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얘기…… 계속해 봐.”
원곡이 다시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와 고개를 두 번 끄덕인 후 말을 이었다.
“내가 소림에서 쫓겨났을 때가 열세 살. 형님도 당연히 열세 살이었다.”
“그렇지. 쌍둥이니까.”
“원무 사형이 소림에서 쫓겨난 게 사 년 후인 내 나이 열여섯 살 때다. 그러니까 형님이 열여섯 살 되었을 때, 이미 소림은 원무 사형에게 지원하던 모든 것들을 형님에게로 돌려 지원하기 시작했다. 형님이 열일곱 살이 되기도 전에 칠룡사봉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던 이유였다.”
“…….”
“형님은 원무 사형이 저질렀던 전철을 밟지 않았다. 속마음이야 어쨌건, 형님은 언제나 착하고 성실하며 올바른 소림사의 어린 스님이었다. 그럴수록 소림사의 어른들은 더욱 기뻐하며 형님에 대한 지원을 계속 늘리게 됐다.”
소림사의 전폭적인 지원이라.
천재가 아니라 보통 사람이었어도 상승의 경지로 올라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그 대상이 천수신권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렇게 형님이 스물네 살이 되던 해. 후기지수들은 말할 것도 없고, 무림의 기라성이라는 고수들과도 비교될 정도로 형님은 무지막지한 힘을 얻었다고 했다.”
지금으로 따지면 천무휘 정도 되려나?
우리 예지도 있고.
“그래서?”
“천하는 넓고 고수는 많다. 그것이 무림이란 세계다.”
“쓸데없는 말 붙이지 말고, 본론만 말해.”
“형님의 아성에 도전하는 새로운 고수가 등장했다는 소식이 형님 귀에 들려왔다. 고작 스무 살의 나이였음에도 칠룡사봉의 수좌 자리까지 위협할 정도로 엄청난 신진 고수가 탄생했다고…….”
“현 무림맹주, 남궁비혁이군.”
“그렇다.”
참, 생각해 보면 좀 그렇다.
그렇게 탄탄대로를 걸어가던 두 사람이 왜 이 지경이 된 것인지.
그나저나 그때는 서로를 경쟁 대상으로 인식하여 불목하게 된 건가?
“다시 말하지만, 형님은 속마음이 어쨌든 겉으로는 매우 훌륭한 스님이었다. 그리고 그건 남궁비혁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 뭔 말인지 알 것 같군. 서로를 인정했다는 말이지? 겉으로는.”
원곡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다. 심지어 둘은 서로 의기투합하여 무림행을 떠났다. 남궁세가의 소가주와 소림사의 신성, 칠룡사봉 중 수좌 자리를 다투는 두 사람이 떠나는 무림행에 당시 모든 무림의 눈과 귀가 쏠렸다.”
“그럴 만도 하겠군. 그래서?”
“두 사람의 무림행은 순풍에 돛을 단 듯 순조로웠다.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랬지.”
“두 사람을 때렸다는 그녀?”
“그렇다.”
“그녀가 누구지?”
“세간의 이목이 부담스러웠던 두 사람은 잠시 사람들의 눈을 피해 한적한 곳만을 골라 다녔다고 한다. 그러다 간 곳이 귀주였고, 귀주의 어느 산자락에 위치한 산장에서 그녀를 만났다고 한다. 그녀가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남궁비혁은 정신도 차리지 못하고 귀신에라도 홀린 것처럼 그녀에게 다가갔다고 한다.”
확실히 무적 할매는 아니군.
무적 할매가 그렇게까지 예쁜 건 아니니까.
뭐, 내 머릿속에 각인된 무적 할매는 아무튼 그렇다.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젊은 시절 남궁비혁은 남궁세가에서 무공뿐만 아니라 예법 또한 깊이 가르쳤다고 한다. 그래서 여인에게도 예법에 어긋나지 않게 다가갔다. 하지만 그건 겉치레였고. 그 속내는 뻔하지 않겠나? 무림의 원로들마저 굽실굽실해야 했던 남궁비혁이 한낱 변방 시골에서 만난 처녀에게 진심으로 예의를 갖추었을 리 만무하지.”
“상황이 조금은 상상이 되는군. 나도 그런 시건방진 후기지수들을 몇 번 만나 봐서 잘 알지. 그래서?”
“안타깝게도 그때 남궁비혁과 형님이 접근했던 여인은, 선녀와 같은 아름다운 외모와 다르게 성격이 불같았다고 했다. 아니.”
“아니, 뭐?”
“몇 년 전에도 그녀에 관한 정보를 접했는데, 여전한 것 같아서.”
“그녀가?”
“그렇다. 아들만 셋이 있는데, 소문에 따르면 아들들이 아버지를 매우 무서워한다고 하더군. 얼마나 엄격히 아들들을 가르치면, 아들들이 엇나가는 경우 실제 팔이며 다리며 모두 부러뜨린다고까지 했다.”
“그게 뭐야? 그건 엄마가 아니라 아버지를 무서워하는 거잖아.”
“나도 그렇게만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아들들의 팔다리를 부러뜨린 게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가 그랬다고 한다. 남편도, 또 아들들도 그런 어머니가 무섭고 창피해서, 모두 남편 자신이 그랬다고 말하고, 자식들도 어머니가 아니라 아버지가 그랬다고 말하며 다닌다고 하더라.”
“음, 뭐야? 그래서 그 여자가 누군데?”
“아무튼 여인은 아름다웠지만, 성격은 외모와 정반대였다고 한다.”
지금 이 인간 내 말 씹은 거 맞지?
아놔!
열받네.
“결국 시비가 붙었고, 남궁비혁과 여인은 칼부림까지 하게 됐다.”
“천수신권은?”
“형님은…… 그냥 지켜보기만 했다고 했다.”
“왜?”
“남궁비혁이 쓰러질 때까지 지켜보다가, 위급해지면 구해 주려고.”
“하아! 그런 상황 속에서도 그런 생각을 해? 그렇게 빚이라도 하나 덧씌우려고? 대단하다, 정말 대단해.”
“하지만 형님의 생각은 틀렸다.”
“왜? 뭐가 문제였는데?”
“남궁비혁이 여인에게 개처럼 두들겨 맞는 걸 보고, 결국 피 칠갑을 하고 또 입에 게거품까지 물며 살려 달라고 애원했을 때 형님이 나섰다. 그리고…….”
“그리고?”
“형님도 그 여인에게 개처럼 두들겨 맞았다고 한다. 남궁비혁 옆에 쓰러져, 바닥을 구르며 피를 흘리고 비명을 지르며 살려 달라고 했단다.”
“아! 그 여인…… 무지막지한 고수였나 보군. 이제 그만 말해 주지, 그 여인의 정체를?”
“그때 그 남자가 나타나서 여인을 말리지 않았다면, 형님과 남궁비혁은 죽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 했다. 최소한 평생 불구로 살아야 했을 수도 있다고.”
아니, 이 인간 진짜로 내 말을 씹네?
그나저나 궁금하군.
“여인을 말린 남자가 누군데?”
“연인(戀人).”
“아니! 그건 누구나 다 짐작할 수 있는 거고. 그 남자가 누구냐고? 이름, 별호. 이런 거.”
“극양신장 오대극.”
“오, 오대극?”
원곡이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화양문의 극양신장 오대극?”
끄덕.
“아…….”
오대극은 오체중의 아버지다.
왜, 우리가 무림맹 용봉지회 갔을 때 나와 의제, 한해북 뒤를 계속 쫓아다니며 ‘형님! 형님!’ 했던 그 녀석 말이다.
그때 아버지를 엄청나게 무서워한다고, 잘못하면 팔다리 하나는 가볍게 분질러 버린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속으로, ‘누가 양강(陽强) 계열의 무공을 익힌 고수 아니랄까 봐 성격 한번 불같네.’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실제 오중체와 그 형제들이 무서워했고, 잘못하면 팔다리를 부러뜨렸던 게 아버지가 아닌 어머니였어?
참, 남의 집 사정이지만, 오중체가 꽤 안쓰럽긴 하다.
다음에 만나면 조금 잘해 줘야겠다.
그나저나 오중체의 어머니도 엄청난 고수인가 보다.
젊은 시절 천수신권과 남궁비혁을 둘 다 때려 눕혔을 정도면 말이다.
“이제 여인의 정체도 알겠지?”
이번엔 내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형님과 남궁비혁이 합공을 했으면 그 여인에게 그렇게까지 처참한 패배를 맛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남궁비혁의 자존심과 형님의 이해타산적 심보가 일을 그렇게 최악으로 몰아넣었던 것이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뭔데? 뭐가 또 있어?”
“여인에게 맞았다는 육체의 아픔과 마음의 패배감, 수치심 이 모든 걸 잊어버릴 정도로 커다란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설마…… 극양신장 오대극 때문에?”
원곡이 다시 고개를 크게 끄덕인 후 답했다.
“당시 형님과 남궁비혁은 부끄러움이 뭔지 몰랐었나 보다. 개처럼 두들겨 맞아 피를 흘리고 바닥을 구르면서도, 악에 받쳐 소림사와 남궁세가를 들먹이며 복수하겠다고, 여인을 갈기갈기 찢어 죽이겠다며 악을 썼다고 했다. 그리고 그때 오대극이 조용히 모습을 드러내며 여인을 말리고, 바닥에 쓰러진 두 사람을 무표정한 얼굴로 내려다봤다고 하더군.”
“극양신장 오대극.”
“그렇다. 그리고 두 사람은 극양신장을 보자마자 온몸이 굳어 버렸다고 했다. 도저히, 영원히 넘어설 수 없는 절대적인 벽에 부딪힌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당시 극양신장의 나이 고작 스물두 살이었을 때다.”
극양신장이 대단하긴 하지.
광마일기에도 그렇게 적혀 있고.
“극양신장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두 사람에겐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당시 연인이었던 현재의 부인을 데리고 산장을 떠났다고 한다. 형님과 남궁비혁은 그들이 떠난 후에도 한참을 움직일 수도 없었다고 했다. 또한 그 눈빛을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고. 그렇게 큰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음…… 결국 극양신장 때문에 두 사람이 지금처럼 됐다는 말인가? 아니, 잠깐. 그런데 그 엄청난 사건이 왜 알려지지 않았지? 천수신권과 무림맹주에 관한 이야기는, 아주 어렸을 적 사소한 일들까지 모두 알려졌잖아. 그런데 방금 당신이 한 이야기는 처음인데?”
“말하지 않았나? 귀주라는 변방에서도 오가는 이가 드문 산골의 이름도 없는 산장이었다고.”
“설마……?”
“소림과 남궁세가의 명예가 실추될 것을 우려한…… 사실, 두 사람 스스로 이 사건이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은 것이지. 그보다 더한 치욕은 없었을 테니까. 그래서 열 명 남짓한 산장 사람들과 손님들을 모두 죽여 살인멸구를 했다고 하더군.”
“극양신장과 극양신장의 부인은?”
“모른다. 두 사람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당시의 일을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 속사정까지는 내가 알 수 없다.”
어쩌면 당시의 원욱과 남궁비혁을 무시해서 말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아니면, 지금과 같은 힘을 지니지 못했던 당시의 화양문에서 소림사와 남궁세가라는 거대한 세력과 불화를 일으키고 싶지 않아 함구하였을 수도 있고.
이건 원곡의 말마따나, 극양신장 본인이 아니면 알 수 없는 일.
아! 그러고 보니, 극양신장의 화양문은 정파다.
유령신검의 황룡회가 정사지간의 문파여서 무림맹에 소속되지 않은 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화양문은 정파임에도 무림맹에 소속되어 있지 않다.
어쩌면 과거의 그 일 때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 일이 계기가 되어 충격을 받은 원욱과 남궁비혁이 천하를 자신들 발아래 두려는 꿈을 꾸게 됐다고?”
“하나가 더 있다.”
“또?”
“두 사람은 당시 커다란 충격을 받고, 사문과 집으로 돌아가 참회하며 수련에 매진해야 했다. 하지만 둘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살인멸구를 한 후, 곧바로 귀주를 벗어나 천하를 떠돌며 매일 술에 취해 행패를 부리고 다녔다고 한다.”
“역시 처음 듣는 이야기군.”
“소림사와 남궁세가에서 작정하면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부를 수도 있다.”
“그래, 그건 그렇고. 그다음은?”
“매일 패악질을 부리며 천하를 떠돌다 도착한 게 산서였고, 그때 다시 두 사람의 인생을 바꾸게 만든 한 남자를 만난다.”
“설마…… 유령신검 월제?”
원곡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산서면 당연히 유령신검의 황룡회를 먼저 떠올린다.
누구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유령신검이 아니라면 누구지?
“당시에는 황룡회 자체가 없었다.”
“아! 그렇지. 그건 유령신검이 한참이란 시간이 지나 스스로 개파한 문파니. 그래서 누굴 만났고, 무슨 일이 있었는데?”
“술에 취해 패악질을 부리던 형님과 남궁비혁을 그 사내가 꾸짖었다고 한다. 서른이 넘은 나이의 사내였는데, 형님과 남궁비혁은 자신들을 꾸짖는 사내에게 다짜고짜 살수까지 썼다고 한다. 산서에서 겪은 굴욕을 그 사내에게 되갚음이라도 하겠다는 듯 말이다. 하지만…….”
“되레 맞았구나?”
원곡이 이번엔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그것도 엄청나게 맞았다고 하더군. 산서에서는 그나마 바닥을 구르고 피를 쏟아내면서도, 요리조리 덜 아픈 곳만 맞을 수 있었는데, 이자는 사악했다고. 그것도 너무 사악하게 자신들의 아픈 곳만 계속 때려서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는 생각까지 했다고 한다.”
“정파 사람이 아니군?”
“아니지. 당시 유령문은 정사지간의 문파였으니까.”
유령문?
유령문은 황룡회의 전신이다.
지난번 송암 도장이 유령신검을 만났을 때 말한 유령문의 마지막 문주, 그러니까 유령신검의 사조가 몸을 담았던 그곳 말이다.
“설마……?”
“형님과 남궁비혁을 다음 날 아침까지 쉬지도 않고 때렸다는 그 사람은 바로, 현 황룡회의 회주 유령신검 월제의 하나뿐인 사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