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화
의제, 한해북, 우리 예지 그리고 왕대와 함께 귀주 극양신장의 화양문으로 가는 길.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이미 무림맹주의 감시에 대해 처호, 처선, 공손병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었다.
염우촌에서 살수들이 맹주의 눈과 귀를 모두 제거하는 일도 있었고, 팔적산에서 제대로 된 힘도 과시했다.
그랬기에 맹주가 쉬이 감시의 눈을 붙이지 못할 것이라는 게 공통된 의견이었다.
그래도 혹시 몰라, 우리는 순번을 정해 돌아가며 불시에 주위를 살피고 또 살폈다.
역시 의심할 만한 자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한시름 놓았지만, 완전히 경계를 풀지 않고 변용까지 하여 귀주 화양문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호남을 지날 무렵, 점심 식사를 위해 어느 마을의 작은 객잔에 들렀다.
그리고 그곳 마을 주민으로 추정되는 이들의 이야기를 우연히 듣게 되었다.
“요즘 무림이 심상치 않아.”
“미친놈. 또 시작이네. 열 살 때부터 시작한 그놈의 무림이 심상치 않다는 이야기는 언제 끝나냐? 내일모레면 환갑인데.”
“아니야, 이번엔 진짜야. 무림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마치 태풍 전야와 같은 그런 고요함이야.”
“고요하긴 개뿔. 얘기 못 들었어? 저기, 그게 어디야. 맞다, 섬서 팔적산. 거기서 황룡회랑 아미파랑 한 판 크게 붙을뻔했다고 하잖아. 그리고 마두들은 여전히 중원 곳곳에서 난리를 치고 있고, 또 그놈들을 잡으려는 협객들도 계속 활약 중인데, 뭔 무림이 고요해? 하여간, 남의 땅에 농사나 지으며 간신히 입에 풀칠하는 놈이. 주둥이만 살아서. 쯧쯧.”
“어험, 어험. 내가 비록 남의 땅에 농사를 짓고는 있지만, 무림의 기운을 읽을 수 있는 신비한 능력이 있다고.”
“됐고. 술 그만 마시고, 얼른 일어나 가자고. 밭에 할 일이 태산같이 쌓였어.”
“야, 너 그 얘기 들었냐?”
“또 뭔 개소리를 하려고 그래? 너 지금 술 한 병 더 마시려고 수작 부리는 거지?”
“아니야. 구산사협 얘기야.”
“또 헛소리하면 죽는다.”
“아니야. 이번엔 진짜야. 구산에서 활약하는 네 명의 엄청난 협객들 이야기.”
“처음 듣는데? 구산이면 우리 마을에서도 사나흘밖에 걸리지 않는 가까운 곳이잖아.”
“내 말이.”
“그런데 구산에 협객이니 뭐니 하는 이야기는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데?”
“그래서 지금 내가 말하잖아.”
“휴우, 알았다.”
“술 한 병만 더 시킨다, 큭큭.”
“마지막이다. 그것만 마시고 일하러 가는 거다.”
“알았어. 알았다고. 여기! 화주 한 병 더.”
“예이.”
“술도 시켰다, 어서 얘기해 봐. 구산사협이 누군데?”
“놀라지 마. 글쎄. 그들이 말이야. 일백 년 전 천하제일인이셨던 현화검존의 후예들이래.”
“정말? 아닌데. 그럼 마악치 대협은? 마악치 대협이 현화문의 유일한 제자 아니야?”
“몰라. 그것까지는. 그런데 그들 스스로 현화문의 후예라고 그렇게 말하고 다닌다고 하던데?”
“사기꾼들 아니야?”
“아니. 사기꾼들이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자기 목숨 걸어 마두들과 싸우지는 않지.”
“오! 그래? 구산사협이 어떤 마두들을 잡았는데?”
“음…… 그게…… 그러니까. 많이 잡긴 잡았는데, 정확히 누굴 잡았는지는 내가 기억이…….”
“예끼! 이 사람아. 술 한 병 더 마시고 싶으면 그냥 말을 해. 없는 말 지어내지 말고.”
“아! 생각났다. 우리 옆 마을에 그 흑광랑 미치광이 새끼.”
“어, 그 새끼. 간통하다가 걸려서 그 집 식구들 다 죽이고 여자랑 도주했던 놈? 그놈을 잡았대?”
“응. 그 연놈들 모두 산 채로 잡아서 현청에 넘겼다고 하더군. 내일이나 모레 정도면 우리 마을로 압송한다고 하더라고.”
“오! 진짜였군?”
“그렇다니까.”
“또. 구산사협이 또 어떤 나쁜 놈들을 잡았는데?”
“그러니까 말이야…….”
구산사협?
이름이 어째…… 익숙하다.
구산에서 활약하는 네 명의 협객들이라.
설마 그들인가?
난 조금 더 농부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그리고, 그들이 추가로 주문한 화주 한 병을 모두 비우고 밭으로 돌아가려 할 때.
“실례합니다.”
“뉘십니까, 도사님은?”
“정처 없이 떠돌며 도를 수양 중인 이름 없는 도사입니다. 혹시 방금 하셨던 구산사협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들을 수 있을까요?”
난 농부들에게 구산사협에 대한 추가 정보를 아주 조금 더 얻을 수 있었다.
구산(九山) 인근 호옥현이라는 작은 도읍에 그들의 문파가 있다고 하였다.
화양문으로 가는 길에서 조금만 우회하면 들릴 수 있는 곳이었다.
난, 우리 녀석들을 이끌고 곧바로 호옥현으로 향했다.
*
현화무관(玄化武館).
‘일백 년 전 천하제일인이셨던 현화검존의 현화문. 그 제자들의 후손들이 무관을 열었다!’
‘천하제일신공 대개방!’
“형님, 저게 그 구산사협이라는 자들의 문파에요? 현판에는 문(門)이 아니라 무관이라고 써 있는데요? 그리고 저 벽에 걸린 홍보 문구는…… 휴우. 유치찬란하네요. 제대로 온 거 맞아요?”
“나도 잘 모르겠다. 내가 생각하는 그들이 맞는지. 일단 들어가 보자.”
“예.”
한숨이 절로 나오는 유치한 무관 홍보 문구를 뒤로하고, 우리는 현화무관이라는 작은 무관 안으로 들어갔다.
“와아아아!”
“얍! 얍! 내가 천하제일인이시다! 하하하.”
“난 천수신권.”
“난 창궁검제.”
“야! 우리 현화무관이야. 그런데 천수신권하고 창궁검제가 왜 나와?”
“그럼 넌 누구 할 건데?”
“나? 나는 천무휘. 난 수룡검 천무휘.”
“그럼 나는 여자니까 봉황검 금예지할래.”
“야! 넌 못생겼잖아.”
“너 우리 엄마한테 이를 거야! 으아아앙.”
작은 무관이지만, 관도들이 꽤 많다.
수련은 하지 않고, 장난감 같은 목검을 들며 뛰어노는 아이들이 천지다.
대충 봐도 오륙십 명이 훌쩍 넘는다.
무관 운영은 잘되나 보다.
“얘들아.”
“야, 손님이다. 엇, 안녕하세요.”
내 부름에 뛰어놀던 아이들 서넛이 다가왔다.
“여기 혹시 관주님이나 교두님들 계시니?”
“안 계신데요?”
“한 분도 안 계셔?”
“네.”
“어디 계시는데?”
“나쁜 놈들 잡으러 갔어요.”
“나쁜 놈?”
“네. 우리 사부님들 무공 엄청 고강하거든요. 그래서 인근에 나쁜 마두들이 나타나면, 우리 사부님들이 다 혼내 줘요.”
“오, 그렇구나. 그럼 사부님들이 마두들 잡으러 어디로 가셨는데?”
“그건 모르지요.”
“음, 그래. 그럼…… 혹시 사부님들 함자를 알 수 있겠니?”
“그건 왜요?”
“내가 아는 분들인가 해서.”
“아저씨는 누군데요?”
“마악치.”
“풉, 큭큭. 하하하! 야, 들었어? 이 아저씨가…… 큭큭. 자기가 마악치래.”
“야, 듣잖아.”
대꾸하던 아이가 나를 비웃자, 옆에 있던 아이가 옆구리까지 툭 치며 나무랐다.
그런 후 미안한 얼굴로 나를 향했다.
“죄송해요. 이 녀석이 원래 장난을 잘 쳐요.”
“음, 괜찮아. 나라도 웃겼을 테니까.”
그런데 조금 전 나를 비웃었던 녀석이 또 다 들리는 목소리로 옆에 친구에게 말했다.
“야, 마악치래. 큭큭큭. 마악치가 원래 저렇게 못생겼냐? 큭큭큭.”
“야, 그만해. 저 아저씨 화내면 어쩌려고 그래?”
“아나, 마악치. 개못생겼네. 큭큭큭.”
다시금 그 옆에 친구가 대신 사과를 했다.
“죄송해요.”
“아니야. 내가 못생겨서 미안해. 마악치 대협은 엄청 잘생겼다고 하던데.”
“맞아요. 엄청 멋지다고 들었어요. 물론 수룡검 천무휘 대협이 백 배 더 멋지지만요.”
“나는 봉황검 금예지 여협.”
“넌 뚱뚱하고 못생겨서 안 된다니까.”
“내가 금예지라고 했어? 금예지 여협이 좋다고 했지. 너 정말 우리 엄마한테 이른다!”
“알았어. 알았다고. 큭큭큭.”
아이들이 또 지들끼리 티격태격한다.
“얘들아.”
“아! 죄송해요. 네.”
“그래서 사부님들 함자가 어떻게 되시니?”
예의 바른 아이가 답했다.
“큰 사부님은 황 노 자를 쓰시고, 작은 사부님들은 여 발 자 무 자, 위 은 자 치 자, 한 인 자 심 자를 쓰십니다.”
그들이다.
황노, 여발무, 위은치, 한인심.
구산사괴(九山四傀)다.
*
구산사괴의 뒤를 밟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인근 개방 분타에 화주 다섯 병에 오리구이 두 마리 그리고 은자 한 냥을 주었더니, 정확한 위치를 알려 주었다.
직접 안내까지 해 주겠다는 걸 말리기까지 했다.
구산사괴가 이번에 쫓는 악인은 실제로 존재했다.
인근에서 꽤 유명한 고수로 평소에도 악행이 굉장히 심했는데, 보름 전 술에 취해 사람을 다섯 명이나 때려죽이고 도주 중이라 한다.
해당 마을의 관인들과 무인들이 잡으려다 놓쳤는데, 그 도주로를 예측한 결과 오늘쯤 해서 구산을 지날 것이라 개방 분타에서 그들에게 알려 주었다고 한다.
십중팔구 구산에 매복해 악인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우리는 빠르게 구산으로 향했다.
호남하면 동정호가 유명하지만, 구산은 동정호와 매우 멀리 떨어져 있는 곳으로, 인근에 호수는커녕 작은 개천도 흐르지 않는 곳이다.
아무튼 우리는 개방에서 상세히 알려준 대로 구산을 올랐다.
아주 은밀히, 구산사괴의 무공 경지가 어느 수준에 올라와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은형술까지 펼쳐 움직였다.
그리고 그들 구산사괴가 매복해 있는 뒤에 조용히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지켜보자. 그들이 내가 바랐던 대로 새 삶을 살고 있는지.
사부를 죽이고 훔쳐 간 사문의 비급, 현화승천신공(玄化昇天神功)을 바탕으로 네 명 모두 초절정의 경지에 오른 후 당당하게 무림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광마일기 中
나는 기운을 갈무리하고 조용히 몸을 숨긴 상태로 구산사괴를 살폈다.
한노 고수급.
여발무, 위은치, 한인심 모두 일류 무사급.
광마일기에 그들의 무공 경지가 기록된 것은 내 나이 열여덟 살 때이다.
그리고 지금 내 나이는 스물네 살.
육 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그들의 무공은 크게 발전한 것이 없었다.
여전히 당시와 같은 경지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현화승천신공을 훔쳐 가지 못해서일까?
아니다.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분위기가, 내가 생각했던 것과 많이 다르다.
광마일기에 묘사된 외양은 같은데, 분위기는 영 딴판이다.
같은 사람일까 의심이 들 정도로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분위기가 그러했다.
조금 더 지켜보자.
이번엔 청력을 조금 더 높여 그들을 살폈다.
“형님.”
여발무가 황노를 향해 말했다.
“왜? 또 뭔 소리를 하려고?”
“아! 불길해요.”
“뭐가?”
“불길하다니까요.”
“그러니까 뭐가 불길해?”
“이번에 그 옥미촌인가 뭔가에서 사람 죽이고 튀었다는 놈이요.”
“지금 우리가 기다리는 그놈.”
“네.”
“걔가 왜?”
“엄청난 고수래요. 몇 년 전엔 호랑이도 한 손으로 때려잡았다고 하던데요?”
“넌 그 말을 믿냐?”
여발무를 타박한 건 황노가 아닌 한인심이었다.
하지만 옆에 있던 위은치가 여발무를 두둔했다.
“호랑이를 잡은 게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몰라도, 옥미촌 인근에서 가장 강한 고수는 맞아. 개방 거지들한테 들었잖아. 관인들 스무 명하고 인근 고수 서른 명이 한꺼번에 달려들었는데도 못 잡았다고.”
이에 힘을 얻은 여발무가 진지한 얼굴로 황노를 향해 말했다.
“형님.”
“뭐? 어쩌라고?”
“이번엔 그냥…… 튀죠.”
“뭘 튀어?”
“아이 씨, 불길해요. 괜히 그 새끼 잡으려다가 우리가 당할 것 같단 말이에요.”
다시 위은치가 여발무를 거들고 나섰다.
“형님, 저도 발무 말에 동의합니다. 그 새끼 엄청난 고수래요.”
위은치까지 동조하고 나서자, 황노도 제법 심각한 얼굴이 됐다.
곧 황노가 시선을 한인심에게로 향했다.
한인심은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음, 형님. 꼭 우리가 잡을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슬쩍 적랑파나 구정문, 아니면 황강방에 정보를 흘려서 그놈들을 잡게 하는 건 어떻습니까?”
결국, 동생 세 명이 모두 이번 일을 포기하자는 의견을 냈고.
황노도 얼굴까지 구겨 가며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약간의 시간이 흘렀다.
세 명의 동생은 황노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 초조한 얼굴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황노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갑자기 자신의 상의를 훌러덩 젖혀 가슴살을 훤히 드러내 동생들에게 보여 주었다.
황노의 가슴엔 정확히 여덟 글자가 문신으로 새겨 있었다.
‘행악필사 귀정득생(行惡必死 歸正得生)’
내가 새겨 준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