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유령신검은 장위지와 함께 산서로 되돌아갔다.
떠나기 전, 나는 그와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엄청난 소득이 있었다.
유령신검과 비밀 동맹을 맺은 것이다.
처음 그가 나를 만나러 일부러 산서에서 이곳 섬서까지 온 이유는 이랬다.
“원래는 자네를 내 제자나 수하로 받아들일 생각이었네. 내가 이런 제안을 한다면 자네가 매우 기뻐하며 단숨에 내게 구배지례를 할 것이라 생각했지.”
“저에 대한 조사가 살짝 부족하셨군요.”
“살짝이 아니라 완전히 잘못 판단하고 왔네. 인정하지, 허허허.”
“그럼 앞으로…….”
“나와 동등한 관계로 자넬 인정하겠네. 동등한 입장에서 우리 동맹을 유지하고 싶네.”
“네. 저도 딸린 식구가 많아서 함부로 허리 숙여 감사하다는 말씀은 못 드리겠습니다.”
“이해하네. 다시 생각해도 자네는 대단하구먼, 대단해. 허허허.”
“월 대협에 비한다면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아니. 절대 그렇지 않아. 지금 자네를 보고 있자니, 아마 십 년 후에는 자네와 동등한 관계로 동맹을 맺은 걸 내가 오히려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네.”
무림오대고수, 그리고 그가 이룩한 황룡회.
나는 그들과 동등한 입장에서 비밀 동맹을 맺게 되었다.
그리고 그 동맹의 기한은 무림맹주의 목을 베는 그날까지로 정했다.
이래저래 엄청난 수확을 거둔 팔적산 행보가 아닐 수 없었다.
*
“주군,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처선이다.
유령신검과 대화를 마치고 돌아오자, 처선이 꽤 송구한 얼굴로 내게 그리 말했다.
“무슨 일인데 그런 얼굴이야? 말해.”
“도움이 필요합니다.”
“도움?”
“네, 주군. 실은 아버지께서 주군의 팔적산 행보에 심기가 흐트러질 수 있으니, 일을 모두 마칠 때까지 함구하라 하여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음, 진즉 내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었다는 거네?”
“네, 주군.”
“그래, 그게 뭔데?”
“고문 전문가를 도저히 설득할 수 없습니다. 공손 선생의 말에 따르면, 그는 진정한 천하제일이라 불릴 만한 고문 전문가가 확실하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그의 손을 거쳐 자백을 받지 못한 이가 단 한 명도 없다고 합니다.”
“이봐, 처선.”
“충!”
“그걸 왜 나한테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거야?”
“주, 주군. 죄송합니다.”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라. 그거 어차피 내 일이잖아. 내 일인데, 지금 처호 선생하고 공손병 선생이 나 대신 열심히 일해 주고 있는 거고. 그건 내가 돕는 게 아니라, 내가 원래 해야 할 일을 해야 하는 거라고.”
“아…… 네. 주군.”
“처선.”
“충!”
“고마워. 자네와 자네 처호 선생 덕분에 든든한 힘이 생겼어. 들으면 깜짝 놀랄 일이야.”
난 처선에게 조금 전 유령신검과 맺은 비밀 동맹에 관한 이야기를 모두 해 주었다.
심지가 굵고 지혜가 밝은 처선임에도, 내가 전하는 소식에 온몸을 부르르 떨며 크게 놀라워했다.
“또 한 번 천하를 놀라게 할 일을 해내셨습니다. 경하드립니다, 주군.”
“천하는 나중에 천천히 놀라게 하고. 일단 가자고. 나 때문에 고생하고 있는 우리 처호 선생과 공손병 선생의 수고를 조금이라도 덜어 줘야지.”
“존명!”
나, 처선, 의제, 한해북, 금예지, 마지막으로 왕대까지.
아! 송암 도장도 무당파로 돌아갔다.
아무튼 우리는 빠르게 말을 몰아 천하제일 고문가가 있다는 섬서 위남으로 달렸다.
우연인지 행운인지, 현재 우리가 있는 섬서에 위치한 유림과 크게 멀지 않은 곳이다.
현재 천무휘가 폐관 수련을 하고 있는 화산파 인근이기도 하다.
“가자!”
*
다그닥 다그닥.
말을 몰아가며 처선의 보고를 받았다.
우리가 찾아가는 천하제일 고문가의 신상과 내가 미리 알아 둬야 할 사항에 대한 보고였다.
“이름은 홍민이라고 합니다. 나이는 마흔세 살이나, 외모는 이십 대 중후반 정도로 보입니다.”
“고수인가?”
다그닥 다그닥.
“일류 무사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점혈공(點血功)을 독문무공으로 쓰는 자입니다.”
“점혈공? 기이한 일이군.”
점혈을 하는 수법은 웬만한 상승 무공이 아니라 하여도 대부분의 무공이 이를 갖추고 있다.
특히 상대를 죽이는 사혈에 관해서 점혈 수법은 그냥 기본이다.
조금 더 나아가면 상대의 신체를 마비시켜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마혈(痲血)에 관한 점혈법.
또 소리를 내지 못하게 만드는 아혈(啞血)에 관한 점혈법 등등.
모두가 어느 정도의 경지를 넘어선 고수들에게는 기본 중의 기본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 의미로 점혈법을 따로 깊게 파고들고, 또 그것만 죽어라 익히는 무인은 거의 없는 게 현실이다.
다만, 간혹.
“혹시 의술을 익히는 의원인가? 고문하다가 사람이 크게 다치거나 죽기 직전에 점혈수법으로 치료를 한다든가.”
“그런 건 아닌 줄 알고 있습니다.”
“어쩌면 점혈수법으로 고문을 하는지도 모르겠군.”
“아버지와 공손 선생도 그리 추론했으나, 워낙 최고의 고문 전문가라는 것 외에는 알려진 것이 없어서 확신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 그건 됐고. 다음 정보는?”
“네. 그러니까 홍민은 사천에서 태어나…….”
다그닥 다그닥.
말을 달리면서 처선의 보고는 계속 이어졌다.
기본적인 인적 사항과 소문 외에 크게 주목할 만한 부분은 없었다.
처호와 공손병이 부족한 정보 때문에 그를 설득하는 데에 있어서 애를 꽤 먹겠다 싶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아! 그자에게 별호가 있습니다.”
“별호? 고문 전문가에게도 별호가 붙나?”
“알려진 바에 의하면, 고문 전문가로 붙은 별호가 아니라, 평소 사람들과 어울리다가 생긴 별호라고 합니다.”
“거참 희한한 놈일세. 그래서 별호가 뭔데?”
“옥면화화랑(玉面花花郞)이라고 합니다.”
이히이이잉.
내가 말고삐를 잡아당겼다.
빠르게 달리던 말이 크게 울부짖으며 걸음을 멈추었고, 동시에 처선과 우리 아이들이 모두 말을 멈추어 세웠다.
내가 좀 황당한 얼굴로 처선에게 물었다.
“옥면화화랑?”
“네, 주군. 그렇습니다.”
“이름도 홍민이라며?”
“네, 주군.”
“가명 아니야?”
“그것까진 알려진 정보가 없습니다.”
“옥면화화랑?”
“네.”
“잘생긴 얼굴에 바람둥이, 화류계 어쩌고 그런 의미 맞아?”
“네, 주군. 맞습니다.”
“천하제일 고문가 맞지? 우리 지금 사람 잘못 찾아가고 있는 거 아니지?”
“정확히 길을 가고 있습니다.”
“하아! 난 천하제일 고문가라고 해서, 막 우락부락하게 생기고. 음침하고, 그런 거 있잖아. 으스스한 분위기에 살기가 슬금슬금 피어나면서, 보기만 해도 오싹한 그런 분위기의 사람일 줄 알았는데. 옥면화화랑? 하! 참, 살다 살다 별일도 다 겪어 보는군.”
“실은 저희도 실제 옥면화화랑 홍민을 만난 후 크게 놀랐습니다. 아버지와 공손 선생 그리고 저까지 모두 주군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별호를 들었을 때도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실제 만나 보니 굉장한 미남이었습니다.”
“미남?”
“네, 주군. 소문에 따르면, 옥면화화랑이란 별호도 그를 사모하는 수많은 여인이 지어 준 것이라 합니다.”
“내가 별로 안 좋아하는 부류군.”
처선이 잠시 주저하며 고민하는가 싶더니, 조심스레 다시 입을 열었다.
“추측입니다만, 고문에 관한 일을 하며 그 또한 많은 적을 만들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일 년 전부터 갑작스레 잠적한 이유도 그렇고, 사천 출신인 그가 연고가 하나도 없는 섬서의 화산 인근에 터를 잡은 것도 그렇고…… 그래서 어쩌면 변용이지 않을까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음, 그럴 수도 있겠군. 일단 가서 보면 알겠지. 어떻게 생긴 녀석인지. 가자.”
“존명!”
*
위남에 도착했다.
옥면화화랑 홍민이 산다는 곳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화산에 더 가까운 곳이었다.
도읍 여기저기 화산파와 관련된 글귀며 매화 무늬의 표식 등이 눈에 들어왔다.
또한 화산파 때문인지 거리 분위기가 상당히 활기차고 사람도 많은 도읍이었다.
우리는 그곳에서도 가장 번화한 거리로 향했다.
작지만 고풍스러운 느낌이 물씬 풍기는 다관(茶館)이 나왔다.
그리고 그 다관 입구에는 우락부락, 엄청난 덩치의 비슷한 생김새의 세 사내가 경계를 서고 있었다.
처선이 앞장서 그들에게 다가가자, 한눈에 처선을 알아본 그들이 곧바로 예를 갖추었다.
“처선 선생님 오셨군요.”
“지존께서 오셨습니다.”
처선의 말에 세 사내는 너무 놀라 사고마저 정지된 얼굴을 했다.
어쩔 줄 몰라 얼굴까지 창백하게 변해 버렸다.
세 녀석은 한참이나 그렇게 길을 비켜 주지도 않고, 또 말도 안 하고 주저하기만 했다.
약간의 시간이 흘렀고, 그중 미세하지만 덩치가 조금 더 큰 사내가 부복을 하며 큰 목소리로.
“천세…….”
“쉿! 조용.”
둘째와 셋째도 곧바로 부복을 했다.
하지만 내가 그들의 천세 제창을 제지하자, 부복한 상태로 눈알만 굴려 댔다.
그런데 갑자기 한 녀석이 처음 부복한 녀석의 허리를 팔꿈치로 툭 치며 나무라듯 말했다.
“형. 선생님이 아직 주군이 우리 주군인 거 말하지 말라고 했어.”
“맞다. 야! 일어나.”
세 녀석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언제 자신이 내게 부복을 했냐는 얼굴을 하였지만, 그러면서도 또 감히 나와 눈을 마주치지 못한다.
이 녀석들, 누군지 알 것 같다.
광마일기에 몇 줄 적혀 있지도 않은 녀석들인데, 그 특징이 너무 또렷해 대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때 드디어 공손병이 사패천으로 와 내게 충성을 맹세했다.
홀로 은거하던 공손병은 덩치만 크고 멍청하며 힘만 무지막지하게 센 세 녀석까지 데리고 왔다.
자신의 호위로 쓸 녀석들이라 했다.
막영, 막웅, 막문이란 형제 녀석들인데, 이 녀석들 나를 볼 때마다 어쩔 줄 몰라 한다.
머리가 조금 모자란 녀석들인데, 공손병이 어떻게 가르쳤는지 셋 다 절정의 반열까지 올랐다.
그런데 얘들이 죽었다고 들었는데. 언제 죽었지?
아! 생각났다. 내가 욱해장 장주의 애첩을 보쌈했을 때였다.
의제와 천주제검대는 물론 내 수호대까지 모두 따돌리고 단독으로 움직였을 때다.
공손병이 나를 찾겠다면, 자신의 호위무사였던 이 녀석들까지 내보냈었다.
애첩에게 눈이 멀어 미쳐 있던 욱해장의 장주는, 자신의 애첩을 보쌈해 간 게 나인 줄도 모르고 살수들을 수백 명이나 풀었다.
다 죽이려다가 그냥 장난으로 놈들과 숨바꼭질을 했다.
그때 우연히 막영, 막웅, 막문 세 형제가 나와 조우했고, 그들이 내 뒤를 쫓던 수백 명의 살수들을 막아섰다.
난 그 상황이 너무 재밌어서 녀석들을 뒤로하고 다시 도주했다.
그날 세 형제가 모두 죽었다고…… 젠장.
착한 녀석들이었는데.
-광마일기 中
막영, 막웅, 막문 형제들이다.
내 장난질에 그만 목숨을 잃은 녀석들.
기억엔 없다.
지금의 나는 이 세 형제를 처음 본다.
그런데 절로 내 얼굴에 미소가 드리운다.
고마움에, 또 미안한 마음에.
그렇게 그들에게 미소를 지으며 다가갔다.
여전히 나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며, 또 미세하게 떨기까지 하며 어색한 딴청을 피우는 녀석들이다.
내 미소가 더 짙어졌다.
“반갑습니다. 마악치라고 합니다.”
“어험, 어험. 안녕하세요. 전…… 그러니까. 저는 막영이라고 해요. 얘네들은 제 동생인데. 웅이와 문이라고 해요.”
“영웅문(英雄門)이시네요. 세 분에게서 이름과 같은 영웅의 기상이 느껴집니다.”
내 칭찬에도 그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괜찮다.
앞으로도 계속 이럴 테니, 내가 적응하면 된다.
그리고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공손병이 나를 돕는다는 명목하에 움직이고 있지만, 그는 이미 마음의 결정을 내린 듯하다.
그가 나를 주군으로 모시려 이미 마음을 굳힌 게 확실하다.
이들 막영, 막웅, 막문 형제가 바로 그 증거다.
광천마제 시절 그러했듯 말이다.
그리고 오늘.
내가 이곳에 온 진짜 목적은 고문 전문가를 만나기 위함이 아니다.
공손병 선생을 만나러 온 것이다.
광천마제 시절 내가 가장 후회하는 일 중 하나가 바로, 천안천이(千眼千耳) 공손병 선생이 떠날 때 잡지 못한 일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