, 종국에는 뱀의 머리를 달아 살아 움직이는 하나의 긴 채찍이 되었다.
젠장! 아니길 바랐는데.
설마 설마 했는데.
그녀, 주소수. 화경의 고수다.
내가 그녀의 무공을 감지하지 못했던 건, 아마도 내가 알지 못하는 구음시녀공의 특수성도 있었겠지만, 그녀가 작정하고 우리에게 자신의 무공을 숨기려 했기 때문이리라.
화경의 고수, 그것도 완연한 경지에 접어든 화경의 고수였기에 나의 기감을 피할 수 있었으리라.
젠장! 또 화경의 고수라니.
도대체 이놈의 시대에는 숨겨진 화경의 고수가 얼마나 있는 거야?
아! 어쩌면 다른 시대에도 이랬는지 모르겠다. 그저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지.
아무튼 혼란스럽고 긴장되었다.
이상하게 두렵지는 않았다. 이게 지금은 나에게 위협이 되지만, 만약 동맹을 맺게 된다면 더없이 큰 힘이 될 테니 말이다.
그러기 위해선 일단 이 위급한 상황에서 벗어나야 한다. 까닥하면 죽을 수 있다.
“신녀! 신녀를 찾게 도와드리겠습니다.”
다급히 외쳤다.
그러자 그녀가 크게 움찔했다.
얼마나 놀랐는지,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커졌다.
하지만 그녀의 손에서 뻗어 나온 강기의 사편은 여전히 단숨에 나를 집어삼킬 듯 꿈틀거림을 멈추지 않았다.
“네, 네가 어찌 그것을……?”
“중체에게 들었습니다.”
중체야 미안하다.
내 목숨이 경각에 달해 잠시 너를 좀 팔았다.
설마 엄마가 널 죽이진 않을 거 아니겠느냐?
우선 나부터 살고 좀 보자.
“오중체, 이 녀석!”
“여협! 지금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녀의 눈이 다시금 사악하게 변했다.
나를 죽일 듯 노려보는 그녀다.
“신녀, 찾아드리겠습니다.”
차가운 목소리가 그녀에게서 흘러나왔다.
“네가 작은 명성을 얻었다고 세상에 거칠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구나.”
“제 목을 걸겠습니다.”
“난 진짜로 네 목을 벨 것이다.”
“네.”
“…….”
주소수의 눈이 다시금 미미하지만 떨리는 게 보였다.
확실히 신녀를 찾는 일이 그녀에게 엄청나게 중요한 일이 맞나 보다.
“어떻게 찾지? 내가 사십 년 넘게 찾았고 또 우리 문도가 노력했지만, 찾을 수 없었다. 그런 신녀를 네가 어떻게 찾는다는 말이냐?”
“믿기 힘드시겠지만, 본 문의 도사들에게는 신통력이란 게 있습니다.”
“거짓말!”
“구음신녀문의 신녀가 신비로운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믿으시면서, 우리 현화문의 신통력은 믿지 않으시는군요.”
“그건! 내가 신녀였고, 그 신비로운 능력을 직접 경험했기 때문이다.”
“저도! 제가 현화문의 도사고, 지금도 그 신통력을 경험하는 중입니다.”
그녀의 말문이 막혔다.
나를 보는 눈동자가 또 떨려온다.
나에게 기대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기대가 또 실패로 다가올까 봐 두려운 것이다.
“말씀드렸습니다. 제 목을 걸겠다고.”
“정녕…… 정녕 찾을 수 있다는 말이냐?”
난 대답 대신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정말 간절했던 모양이다.
그녀의 손에서 길게 뻗어 나왔던 강기의 사편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표독스럽게 나를 노려보던 그녀의 눈에는 눈물까지 글썽이고 있다.
진심으로, 정말 너무나도 간절하게 신녀를 찾고 싶었나 보다.
“조건이 있습니다.”
“말……해라.”
“첫째, 화양문과 동맹을 맺고 싶습니다.”
“신녀를 찾아만 준다면, 적들과의 싸움에 우리 화양문이 선두에 서겠다.”
“둘째는…… 어험.”
“……?”
“이번 일로 중체를 때리지 말아 주십시오.”
움찔.
“알, 알았다. 그 또한 약속하마. 다음 조건은?”
“없습니다. 그 두 가지만 지켜 주신다면, 곧바로 신녀를 찾아 드리겠습니다.”
“내가 무얼 하면 되지?”
“먼저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구음신녀문의 신녀가 오직 신녀문에서만 태어난다는 게 사실입니까?”
“그렇다. 그건 확실하다. 사백 년이 넘는 본 문의 역사에 예외는 단 한 번도 없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당장, 신녀문의 문도들을 모두 소환해 주십시오. 특히 어린 문도들까지 한 명도 빠짐없이 모여야 합니다.”
“바로 준비하겠다.”
*
화양문의 내전, 그중에서도 가장 깊은 심처.
화양문의 가모 주소수가 기거하는 전각이다.
아니, 그냥 장원이다.
그리고 나는 그 장원의 여러 전각 중 가모의 전용 연공실로 향했다.
이게 말이 연공실이지, 웬만한 중소방파의 연무장보다 더 큰 규모였다.
아마도 이곳에서 구음신녀문의 문도들이 모두 모여 비밀리에 무공을 수련하기 때문에 커다란 규모로 지은 듯했다.
아무튼 그곳에 구음신녀문의 문도들이 모두 모였다.
“자! 본 구음신녀문의 문도는 한 명도 빠지지 않았다. 이중 누가 신녀지?”
아직 문도라고 보기에는 너무 어린아이들까지 모였기에 육십 명이 조금 넘는다.
광천마제 시절, 내가 극양신장과 싸울 당시의 나이가 스물아홉 살.
그리고 그때 나타났던 신비로운 여인은 이십 대 초중반이라 광마일기에 기록되었다.
현재 내 나이 스물네 살.
오 년 뒤에 이십 대 초중반의 나이가 될 여인들 가운데 찾으면 된다.
아주 아주 정말 넉넉히 잡아서 댓 살에서 서른 살까지.
스무 명도 안 된다.
난 곧바로 그 나이대의 문도들을 살폈다.
자세히 살필 필요도 없다.
왜? 신녀는 맹인(盲人)이니까.
한 명 한 명, 그 눈을 중점적으로 그렇게 살폈…… 어?
없네?
이상하네.
“어…… 저기…… 주 여협.”
“무언가?”
“더 없어요?”
그녀의 인상이 와락 구겨졌다.
아니, 나를 보는 그녀의 눈에서 지옥의 화염이 뿜어져 나오고 있다.
난 빠르게 젊은 여인들을 재차 살폈다.
아! 그래도 없다.
어쩌면 내가 나이대를 잘못 본 걸 수도 있다.
다시, 이번에는 모든 문도를 한 명 한 명 살폈다.
태어난 지 몇 달 되지도 않은 갓난아이도 자세히 살피고.
주소수보다 십수 년은 더 나이가 많아 보이는 할머니 문도까지 살피고 또 살폈다.
정말 세심히 또 자세히 살폈지만, 육십여 명을 살핀 순간은 순식간이었다.
그런데, 젠장! 없다.
돌겠네.
이제는 분노가 머리끝까지 차오른 주소수가 살기를 마구 뿜어대며 온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한다.
그녀의 오른손에서 다시금 강기의 사편이 꿈틀거리려는 순간이었다.
아! 어째 크게 엿 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