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팔적산의 일을 모두 깔끔하게 해결했다.
황룡회와 무림맹이 철수한 후, 아미파까지 떠날 준비를 모두 마쳤을 때 우리도 그곳을 떠났다.
팔적산에 보름 넘게 갇혔던 봉화 사니와 봉화 사니의 두 제자도 건강했다.
황룡회의 견노량은 떠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나를 보는 눈이 곱지 않았다.
딱히 적대감은 없었는데, 심사가 복잡한 그런 눈빛이었다.
나에게는 그랬지만, 대신 아미파 여승들에게는 시간이 갈수록 더 극진한 태도를 취했다.
덕분에 황룡회와 아미파의 미래가 더 기대되기도 하였다.
황룡회는 정사지간의 문파다.
당연히 무림맹에 소속되지 않은 문파다.
큰 틀로 보아 내게는 도움이 될 만한 일이다.
그리고 이번 팔적산 일의 가장 큰 성과는.
뭐니 뭐니해도 무림맹주에게 내 힘을 과시했다는 점이다.
광천마제 시절 내가 수많은 이들을 죽여가며 내 힘을 과시했듯, 이번에는 다른 방법이지만 분명하게 내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음을 증명했다.
아마 이 보고를 받게 된다면 무림맹주의 심사도 꽤 복잡해질 것이다.
거기에 더해, 염우촌에서 살수들이 일을 깔끔하게 해 준 덕분에, 그곳에 관한 보고는 꽤 시간이 흘러서야 제대로 보고받을 것이다.
그러면 머리가 더 복잡해질 것이고.
왕대가 나를 주인님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사실까지 알게 된다면, 큭큭큭.
아! 맹주가 무슨 표정을 지을지 너무 궁금하다.
무휘야, 무휘야, 내 친구 천무휘야!
너도 어서 빨리 돌아와라.
네가 화경의 반열에 올라 우리와 함께한다면, 그때는 무림맹주도 진짜 허튼수작 부리지 못할 것이다.
물론, 그때까지 나도 계속 성장해 나갈 것이고.
아무튼 기분 최고다.
팔적산을 떠나는 내 발걸음이 너무나 가볍다.
나와 의제, 한해북, 금예지, 왕대 그리고 처선이 함께한다.
포쾌문의 여적위가 큰 공을 세웠는데, 그는 오히려 떠나면서 나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몇 번이나 했다.
참 고마운 사람이다.
그리고 이런 인연을 만나게 해 준 처호도 고맙고.
그리고 지금 내 발걸음을 더욱 경쾌하게 하는 이유 중 하나가 또 처호다.
선도연가, 몽중방, 천검문, 숭무문, 동산파.
처호를 통해 나를 주군으로 받들겠다는 이들.
십합단은 하나의 단(團)이고, 달호와 처호, 처선 등은 개인이다.
문파를 통으로 수하로 삼는 것은 광천마제 시절 이후 스물여섯 번째의 회귀를 통해 처음이다.
처선의 말에 따르면, 이미 몇 개의 문파와 수십을 넘는 개인과 무리 등이 이미 나를 주군으로 모시겠다고 맹세하였다 한다.
차근차근, 확실히 충성 맹세를 받고 신뢰를 쌓은 후 내 앞에 그들을 선보이겠다고 한다.
안다.
처호와 처선은 내가 무엇을 기대하건 그 이상의 결과를 보여 줄 것이다.
그리고 지금.
지금 내가 더 즐겁게 콧노래까지 부르며 길을 걷는 이유는, 이번 팔적산 일을 돕기 위해 백 리 길을 단숨에 달려와 준 선도연가, 몽중방, 천검문, 숭무문, 동산파 사람들을 만나러 가기 때문이다.
잘 닦이진 않았지만, 제법 폭이 넓은 언덕 위의 길.
외진 곳이라 인적은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내가 콧노래를 부르며 기분 좋게 우리 녀석들과 함께 길을 걸을 때.
그가 나타났다. 정말 거짓말처럼, 귀신이 갑자기 튀어나오듯.
그는 허공에서 갑자기 생겨나 우리의 길을 막아섰다.
진짜 놀랐다. 그가 바로 우리 앞에 나타날 때까지, 아무런 기감도 감지하지 못했다.
이건 신법을 넘어 그냥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그리고 당금 무림에 이러한 움직임을 보일 수 있는 자는 그리 많지 않다.
우리 앞에 선 중년의 사내, 그가 바로 화경의 고수라는 뜻이다.
하지만 나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의 외모, 움직임, 기운, 그러한 것들이 모두 그가 한 인물임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쉬이이이이이이익.
파파파파파파팟척!
저 멀리서, 엄청난 속도로 한 인영이 신법을 발휘해 우리를 향해 다가왔다.
젊은 여인이다.
그녀는 곧, 조금 전 우리 앞에 갑자기 나타난 중년 사내의 옆에 자리했다.
“사부님.”
그녀가 중년 사내를 향해 사부라 호칭했다.
맞다. 그녀는 내가 아는 여인이다.
아니, 왕대를 뺀 우리 모두가 아는 여인이다.
무림맹 용봉지회에서 봤던 그녀.
칠룡사봉 중 일인인 그녀다.
황룡회의 회주, 유령신검의 여러 제자 중 유일한 여성인 생령유검 장위지가 바로 그녀다.
그리고 그녀가 천하에 사부라 부를 사람은 당연히 한 사람밖에 없다.
무림오대고수 중 일인이자, 황룡회의 회주인 유령신검 월제가 바로 그이다.
그런데 엎어지면 코 닿을 팔적산에서는 코빼기도 내비치지 않더니, 왜 지금 이곳에서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일까?
아니다.
그는 우리가 아닌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지금 그는, 우리 길을 막아서고는 나를 보며 무언가 신기한 물건이라도 본 듯 히죽히죽 웃고 있다.
“후학 한해북이 황룡회의 회주 유령신검 월제 대협께 인사드립니다.”
유령신검을 알아본 건 나만이 아니다.
왕대를 빼고 모두 알아봤다.
그의 의도가 어떻건, 당장 우리를 때려죽이려는 것은 아니다.
그랬기에 한해북이 먼저 인사를 했고, 나와 의제 그리고 금예지까지 모두 포권을 하며 예를 갖췄다.
왕대는, 당연히 안 했다.
그래서 내가 옆구리를 툭 쳤더니.
“저 아저씨는 어린아이 안 괴롭힙니까? 괴롭히면 제가 때려 주겠습니다.”
서둘러 왕대를 말린 후.
“죄송합니다, 월 대협. 이 친구가 머리가 살짝 아파서 그렇습니다. 왕대야, 어른한테 인사해야지. 예의 바르게.”
“알겠습니다, 주인님.”
왕대가 한 발 앞으로 나간다.
방금 본 게 있어서 제대로 포권까지 한다.
그러고는.
“안녕. 나는 왕대다. 어린아이를 괴롭히면 나한테 혼난다.”
또 반말이다.
아! 이건 몇 번을 말해도 고쳐지지 않네.
큰일이다.
유령신검이 화라도 내면, 우리만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데.
하지만.
“하하하. 하하하하! 재밌는 녀석이구나.”
유령신검은 그냥 기분 좋게 웃을 뿐이었다.
정말 기분이 좋아서라기보다는, 애초에 왕대에게 관심이 없는 듯했다.
그리고 역시, 그의 시선은 나에게 고정되었다.
참 부담스러운 눈빛이 아닐 수 없다.
광천마제 시절 내 눈빛을 받아야 했던 모든 이들이 그랬을까?
화경의 고수가 바라보는 눈빛이, 정말 힘들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내가 더 고수다’라고 속으로 몇 번이고 되뇌며 똥꼬에 힘까지 주었지만, 긴장되는 마음이 쉬이 풀리지는 않았다.
결국, 내가 먼저 입을 열어야 했다.
“월 대협, 그런데 일부러 저희를 찾아오신 것입니까?”
“그렇다.”
“무슨 일이신지……?”
유령신검이 슬쩍 자기 옆에 있는 장위지를 보는가 싶더니, 이내 나를 보며 씨익 웃으며 말했다.
“이 녀석이 용봉지회를 다녀온 후에 하루도 빼먹지 않고 네 이야기를 하더구나. 입에 침이 마르기 전까지는 네 칭찬을 멈추지 않더라. 그래서 도대체 어떻게 생긴 녀석인가 싶어 얼굴이라도 구경하러 왔다, 허허허.”
“아잉, 사부님.”
순간 장위지가 화들짝 놀라 원망하는 말투로 말한 후 몸을 배배 꼰다.
얼굴은 어느새 새빨간 홍시가 되어 있었다.
아! 나도 얼굴이 화끈거리네.
어험, 정신 차리자.
지금 내 앞에 있는 자는 무림오대고수 중 일인이다.
광천마제 시절, 내가 죽인 이 중 한 명이고.
“하하하! 제가 이놈의 얼굴 때문에 인기가 좀 많습니다. 하하!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장 소저. 하하하하!”
정신 좀 차리려고 했는데, 터지는 웃음은 나도 어쩔 수 없었다.
아! 우리 예지가 오해하면 안 되는데.
그때 장위지가 조심스레 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마 도사님. 사부님께서 농담을 하신 거예요. 사실 저희는 보름 전부터 이곳에 와 있었어요. 팔적산에서 혹시라도 불상사가 생기면 막으려고, 또 일을 크게 키우지 않으시려고 사부님께서 조용히 지켜만 보고 계셨습니다.”
아! 젠장. 아니었어? 날 좋아하는 거, 아니었냐고.
“실망한 얼굴이군, 큭큭큭.”
“아닙니다, 그런 거.”
“얼굴 보니 실망했는데, 뭐. 큭큭.”
“어험. 그럼 얼굴 보셨으니 저희는 가던 길 가겠습니다.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월 대협.”
“아, 네. 안녕히 가세요, 마 도사님.”
장위지가 내게 인사를 했고, 우리는 그렇게 유령신검의 곁을 지나 자리를 떠나려 했다.
그런 내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유령신검이었다.
상당히 못마땅하다는 그런 눈으로 말이다.
결국.
“멈추어라.”
아! 그냥 가야 하는데, 내 다리가 내 뇌의 지시보다는 유령신검의 말을 따르고 말았다.
“또 무슨 볼일이 있으신가요?”
“처음이군.”
“뭐가요?”
“나를 한 번이라도 만나 보고 싶어 긴 줄을 서는 사람은 봤어도, 나를 만난 후 먼저 자리를 뜨겠다고 하는 건 네가 처음이다.”
“바쁜 일이 있어서요.”
“바빠도 시간 좀 내어라. 네게 흥미란 게 생겼다. 너에 대해 알고 싶구나.”
변탠가?
같은 사내끼리 뭘 알고 말고를 해?
그리고 더 중요한 건, 난 이미 당신에 대해 아주 자세히 알고 있다고.
당신에 관한 기록만 광마일기에 스무 쪽이 넘게 적혀 있어.
그러니 유령신검과 대화를 오래하면 할수록, 나만 손해다.
“저에 대해 알고 싶으시면 개방이나 하오문에 물어보시죠. 저보다 저를 더 많이 아는 사람들이니까요.”
그렇게 다시 움직이지 않는 발을 억지로 움직이려고 했다.
그런데 유령신검이.
스으으윽.
하아!
이건 볼수록 신기하군.
꿈쩍도 안 했는데, 진짜 유령처럼 어느새 내 앞에 와 있다.
길을 막아선 것이다.
“길 막지 마시죠, 선배님.”
“큭큭큭, 당돌한 놈이구…….”
쾅!
왕대다.
엄청난 마기가 폭발했다.
“저 사람이 우리 주인님 괴롭힙니까? 제가 때려 주겠습니까?”
왕대도 상대가 얼마나 고강한 인물인지 본능적으로 느낀 것 같다.
말투도 이상하고, 평소 볼 수 없었던 긴장감이 그에게서 느껴진다.
“왕대야, 어른들 얘기할 때 끼어드는 거 아니라고 했잖아. 어서 뒤로 물러나 있어.”
“알겠습니다.”
아까와 달리 유령신검의 얼굴이 좋지 않다.
비릿한 미소를 짓는다.
“별 희한한 놈들을 다 보겠군.”
아! 이 인간.
정사지간의 괴팍한 인간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선을 넘었다.
방금 분명히 우리를 향해, ‘놈들’이라고 말했다.
이건 아니다.
“말씀 좀 가려서 하시지요. 나이도 지긋하신 양반이.”
순간!
유령신검의 기도가 변했다.
나를 보는 눈과 그의 호흡, 표정까지 모두 바뀌었다.
자신의 힘을 과시하며, 또 한편으로는 나를 발칙한 놈으로 보고 있다.
비웃음이 아닌, 정말 신기한 것을 봤을 때 웃는 그런 눈인데 또 이게 사악하게 보인다.
“방금 한 말. 감당할 수 있겠느냐, 아이야?”
하아! 유령신검의 바뀐 분위기에 대한 설명이 길었지만,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무섭다.
그냥 ‘살려 주세요’라고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순 없다.
난 이미 혼자가 아니다.
“물론입니다.”
내 대답에, 유령신검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본격적으로 힘을 과시하려는 그런 미소였다.
죽이려는 의도가 아닌 건 알지만, 그래도 눈앞이 깜깜해지는 순간이었다.
“무릇, 나이 많은 어른에게 버릇없이 굴면 혼나야 하는 법이지. 암, 그렇고 말고, 클클클.”
아! 이 인간.
유령신검.
진짜로 손을 쓰려고 한다.
그렇게 고개를 까딱하며 사악한 미소와 함께 나에게 다가온다.
X 됐다.
그런데 그때였다!
대기를 진동시키는 엄청난 사자후가 멀리서 터져 나왔다.
그 사자후보다 더 강하고 빠르게, 하나의 인영이 거의 빛이라 해도 무방할 속도로 우리를 향해 다가오며 외쳤다.
“크하하하하! 말 한번 잘했다! 나이 많은 어른에게 버릇없이 굴면 혼나야 하지. 내 나이 올해로 일백스물세 살이 되었다, 이놈아!”
당금 무림에 일백이십삼 세의 나이까지 살며 활동하는 고수는 딱 한 명밖에 없다.