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화
쉬이이이이이이익!
사뿐.
송암 도장이 무지막지한 속도로 날아왔다.
하지만 착지는 깃털보다 가벼웠다.
흙바닥의 먼지 한 톨이 일어나지 않을 기가 막힌 착지였다.
“송암 도장님.”
우리는 서둘러 송암 도장에게 포권을 하며 인사를 했고.
“허허허. 잘 지내셨는가, 우리 마 도사?”
송암 도장 역시 너무나 반갑게 우리를 반겨 주었다.
아니, 나를 반겨 주었다.
그리고는 곧, 정색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급작스러운 등장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유령신검을 향해서였다.
“자네.”
“어험, 무당파의 송암 도장님이셨구려.”
짐짓 아닌 척하지만, 확실히 많이 당황했는지 그런 기색을 숨기지 못하는 유령신검이었다.
“자네 방금 우리 마 도사한테 뭐라고 했나?”
“별말 안 했소.”
“안 했소?”
“어험. 어험.”
“자네 올해로 나이가 몇인가?”
“그게…… 어험. 나이는 왜 물으시오?”
“몇 살이냐고 물었네.”
유령신검도 빠르게 놀란 마음을 추슬렀다.
거기에 집요하게 자신을 심리적으로 압박하려는 송암 도장에게 불쾌한 기색까지 은은히 내비치기 시작했다.
“쉰아홉이오.”
“나이 많은 어른이 뭐가 어쨌다고?”
“쩝. 그만하시지요. 잠시 아이들을 골려 주려고 했을 뿐. 송암 도장과 고작 애들 문제로 불화를 일으킬 생각은 없소.”
“너. 말이 많이 짧구나.”
“이보시오, 송암 도장! 정도를 지나치면 좋지 않은 꼴을 볼 것이오! 말을 삼가시오!”
이제는 대놓고 화를 내는 유령신검이었다.
여차하면 칼부림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기운이다.
하지만 송암 도장은 여전히 여유로웠다.
뭘까?
송암 도장이 대단한 건 알지만, 그래도 유령신검을 상대로 저렇게까지 여유를 부릴 수는 없을 텐데.
이상했다.
그리고 나는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황룡회의 전신이 유령문이지? 원래 너의 사문.”
“그, 그건…… 그렇소. 천하가 모두 아는 것을 왜 물으시오?”
“유령문의 마지막 문주가 곡리태 맞지?”
“갑자기 왜 남의 사조님은 들먹이시는…….”
버럭 화를 내며 말을 하다가, 유령신검도 뭔가 뜨끔한 게 있었나 보다.
눈동자에 갑자기 지진이 일어나는가 싶더니, 말끝을 흐려 버리는 그였다.
곧이어, 송암 도장이 이때다 싶어 도사답지 않게 사악한 미소까지 지으며 얼굴을 유령신검에게 바싹 들이밀었다.
“마! 내가 니 사조랑, 으! 한창때 구룡폭포에서 같이 목욕도 하고! 으! 항주에 있는 기루, 그거. 으! 천상루! 거기서 밤새 술도 먹고! 으! 동정호에서 혈수칠괴도 같이 때려잡고! 천산에서는 같이, 마! 천년하수오도 함께 뜯어먹고! 할 거 다 했어!”
새하얗게 질려 버린 유령신검의 얼굴.
질리다 못해 몸을 미세하게 떨기까지 한다.
엄청나게 놀란, 또 당황한 얼굴이다.
그러더니.
꾸벅!
허리를 반으로 접는다.
“죄, 죄송합니다! 사조님의 친구분을 알아뵙지 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군기가 바싹 잡힌 군영의 졸병이 대장군을 만났을 때와 같은 인사법으로 예를 갖추는 유령신검이었다.
그는 그렇게 허리까지 깊이 숙인 후에도, 좀처럼 허리를 펼 생각조차 못 하였다.
와! 우리 송암 도장, 생각지도 못했던 인맥을 갖고 있었네.
천하의 무림오대고수가 저렇게 쩔쩔매는 꼴을 다 보고 말이다.
역시 나이 많은 분들은 일단 존중해 주는 게 맞나 보다.
또 확실히 무림에서는 사제(師弟)와 사조손(師祖孫)의 관계란 게 대단하긴 한 것 같다.
뭐, 나만 보더라도 우리 사부님 없으면 못 살 것 같으니, 남들이라고 어디 다르겠는가.
“무량수불, 허허허 허리를 펴시오, 월 대협. 잠깐 내가 흥분해서 옛날 일을 언급했구려. 무량수불, 허허허.”
와! 송암 도장, 내가 모르는 면이 있었네.
그냥 안면을 싹 바꾸어 버린다.
저런 면도 원래 있었나?
아니면, 그 사이 사람이 바뀐 건가?
모르겠다.
아무튼 덕분에 기고만장하던 유령신검이 허리를 편 후에도 쩔쩔매는 모습이었다.
웃음이 터질 것 같았지만, 간신히 참을 수 있었다.
그런데 다시 그때!
“와아아아아아아아!”
“와아아아아아아아!”
엄청난 인파가 사방에서 우리를 향해 함성을 지르며 몰려들기 시작했다.
한 명 한 명 제법 뛰어난 무인들로, 그 기세 또한 사뭇 대단했다.
“주군, 주군의 수하들입니다.”
처선이 빠르게 다가와 내게 그들의 정체를 알렸다.
곧, 그들이 우리를 포위하듯 둘러쌌다.
선도연가, 몽중방, 천검문, 숭무문, 동산파의 일천오백여 무인들이다.
가까이에서 본 이들의 기세가 실로 대단했다.
곧이어 처선이 나서서 그들에게 이곳이 안전함을 수신호로 표현했다.
그러자.
처처처처처척!
처처처처처척!
무려 일천오백에 달하는 무인들이 일제히 나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천세! 천세! 천천세! 연가가 현화지존 주군께 인사드립니다! 충!”
“천세! 천세! 천천세! 몽중방이 현화지존 주군께 인사드립니다! 충!”
“천세! 천세! 천천세! 천검문에서 현화지존 주군께…….”
이어 숭무문과 동산파의 수장까지 큰 목소리로 내게 첫인사를 했다.
감개무량을 넘어 가슴이 벅차오르는 순간이었다.
너무 감동해 주책맞게 눈물까지 흘릴뻔했다.
난 한걸음에 그들에게 다가갔다.
일일이 수장들을 직접 일으켜 세웠다.
감동의 인사를 그들과 나눌 수 있었다.
그들은 내게 ‘주군’ 그리고 ‘현화지존(玄化至尊)’이라 호칭했다.
현화지존이라.
광천마제보다 더 멋진 별호 아니겠는가?
마음에 든다.
그들과 뜨거운 감동의 인사를 나눈 후, 처선까지 합류해 잠시 회의를 진행했다.
당분간 내 활약은 계속하되, 새로 얻게 된 세력에 대하여는 외부에 알리지 않는 게 좋겠다는 결론을 냈다.
어중간한 세력은 적들의 사냥물이 되기 좋기 때문이다.
확실히 힘을 갖추었을 때, 그 어떤 강력한 세력도 감히 함부로 할 수 없는 힘을 갖추었을 때, 그때가 되어야 안전할 수 있다.
이는 나에게도 적용되는 일이지만, 나를 믿고 따르기로 결심한 이들에게 더더욱 필요한 일이었다.
세력이 모여지고 있음을 숨기기 위해서라도, 그들과 오랜 시간을 가질 수 없었다.
짧지만 뜨거운 만남을 갖은 후, 그렇게 우리는 헤어졌다.
송암 도장은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의제와 한해북은 나와 비슷한 감동을 받은 얼굴이고, 우리 예지는 꽤 놀란 얼굴이다.
왕대는 유령신검만 노려보고 있고, 유령신검은 의외로 착잡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난 새로 얻은 수하들을 보낸 후, 착잡한 얼굴을 하고 있는 유령신검에게 다가갔다.
“시간 있으시면 잠시 대화 좀 나누시죠.”
“기다리고 있었네.”
*
잡초들만 무성한 낮은 언덕 위.
나와 유령신검 둘만이 자리를 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유령신검이다.
어느새 착잡했던 얼굴은 싹 지워졌고, 살짝 놀라움이 깃든 얼굴을 하며 내게 물었다.
“자네, 진짜 정체가 뭔가?”
그에게 씨익 웃으며 답해줬다.
“아까 듣지 않았습니까? 현화지존 마악치라고요, 하하.”
“음…….”
농담으로 들은 것일까?
아니다.
유령신검이 심각한 얼굴을 했다.
“우리 산서에서 있었던 일 말일세.”
“신창양가 사건이요?”
“그렇지.”
“지켜보고 계실 거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맞네.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네. 내 수하들이 그 일을 보고할 때 항시 수룡검 천무휘를 중심에 두고 보고하더군. 그런데 이상했어. 보고를 받으면 받을수록, 자네 이름이 더 많이 언급되었거든.”
“제가 대장이니까요, 하하.”
내가 웃었지만 유령신검은 이번에도 웃지 않았다.
여전히 심각하고 또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무림맹 용봉지회 때 일어났던 일도 들었네. 수룡검에 이어 이십 대 초반의 여인이 초절정 극상의 경지에 올랐다고 하며 우리 황룡회까지 크게 들썩였다네. 봉황검 금예지 소저 말일세.”
“우리 예지가 또 한 칼 합니다, 하하.”
“사실 나도 꽤 놀랐지. 내 제자들을 포함해 우리 황룡회에도 뛰어난 후기지수들이 넘쳐난다네. 하지만 초절정 극상이라……. 허, 내가 자네들 나이 때에도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경지였는데 말이야. 그런데 봉황검의 소식보다 더 놀라운 일이 있었네. 무엇인지 아는가?”
“설마, 또 제 얘기입니까?”
“맞네. 용봉지회의 행사를 모두 마치고 돌아온 우리 위지가 그러더군. 진짜 관심을 갖고 주목할 사람은 봉황검이 아니라 현화도사 마악치라고. 봉황검, 우각도협, 구절협을 실제 이끄는 자가 바로 현화도사 마악치라고 했네.”
“잘생겼다든가, 설렌다든가 하는 말은 안 하던가요?”
“…….”
내 농담에 이번엔 유령신검이 입까지 꾹 닫았다.
나도 어쩔 수 없이 진지해져야 했다.
“일부러 오신 거군요? 저를 보기 위해서요.”
“팔적산에서 본 회와 아미파가 충돌할 일은 애초에 없었네. 그건 핑계였고, 실제 자네가 올 것이라 생각해서 기다리고 있었네.”
“저를요? 아니, 그보다 어떻게 팔적산에서 황룡회와 아미파가 충돌하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나요?”
“무림맹에서 원하지 않을 테니까. 또 내가 견노량 일장로에게 신신당부했었고. 만에 하나 아미파와 충돌하게 된다면, 결국 무림맹주의 장난질에 놀아나게 되니, 최대한 무력을 사용하지 말라고 명했네.”
“아…… 그랬군요. 화를 좀 많이 내시던데.”
“그건 원래 성격이 그런 거고. 말만 그렇게 해. 그러고는 뒤돌아서서 또 금방 후회하고 그런 사람일세.”
“그렇군요. 그런데 무림맹의 장난질인 건 어떻게 아셨어요?”
“말하는 모양을 보니 자네도 그리 생각하고 있었다는 뜻이군.”
난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이 양반, 유령신검이 어쩌면 나와 같은 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솟구쳤다.
어찌 아니겠는가?
무릇 적의 적은 내 친구며, 공동의 적을 두면 같은 편이니 말이다.
“팔적산에서 죽은 내 제자.”
“칠흑야검요?”
“버린 놈이네. 수제자 자리를 박탈하고 뇌옥에 가두었는데, 도망쳤다가 그 꼴이 났지. 그리고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우리 황룡회에서도 극히 일부만일세.”
“무슨 죄를 지었기에……?”
“그것까지는 집안 사정이니 말해주기 어렵네. 적당히 망나니짓을 했으면 뇌옥에 가두기까지 했겠나? 그래도 명색이 수제자 녀석이었는데 말이야. 많이 안 좋은 일이 있었다고만 알아 두시게.”
“아, 네.”
“무림맹의 이런 시도가 처음이 아니라네. 내 제자에게까지 손을 댄 중차대한 일은 처음이지만 말이야.”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자네 우리 황룡회가 거대한 힘을 품고서도 왜 무림에서 활동을 하지 않는지 아는가?”
“아! 깊이 생각해 본 적은 없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렇다.
황룡회가 콧바람 후 불면 날아갈 정도의 신창양가가 산서 대부분의 이권을 거머쥐고 있었다.
황룡회의 활동은 거의 없었다.
광마일기에도 지금 눈앞에 있는 유령신검에 관한 기록은 많지만, 황룡회에 대한 기록은 그리 많지 않다.
다 죽어 가면서 무림 정세가 어떻게 돌아가느니 하는 일을 일기에다가 쓸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나라면 말이다.
그리고 그 일기는 내가 썼고.
“내가 황룡회를 만들 때부터 무림맹주의 압박이 있었네. 그의 기치 아래, 정파의 기치 아래로 들어와 그들이 만들어 놓은 세상에 따르라는 압박이었네. 달리 말하면 말 잘 듣는 개가 되라는 소리였지.”
“아…….”
“당연히 거부했고. 그때부터 무림맹주는 별의별 수단을 써가며 나와 우리 황룡회를 압박했네. 그렇게 철통같이 정보를 차단했는데도, 무림맹은 우리에 대해 속속들이 다 알고 있더군. 무림에서의 활동까지 거의 중단시켰음에도 말이야.”
“황룡회가 무림에서 활동하지 않은 이유가, 무림맹의 감시를 피하기 위함이었군요.”
“그렇지. 그런데 자네 더 웃긴 게 무엇인지 아는가?”
“……?”
“비겁한 무림맹주가 나와 싸우는 걸 두려워한다는 것일세. 그래서 계속 별 시답잖은 일들로 음모를 꾸미고, 돈의 흐름까지 차단하는 비겁한 수를 쓰며 나를 괴롭히고 있다네. 나와 칼을 겨룰 생각은 하지도 못하면서 말이야. 그래서 이번 팔적산 일이 터졌을 때도 곧바로 알았지. 무림맹주의 짓거리라는 것을.”
“그렇군요.”
“내 제자 녀석이 아무리 지랄맞아도, 그래도 수제자였네. 녀석을 죽일 수 있는 자는 천하에 몇 명 없어. 함정을 파고 하독을 하고 암기를 썼으니 죽일 수 있었던 거야.”
“…….”
“그리고 그런 비겁한 짓을 가장 잘하는 놈이 무림맹주라는 사실을 나는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더더욱 무림맹주가 한 짓거리임을 확신할 수 있었네.”
“맹주를…… 많이 싫어하시는군요.”
“자넨…… 아닌가?”
이 양반, 나에 대해 뭔가 좀 알고 있다.
신창양가에 용봉지회 사건까지.
그 이후 나에 대해 철저히 조사한 모양이다.
지금 나를 떠보려는 것이다. 내 의중을.
아니, 유령신검은 이미 확신하고 있다.
내가 무림맹주와 척을 지고 있다는 사실을.
그랬기에 자신의 솔직한 심정을 모두 내비쳤을 것이다.
받은 게 있다면, 주는 것 또한 있어야 도리다.
내가 그를 향해 말했다.
“맹주의 목을 베는 것은 제 몫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