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화
“이봐!”
“…….”
“이봐!”
“…….”
내가 목소리까지 높여 불렀으나, 원곡은 비정검사 오화서가 죽었다는 말에 너무 놀라 쉬이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괜찮다.
이럴 땐 특효약이 있지 않은가.
“홍민 선생, 밖에 있는 단체 손님 아직도 대기 중인가요?”
“네. 돈을 두 배로 주겠다며, 여기에 오고 싶어 안달이 났습니다.”
“잠깐! 잠깐! 정신 차렸다. 너무 놀라서…… 괜찮다. 다 말하겠다. 무엇이든 물어봐라. 그러니 제발…… 제발 그 소리 좀 그만해 다오. 부탁이다.”
단체 손님이라는 말에, 다시금 화들짝 놀라 경기까지 일으키는 원곡이었다.
“천수신권과 맹주의 다른 힘은 더 없어?”
“그게 전부다. 말했듯, 자잘한 녀석들과 세력이 있지만, 내가 이름도 들어 보지 못했을 정도로 미비한 존재감의 사람과 문파들이다.”
“음…… 그럼 이게 끝?”
“그렇다. 그러니…….”
“……?”
“이제 그만…… 죽여 다오.”
“음, 뭐든 좋으니 하나만 더 불어. 그러면 깔끔하게 보내 줄게. 고통도 없이.”
내 말에 원곡이 인상까지 써 가며 기억을 되살리는 노력을 했다.
정말 더는 없나 보다.
그나저나 천수신권과 맹주가 지금까지 모은 세력이 참 그렇다.
딱 예상했던 정도라 할 수 있을까?
예상 밖의 놈들도 있고, 예상했으나 아니었던 곳도 있고.
전체적으로 보면, 예상했던 규모라 할 수 있겠다.
내가 앞으로 싸우고 부수어야 할 적의 크기가 그랬다.
“있다.”
“어? 더 있어?”
내가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원곡이 입을 열었다.
그냥 한 번 찔러 본 건데, 찔러 보길 잘했다.
“어딘데?”
“사람이다. 한 명이고.”
“고수군.”
“그렇다. 하지만 그자가 확실히 맹주 밑으로 들어갔는지는 모르겠다. 너에게 잡혀 오기 전까지 맹주가 그를 설득하고 있다는 말만 들었다. 그러다 귀정사로 끌려간 것이니, 그 결과까지는 내가 알 수 없다.”
“음, 그래. 그건 내가 더 알아보고. 그래서 그게 누군데?”
“수라섬전도 능치.”
“수라섬전도? 맹주가 그에게 손을 뻗치고 있었어?”
“그렇다.”
광마일기에 수라섬전도 역시 많은 분량으로 기록되어 있다.
좀 독특한 건, 내가 죽인 다른 화경의 고수들과 달리 수라섬전도는 나와 아무런 인연도 없었고 분란도 없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나를 찾아와 싸우게 됐다.
그리고 내 손에 죽었다.
광마일기에도 그의 외모나 말투 등에 간략하게 적혀 있고, 대부분이 그의 무공과 도법에 관한 내용들이다.
광천동에서 광마일기를 처음으로 꺼내 쓰는 순간까지도, 그가 왜 날 찾아왔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고 기록되어 있다.
결국, 그 또한 맹주와 연관되어 있었다는 뜻이리라.
둘 중 하나겠지.
맹주의 개가 되었거나, 맹주에게 이용당했거나.
아니, 결국 그건 그의 선택이었으리라.
맹주를 선택했기에 나를 죽이려 찾아왔을 테다.
됐다.
내가 회귀를 통해 새 삶을 얻었듯, 그 또한 한 번의 새로운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가 만약 광천마제 시절과 같은 선택을 하게 된다면, 그는 이번 생에도 내 광천검에 죽게 될 것이다.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다.
물론, 내가 그전까지 화경의 힘을 되찾아야겠지만 말이다.
“마악치 도사.”
내가 다시 잠깐 상념에 잠겨 있을 때.
원곡이 나를 불렀다.
이번에 나를 부르는 그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다.
결국.
“부탁이다. 이제 그만…… 나를 보내 다오.”
“다음 생에는 원욱의 쌍둥이가 아닌, 좋은 곳에서 태어나길 기원하겠소.”
그렇게 원곡은 세상을 떠났다.
고통 없이 보내 주었다.
그는 악인이었지만, 결국 모든 죄와 음모를 자백하였다.
고문도 고문이었지만, 자신의 삶이 틀렸음을 인정하고 반성하였기에 숨김없이 모든 것을 불었으리라.
그래서 진심으로 그가 다음 생에는 좋은 곳에서 태어나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며 제사도 지내주었다.
세상이 몰랐던 극마의 고수가, 그렇게 마지막까지 천하에 이름 한번 떨쳐 보지 못하고 끝을 맺는 순간이었다.
*
“원곡이 말했던 맹주의 사파 쪽 무리들 말이오.”
“네, 주군. 맹주를 따르는 사파의 거두들 말씀이십니까?”
“그렇소, 처호 선생. 내 명성이 널리 퍼지고 세력을 모으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그들이 접근해 올 수 있습니다.”
“주군께서 명하신 대로, 그들을 모두 배제하겠습니다.”
“자, 이것도 받으시오.”
내가 처호에게 한 장의 종이를 건넸다.
이름이나 별호 같은 것, 혹은 사람의 특징이나 독문 무공이 적힌 종이였다.
광마일기에 사패천 당시 나를 따르던 수하들, 종국에는 나를 배신했던 수하들 말이다.
그들에 대해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냥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같은 놈들이라는, 관용적 문구로 지칭한 게 대부분이다.
그래도 몇몇은 그 이름이나 별호가 명확히 기록되어 있다.
이름이나 별호가 없어도, 독문무공이나 다른 사람과 확연히 구분할 수 있는 특징이 적혀 있는 경우도 있었다.
난 광마일기에서 그러한 부분들을 모두 발췌해 적은 후, 그것을 처호에게 건넨 것이다.
광천마제 시절, 나를 배신했던 자들이다.
누가 나를 배신했고, 배신하지 않았는지는 명확하다.
그러니까 내가 처선을 죽였던 날, 아니 그런 후 사흘이 되던 날.
공손병이 서신 한 장 달랑 남겨 두고 사패천을 떠났다.
그리고 공손병의 뒤를 따라 수천 명에 달하는 고수들이 사패천을 떠났다.
모두 처선과 공손병 때문에 사패천에 합류한 자들이었고 내게 충성을 맹세한 자들이다.
그들이 진정한 충신들이었다.
그리고 남은 사패천의 무리들.
의제와 십합단 녀석들을 빼면 모두 나를 배신했다.
그러니 간단하다.
처호, 처선, 공손병이 직접 섭외해 오는 자들은 충신이다.
알아서 내 기치로 모여드는 자 중에는 간신도 있고, 간자도 있고,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다.
그러니 지금처럼 처호, 처선, 공손병은 고수와 인재를 하던 그대로 섭외하면 된다.
또 알아서 모이는 자들 중, 원곡이 거론했던 자들과 지금 내가 종이에 적어 건넨 자들은 배제하면 된다.
나머지는 신중히 신상을 조사한 후 결정하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주군?”
“원곡이 거론했던 자들과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이오. 몇몇은 이름도 모르고 무공이나 특징만 적기도 했소.”
“아! 이 정도 특징이면 그 사람이 누군지 파악하는 것에는 문제가 없을 듯합니다. 그럼, 이 사람들도 모두 배제할까요?”
“그렇소. 그리고 앞서 말했듯, 사람을 들이는 일은 앞으로 더욱 신중해야 할 것이오.”
“신의 모든 것을 걸고 꼼꼼히 살피겠습니다.”
처호가 결의에 가득 찬 눈으로 그리 말했다.
믿어도 될 것이다.
처호라면 충분히 선과 악을 구분할 것이다.
처선이 또 그런 처호를 도울 테니, 더더욱 든든했다.
“허락해 주신다면, 저도 처호 선생을 돕고 싶습니다.”
공손병이다.
처호의 한 발자국 뒤에서 가만히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공손병이, 평소와 다르게 목소리에 힘까지 주어서 이런 말을 내게 했다.
때가 온 것 같다.
내 심장이 떨려 온다.
“공손 선생…….”
척.
내가 그 이름을 부르자, 그가 곧바로 나를 향해 부복했다.
옆에 있던 처호와 처선이 양옆으로 물러나 허리를 숙였다.
둘 다, 현 상황이 무엇인지 알기에 그리 비켜 준 것이다.
“신 공손병, 지금부터 목숨이 다하는 그날까지 주군께 충성을 맹세합니다. 충!”
감격이었다.
공손병이 전생에 이어 다시금 나를 주군으로 받드는 순간 아니겠는가.
난 그에게 다가가 천천히 손을 잡아 그를 일으켜 세웠다.
“고맙소. 그리고…… 미안하오. 하지만 약속하겠소, 공손 선생.”
“신 공손병, 주군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아니, 이건 내 약속이오.”
“경청하겠습니다, 주군.”
“이번엔…… 이번엔 결코 그대의 손을 놓지 않겠소. 우리 끝까지 함께합시다, 공손 선생.”
공손병은 내 말뜻을 명확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나는 광천마제 시절의 이야기를 지금과 이어서 하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공손병은 현명한 자다.
큰 틀의 의미를 깨달은 것이다.
“존명! 주군의 대도(大道)를 끝까지 보좌하겠습니다. 충!”
“고맙소. 정말 고맙소, 공손 선생.”
공손병도, 또 이를 지켜보는 처호와 처선도 크게 감동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이날의 감격은 내 것이 당연히 제일 클 수밖에 없었다.
*
원곡이 죽은 다음 날은 짧은 회의 후 모두가 모여 음식도 먹고 술도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공손병의 합류를 그렇게 조촐하지만 모두 기뻐하며 축하해 주는 시간을 가진 것이다.
그리고 다음 날.
우린 다시 앞으로의 일에 대해 논의를 시작했다.
“주군, 황룡회에는 저희가 가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공손병이 의견을 내놓았다.
유령신검의 사형, 그 죽음의 비밀을 어떻게 전하는 것이 좋을지 함께 고민하던 중이었다.
“유령신검에게요?”
“네, 주군. 황룡회는 세상에 알려진 것보다 많은 힘을 갖추고 있습니다. 일단 주군께서 유령신검과 큰 틀에서 동맹을 맺어 주셨으니, 구체적이고 세세한 일들은 저희가 나서서 협의를 봐야 합니다. 그러한 일들도 처리하고, 주군의 대계도 상세히 유령신검에게 전하고 논의를 해야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합니다.”
“그렇죠. 그게 좋겠군요. 그런데 유령신검이 많이 괴팍합니다. 사형의 죽음을 알리면, 불같이 성질을 내지 않을까 그게 걱정입니다.”
“그 또한 감안하여 조심스레 전달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절로 웃음이 나왔다.
더없이 믿음직스러워 나오는 미소였다.
“그래요. 그럼 황룡회에는 선생들이 가 주시오.”
“존명.”
다시 여러 이야기가 오갔다.
그리고 이번엔 처호가 조심스레 하나의 계책을 내놓았다.
“주군, 어제 하셨던 사람을 들이는 일에 관해 한 가지 계책이 떠올랐습니다.”
“어떤 계책입니까?”
“맹주의 간자들, 그리고 배신할 세력들을 배제하지 말고 받아들이는 것이 어떨까 싶습니다.”
다른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면, 욕지거리를 넘어 주먹 한 방 날렸을지 모르겠다.
그런데 이번에도 웃음이 나왔다.
무언가 엄청난 계책이 처호의 입을 통해 나올 것 같은 기대감 때문이었다.
“궁금하군요. 처호 선생이 왜 그리 말하는지요.”
“주군께서 그들이 언젠가 우리의 뒤를 칠 것이라 하셨습니다. 맹주의 명을 받아서 그리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렇죠.”
“그것을 역이용하는 것입니다.”
“역이용요?”
“네. 일단 그들을 모두 받아들이고, 한곳에 묶어 두는 것입니다. 그런 후, 그들 사이사이에 공손병 이 친구의 사도(邪道) 쪽 인사들을 몇 명 심어 놓는 것입니다.”
“그래서요?”
“사도 인물들은 정의나 협의 또 명분보다는 실리를 따라 움직이기에 사도라 불립니다. 그들이 지금 맹주와 손을 잡은 것도, 분명 맹주가 그들을 포섭할 만한 이익을 가져다주었거나 약속했기에 그리했을 것이라 사료됩니다.”
“나 역시 같은 생각이오.”
“공손 선생의 인사들을 통해 그들과 맹주를 이간질하고, 더 큰 이익을 약속한 다음, 때가 되면 그들로 하여금 오히려 맹주 측을 공격하게 하는 것입니다.”
“처호 선생.”
“네, 주군.”
“그대가 있어 나는 몹시 행복하오.”
“네? 아, 그게…….”
“공손 선생, 처호 선생, 그리고 처선 선생.”
“충!”
“고맙소. 정말 고맙습니다, 세 분 모두요.”
*
처호, 처선, 공손병이 떠났다.
아, 영웅문 삼형제도 그들을 호위하며 함께 떠났다.
언제 그렇게 친해졌는지, 선생들과 나의 헤어짐보다 왕대와 영웅문 삼 형제의 이별이 더 애틋했다.
아무튼 그렇게 그들은 산서의 황룡회로 갔다.
다른 이들도 아닌 세 사람이 갔으니, 황룡회의 일은 훌륭히 처리될 것이다.
세 사람에 대한 나의 믿음은 그러한 것이다.
그리고 다시 남은 우리.
“형님, 이제 우린 뭘 하면 되죠?”
“가자.”
“어디로요?”
“오랜만에 그 녀석 얼굴이나 보러 가자.”
“누구요?”
“있잖아. 우리를 졸졸 따라다니며, 연신 큰 목소리로 ‘형님! 형님!’ 하던 녀석.”
“아! 오중체 그 녀석요? 좋죠. 갑시다, 귀주 극양신장의 화양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