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마두가 된 이유-193화 (193/245)

193화

순간. 조금은 협소한 다관 내실에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홍민은 여전히 진지했지만, 우리는 그렇지 못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고, 그저 눈동자만 굴렸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등으로 한 줄기 식은땀마저 흘러내렸다.

아! 그러고 보니, 아까 이 인간 후원에서 우리 보고 꺼억꺼억 울었던 게 그거였어?

천무휘의 친구인 우리를 만난 게 오열을 토할 정도로 좋았던 거야?

뭐라고 답을 해야 하지?

아니, 아! 젠장.

내가 왜 나섰을까?

아니, 내가 나설 상황은 맞긴 맞는데.

하아! 머리가 혼란하다.

어떻게 답을 해 줘야 할지도 모르겠고, 또 이 사람에게 어떻게 대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냥, 아무것도 모르겠다.

머리가 혼란스러운데 또 백지장같이 하얗다.

사고가 정지된 느낌…… 덥석.

갑자기 홍민이 내 손을 덥석 잡아 버렸다.

내 손을 잡고 눈을 쳐다보며 울먹인다.

왜지? 머리털이 모두 쭈뼛 서는 느낌이다.

얘는 나를 죽일 수 없는데.

느낌이 좀 그렇다.

처음 겪는 느낌이라 생소해 그런 것일까?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도 홍민의 북받친 감정은 점점 더 격렬해져 가고 있다.

“마 도사님…….”

아! 손을 슬쩍 빼려고 했는데.

동시에 이 녀석이 내 손을 더욱 강하게 잡아 버렸다.

난감하네.

“도사님…… 도와……주세요. 전…… 저는 정말 그분께 진심입니다.”

“아, 네. 네.”

아이 씨. 손부터 좀 놓고 말하지.

돌겠네.

이런 심각한 상황에 그런 말 하기도 좀 뭐하고.

“전…… 저는 그분을 사랑합니다, 흑흑.”

결국 홍민의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기회다.

“눈물부터 좀 닦으시고, 차분하게 대화를 하시지요.”

하아! 원시천존님, 천지신명님, 부처님, 하늘님, 옥황상제님, 염라대왕님, 기타 등등님.

모두 감사합니다.

홍민이 내 손에서 자신의 손을 떼어 눈물을 훔치었다.

순간 내 온몸을 지배하던 긴장감이 봄날 눈 녹듯 사르르 녹아내렸다.

이게 이렇게까지 사람을 긴장하게 만드는 일일 줄은 몰랐네.

그나저나 어쩌지?

난 살짝 손을 잡은 것만으로도 이렇게 힘든데.

우리 천무휘 녀석, 아!

혼자 결정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고개를 살짝 돌려 예지를 봤다.

나와 눈이 마주친 예지가 어금니를 꽉 깨물고 고개를 천천히 가로젓는다.

아무리 이 일이 중차대하다고 하여도, 절대 친구를 팔아먹어서는 안 된다는 강한 의지가 우리 예지의 눈빛에서 흘러나왔다.

다시 그 옆에 있는 의제를 보았다.

처참한 얼굴을 하고 있다.

더없이 고통스럽다는, 또 슬프다는 눈빛.

그와 동시에 의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천무휘를 희생시키자는 강한 의지였다.

이번엔 한해북을 보았다.

나와 눈을 마주친 한해북은, 곧바로 내 시선을 피했다.

그러면서 슬쩍. 고개를 끄덕인다.

내가 못 봤을까 봐, 두 번 끄덕였다.

한해북도 대의를 위해 천무휘를 희생시키자는 뜻을 명확히 표현한 것이다.

이렇게 결정되었다.

삼 대 일이다.

나도 천무휘가 희생하는 것에 한 표.

그러니 삼 대 일.

“홍 선생.”

“마, 마 도사님…… 흑흑.”

“당신의 진심이 통했습니다.”

내 말에 눈물을 흘리며 흐느끼던 홍민이 화들짝 놀라 두 눈을 화등잔만 하게 떴다.

말문마저 막힌 그런 격한 놀람과 감정이 그에게서 고스란히 흘러나왔다.

그 정도로 좋아하는 건가?

뭐, 그건 홍민의 감정이니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고.

“우리 천 형을…… 홍 선생에게 소개해 주겠습니다.”

“정, 정말이십니까?”

“그렇습니다. 단, 현재 천 형은 폐관 수련 중이라 폐관을 모두 마친 후에나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고개를 마구 끄덕이며 홍민이 답했다.

“그렇죠. 그렇죠. 당연한 말씀이십니다.”

“또한…… 어험, 어험. 그러니까…… 그냥 대화만…… 밥도 먹고, 차도 마시고, 길도 나란히 걷고…… 평범한 만남.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다시 고개를 마구 끄덕인다.

“물론입니다. 천 대협께 제 마음을 숨기겠습니다. 아니, 당연히 그래야 합니다. 고귀하신 분께, 어찌 제 마음을 밝힐 수 있겠습니까?”

“아! 제 말뜻은 그런 게 아닌데…….”

“압니다. 천 대협의 취향이 저와 다른 것도 알고. 마 도사님께서 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천하의 시선이 저와 같은 사람을 어찌 보는지도 잘 압니다. 그리고 저는 제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도 알고 있습니다. 아무 염려 마십시오. 저는 그저 천 대협을 가까이서 보고 평범하게 대화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습니다.”

“아! 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꼭 그런 자리를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덥석.

또 내 손을 잡았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마 도사님!”

이상하다.

이번엔 머리털이 쭈뼛 곤두서지 않았다.

더없이 기뻐하는 홍민을 보고 있자니, 나도 덩달아 미소가 지어졌다.

이후 홍민은 내가 먼저 말을 꺼내기도 전, 고문 일을 맡겠다고 하였다.

일사천리였다.

이제 천수신권의 쌍둥이 동생이 갇혀 있는 귀정사로 향하면 된다.

그나저나, 그 전에 할 일이 있다.

나와 의제, 한해북 그리고 금예지만 따로 다관 옆 골목에 잠시 자리를 했다.

“자, 우리들의 친구 천무휘를 위해 묵념.”

나와 의제, 한해북이 눈도 감고 고개도 숙이고, 진지하게 묵념을 했다.

우린 천무휘의 거룩한 희생을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다.

“오빠들! 그만해.”

예지가 그런 우리를 나무라며 말렸다.

*

귀정사.

“작은 사부님!”

“그래, 그래. 우리 악치 왔구나. 악치야!”

우리 작은 사부.

못 본 지 얼마나 됐다고, 나를 보자마자 눈시울이 시뻘게진다.

의제와 한해북은 작은 사부를 사막에서 만난 적 있다.

적사마적단과 녹주마적단 사건 때 말이다.

하지만 예지와 왕대는 처음이다.

홍민과 처호, 처선, 공손병은 섬서 위남에 머물러 있다.

내가 원곡을 데리고 갈 때까지, 고문에 필요한 준비를 마쳐 놓겠다고 하였다.

아무튼 의제와 한해북도 작은 사부에게 인사하고.

우리 예지도 소개해 주고.

마지막으로 왕대.

“처음 뵙겠습니다. 왕대입니다.”

이 녀석, 우리 작은 사부에게 깍듯하게 존대를 한다.

좀 어설프기는 했지만, 허리까지 깊이 숙여 예를 갖추는 모습이다.

사부의 고강함을 알아봤다기보다는, 내 사부님이라는 말에 저리 행동하는 것이다.

어쨌거나 작은 사부와 짧게 회포도 풀고.

작은 사부가 젊은 시절 광기를 억누르기 위해 벽면수양을 하던 동굴로 향했다.

그곳에 원곡이 있었다.

가부좌를 튼 상태로, 진짜 돌처럼 꿈쩍도 하지 않고 있었다.

머리와 어깨에 먼지까지 잔뜩 쌓였다.

“살아…… 있어요?”

살아 있다.

호흡이 느껴진다.

그래도 정말 돌처럼 움직이지 않아 그냥 한 번 물어본 거다.

“휴우, 홍민이 진짜 저 인간 입을 열 수 있을까?”

혼잣말이다.

홍민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쉽지 않을 듯하다.

홍민도 화경의 고수, 아니 극마의 고수를 고문하는 건 처음 아니겠는가?

“작은 사부님.”

“그래, 악치야. 나는 무얼 하면 되겠느냐?”

“홍민이라는 고문 전문가가 그러더라고요. 마혈만 확실히 제압해 달라고요. 대신 얼굴은 자신이 점혈할 테니, 얼굴로 이어지는 혈도는 풀어 달라고 했어요. 가능하죠?”

“어려울 게 있겠느냐? 그런데 정말 저놈의 입을 열 수 있다더냐?”

“천하제일 고문가라고 하는데, 원곡 이 인간을 보니 쉽지 않을 듯합니다. 그래도 일단 시도는 해 봐야죠. 저 인간 입을 통해 들을 게 너무 많으니까요.”

“그래, 그럼 나는 일단 마혈부터 확실히 제압해 놓겠다.”

작은 사부가 꼼꼼히 원곡의 전신 마혈을 제압했다.

작은 사부의 말에 따르면, 맹주나 천수신권이 와도 쉬이 풀지 못할 것이라 했다.

물론, 얼굴로 연결되는 혈도는 모두 풀어놓았고.

홍민이 왜 이런 부탁을 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일단, 그가 시키는 대로 다 했다.

이제 섬서 위남으로 원곡을 데리고 가면 된다.

우리는 다음 날 이른 아침, 작은 사부와 작별한 후 귀정사를 떠났다.

*

다시 돌아왔다.

원곡을 데리고.

홍민이 사는 집.

작지만 굉장히 고급스러운 장원이다.

확실히 돈이 많은 모양이다.

마차에 실은 원곡을 그곳으로 데리고 갔다.

밀실.

원곡을 마차에서 꺼내 그곳에 내려놓았다.

마혈이 제압당해 스스로는 꿈쩍도 하지 못하는 원곡이다.

얼굴로 연결되는 혈도와 아혈은 풀렸기에 분명 표정을 지을 수도 있고, 말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원곡은 마치 진짜 돌이라도 된 것처럼, 두 눈까지 깊게 감고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자, 그럼 이제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 마지막 준비를 해야겠군요.”

홍민은 웃고 있었다.

살짝 상기된 얼굴이, 기쁘면서도 뭔가 들뜬 기분이었다.

우리는 홍민이 원곡에게 어떤 준비를 하는지 유심히 살폈다.

탓!

타타타탓!

타타타탓!

점혈공을 익혔다고 하더니, 확실히 혈도를 점혈하는 수법이 꽤 정교하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점혈의 수법까지…….

어? 뭐지?

홍민이 점혈공으로 원곡의 얼굴과 연결된 혈도를 점혈할 때마다, 미묘하지만 원곡의 얼굴이 바뀌어 간다.

아니, 표정이 바뀌고 있다.

그리고, 결국!

원곡이…… 웃는다.

웃어?

뭐지?

저런 점혈 수법도 있었나?

“자! 일차 준비 끝! 어때요? 웃는 얼굴이 더 보기 좋죠?”

“아, 네. 뭐. 그러네요.”

우리는 홍민이 무슨 일을 꾸미고자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왜 원곡의 혈도를 점혈해 강제로 웃는 얼굴로 만들었는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

이는 천안천이 공손병 역시 마찬가지다.

홍민이 천하제일 고문가로 알려졌지만, 그의 고문 방법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고 하였다.

도대체 무슨 일을 하려는 것일까?

모두가 의아해하고 있을 때.

“자! 그럼 이차 준비.”

그가 밀실 한쪽에 있는 제법 커다란 상자로 다가갔다.

무시무시한 고문 도구가 있을까, 우리는 모두 촉각을 곤두세워 지켜보았다.

그렇게 상자가 열렸는데.

엇?

이건 또 뭐야?

저건…… 저건 분명 여인들이 화장할 때 쓰는 것들인데?

“오랜만이다, 예쁜 내 새끼들아. 오늘도 잘 부탁한다.”

홍민은 화장 도구들이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인 것처럼 말까지 했다.

그렇게 몇 개의 도구를 챙기더니, 원곡에게 다가간다.

그리고 상상치도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홍민이, 원곡의 얼굴을 화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우리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극마의 고수다.

녹주마적단과 적사마적단의 주인이며.

천하를 전복시킬 음모를 꾸미고 있는 배후가 바로 원곡이다.

그런 그를, 홍민은 콧노래까지 부르며 화장하고 있다.

너무나 놀란 우리는 입까지 쩍 하고 벌리고는 좀처럼 다물지 못했다.

이는 산전수전 다 겪었다는 처호와 공손병마저도 마찬가지였다.

엄청난, 경악할 만한 이 일에,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홍민이 하는 일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원곡의 얼굴에 화장이 완성되어 갈 즈음.

“에이, 울지 마. 울면 힘들게 한 화장이 지워지잖아. 예뻐. 아주 예뻐. 호호호. 하하하.”

원곡이 말이다.

돌처럼 굳어 아무런 감정도 표현하지 않던 원곡이 말이다.

웃는 얼굴로 눈물을 흘렸다.

“자! 다 됐다. 아이고, 내 정신 좀 봐. 옷도 갈아입어야지, 우리 예쁜 왕자님, 호호호.”

차마, 더는 볼 수 없었다.

*

그날 밤.

우리는 홍민의 장원을 나와야 했다.

고문하는 일은 아무리 의뢰인이라 하여도 지켜볼 수 없다고 했다.

확실히 천하제일 고문가라 그런지, 그는 그만의 원칙을 철저히 지켰다.

홍민의 집은 번화가 중심에 위치해 있다.

바로 건너편에 한밤중임에도 손님들이 북적이는 객잔과 기루들이 있었다.

우리는 그중 한 객잔에 방을 잡고, 다시 객잔 이 층 식당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홍민의 장원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지켜보기 위함이었다.

늦은 밤이 되었고, 다시 새벽이 되었다.

아무런 변화도 없다.

비명도 절규도, 그 무엇도 들리지 않았다.

다만, 홍민의 장원에서 일하는 일꾼이 장원 정문에 홍단화(紅丹花) 문양의 표식을 붙여 놓은 게 전부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여전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청력을 아무리 극대화해도, 원곡의 비명도 들리지 않았다.

도대체 뭘까?

고문을 하고 있긴 하고 있는 게 맞을까?

너무 고요하다.

장원 밖의 상황도 특별할 게 없다.

간혹, 번잡한 이 거리를 지나는 사람 중 일부가 홍민의 장원 정문에 붙여진 홍단화 문양을 슬쩍 지켜본 후 지나가는 게 전부였다.

아! 뭐지?

어젯밤부터 지금 저녁이 될 때까지, 한숨도 자지 않고 계속 지켜보고 있는데 정말 사소한 일조차 일어서지 않았…… 어?

처음 보는 사내가 홍민의 장원 정문 앞을 계속 서성인다.

아니다.

저 사내, 분명 대낮에 홍민의 장원 정문에 붙여진 홍단화 문양을 슬쩍 살펴본 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지나갔던 그 사내다.

그런데 왜 다시 돌아왔지?

아니, 그보다 왜 저렇게 계속 남의 집 문 앞을 왔다 갔다 하는 걸까?

안력을 높여 그 얼굴을 자세히 살폈더니, 무언가 갈등하는 모양이다.

초조해 보이기도 하고.

그러더니 이내, 결심을 한 듯 대문을 향해 다가가는 사내.

똑, 도독, 똑똑.

또도도도도똑똑, 똑똑.

미친놈인가?

대문을 왜 저렇게 이상하게 두드리지?

강약에 장단까지 넣어 문을 두드렸다.

곧바로 홍민의 장원 일꾼이 빼꼼하게 문을 열었다.

웃는 얼굴로 사내를 맞이하는 일꾼.

사내는 뻘쭘한 듯 주저하더니, 주변을 한차례 쓰윽 살핀 후 쏜살같이 장원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건, 비슷한 일이 그날 밤 무려 열한 차례나 반복되었다는 것이다.

도대체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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